비 그리고 바람
이정희 시집
이정희의 시집 『비 그리고 바람』. 이 시집은 이정희의 시 작품을 엮은 책이다. 크게 4부로 나뉘어 있으며 책에 담긴 주옥같은 시편을 통해 독자를 시인의 시 세계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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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홍 진 기
시인, 한국문협, 국제펜 한국본부 자문위원
오늘은 앞가슴 폭으로 가을이 오고
내일은 가슴 폭 뒤에서 가을이
홍조가 되어간다
- "이상" 부분 -
1.
한 편의 시작품詩作品은 한 사람의 진한 땀과 고뇌의 결과물일 터다. 그 땀과 고뇌의 저 깊은 곳에는 한 시인의 피나는 노력과 거기 따른 고통과 불면의 긴긴 밤이 녹아 있음은 물론이며, 그의 전신으로 짜낸 지적 긴장 또한 적지 않음을 시인들은 알고 있다. 그의 지력이 동원된 노력의 결과물이 한 편 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펴내는 이정희 시인의 첫 시집 "비 그리고 바람"의 원고를 놓고 앉으니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다.
현대시는 서정시를 일컫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 되어있다. 이 경우, 서정은 한 사람의 감정반응을 바탕에 깔고 있을 것임이 분명할 터. 이정희 시인의 시가 필자의 감정을 또 한 번 흔들어 놓은 정서반응이다.
이정희 시인은 오늘날 우리 문단사회가 일컫는 등단이라는 절차를 꽤 많이 늦게 밟은 사람이다. 그의 작품 '칠순이 넘어 시를 배웠다'에서 그렇게 풀어놓았다. 인생이란 연륜을 오래 밟아와서거나, 사람 사랑의 가슴이 깊고 따스해서거나, 또 다른 무엇이거나 간에 그의 작품 깊숙이는 사랑이란 물줄기가 닿아있지 않은 데가 없다. 이 사람사랑의 정감, 정서가 필자의 눈길을 잡아끌어 자신의 작품 앞에 앉히지나 않았나 하는 마음이다.
'사랑을, 인간의 면모를 나타내면서 새로운 삶의 공간을 설정하고, 넓혀나가면서 인간의 특징을 나타내는 진솔한 이름'이라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여기서 사랑의 자리에 시를 놓아도 무방하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만 어디 대가를 지불하더냐. 시를 얻기 위해서도 그만한 아니, 그보다 더한 진한 농도의 차원 높은 뜨거운 땀과 피를 내어놓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필자는 이번 이정희님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거듭 느꼈다. 길이 숨가쁘면 쉬어가듯, 이정희님은 인생의 숨가쁜 삶과, 가슴에 지열처럼 끓어올랐던 젊은 날의 사랑을 한참 묵혔다가 드디어 시로써 쉼표를 찍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정희님의 인생 대용표현은 그의 시라는 결정체로 하여 필자는 한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이야기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시작품을 통해 그의 정서가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하며, 그가 얼마나 다운(사람다운) 자연인인지를 알았다. 강한 듯 지극히 여리고 결이 고움을 다시 작품을 통해서 보고자 한다. 한 시인의 인생살이는 한 시인의 시로 말한다는 말을 좇으며.
2.
자유로운 영혼과 어울린 사랑의 향기가 도는 시밭을 직접 한 번 돌아보며 시편들을 만나는 재미를 같이 맛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불러도 손 닿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골짝도 멀리 떨어져 인적도 드물었다
사람살이 음모도 비방도 오다가 되돌아가는
외진 곳
산 중턱쯤
외롭게 핀 하얀 구름처럼
혼자서 피었다 지는
한 송이 야생화로 살다가 떠난 사람
그녀 구름꽃
평생을 바람 맞고 피멍을 안고 살던
그녀
풀잎에 매달렸다가
이슬이 된 그녀
지금 내 발등을 적시는
그녀의 시린 영혼
- "이슬이 된 사람" -
별로 해석을 요하지 않는 작품 같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시에서 한 시인의 시린 영혼의 향기를 읽고, 이정희 시인이란 한 사람의 속내 깊은 사랑 그 인간미에 감사한다. 평생을 바람 맞고 피멍을 안고 살아온 어쩌면 시적 대리인을 통한 자신의 아픔을 시로써 대리만족을 시도하지나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한 독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넘짚어 본 것이다. 우리는 많은 시에서 이중구조를 통해 구조의 탄력성과 내용의 견고성을 꾀하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독자를 위한 배려, 독자의 몫을 상징이나 은유를 통해 깔아주는 시인의 시작詩作 태도에 그 연이 닿아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따온 위 시가 보여주듯, 이렇게 그는 자기의 시에 거짓 없는 인생을 부어놓는다. 그렇다 이정희의 시는 그만큼 진솔한 삶의 이야기, 진정성이 담겨있다. 그녀가 자신이건 타인이건 상관없이 독자에겐 한 작품을 놓고 자의적인 상상을 통해 감상할 자유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독자가 작품에 관여하고 싶은 애정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자신이 아닐 확률이 크다. 그러나 그렇게만 읽으면 시적 감도가 떨어질 가능성과 상상력의 폭이 줄어지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점이 염려되어서다.
철학자 피히테는 인생의 주성분을 사랑이라 했는데, 어느 시인은 여자의 주성분을 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시인의 주성분을 이렇게 사랑이라 보고 있다. 적어도 이정희 시인에게 만이라도. 이정희 시인의 사랑이 미치는 시 한 편을 더 보면서 사랑의 폭을 한 번 둘러보면 어떨까.
오월의 푸르름은 짐승들의
꿈꾸기 좋은 언덕
앞산 허리엔 초록빛 봄이 숨쉬고
넓은 초원에는
짐승들과 꽃들과 새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
이 신비로운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고
이봄의 편지로 남을 실로폰소리
- "편지" 앞부분과 끝줄 -
따온 시는 아주 맑은 시각이 포착해낸 봄의 노래로 읽히는 시다. 시적 긴장이 다소 부실하지나 않았나 하는 우려가 작은 결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독자에게 사람살이의 방법을 암시하는 것 같은 손짓이 있어 쉬우면서 정이 가는 시편이다. 이정희 시인의 위 시를 필자는 인생 경험과 연륜을 동반하면서, 시를 해석함에 있어 표층구조인 표현본질을 시적 정서의 바탕에 두고 이 표층구조의 선명성을 시인의 세계사랑이라는 공간에 놓고 상상력을 조율하고 있다는 편에서 바라보았다. 인간의 사랑을 잠깐 벗어두고, 자연과 인간 외적인 생명에로 사랑의 시선을 돌린 시라고 생각한다. 이런 류의 시가 이번 시집에 더러 실려 있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대한 진폭을 읽게 해줌의 의도일 터다. 나아가 시인의 정감과 지성의 새로운 일면을 독자에게 열어 보여줌으로써 시인의 정서영역을 독자가 쉽게 접근하고 수용할 수 있게, 의도된 것은 아닐까. 이 자연의 '신비로운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고' 자연의 물소리만 도란거린다고 한다. 시인의 자연애는 어쩌면 떠난 그 누가 보내온 '이 봄의 편지로 남을 실로폰 소리' 자연이 보내온 편지. 이 놀라운 시적 표현력과 시적 감수성의 예민성에 필자는 놀라움과 벅참을 동반한 기쁨을 감당하고 있다. 마지막 한 줄의 내포성과 메타포에 무릎을 친다.
3.
사랑이 오고 가는 기류를 타고 시의 씨앗은 싹이 나고 뿌리는 뻗어서 가지를 키워 드디어는 한 편의 '시'라는 창작예술의 열매를 맺는 것 아닌가. 누가 말했듯 시는 시인의 노력과 사랑을 자양분으로 먹으면서 자라나는 식물은 또 아닌가. 이정희 시인의 아프도록 짙붉은 사랑을 읽으면서 거듭 생각하게 된다.
장롱을 정리하다가
빛바랜 솜이불 한 채를 보았습니다
수림의 몸내음보다 더 향그런
자운영의 거름 내음
피어나는 그윽한 아버지의 사랑
목화 속에 듬뿍 담긴 그 사랑이
무심했던 세월에 지쳐 있습니다
장롱 속에 묻혀 있었던 그리움이
저녁 안개처럼 피어올라
당신의 눈물 흔적 세월에 얼비칩니다
세상살이에 밀려 멀어졌던
당신의 사랑, 이불의 침묵이
지금 자운영 향기가 되어 나를 온통 감싸고 있습니다
- "아버지" -
위 따온 시에서 아버지의 그리움을 깔고 있는 이정희 시인 사랑의 아픔이 필자의 그것처럼 애절하게 다가온다. 어버이에 대한 사랑의 정감이사 날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그 강도와 심도는 높아지고 깊어지기 마련인 것임을 우리는 실감하면서 날마다를 살아간다. 더구나 시를 쓰는 사람의 가슴이 온기와 습기를 잃었다면, 그 건조한 돌자갈밭에서 무슨 시가 뿌리를 내리고 잎눈 꽃눈이 트겠는가.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마음이 들뜬다고 했지만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아프고 저리고 통한적이 아닐까. '지금 자운영 향기가 되어 나를 감싸'는 아버지의 체온은 한 시인의 가슴을 많이 아프게 그리고 많이 슬프게 하여 시인을 입을 막고 울게 한다. 피보다 진한 눈물을 쏟으면서 안으로 삼키게 하고 있다. '속으로 우는 울음/명치끝이 저려오고/이월의 찬바람에/손등이 시리'다고 시인이 ?어머니 기일에-라는 작품에 쏟아낸 '사무치는 애절함'이 지난날에 미처 몰랐던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을 돌아봄으로 통회하며 강물처럼 눈물 흘리고 있다고 시인은 진술하고 있다.
비가 쏟아집니다
하얀 비는 갈기를 세워
부챗살을 그립니다
오월의 편지지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나 바람이 한사코 훼방을 놓습니다
비는 쉴 새 없이 긴긴 사연의 편지를
나뭇잎에다 쓰고 또 쓰곤 합니다
바람이 와서 편지지를 흔들어 버리면
우두둑 말들은 모두 지워지고
비의 애절한 사연은 물방울이 되어 흘러갑니다
비가 걸어 놓은
새파란 편지지를
바람이 제멋대로 타고 놉니다
- "비 그리고 바람" -
여기서 이정희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 오도카니 앉아, 시인을 시인되게 지켜주는 사랑, 그것도 비에 태워 하늘에 띄우는 연서 한 장을 우리는 읽는다. 그의 시작품의 중심에 서있는 사상은 아무래도 사랑 같다. 앞에 말한 바, 시인의 주성분을 사랑이라고 필자가 놓아둔 연장선에서 위 따온 시를 읽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참담하다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혼자 걷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한다면, 좌절해버리는 날엔 진실로 영원한 참담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자칫 자신은 망가지고 그가 품었던 고귀하고 아름다웠던 사랑은 퇴색되어 주검처럼 허무할 것임이 틀림없을 터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소산, 그 감정에 자신이 짓밟히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일어서서 그 참담한 눈물을 진주떨기로 바꾸어내는 자가 시인, 이정희 시인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고독을 타서 개울물에 안주로 씹으며 거기서 그는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고 ?사랑-에서 시인은 말한다. 고독에 밟히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정희 시인이다.
얼마나 잡고 싶었던 옷자락인데
무심히 그냥 멀어집니까
그리 왔다 갈 걸
한참을 울었습니다
오랫동안 큰 소리로 부르다
목안이 다 타 쓰립니다
다음에는 긴 사연 가지고 오소서
소엽차 한 잔 하게
- "꿈에 본 당신" 둘째연 -
따온 시가 말했듯이 이정희 시인은 사랑을 쉽게 흘려보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영혼은 당당하고 굳세고 도도하다. 꿈에서도 부르고 싶은, 또 부르는 사랑이 있다. 그러나 그 애절한 사랑에 짓밟히는 사람이 아니다. 애이불상哀而不傷 그는 사랑을 슬퍼는 하되 그 도를 넘어 귀한 사랑을 짓밟거나 자신을 버려 짓밟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를 애인여기愛人如己 남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함의 정신이라 불러 무방할 터이다. 이정희 시인은 이처럼 꿈에도 그리는 사랑(이름)을 놓지 않는 깊은 인간애 정감의 소유자, 머언 기다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단순하게 과거에의 회상에만 잠기는 사람을 늙어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 번 태어나 한 번 가는 인생을 막을 사람은 없다. 이 우주의 원리를 뉘라 거스를 수 있을 것인가. 이정희 시인은 늦게나마 늙지 않는 방법으로 시를 선택, 영혼의 영생을 꿈꾸고 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을 익어가는 사람이라 말한다. 영혼이 건강하게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당산나무"에서는 '그때 그곳에 와 멀수록 가깝게 들리는 추억'을 스스로 다독거리는 영원성을 노목에 기대는 꽃처럼 피워주고, "사랑"에서는 가슴으로 감추는 사랑을 빗물에 씻어 개울에 띄우는, "속살이 하얀 참외"에선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곳에서 영혼의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가는 계절 오는 계절"에서는 하얀 꽃바람 이는 자연과 더불어 기다리는 사랑의 밀어를 들려주는, 다양하게 그러면서 일관되게 사랑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등장하는, 건강한 영혼의 지킴이 시인으로 서있다.
4.
이정희 시인의 작품에 비쳐나오는 시정신에서 필자는 옥타비오 파스의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중 존개가치가 사랑이란 주장과 그리고 연애와 시, 엑스터시가 있는 삶이야말로 최상의 삶'이라고 역설(활과 리라에서)한 말을 떠올린다.
꽃은 지는 것까지 꽃이고, 사랑은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것을 읽었던 지나간 기억도 새로워진다. 이정희 시인은 이별도 그냥 버리지 못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별을 시의 중심에 세워 아름다운 정서를 다듬고 있다. 영혼영생의 구도자처럼.
이기는 사람은 전진하는 사람이라고 한 몽고메리 장군의 말을, 칼 로저스의 이론에 가져다 대면 자아치료를 훌륭하게 이뤄낸 사람이 되겠다. 즉 사랑, 삶이라는 현상세계를 통해서 본질을 규명해내어(존재를 파악한) 의미부여를 했다는 뜻이다. '승리란 살아있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가슴속에 있'다는 야스퍼스의 말을 이정희 시인은 애정이란 획득한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의 가슴 속에 있다고 바꾸어놓았다.
스님이 두드리는 목탁 소리는 언제 들어도
산소 같은 안정제입니다
마음 가다듬고 법당에 들어가면 법당은
불경의 바다가 됩니다
마음속에 쌓였던 찌꺼기
모두 닦아 흘려보내고
부처님의 참 진리 가슴에 가득
채우려고 손 모아 경배 올립니다
- "암자" 2.3 연 -
사랑으로 귀결되는 쇠북소리의 자비를 듣는다. 19세기까지의 우리 시를 의미전달을 중시하는 기법의 시라고 했다면, 20세기 전반기는 이미지의 조형에 그 기조를 두어오지 않았던가. 이정희 시인은 여기에 가까이 또는 이 편에 많이 다가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정희 시인의 시 많은 부분이 여기 기울어 있거나 두 경향을 넘나들지 않았는가 그렇게 필자는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일면으로 20세기 하반기의 리얼리티 주변에 와서 이야기시를 넘보는 시를 몇 편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이정희 시인의 가능성과 아울러 기대치가 필자로 하여금 다음 시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의 시적 성장점을 독자의 자리에서 두드려주고 싶은 작은 욕망이기도 하다. 나아가 불경의 바다에 들어 산소 같은 말씀의 진리로 채우려는 시인의 가슴에는 시의 꿈으로 가득 차있음을 쉬 짐작할 수 있어 기쁘다. 말씀의 진리 예술(문학)의 아우라가 없는 사회에서의 삶이라면 특히 현대 사회는 얼마나 건조하고 살벌할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건조한 현대인들의 가슴에 물을 주고 바람을 주고 햇살을 내리는 행위를 이정희 시인은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것이라 단정하고, 시작詩作에 몰두한 시인일시 분명하다. 그는 시를 향해 구호만 외치거나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몸을 던져 창작자로 분신을 다짐하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며, 역동적인 면을 후진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준 앞선 사람이다. 손 모아 올리는 경배 뒤에 시의 꿈이 엎드려 있음이 보이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다음의 시가 그를 쉬 증명하리라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가슴에 별
하나쯤은 안고 있을 것이다
빛나는 별 흐린 별 그렇지 않은 별도 있을 것이다
이 많은 별을 좇아 가다가 나는 암흑에서 보았다
전봇대 꼭대기 움막집 한 채를
모진 비바람에도 눈 내리고 태풍이 내려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그곳에 빛나는 별이 있을 거라고
먼 산이마에 서 있는 돌처럼 가슴 열고
피보다 붉은 결심 새기고 싶었다
당신의 뜰에 피는 빨간 양귀비꽃이 되고 싶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아니하며
비가와도 젖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 "칠순이 넘어 시를 배웠다"2.3연 -
가슴에 별을 달고 시밭을 걷는 시다. 대인은 계속 전진하는 소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정희 시인을 두고 나온 말 같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대인으로 나고, 소인으로 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상식으로 잘 알고 있다. 전진은 노력이다. 노력은 땀이다. 시를 바라보며 시인은 땀을 흘리고 앞으로만 내딛었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문학을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경험의 표현이라고 했다.' 사상이나 표현기교에는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으나 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정이다. 이 같은 문학에 있어서 정의 극치는 아무래도 연정戀情이다. 이 극치를 이정희 시인은 시에다 쏟아부었다. 세정에 시달려 돌처럼 굳어있는 가슴을 시를 위해 열었다. 피보다 붉은 결심을 바윗돌에 새겼다. 그렇게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된 사랑을 볕살에 말리고 조곤조곤 또 다져서 달빛에 바랜 다음 조심스럽게 독자에게 보여주는 작업의 첫발을 인생 칠십이 넘어서 과감하게 내딛게 되었다. 그 결단과 용기에 박수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완벽한 이성의 통제가 다소 부족한 점도 이쯤에 와서 그만 굴복하고 말았을 필자임을 고백해야겠다.
인생에 있어 필요한 것이사 여럿일 터, 그중 사람을 눈멀고 귀먹게 하는 우리들의 귀한 저 누우런 황금, 그 위력의 돈, 그 돈의 분량은 전생을 통해 12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은 참이다. 12분의 11은 우리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임을 생각하면 이정희 시인의 인생 해석은 탁월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의 무거운 비중, 김동인의 "무지개"는 허망한 것 같지만, 아무도 그 다리를 타고 하늘에 다녀온 사람은 없지만 무지개는 우리들 뇌리에, 그리고 가슴에 영원한 이상의 꽃으로 오늘도 또 내일도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것임을 시인은 알고 영혼구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그토록 선호하며 목숨을 거는 물질계를 이정희 시인은 넘어서서 초월계로 통하는 영혼의 다리 12분의 11을 택한 것이다.
5.
문학이란 먹을수록 허기지며 마실수록 갈증 나는 것. 그것은 문학이 인간 정신 속에 깃들인 골 깊은 병을 치유하는 신비의 명약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는 더러 육신이 저지른 죄값을 정신이 받아 앓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신이 저지른 죄의 값을 육신이 대속으로 아파주는 경우도 있다. 문학은 전자의 경우에 가까워 정신이 혹사당하는 일이다. 그래서 문학을 어떤 이는 종교에다 견주어 비교하기도 한다. 영혼구제 쪽에 위치한 문학을 바라본 해석일시 분명하다. 네 영혼이 아프면 시를 쓰라고 필자는 권하고 싶다. 글 속에는 글 쓴 이의 정신이 녹아있어 나름대로의 향기가 있고 성정에 따라 말결이 있게 마련이다. 이유인 즉 글이란 본디 마음(가슴)과 생각(머리)을 돌아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이 맑지 못하면 맑은 글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맑은 마음을 가지라는 뜻, 공자가 말한 시의 정의는 사무사思無邪다. 못된 생각을 먼저 버려 없애야 시가 된다는 이치 아닌가. 사람 되고 시 쓰라는 말이라고 풀어 무방하리라.
누구나 펜을 들면 좋은 글, 아름다운 글을 먼저 떠올리게 돼있다. 그것은 미문美文과 교문巧文의 유혹을 털어내지 못한 욕심에서의 비로솜이다. '문심조롱'에는 영혼을 충만 시키라고 일찍이 말해둔 바 있다. 그래야 사물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글을 쓰게 된다고 일렀다. 그 말에는 동서양의 구별이 없는 가보다. 그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이라고 공자도 뷔퐁도 같이 설파하지 않았던가. 이쯤에서 이정희 시인의 호기심이 소롯이 담긴 시 한 편 더 읽어봄이 어떨까.
올해도 잊지 않고 미소 지으며
담벽 넘어 찾아온 그대
그는 노란 꽃술 달고 빨간 얼굴로
나를 반기네
흔들리는 비바람 비에 젖은 길
얼마나 멀길래 당신은 오지 않고
능소화만 보냈어요
올해는 가뭄이 너무 심해 당신의 기다림을
눈을 크게 떠보고 귀도 멀리 열어봅니다
당신의 발자국 소리 음성도 들리는 듯
능소화가 웃어주네요
올해도 더 가깝게 더 붉게
내 곁에 고개 숙입니다
- "능소화" -
이정희 시인의 가슴은 언제나 뜨겁고 젖어있다. 시인의 주성분은 사랑이라는 말을 다시 이정희 시인 앞에 놓아도 무방함을 확인한다. 능소화만 보내고 오지 않는 당신은 누구일까. 여태도 시인의 가슴 반쪽에 자리하고 있는 행운아는 과연 누구일까. 막연한 대상이라 불러도 될 것이며, 지난날의 추억만 두고 훌쩍 떠나버린 어느 멋진 이성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잊으려야 도무지 잊히지 않는 혈육으로도 확대시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정희 시인은 익어가는 사람의 길을 택한 영원한 젊음이다. 젊음이 그의 가슴 속에서 한시 반시도 떠날 줄을 모른다. 시인 울만이 말했듯 호기심을 잃지 않는 영원한 청춘이다. 시인은 늙어서도 어린이의 말로 말한다는 말을 실감시키는 시인임이 분명하다. 지상에서 숨쉬고 있는 시는 늙음을 모른다. 멀리 갈 일 아니다. 소월, 미당, 지훈, 목월 선생은 영원히 우리 가슴에 새파란 청춘으로 숨쉬며 누구나의 일그러진 가슴을 다독여 주고 있지 않는가.
누구나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아름답게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사랑과 신비함일 것이다. 과학이나 예술이나를 초월한 떠나있는 생각의 근원일 시 분명하다. 이런 새파랗게 젊어있는 마음 터를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감고 세상구경 가는 사람이라 불러 두자. 살아있는 죽은 사람이라는 역설도 무방하리라. 능소화 한 송이에 가슴 두근거리고 아름다운 꿈을 되살려 인생을 아득한 저 옛날로 되돌릴 줄 아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인임을 이정희 시인은 그의 시로 증명하고 있다. 늙어서 젊음을 걷는 사람이다.
꽃 속에 감추인 사랑의 밀어, 능소화는 그 대리자로 시인 앞에 올해는 더 붉게 더 가깝게 다가온다. 더 붉게,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붉게 이정희 시인 앞에 다가올 것을 필자는 확신한다. 날로 달로 젊어가는 시인 앞에.
끝으로 그의 시 "시밭에는"에 잠깐 쉬면서, 시인의 시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시어를 찾아 나서는 올곧은 열정이 담긴 이 한 구절 ? 첫줄과 끝연 ?만 불러다 놓고 아둔한 필을 접어야겠다.
그가 얼마나 시를 찾아, 한 소절 시어를 찾아, 산천을 누비고 있는지, 언어를 다듬으며 시어를 닦고 말들을 심으면서 가꾸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를 느꼈기에.
누군가 신다 버린 신발
처음처럼 같은 날처럼 씨도 뿌리고
가꾸면서 한해의 시어를 만들 때까지
쓸고 닦아 예쁜 그릇에 담을 때까지
목차
목차
1부
아버지 / 13
금낭화 / 14
비 내린다 / 15
만남 / 16
겨울 한때 / 17
감나무 / 18
딩굴리는 것 / 19
저녁 단상 / 20
비 / 21
이슬이 된 사람 / 22
어떤 부부의 대화 / 23
숲의 비밀 / 24
기억을 심어주는 꽃 / 25
향수 / 26
능소화 / 27
오른쪽 어깨는 눈이 내리고 왼쪽 어깨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 28
2부
만선의 기쁨 / 31
속살이 하얀 참외 / 32
오월의 노래 / 33
암자 / 34
아들 / 35
어머니 기일에 / 36
거울 / 37
내 마음에 봄이 없는 날이 참 오래되었다 / 38
살다 보니 / 39
담배 먹는 여자 / 40
하얀 연인 / 41
비 그리고 바람 / 42
번뇌 / 43
세상 속으로 / 44
그냥 두면 옛것인데 / 45
계곡처럼 / 46
3부
그때 그 친구들 / 49
칠순이 넘어 시를 배웠다 / 50
그만살이 / 52
문득 / 53
나무를 바라보며 / 54
가는 계절 오는 계절 / 55
기억의 시간 / 56
외줄 타는 담쟁이 / 57
편지 / 58
어디서 나를 찾나 / 59
굴뚝새 / 60
소망 / 61
입곡저수지 / 62
이상 / 63
염소 / 64
4부
내일은 내 생일 / 67
시인으로 가는 길 / 68
꿈에 본 당신 / 69
하얀 마음 / 70
오일장 / 71
사랑 / 72
당산나무 / 73
나이는 그대로 쌓인다 / 74
귀뚜라미 우는 밤 / 75
백월산 진달래 / 76
만남의 설렘 / 77
시밭에는 / 78
동트는 봄 / 79
봄이 주는 오늘 / 80
바람이 오는데 / 81
■시집 해설
시린 영혼의 향기, 꽃 속에 담긴 사랑의 시학 - 홍진기 시인 / 82
저자
저자
김해 진영 출생
2016년 월간《한맥문학》등단
시낭송 문예지도사
시낭송가, 화요시낭송회 회원
창원문화원 문예창작반 수강중
마산문학관 문예창작교실 수강중
창원 다문화센터 한글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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