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이라더니
백선옥 시집
백선옥 시집 [세월이 약이라더니].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온 저자는 이번 시집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삶 속에서 건져올린 시들의 면면은 생각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독자들의 시감상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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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시는 고통을 통해 피어나는 꽃
임창연 (시인,문학평론가)
1.
백선옥 시인은 민들레문학회를 통해 20년 동안 변함없이 활동하며 매년 시를 발표해 왔다. 첫 시집인 『세월이 약이라더니』는 민들레문학 동인지에 매년 발표되었던 시가 89편 실려 있다. 특별히 민들레문학회는 지역 문학동인회로 소중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경남문인협회와 마산문인협회를 중심으로 회원들은 선두적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아직도 창립 회원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선옥 시인도 창립 회원이다. 그리고 20년 동안 변함없이 시 창작을 멈추지 않고 동인지에 발표를 했다. 그 기간 동안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과정과 창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는 등 문학수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른 동인들이 등단을 하는 동안에 자신은 등단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다. 이 시집을 내기 전 지인의 설득과 권유로 등단을 하였다. 늦깎이 등단과 동시에 펴낸 첫 시집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바쁜 삶 가운데 시인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하게 했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시적 주체와 타자와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서정시는 대체로 화자의 직접적인 서술이나 타자를 통한 화자의 서술로 대부분 표현된다. 백선옥 시인의 시는 서정시에 근간을 두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시들이다.
1.
여린 칼끝 베어 문
발바닥 자주쓴풀 같은 어제
검붉은 꽃 피운다
힘껏 내리친 기억
소스라치게 놀란 잠이 덜 깬 사월
아카시아 꽃잎
하얀 노래 부른다
며느리밑씻개 꽃잎 수의壽衣 입는다
2.
지친 울음 그친 전화벨
따뜻한 스웨터 보내고 싶은데
오늘도 인사한다
얽힌 실타래
달개비 눈물 같은 이름 모를 어제
상여喪輿 들쳐 맨다
아지랑이 앞산 낮은 목소리
앉은뱅이 햇살 창문 위 앉는다
3.
침묵沈默은 승勝한 걸까
패敗한 걸까
하늘 닿은 도깨비바늘 같은 기도
보리밥 훔쳐 먹은 드럼
소복이 쌓이는 눈물
목마른 시간 비우기 위해
뒷마당 돌담 쌓고
보이지도 않는 쌘구름 찾는다
4.
애기똥풀 같은 희미한 도시
시든 꽃 버리듯
그리움 터널 빠져나가고
인적 드문 골목에 잠든 어제
옷 갈아입는 동네 어귀
이름표 붙인 비비추
기억한다 어제는
- 「기억한다 어제는」 전문
한 편의 시에 '자주쓴풀, 아카시아, 며느리밑씻개, 달개비, 도깨비바늘, 애기똥풀, 비비추' 무려 7종류의 풀꽃이 등장한다. 4연의 독립된 4편의 시가 꽃 빛깔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4개의 소품으로 그려진,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사라지는 과거를 또렷하게 기억의 문장으로 각인시킨다. 세상은 풀꽃처럼 사라져 가지만 지는 꽃처럼 아름답다. 시간도 스러져 기억하지 않지만 다시 사라질 꽃 위에 시인은 이름표를 붙인다.
공동목욕탕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출입을 하는 곳이다. 남자들에게는 자식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여자들에게는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교감이 이루어진다.
며느리 시어머니 굳은 창고를
짙은 가을 향기 뱉어내는
붉은 사과나무처럼
목욕시킨다
쉰아홉 며느리
여든넷 시어머니
살아온 시간 맛난 중참처럼
색색이 피어나는 안개 사이로 시간 주고받는다
시어머니 세월 머리 감기니
덕지덕지 때 묻은 여든넷 바람 비켜선다
굳어가는 뼈마디 사이로 기억 풀어내고
며느리도 웃는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엉킨 세월의 실타래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비누 거품 같은 그림자 사이로
질긴 인연줄 풀어낸다
- 「목욕탕에서」 전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목욕탕에 함께 간 이야기가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며느리 시어머니 굳은 창고를 /짙은 가을 향기 뱉어내는 /붉은 사과나무처럼 /목욕시킨다
늙은 시어머니의 삶이 가을 향기를 품은 잘 익은 사과나무를 씻는다고 말한다. 인생은 늙어가는 게 아니고 사과처럼 잘 익어간다고 노래한다. 뽀얀 김이 피어나는 목욕탕에서 시어머니의 등을 밀어주는 며느리의 가슴 뭉클한 그림이 그려진다.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인생은 늙어가는 게 아니고 익어간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시이다.
2.
시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2002년 4월 15일 김해공항에 착륙하려던 중국 민항기가 신어산 쪽에 추락해 129명이 사망한 사고이다. 그 사고로 인해 부모님을 동시에 잃었으니 참으로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다.
끈 풀린 운동화처럼
무딘 기억
사는 이유 더듬어 돌탑 찾는다
사람 냄새로 골 패인
시든 4월
돌탑 앞에 고개 숙여 묵념한다
붉은 4월이 물들인 가을은
가슴으로
지친 그날을 위해 기도한다
CA129는
흔적 남아 돌탑 지키고
129명의 영혼은 돌탑 되었다
받는 이 없어도 보내고
보내주는 이 없어도 받아
침묵은 고이 흘러 등산로가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도 찾지 않는
제자리걸음 하는 그날은 눈물을 보낸다
- 「돌탑」 전문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아버지께서 탑승하신 비행기라니
멎어버린 손끝에 기억이 눈물을 토하고
깨어진 그릇 조각처럼 부서지는 시간
달리는 차도 멎고
눈물은 비를 타고
새라면 좋을 텐데
생각은 고장 나버린 나사처럼 나뒹굴고
고함지르고 몸부림치고
시간이 멈춰버린
기다렸다 미치도록 기다렸다
손에 잡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기억
기억을 부여잡고 흔들어 깨워보지만
영정사진은 표정을 바꾸고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는 바람
어제가 되어버리는 오늘
손에 잡힌 지난 기억은 서러운 통곡
때 묻은 묵은 손길
냉장고 속에 김치도 웃는데
전화벨은 울리지 않는다
- 「그곳은 지옥이었다」 중에서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창작 의욕은 좋은 조건에서도 나쁜 조건에서도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창작의 뿌리가 때로는 고통을 통해 피어나는 꽃이고 열매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가 창작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극복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보여줌으로 치유 행위를 하는 것이다. 마치 신뢰하는 사람에게 아픔을 털어놓는 행위가 아픔을 덜어내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작품을 읽는 독자도 공감을 통해 자신이 가진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거나 작가의 상처를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가장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굳이 시로 풀어내는 것은 홀로 가슴앓이를 하지 않고 흘러가는 강물에 상처를 버리는 의식이다. 화장을 한 유골가루를 강물에 흘려보내는 의식인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속의 기억을 다 지울 수 없지만 가볍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김동리 선생님
박목월 선생님
저승 이승 오가면서 부탁 하나 들어주오
인연 닿아 혹 내 엄마 아버지 만나거든
소식 좀 전해주오
잘 있다 소식 좀 전해주오
- 「소식」 부분
문학기행을 갔다가 문학관에 죽은 고인들을 보니 부모님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안부를 묻는 것이다. 시인은 부모를 가슴에 묻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3.
시인의 시에는 달이 많이 등장한다. 달은 여인들이 삶과 무관하지 않다. 월경(月經)이란 말이 다른 말로 달거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달은 그리움의 상징인 동시에 채움과 비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밤잠을 설치는 여인들의 친구이기도 하다.
앞산만큼 쌓여 가는
마른 한숨 어미소 울음
목축이고 목축이고파
날 새는 줄 모르고 밤잠 설쳤다
(중략)
불러도 불러도
꾸역꾸역 잘도 가는 달
- 「달」 부분
초겨울
감나무 까치밥 지키듯
지친 꿈속 깨우지 않으려
뼈 빠지게 기다리던
박 덩이
기운 소매 삭이고 삭아
다져진 콧물 투명하다
- 「달 2」 부분
여름이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밤늦게 만난 반달이 얘기한다
푼수 같다고
쓸데없이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고?
- 「반달」 부분
시인에게 달은 가장 좋은 친구이다. 다른 식구들은 잠이 들고 시인에게는 시를 쓰며 달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노래를 부른다
아리 아리 아리랑 아리랑고개
푸념하는 늦가을
함초롬한 수채화 같은 산기슭
바쁜 걸음 모자라
덜미 잡힌 오늘
할머니 쪽머리 만진다
불빛 밥상 차린 저녁 바다
주춤거리다 얼굴 못 보고
서쪽하늘 초승달 같은 여덟 마리 물새
거울 보던 눅눅한 나이
詩를 만진다
몸 뺏긴 머리
오슬오슬 술 깨는 저녁
오호嗚呼라며 옷 갈아입는 때늦은 가을
잠자는 전설傳說 젖은 이야기
꿈을 만진다
- 「잠자는 전설」 전문
시인이 잠 못 들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시가 잘 써지지 않아서 이다. 그만큼 철저한 시인정신으로 날마다 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다운 시 만나
밤새도록 사랑 나누고 싶다
마음 담은 글 같은 시 만나보려
다가서 보지만
제대로 된 시를 만나는 것은
화두話頭 쫓아 도道를 통하는 만큼 어려우니
제대로 품어 보지도 못하고
진정 누군지도 모른 채
남들이 말하는 시를 내뱉고
이제 조금이나마 아주 가끔
내 품에 와 안겨 주는데도
단지 그림 속의 떡이다
옷 같은 옷 해 입히지 못하고
본뜨기도 안 되는
남의 눈에 보이는 구멍 난 속옷
기워 입히지도 못하고
겉도는 걸음은 여전히 뒤뚱거리고 있다
- 「그림 속의 떡」 전문
시인이라면 시다운 시를 계속해서 쓰고 싶은 것이 진정한 소원일 것이다.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삶 속에서 덤으로 하나 더 시라는 짐을 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빚이 없지만 늘 빚진 자처럼 시로 세상에 빚을 갚아나가는 사람이다. 시인에게 시는 태어나면서부터 빌린 적은 없지만 꼭 갚아야만 하는 채무 약정서처럼 따라다니는 일종의 빚인 동시에 세상이 이름 지어준 훈장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식으로 아내로 그리고 어머니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겪어왔다. 오죽하면 「세월이 약이라더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렇지만 애써 행복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고 산처럼 묵묵히 걸어왔다고 말한다. 그런 시인의 시 쓰기는 그런 엉킨 삶의 시간을 풀어내는 묘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시라는 형식을 빌려온 것을 제외한다면 20년 세월의 일기로 읽힌다. 가정사를 넘어 가족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본인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다.
끝으로 시집 제목인 「세월이 약이라더니」를 소개하며 마무리를 한다.
다 주고도
더 줄 게 없어
주름진 굳은 살갗까지 벗겨내는
몇백 년 고향 지켜온 늙은 정자나무
내 엄마 그리운 세월 같다
눈이 시리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꿈까지 주고 갔다
아픈 지아비 자식들 짐 되지 않게 함께
다가설 수 없는 거리다
하얀 머릿결 풀어놓은 햇살 같다
눈 내리는 하늘에 자꾸 눈이 간다
늙은 가지 끝에 힘들게 버틴 새집
내리는 눈 무거워 눈물 흘리고 있다
철새처럼 다녀온다는 약속도 없이
겨울바람 주섬주섬 챙겨 빈집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바람이 지키는 빈집에는
하얀 국화꽃 겨울에 피었다
힘든 시간 끝자락 지키고 있는 기억
세월이 약이라더니
풀어진 신발 끈 묶지도 못한 채 간다
- 「세월이 약이라더니」 전문
목차
목차
1부
느티나무
기억한다 어제는
고무신
몸살
밤안개
무(無)
소식
골목길
깨털이
비 맞은 노란 장미꽃
가출
고집
딸
돌탑
목욕탕에서
배신(背信)
사월
오월 낙엽
달
달 2
소주
바람
반달
2부
천상재회
여자 나이
폐가(廢家)
마흔 고개에 선 나무
엄마를 닮았다
코스모스
까치밥
생일
용서
출가
홀씨 5집 탄생일
산마실에 들리니
시선
노을
감나무
시 내음 나는 세상
진주 화요문학회를 다녀오면서
덫
부고장
기억
오케스트라
비 오는 날
가불
3부
사랑길
노오란 국화꽃
우리 동네 사람들
소문
국화
작은 아들
교도소 담벼락에 핀 나팔꽃
가을은
침묵 잠시 바람처럼 흔들렸다
어시장의 오후
잠자는 전설(傳說)
무소유
부도
문수암 까치울음
고려장
바람
길
가을산
찬 달도 기울다
세상이 바뀌어도 참
늦가을
4부
초겨울
달빛
비우기
그곳은 지옥이었다
나의 메아리
늙은 정자나무
사주풀이
구름 시간표
그림 속의 떡
고향집
비
F학점
낙엽
이혼
친정
12월
졸업식장에서
실수
손톱을 깎으며
지금 그 여자는 어디에 서 있는가?
가마솥
세월이 약이라더니
■시집 해설 /임창연
시는 고통을 통해 피어나는 꽃
저자
저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이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창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비문학》 시 부문 등단
민들레문학회 회원
시집 『세월이 약이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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