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달다(창연시선 2)
이영자 제7시집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저자의 다양한 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함축된 언어의 미학을 엿볼 수 있으며, 그 속에 담긴 깊은 사색이 독자를 문학의 세계로 이끈다. 새로운 시선이 돋보이며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시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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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어느 때는 실이 모자라고 어느 때는 꽃이 모자라서 완성 못한 꽃목걸이' 같은 시인의 절절함이 '풀꽃의 향기와 언어를 허락 받'았을 것이다.
다른 이들을 타이르기보다 끝없이 자신을 설득해가는 깊은 사유가 쪽진 머리처럼 단아하고 박꽃처럼 환하다."라고 말했다.
[시집 해설]
삶의 진실과 시적 운명
-이영자 시세계
배한봉(시인·문학박사)
시력 30여년 만에 7번째 시집 ?미리 달다?를 펴내는 이영자 시인은 현재 경남 산청군의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시를 쓰고 있다. 일상에 산포된 곡절을 서정시의 속성에 담아 소통 가능성을 확장하는 양식으로 드러내며 삶의 진실과 자연 교감의 정서를 재현/재구성하여 심미적으로 승화하고 있다.
1989년 시집 ?초승달 연가?를 상재하며 시단에 나온 시인의 별명은 칠판시인이었다. 당시 마산 부림시장 지하에서 '성광집'이라는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던 시인은 벽에 걸어둔 칠판에 늘 자작시를 써 놓았고, 이것을 눈여겨 본 신상철, 황선하, 이선관 등 당시 내로라하던 성광집 단골 문인들이 시집 출간을 재촉하여 ?초승달 연가?가 태어났던 까닭이다. 그 이후 꾸준히 시작에 매진하여 ?개망초꽃도 시가 될 줄은?, ?식당일기?, ?그 여자네 집?, ?땅심?, ?따라 부를 수 없는 풍년가?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지금까지 이영자 시인이 일구어온 시적 세계는 일찍 사별한 부군(夫君)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 그리고 식당을 소재로 한 삶의 경험들, 일상성을 담은 섬세한 감성, 자연의 이치를 노래한 정서가 혼재되어 있었다. "지아비의 사별이라는 인생 최대의 비극적 충격이 문학과 결연되는 운명적 요소"였고, "자신의 작품을 하잘 것 없는 개망초꽃에 비교하며 겸손하게 시인의 길에 들어섰"(?식당일기? 해설, 98-99쪽)다고 했던 오하룡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 이러한 정서는 평소 시인이 가꾸어온 삶의 진실과 시적 운명을 담아낸 영혼의 울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가혹한 삶의 궤적은 시인에게 여러 가지 시적 의미를 축적시킨다. 즐겁고 평범한 삶에 안착하여 세상을 보는 사람은 들판의 꽃이 견딘 시련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다. 또 이웃의 손바닥에 새겨진 거친 흔적을 온전히 체감하고 공감하기 어렵다. 이영자 시인은 말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삶의 한설풍파를 통과하면서 시적 대상의 안과 밖을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험과 내적 의식이 서정의 그물을 통과하면서 시로 태어났을 터이니 이영자 시인은 삶이라는 땅을 딛고 서서 시적 대상들을 관찰하고 재발견하는, 그야말로 순수 시인이요, 천생시인인 것이다.
시집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풍경이 "꽃모종 바구니"를 내미는 이웃과의 만남이다. 이웃은 심리적 거리가 대체적으로 짧은 거리에 놓인다. 때문에 감정을 양식화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발화하는 관계에 속한다. 이영자 시인의 시는 이웃과의 만남이 보여주듯 관계성에서 태어나는 삶의 진실과 일상성에서 발현되는 서정 세계를 주관화하는 경우가 많다. 시의 세계에서 일상은 자아와 세계의 만남이 반복적 연속적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영역이고,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여러 현상의 영역이다. 따라서 일상성은 서정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고, 현실의 삶에 밀착된 하나의 가치개념으로서 우리의 생활 의식과 문화를 포섭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성은 의식 체험으로서 시인의 지향성, 곧 자아의 자기 해명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눈곱 같은 꽃다지 냉이 그들 앞에서
저물도록 서성이는 등 뒤로
이웃 노인 군소리 심하다
저 넘의 할마시 꽃만 보믄 사족을 못쓰재?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마음에 걸렸는지
꽃모종 바구니를 내 앞에 들이댄다
요게 말이오
나물해서 먹으면 겁나게 맛나고
꽃은 눈물 나게 곱다우
어떤 꽃이길래 저러실까?
눈물 나게 곱다니 늦은 밤 입고 나오시는
달님 저고리처럼 은은하겠네
-?취나물 꽃?
?취나물 꽃?은 이웃과 정을 나누는 방식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화자는 시골이라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풀꽃을 보며 오래 그 모습에 젖어 있다. "이웃 노인"에게는, 그 모습이 일상적이다. 그래서 "저 넘의 할마시 꽃만 보믄 사족을 못쓰재"하고 "군소리"를 한다. 그러나 이 군소리는 타박하거나 핀잔을 주는 말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고, 마음을 나누는 소통의 방식이다. "꽃모종 바구니"를 주며 "꽃은 눈물 나게 곱다"는 말에 그 꽃이 "달님 저고리처럼 은은"할 것이라고 화답하는 것에서 이런 정리(情理)가 잘 나타나고 있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정이 풀꽃처럼 피어나는 풍경이다.
모종 내는 철마다
손 벌리는 일이 미안해서 금년에도
아무거나 주오 잎사귀나 따먹게…
땅땅 실한 들깨 모종 주면서
금석댁 설핏 웃는다
저 미소는 무슨 뜻일까?
무럭무럭 자란 잎 이파리 말고도
쏟아 놓은 깨알이 됫박 넘치는데
신통해라 흥감해라
가을볕이 까불고 나도 들까불고
한 알이 훅 날아 까부는 눈에 박혀서
머들머들 먼지 털고 들기름 치더니
이제야 보인다
모종 줄 때 웃던 그 사람 깊은 속을
떡잎 보면 열매를 알 수 있는
금석댁 혜안이
-?미소 뒤에 숨은 뜻?
화자는 들깻잎이나 따먹을 요량으로 아무렇게나 자란 모종 몇 포기만 주면 좋겠다고 하지만 "금석댁"은 실한 모종을 주면서 미소를 보인다. 무럭무럭 자란 모종은 잎 말고도 실한 깨알을 됫박 넘치게 쏟아낸다. 그것을 보면서 화자는 "모종 줄 때 웃던 그 사람 깊은 속"을 읽어낸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시는 감정의 직접적 진술과 묘사의 구체성을 결합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환기한다. 실제의 삶에서 일어난 생활감정을 통해 촉촉하고 부드러운 정서적 이미지를 재현한다. 기쁨과 감사의 감정을 드러낸 반영체(反影體) 형용사를 직접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따라서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가 결합된 이 시는 이영자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도구로서의 시적 기능을 실현한다.
짐수레를 앞에서 끄는 성촌댁과
뚜벅뚜벅 뒤에서 따라가는 성촌양반을
농수로 지나던 사람이
내 귀에다 동네 소문 속닥거린다
성촌양반 저 양반 말이여
황소처럼 일하는 장사였는데
어느 핸가 몸에 풍이 지나가서 힘을 잃고
그 뒤로 아내가 황소 되었다고
옳거니
여기 산청 운곡마을 아랫담에
열녀 산다고 하늘 향하여 소리소리 질렀더니
하느님 들으시고
구름 사이로 사진 찍는다
착한 부부에게 풍년상 주시려고
-?풍년상-착한농부?
먼저 인용한 두 편의 시도 그러하거니와 우리는 이영자 시인의 시가 지닌 소박하고 질박한 정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이웃의 삶에 귀 기울임으로써 발생하는 긍정적이고 온정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이 인간상은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최소한도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소박한 꿈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자를 통해, 혹은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시적 자기 소명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소처럼 일하는 장사" 였던 남편이 "몸에 풍이 지나가서 힘을 잃고/ 그 뒤로 아내가 황소가 되었다"는 시구는 인간의 진정한 실존 방향에 대한 전언이다.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부부는 물질적 풍요보다는 고되지만 평생 동반자로서의 동행이 행복임을 실천하는 존재들이다. 기실 그들의 삶의 이면에는 고통과 고난이 할퀴고 간 자국이 깊게 남아있을 터. 때문에 화자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풍년상"을 받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장삼이사의 목소리를 통해 그 존재들의 삶을 이해하고, 주관화하여 소박한 생활감정으로 노래한 이 시는 현실적 언어의 재생으로 삶의 진실성을 보여주려는 시인의 의도, 혹은 시인의 시적 자기 소명이 가감 없이 표현된 경우라 할 것이다.
머슴둘레가
조석으로 밥상에 올라앉을 때
쓰다 달다 군말 없이 아들은
박하꽃 코앞에 양봉을 입주시킨다
허브향 넘치는 그들은 신혼인데
꿀 맛보리라 기다리는 벌집 밖이
미리 달다 큼직하게 준비한
꿀통이 미리 달고
쓴냉이 나물이 미리 달다
여왕벌은 아직 촛불도 끄지 않았는데
-?미리 달다?
앞서 인용한 3편의 시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진실을 탐색하였다면 표제작으로 떠오른 ?미리 달다?는 아들이 박하꽃 앞에 설치한 양봉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양상을 보인다. 화자는 봄에 민들레로 밥상을 꾸린다. 그것이 민들레 꽃밥인지 민들레 나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농촌생활이 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바깥에 나가면 쉬이 나물거리를 구할 수 있고, 그것으로 봄맛을 시시때때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민들레가 지천인 봄날에 벌통을 보며 꿀맛 볼 것을 상상하니 미리 달콤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자 사방 모든 것이 다 단맛을 풍기며 다가온다. 상상력은 동화와 투시를 통해 시적 대상을 주관화한다. 주관화란 말은 시인이 세계를 자기의 개성에 따라 자아화한다는 뜻이다. 익히 알다시피 세계의 자아화는 서정시의 기본 원리이다. 이영자 시인은 박하꽃 앞에 설치한 양봉을 보며 미리 달콤한 꿀맛을 느끼고 아름다운 봄의 깊이를 체감한다. 이러한 체감 속에서 시인의 감정과 자연의 심리적 거리는 소멸되거나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동일시는 이영자 시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포도 넓은 이파리 뒤로
멧새 한 마리 살짝 다녀간다
포도가 익었는지 둘러보고 가는 모양이다
며칠이 지나자 여럿이 와서
포도를 맛본다
영감 기제사에 올릴 제물을 넘본다고
쫓고 나서 생각하니
친구 좋아하던 그 사람이다
이제는 새들과도 친해서
신포도 대접 즐기는 것을 늦게 알았다
날짐승이 다리를 놓으니
저승과 이승 참 가깝다
-?가까운 사이?
화자는 포도밭을 들락거리는 멧새를 발견하고는 "영감 기제사에 올릴 제물을 넘본다" 여겨서 멧새를 쫓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친구 좋아하던 그 사람"이 이제는 친구가 된 새들에게 신포도를 대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멧새는 화자와 영감 사이를 잇는 매개로써 "나는 하늘 같은 남편이라고/ 땅땅 큰소리치던"(?장마 오기 전에?)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하고, "봉암다릿가/ 물 위의 횟집"(?봉암 꼬시락?)으로 소풍 갔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래서 화자는 "날짐승이 다리를 놓으니/ 저승과 이승 참 가깝다"고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는 정서와 상상력으로 이루어진다. ?가까운 사이?는, 기억이나 회상의 연속적인 흐름에 의한 과거의 재생은 정서와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인상(印象)을 통과함으로써 현재 속에 융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편이다.
엄마 또 그 꽃이 피었어요
남편이 생전에 돌보던 선인장
이 집 저 집 이삿짐 따라다니다가
딸네의 베란다에서 꽃을 피웠다
생과 사의 눈물은 빗물에도 섞이지 않고
꽃으로 붉게 피나보다
가족과 함께 오래 살지 못하고
병수발 시킨 것이 미안하다고
그 말하러 핀 거야 네 눈앞에 핀 거야
딸아 그러니까 모른 척 하자
그 뜻을 우리가 다 알아들은 줄 알면
네 아버지는 할 말 다 했다고
꽃으로 올 생각 지울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는 서정의 원리가 잘 구현된 시이다. 서정은 대체로 회감, 세계의 자아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등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이 시에서는 개인의 체험과 감정을 꽃이라는 상징을 통해 승화시키는 형식을 보인다. "딸네의 베란다에서 꽃을 피"운 선인장은 "남편이 생전에 돌보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 딸은 화자에게 "또 그 꽃이 피었다"고 소식을 전하지만 화자는"모른 척 하자"고 말한다. 생전에 온갖 고생을 다 시킨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그 말하러 핀" 것인데, 그 뜻을 알아들었다고 하면 "할 말 다 했다고/ 꽃으로 올 생각 지울 수 있으니까" 모른 척 하자는 것이다. 서정시에서 자연적 상징은 종종 사용되어 왔다. 꽃은 피고 지는 윤회의 변신을 거듭한다. 이런 변신의 반복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다. 화자는 꽃이라는 자연적 상징을 통해 남편과 사별한 한을 승화시킨다. 그리고 사별한 남편과 지속적으로 만나려는, 좀 더 욕심을 가진다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려는 정서를 환기한다. 이런 반복의 변신성과 영원의 시간성이 병합되는 꽃을 서정의 원리 속에 구현함으로써 이 시는 영원한 사랑, 혹은 불멸의 언약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풋내 단내 향긋한 감꽃의 꿈은
돼지꿈일까 용꿈일까
바람에 마르고 말라 곶감 되는 것이 전부일까
내 생각에는
감나무 아래서 목걸이를 만들다가
어느 때는 꽃이 모자라서
어느 때는 실이 모자라서
완성 못한 꽃목걸이를 들고 섰는
소녀를 만나는 기다림일 거야
-?감꽃의 꿈?
정서는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것이고, 이미지들을 동일화하고 통일시킨다. 이 시에 등장하는 감꽃은 하나의 평범한 제재이지만, 화자의 경험이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감꽃의 꿈"은 시인의 주관적 감정에 띠라 선택된 관념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관념은 정서를 내포하고, 정서는 관념을 내포한다. 시의 동일성은 이렇게 정서와 관념이 일체가 되는 것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엘리엇은, 시인은 언제나 감수성의 통일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화자가 들추어내는 "감꽃의 꿈", 즉 "꽃목걸이를 들고 섰는/ 소녀를 만나는 기다림"은 화자의 섬세한 감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환기력을 가진다. 시의 이미지는 시의 배경을 마련하는 기능을 하지만, 경험의 동일성을 지닌 독자에게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고 쾌감을 공급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 심원한 쾌감의 세계는 도시에서 성장하고 자란 세대가 느끼기 어려운 정서다. 그러면 다음의 시는 어떤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보미지예?
아닌데요 자얀데요! 자야라고요
그라지 말고 바른말 하이소
좋은 정보 줄게요
아이구 참 아이라케도 와그라노
통장에 노령연금 들어 온
낌새를 맡고
우쨌든지 털어먹을라꼬
요령 부리는 것 같아서
탁 전화를 끄는데
봄까치꽃 제풀에 놀라 떤다
-?봄바람 보이스 피싱?
이 시는 계절을 의인화하여 상상력을 발동한다. 화자가 전화를 받는 이 은밀한 행위는 청각적 이미지와 참신하게 결합하여 신선감을 준다. "보미지예?"라는 물음에 "아닌데요 자얀데요!"라고 대답하는 화자를 상상하며 우리는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보미"가 봄을 일컫는다는 것, 그리고 "자야"가 화자 자신임을 우리는 금세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보이스피싱과 같은 현대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유쾌한 풍경으로 전환시켜 연출함으로써 이미지가 어떻게 정서를 환기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동화적 감성에 유머와 해학을 삽입한 이 시를 통해 알레고리적 서정의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은 시를 읽는 독자로서의 행복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전화 끄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는 "봄까치꽃"을 통해, 자연 동화(同化)를 통해 획득한 생명의 화음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적 방식은 ?할머니의 약?, ?참새의 이름은?과 같은 시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서너 포기 잘 가꾸면 장맛비에 쭉쭉 뻗어
오이냉국 걱정 없다
장대높이 줄을 길게 쳤는데
앞서 오른 것은 무성한 환삼 넝쿨
바닥에 오그라 붙은 오이꽃에게
괜찮아 괜찮아 오이냉국 먹었다
치자
일등 농사꾼 집에서 얻은 시금치 씨앗을
심었는데 서둘러 올라 온 것은
넙덕넙덕 소루쟁이 눈만 붙은 시금치는
울상인데
괜찮아 괜찮아 김밥 싸서 먹었다
치자
그들 위로 하느라 치자치자 하는 소리
치자꽃 저 부르는 줄 알고
버선발로 나와 치자치자 장구 치자 북 치자
상큼한 향기 판치는 치자의 독무대
-?판치는 치자꽃?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생명의 화음을 들려주는 작품 가운데 주목할 시편으로는 ?때문이와 덕분이?, ?판치는 치자꽃?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서 여러 시편을 통해 살펴본 바, 진실성을 삶의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는 이영자 시인의 자연관이 잘 스며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판치는 치자꽃?에 나타나는 화자의 자연감응은 시인의 세계에 대한 태도, 시인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오이 모종도 심고 시금치 씨앗도 뿌려 텃밭을 가꾼다. 그런데 오이보다 먼저 환삼덩굴이 자라고, 시금치 싹보다는 소루쟁이가 먼저 번진다. 그래도 화자는 "괜찮아" 하고 위로하며 "먹었다/ 치자"고 말한다. 그러자 "치자꽃"이 "장구 치자 북 치자"하며 "상큼한 향기"를 내뿜는다. 이처럼 이 시는 말놀이 속에 삶과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를 풀어 넣고 상생의 정서를 신명으로 일으키는 가편이다.
이영자 시인은 한설풍우가 휘몰아치기도 하였으나 "학자 가문 태생"(?산밭골 달래 마늘밭에 사는 이유?)임을 늘 잊지 않고 삶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다. 다사다난한 생활 한 가운데서 운명적으로 시와 만나 시업에 들어선지 벌써 30년. 일상 속에서 시를 건져 올리되 진지함과 올곧음을 늘 잃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시세계 전반에 놓인 사상은 삶의 진실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목차
목차
1부
산밭골 달래 마늘밭에 사는 이유
취나물 꽃
노란색의 안정감
착각
감꽃의 꿈
참새네의 아침
역
여행
여항산
궁금하다
숲과 사람
생의 한 가운데
수수한 아름다움
골목 풍경
봄바람 보이스 피싱
그대 곁에 풀꽃 심으며
2부
참새의 이름은
겁 없는 사랑
두고 보자
유등축제
새들의 양심
새의 가슴
황노인의 황새
괜한 걱정
가까운 사이
장마 오기 전에
할머니의 약
눈물 장마
미소 뒤에 숨은 뜻
함구하고 있었는데
마 산다
마산에 겹치는 그림자
3부
미리 달다
맛의 신
오래된 기억
때문이와 덕분이
복더위에 배운 사랑
새로운 기도
호칭 때문에
그대 나의 예수이니
하느님만 따르리라
주님과 자녀 틈 사이에서
새 주교님 착좌식에서
깡통 안의 주님과 기사님
먼동 틀 때 다진 마음
성모님 손잡고 성모님 따라
우주만물이 우리와 함께
귓불 푸른 친구
4부
너 아니었으면
얕아서
아이에게 졌어요
나비 두 마리
도랑 치고 가재 잡은 날
콩잎 장아찌
풍년상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까
봉암 꼬시락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산까치의 속마음
바람 따라갔더니
판치는 치자꽃
호박넝쿨 제자리 찾기
시에게
겨울꽃 향기가
오빠 생각
■해설
삶의 진실과 시적 운명-이영자 시세계 / 배한봉 시인
저자
저자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을 수상하고, 시집으로 《개망초꽃도 시가 될 줄은》 《식당일기》 《그 여자네 집》 《땅심》 《따라 부를 수 없는 풍년가》 《미리 달다》가 있다.경상남도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경남시인협회, 경남아동문학회, 마산교구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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