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로운 삶을 향한 존재의 이해
니체와 에크하르트로 읽는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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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현실언어의 종언
니체와 에크하르트의 종교경전의 해석학적 파격(해체적 해석)
시대의 사유와 행위에 저항하고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것은 철학이 엄밀한 학문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에드문트 후설(E. Husserl)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이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영역 안에서 특수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학 및 신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낡은 정신적 축을 대신하여 시대의 새로운 분기점이 필요하다고 요청되는 때 종교적 사유와 행위의 선구자들이 어김없이 나타났으며, 그로인한 동서양의 정신적 세계는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동서양의 경전(Canon, Biblos)의 문자적 확산은 종교와 철학적 삶의 근간이 되었고, 그 해석학의 기술은 문해력을 높이는 인문학적 능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중에서 성서는 서양의 종교, 철학, 문화, 정치, 경제, 문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고 늘 당대의 시대적 문제와 씨름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만큼 서양의 정신을 알자면, 좀 더 거칠게 말해서 세계의 정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서’라는 배경을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니체(Friedrich W. Nietzsche)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모두 당세(當世)의 종교문화와 맞서 치열하게 논쟁을 했던 해체주의 해석학자들이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 설교수도회의 탁발수사사제로서 교회의 교조주의에 저항하였으며, 니체는 독일철학적 글쓰기 방식에 운문을 도입함은 물론 신 죽음의 파격적 선언으로 종래의 철학과 종교에 과감하게 저항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철학자의 시선으로 성서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모험이요 저항의 몸-짓(poiesis)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두 사람을 해석학의 도구로 삼아 성서를 봄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쇄신을 갈망하는 필자의 포이에시스(창작적 언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작금의 종교는 그 본래의 올바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매너리즘과 아비투스에 빠져 값싼 신앙언어만 생산함으로써 종교의 언어, 경전의 언어가 높은 이상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저항의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고자 한 저자의 성서해석학의 포이에시스적 시론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할 것이다.
니체와 에크하르트의 종교경전의 해석학적 파격(해체적 해석)
시대의 사유와 행위에 저항하고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것은 철학이 엄밀한 학문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에드문트 후설(E. Husserl)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이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영역 안에서 특수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학 및 신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낡은 정신적 축을 대신하여 시대의 새로운 분기점이 필요하다고 요청되는 때 종교적 사유와 행위의 선구자들이 어김없이 나타났으며, 그로인한 동서양의 정신적 세계는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동서양의 경전(Canon, Biblos)의 문자적 확산은 종교와 철학적 삶의 근간이 되었고, 그 해석학의 기술은 문해력을 높이는 인문학적 능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중에서 성서는 서양의 종교, 철학, 문화, 정치, 경제, 문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고 늘 당대의 시대적 문제와 씨름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만큼 서양의 정신을 알자면, 좀 더 거칠게 말해서 세계의 정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서’라는 배경을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니체(Friedrich W. Nietzsche)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모두 당세(當世)의 종교문화와 맞서 치열하게 논쟁을 했던 해체주의 해석학자들이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 설교수도회의 탁발수사사제로서 교회의 교조주의에 저항하였으며, 니체는 독일철학적 글쓰기 방식에 운문을 도입함은 물론 신 죽음의 파격적 선언으로 종래의 철학과 종교에 과감하게 저항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철학자의 시선으로 성서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모험이요 저항의 몸-짓(poiesis)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두 사람을 해석학의 도구로 삼아 성서를 봄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쇄신을 갈망하는 필자의 포이에시스(창작적 언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작금의 종교는 그 본래의 올바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매너리즘과 아비투스에 빠져 값싼 신앙언어만 생산함으로써 종교의 언어, 경전의 언어가 높은 이상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저항의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고자 한 저자의 성서해석학의 포이에시스적 시론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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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니체(Friedrich W. Nietzsche)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모두 당세(當世)의 종교문화와 맞서 치열하게 논쟁을 했던 해체주의 해석학자들입니다. 니체는 독일철학적 글쓰기 방식에 운문을 도입함은 물론 신 죽음의 파격적 선언으로 종래의 철학과 종교에 과감하게 저항하였으며,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 설교수도회의 탁발수사사제로서 교회의 교조주의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철학자의 시선으로 성서(聖書)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모험이요 저항의 몸-짓(poiesis)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두 사람을 해석학의 도구로 삼아 성서(聖書)를 봄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쇄신을 갈망하는 필자의 포이에시스(창작적 언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작금의 종교는 그 본래의 올바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매너리즘과 아비투스에 빠져 값싼 신앙언어만 생산함으로써 종교의 언어, 경전의 언어가 높은 이상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저항의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고자 한 저자의 성서해석학의 포이에시스적 시론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중세신비주의 부정신학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는 근대 독일철학자 니체이고, 후자는 중세 설교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입니다. 두 사람의 언어가 결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언어는 대부분 아포리즘(aphorism)으로 구성되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현장의 언어, 그러나 쉽지 않은 설교 어투로 구성되었습니다.
아포리즘과 콘텍스트 속에서 직접 부딪힌 청중에게 구사하는 설교가의 언어는 같으면서 다른, 다르면서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니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들의 아포리즘이나 설교를 듣는 즉시 당장에 '아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어의 격상과 초월론적 해석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어렵다는 것은 그들의 콘텍스트와 우리의 콘텍스트가 달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행위가 언어의 깊이와 높이에 맞닿아 있어서 범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달리 의식의 상승을 가져옵니다. 그들이 삶을 보는 차원과 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와 다릅니다.
필자는 이러한 고민을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초월로의 상승과 삶의 도약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눈을 가지고 성서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성서가 다르게 보이고 새로운 언어로 사유함으로써 삶과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체험(Erleben)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어를 어떤 도구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도출되는 결과는 다릅니다. 언어의 신비는 마음이 바뀌게 하고 의식에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언어를 의도적으로 자꾸 다르게 사용하도록 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과 소리와 뜻,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를 철학자 한병철은 '휘발성'이라는 표현으로 짚어냈습니다. 억지로라도 가벼운 말, 경박한 몸짓, 부박한 생각, 경망한 발걸음, 무사유의 신앙에서 벗어나려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강요가 아닙니다. 나를 성찰하지 않으면 아무리 양적으로 많은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을 내성(內省, introspection)하지 못하면 초월(超越, transcendence)도 못하는 법입니다.
두 사람 다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중세신비주의 부정신학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는 근대 독일철학자 니체이고, 후자는 중세 설교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입니다. 두 사람의 언어가 결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언어는 대부분 아포리즘(aphorism)으로 구성되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현장의 언어, 그러나 쉽지 않은 설교 어투로 구성되었습니다.
아포리즘과 콘텍스트 속에서 직접 부딪힌 청중에게 구사하는 설교가의 언어는 같으면서 다른, 다르면서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니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들의 아포리즘이나 설교를 듣는 즉시 당장에 '아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어의 격상과 초월론적 해석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어렵다는 것은 그들의 콘텍스트와 우리의 콘텍스트가 달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행위가 언어의 깊이와 높이에 맞닿아 있어서 범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달리 의식의 상승을 가져옵니다. 그들이 삶을 보는 차원과 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와 다릅니다.
필자는 이러한 고민을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초월로의 상승과 삶의 도약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눈을 가지고 성서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성서가 다르게 보이고 새로운 언어로 사유함으로써 삶과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체험(Erleben)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어를 어떤 도구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도출되는 결과는 다릅니다. 언어의 신비는 마음이 바뀌게 하고 의식에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언어를 의도적으로 자꾸 다르게 사용하도록 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과 소리와 뜻,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를 철학자 한병철은 '휘발성'이라는 표현으로 짚어냈습니다. 억지로라도 가벼운 말, 경박한 몸짓, 부박한 생각, 경망한 발걸음, 무사유의 신앙에서 벗어나려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강요가 아닙니다. 나를 성찰하지 않으면 아무리 양적으로 많은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을 내성(內省, introspection)하지 못하면 초월(超越, transcendence)도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철학자의 시선으로 성서(聖書)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모험이요 저항의 몸-짓(poiesis)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두 사람을 해석학의 도구로 삼아 성서(聖書)를 봄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쇄신을 갈망하는 필자의 포이에시스(창작적 언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작금의 종교는 그 본래의 올바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매너리즘과 아비투스에 빠져 값싼 신앙언어만 생산함으로써 종교의 언어, 경전의 언어가 높은 이상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저항의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고자 한 저자의 성서해석학의 포이에시스적 시론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중세신비주의 부정신학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는 근대 독일철학자 니체이고, 후자는 중세 설교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입니다. 두 사람의 언어가 결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언어는 대부분 아포리즘(aphorism)으로 구성되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현장의 언어, 그러나 쉽지 않은 설교 어투로 구성되었습니다.
아포리즘과 콘텍스트 속에서 직접 부딪힌 청중에게 구사하는 설교가의 언어는 같으면서 다른, 다르면서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니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들의 아포리즘이나 설교를 듣는 즉시 당장에 '아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어의 격상과 초월론적 해석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어렵다는 것은 그들의 콘텍스트와 우리의 콘텍스트가 달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행위가 언어의 깊이와 높이에 맞닿아 있어서 범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달리 의식의 상승을 가져옵니다. 그들이 삶을 보는 차원과 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와 다릅니다.
필자는 이러한 고민을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초월로의 상승과 삶의 도약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눈을 가지고 성서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성서가 다르게 보이고 새로운 언어로 사유함으로써 삶과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체험(Erleben)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어를 어떤 도구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도출되는 결과는 다릅니다. 언어의 신비는 마음이 바뀌게 하고 의식에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언어를 의도적으로 자꾸 다르게 사용하도록 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과 소리와 뜻,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를 철학자 한병철은 '휘발성'이라는 표현으로 짚어냈습니다. 억지로라도 가벼운 말, 경박한 몸짓, 부박한 생각, 경망한 발걸음, 무사유의 신앙에서 벗어나려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강요가 아닙니다. 나를 성찰하지 않으면 아무리 양적으로 많은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을 내성(內省, introspection)하지 못하면 초월(超越, transcendence)도 못하는 법입니다.
두 사람 다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중세신비주의 부정신학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는 근대 독일철학자 니체이고, 후자는 중세 설교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입니다. 두 사람의 언어가 결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언어는 대부분 아포리즘(aphorism)으로 구성되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현장의 언어, 그러나 쉽지 않은 설교 어투로 구성되었습니다.
아포리즘과 콘텍스트 속에서 직접 부딪힌 청중에게 구사하는 설교가의 언어는 같으면서 다른, 다르면서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니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들의 아포리즘이나 설교를 듣는 즉시 당장에 '아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어의 격상과 초월론적 해석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어렵다는 것은 그들의 콘텍스트와 우리의 콘텍스트가 달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행위가 언어의 깊이와 높이에 맞닿아 있어서 범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달리 의식의 상승을 가져옵니다. 그들이 삶을 보는 차원과 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와 다릅니다.
필자는 이러한 고민을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초월로의 상승과 삶의 도약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눈을 가지고 성서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성서가 다르게 보이고 새로운 언어로 사유함으로써 삶과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체험(Erleben)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어를 어떤 도구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도출되는 결과는 다릅니다. 언어의 신비는 마음이 바뀌게 하고 의식에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언어를 의도적으로 자꾸 다르게 사용하도록 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과 소리와 뜻,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를 철학자 한병철은 '휘발성'이라는 표현으로 짚어냈습니다. 억지로라도 가벼운 말, 경박한 몸짓, 부박한 생각, 경망한 발걸음, 무사유의 신앙에서 벗어나려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강요가 아닙니다. 나를 성찰하지 않으면 아무리 양적으로 많은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을 내성(內省, introspection)하지 못하면 초월(超越, transcendence)도 못하는 법입니다.
목차
목차
말을 열면서
종교적 현실언어의 종언과 종교경전의 해체적 해석
1장 종교의 순수한 시원을 향한 첫 걸음
1. 이방인을 위해 이방인이 된 존재, 사도 바울의 행복(엡 3,1-12) 23
2. 세례, 정신없는(영혼 없는) 삶이 깨어남(사 8,14~17) 28
3. 은총의 선물, 결코 맨망하지 않은(고전 12,1~11) 33
4. 카오스적인 신앙의 실재(고전 12,12~31a) 39
5. 사랑, 벗 지향적인 헌신(고전 13,1~13) 45
6. 복음, 그리스도의 나타남(고전 15,1~11) 50
7. 부활, 예수의 호흡을 나누는 것(고전 15,12~20) 56
8. 그리스도 부재(不在)의 불안(고전 15,35~38·42~50) 61
9. 무덤에서 피어오르는 파열의 향기(고전 15,51~58) 66
10. 단순한 일상 그러나 가볍지 않은 구원(롬 10,8~13) 71
2장 종교적 삶의 자리
1. 신앙의 모범은 신성한 외곬일까?(빌 3,17~4,1) 79
2. 신앙의 금기를 넘은 무지(고전 10,1~13) 84
3. 구원은 억측일까?(고후 5,16~21) 89
4. 신앙의 유전자와 아스케제(빌 3,4b~14) 94
5. 최악의 증인(빌 2,5~11) 100
6. 큰 이성의 부활(1고린 15,19~26) 106
7. 죽음은 깨어남이다!(계시 1,4~8) 112
8. 예수와 사는 방법(계시 5,11~14) 117
9. 죽음 이후의 나는 사랑이어야(계시 7,9~17) 122
10. 신앙, 이전과는 다른 해방의 족적(계시 21,1~6) 127
3장 종교적 언어와 삶의 지근(至近) 존재
1. 거룩한 공간[聖殿]의 여백(계시 21,10·22~22,5) 137
2. 목소리와 호명되기 위한 몸짓(계시 22,12~14·16~17·20~21) 142
3. 성령으로 놀이되는 삶(롬 8,14~17 행 2,1~21) 147
4. 시인들만이 꿈꿀 수 있는 신앙언어들(롬 5,1~5) 152
5. 믿음의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차별은 없습니다!(갈 3,23~29) 158
6. 거저 얻어진 자유는 없습니다!(갈 5,1·13~25) 163
7.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갈 6,1~16) 168
8. 복음, 아름다움 언어(골 1,1~14) 174
9. 신앙의 아르케(arche)(골 1,15~28) 178
4장 종교인의 언어적 구체성, 사랑과 환대
1. 신앙의 껍데기는 가라(골 2,6~19) 187
2. 그리스도인이라는 인간과 삶, 특수한가?(골 3,1~11) 192
3. 신앙의 고향이 없는 사람들(히 11,1~3·8~16) 197
4. 보통의 믿음만 있어도(히 11,29~12,2) 202
5. 신앙의 마음 공간(히 12,18~29) 208
6. 사랑의 지극한 표현, 환대(히 13,1~8·15~16) 213
7. 오직 하나님만을 소유하기를(몬 1,1~21) 218
8. 하나님의 자비는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딤전 1,12~17) 223
9. 기도는 하나님과 상의하는 것입니다!(딤전 2,1~7) 228
10. 많은 사랑을 소유하십시오!(계시 12,7~12) 233
5장 신과 삶의 일치, 그 실존의 지금 여기
1. 고뇌와 고독의 속의 하나님(딤후 1,1~14) 241
2. 하나님의 지금 여기(딤후 2,8~15) 246
3. 텅 빔의 부재(不在), 그 역설의 진리(딤후 3,14~4,5) 252
4. 세상은 말씀이 스며들어 잠들고(딤후 4,6~18) 258
5. 모든 삶의 받침대가 되시는 분(살후 1,1~12) 263
6. 종말론적 언어의 카코포니(살후 2,1~5 13~17) 268
7. 성실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세상의 일탈(살후 3,6~13) 273
8. 익숙한 신앙과 결별하는 법(골 1,11~20) 279
9.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것(롬 13,11~14) 284
10. 자신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롬 15,4~13) 288
11. 얄궂은 시간의 유혹(약 5,7~10) 294
12. 예수에게 어떤 색깔을 입히고 싶은가!(롬 1,1~7) 299
13. 아나키스트, 예수(히 2:10~18) 304
종교적 현실언어의 종언과 종교경전의 해체적 해석
1장 종교의 순수한 시원을 향한 첫 걸음
1. 이방인을 위해 이방인이 된 존재, 사도 바울의 행복(엡 3,1-12) 23
2. 세례, 정신없는(영혼 없는) 삶이 깨어남(사 8,14~17) 28
3. 은총의 선물, 결코 맨망하지 않은(고전 12,1~11) 33
4. 카오스적인 신앙의 실재(고전 12,12~31a) 39
5. 사랑, 벗 지향적인 헌신(고전 13,1~13) 45
6. 복음, 그리스도의 나타남(고전 15,1~11) 50
7. 부활, 예수의 호흡을 나누는 것(고전 15,12~20) 56
8. 그리스도 부재(不在)의 불안(고전 15,35~38·42~50) 61
9. 무덤에서 피어오르는 파열의 향기(고전 15,51~58) 66
10. 단순한 일상 그러나 가볍지 않은 구원(롬 10,8~13) 71
2장 종교적 삶의 자리
1. 신앙의 모범은 신성한 외곬일까?(빌 3,17~4,1) 79
2. 신앙의 금기를 넘은 무지(고전 10,1~13) 84
3. 구원은 억측일까?(고후 5,16~21) 89
4. 신앙의 유전자와 아스케제(빌 3,4b~14) 94
5. 최악의 증인(빌 2,5~11) 100
6. 큰 이성의 부활(1고린 15,19~26) 106
7. 죽음은 깨어남이다!(계시 1,4~8) 112
8. 예수와 사는 방법(계시 5,11~14) 117
9. 죽음 이후의 나는 사랑이어야(계시 7,9~17) 122
10. 신앙, 이전과는 다른 해방의 족적(계시 21,1~6) 127
3장 종교적 언어와 삶의 지근(至近) 존재
1. 거룩한 공간[聖殿]의 여백(계시 21,10·22~22,5) 137
2. 목소리와 호명되기 위한 몸짓(계시 22,12~14·16~17·20~21) 142
3. 성령으로 놀이되는 삶(롬 8,14~17 행 2,1~21) 147
4. 시인들만이 꿈꿀 수 있는 신앙언어들(롬 5,1~5) 152
5. 믿음의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차별은 없습니다!(갈 3,23~29) 158
6. 거저 얻어진 자유는 없습니다!(갈 5,1·13~25) 163
7.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갈 6,1~16) 168
8. 복음, 아름다움 언어(골 1,1~14) 174
9. 신앙의 아르케(arche)(골 1,15~28) 178
4장 종교인의 언어적 구체성, 사랑과 환대
1. 신앙의 껍데기는 가라(골 2,6~19) 187
2. 그리스도인이라는 인간과 삶, 특수한가?(골 3,1~11) 192
3. 신앙의 고향이 없는 사람들(히 11,1~3·8~16) 197
4. 보통의 믿음만 있어도(히 11,29~12,2) 202
5. 신앙의 마음 공간(히 12,18~29) 208
6. 사랑의 지극한 표현, 환대(히 13,1~8·15~16) 213
7. 오직 하나님만을 소유하기를(몬 1,1~21) 218
8. 하나님의 자비는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딤전 1,12~17) 223
9. 기도는 하나님과 상의하는 것입니다!(딤전 2,1~7) 228
10. 많은 사랑을 소유하십시오!(계시 12,7~12) 233
5장 신과 삶의 일치, 그 실존의 지금 여기
1. 고뇌와 고독의 속의 하나님(딤후 1,1~14) 241
2. 하나님의 지금 여기(딤후 2,8~15) 246
3. 텅 빔의 부재(不在), 그 역설의 진리(딤후 3,14~4,5) 252
4. 세상은 말씀이 스며들어 잠들고(딤후 4,6~18) 258
5. 모든 삶의 받침대가 되시는 분(살후 1,1~12) 263
6. 종말론적 언어의 카코포니(살후 2,1~5 13~17) 268
7. 성실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세상의 일탈(살후 3,6~13) 273
8. 익숙한 신앙과 결별하는 법(골 1,11~20) 279
9.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것(롬 13,11~14) 284
10. 자신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롬 15,4~13) 288
11. 얄궂은 시간의 유혹(약 5,7~10) 294
12. 예수에게 어떤 색깔을 입히고 싶은가!(롬 1,1~7) 299
13. 아나키스트, 예수(히 2:10~18) 304
저자
저자
김대식
1967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석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종교학 박사), 숭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철학박사)에서 공부한 후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서울신학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등에서 시간강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등에 출강하면서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학술위원장 및 안병욱아카데미 원장,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과 (사)함석헌기념사업회 부설 씨???사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씨???의 희망과 분노』(공저),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 성서해석 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식탁의 영성』(공저), 『망각의 해석학』(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생태영성의 이해』,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예수와 신앙 언어』,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그리스도교 감성학』, 『함석헌의 평화론』,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그리스도교 생태철학』, 『켜켜이 쌓인 시간을 풀어주는 사람』, 『교회 몰락의 시대에 신을 말한다』,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공저), 『아시아 평화공동체』(공저), 『인문학적 상상력과 종교』(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종교 간 고통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과 유동적 종교」,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생명미학적 정치」 등이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아나키즘과 현상학적 인식론 및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 해석, 기술철학과 정치미학, 해체구성적 종교이다.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씨???의 희망과 분노』(공저),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 성서해석 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식탁의 영성』(공저), 『망각의 해석학』(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생태영성의 이해』,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예수와 신앙 언어』,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그리스도교 감성학』, 『함석헌의 평화론』,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그리스도교 생태철학』, 『켜켜이 쌓인 시간을 풀어주는 사람』, 『교회 몰락의 시대에 신을 말한다』,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공저), 『아시아 평화공동체』(공저), 『인문학적 상상력과 종교』(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종교 간 고통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과 유동적 종교」,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생명미학적 정치」 등이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아나키즘과 현상학적 인식론 및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 해석, 기술철학과 정치미학, 해체구성적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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