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
이종희 장편소설
이종희 장편소설 『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는 국내의 대형서점을 통하여 유통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인터넷 색인을 통하여 제목만 클릭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모두 전자책으로도 제작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독자들까지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주도와 산간벽지, 전국의 국공립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오랜 친구인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가의 여덟 번째 신작 장편소설 《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를 출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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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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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
사람의 영토
사람의 영토는 원래 텅 비어있었다. 영토가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영토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에 그려질 여러 가지의 문양과 도형이 결정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영토에 정착한 거룩한 사람들의 문장紋章은 신비스러웠지만 일반에게는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6만년의 섬'이라고 이름 지어진 '사람의 영토'에서는 금이나 보석들을 모두 쓰레기로 보았고, 땅에 속한 것들에 그다지 집착 하지 않았다. '거룩한 생각'은 욕심과 욕정 그리고 교만과 같은 지상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웠고 그 결과로 물 위를 걷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지상의 것과, 영원한 생명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고 영원한 생명의 부력이 중력을 이길 때 사람들은 자유롭게 물 위를 걸어갔다.
한편 거주자들은 인간적인 약점도 가졌다는 표식으로, 시몬 베드로의 수탉 문양이 아로새겨진 문장과, 동족을 나타내는 물고기가 그려진 문장을 성루 여기저기에 드높이 내걸었다.
이곳은 동물이나 파충류와는 구별이 되는 사람이 살아가는 영토였다. '거룩한 섬'은 6만년 동안이나 외부와 단절된 채로 살아온 사람들만의 시간과 공간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고립된 성城'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외로운 시간들을 버티어 나갔으며, 그 결과로 사람의 영토는 조금씩 희망으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 희망은 누군가의 희생과 피로인한 것이었다고 모두들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또한 '자신들은 사랑받았으므로 잘 살아야한다'는 결의를 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베드로'를 상징하는, 두 개의 열쇠를 든 인물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것으로 미래를 밝게 예측하는 것이었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알려진 베드로라는 별명의 성주城主는 성문 앞에서 몇 가지 질문을 할 것이며, 이때 사람들은 당당하게 지나온 길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물위를 걷는 베드로는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어버렸고, 세상을 초월하는 영원성을 껴입는 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6만년의 섬
대학 새내기인 준석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 모임을 구상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같은 과의 동기생들, 선배들 그리고 동아리 친구들과 쉴 사이 없이 부대끼며 생활해온 준석으로서는 외롭다기보다는 오히려 곁에서 후후, 숨 쉬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가끔 조용히 혼자 지내기를 바랐지만 언제나 준석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럴 즈음 신문과 방송 르포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들' 시쳇말로 '혼밥족'에 대한 기사를 접하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라는 궁금증과 아울러 외로움의 실체와 맞부딪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인간들 속에서 번잡하게 살아온 준석이 이질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럼으로써 소요스러운 일상이 순화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저녁밥을 지어 먹는 모임, '6만년의 섬'을 개원하게 된 동기였다.
인도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노스센티널 섬은 6만 년 동안이나 외부와 접촉이 없이 고립된 채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며 고대 부족이 살아왔다. 그들은 교류를 원하는 인간들에게 극도로 배타적이며 호전적이어서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인도양에 위치한 이 고대의 격리된 섬은 오염되지 않은 고대문명의 신비가 살아 숨 쉰다. 고립적이며 그리하여 신비롭다는 것이 준석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준석은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줄곧 운영해온 수학교습소 건물의 일부를 개조하여 여러 명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제법 넓은 주방을 꾸미고 노스센티널 섬의 기원에서 착안하여 이 모임을 '6만년의 섬'이라 명명했다.
밥을 지어 주방의 가운데 놓인 기다란 직사각형의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간혹 서로 말 한마디 없이 밥만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억지로 말을 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조개처럼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고 딱딱한 껍질로 자아를 덮어 비밀을 유지하려고 했다. 6만년 동안이나 정신적인 은둔자로 살아온 자들이었다. 처음 얼마동안 섬은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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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밥 먹는 모임에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한 사람, 두 사람 빠져나가고, 모임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자 준석을 포함하여 모두 일곱 명만이 섬에 남게 되었다.
작은 사건이 있었다. 꿈이나 운세를 전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런 것들을 신봉하는 태도마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혐오해마지 않는 준석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섬을 개원한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꿈은 너무나 생생해서 한동안 준석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케파(Kepha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야, 잘 들어라, 너희 가운데 '사람의 아들'이 있다.
꿈속에서 말하는 이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눈부신 광채만이 느껴졌다. 그러나 눈곱만큼도 걱정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럴 경우 준석은 주저하지 않고 꿈을 완전하게 무시해버림으로써 단숨에 스스로를 이지적이며, 꿈이나 미신을 전혀 믿지 않는 지성인의 반열에 드높이 올려놓는 것이었다.
모임의 운영은 단순했다. 예산의 범위 내에서 당번을 정해 장을 보고,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처음 얼마동안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너무 말이 없었기 때문에, 준석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눌 이야깃거리도 준비하기로 했다.
― 코모도왕도마뱀에 대해 들어보았나요? 몸길이가 3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놈이에요, 몸무게도 성인 어른 만큼 되죠, 그리고 사납기까지 해서 사슴이나 다른 포유류까지 사냥을 해서 잡아먹죠.
준석이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준석을 쳐다보며 그 다음 이어질 설명을 기다렸다.
― 소름이 끼치는 일이지만, 사람이 표적이 될 경우 녀석의 포위망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아요, 녀석은 사자처럼 날쌔고 악어처럼 강하며 독사처럼 맹독을 지니고 있어요.
준석의 의도는 적중했다. 섬의 고독하고 위대한 인류들은 모두 준석에게 시선을 뺏기고 있었다.
― 파충류의 특성상 후각까지 발달했을 게 분명해요, 뱀처럼 말이에요. 멀리서도 사냥감의 냄새를 알아차린다면 치명적일 텐데요?
그렇게 처음 말문을 연 남자는 눈매가 매섭게 보이는 도치였다.
― 천적이 없겠어요, 도마뱀의 침 속에 맹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도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전직 산부인과 의사이며 현재는 호스트바에서 남성접대부로 일하는 희수가 좀 먼데 있는 냉이 무침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러나 이때 보라는 갑자기 식욕이 달아나고 말았다. 어젯밤 남자는 도마뱀처럼 보라의 여성기를 혀로 핥았으며, 침과 정액과 질속에서 흘러나온 유동액이 합쳐진 결과로 한동안 보라의 성기 주위가 끈적거리는 기분이었다.
― 맹독이라기보다는 침 속에는 병균이 득실거리는 거죠, 놈에게 물리면 온 몸으로 병균이 퍼져 살아나기 힘들어요.
남자가 입술로 보라의 클리토리스를 물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도마뱀처럼 길고 뾰족한 혀를 질속 깊숙이 찔러 넣으려 했던 것도 기억해냈다. 몸속으로 온갖 병균이 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도마뱀에게 물려 죽는 순간에도 오르가즘처럼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며 황홀할까를 생각했다. 보라는 남자의 혀가 꽃잎사귀를 애무하는 동안 두 다리를 도마뱀의 몸통처럼 만들어 남자의 목을 감았다. 남자의 코가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던 감촉도 되살아났다. 남자와의 정사는 분명 불쾌한 것이었지만 보라는 절정을 느꼈다.
― 우리의 '6만년의 섬'에는 코모도왕도마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우리는 밥만 먹을 게 아니라, 좀 더 떠들어 댈 필요가 있어요. 우리 모두 약속하기로 하죠,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비판만 앞세우지 말고 격려해주는 걸로.
준석의 이런 위로에도 불구하고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하이에나와 표범, 악어 그리고 독사를 합친 것 같은 코모도왕도마뱀이 항상 섬 주변에 득실거렸음을 상기했다. 그 공포를 피해 홀로 살아가기를 택했다. 사실 그들이 사람을 피했다기보다는 일상으로 사람을 만났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거나 열 수 없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았다. 한편으로 고립적인 상황에 있으면서도 고결한 인간의 족속으로, 탁월하고 남과 구별되는 행복을 누려왔다고 자위하는 것이었다. 섬의 거주자들은 비록 강한 근육과 이빨을 지니지 않았고 더 날랜 발을 가지지는 않았을지라도, 뛰어난 지능은 만물을 발아래 굴복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히 모순적이게도 이런 자만심과 배타성이 쉽게 '파충류'라고 잘못 간주해버린 타인을 매몰차게 대하는 것을 정당하게 보이도록 호도하고 말았다.
보라는 시계를 보았다. 잠복을 나갈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불황의 위기에도 사업을 접지 않은 룸살롱에는 일을 하겠다는 여성지원자가 많았다. 보라는 거물정치인과 뇌물수사망에 걸린 기업가들이 강남 모처의 룸살롱에 모인다는 정보를 접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스티스로 변장하여 잠복을 한다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모험적이고 다소 굴욕적인 과정을 거친 후라면, 범인을 검거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로 보였다. 보라의 예상은 적중하는 듯했다. 그들이 나누는 적나라한 이야기를 수사과장 보라가 직접 귀로 들었다.
밤을 함께 보낸 남자는 누구나 아는 국민 엄친아로서, 재벌인 아버지와 유력정치인 가문의 외동딸을 어머니로 둔 젊은 국회의원이었다. 호텔을 나서기 전 그는 보라에게 수표를 내밀었다. 보라가 그의 뺨을 두 차례나 후려 친 뒤에서야 그는 '이 여자가 누구인가?'라는 표정이 되었다.
― 돈은 필요 없어, 나도 섹스를 원했거든, 남자만 여자를 선택하고 간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마.
룸살롱 잠복근무는 강력계 여형사들의 몫이었지만 보라는 현장을 뛰는 것이 좀 더 적성에 맞는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격무에 시달린 몸을 이끌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오피스텔로 돌아가 혼자 저녁을 먹는 것보다는 '6만년의 섬'이 보라에게 탁월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룸살롱 호스티스라고 섬의 구성원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 대학을 졸업하면 호스티스는 그만 두려고 했어요, 지금은 순경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몇 차례 떨어지고 말았지만.
굳이 신분을 속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대학4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지금은 경찰에 몸을 담고 있다고 털어놓는 것이 오히려 섬 식구들을 불편하게 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보라는 다만 외롭지 않게 식사를 하고 싶었다.
식사를 끝내고 모두 함께 설거지를 했다. 섬의 규칙이었다. 인근의 마트에 가서 찬거리를 사오는 당번을 제외하고는 조리나 식사 그리고 심지어 설거지도 따로 당번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섬 안에서 '혼자서 하는 모든 행위'는 가장 지독한 죄에 속했다. 몇몇 이견異見을 보이던 식구들도 준석의 말에 수긍하며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혼자서 할 바에야 섬이 존재할 필요가 없지'라고 모두들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섬에서의 금기는 '참을 수 없이 고독한 모든 행위'였다.
한편 섬의 부족원 가운데 한사람인 도치는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생활했기에 혼자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보육원과 소년원 그리고 교도소까지, 옷깃이 스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늘 생명체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교류를 한다거나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색다르고 특별한 고독에 휩싸인 채로 살아왔다. 도치는 상자 안의, 날 수 없는 연이었다. 날아가고 싶어 하는 수많은 연들과 상자 속에 갇혀있었다. 공기는 희박했고 공간은 비좁았다. 그가 상자를 열고 나왔을 때 광활한 대지에는 푸른 공기가 넘실거렸지만 이미 날개가 부러지고 꼬리가 찢긴 연이라고 자책했다. 도치의 최근까지의 화두는 '아직도 내게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좀 지난 일로, 도치는 법대 강의실을 드나들며 도강을 일삼았다. 학생들은 도치를 복학생이라고 여겼다. 그가 어느 날 말없이 사라졌을 때 학생들은 도치가 가정형편으로 휴학을 했거나 고시를 준비하게 위해 절로 들어갔을 거라 지레 짐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치는 얼마 후, 출소를 하고 다시 그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안면을 익힌 학생들이 상급학년이 되고 고시에 합격했을 때 도치는 이미 그들에게 그다지 친밀하지는 않지만 아는 복학생으로 인식이 되어있었다. 도치는 국립대학을 졸업한 능력 있는 변호사로 행세하며 여러 명의 여자에게 결혼을 미끼로 사기를 쳤다. 죄로 에워싸여 있고 그로인해 외로운 그에게 '6만년의 섬'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에 다시 둘러앉았을 때 도치의 눈앞에는 수의囚衣가 아닌 형형 색깔의 화려한 여러 개의 서로 다른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질적인 것, 도치가 아닌 것, 죄가 아닌 것. 아마도 도덕적일 것만 같은 사람들의 문양이었다. 열 개도 넘는 죄의 목록이 도치의 과거였다. 그러나 도치의 마음에 내재한 어두운 죄의 빛깔들을 한 겹만 벗겨내면 천연색의 밝은 문양, 인간 본연의 지나치게 선하고 유약한 본성이 드러났는데, 실제로 그는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선과 악의 양면을 지녔을 뿐이었다. 마치 칼로 어두운 색을 벗겨내자 그 속에서 원래의 순박한 노랗고 파랗고 더욱이 빨간 원색의 밑그림이 나타난 것이나 같았다. 그리고 외롭게 혼자 밥을 먹어야만 했던 지난날을 극복하기 위해 섬에 모여든 구성원들 가운데 도치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신비스럽고 한편으로 사람을 끄는 모호한 매력이 있었지만, 그 밖에도 도치가 확신하는 것은 보라는 호스티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법대생들 사이에서도 천재로 소문이 났던 그녀를 도치는 어렴풋이나마 기억해냈다. 도치는 법대강의를 도강했을 뿐 아니라 그녀마저 훔쳐보았다. 그녀가 언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몸의 어느 부위가 가장 아름다운지 알고 있었다. 그가 알아낸 보라의 놀라운 신체적 특징이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나 스커트를 입었을 때 판판하게 펴진 스커트에 저항하며 그녀의 둔덕이 볼록하게 융기해 도드라져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발견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음란광적인 본성이 발휘된 특이하고 예리한 관찰의 결과였다. 그래서 도치의 뇌리에 보라는 여성기가 다소 발달한, 그러나 지나치게 도도하며 잘난체하는 여자로 각인되어있었다. 당시 법학과의 그 누구도 차석과도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 그녀의 적수는 아니었다.
도치는 그녀가 장관의 숨겨진 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장관에게 내연녀가 있었고 딸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다만 호사가들도 보라가 바로 그 물의를 일으킨 장관과 내연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사실을 모를 뿐이었다. 보라는 연수원과정을 마치고 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그녀의 아버지인 장관은 수뢰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도치 역시 강간 미수라는 명예롭지 않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너무나 억울한 죄목으로 형을 살고 있을 때였다. 장관은 도치가 저지른 사건의 담당 검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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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년의 섬' 족장 준석 베드로―섬의 구성원들은 준석을 모임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는 오늘 모임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듣기만 했던 나머지 대부분의 식구들에 대해 약간은 우려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 대화에 나서도록 할 수가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껏 보아온 준석 주위의 친구들은 '6만년의 섬' 식구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지나친 자존감으로 가득 차 교만하며, 자신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외로움과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이질감이 준석을 불안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6만년의 섬'을 공연히 시작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나자 소년이 뒷정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가스밸브가 잠겼는지 점검하고 주방과 교습소의 스위치를 모두 내려 불을 끄고 구석에 마련된 침실로 들어갔다. 그전에 소년은 준석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했다. 준석은 조만간 아파트를 정리하고 교습소가 있는 이 건물을 구입하는 문제를 아버지와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무 척이나 되는 배를 소유한 아버지는 같은 해 통영에서 유일하게 서울의 국립대학에 입학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로서는 사소한 배려였겠지만, 입학과 때를 맞추어 강남에 제법 넓은 아파트를 마련해주었다. 수학교습소는 세를 얻은 관계로 준석이 매달 꼬박꼬박 월세를 내야만 했다. 차라리 아파트를 매각하고 그 돈으로 지하에는 카페가 자리 잡고 있고 1층에는 교습소 그리고 2층과 3층에는 사무실이 입주해있는 이 건물을 매입할 수만 있다면, 준석이 '6만년의 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개포동의 아파트까지 출퇴근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도 있고, 건물의 월세 부담에서도 해방될 수 있겠다는 계산이 깔렸다. 무엇보다도 소년 엘(EL)이 교습소의 구석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위층에 주방을 넓혀서 앉히고 일부는 숙소로 꾸밀 계획까지 세웠다. 소년은 준석이 수학교습소를 시작했을 무렵 신문배달을 하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건물 앞을 청소를 하며 지내던 고아였다. 소년은 말없이 준석을 도와 교습소 바닥 청소를 했고, 그리고 복도에 쪼그려 잠을 잤다. 따지고 보면 소년이 준석보다 먼저 이 건물과 인연을 맺고 살아오고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년은 교습소에 딸린 화장실 청소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 주방에 들어와 저녁준비를 하는 준석을 도왔다. 그날부터 소년은 복도에서 자지 않고 교습소 한쪽에 칸을 막아 접이식 침대를 놓고 벽과 천정이 온전하게 갖추어진 공간에서 잠을 잤다. 준석이 소년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된 것이 '6만년의 섬'을 기획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였음을 준석이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다.
소년은 이제 겨우 열 살이었다. 소년과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명한 사실은 객지에서 저녁에 혼자 밥을 먹는 일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었고 3남매의 장남인 준석에게 혼자 살아가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았다. 소년이 그 잠깐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왔고, 그는 나이에 비해 의연하고 부지런하며 당당한 면이 있었다.
― 난 '사람의 아들'이에요. 보육원에서 지어준 '노아'라는 이름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어요. 노아는 내가 보낸 심부름꾼에 불과해요. 내 이름은 '엘(EL)'이죠,
소년은 엉뚱하거나 상식적이지 않았다. 마치 선문답을 하듯 난해한 경우가 많았다. 소년은 다섯 살에 보육원을 나와 껌팔이와 구걸을 하며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6만년의 섬에 오기 전까지 소년은 마땅히 쉴 곳도, 머물 곳도 없었다.
목차
목차
010 6만년의 섬
023 은화 물고기
033 사마리아 여인
044 바다로 간 포유류
050 빙하기 인간
055 사소한 민족
064 주머니에 넣은 겨울
077 오래된 책
093 샤론의 장미
097 결혼을 합시다
161 고등어 문장
165 엠마오로 가는 길
173 신의 휴일
189 졸혼
198 만찬을 위한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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