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아담
이종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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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명 서점들과 인터넷서점 그리고 ebook(전자책)으로 소개되고 있는 작가의 新刊長篇小說 <신의 나라 토마스>, <크리스마스 목가>, <잎새 시계>, <샤갈선생>, <네모 행성>, <푸른 말 호박등불>, <성자의 낙서> 그리고 <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를 사랑해주시는 독자들과 문우들의 격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상기 소설들은 국내의 대형서점을 통하여 유통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인터넷 색인을 통하여 제목만 클릭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모두 전자책으로도 제작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독자들까지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주도와 산간벽지, 전국의 국공립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성원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작가의 아홉 번째 신작 장편소설 <두 번째 아담>을 통하여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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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나의 생애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내가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고, 여럿 장정들이 모여 바짓가랑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내는 광경이다. 논에는 푸른 물결의 벼가 자라고 미루나무는 하늘을 찌르며 솟아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초임지에서 나를 낳았고, 주인집 누나가 나를 업고 마실을 나갔다. 그 후로 아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다. 또한 나는 행운아였다. 부부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실 때가지 45년을 교직에 계셨던 부모님 덕에 안정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분이 교직에 봉직했던 기간을 합치면 자그마치 90년이나 된다. 아버지 스테파노와 어머니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비바람과 폭풍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대기의 노래가 없이는 꽃은 춤출 수 없고 나무는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어버린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면 천국이다. 그리고 미워할 사람이 있다면 더 행복하다, 그 미움이 사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행은 사랑하거나 미워할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뿐이다.
작가에게는 오랜 친구인 독자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하는 남다른 기쁨이 있다. 그간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기억하고 격려해주는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은둔자가 아니었다. '솨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야 다듬어진다.'는 잠언처럼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사랑받은 만큼 사랑하고 또 용서하며 살았던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사랑의 부력이 악의 중력을 이길 때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 치열한 대결의 수평선을 딛고 서 있다. 가라앉을 것인가, 떠오를 것인가? 마침내 물 위를 걸을 것인가?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비바람과 폭풍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대기의 노래가 없이는 꽃은 춤출 수 없고 나무는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어버린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면 천국이다. 그리고 미워할 사람이 있다면 더 행복하다, 그 미움이 사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행은 사랑하거나 미워할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뿐이다.
작가에게는 오랜 친구인 독자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하는 남다른 기쁨이 있다. 그간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기억하고 격려해주는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은둔자가 아니었다. '솨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야 다듬어진다.'는 잠언처럼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사랑받은 만큼 사랑하고 또 용서하며 살았던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사랑의 부력이 악의 중력을 이길 때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 치열한 대결의 수평선을 딛고 서 있다. 가라앉을 것인가, 떠오를 것인가? 마침내 물 위를 걸을 것인가?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목차
목차
책 속의 작은 제목들
작가의 말
계약의 나무
행위예술
조각가 알퐁소
침묵의 방
붉은 여우 언덕
성전 허물기
연옥 성당
피터의 마지막 겨울
새로운 약속의 책
다섯 번째 부조
수도원장의 죽음
피아노 트리오
결혼하지 않는 자
앵무와 코이울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을까?
생명나무 정원
별지: 이종희 신간소설 목록
작가의 말
국내 유명 서점들과 인터넷서점 그리고 ebook(전자책)으로 소개되고 있는 작가의 新刊長篇小說 <신의 나라 토마스>, <크리스마스 목가>, <잎새 시계>, <샤갈선생>, <네모 행성>, <푸른 말 호박등불>, <성자의 낙서> 그리고 <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를 사랑해주시는 독자들과 문우들의 격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상기 소설들은 국내의 대형서점을 통하여 유통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인터넷 색인을 통하여 제목만 클릭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모두 전자책으로도 제작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독자들까지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주도와 산간벽지, 전국의 국공립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성원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작가의 아홉 번째 신작 장편소설 <두 번째 아담>을 통하여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내가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고, 여럿 장정들이 모여 바짓가랑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내는 광경이다. 논에는 푸른 물결의 벼가 자라고 미루나무는 하늘을 찌르며 솟아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초임지에서 나를 낳았고, 주인집 누나가 나를 업고 마실을 나갔다. 그 후로 아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다. 또한 나는 행운아였다. 부부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실 때가지 45년을 교직에 계셨던 부모님 덕에 안정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분이 교직에 봉직했던 기간을 합치면 자그마치 90년이나 된다. 아버지 스테파노와 어머니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비바람과 폭풍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대기의 노래가 없이는 꽃은 춤출 수 없고 나무는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어버린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면 천국이다. 그리고 미워할 사람이 있다면 더 행복하다, 그 미움이 사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행은 사랑하거나 미워할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뿐이다.
작가에게는 오랜 친구인 독자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하는 남다른 기쁨이 있다. 그간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기억하고 격려해주는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은둔자가 아니었다. '솨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야 다듬어진다.'는 잠언처럼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사랑받은 만큼 사랑하고 또 용서하며 살았던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사랑의 부력이 악의 중력을 이길 때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 치열한 대결의 수평선을 딛고 서 있다. 가라앉을 것인가, 떠오를 것인가? 마침내 물 위를 걸을 것인가?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사랑하는 크리스티나, 시몬 그리고 글라라에게
2017 성모승천 대축일에
두 번째 아담
부제 축혼행진곡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1 CORINTHIANS 15,45
계약의 나무
가시가 많고 구불구불 제멋대로 자라는 성질 때문에 목재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나무였다. 줄기에 물기가 적어 내구성이 강하고 나무못으로 사용될 정도로 재질이 무척 단단하다며 화훼농원 주인은 장황하게 세팀나무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봉수와 허영이 함께 거주하는 단독주택의 정원은 남향이었고 200평이 넘는 면적이었다. 정원 한쪽, 햇살이 잘 내려 쪼이는 곳에 세팀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 봉수를 향해 허영이 거실의 창문을 열고 멀리 있는 외야수에게 작전 지시를 하는 야구감독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무엇 때문인지 설명해 줄래요? 세팀나무가 우리 정원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봉수로서도 심고 있는 나무에 대해 설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선 묘목이 실제로 어떤 모양으로 커갈지 알 수 없었고, 나무가 충분히 자란 후에도 건조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조각목으로 쓰일 때까지 지켜보아야 허영의 물음에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봉수는 언제나 허영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두 사람이 부부로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일방의 통고로 계약결혼은 언제든 종료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봉수가 조각에 쓸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었으며, 왜 하필 세팀(Setim, 성궤의 나무, Biblia Vulgata 라틴 Exodus 25,10)나무여야만 하는 것인지, 허영이 오해하기에 좋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허영은 팔뚝에서 뽑았던 털도 그 자리에 꽂고야마는 성격이었다. 지금 봉수는 그녀의 팔뚝에 예기치 않은 이상한 털을 심으려는 중이었다. 사실 허영은 오늘 저녁으로 인스턴트 짜장면을 먹어도 괜찮겠느냐고 계약 남편 봉수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집에서는 거의 밥을 지어먹지 않는 편이었다. 아침은 간단한 시리얼로 대신하고 점심은 호감이 가는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고, 저녁도 가능하면 외식을 하는 쪽을 선호했는데, 다행히 봉수나 허영은 저녁식사를 밖에서 해결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했다. 퇴근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노동이 완전히 배제되어, 철저히 휴식만을 위한, 마치 연인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듯 함께 밀회를 즐기는 재충전의 시간으로 할애했다. 정원에는 나무와 꽃들이 나름의 영역을 차지하고, 인공연못에는 집 주인 허영과 봉수가 열대어, 잉어 그리고 심지어 민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몰아넣는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둥지를 튼 초우성의 물고기, 금붕어가 뛰어놀았다. 주말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보냈는데, 노른자위 휴식을 취한다는 허영과 봉수, 계약부부의 신조에 따른 것이었다. 이리하여 저택은 마치 금지된 사과나무를 따먹기 전의 에덴과도 같이 평화로웠다. 봉수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조각나무가 다 자라면 베어서 건조를 시킨 다음에 그 위에다 조각을 할 거야, 나무가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지.
봉수는 수건으로 연신 목 뒤에 흐른 땀을 닦으며 허영에게 말했다. 허영은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저녁을 인스턴트 짜장면으로 대충 때우자고 제안하려던 것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묘목이 자라서 목재로 쓰일 수 있을 만큼 긴 시간동안 계약결혼이 지속될 거라고 믿고 있는 걸까?'허영은 야릇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결혼계약조항 가운데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계약결혼의 기간은 종료가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바대로, 허영도 계약결혼이 영원히 무언가가 부족한 상태로 남을 것이어서 결코 완벽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봉수도 계약결혼이나 정식 절차를 거친 혼인을 비롯하여 광의의 모든 결혼제도가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라거나 행복에 도달하는데 조금의 도움을 줄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 두 사람이 어렵사리 계약결혼을 결심했을 때는, 허영으로서도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무모해 보이는 결혼생활을 지속해 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었다. 두 사람 모두 결혼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지만,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불행일 뿐이므로 다른 대안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차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라든지, '행복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완전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봉수는 허영이 모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하게 된 저녁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의도인 것을 알았다. 허영으로서는 봉수가 어떤 나무를 왜 심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봉수는 출장이나 야근으로 집을 비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퇴근 후에 봉수가 혼자서 하는 일은 모두 두 사람 사이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으로 매도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봉수에게'그러려면 왜 결혼한 거야?'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그런 점에서도 봉수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바로 결혼은'구속'일 거라는 예상이었다.
어느 듯 해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서산마루바위에 부딪친 후에 깨어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러자 허영과 봉수의 마당은 금방 멍든 것처럼 땅거미로 뒤덮였다.
―과일이랑 빵, 치즈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어요.
거실에서 조명불빛을 등진 채 그녀가 말했다.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허영은 갓이 있는 스탠드만 고집해서 집안 곳곳은 간접조명뿐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 조명을 받자 그녀의 몸의 윤곽에 흰 테두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치즈의 희거나 연한 노랑 빛깔 같았다. 허영에게서는 여러 가지 치즈냄새가 났다. 그리고 지나치게 세정을 한 날은 냄새가 사라진 대신에 너무 미끈거리는 감촉이 봉수의 남성을 소심하게 만들었는데, 그 후부터 봉수는 후각이 성욕을 일깨우는 구실을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치즈를 좀 남겨두지' 하는 마음이었다. 이런 기분이나 느낌마저도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던 사실이었다.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해보는 거야. 난 바이브레이터 대신 당신과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어.
허영이 계약결혼을 하고나서 봉수에게 말했었다. 봉수가 거실로 들어서자 허영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 참, 이제 생각났어요, 세팀나무 뿌리가 50m도 넘게 땅속으로 길게 뻗어나간다는 거예요, 건조한 기후에 살아남기 위해서겠지.
허영은 주스를 건네며 봉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말라 소금기가 비쳤다. 허영은 스키니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 마른 편이었지만 둔덕과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봉수의 시선이 허영의 아랫배를 훑어 내렸다.
―난 당신의 그런 눈길이 좋아요, 결혼 전에는 봐주는 사람조차 없었거든, 보았댔자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체념해버리거나 무심했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어, 난 봉수가 그런 눈으로 내 몸을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잖아? 지금부터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봉수는 유학시절에 같은 하숙집에 살았던 인도계 아메리칸 학우, 에이미 싱에게서 풍겨오던 이상한 냄새를 잊지 않았으며, 그것은 강한 최음제의 효과가 있었다. 너무나 오래 건조되어 떫어진, 진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체액의 냄새 같았다. 기억 속의 그녀는 거실이나 정원에서 맨발로 있기를 좋아했다. 에이미 싱은 말했었다.
―한국이 무덥다고? 그렇게 생각해? 내가 사는 인도의 여름은 섭씨 40도는 기본이었어. 봉수는 너무나 엄살이 심해. 불행하다고? 내가 보기엔 너무 행복해 보여. 그렇게 생각해도 될 정도야.
봉수는 짧지 않았던 유학시절 내내 그녀의 체취에 사로잡혔다. 에이미 싱은 변호사가 된 뒤 나이 많은 은행가와 결혼했다. 그는 에이미 싱을 지원해준 장학재단의 고문이었다. 계약 아내 허영에게는 결코 건조하지 않은 청량한 샘의 느낌이 묻어났다.
"물이 부족한 경우에만 그럴 거라고 봐, 충분하다면 뿌리를 너무 멀리까지 뻗어야할 필요는 없겠지."
봉수는 세팀나무로 화제를 돌렸다. 허영이 곁에 있음으로 봉수의 갈증은 줄어들었다. 그는 사막의 세팀나무처럼 너무나 멀리 뿌리를 뻗어 물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한편 허영은 봉수가 샤워하기 전에 그의 체취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은연중에 허영 자신이 봉수의 성적인 갈증을 비롯하여 외로움이나 고립에서 오는 인간적인 목마름을 씻어주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봉수가 약간은 목이 마르거나 불편한 상태에서 자신을 안아주기를 원했다.
봉수는 방금 심은 세팀나무가 충분히 자라 조각재로 사용되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계약결혼이 시효를 다하여 종료되는 일도 없을 거라는 확신과도 같았다. 완벽한 행복이란 원래 존재할 수가 없다는 데 두 사람은 말없이 동의를 했다. 행복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두 사람의 계약결혼의 조건은 그런 점에서 가장 굳건한 결속으로 보였다.
―근데 봉수씨는 무얼 조각하고 싶은 거야?
"아직 결정한 건 아니야, 하지만 여러 가지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어.
―그렇담, 결정하기 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거네요, 설마 나무가 다 자랄 만큼의?
봉수는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세팀나무에 조각 칼집을 남기기 전에 결혼생활에 행복을 느끼고 약속대로 허영과 헤어지는 일이 생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봉수의 생각을 듣지 못한 허영이 동문서답을 했다.
―어차피 당신에겐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어요,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물론 강요할 생각은 아니란 걸 알죠? 은밀한 것, 적나라한 것 어느 것을 원해요?
허영은 그렇게 말했지만 계약남편 봉수가 은밀한 쪽을 선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당신이 지금 갈증을 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몸이 불편할수록 정신은 허기가 지기 마련이지, 그래서 더욱 격렬해질 수밖에 없겠지, 난 다만 당신이 물을 갈구할 때 날 던져주는 호사를 누리려는 거야.)
허영은 거실의 있는 네 개의 조명 가운데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소등을 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 하나도 리모트컨트롤로 가장 낮은 조도로 조정을 했다. 그러자 거실은 작은 촛불하나만 켜진 것 같은 고즈넉한 공간으로 변했다.
―조각목은 쇠처럼 단단해야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해요, 팔만대장경 목판이 어떤 나무인지 알아요? 그리고 지금 조각목처럼 단단해야만 될 의무를 진 또 다른 것이 있다는 걸 알 테죠? 그러나 난 조각목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을 거예요, 잘 될지는 몰라요, 당신이 조금은 협조를 해야만 될 거니까.
허영은 그가 가졌다는 선택지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은 캐묻지 않기로 했다.
불안정한 것은 고착되지 않아서 언제나 설렘을 안겨다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계약결혼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심지어 깨어질 수 있는 가변성위에 놓여있음으로써 조심스럽고, 상황에 따라 관계는 발전하거나 퇴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허영은 봉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야만 했다. 그는 적나라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허영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그에게 드러내 보이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반대로 봉수도 허영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염두에 두어야했으며 그 결과로 그는 땀을 흘린 후에 샤워를 하지 않은 채 허영을 안아야 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시각보다 후각과 청각 그리고 살이 맞닿는 감촉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 외에도 언제나 서로를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좀 서두르기로 해요, 열시 전에는 끝내야 해요, 내일 컨퍼런스 준비를 하려면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몰라.
그녀는 오래 기다렸다는 말투였다. 조도가 낮아진 거실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만이 유령처럼 흐늘거렸다. 봉수는 이미 옷을 모두 벗어 던져버렸으며 파충류처럼 거실의 공기 중에 떠도는 허영의 냄새를 좇아 다가갔다. 허영은 보여주지도 보지도 않음으로써 성적인 판타지는 조금의 성공을 거둔 듯 보였다. 두 사람은 결코 침대에서 섹스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함께하는 일은 없었다. 별도의 방에서 각자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러나 그 밖의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은 예외적이며 예정된 적이 없는 새로운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궁극적 섹스의 과정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더한 희열을 느끼는 방법도 서슴지 않았다.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훈련된 개에게 먹이를 보여주고 참으라고 신호를 보내요, 그러면 개는 침을 흘리기 시작해,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얼마나 맛있을지를 상상하겠지, 개의 지능은 이때 최고조로 올라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실제로 먹는 것보다 더한 기대와 행복감에 빠질 수 있을까? 사육사는 마침내 먹이를 던져줄 테지만, 우린 좀 다를 수가 있어요,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잠드는 거야.
봉수는 식탁을 잡고 선 그녀를 뒤에서 안았으며 손으로는 허영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녀는 가끔 허리를 비틀거나 신음을 흘렸지만 참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우린 지금 머시멜로우 실험중이라는 걸 잊지 않았죠?
봉수는 목이 타는 갈증으로 신음하던 차였다. 그녀는 봉수의 페니스가 그녀의 문을 두드리려는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
―우리는 절제하는 능력을 테스트해 보는 거야, 머시멜로우를 보여주고, 정해진 시간만큼 먹지 않고 참을 수 있다면, 또 한 개의 머시멜로우를 추가로 더 주겠다는 약속을 해, 먹지 않고 자제할 수 있는 아이는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훨씬 높다는 거예요. 당신은 어쩔 거야?
봉수는 이미 그녀가 언급한 머시멜로우 실험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그녀의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가는 동작을 멈추었다.
―난 언제든 당신이 다시 원할 때 허락할 거예요. 지금보다는 조금 더 판타지가 강할지 몰라요. 아마 그럴 거예요.
봉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허영이 지쳐있을 새벽 시간에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허영은 서재에서 밤새워 컨퍼런스 준비를 할 것이 분명하다. 봉수가 유두를 건드리자 허영은 돌아서며 그의 어깨위로 팔을 감았다.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유두로 봉수의 가슴을 문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현재의 욕구를 억눌러 참는 대가로 더 큰 미래의 쾌감을 맛보려는 의도였지만, 그보다도 늘 되풀이되는 평범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허영이 봉수의 가슴에 키스했을 때 소금기가 느껴졌다. 뒤이어 두 사람은 깊은 키스를 했는데 그것은 머시멜로우 실험으로 현재의 욕구를 지연시킨 아쉬움과 미래의 쾌락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봉수의 상상 속에서는 세팀나무가 길고 긴 뿌리를 뻗었다. 욕구를 씻어내지 못한 아쉬움은 생각의 가지를 더 멀리 그리고 땅속 깊이 뻗어나가도록 부추겼다. 나무는 건조한 줄기를 가져서 쇠처럼 여물었고 반면 허영의 몸은 샘처럼 생기로 넘쳐났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봉수에게 허영은 신선하고 차가운 생명수로 여겨졌다.
허영이 봉수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돌아서 몇 발자국을 걸어 서재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봉수에게 다가와 포옹하며 말했다.
―내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다음번에 머시멜로우 하나를 더 받게 되어 있잖아?
그러나 그녀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머시멜로우 실험은 너무 잔인한 것 같아. 적어도 금요일 오후에는 말이야.
봉수의 말에 허영은 진정으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당장 두 사람에게 주어진 머시멜로우를 먹어치우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평범하지 않은 밤을 보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침대에까지 가지도 못하고 차가운 거실바닥에 뒹구는 지금의 상황마저도 이미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지 않았다. 봉수가 허영의 엉덩이 아래에 손바닥을 넣어 받치고 물을 찾아 더듬기 시작했다. 그의 페니스가 이내 세팀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뻗어나갔다. 허영은 고양이 비명을 질렀다. 사실 그들은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머시멜로우 실험에 빠져 섹스리스상태로 있었다.
잠시 후에 찬 공기가 두 사람을 환락의 잠에서 일으켜 깨웠다.
―쾌락과 행복을 구분하는 방법 알아?
허영의 물음에 봉수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허영이 스스로 질문에 대답했다.
―상쾌하고 개운한지, 아님 불쾌하고 후회스러운 기분인지로 가려내는 거야, 난 지금 어떨 거 같아?
허영은 봉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심해도 좋아, 행복에 가까워. 적어도 후회스럽거나 역겁다거나 불쾌하지는 않거든.
봉수는 섹스 후의 불쾌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을 때에는 한동안 후회가 기억하기도 싫은 사람처럼 머물렀다가 뉘엿뉘엿 느리게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봉수는 그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기분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명확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허영은 계약아내역할을 비교적 잘 수행해왔고 그기에 발맞추어 봉수도 계약남편으로서 결혼조건을 잘 지켜왔다.
―어쩌면 섹스는 동물의 게임일지도 몰라, 하지만 내 경우는 마음이 반드시 구분을 짓고 말아, 사랑이었는지 아닌지 말이야.
봉수도 그녀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를 한다는 신호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봉수는 인간이 생존만을 위해 너무 많은 정력을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먹고 자고 번식만 하다가 죽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제 두 사람이 더 이상 거실바닥에 누워있을 필요는 없었고 고개를 들었을 때 창으로 드넓은 정원이 군데군데 불빛을 받은 채 내려다보였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도망쳐 나온 아담과 하와처럼 그들은 선악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 있었으며, 정원과 거실을 구분 짓는 미닫이 창문턱을 경계로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류를 대표했다.
묘목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웃자라버린 세팀나무는 나름대로 정원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향후 조각목으로 행위·설치미술 그리고 조각과 회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미술과 광기를 넘나드는 봉수의 꿈을 이루어줄 것임을 예고했다. 그의 행위미술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단 한명의 관객인 허영이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행위예술의 특성상 묘목을 사오는 순간부터 퍼포먼스는 이미 시작이 되었다. 정원은 에덴이었으며 또한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반면 생각하기에 따라 정원의 경사는 골고다 언덕일 수도 있었으며 그 무엇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정원에는 상상만이 흘러 넘쳤으며 조각과 회화와 설치미술의 대가인 봉수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편 에덴에서 추방된 하와의 보속은 '불완전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허영은 또 다른 보속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출산과 양육이라는 과제를 떠안는 바보짓을 결코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으며, 선하지 않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고 여자를 사랑하지도 않을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지도 않을 것임을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허영은 상호 합의하에 결혼을 해지할 수 있는 계약아내를 선택했다. 종래의 규범적인 결혼제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근거로, 원래는 아담의 몫이었던 노역을 불합리하게도 하와의 후예인 허영이 이미 수행해오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현실적으로도 허영은 정신과 의사이며 교수로서 지나치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샤워할 거야?
봉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이 먼저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수증기가 피어올라 서로의 윤곽만이 보였다. 봉수가 허영에게 거품 칠을 시작하자 허영이 봉수에게 안겨왔다. 봉수가 허영의 등과 목 그리고 볼에 거품을 묻히는 동안 허영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며 가벼운 신음을 토했다. 봉수의 호흡이 거칠어졌고 이 때, 허영의 머리카락 몇 올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물줄기를 맞았다.
―당신의 손에 도대체 뭐가 있는 거야? 난 그냥 샤워를 하고 잠들기를 바랐는데 말이에요, 그 손이 닿으면 난 마법에 걸린 것 같단 말이야.
허영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책을 하는 것도 같았다. 허영은 손을 뻗어 봉수의 남성을 움켜쥐었다. 남성이 마치 주전자 꼭지처럼 하늘을 가리켰다. 봉수가 그녀의 등 뒤에서 허리를 안았다. 허영이 말했다.
―머시멜로우.
#
봉수와 허영이 계약결혼을 하고 한 지붕 아래 살게 되기 몇 해 전, 허영은 인턴 때에 헤어졌던 남자 친구 봉수를 진료예약환자명단에서 발견하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봉수는 예약을 할 때, 상담할 의사가 누구인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상담의사는 봉수가 미술대학 조교시절 헤어진 여자 친구 허영이었다. 허영이 아침에 헤어졌다 만난 사람처럼 먼저 입을 열었다.
―퍼포먼스가 지나쳤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아.
허영은 오래 숙성된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어?
봉수는 허영의 얼굴에 페인팅을 해서 누군지 알아 볼 수 없게 한 것이었지만, 신분을 감추고 싶었다면 왜 봉수 자신은 평소에 쓰고 다니던 안경마저 벗어 던진 채, 군중들 앞에 실오라기 하나 몸에 걸치지 않고 나섰는가 하는 것이었다. 허영이 물었다.
―우리는 함께 전라全裸가 되기로 했었어, 근데 왜 내 얼굴에만 가면을 그려 넣었던 거야?
허영의 물음에 봉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사람들은 얼굴만 가리면 치부는 드러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난 그런 이중적 성향을 표현하려던 거였어. 인간의 심리를 에둘러 나타내려고 했던 거야."
―이제야 알겠어, 넌 나까지 속였거나 실험의 오브제로 삼았어, 난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재료였을 뿐이었다는 걸 알았어. 그런데 그 퍼포먼스 덕분에 봉수 당신은 겸임교수 자리마저 잃고 말았잖아?
허영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봉수가 어색한 침묵의 공간을 채웠다.
"오히려 나로서는 행운이었을지도 모르지, 그 후로는 쭉 작품에만 매달렸으니까 말이야."
허영은 봉수가 결국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한동안 외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마저 감수한 행위예술 퍼포먼스가 만용이었다는 생각을 아직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절실했던 예술혼을 질책할 의도는 없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는 아주 잠깐 동안,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를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어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백주 대낮에 전라의 몸으로 광화문에 나타난 젊은 행위예술가와 얼굴에 페인팅 작업을 했을 뿐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허영의 행보에 주목했다. 사실 봉수의 퍼포먼스 주제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추방된 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체였다는 것에 흥미를 가진 듯 했고,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허영마저도 스스로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여성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퍼포먼스의 주제는 봉수가'허영의 얼굴에 페인팅'을 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봉수가 허영의 예약환자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허영이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봉수는 허영과의 행위예술 퍼포먼스와 이별 뒤에도 끊임없이 기이한 행위예술을 펼쳐보였고, 일반인들의 눈에는 거의 정신적 오작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설치와 행위예술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봉수는 대학의 교수였고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허영은 봉수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문과 방송을 넘나들며 인구에 회자가 되는 과거의 남자친구였다. 두 사람의 퍼포먼스 후에 사람들은 얼굴에 페인팅을 한 채, 봉수와 전라로 거리를 활보했던 여자가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 했다. 봉수는 연인 허영을 염려했고 허영의 신분을 결코 매스컴에 노출하지 않았다. 봉수는 자유를 누리며,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있는 종족의 하나였으며, 자립심으로 인해 우연을 가장하여 아무 죄 없는 신에게 연인을 대책 없이 내맡기지는 않았다. 봉수는 페인팅 얼굴 가면의 연인, 허영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환자로 다시 나타난 봉수에게 허영이 말했다.
―봉수 당신은 미쳤거나 미치는 과정에 있는 환자가 결코 아니야, 다만 그렇게 보일뿐이지, 내가 보증 할 수 있어,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
"얼마든지, 하지만 난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내가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변색이 되고 마침내 썩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냄새도 풍길 테지. 그 많은 생리대를 한데 모아 탑을 쌓은 의미가 뭐야? 이미 사용했던 생리대도 섞여있었어, 봉수가 공원에 설치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공공설치작품에 대한 말이야?
"난 생리대가 눈비를 맞고 썩고 부패하고 냄새를 풍기는 일련의 과정을 표현하려던 거였어, 물론 악취가 진동하겠지, 생명의 근원을 표현하려던 것이었어, 여성의 대표, 하와의 불편함과 희생이랄까, 인간들은 이런 하와의 수고에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해."
―가족들이 산책을 하는 공원의 설치예술작품으로 적당한 것이었을까?
"적당한 것이었는지는 고려하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전혀 일반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기를 바랐거나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거야."
허영은 봉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가 허영을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이제 세월도 어느 정도 흘러서, 봉수와 나체 퍼포먼스를 펼쳤던 가면 여성에 대한 일반의 호기심도 사라졌다. 그는 허영과 예전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의도로 허영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먼저 얘기해도 될까?
봉수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허영이 꾸밈없이 말했다.
―난 봉수와 헤어진 적이 없었어, 그러니 다시 시작한다는 말도 필요 없겠지.
퍼포먼스는 하나의 창조였으므로 그 일곱 째 날, 두 사람이 재회를 한 뒤에는 휴식과 충전이 필요했다.
허영도 얼굴만 드러내지 않고 가릴 수만 있다면 서슴지 않고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류로 진화한 것은 아닌지 봉수로서는 단정 할 수가 없었다. 퍼포먼스는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봉수는 노동을 해야만 했고 허영은 선하지 않은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겠다던 그간의 신념에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허영은 누구보다도 바쁘게 노동의 나날을 보내고 봉수가 아기를 낳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봉수가 허영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 한번 생각해 보았어? 결혼계약에 대해서 말이야.
허영으로서는 남자의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아내로 살아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결혼계약은 해볼 만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순간 헤어지기로도 약속했다. 결혼은 결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신념은 너무나 확고했고, 만일 그런 신념이 흔들린다면 그 순간은 판단력이 흐려졌거나 심신상실의 상태에 빠진 것이 분명하므로 즉시 비현실적인 환각의 상태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취지였다. 허영은 봉수에게 아내와 자녀를 부양하기 위한 노역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봉수도 허영에게 출산과 단 한사람, 봉수의 아내로만 살아가는 것을 강요하지 않을 것임을 제일 먼저 선언했다.
에덴의 그 알량한 과일나무 열매를 따먹은 보속으로서 주어졌던 벌칙들에 대하여 요즈음에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상징적 의미로 해석해서 신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했지만, 조상이 저지른 일까지 까마득한 후손들에게 뒤집어 씌워야겠느냐며 항변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사람이 아들'이 속죄양으로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쳐졌으므로 원죄는 이미 없어져 버렸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남자가 아기를 낳을 수 없음에도, 하와의 후예인 허영은 아담에게 보속으로 주어진 노동에까지 동참했다. 계약결혼에 대해 허영은 긍정적이었으며 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에 봉수에게도 아내를 양육할 책임을 지우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으므로 주저할 것은 없었다.
허영은 완전하지 않은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될 것으로 보였지만 그마저도 일방의 통고에 의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결혼계약조항을 통해서 어려움은 다소 해소되고 말았다.
책 속의 작은 제목들
작가의 말
계약의 나무
행위예술
조각가 알퐁소
침묵의 방
붉은 여우 언덕
성전 허물기
연옥 성당
피터의 마지막 겨울
새로운 약속의 책
다섯 번째 부조
수도원장의 죽음
피아노 트리오
결혼하지 않는 자
앵무와 코이울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을까?
생명나무 정원
별지: 이종희 신간소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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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국내 유명 서점들과 인터넷서점 그리고 ebook(전자책)으로 소개되고 있는 작가의 新刊長篇小說 <신의 나라 토마스>, <크리스마스 목가>, <잎새 시계>, <샤갈선생>, <네모 행성>, <푸른 말 호박등불>, <성자의 낙서> 그리고 <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를 사랑해주시는 독자들과 문우들의 격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상기 소설들은 국내의 대형서점을 통하여 유통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인터넷 색인을 통하여 제목만 클릭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모두 전자책으로도 제작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독자들까지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주도와 산간벽지, 전국의 국공립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성원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작가의 아홉 번째 신작 장편소설 <두 번째 아담>을 통하여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내가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고, 여럿 장정들이 모여 바짓가랑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내는 광경이다. 논에는 푸른 물결의 벼가 자라고 미루나무는 하늘을 찌르며 솟아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초임지에서 나를 낳았고, 주인집 누나가 나를 업고 마실을 나갔다. 그 후로 아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다. 또한 나는 행운아였다. 부부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실 때가지 45년을 교직에 계셨던 부모님 덕에 안정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분이 교직에 봉직했던 기간을 합치면 자그마치 90년이나 된다. 아버지 스테파노와 어머니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비바람과 폭풍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대기의 노래가 없이는 꽃은 춤출 수 없고 나무는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어버린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면 천국이다. 그리고 미워할 사람이 있다면 더 행복하다, 그 미움이 사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행은 사랑하거나 미워할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뿐이다.
작가에게는 오랜 친구인 독자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하는 남다른 기쁨이 있다. 그간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기억하고 격려해주는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은둔자가 아니었다. '솨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야 다듬어진다.'는 잠언처럼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사랑받은 만큼 사랑하고 또 용서하며 살았던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사랑의 부력이 악의 중력을 이길 때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 치열한 대결의 수평선을 딛고 서 있다. 가라앉을 것인가, 떠오를 것인가? 마침내 물 위를 걸을 것인가?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사랑하는 크리스티나, 시몬 그리고 글라라에게
2017 성모승천 대축일에
두 번째 아담
부제 축혼행진곡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1 CORINTHIANS 15,45
계약의 나무
가시가 많고 구불구불 제멋대로 자라는 성질 때문에 목재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나무였다. 줄기에 물기가 적어 내구성이 강하고 나무못으로 사용될 정도로 재질이 무척 단단하다며 화훼농원 주인은 장황하게 세팀나무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봉수와 허영이 함께 거주하는 단독주택의 정원은 남향이었고 200평이 넘는 면적이었다. 정원 한쪽, 햇살이 잘 내려 쪼이는 곳에 세팀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 봉수를 향해 허영이 거실의 창문을 열고 멀리 있는 외야수에게 작전 지시를 하는 야구감독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무엇 때문인지 설명해 줄래요? 세팀나무가 우리 정원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봉수로서도 심고 있는 나무에 대해 설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선 묘목이 실제로 어떤 모양으로 커갈지 알 수 없었고, 나무가 충분히 자란 후에도 건조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조각목으로 쓰일 때까지 지켜보아야 허영의 물음에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봉수는 언제나 허영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두 사람이 부부로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일방의 통고로 계약결혼은 언제든 종료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봉수가 조각에 쓸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었으며, 왜 하필 세팀(Setim, 성궤의 나무, Biblia Vulgata 라틴 Exodus 25,10)나무여야만 하는 것인지, 허영이 오해하기에 좋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허영은 팔뚝에서 뽑았던 털도 그 자리에 꽂고야마는 성격이었다. 지금 봉수는 그녀의 팔뚝에 예기치 않은 이상한 털을 심으려는 중이었다. 사실 허영은 오늘 저녁으로 인스턴트 짜장면을 먹어도 괜찮겠느냐고 계약 남편 봉수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집에서는 거의 밥을 지어먹지 않는 편이었다. 아침은 간단한 시리얼로 대신하고 점심은 호감이 가는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고, 저녁도 가능하면 외식을 하는 쪽을 선호했는데, 다행히 봉수나 허영은 저녁식사를 밖에서 해결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했다. 퇴근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노동이 완전히 배제되어, 철저히 휴식만을 위한, 마치 연인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듯 함께 밀회를 즐기는 재충전의 시간으로 할애했다. 정원에는 나무와 꽃들이 나름의 영역을 차지하고, 인공연못에는 집 주인 허영과 봉수가 열대어, 잉어 그리고 심지어 민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몰아넣는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둥지를 튼 초우성의 물고기, 금붕어가 뛰어놀았다. 주말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보냈는데, 노른자위 휴식을 취한다는 허영과 봉수, 계약부부의 신조에 따른 것이었다. 이리하여 저택은 마치 금지된 사과나무를 따먹기 전의 에덴과도 같이 평화로웠다. 봉수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조각나무가 다 자라면 베어서 건조를 시킨 다음에 그 위에다 조각을 할 거야, 나무가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지.
봉수는 수건으로 연신 목 뒤에 흐른 땀을 닦으며 허영에게 말했다. 허영은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저녁을 인스턴트 짜장면으로 대충 때우자고 제안하려던 것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묘목이 자라서 목재로 쓰일 수 있을 만큼 긴 시간동안 계약결혼이 지속될 거라고 믿고 있는 걸까?'허영은 야릇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결혼계약조항 가운데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계약결혼의 기간은 종료가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바대로, 허영도 계약결혼이 영원히 무언가가 부족한 상태로 남을 것이어서 결코 완벽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봉수도 계약결혼이나 정식 절차를 거친 혼인을 비롯하여 광의의 모든 결혼제도가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라거나 행복에 도달하는데 조금의 도움을 줄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 두 사람이 어렵사리 계약결혼을 결심했을 때는, 허영으로서도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무모해 보이는 결혼생활을 지속해 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었다. 두 사람 모두 결혼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지만,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불행일 뿐이므로 다른 대안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차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라든지, '행복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완전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봉수는 허영이 모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하게 된 저녁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의도인 것을 알았다. 허영으로서는 봉수가 어떤 나무를 왜 심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봉수는 출장이나 야근으로 집을 비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퇴근 후에 봉수가 혼자서 하는 일은 모두 두 사람 사이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으로 매도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봉수에게'그러려면 왜 결혼한 거야?'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그런 점에서도 봉수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바로 결혼은'구속'일 거라는 예상이었다.
어느 듯 해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서산마루바위에 부딪친 후에 깨어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러자 허영과 봉수의 마당은 금방 멍든 것처럼 땅거미로 뒤덮였다.
―과일이랑 빵, 치즈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어요.
거실에서 조명불빛을 등진 채 그녀가 말했다.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허영은 갓이 있는 스탠드만 고집해서 집안 곳곳은 간접조명뿐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 조명을 받자 그녀의 몸의 윤곽에 흰 테두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치즈의 희거나 연한 노랑 빛깔 같았다. 허영에게서는 여러 가지 치즈냄새가 났다. 그리고 지나치게 세정을 한 날은 냄새가 사라진 대신에 너무 미끈거리는 감촉이 봉수의 남성을 소심하게 만들었는데, 그 후부터 봉수는 후각이 성욕을 일깨우는 구실을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치즈를 좀 남겨두지' 하는 마음이었다. 이런 기분이나 느낌마저도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던 사실이었다.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해보는 거야. 난 바이브레이터 대신 당신과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어.
허영이 계약결혼을 하고나서 봉수에게 말했었다. 봉수가 거실로 들어서자 허영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 참, 이제 생각났어요, 세팀나무 뿌리가 50m도 넘게 땅속으로 길게 뻗어나간다는 거예요, 건조한 기후에 살아남기 위해서겠지.
허영은 주스를 건네며 봉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말라 소금기가 비쳤다. 허영은 스키니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 마른 편이었지만 둔덕과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봉수의 시선이 허영의 아랫배를 훑어 내렸다.
―난 당신의 그런 눈길이 좋아요, 결혼 전에는 봐주는 사람조차 없었거든, 보았댔자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체념해버리거나 무심했던 거겠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어, 난 봉수가 그런 눈으로 내 몸을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잖아? 지금부터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봉수는 유학시절에 같은 하숙집에 살았던 인도계 아메리칸 학우, 에이미 싱에게서 풍겨오던 이상한 냄새를 잊지 않았으며, 그것은 강한 최음제의 효과가 있었다. 너무나 오래 건조되어 떫어진, 진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체액의 냄새 같았다. 기억 속의 그녀는 거실이나 정원에서 맨발로 있기를 좋아했다. 에이미 싱은 말했었다.
―한국이 무덥다고? 그렇게 생각해? 내가 사는 인도의 여름은 섭씨 40도는 기본이었어. 봉수는 너무나 엄살이 심해. 불행하다고? 내가 보기엔 너무 행복해 보여. 그렇게 생각해도 될 정도야.
봉수는 짧지 않았던 유학시절 내내 그녀의 체취에 사로잡혔다. 에이미 싱은 변호사가 된 뒤 나이 많은 은행가와 결혼했다. 그는 에이미 싱을 지원해준 장학재단의 고문이었다. 계약 아내 허영에게는 결코 건조하지 않은 청량한 샘의 느낌이 묻어났다.
"물이 부족한 경우에만 그럴 거라고 봐, 충분하다면 뿌리를 너무 멀리까지 뻗어야할 필요는 없겠지."
봉수는 세팀나무로 화제를 돌렸다. 허영이 곁에 있음으로 봉수의 갈증은 줄어들었다. 그는 사막의 세팀나무처럼 너무나 멀리 뿌리를 뻗어 물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한편 허영은 봉수가 샤워하기 전에 그의 체취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은연중에 허영 자신이 봉수의 성적인 갈증을 비롯하여 외로움이나 고립에서 오는 인간적인 목마름을 씻어주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봉수가 약간은 목이 마르거나 불편한 상태에서 자신을 안아주기를 원했다.
봉수는 방금 심은 세팀나무가 충분히 자라 조각재로 사용되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계약결혼이 시효를 다하여 종료되는 일도 없을 거라는 확신과도 같았다. 완벽한 행복이란 원래 존재할 수가 없다는 데 두 사람은 말없이 동의를 했다. 행복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두 사람의 계약결혼의 조건은 그런 점에서 가장 굳건한 결속으로 보였다.
―근데 봉수씨는 무얼 조각하고 싶은 거야?
"아직 결정한 건 아니야, 하지만 여러 가지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어.
―그렇담, 결정하기 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거네요, 설마 나무가 다 자랄 만큼의?
봉수는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세팀나무에 조각 칼집을 남기기 전에 결혼생활에 행복을 느끼고 약속대로 허영과 헤어지는 일이 생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봉수의 생각을 듣지 못한 허영이 동문서답을 했다.
―어차피 당신에겐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어요,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물론 강요할 생각은 아니란 걸 알죠? 은밀한 것, 적나라한 것 어느 것을 원해요?
허영은 그렇게 말했지만 계약남편 봉수가 은밀한 쪽을 선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당신이 지금 갈증을 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몸이 불편할수록 정신은 허기가 지기 마련이지, 그래서 더욱 격렬해질 수밖에 없겠지, 난 다만 당신이 물을 갈구할 때 날 던져주는 호사를 누리려는 거야.)
허영은 거실의 있는 네 개의 조명 가운데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소등을 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 하나도 리모트컨트롤로 가장 낮은 조도로 조정을 했다. 그러자 거실은 작은 촛불하나만 켜진 것 같은 고즈넉한 공간으로 변했다.
―조각목은 쇠처럼 단단해야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해요, 팔만대장경 목판이 어떤 나무인지 알아요? 그리고 지금 조각목처럼 단단해야만 될 의무를 진 또 다른 것이 있다는 걸 알 테죠? 그러나 난 조각목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을 거예요, 잘 될지는 몰라요, 당신이 조금은 협조를 해야만 될 거니까.
허영은 그가 가졌다는 선택지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은 캐묻지 않기로 했다.
불안정한 것은 고착되지 않아서 언제나 설렘을 안겨다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계약결혼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심지어 깨어질 수 있는 가변성위에 놓여있음으로써 조심스럽고, 상황에 따라 관계는 발전하거나 퇴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허영은 봉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야만 했다. 그는 적나라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허영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그에게 드러내 보이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반대로 봉수도 허영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염두에 두어야했으며 그 결과로 그는 땀을 흘린 후에 샤워를 하지 않은 채 허영을 안아야 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시각보다 후각과 청각 그리고 살이 맞닿는 감촉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 외에도 언제나 서로를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좀 서두르기로 해요, 열시 전에는 끝내야 해요, 내일 컨퍼런스 준비를 하려면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몰라.
그녀는 오래 기다렸다는 말투였다. 조도가 낮아진 거실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만이 유령처럼 흐늘거렸다. 봉수는 이미 옷을 모두 벗어 던져버렸으며 파충류처럼 거실의 공기 중에 떠도는 허영의 냄새를 좇아 다가갔다. 허영은 보여주지도 보지도 않음으로써 성적인 판타지는 조금의 성공을 거둔 듯 보였다. 두 사람은 결코 침대에서 섹스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함께하는 일은 없었다. 별도의 방에서 각자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러나 그 밖의 집안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은 예외적이며 예정된 적이 없는 새로운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궁극적 섹스의 과정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더한 희열을 느끼는 방법도 서슴지 않았다.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훈련된 개에게 먹이를 보여주고 참으라고 신호를 보내요, 그러면 개는 침을 흘리기 시작해,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얼마나 맛있을지를 상상하겠지, 개의 지능은 이때 최고조로 올라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실제로 먹는 것보다 더한 기대와 행복감에 빠질 수 있을까? 사육사는 마침내 먹이를 던져줄 테지만, 우린 좀 다를 수가 있어요,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잠드는 거야.
봉수는 식탁을 잡고 선 그녀를 뒤에서 안았으며 손으로는 허영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녀는 가끔 허리를 비틀거나 신음을 흘렸지만 참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우린 지금 머시멜로우 실험중이라는 걸 잊지 않았죠?
봉수는 목이 타는 갈증으로 신음하던 차였다. 그녀는 봉수의 페니스가 그녀의 문을 두드리려는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
―우리는 절제하는 능력을 테스트해 보는 거야, 머시멜로우를 보여주고, 정해진 시간만큼 먹지 않고 참을 수 있다면, 또 한 개의 머시멜로우를 추가로 더 주겠다는 약속을 해, 먹지 않고 자제할 수 있는 아이는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훨씬 높다는 거예요. 당신은 어쩔 거야?
봉수는 이미 그녀가 언급한 머시멜로우 실험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그녀의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가는 동작을 멈추었다.
―난 언제든 당신이 다시 원할 때 허락할 거예요. 지금보다는 조금 더 판타지가 강할지 몰라요. 아마 그럴 거예요.
봉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허영이 지쳐있을 새벽 시간에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허영은 서재에서 밤새워 컨퍼런스 준비를 할 것이 분명하다. 봉수가 유두를 건드리자 허영은 돌아서며 그의 어깨위로 팔을 감았다.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유두로 봉수의 가슴을 문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현재의 욕구를 억눌러 참는 대가로 더 큰 미래의 쾌감을 맛보려는 의도였지만, 그보다도 늘 되풀이되는 평범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허영이 봉수의 가슴에 키스했을 때 소금기가 느껴졌다. 뒤이어 두 사람은 깊은 키스를 했는데 그것은 머시멜로우 실험으로 현재의 욕구를 지연시킨 아쉬움과 미래의 쾌락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봉수의 상상 속에서는 세팀나무가 길고 긴 뿌리를 뻗었다. 욕구를 씻어내지 못한 아쉬움은 생각의 가지를 더 멀리 그리고 땅속 깊이 뻗어나가도록 부추겼다. 나무는 건조한 줄기를 가져서 쇠처럼 여물었고 반면 허영의 몸은 샘처럼 생기로 넘쳐났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봉수에게 허영은 신선하고 차가운 생명수로 여겨졌다.
허영이 봉수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돌아서 몇 발자국을 걸어 서재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봉수에게 다가와 포옹하며 말했다.
―내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다음번에 머시멜로우 하나를 더 받게 되어 있잖아?
그러나 그녀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머시멜로우 실험은 너무 잔인한 것 같아. 적어도 금요일 오후에는 말이야.
봉수의 말에 허영은 진정으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당장 두 사람에게 주어진 머시멜로우를 먹어치우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평범하지 않은 밤을 보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침대에까지 가지도 못하고 차가운 거실바닥에 뒹구는 지금의 상황마저도 이미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지 않았다. 봉수가 허영의 엉덩이 아래에 손바닥을 넣어 받치고 물을 찾아 더듬기 시작했다. 그의 페니스가 이내 세팀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뻗어나갔다. 허영은 고양이 비명을 질렀다. 사실 그들은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머시멜로우 실험에 빠져 섹스리스상태로 있었다.
잠시 후에 찬 공기가 두 사람을 환락의 잠에서 일으켜 깨웠다.
―쾌락과 행복을 구분하는 방법 알아?
허영의 물음에 봉수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허영이 스스로 질문에 대답했다.
―상쾌하고 개운한지, 아님 불쾌하고 후회스러운 기분인지로 가려내는 거야, 난 지금 어떨 거 같아?
허영은 봉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심해도 좋아, 행복에 가까워. 적어도 후회스럽거나 역겁다거나 불쾌하지는 않거든.
봉수는 섹스 후의 불쾌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을 때에는 한동안 후회가 기억하기도 싫은 사람처럼 머물렀다가 뉘엿뉘엿 느리게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봉수는 그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기분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명확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허영은 계약아내역할을 비교적 잘 수행해왔고 그기에 발맞추어 봉수도 계약남편으로서 결혼조건을 잘 지켜왔다.
―어쩌면 섹스는 동물의 게임일지도 몰라, 하지만 내 경우는 마음이 반드시 구분을 짓고 말아, 사랑이었는지 아닌지 말이야.
봉수도 그녀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를 한다는 신호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봉수는 인간이 생존만을 위해 너무 많은 정력을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먹고 자고 번식만 하다가 죽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제 두 사람이 더 이상 거실바닥에 누워있을 필요는 없었고 고개를 들었을 때 창으로 드넓은 정원이 군데군데 불빛을 받은 채 내려다보였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도망쳐 나온 아담과 하와처럼 그들은 선악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 있었으며, 정원과 거실을 구분 짓는 미닫이 창문턱을 경계로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류를 대표했다.
묘목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웃자라버린 세팀나무는 나름대로 정원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향후 조각목으로 행위·설치미술 그리고 조각과 회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미술과 광기를 넘나드는 봉수의 꿈을 이루어줄 것임을 예고했다. 그의 행위미술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단 한명의 관객인 허영이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행위예술의 특성상 묘목을 사오는 순간부터 퍼포먼스는 이미 시작이 되었다. 정원은 에덴이었으며 또한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반면 생각하기에 따라 정원의 경사는 골고다 언덕일 수도 있었으며 그 무엇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정원에는 상상만이 흘러 넘쳤으며 조각과 회화와 설치미술의 대가인 봉수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편 에덴에서 추방된 하와의 보속은 '불완전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허영은 또 다른 보속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출산과 양육이라는 과제를 떠안는 바보짓을 결코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으며, 선하지 않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고 여자를 사랑하지도 않을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지도 않을 것임을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허영은 상호 합의하에 결혼을 해지할 수 있는 계약아내를 선택했다. 종래의 규범적인 결혼제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근거로, 원래는 아담의 몫이었던 노역을 불합리하게도 하와의 후예인 허영이 이미 수행해오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현실적으로도 허영은 정신과 의사이며 교수로서 지나치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샤워할 거야?
봉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이 먼저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수증기가 피어올라 서로의 윤곽만이 보였다. 봉수가 허영에게 거품 칠을 시작하자 허영이 봉수에게 안겨왔다. 봉수가 허영의 등과 목 그리고 볼에 거품을 묻히는 동안 허영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며 가벼운 신음을 토했다. 봉수의 호흡이 거칠어졌고 이 때, 허영의 머리카락 몇 올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물줄기를 맞았다.
―당신의 손에 도대체 뭐가 있는 거야? 난 그냥 샤워를 하고 잠들기를 바랐는데 말이에요, 그 손이 닿으면 난 마법에 걸린 것 같단 말이야.
허영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책을 하는 것도 같았다. 허영은 손을 뻗어 봉수의 남성을 움켜쥐었다. 남성이 마치 주전자 꼭지처럼 하늘을 가리켰다. 봉수가 그녀의 등 뒤에서 허리를 안았다. 허영이 말했다.
―머시멜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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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와 허영이 계약결혼을 하고 한 지붕 아래 살게 되기 몇 해 전, 허영은 인턴 때에 헤어졌던 남자 친구 봉수를 진료예약환자명단에서 발견하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봉수는 예약을 할 때, 상담할 의사가 누구인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상담의사는 봉수가 미술대학 조교시절 헤어진 여자 친구 허영이었다. 허영이 아침에 헤어졌다 만난 사람처럼 먼저 입을 열었다.
―퍼포먼스가 지나쳤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아.
허영은 오래 숙성된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어?
봉수는 허영의 얼굴에 페인팅을 해서 누군지 알아 볼 수 없게 한 것이었지만, 신분을 감추고 싶었다면 왜 봉수 자신은 평소에 쓰고 다니던 안경마저 벗어 던진 채, 군중들 앞에 실오라기 하나 몸에 걸치지 않고 나섰는가 하는 것이었다. 허영이 물었다.
―우리는 함께 전라全裸가 되기로 했었어, 근데 왜 내 얼굴에만 가면을 그려 넣었던 거야?
허영의 물음에 봉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사람들은 얼굴만 가리면 치부는 드러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난 그런 이중적 성향을 표현하려던 거였어. 인간의 심리를 에둘러 나타내려고 했던 거야."
―이제야 알겠어, 넌 나까지 속였거나 실험의 오브제로 삼았어, 난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재료였을 뿐이었다는 걸 알았어. 그런데 그 퍼포먼스 덕분에 봉수 당신은 겸임교수 자리마저 잃고 말았잖아?
허영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봉수가 어색한 침묵의 공간을 채웠다.
"오히려 나로서는 행운이었을지도 모르지, 그 후로는 쭉 작품에만 매달렸으니까 말이야."
허영은 봉수가 결국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한동안 외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마저 감수한 행위예술 퍼포먼스가 만용이었다는 생각을 아직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절실했던 예술혼을 질책할 의도는 없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는 아주 잠깐 동안,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를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어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백주 대낮에 전라의 몸으로 광화문에 나타난 젊은 행위예술가와 얼굴에 페인팅 작업을 했을 뿐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허영의 행보에 주목했다. 사실 봉수의 퍼포먼스 주제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추방된 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체였다는 것에 흥미를 가진 듯 했고,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허영마저도 스스로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여성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퍼포먼스의 주제는 봉수가'허영의 얼굴에 페인팅'을 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봉수가 허영의 예약환자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허영이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봉수는 허영과의 행위예술 퍼포먼스와 이별 뒤에도 끊임없이 기이한 행위예술을 펼쳐보였고, 일반인들의 눈에는 거의 정신적 오작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설치와 행위예술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봉수는 대학의 교수였고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허영은 봉수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문과 방송을 넘나들며 인구에 회자가 되는 과거의 남자친구였다. 두 사람의 퍼포먼스 후에 사람들은 얼굴에 페인팅을 한 채, 봉수와 전라로 거리를 활보했던 여자가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 했다. 봉수는 연인 허영을 염려했고 허영의 신분을 결코 매스컴에 노출하지 않았다. 봉수는 자유를 누리며,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있는 종족의 하나였으며, 자립심으로 인해 우연을 가장하여 아무 죄 없는 신에게 연인을 대책 없이 내맡기지는 않았다. 봉수는 페인팅 얼굴 가면의 연인, 허영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환자로 다시 나타난 봉수에게 허영이 말했다.
―봉수 당신은 미쳤거나 미치는 과정에 있는 환자가 결코 아니야, 다만 그렇게 보일뿐이지, 내가 보증 할 수 있어,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
"얼마든지, 하지만 난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내가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변색이 되고 마침내 썩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냄새도 풍길 테지. 그 많은 생리대를 한데 모아 탑을 쌓은 의미가 뭐야? 이미 사용했던 생리대도 섞여있었어, 봉수가 공원에 설치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공공설치작품에 대한 말이야?
"난 생리대가 눈비를 맞고 썩고 부패하고 냄새를 풍기는 일련의 과정을 표현하려던 거였어, 물론 악취가 진동하겠지, 생명의 근원을 표현하려던 것이었어, 여성의 대표, 하와의 불편함과 희생이랄까, 인간들은 이런 하와의 수고에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해."
―가족들이 산책을 하는 공원의 설치예술작품으로 적당한 것이었을까?
"적당한 것이었는지는 고려하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전혀 일반적이거나 규범적이지 않기를 바랐거나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거야."
허영은 봉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가 허영을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이제 세월도 어느 정도 흘러서, 봉수와 나체 퍼포먼스를 펼쳤던 가면 여성에 대한 일반의 호기심도 사라졌다. 그는 허영과 예전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의도로 허영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먼저 얘기해도 될까?
봉수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허영이 꾸밈없이 말했다.
―난 봉수와 헤어진 적이 없었어, 그러니 다시 시작한다는 말도 필요 없겠지.
퍼포먼스는 하나의 창조였으므로 그 일곱 째 날, 두 사람이 재회를 한 뒤에는 휴식과 충전이 필요했다.
허영도 얼굴만 드러내지 않고 가릴 수만 있다면 서슴지 않고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류로 진화한 것은 아닌지 봉수로서는 단정 할 수가 없었다. 퍼포먼스는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봉수는 노동을 해야만 했고 허영은 선하지 않은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겠다던 그간의 신념에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허영은 누구보다도 바쁘게 노동의 나날을 보내고 봉수가 아기를 낳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봉수가 허영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 한번 생각해 보았어? 결혼계약에 대해서 말이야.
허영으로서는 남자의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아내로 살아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결혼계약은 해볼 만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순간 헤어지기로도 약속했다. 결혼은 결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신념은 너무나 확고했고, 만일 그런 신념이 흔들린다면 그 순간은 판단력이 흐려졌거나 심신상실의 상태에 빠진 것이 분명하므로 즉시 비현실적인 환각의 상태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취지였다. 허영은 봉수에게 아내와 자녀를 부양하기 위한 노역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봉수도 허영에게 출산과 단 한사람, 봉수의 아내로만 살아가는 것을 강요하지 않을 것임을 제일 먼저 선언했다.
에덴의 그 알량한 과일나무 열매를 따먹은 보속으로서 주어졌던 벌칙들에 대하여 요즈음에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상징적 의미로 해석해서 신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했지만, 조상이 저지른 일까지 까마득한 후손들에게 뒤집어 씌워야겠느냐며 항변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사람이 아들'이 속죄양으로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쳐졌으므로 원죄는 이미 없어져 버렸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남자가 아기를 낳을 수 없음에도, 하와의 후예인 허영은 아담에게 보속으로 주어진 노동에까지 동참했다. 계약결혼에 대해 허영은 긍정적이었으며 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에 봉수에게도 아내를 양육할 책임을 지우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으므로 주저할 것은 없었다.
허영은 완전하지 않은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될 것으로 보였지만 그마저도 일방의 통고에 의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결혼계약조항을 통해서 어려움은 다소 해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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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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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이종희 신간소설 목록
저자
저자
이종희
저자 이종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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