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뼈를 보았을 뿐
이종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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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명 서점들과 국공립도서관, 인터넷서점을 통하여 소개되고 있고 전자책으로도 읽혀지고 있는 新刊長篇小說 <신의 나라 토마스>, <크리스마스 목가>, <잎새 시계>, <샤갈선생>, <네모 행성>, <푸른 말 호박등불>, <성자의 낙서>, <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 <두 번째 아담> 그리고 <공원 교향악단의 부활>을 사랑해주시는 독자들과 문우들의 격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작가의 열한 번째 장편소설 <큰 뼈를 보았을 뿐>으로 새롭게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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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단테는 『신곡』 (지옥의 문)에서 '나를 거쳐 가는 자는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라고 적고 있다. 희망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인지?
우리 인간들은 모두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지구'라는 학교의 동창생들이다. 인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름다운 지구행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졸업이 영원한 마지막이 될 것인지 또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인지는, 단테가 노래한 '희망'이 그 순간 우리에게 있는가에 달려있다. 나는 지구학교의 동창생 모두가 매순간순간 그리고 언제까지나 기대와 희망 속에 살아가기를 원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신을 완전히 알지도,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한다. 다만 신비의 숲이 있었다.
나는 소설가라는 기성복에 나의 몸을 맞추어 넣었다. 비교적 만족한다, 세상에 내걸린 모든 옷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편한 옷이었다. 나에게는 헐렁하고 고독한 자유가 있다. 그리고 공감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보낸다. 새롭게 집필을 시작 할 때마다 습작이 아닌 완주를 기원하지만, 나는 절반의 성취에 만족한 채, 또 다시 다음 항해를 기약하곤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나는 항구에 잠시 기항할 뿐 그 항구에 영원히 귀속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늘도 힘을 내어 나의 마음 속 전지전능한 제독에게 타전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열한 번째 편지를 부쳤습니다.
[책속으로 추가]
감수성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노숙자 그 누구라도 자신과 입장을 바꾸어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감수성이 가진 재산을 모두 내어 준다고 한들 무슨 대수이겠으며, 생명을 단 하루라도 더 연장 할 수만 있다면, 현재 그들의 초라한 처지나 모습도, 나아가 그 어떤 악마적 제안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억만장자이며 영화제작자인 감수성이 한갓 노숙자인 허상의 처지를 그토록 부러워한다는 것을 허상이 꿈엔들 알 수가 있었을까?
감수성이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노숙자 허상은 예술대학의 지하 푸드 코트에서 풍겨 나오는 구수한 빵 냄새가 코에 스며들자 신음하듯 말했다.
"배가 고파, 속이 너무나 쓰려오는 군."
며칠 전, 허상은 빵 대신 위스키를 사서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데생모델료로 받은 돈을 몽땅 털어 술을 사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는 번번이 이렇게 후회를 하는 것이었지만, 돈이 생기면 허상 박사는 우선적으로 위스키를 구입했다. 그는 무의식중에 외투 안주머니에 꽂혀있던 위스키 병을 꺼내서 입에까지 가져갔다가 꾹 눌러 참았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허상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수입원인 미술대학 누드 드로잉 모델자리만은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위스키 병을 꺼내서 입에 대었다가 흠칫 놀라며 다시 낡은 외투 안주머니에 꽂는 광경을 병원의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던 감수성 감독이 말했다.
"그는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어, 술도 마실 수가 있지,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어! 돈이 많아도 나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고 단지 링거를 맞을 뿐이야. 젠장, 링거액이 온통 위스키라면 좋으련만."
이제 노숙자, 허상은 감수성의 부러움을 뒤로 한 채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허상이 예술대학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최근 감수성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으며 그것은 온통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에 죄 없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었다. 감수성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진통제의 기운이 떨어지는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감수성의 얼굴은 점점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몸은 말라갔다. 그러나 이런 외모의 변화에 못지않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우울증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갉아먹고 있었다.
감수성의 담당의사, 닥터 최면이 회진을 할 시간이었다. 최면 박사가 했던 말이 감수성의 귓전에 울렸다.
"신은 축구경기의 규칙을 정해주고는 인간들에게 인생이라는 축구경기를 뛰게 하는 거예요. 저마다 최선을 다하겠지요."
그는 또 감수성의 눈을 보며 말했다.
"공정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한 사람만을 특별히 도와줄 수는 없어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는 겁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중요하니까요, 인간은 결코 신의 마리오네트가 아니라는 거죠,"
바로 며칠 전이었고, 감수성은 '그는 왜 이다지도 쌀쌀맞고 차가운가?'라고 생각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 그에게 감수성이 이런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신이 정해준 축구경기의 규칙은 대단히 중요하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규칙들로 인해 신이 인간을 방치하거나 섭리하지 않는다는 오해는 받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당신이 인생이라는 축구경기에 선수로 참가하여 시합을 벌이는 중에 혹시라도 경기의 진행에 대한 의문이나 회의가 생겼을 때에는 그 규칙들을 꼼꼼히 적어둔 약속의 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하지만 경기도중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경우에도, 경기규칙을 정해준 이는 그냥 바라보기만 할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나는 단지 그것이 불만이라는 겁니다."
최면 박사는 세상에 불치의 병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사로서 자신의 입장이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 감수성과의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감수성이 보기에 그는 출간된 지 오래된 약속의 책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 꾸준히 설득하려는 것이겠지만, 그런 말이 감수성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죄 없는 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은 단지 불합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과 고통의 한가운데 빠져버린 자가 바로 감수성 자신이었다. 그 결과 감수성은 절망으로 흠뻑 젖었고 회한과 고통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감수성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기의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최면 박사의 진료실, 그의 의자 바로 뒤 벽에 걸려있어서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것이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처지에서 감사하라'(데살로니카1서, 5,16∼18). 그러나 그것이 감수성에게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인지, 정말로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감수성은 주치의 최면 박사의 권고를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폐질환의 전문의인 그가 주제넘게도 인간의 정신마저 치료하려는 것인가?' 감수성이 이렇게 반감을 가지는 배경에는 닥터 최면이 결국 감수성을 살려낼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강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최면이 얄미웠다. '최면 박사의 능력으로는 감수성을 살려낼 수 없으니 스스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살아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감수성은 이렇게 마음속 한가득 불만을 품었다. 감수성은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은 채 절룩거리며 그라운드를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감수성은 신이 마지막으로 선의를 베풀 듯 그에게 준 추가연장시간을 뛰고 있었다. 그가 병에서 회복될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 그 순간, 정규시간은 이미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 시시각각 경기의 마지막을 알리는 최후의 호각소리가 울릴 시각이 목을 조이듯 숨 막히게 다가오고 있었다.
감수성은 최면 박사가 회진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병원과 인접한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감수성은 이때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멈추었고 공간은 낯이 설었다. 그는 휠체어를 병실의 복도에 그대로 놓아둔 채 비틀거리며 승강기까지 걸어갔고 마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자처럼 승강기에 올랐다. 승강기의 문은 '블랙홀의 문'처럼 소리 없이 열렸다. 잠시 뒤, 승강기가 1층에 도착하자 그는 블랙홀의 이면을 통하여 다른 차원으로 나가는 사람처럼 병원의 출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병원과 도서관을 경계 짓는 담장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이 좁은 문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4차원의 또 다른 경계였다.
같은 시각, 미술대학의 실습모델인 노숙자 허상이 소묘실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학생들이 손으로는 바삐 화구를 챙기면서도 눈으로 허상을 맞이했다. 노숙자 허상은 대기실에서 이미 탈의를 하고 알몸위에 바바리만 걸친 상태였다. 실기학점을 취득하기위해 학생들은 실습에 매달렸다. 허상의 경우는 다른 모델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학생들은 그가 저명한 양자물리학자라는 것과, 비록 미쳐버렸다는 이유로 학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데생을 하는 동안 그에게서 돈을 주고도 들을 수 없는 유익한 물리학 강의를 덤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노숙자 허상 박사가 자세를 잡고 앉자 학생가운데 한 사람인 신비가 보온병에 넣어두어 아직도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우유를 그에게 권했다. 이런 행동은 양자물리학이나 천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부탁이었으며, 학생들은 데생과 아울러 그의 물리학 강의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신비는 허상의 얼굴 윤곽이 뚜렷한 점이 데생을 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허상이 너무나 여윈 탓도 있었지만 원래부터 그는 광대뼈가 솟아오르고 눈은 움푹 들어가서 비록 태생적으로는 한국인이었지만 서양인의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갈비뼈가 앙상해서 학생들 사이에서 '미스터 해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졌다. 신비는 종합예술대학의 미술단과대학 과대표로서 드로잉 실습모델을 선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허상 박사는 신비의 친구인 이미지의 아파트에 간혹 머무는 자이기도 했다. 허상은 스티븐 호킹 박사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아이비리그 출신, 우물 안 개구리였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예술작업을 좋아하나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이에 신비는 회화뿐만 아니라 변호사가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법학도 너무나 좋아하는 분야라고 스스로에게 주문(呪文)을 걸었다. 신비는 돈벌이가 안 되는 천직(天職)인 화가를 계속 하기위해서 로스쿨에 진학하려는 것이었다.
크로키 데생 최강의 모델, 허상이 앉은 자세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독배를 들기 직전의 소크라테스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신비는 허상 박사가 무엇 때문에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굳이 마다하고 노숙자가 되었는지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허상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어요, 그게 뭔가요? 아마도 좀 더 주의 깊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 여겨지는데, 데생을 하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으니 나무랄 생각은 아니야. 하지만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나는,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허상의 이야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인 원자는 실제로는 입자가 아닌 단지 파동이므로 인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은 허구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고, 원자의 구성요소의 하나인 전자는 입자처럼 행동하며 인간들의 눈을 속이지, 하지만 그건 단지 파동에 불과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사물은 실제로는 없는 거야, 단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말이야."
학생들은 반신반의하는 쪽과,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실습에만 열중하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졌다. 누군가가 물었다.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의식하며 지켜보고 있을 동안은 입자, 즉, 물질의 알갱이인 척 하다가 지켜보지 않으면 이내 파동으로 변해버린다는 거지."
신비의 의식 속에서 허상의 언어는 들렸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신비가 데생에 집중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신비가 주의를 기울여 무언가를 듣거나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 순간, 실제로도 물체가 파동으로 변해 사라져버렸다는 것인가? 하지만 허상 박사는 조현병력을 가진 자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이 듣건 말건 강의를 계속했다.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는 태양계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원자는 태양 같은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행성 같은 전자들로 구성되지, 하지만 문제는 이거야, 한 개의 원자를 축구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원자핵은 하프라인 중심에 놓인 축구공이고 전자는 거대한 축구돔구장의 바깥 저 멀리에 떠도는 먼지정도라고 할까, 결국 한 개의 원자는 너무나 성긴, 텅 빈 구조를 하고 있어. 더욱이 전자는 너무나 작아서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될 정도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말아. 세상이 파동이 아닌 입자, 즉, 물질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헐렁하게 비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신비의 머릿속도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신비는 허상 박사의 현재 처지나 모습에 대해 같은 한국인으로서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 주어진다면 허상을 물리학과 교수이며 과학기술원 종신회원의 위치로 되돌려 놓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꾸었다. 초라한 순례자 같은 허상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안타까운 몰골이었다. 인간 허상을 형상화한 신비의 인체 데생도 거의 완성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나이에 비해 굵고 깊게 패인 주름, 얼굴을 뒤덮은 수염과 근육들은 역동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완성한 그림에 신비는 비교적 만족했다. 신비가 화구를 챙겨서 일어나려는 순간, 허상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이동은 환상이야, SF영화나 판타지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그러니 무리하지 않기를 바라."
허상이 들려준 말이었다. 그는 신비의 마음마저 읽었던 것인가? 허상을 현재의 처지에서 원래 그의 자리로 순간이동을 시키기에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의 개수와 정보는 너무나 방대하다. 신비로서는 그를 순간이동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보다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진학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남의 불행은 정작 신비의 당면한 과제에 쉽게 떠밀려버리는 것이었다.
데생 실습이 끝난 시간은 밤 열시 경이었다. 추위는 매서웠다. 11월이라고는 해도 새벽에는 영하10도를 오르내린다. 허상 박사는 이럴 경우, 미리 보아둔 지하철 역사의 구석진 자리나 온기가 남아있는 예술대학의 빈 강의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허상은 예술대학을 나왔다.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길을 자전거를 끌며 걸어갔다. 자전거는 그의 이동식 주택이나 다름이 없었고, 자전거의 안장과 짐받이를 완전히 점령한 두 개의 마분지 상자 안에는 당장 입을 옷가지들과 접시와 포크 등의 주방기구들이 담겨 있었다.
며칠 전, 낮잠을 청하고 있던 허상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감수성이라고 소개했다. 허상이 도서관의 벤치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을 때였고 그 사내가 이상한 제안을 했을 때, 허상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감수성이라는 자는 병색이 완연했고 희망이라고는 실낱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오히려 노숙자에 불과한 허상보다 더 불쌍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기어들어가는 쉰 음성이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요, 물론, 거절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강요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었으며 환자복 위에 스웨터를 걸쳤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자 스웨터의 팔이 힘없이 흔들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떨렸다.
"우리는 마치 서로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각자의 운명을 바꾸어보자는 겁니다. 물론 어려운 것이겠지요! 나는 다만 당신의 희망, 적어도 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희망을 가져보려는 겁니다. 난 희망이 없어요. 죽을 운명이니 말입니다. 내가 살아날 희망이 있는, 노숙자가 되었다는 기쁨을 누려보려는 거지요."
감수성은 이미 허상의 허락이나 승낙에 무관하게 순간이동을 결심한 것 같았다. 설사 허상이 거절을 한다고 해도 그는 벤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그 누구와도 기꺼이 운명교환을 시도할 사람으로 비쳤다.
"당신은 나의 희망을 사고, 그 다음 나에게는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우리는 주고받을 무언가가 필요하겠군요."
허상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가 허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감수성, 당신이 내가 될 수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계실 테죠?"
"물론 그렇죠, 하지만 나는 착각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려는 거예요. 나는 죽을 운명의 부자에서 가난하지만 건강한 노숙자가 되었다는 최면에 빠지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얻게 되는 건 마음의 위안인가요?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죽을 텐데요?" "희망이죠, 비록 거짓 희망일지라도 살아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싶은 겁니다. 이제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세요."
"나는 이제 당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나라에서 당신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잠깐 내 눈을 의심했을 뿐이죠. 당신은 위대한 감수성이 틀림없군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돈이나 작가이며 영화제작자라는 직위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어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지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지루하고 판에 박힌 연구소를 나온 뒤에는 무한의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제게 좀 더 친절할 수는 없나요?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당신이 은인이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지 묻는 겁니다."
허상이 대답을 하지 않자, 감수성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감수성의 순간이동의 신념은 너무나 확고해보였다. 감수성은 그렇게 생명으로 걸어 나왔다가 목숨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허상은 감수성이 힘없이 돌아서기 전에 남겼던 말에 주목했다.
"나는 저명한 물리학자인 허상 박사, 당신을 본적이 있어요, 내 영화<별이 될 때까지>의 시사회자리였나요? 당신은 내가 부자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이 양자물리학 연구소를 개설하고 평생토록 신나게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을 정도의 재원을 마련해 드리겠어요. 500불이면 충분하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노숙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나에게 양도하는 거예요. 당신이 버리게 되는 건 일종의 방종적인 자유뿐이며,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물리학자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가 있어요."
감수성이 남긴 마지막 말은 허상에게 혜성의 꼬리 같은 긴 여운을 남겼다. 예술대학을 벗어난 허상이 감수성을 생각하며 시간과 공간으로 짠 그물 같은 보도 위를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허상의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허상이 중학교 때 가보았던 한국의 고모네 집 앞에는 저수지 연못이 있었다. 허상이 그 고인 물을 가리켜 '호수'라고 하자 사람들은 웃었다. 한겨울인데도 저수지에는 두껍게 얼음이 얼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그 물렁물렁한 얼음을 '고무얼음'이라고 불렸다. 엷게 언 그 얼음판 위를 조심조심 걸어갈 때면 파파팟, 얼음의 살이 트는 소리가 나며 얼음판은 고무처럼 꿀렁거렸다. 그 커다란 유리 수조 같은 저수지 연못 속에서 여러 가지 신비한 물풀들과 이름 모를 물고기와 벌레들이 군락을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저수지는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을 남겼다. 여름철마다 물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여럿 죽었다. 그리고 죽은 영혼은 물귀신이 되어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당긴다고 했다. 어느 해 겨울에는 갓 부임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 숨구멍에 들어갔다. 그는 총각이었다. 허상이 디디고선 시간과 공간도 살얼음판이었다. 허상이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는 파파밧, 그 살이 트며 깨어지려했다. 꽁꽁 얼어붙어 단단하고 절대적인 얼음 위를 지쳐나가듯 살 수만은 없는 인생은 고무얼음처럼 상대적이며 출렁거렸다. 우주공간도 유동적이기는 매 한가지였다. 초신성의 폭발이 있은 다음, 그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출렁거리며 절대성을 상실하고 만다. 허상은 절대적이라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였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었으며 그에게 세상은 '없는 것'이었다.
허상이 추억여행을 하며 걸어가는 동안, 한 달이면 적어도 두 서너 번꼴로 신세를 지는 이미지의 아파트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아파트의 가구들마다 네모나게 토막으로 잘라진 얼음 같은 빛들과 길 양편에 띄엄띄엄 서있는 가로등 빛들이 무언의 재즈 음악을 연주했다. 그 음악은 분명 살아있으며 허상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회색의 콘크리트 아파트는 좀 커다란 닭장처럼 보였지만 허상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게 아파트가 하모니카를 닮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허상의 초라한 처지가, 작가로서의 명예를 한손에 거머쥐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제작자로서도 성공을 거둔 부호인 감수성마저도 부러워하는 희망차고 찬란한 은총이었는지 곰씹어 보는 것이었다. 감수성, 그는 마침내 허상에게 눈물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허상의 마음은 이미 감수성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허상은 원자나 분자 등의 미시세계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아메리카의 양자물리학연구소의 수석연구원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조현병동에 입원한 환자였다가 또 한 번의 변신으로 노숙자의 처지가 되었다. 그가 시립도서관의 벤치 근처를 배회하기 바로 전, 그는 인접한 종합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당시 조현병동의 모든 인간들의 교수였으며 또한 그 스스로도 조현병자였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조현병동의 특실에서 시립도서관의 벤치로 순간이동을 하고 말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허상은 신이 존재하는 것이 여러모로 인간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되었으며, 빅뱅이 창조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작용에 의해 저절로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할 나름대로의 근거를 찾고 싶었고, 허상 스스로 유신론자이고 싶었다. 다만 지금까지도 신의 존재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그는 어쩔 수없이 자신을 무신론자로 분류했다. 허상은 전자슬릿시험에 참여했고 물질의 기본적인 알갱이,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가 입자이며 동시에 파동이라는 점에 공감한 나머지 '허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원자의 구성요소인 전자는 관찰자가 있을 때는 입자이지만 관찰자가 없을 때는 파동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구경기의 타자가 날아오는 공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는 공이지만, 다른 곳을 바라볼 때에는 야구공은 물질이 아닌 파장으로 변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 동안, 노숙자 허상 박사는 어느 사이 이미지의 아파트 현관 앞까지 왔고 잠시 그 곳에 서 있었다. 허상은 언제나 이미지에게 잠시라도 신세를 지는 대신, 자유를 잃게 될 것이 두려웠다. 허상은 잘 알지 못하는 신에게 의탁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모든 걱정과 번민을 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단순히 고민을 맡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 순종하겠다는 서약이기도 했다.
허상은 아파트의 입구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다운타운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 등의 주방기구들은 자전거가 인도의 툭 튀어나온 블록을 밟고 지나갈 때나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 덜그럭, 소리를 냈다. 그는 거북의 등껍질처럼 바이올린 케이스도 언제나 등에 둘러메고 다녔다. 허상은 쪽잠이라도 청해볼 요량으로 거의 매일 들리다시피 하는 24시간 커피숍을 향해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외투 안주머니에 위스키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허상의 입에 가득 침이 고였다. 이럴 때면 허상은 마음속으로 스무 번을 센다. 마치 섹스의 절정에서 사정을 참는 행위나 같았다. 항문이 여성의 질보다 조이는 힘이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성의 질에 대한 데이터를 단 한 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어금니 턱이 아려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바로 그 순간, 위스키를 재빨리 꺼내어 병째로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자 알싸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사정을 한 자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섹스 파트너는 언제나 남자였다. 안 주머니에서 반쯤 먹고 남겨두었던 소시지도 꺼내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미지의 노숙자 쉼터인 아파트에서는 술을 절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구속이야말로 자유분방한 허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술기운으로 피로가 가시고 기분이 좋아진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힘든 줄도 모르고 발로 박자를 맞추며 걸어가는 것이었다. 달과 하늘천정이 그와 함께 춤을 추었다. 땅이 고무얼음처럼 꿀렁거렸다. 찌지직, 찌직, 파팟 파바밧, 고무얼음은 갈라졌다. 자전거 페달이 허상의 뒤뚱거리는 발길에 차일 때마다 소스라쳐 놀라며 철커덕 철커덕, 헛바퀴를 돌았다. 도시의 불빛이 꼬리를 흔들며 다시 그를 반겼다. 커피숍 입구에 다다르자 허상은 체인으로 자전거 바퀴를 두서너 번 칭칭 감은 다음 자물쇠로 단단히 채웠다. 안으로 들어간 허상이 커피숍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옷을 여러 겹 껴입고 가방이나 짐을 잔뜩 옆자리에 쌓아둔 남자 몇이 테이블에 엎드리거나 비스듬히 의자에 누운 채로 잠들어있었다. 그들은 커피숍의 화장실에서 이빨을 닦고 세수를 하고 홀의 의자로 돌아가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밤에 커피숍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그들을 내쫓지 않았다. 종업원들은 그들 역시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허상의 생각 속에서, 테이블과 의자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며 단지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지는 것에 불과했다. 물질이 저절로 생겨나 파동과 입자로 탈바꿈해가며 인간들을 현혹했다. 한편으로 물질은 마치 현존하는 것 인양 인간의 물욕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이에 허상은 세상을 지배하는 입자이자 파동이며 사기꾼인 물질에 반기를 드높이 쳐들기로 작정한 자였다. 허상에게 감수성의 재화는 탐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배가 고프다거나 춥다는 등의 불편함만 없다면, 허상은 이런 귀찮은 것들을 아예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고 싶었다.
허상은 커피숍의 의자에 상체만 대고 누웠다. 낡은 구두를 신은 그의 발은 여전히 대지의 한 점에 닿아있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지구'라는 학교의 동창생들이다. 인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름다운 지구행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졸업이 영원한 마지막이 될 것인지 또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인지는, 단테가 노래한 '희망'이 그 순간 우리에게 있는가에 달려있다. 나는 지구학교의 동창생 모두가 매순간순간 그리고 언제까지나 기대와 희망 속에 살아가기를 원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신을 완전히 알지도,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한다. 다만 신비의 숲이 있었다.
나는 소설가라는 기성복에 나의 몸을 맞추어 넣었다. 비교적 만족한다, 세상에 내걸린 모든 옷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편한 옷이었다. 나에게는 헐렁하고 고독한 자유가 있다. 그리고 공감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보낸다. 새롭게 집필을 시작 할 때마다 습작이 아닌 완주를 기원하지만, 나는 절반의 성취에 만족한 채, 또 다시 다음 항해를 기약하곤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나는 항구에 잠시 기항할 뿐 그 항구에 영원히 귀속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늘도 힘을 내어 나의 마음 속 전지전능한 제독에게 타전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열한 번째 편지를 부쳤습니다.
[책속으로 추가]
감수성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노숙자 그 누구라도 자신과 입장을 바꾸어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감수성이 가진 재산을 모두 내어 준다고 한들 무슨 대수이겠으며, 생명을 단 하루라도 더 연장 할 수만 있다면, 현재 그들의 초라한 처지나 모습도, 나아가 그 어떤 악마적 제안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억만장자이며 영화제작자인 감수성이 한갓 노숙자인 허상의 처지를 그토록 부러워한다는 것을 허상이 꿈엔들 알 수가 있었을까?
감수성이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노숙자 허상은 예술대학의 지하 푸드 코트에서 풍겨 나오는 구수한 빵 냄새가 코에 스며들자 신음하듯 말했다.
"배가 고파, 속이 너무나 쓰려오는 군."
며칠 전, 허상은 빵 대신 위스키를 사서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데생모델료로 받은 돈을 몽땅 털어 술을 사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는 번번이 이렇게 후회를 하는 것이었지만, 돈이 생기면 허상 박사는 우선적으로 위스키를 구입했다. 그는 무의식중에 외투 안주머니에 꽂혀있던 위스키 병을 꺼내서 입에까지 가져갔다가 꾹 눌러 참았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허상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수입원인 미술대학 누드 드로잉 모델자리만은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위스키 병을 꺼내서 입에 대었다가 흠칫 놀라며 다시 낡은 외투 안주머니에 꽂는 광경을 병원의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던 감수성 감독이 말했다.
"그는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어, 술도 마실 수가 있지,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어! 돈이 많아도 나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고 단지 링거를 맞을 뿐이야. 젠장, 링거액이 온통 위스키라면 좋으련만."
이제 노숙자, 허상은 감수성의 부러움을 뒤로 한 채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허상이 예술대학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최근 감수성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으며 그것은 온통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에 죄 없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었다. 감수성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진통제의 기운이 떨어지는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감수성의 얼굴은 점점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몸은 말라갔다. 그러나 이런 외모의 변화에 못지않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우울증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갉아먹고 있었다.
감수성의 담당의사, 닥터 최면이 회진을 할 시간이었다. 최면 박사가 했던 말이 감수성의 귓전에 울렸다.
"신은 축구경기의 규칙을 정해주고는 인간들에게 인생이라는 축구경기를 뛰게 하는 거예요. 저마다 최선을 다하겠지요."
그는 또 감수성의 눈을 보며 말했다.
"공정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한 사람만을 특별히 도와줄 수는 없어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는 겁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중요하니까요, 인간은 결코 신의 마리오네트가 아니라는 거죠,"
바로 며칠 전이었고, 감수성은 '그는 왜 이다지도 쌀쌀맞고 차가운가?'라고 생각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 그에게 감수성이 이런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신이 정해준 축구경기의 규칙은 대단히 중요하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규칙들로 인해 신이 인간을 방치하거나 섭리하지 않는다는 오해는 받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당신이 인생이라는 축구경기에 선수로 참가하여 시합을 벌이는 중에 혹시라도 경기의 진행에 대한 의문이나 회의가 생겼을 때에는 그 규칙들을 꼼꼼히 적어둔 약속의 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하지만 경기도중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경우에도, 경기규칙을 정해준 이는 그냥 바라보기만 할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나는 단지 그것이 불만이라는 겁니다."
최면 박사는 세상에 불치의 병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사로서 자신의 입장이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 감수성과의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감수성이 보기에 그는 출간된 지 오래된 약속의 책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 꾸준히 설득하려는 것이겠지만, 그런 말이 감수성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죄 없는 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은 단지 불합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과 고통의 한가운데 빠져버린 자가 바로 감수성 자신이었다. 그 결과 감수성은 절망으로 흠뻑 젖었고 회한과 고통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감수성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기의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최면 박사의 진료실, 그의 의자 바로 뒤 벽에 걸려있어서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것이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처지에서 감사하라'(데살로니카1서, 5,16∼18). 그러나 그것이 감수성에게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인지, 정말로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감수성은 주치의 최면 박사의 권고를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폐질환의 전문의인 그가 주제넘게도 인간의 정신마저 치료하려는 것인가?' 감수성이 이렇게 반감을 가지는 배경에는 닥터 최면이 결국 감수성을 살려낼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강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최면이 얄미웠다. '최면 박사의 능력으로는 감수성을 살려낼 수 없으니 스스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살아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감수성은 이렇게 마음속 한가득 불만을 품었다. 감수성은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은 채 절룩거리며 그라운드를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감수성은 신이 마지막으로 선의를 베풀 듯 그에게 준 추가연장시간을 뛰고 있었다. 그가 병에서 회복될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 그 순간, 정규시간은 이미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 시시각각 경기의 마지막을 알리는 최후의 호각소리가 울릴 시각이 목을 조이듯 숨 막히게 다가오고 있었다.
감수성은 최면 박사가 회진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병원과 인접한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감수성은 이때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멈추었고 공간은 낯이 설었다. 그는 휠체어를 병실의 복도에 그대로 놓아둔 채 비틀거리며 승강기까지 걸어갔고 마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자처럼 승강기에 올랐다. 승강기의 문은 '블랙홀의 문'처럼 소리 없이 열렸다. 잠시 뒤, 승강기가 1층에 도착하자 그는 블랙홀의 이면을 통하여 다른 차원으로 나가는 사람처럼 병원의 출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병원과 도서관을 경계 짓는 담장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이 좁은 문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4차원의 또 다른 경계였다.
같은 시각, 미술대학의 실습모델인 노숙자 허상이 소묘실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학생들이 손으로는 바삐 화구를 챙기면서도 눈으로 허상을 맞이했다. 노숙자 허상은 대기실에서 이미 탈의를 하고 알몸위에 바바리만 걸친 상태였다. 실기학점을 취득하기위해 학생들은 실습에 매달렸다. 허상의 경우는 다른 모델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학생들은 그가 저명한 양자물리학자라는 것과, 비록 미쳐버렸다는 이유로 학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데생을 하는 동안 그에게서 돈을 주고도 들을 수 없는 유익한 물리학 강의를 덤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노숙자 허상 박사가 자세를 잡고 앉자 학생가운데 한 사람인 신비가 보온병에 넣어두어 아직도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우유를 그에게 권했다. 이런 행동은 양자물리학이나 천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부탁이었으며, 학생들은 데생과 아울러 그의 물리학 강의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신비는 허상의 얼굴 윤곽이 뚜렷한 점이 데생을 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허상이 너무나 여윈 탓도 있었지만 원래부터 그는 광대뼈가 솟아오르고 눈은 움푹 들어가서 비록 태생적으로는 한국인이었지만 서양인의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갈비뼈가 앙상해서 학생들 사이에서 '미스터 해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졌다. 신비는 종합예술대학의 미술단과대학 과대표로서 드로잉 실습모델을 선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허상 박사는 신비의 친구인 이미지의 아파트에 간혹 머무는 자이기도 했다. 허상은 스티븐 호킹 박사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아이비리그 출신, 우물 안 개구리였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예술작업을 좋아하나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이에 신비는 회화뿐만 아니라 변호사가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법학도 너무나 좋아하는 분야라고 스스로에게 주문(呪文)을 걸었다. 신비는 돈벌이가 안 되는 천직(天職)인 화가를 계속 하기위해서 로스쿨에 진학하려는 것이었다.
크로키 데생 최강의 모델, 허상이 앉은 자세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독배를 들기 직전의 소크라테스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신비는 허상 박사가 무엇 때문에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굳이 마다하고 노숙자가 되었는지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허상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어요, 그게 뭔가요? 아마도 좀 더 주의 깊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 여겨지는데, 데생을 하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으니 나무랄 생각은 아니야. 하지만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나는,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허상의 이야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인 원자는 실제로는 입자가 아닌 단지 파동이므로 인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은 허구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고, 원자의 구성요소의 하나인 전자는 입자처럼 행동하며 인간들의 눈을 속이지, 하지만 그건 단지 파동에 불과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사물은 실제로는 없는 거야, 단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말이야."
학생들은 반신반의하는 쪽과,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실습에만 열중하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졌다. 누군가가 물었다.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의식하며 지켜보고 있을 동안은 입자, 즉, 물질의 알갱이인 척 하다가 지켜보지 않으면 이내 파동으로 변해버린다는 거지."
신비의 의식 속에서 허상의 언어는 들렸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신비가 데생에 집중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신비가 주의를 기울여 무언가를 듣거나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 순간, 실제로도 물체가 파동으로 변해 사라져버렸다는 것인가? 하지만 허상 박사는 조현병력을 가진 자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이 듣건 말건 강의를 계속했다.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는 태양계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원자는 태양 같은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행성 같은 전자들로 구성되지, 하지만 문제는 이거야, 한 개의 원자를 축구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원자핵은 하프라인 중심에 놓인 축구공이고 전자는 거대한 축구돔구장의 바깥 저 멀리에 떠도는 먼지정도라고 할까, 결국 한 개의 원자는 너무나 성긴, 텅 빈 구조를 하고 있어. 더욱이 전자는 너무나 작아서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될 정도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말아. 세상이 파동이 아닌 입자, 즉, 물질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헐렁하게 비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신비의 머릿속도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신비는 허상 박사의 현재 처지나 모습에 대해 같은 한국인으로서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그녀에게 주어진다면 허상을 물리학과 교수이며 과학기술원 종신회원의 위치로 되돌려 놓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꾸었다. 초라한 순례자 같은 허상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안타까운 몰골이었다. 인간 허상을 형상화한 신비의 인체 데생도 거의 완성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나이에 비해 굵고 깊게 패인 주름, 얼굴을 뒤덮은 수염과 근육들은 역동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완성한 그림에 신비는 비교적 만족했다. 신비가 화구를 챙겨서 일어나려는 순간, 허상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이동은 환상이야, SF영화나 판타지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그러니 무리하지 않기를 바라."
허상이 들려준 말이었다. 그는 신비의 마음마저 읽었던 것인가? 허상을 현재의 처지에서 원래 그의 자리로 순간이동을 시키기에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의 개수와 정보는 너무나 방대하다. 신비로서는 그를 순간이동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보다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진학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남의 불행은 정작 신비의 당면한 과제에 쉽게 떠밀려버리는 것이었다.
데생 실습이 끝난 시간은 밤 열시 경이었다. 추위는 매서웠다. 11월이라고는 해도 새벽에는 영하10도를 오르내린다. 허상 박사는 이럴 경우, 미리 보아둔 지하철 역사의 구석진 자리나 온기가 남아있는 예술대학의 빈 강의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허상은 예술대학을 나왔다.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길을 자전거를 끌며 걸어갔다. 자전거는 그의 이동식 주택이나 다름이 없었고, 자전거의 안장과 짐받이를 완전히 점령한 두 개의 마분지 상자 안에는 당장 입을 옷가지들과 접시와 포크 등의 주방기구들이 담겨 있었다.
며칠 전, 낮잠을 청하고 있던 허상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감수성이라고 소개했다. 허상이 도서관의 벤치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을 때였고 그 사내가 이상한 제안을 했을 때, 허상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감수성이라는 자는 병색이 완연했고 희망이라고는 실낱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오히려 노숙자에 불과한 허상보다 더 불쌍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기어들어가는 쉰 음성이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요, 물론, 거절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강요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었으며 환자복 위에 스웨터를 걸쳤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자 스웨터의 팔이 힘없이 흔들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떨렸다.
"우리는 마치 서로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각자의 운명을 바꾸어보자는 겁니다. 물론 어려운 것이겠지요! 나는 다만 당신의 희망, 적어도 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희망을 가져보려는 겁니다. 난 희망이 없어요. 죽을 운명이니 말입니다. 내가 살아날 희망이 있는, 노숙자가 되었다는 기쁨을 누려보려는 거지요."
감수성은 이미 허상의 허락이나 승낙에 무관하게 순간이동을 결심한 것 같았다. 설사 허상이 거절을 한다고 해도 그는 벤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그 누구와도 기꺼이 운명교환을 시도할 사람으로 비쳤다.
"당신은 나의 희망을 사고, 그 다음 나에게는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우리는 주고받을 무언가가 필요하겠군요."
허상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가 허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감수성, 당신이 내가 될 수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계실 테죠?"
"물론 그렇죠, 하지만 나는 착각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려는 거예요. 나는 죽을 운명의 부자에서 가난하지만 건강한 노숙자가 되었다는 최면에 빠지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얻게 되는 건 마음의 위안인가요?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죽을 텐데요?" "희망이죠, 비록 거짓 희망일지라도 살아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싶은 겁니다. 이제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세요."
"나는 이제 당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나라에서 당신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잠깐 내 눈을 의심했을 뿐이죠. 당신은 위대한 감수성이 틀림없군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돈이나 작가이며 영화제작자라는 직위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어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지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지루하고 판에 박힌 연구소를 나온 뒤에는 무한의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제게 좀 더 친절할 수는 없나요?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당신이 은인이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지 묻는 겁니다."
허상이 대답을 하지 않자, 감수성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감수성의 순간이동의 신념은 너무나 확고해보였다. 감수성은 그렇게 생명으로 걸어 나왔다가 목숨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허상은 감수성이 힘없이 돌아서기 전에 남겼던 말에 주목했다.
"나는 저명한 물리학자인 허상 박사, 당신을 본적이 있어요, 내 영화<별이 될 때까지>의 시사회자리였나요? 당신은 내가 부자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이 양자물리학 연구소를 개설하고 평생토록 신나게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을 정도의 재원을 마련해 드리겠어요. 500불이면 충분하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노숙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나에게 양도하는 거예요. 당신이 버리게 되는 건 일종의 방종적인 자유뿐이며,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물리학자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가 있어요."
감수성이 남긴 마지막 말은 허상에게 혜성의 꼬리 같은 긴 여운을 남겼다. 예술대학을 벗어난 허상이 감수성을 생각하며 시간과 공간으로 짠 그물 같은 보도 위를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허상의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허상이 중학교 때 가보았던 한국의 고모네 집 앞에는 저수지 연못이 있었다. 허상이 그 고인 물을 가리켜 '호수'라고 하자 사람들은 웃었다. 한겨울인데도 저수지에는 두껍게 얼음이 얼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그 물렁물렁한 얼음을 '고무얼음'이라고 불렸다. 엷게 언 그 얼음판 위를 조심조심 걸어갈 때면 파파팟, 얼음의 살이 트는 소리가 나며 얼음판은 고무처럼 꿀렁거렸다. 그 커다란 유리 수조 같은 저수지 연못 속에서 여러 가지 신비한 물풀들과 이름 모를 물고기와 벌레들이 군락을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저수지는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을 남겼다. 여름철마다 물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여럿 죽었다. 그리고 죽은 영혼은 물귀신이 되어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당긴다고 했다. 어느 해 겨울에는 갓 부임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 숨구멍에 들어갔다. 그는 총각이었다. 허상이 디디고선 시간과 공간도 살얼음판이었다. 허상이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는 파파밧, 그 살이 트며 깨어지려했다. 꽁꽁 얼어붙어 단단하고 절대적인 얼음 위를 지쳐나가듯 살 수만은 없는 인생은 고무얼음처럼 상대적이며 출렁거렸다. 우주공간도 유동적이기는 매 한가지였다. 초신성의 폭발이 있은 다음, 그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출렁거리며 절대성을 상실하고 만다. 허상은 절대적이라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였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었으며 그에게 세상은 '없는 것'이었다.
허상이 추억여행을 하며 걸어가는 동안, 한 달이면 적어도 두 서너 번꼴로 신세를 지는 이미지의 아파트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아파트의 가구들마다 네모나게 토막으로 잘라진 얼음 같은 빛들과 길 양편에 띄엄띄엄 서있는 가로등 빛들이 무언의 재즈 음악을 연주했다. 그 음악은 분명 살아있으며 허상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회색의 콘크리트 아파트는 좀 커다란 닭장처럼 보였지만 허상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게 아파트가 하모니카를 닮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허상의 초라한 처지가, 작가로서의 명예를 한손에 거머쥐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제작자로서도 성공을 거둔 부호인 감수성마저도 부러워하는 희망차고 찬란한 은총이었는지 곰씹어 보는 것이었다. 감수성, 그는 마침내 허상에게 눈물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허상의 마음은 이미 감수성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허상은 원자나 분자 등의 미시세계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아메리카의 양자물리학연구소의 수석연구원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조현병동에 입원한 환자였다가 또 한 번의 변신으로 노숙자의 처지가 되었다. 그가 시립도서관의 벤치 근처를 배회하기 바로 전, 그는 인접한 종합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당시 조현병동의 모든 인간들의 교수였으며 또한 그 스스로도 조현병자였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조현병동의 특실에서 시립도서관의 벤치로 순간이동을 하고 말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허상은 신이 존재하는 것이 여러모로 인간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되었으며, 빅뱅이 창조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작용에 의해 저절로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할 나름대로의 근거를 찾고 싶었고, 허상 스스로 유신론자이고 싶었다. 다만 지금까지도 신의 존재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그는 어쩔 수없이 자신을 무신론자로 분류했다. 허상은 전자슬릿시험에 참여했고 물질의 기본적인 알갱이,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가 입자이며 동시에 파동이라는 점에 공감한 나머지 '허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원자의 구성요소인 전자는 관찰자가 있을 때는 입자이지만 관찰자가 없을 때는 파동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구경기의 타자가 날아오는 공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는 공이지만, 다른 곳을 바라볼 때에는 야구공은 물질이 아닌 파장으로 변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 동안, 노숙자 허상 박사는 어느 사이 이미지의 아파트 현관 앞까지 왔고 잠시 그 곳에 서 있었다. 허상은 언제나 이미지에게 잠시라도 신세를 지는 대신, 자유를 잃게 될 것이 두려웠다. 허상은 잘 알지 못하는 신에게 의탁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모든 걱정과 번민을 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단순히 고민을 맡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 순종하겠다는 서약이기도 했다.
허상은 아파트의 입구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다운타운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 등의 주방기구들은 자전거가 인도의 툭 튀어나온 블록을 밟고 지나갈 때나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 덜그럭, 소리를 냈다. 그는 거북의 등껍질처럼 바이올린 케이스도 언제나 등에 둘러메고 다녔다. 허상은 쪽잠이라도 청해볼 요량으로 거의 매일 들리다시피 하는 24시간 커피숍을 향해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외투 안주머니에 위스키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허상의 입에 가득 침이 고였다. 이럴 때면 허상은 마음속으로 스무 번을 센다. 마치 섹스의 절정에서 사정을 참는 행위나 같았다. 항문이 여성의 질보다 조이는 힘이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성의 질에 대한 데이터를 단 한 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어금니 턱이 아려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바로 그 순간, 위스키를 재빨리 꺼내어 병째로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자 알싸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사정을 한 자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섹스 파트너는 언제나 남자였다. 안 주머니에서 반쯤 먹고 남겨두었던 소시지도 꺼내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미지의 노숙자 쉼터인 아파트에서는 술을 절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구속이야말로 자유분방한 허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술기운으로 피로가 가시고 기분이 좋아진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힘든 줄도 모르고 발로 박자를 맞추며 걸어가는 것이었다. 달과 하늘천정이 그와 함께 춤을 추었다. 땅이 고무얼음처럼 꿀렁거렸다. 찌지직, 찌직, 파팟 파바밧, 고무얼음은 갈라졌다. 자전거 페달이 허상의 뒤뚱거리는 발길에 차일 때마다 소스라쳐 놀라며 철커덕 철커덕, 헛바퀴를 돌았다. 도시의 불빛이 꼬리를 흔들며 다시 그를 반겼다. 커피숍 입구에 다다르자 허상은 체인으로 자전거 바퀴를 두서너 번 칭칭 감은 다음 자물쇠로 단단히 채웠다. 안으로 들어간 허상이 커피숍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옷을 여러 겹 껴입고 가방이나 짐을 잔뜩 옆자리에 쌓아둔 남자 몇이 테이블에 엎드리거나 비스듬히 의자에 누운 채로 잠들어있었다. 그들은 커피숍의 화장실에서 이빨을 닦고 세수를 하고 홀의 의자로 돌아가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밤에 커피숍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그들을 내쫓지 않았다. 종업원들은 그들 역시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허상의 생각 속에서, 테이블과 의자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며 단지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지는 것에 불과했다. 물질이 저절로 생겨나 파동과 입자로 탈바꿈해가며 인간들을 현혹했다. 한편으로 물질은 마치 현존하는 것 인양 인간의 물욕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이에 허상은 세상을 지배하는 입자이자 파동이며 사기꾼인 물질에 반기를 드높이 쳐들기로 작정한 자였다. 허상에게 감수성의 재화는 탐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배가 고프다거나 춥다는 등의 불편함만 없다면, 허상은 이런 귀찮은 것들을 아예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고 싶었다.
허상은 커피숍의 의자에 상체만 대고 누웠다. 낡은 구두를 신은 그의 발은 여전히 대지의 한 점에 닿아있었다.
목차
목차
차례
작가의 말 04
큰 뼈를 보았을 뿐 07
순간이동
별이 될 때까지
찻잔 크기의 호수
헤겔의 요정
빅뱅의 천사
유기인간
열대어수족관
그림이 말을 걸어왔다
낮은 땅에 눈 녹은 물이 고여
길고양이 죽이기
신의 계절 169
[작품후기] 194
작가의 말 04
큰 뼈를 보았을 뿐 07
순간이동
별이 될 때까지
찻잔 크기의 호수
헤겔의 요정
빅뱅의 천사
유기인간
열대어수족관
그림이 말을 걸어왔다
낮은 땅에 눈 녹은 물이 고여
길고양이 죽이기
신의 계절 169
[작품후기] 194
저자
저자
이종희
저자 이종희
경북 경주 출생
성균관대학교대학원 경영학석사
육군학사장교 만기전역
詩集 《춤추는 목각줄인형》
短篇小說《하트 모양의 가스얼음》
[새를 쫓기 위하여][신의 계절]외 다수의 이색적인
단편들을 「大邱文學/대구문학」誌에 발표하며 등단
短篇小說·詩選集 《샤갈 선생》
短篇小說集 《크리스마스 목가》
連作小說 《신의 나라 토마스》
長篇小說 《잎새 시계》
長篇小說 《네모 행성》
長篇小說 《푸른 말 호박등불》
長篇小說 《성자의 낙서》
長篇小說 《두 번째 아담》
長篇小說《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
長篇小說 《공원 교향악단의 부활》
長篇小說 《큰 뼈를 보았을 뿐》
11종 全卷 종이책/전자책 동시출간
경북 경주 출생
성균관대학교대학원 경영학석사
육군학사장교 만기전역
詩集 《춤추는 목각줄인형》
短篇小說《하트 모양의 가스얼음》
[새를 쫓기 위하여][신의 계절]외 다수의 이색적인
단편들을 「大邱文學/대구문학」誌에 발표하며 등단
短篇小說·詩選集 《샤갈 선생》
短篇小說集 《크리스마스 목가》
連作小說 《신의 나라 토마스》
長篇小說 《잎새 시계》
長篇小說 《네모 행성》
長篇小說 《푸른 말 호박등불》
長篇小說 《성자의 낙서》
長篇小說 《두 번째 아담》
長篇小說《은화를 입에 문 물고기》
長篇小說 《공원 교향악단의 부활》
長篇小說 《큰 뼈를 보았을 뿐》
11종 全卷 종이책/전자책 동시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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