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혈서(한국문예협회시선집 4)
이문자 시집
이문자 시집 [푸른 혈서]. 이문자 시인의 문학적 기류는 일상 속에 감춰진 세상의 이면을 성찰적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삶의 본질을 더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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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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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의 힘으로 삶의 파동을 기록하다
마경덕(시인)
시인은 새로운 퍼포먼스를 꿈꾸는 사람이다. 예기치 않은 시적 오브제들로 이미지를 완성했을 때 관습적인 사고(思考)를 탈피한 낯섦이 신선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반란과 배신으로 눈에 보이는 논리를 뒤집었다. 상식에 대한 도전으로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들을 환기시킨 것이다. 그림 안에 또 다른 그림을 그려 넣거나 사물의 이름이나 기호를 포함시켜 그려진 대상과 실재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라고 한 가다머의 말처럼 문학 역시 삶을 관찰하고 세상을 만나며 수많은 질문을 만드는 일이다.
"시를 쓰는 힘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이소연 시인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꽤 괜찮은 일"이라고 하였다. '꽤'는 "제법 괜찮을 정도"라는 뜻이다. '제법' 역시 기대했던 것보다 수준이나 솜씨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말이니 시 쓰기는 괜찮은 일 중에서도 괜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 "괜찮은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보자. 시인은 시시껄렁한 흥정들과 고지서와 새로 사들인 물건들과 성형수술 같은 걱정들뿐인 세상에서 음지에서 흘리는 눈물과 비애가 주는 안도감이 시를 쓰게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당당한 자신감인가. 무엇도 창조하지 못한다는 비애의 힘으로 부재하는 능력과 존재하는 기억이 한 몸뚱이에서 녹슨 뼈처럼 삐걱대는 소리를 심원 너머 아련한 손끝의 감촉들로 받아 적는 중이라고 썼다. 이처럼 시인이 고민해야할 것들은 개인의 사소한 걱정보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우선일 것이다.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불행과 어둠으로 직조된 문장들, 혐오스럽고 잔혹한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정체불명의 절뚝거리는 절망들, 진보(進步)라는 이름으로 변용된 시들이 분별없이 범람하고 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영혼을 살리는 건강한 상상력일 것이다.
이문자 시인의 문학적 기류는 일상 속에 감춰진 세상의 이면을 성찰적 시선으로 들여다 보고 삶의 본질을 더듬어간다. 시인이 머무는 시적 공간은 주변이며 다양한 층위의 이웃이 사는 공간이다. 이문자 시인은 시의 본래적 원형에 충실하면서도 시의 품격을 격하하지 않는다. "공기 반, 노래 반"이라는 말도 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정확한 공명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독자와 작품 사이로 공기가 흘러 다닐 수 있는 상상의 공간, 즉 여백이 필요하다. 이문자 시인은 이 여백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눈을 뜨면 어둠 속에 벽이 있다
풀리지 않은 어제의 숙제로
오늘의 벽은 더 높아진다
어둠의 벽을 깨 빛을 맞이하고
침묵을 깨 문을 연다
새벽은 어둠과 빛의 경계
시작과 끝의 틈
불안에서 시작되어
평안으로 마무리되는 하루
새벽,
진통이 시작된 자궁 속
세상을 향한 몸부림의 경계
―「새벽, 틈의 경계」전문
새벽은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서 있다. 하루의 시작과 저녁까지의 틈에는 불안과 평안이 혼재해있다. 잠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난 휴식이다.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밀쳐둔 고민거리들이 다시 엄습한다. 어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머리맡에서 대기 중이다. 인간관계는 갈등과 대립이라는 무수한 삶의 고리로 엮여있다. 가족과 이웃 간의 불화, 사회적 분노, 불치의 질병들, 죽음과 이별, 풀리지 않은 문제는 사람을 매개체로 번식하며 내적 조화를 파괴한다. 새벽 무렵 진통이 시작된 시간의 자궁 속에서 세상을 향한 몸부림이 시작된다. 잠이라는 안식에서 벗어나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든다. 살면서 만나는 숱한 경계들, 생사를 가름하는 경계에 서서 이것과 저것, 이편과 저편으로 영입되거나 밀려나야한다. 타인에게 틈을 보이면 왠지 불안하다. 원시단계에서는 격분 끝에, 또는 두려운 나머지 적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근대생활에서는 목적이나 이상이 서로 모순된다 할지라도 도덕과 윤리, 법률적인 규정을 앞세워 "자신의 욕구를 제한하고,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새벽이 평안한 저녁으로 마무리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은 충동적이고 근심은 늘 대기 중이다.
나무젓가락을 떼다가
한 개가 부러졌다
길이가 다른 젓가락 한 짝
음식을 집기도 모으기도
쉽지 않다
새 젓가락을 떼며
생각해보니
생각의 길이나
간격이 다른 이에게
그 차이를
차별로 대한 적 많았다
―「차이와 차별」전문
서로 비슷한 "두 대상의 차이점"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에 기초한 상대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역설이 있다. 너무 '다르다'는 것은 결국 너무 '닮았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서로 같지 않고 '다르다'는 이유를 우리는 대부분 '틀리다'로 읽는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것이다. 평등의 기본원리를 무시하고 자의적(恣意的)인 기준에 의해 불평등하게 대우하여 격리시키는 사회적 차별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묵인되어왔다.「차이와 차별」은 편견으로 인해 발생되는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시인은 "생각의 길이나/간격이 다른 이에게/그 차이를/차별로 대한 적 많았다"고 고백한다. 최근 가까운 지인이 프랑스에 여행을 갔는데 아직도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좌석을 예매해놓았는데도 그 좌석 표를 백인에게 이중으로 팔아버리거나 먼저 백인을 다 들여보내고 나중에 아시아인(황인)을 들여보냈다는 것이다. 기대에 찬 여행이었지만 인종차별과 소매치기가 들끓어서 불쾌한 여행이었다고 한다. 많은 나라에서 차별이 알게 모르게 자행되고 있다. 아직도 사람을 차별하는 습관이 백인을 중심으로 남아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언어가 다른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부당한 대우를 하지는 않았는가. 출신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감정은 존재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상생(相生)의 시대에서 개인주의로 변해가는 현시대는 윤리가 부족한 시대이다. 윤리라는 말은 일찍이 예기(禮記) 악기편(樂記篇)에서 사용한 말로 인간이 한 동아리로 서로 의존해 지켜야 할 질서를 뜻했다. 이 질서가 힘을 가진 자들의 손에 의해 흔들리게 되고 불만은 불신을 초래했다. 차이와 차별을 절감한 사회적 약자들은 모두 광장으로 모여 목소리를 높인다. 쉽게 부러져버린 믿음, 절뚝거리는 정치, 빈부의 격차, 금수저가 받는 혜택과 흙수저가 받는 부당한 억압이 존재한다. 다산 정약용은 "신분제도에 의해서 양반들은 일도 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평민과 천민만 일을 하거나 아예 평민과 천민을 통해서 일을 시키고 있다. 사람이 일하는 데 있어서 양반이든, 평민이든, 천민이 따로 있던가. 양반도 땅을 가졌으면 자기 손으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 사회의 특권층인 양반은 나라로부터 토지나 기타 특전을 받았다. 사대부(士大夫) 출신인 양반에게 노비들이 얼마나 착취를 당했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다. 차별 없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시인은 부러진 나무젓가락으로 차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조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서울역은
시작과 끝이다
새벽 기차에
희망의 기적을 울렸고
밤 열차의 기적이
삶의 기적이 되지 못할 때는
아픔이었다
기적을 만들기 위해
꿈과 절망을 실어 나르던
역사며 중심이었던 곳
기적을 울리며
서울역, 다시 시작이다
―「서울역, 다시 시작」전문
일제강점기인 1925년 9월 30일에 역사(驛舍)가 준공되어 108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의 관문 서울역, 한때 경성역이라 불리던 서울역은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하루에 9만 여명이 이용한다는 서울역은 경부선과 경부고속철도(KTX), 경의선의 시종착역이며, 수도권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의 환승역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서울역은/시작과 끝이다//새벽 기차에/희망의 기적을 울렸고//밤 열차의 기적이/삶의 기적이 되지 못할 때는/아픔이었다"고 한다. 기적을 만들기 위해 기적을 울리며 달리던 기차는 어김없이 서울역에 닿았고 서울역에서 다시 출발했다. 그동안 밤기차에 탑승한 희망은 얼마였으며 서울역에 내려 헤매던 절망은 또 얼마였을까. 한때 서울역은 지방(地方)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유일한 삶의 출구였다. 1970년대 초 눈만 감아도 코를 베어간다는 서울로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상경한 소녀들이 많았다. 직업소개소가 버젓이 간판을 달고 불법으로 영업을 하기도 했다. 인신매매가 성행하던 서울역은 꿈과 절망이 교차되는 곳이었다. 설과 추석 때면 귀성객으로 몸살을 앓던 서울역, 고향으로 가는 차표를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야만 했다.
이문자 시인은 과거의 체험을 연결하여 통로로 설정하고 서울에 대한 동경, 그리고 절망, 스쳐간 풍경 속에 깃든 아련하고 애틋한 기쁨과 슬픔을 모두 서울역으로 불러들인다. 기적을 힘차게 울리며 다시 달리고 싶은 서울역은 생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는 회항점(回航點]점)이다. 다시 시작하고픈 의지는 생의 활력소로 작동한다. 이문자 시인의「서울역, 다시 시작」은 간결하고 짧은 시이지만 긴밀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1연에서는 시작과 끝을 제시한다. 2연과 3연에서는 새벽 기차와 밤 열차의 기적이 다르다는 것으로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결국 예상이 빗나가고 말 것임을 알면서도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생의 의욕을 다짐한다.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절망을 넘어서고 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요
옳다는 건 무엇일까요
오른쪽을 바른쪽이라고 하기 때문에
오른쪽이 하는 일은 다 옳을 거 같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
오른쪽은 그냥 왼쪽의 반대일 뿐이거든요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 살고 있어요
오른쪽이 오른 방향이라는 생각의 늪에
빠져 있으니까요
우리는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해요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이
옳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나요
누구나 습관처럼 왼쪽
엄지손가락을 올리면서도
오른쪽으로 사라지는 지도 모르겠어요
한 번쯤 방향을 바꿔보면 정말로 옳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고집이 끝내 다른 세상을 보는 생각
주머니를 묶어버렸는지도 몰라요
―「오른쪽」전문
퍼포먼스 설치미술가인 서현석 씨는 '미완의 폐허' 준비를 위해 미술관 1층 75평짜리 프로젝트갤러리를 싹 비우고 텅 빈 공간 맨 안쪽 구석에 천사상(像) 하나를 덩그러니 쓰러뜨려 놓았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진 오늘날의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재미없는 미술관을 대체 왜 가야 하느냐'는 괴로운 질문 앞에서 폐허가 된 미술관을 상상한 의도된 연출이었다. 그런데 개막 직후 누군가 쓰러져 있던 천사상을 바로 세워놓은 것이다. 미술관 측에서 CCTV를 돌려봤더니 웬 부자(父子)가 낑낑대며 40Kg 천사상을 세워놓고 있었다. 미술관 측이 다시 천사상을 쓰러뜨린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관람객이 이를 또 바로 세우는 일이 네 번이나 되풀이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의도를 알지 못한 관람객들의 행위가 곧 퍼포먼스가 된 셈이다. 이 경우만 보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고정관념에 젖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늘 서 있는 것으로 인식된 것들이 쓰러져있는 것을 경우 자꾸 세우려하는 것이다. 인식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힘이 창작의 힘이 되듯이 시인은 한 방향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오른쪽을 바른쪽이라고 하기 때문에/오른쪽이 하는 일은 다 옳을 거 같지만/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오른쪽은 그냥 왼쪽의 반대일 뿐"이라고 반론을 제시한다. 오른쪽이 오른 방향이라는 내재된 익숙한 생각의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도 결국 무의식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른 일을 선택하는 행위는 동일한 양상으로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반복되는 굴레를 벗기 위한 방법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지금은 달라졌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한다. "한 번쯤 방향을 바꿔보면 정말로 옳은 세상이/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우리의 고집이 끝내 다른 세상을 보는 생각/주머니를 묶어버렸는지도 몰라요"에서 알 수 있듯이 낯선 일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은 낮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험을 하기 보다는 길들여지기를 원한다. 너도 나도 낯선 길보다는 익숙한 길을 뒤따라갈 뿐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식이 가능했던 형체마저 희미해져 가듯이 꿈은 점점 퇴색되어간다. 같은 길을 오가며 반복되는 삶을 지루해하며.
우리는 살면서 많은 문과 만나게 된다
하루에도 끝없이 문을 열고 닫으며
생각의 문에 머물게 된다
문은 열려 있을 수도 닫혀 있을 수도 있다
벽의 숨구멍이며 소통의 길인 문
미래에 대한 꿈이 많은 사람은 더
견고한 문을 통과해야 한다
닫혀 있는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고 열고
나아가야 한다
때론 문이 문 이상이거나 문 이하여서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캄캄할 때도 있다
문은 열림을 전제로 하기에 벽이 아니다
열릴 것 같지 않던 문도 두드리고
기다리다 보면 열리지 않겠는가
벽은 넘거나 부서져야 나아갈 수 있지만
문은 두드림과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
작은 두드림이 시간이 지나
길이 되고 소통이 된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많은 문을 지날 수도
있고 평생 단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해
끝없는 갈등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 다르지만
쉽게 열리는 문이 있겠는가
인생의 문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는가에 따라
문問이 문門이 될 수도 있다
―「문問은 문門이다」전문
한 장소의 경계, 건축물의 입구에 사람이 드나드는 곳에 개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문,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는 접점에 서 있다. 문 하나로 안과 밖이라는 경계가 나뉘게 된다. "닫혀 있는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고 열고/나아가야 한다/ 때론 문이 문 이상이거나 문 이하여서/건널 수 없는 강처럼 캄캄할 때도 있다"고 한다. 열리지 않을 때 문은 벽이 된다. 허술한 벽에는 쉽게 열리는 허술한 문이 있지만 벽이 단단하면 문도 완강하다. 사람이 만든 문은 어떤 문이든 물리적인 방법으로 열 수가 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념이 다른 주장이나 사상(思想),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나라와 나라. 평생 단 한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 끝없는 갈등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현실에서 만나는 문도 만만치가 않다. 대학이라는 문, 취업이라는 문, 결혼이라는 문, 출산이라는 문, 죽음이라는 문, 벽이 되어버린 문이 도처에 포진하고 있다. 시인은 "인생의 문 앞에 어떤 자세로/서 있는가에 따라/문問이 문門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問'은 '묻다'라는 문이다. 묻기 위해 알아야하고 알기 위해 '질문'해야한다. 곧 問은 도전인 것이다. 꿈을 가지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운동을 하지 않는 운동선수와 같다고 한다. 꿈은 명사(名詞)가 아니라 인생을 움직이는 동사(動詞)이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곳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넘지 못할 문이 있기에 각박한 현실과 갈등하고 대립하며 세상은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해결되는 단계까지 서로 배척하고 투쟁하는 관계는 발전의 추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問은 문門이다」에서는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체험한 갈등과 고통이 깔려있다. 이문자 시인은 일상에서 발생한 감정의 결을 자신만의 화법으로 구축하고 있다. 내면까지 파고든 공간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가 서로서로 어깨를 겯고 하나가 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주변 관찰을 통해 대립관계에 놓인 대상을 이해하며 다양한 각도로 공간을 확장해나간다.
병원 벤치에 한 남자가
목발을 옆에 두고 안경다리를
접었다 폈다 반복한다
그는 기울기도 하고
넘어져도 본 사람이다
바로 서서만은 갈 수 없는 세상
적당히 기울다가 바로 서기도 하고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지기도 한다
그는 남들보다 악착같이 살아왔다
가족도 챙기지 못한 채
언제나 일이 먼저였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속력을 내다가
헛돌기도 하고 진흙탕에
빠지기도 한세월
쉴 새 없이 달려온 그의 육신은 녹슬고
정신은 먼지가 끼었다
그는 금이 간 안경을 닦고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경고처럼
벨 소리 요란하게 울린다
―「자전거」전문
자전거는 페달을 밟는 두 다리의 힘으로 구른다. 핸들을 잡은 사람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 비틀거리고 쓰러진다. 편리한 기구이지만 위험하기도 하다.「자전거」는 병원에서 만난 한 사내를 통해 악착같이 일만하다가 벼랑 끝에 다다른 가장(家長)의 모습을 보여준다. 휴일도 없이 일에 매달려 산 대가는 결국 불치의 병이었다. 그에게 삶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쉬지도 못한 노동의 시간은 가족들과 분리된 시간이다. 그 분리된 시간 속에는 함께 하지 못해 분실해버린 소중한 기억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병원 벤치에 한 남자가/목발을 옆에 두고 안경다리를/접었다 폈다 반복한다/그는 기울기도 하고/ 넘어져도 본 사람이다"에서 우리는 한 남자가 살아온 험난한 길을 예감할 수 있다. 그 남자의 생활반경 안에 자전거가 들어있다. 취미나 스포츠를 즐기는 경주용자전거가 아닌 가족도 챙기지 못한 채 일이 먼저인 생계형 자전거이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헛돌기도 하고 진흙탕에 빠지며 쉴 새 없이 달려온 그의 도착지는 결국 병원이었다. 무엇을 향해 그토록 속도를 내었을까.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안경다리를 펴고 접는 일이다. 반복해서 "접고 펴는" 행위에서 "불길한 징조"가 보인다. 정신에 먼지가 끼었다니 치매라는 병이 아닐까. 부러진 다리처럼 금이 간 안경으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의 가족들은 그의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제 가족에게 짐이 되어버린 한 남자는 목발을 짚어야 보행이 가능하다.
『재미학 콘서트』의 저자 손대현 교수는 "근면이 미래의 이익이라면 게으름은 현재의 이익이고 일이 인간의 것이라면 여유자적은 신이 내린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목표는 일이 아닌 여유"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작은 여유조차 누리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자전거」는 우리의 익숙한 습관에 질문을 던진다. 잊고 살아가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 사소한 현상을 확장하고 삶의 본질을 사유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해준다. 가족을 위해, 아니면 물질을 얻기 위해 그는 소중한 목숨을 '가불'한 셈이다. 우리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위해 또 얼마나 앞질러 달려야하는가.
한동안 비어 있던
빈 방 벽지에
무인도 같은 얼룩이 졌습니다
이 방을 머물렀던 이의
섬처럼 살아온 흔적입니다
흠, 때, 그림, 무늬
살며 가지게 되는
얼룩의 이름들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군가에게
지우고픈 흠이나 때였을까
남기고픈 그림이며
무늬였을까요
―「얼룩」전문
빈 방은 가버린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외로운 그는 벽에 낙서를 하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벽은 "마음을 받아주는" 대상인 셈이다. 사람이 사라진 "정지된 풍경"속의 흔적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누군가의 "부재를 통해" 보이는 것 안에 "감춰진 것"들을 찾아낸다. 제자리를 지키는 얼룩에 애틋한 삶이 깃들어있다. 어느 설치 예술가는 볕뉘에 부유하는 먼지가 공기의 흐름을 타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고 잠시 후 짧은 비행을 마치고 소매위에 내려앉는 순간, 점에 불과한 작은 먼지의 무게감을 느꼈다고 한다. 접촉하는 순간 그 가벼운 것이 강렬한 전율로 다가온 것이다. 그 후 자신이 경험한 전율감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을 했다고 한다. 집중하는 대상들, 그 안에서 시인은 미적 작품을 형성하려는 "욕망의 지점"을 확인한다. 이처럼 시 쓰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일은 절대적인 과제이다.「얼룩」이라는 "시간의 매뉴얼"에는 보존개념도 들어있다. 낙서나 그림은 소외 받은 기억을 보존하는 기록장이기 때문이다.「얼룩」은 누군가 자신을 방치한 기간은 "어둠의 시간"이며 "암묵적인 슬픔"이다. 시인은 현실의 대상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내부로부터 발견한다. 이미지를 구체화시켜 인간의 내면과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대상 뒤에 숨은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피카소도 배후에 숨은 놀라운 속성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았다. 시인은 부재중인 시간을 통해 얼룩도 "삶의 한 조각"이라는 것, 흠, 때, 그림, 무늬 등 사소한 것들의 집합이 삶을 이루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때는 "시간의 흔적"이지만 흠은 지우고 싶은 상처일 것이다. 벽은 누군가의 삶을 증명하고 ?시인 역시 일상의 틈에서 마주친 사소한 일을 수집하고 그 내면에 존재하는 "얼룩진 파동"을 기록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는 우리는 과거를 오로지 현재로부터 이해할 수 있으며, 반대로 현재는 오로지 과거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흘러간 후에 이해되는 것이고 과거를 거친 현재는 과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비평가 바르트는 보들레르의 작품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패이며, 고흐의 작품은 그의 광기이며, 차이콥스키의 작품은 그의 악덕이라고 예를 들기도 했다. 시에 있어 이미지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요소이듯 이문자 시인의 서정성을 띤「푸른 혈서」는 개인의 역사이기 이전에 힘든 시대를 지나온 우리의 흔적이며 기록이다. 장종완 화가는 작업노트에 이렇게 썼다. "종말 이후의 세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지러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희망을 가득 실은 채 출항했던 유토피아 호는 태풍을 만나고 암초에 걸려 좌초 직전이다. 하지만 배와 그 주변의 경치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배 안에 탑승한 사람들은 아마 지금의 위기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선가 등장할 정체 모를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며 무척 소극적인 자세로 현재의 불안과 모순을 작업을 통해 기록하는 중이다. 미래는 가능할까?" 이 시대의 위기를 잘 표현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풍경에 취해 위기를 느끼지 못하지만 예술가는 예민한 짐승처럼 주변의 불안을 예감하고 있다. 시 쓰기 역시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아름다운 세상을 쓰며, 정체 모를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며, 현재의 불안과 모순을 기록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들뜨지 않은 차분한 어조로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한 이문자 시인은 삶과 갈등을 유기적인 이미지로 형성하며 인간의 근원적인 비애(悲哀)에 집중하고 있다. 시집『푸른 혈서』는 혼탁한 세상을 향해 "자연과 사물"이 전하는 푸른 메시지이다.
목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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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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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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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리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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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혈서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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