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최측의농간 시집선 3)
심재휘 시집
[최측의농간 | 시 003]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은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등의 시집을 통해 우수어린 눈빛으로 잿빛 일상을 추억과 회한이 뒤엉킨 상처의 풍경으로 담담히 기록해왔던 심재휘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이천 년대 들어 한국 시단에 팽배해지기 시작했던 전위에의 욕망들 틈에서도 묵묵히 전통의 길을 고수한 시인들은 있었다. 최측의농간은 조심스럽게 한 시인의 이름을 그 쓸쓸한 좌표의 한 구석에서 꺼내 올리려 한다. 이 시인은 새로운 것들에 관해 과격하거나 새롭게 쓰기보다 익숙한 것들에 관해 조심스럽거나 낯설게 쓴다. 심재휘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을 통해 우리는 이제 좀처럼 보기 힘들어진 어떤 작풍(作風)의 빛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그 작풍은, 이국의 바람이 뿜어내는 세계시민이라는 환상적 프레임과 국지성의 보편화라는 이름의 조작된 전술이 아니라, 제 몸으로 맞서거나 밀려야 했던 바람에 대해 말하는 일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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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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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측의농간 | 시 003]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심재휘 시집, 2017, 최측의농간
황사주의보가 내렸다 비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피를 발라 문틈을 메우고
촘촘한 우주의 적막을 주문처럼 외워야 했다
한때의 사랑이 혁명이 세상의 모든 맹세들이
분진으로 떠돌았다
「사월」 부분.
혁명과 투쟁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맑스?레닌 전집 같은 책들이 헐값에 헌책방으로 고물상으로 처박혀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최측의농간에서는 "한때의 사랑이 혁명이 세상의 모든 맹세들이/ 분진으로 떠돌았"을 그 시절에 등단하여 "바람의 출구"를 찾아 비틀거렸던 한 시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때의 그는 "외할머니"와 "여관", "편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속도 같은 것들에 의지하곤 했으며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무수한 편지를 쓰고, 서역에까지 당도하였다가, "황사들은 환도(還都)할 곳의 봄하늘을 읽으며/ 이 막막함에 누워 사막이었던" 것임을, 바람과 같이 불어오고 불어가는 것일 뿐이라는 걸 ?편지를 태우거나 고쳐 쓰며- 아프게 받아들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밤에 편지를 쓰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갔다
회귀선 아래로 내려간 태양처럼
따뜻한 상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거친 눈이 내렸다
「폭설」 부분.
이천 년대 들어 한국 시단을 잠식하기 시작했던 전위에의 욕망들 틈에서도 묵묵히 전통의 길을 고수한 시인들은 있었다. 심재휘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을 통해 우리는 이제 좀처럼 보기 힘들어진 어떤 작풍(作風)의 빛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그 작풍은, 이국의 바람이 뿜어내는 세계시민이라는 환상적 프레임과 국지성의 보편화라는 이름의 조작된 전술이 아니라, 제 몸으로 맞서거나 밀려야 했던 바람에 대해 말하는 일과 닮아 있다.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우산을 쓰다』 부분.
내가 걸어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 부분.
그러므로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옆, 혹은 뒤에는 위태로운 그들의 몸짓을 바라보며 바람을 제대로 보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도 없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다. '바람'이라는 명사 안에 이미 '불어옴'의 의미가 포함된 것이어서 맞서지 않고는 느낄 도리가 없다고 해도 그렇다. "적당히 쓸쓸"했다는 말은 그러므로 적당히 감상적으로 관조했다는 손쉬운 타협이 아닌, 자신이 바라본, 감당할 수 있었던 만큼의 바람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그러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던- 한 시인의 겸허한 시작(詩作) -생에 대한- 에의 태도를 보여준다.
어쩌면 내가 기운 것처럼 보인 것은
사람들이 바람을 제대로 못 본 탓일 게다
아니 저 바람 속에 뚫린 구멍 속으로
매일 조금씩 흘려 넣는 나의 영혼으로 인하여
나는 또 알 수 없는 곳으로 조금은
기울어 있는 것이다
「기울어 있는」 부분.
젖은 눈으로 바라보면 마르고 생경해 보이는 풍경들도 안개 가득한 시의 풍경이 된다. 끓어오르는 욕망들의 넘실거림 사이에, 젖어 따끔거리는 진행형의 아픔들이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눈 내리고 비 오는 가운데 끝내 그가 놓지 못한 것. 불 속에서 휘어지는 맹세와 적당히 쓸쓸하게 부는 바람 사이에는 겉봉에서부터 낡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가 말한다.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부분.
등받이 없는 회전의자에 앉아 문틈을 엿보면
올라오는 계단과 내려오는 계단이 만나
내 시야를 이루는 한 평의 오늘이 있었다
그곳은 어두운 사진의 세계였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몸을 돌려 다시 오르거나 내려갔을 것이다
「나무 계단에 관한 오래전 이야기」 부분.
어떤 시집은 서점의 구석에서 오랜 시간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그러고서도 오래 쳐다보는 인내심을 감당하고 나서야 만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것들에 관해 과격하거나 새롭게 쓰기보다 익숙한 것들에 관해 조심스럽거나 낯설게 쓰는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첫 번째 시집은 오해 받을 기회조차 보장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후일담을 읊조리는 제스처로, 얕은 '낭만'을 깊은 '우수'로 바꿔치기 하는 눈속임으로, 교묘히 말하는 방법을 그라고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집 곳곳에는 그러므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 했던 시인의 한숨이 웅성거린다. 어두운 사진의 세계에서, 오르거나 내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한 평의 오늘로 바라보았던, 기울어 걷는 한 시인의 한숨이, 여기에 있다.
목차
목차
제1부 바람의 경치
남쪽 마을을 지나며 13
동굴 속의 산책 14
오늘, 16
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 18
현관, 그리고 벗어놓은 신발 20
11월의 숲 22
봄꽃나무 한 그루 24
겨울의 질척거리는 밤거리 26
안개, 여관, 물소리 28
북쪽 벽에 못을 박고 30
공룡발자국 화석 32
폴라로이드 34
기울어 있는 36
Virtual Reality 37
뱅뱅 사거리 38
맛있는 밥 40
바람의 경치 _낯선 마을의 달 42
망치가 망치를 만드는 정오 44
섣달 그믐날의 동물원 45
저녁엔 추억만 남는다? 46
내소사(來蘇寺) 풍경소리 48
바람의 경치 _경포호 49
바람의 경치 50
제2부 폭설
폭설 55
어둠은 어떻게 오나 56
다시 목련을 꿈꾸며 57
잠실의 어두운 거리 58
사월 60
여름날 저녁 61
두 눈 감았다 다시 뜨면 62
씀바귀 64
지상의 가을 65
아! 사바나의 빗소리 66
봄날 68
환자들 69
새들에게 새벽을 묻는다 70
어떤 임종(臨終) 72
경계경보가 해제되었습니다 74
우리 외할머니네 집 75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래톱 마을이 있다 76
나는 도끼를 메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78
제3부 쓸쓸한 향기
쓸쓸한 향기 81
에스컬레이터 82
가시論 84
나무 계단에 관한 오래전 이야기 86
자작나무 흰 몸 88
천산천지(天山天池) 90
아름다운 저녁 91
외할머니의 오이꼭지 92
우산을 쓰다 94
붉은 지붕의 하늘 96
고독한 배경 97
대관령 깃발 98
첫사랑 100
군불 102
新귀촉도 _서역의 밤기차 104
봄밤 107
오래된 한옥 109
척도 110
봄날은 간다 111
저자
저자
강원 강릉 출생.
1997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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