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강물 속에 꽃이 핀다
신승근 시선집
정선에 시인이 산다. 정선에 농사꾼 시인이 산다. 정선에 농사꾼이 된 시인이 산다. 눈 밝은 독자는 이미 그가 누군지 알 터. 바로 신승근 시인이다. 20세기 정선을 대표하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신승근 시인이다. 아, 아니다. 실은 정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인의 시선집을 내가 묶는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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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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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옛 이름은 도원이다.
산 설고 물설던 새외塞外의 땅은 이제
변방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척추를 타고 내려와
소용돌이로 뭉친 단전丹田에 도원은 있다.
사람들은 도원에 이르러
복사꽃 만발한 꿈을 찾지만
보고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도원은 복사꽃을 그의 눈앞에 몇 번이고
펼쳐 보였다.
그대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만났던 그 질긴 외로움 속에서
혹은 도원을 꿈꾸던 그날부터 이미
당신은, 당신 안에
무릉의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당신이 꿈꿀 수 있는 동안은 그러므로
도원의 복사꽃은 그대 가슴속에서
언제나 핀다.
경배하라. 그대여
이 신성의 땅에 입 맞추라.
그대가 혼신으로 다가설 때, 마침내
이 땅은 그대에게
복사꽃 만발한 도원을 펼쳐 보이리니.
- 「도원으로 가는 길」 전문
이번 신승근 시인의 시선집을 편집하면서 제일 처음 들어온 시가 「도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선의 옛 이름이 도원인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선에 간들 그곳이 도원인 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는 모양새가 다 그 모양 아니겠는가. 보고도 못 보니, 바로 옆의 파랑새를 두고 파랑새를 찾아나서는 꼴 아니던가. 그러니 나를 다스려라. 신승근 시인의 시선집을 관통하는 가르침 중 하나 되겠다.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고, 내 마음을 닫고 있는 그것들을 먼저 덜어내고 비우라.
2
지난해 말, 신승근 시인께서 다시 시를 쓰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바로 전화를 넣었다. "선생님 좀 뵙고 싶은데요." 그렇게 올해 초 신승근 시인을 만났다. 정선 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10년 넘게 시를 버리고 사셨다 했다. 다 버리고 이제 시 없이도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흙이 시고 풀이 시고 바람과 돌과 하늘이 시려니 이제 되었다 싶었는데, 믿지 않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훅,하고 시가 다시 찾아 들었다 하셨다. 선생께서는 믿지 않겠지만 나로서는 믿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면 시선집 먼저 묶으시지요!!!"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늘 한가운데
손을 넣으면
내 손이 아프다
눈이 부시게.
이만큼
이만큼
떨어져서 너를 보지만
멀어지지 않는다.
가까이.
너는 더욱 가까이
나를 흔든다.
네가 하늘이고
내가 한 뼘만 한 그늘이고
네가 까마득한 들판이고
내가 그 속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풀꽃이고.
- 「너는 믿지 않겠지만」 전문
3
신승근 시선집, 『저 강물 속에 꽃이 핀다』.
이번에 시선집을 묶으면서 원고 교정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더랬다. 신승근 시인께서 시를 끊고 농사에 매진한 사이 그의 보물 같은 시들도 함께 흙 속에 묻혔던 것인데, 이번에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니, 심해에 묻혀 있던 보물들을 백 년 만에 건져 올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시집을 오실 적에 그 집을 지키던 지킴이 구렁이가 따라왔더랍니다. 보리밭이 좍 갈라지더랍니다. 한 아름은 실히 넘고, 귀까지 달렸더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게 아니고, 시집온 한참 뒤에 할머니 친정집에 불이 났었는데, 지킴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마루 밑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 죽으니 나머지 한 마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찾아오는데, 보리밭이 마치 가르마 타듯 두 갈래로 갈라지더랍니다.
그 뒤로 우리 집은 날로 번창했답니다. 통시에 기와도 올리구요. 통시에 기와를 올린다는 것은 엄청 잘산다는 얘기거든요. 아무튼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히 신화적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 소를 세는 것보다 콩 한 되를 엎어놓고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거나, 우리 집 소들의 고삐를 이어놓으면 서울까지 가고도 남는다는 둥. 하여튼 요란하였습니다.
그것이 모두 우리 집 지킴이 덕이랍니다.
거친 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때론 신화가 삶의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신화 5」 전문
신승근 시선집, 『저 강물 속에 꽃이 핀다』!!!!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 중 가장 상단에 위치할 시집이 아닐까. 감히 그런 생각을 해본다. 2018년에 나올 그 어떤 시집도 이 시집의 무게와 깊이를 넘어서지 못할 거라고 조심스럽게 감히 예측해본다.
[책속으로 추가]
"바람 한 갈피/ 흰 모래밭을 파헤치고 있었다."
"바다는 모래밭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이 시는 '바람/모래밭 → 생선 비늘/해파리 → 목선/돛대 → 바다(파도) → 부두 → 바다/하늘 → 모래밭' 즉, 모래밭의 바람에서 바다로 하늘로 나아가지만, 작용하는 힘이 원심력이 아니라 구심력인 듯하다. 시가 하늘/바다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출발점으로 끌어당겨지는 느낌, 확장/확대가 아니라 축소/미세지향의 기운이 시를 감싸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작은 것', '작은 세계'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신 시인의 전반기 시들의 특징이다. 이에 비하면 후반기 시들에서는, 후술할 텐데, '호방(豪放)함'이 몸으로, 정신으로 읽힌다.
(중략)
시인의 전반기의 시들로 엮인 ?2부?의 시들은 「풀꽃」 연작시 5편, 「민들레가 민들레에게」, 「장자의 나비」, 「장자의 새」, 「나비」 연작시 2 편 등, 「바다 일기」(시 제목으로는 큰 이미지일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시가 아니다)를 빼면, 모두가 작은 것들을 다루고 있다.
걸어서 갔지만 큰 꽃들은
보이지 않았다.
민들레, 패랭이, 꽃다지만 작열했다.
숨죽여 작은 손을 접어
인사를 했다.
공기 같았다.
― 「풀꽃 1」 전문
큰 꽃들은
혼자 있지 않았다.
상처가 크기 때문이라고.
바람의 눈가를 적시는
각시풀만 홀로 있었다.
아주 작은 상처의
영혼들만
홀로 있는 거라고.
― 「풀꽃 2」 전문
삶의 동행자는 민들레, 패랭이, 꽃다지, 각시풀 등 작지만 작열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자존(自存) 능력이 있는 작은 상처들과 함께 산다. 번개와 천둥, 폭풍과 한파 등 큰 것들은 대부분, 불행과 함께 무엇인가를 동반한다. 큰 것들은 우리를 질리게 하고 압도한다.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것은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있는 것,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공기 같"은 것, "작은 상처의 영혼들"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그 상처들에서 말미암는 아픔, 슬픔 그리고 그리움이다.
작은 것에의 경배. 세상의 모든 것, 만물(萬物)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그것의 빛과 그림자라는 예의 「자연의 이치」를 깨우친 화자/시인이 「화두」 연작시편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삽작 어귀도 쓸고
댓돌도 쓸고
방 안도 거울처럼
쓸고 닦았다.
벽 속의 달마가 말하기를
웬 쓰레기가
이리 큰 것이 앉았는고.
― 「화두 2」 전문
오늘은 먹을 갈다가
맑은 달 하나
건졌습니다.
젖어 창호지에
걸었더니
지나가는 새가
발목을 적시고
갑니다.
― 「화두 4」 전문
"외딴집에게/ 말 붙여 보았더니/ 내 안에도 집 한 채가/ 저물고 있다 하네."(「외딴집」 부분)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하나쯤은 업보를 안고 산다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말을, 후반기 시에서도, 되풀이 하는 것은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한 듯 잊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의 나는 버리지 못하면서, 밖에 있는 그 무엇들을 버린다 한들 '마음의 평화'는 어림없다. 그림 속의 달을 보고 지나는 새가 아는 체를 한다. 이는 그림 속의 달이 맑아서 뿐 아니라 그 달을 그려 넣은 사람의 영혼이 맑아서라는 데까지 우리의 시선이 미쳐야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일 터이다.
(중략)
자기가 태어난 농경사회를 떠나 도시사회로 편입된 이력을 지닌 시인들, 그들은 주로 도시와 자연을 대비하며 도시의 비인간화 과정, 그리고 그 상태를 비판하거나 농촌, 도시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다고 양시양비론을 편다. 그도 아니면 무난하게 농경사회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용한 시구들을 보면, 이런 시인들과 신승근 시인은 다르다. 신 시인은 말 그대로 래디컬하다. 농경사회로 돌아와 자연친화적 삶을 생활의 기본 패턴으로 삼으면서 이제, 딴청을 부려가며 옷깃을 여미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자연의 편을 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냥 자연 속에 들어왔으니까. 시인으로서든 사람으로서든 '신승근'이 이미 자연이다. 시인의 말이다. "산과 마주 앉는 시간들이 있었다. 한때는 대결하듯 눈을 부라리며, 한때는 그 웅혼함에 무릎을 꺾으며 저 산들을 바라보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안에도 산 하나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어디 그뿐이겠는가. 내 영혼을 송두리째 잡아 흔드는 통렬함 또한 그 안에 있었다."(『언젠가는 저 산의 문을 열고』)
(중략)
신승근 시인은 "오랜 교사 생활을 접고 자급자족의 농사꾼으로 편입"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정선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살고 있다. 그 안에서 이루어졌을 '정선에 대한 경배'인 「신화」 연작시편 이후의 시인의 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변했고, 시인은 그 세계를 어떻게 확장시켰을까.
머지않아 시인의 신간 시집을 볼 수 있기를, 나는 기대한다.
ㅡ 정승옥 / 강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
목차
목차
1부. 언젠가는 저 산의 문을 열고
이제는 지는 꽃잎에도
생애
누추한, 그러나 행복했던
꽃잎처럼
어느 것인들
우리가 저 강물처럼
눈
어느 날 문득
단풍
어느 봄날
빈집
외딴집
욕망
이젠 가야 하리
귀향
고향
유배의 나라
도원으로 가는 길
생애가 온통 먹빛인 날은
옥갑사玉甲寺 1
옥갑사玉甲寺 2
옥갑사玉甲寺 3
무량수전
신화 1 ― 계룡잠鷄龍岑
신화 2 ― 갈왕산葛王山
신화 3
신화 4 ― 상원산上元山
신화 5
할머니와 낙타
메밀꽃 필 무렵 1
메밀꽃 필 무렵 2
어떤 징후
나비 한 마리가 세상을
물의 마을
아, 동강
호사비오리
두고 온 내가 그리워
노추산
구절리 1
구절리 2
법
우리는 자꾸만 다가올 미래에 갇히다
두께 없는 삶도 있을까
퉁드란
수류재
2부. 그리운 풀들(37)
풀꽃 1
풀꽃 2
풀꽃 3
풀꽃 4
풀꽃 5
민들레가 민들레에게
장자의 나비
장자의 새
너는 믿지 않겠지만
시는
부부
셔터
틈
거문고
외로움에 관하여 1
외로움에 관하여 2
외로움에 관하여 3
김종삼 1
김종삼 2
끈
그러니 껴안을 수밖에
초록빛 어둠
나비 1
나비 2
화두 1
화두 2
화두 3
화두 4
화두 5
은유의 나라
나에게 영혼이 있다면
정선 아라리 1
정선 아라리 2
뿔과 아이와 고삐
바람이 접시에 닿고 있을 때
소리
바다 일기
해설 · 정승옥
하늘이 푸르구나 눈이 부시다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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