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뿌리 신현준(국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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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뿌리, 신현준’은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申鉉俊) 장군의 치열했던 삶을 다룬 평전(評傳)이다. 1949년 2월 1일, 초대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이 신현준 중령을 해병대사령관에 임명하고 해병대를 창설하라고 지시했다. 부대를 만들기 전에 사령관부터 임명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현준은 부대의 위치, 병력, 무기, 보급품 등 모든 창설 업무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이렇듯 해병대 창설이 신현준 한 사람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후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경상북도 금릉(현재의 김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난 신현준은 처절할 정도의 가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극심한 궁핍에 시달리던 신현준의 아버지는 신현준이 네 살 때인 1919년,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국땅인 만주에서의 생활은 고향보다 더 힘들었다. 신현준 가족은 만주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소작 농사를 지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928년에는 가족 모두가 하얼빈 시내에 설치된 빈민구제소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신현준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자식을 교육시켰다. 이 덕분에 신현준은 하얼빈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에 이어 만주까지 집어삼켰다.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그해, 신현준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하얼빈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 부대에서 통역 일을 하게 된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서였다.
1934년, 신현준이 전속으로 통역을 했던 일본군 장교가 만주군 수석고문으로 전출을 가게 됐다. 만주군으로 옮겨가 통역 일을 계속하던 신현준은 만주군 군관학교인 봉천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한다. 장교가 되어 좀 더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였다.
1936년 4월, 봉천군관학교 제5기 군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신현준은 만주군 장교로 변신하게 된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1937년 7월, 일본은 만주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스스로 파멸의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결국 일본은 연합국 측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다.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던 신현준은 한동안 광복군 평진대대 대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46년 5월에 부산으로 귀국했다. 그해 6월에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에 견습사관(見習士官)으로 입대한 신현준은 11월 21일, 부위(중위)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49년 2월 1일,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1949년 4월 15일, 드디어 진해 덕산비행장(德山飛行場)에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사병 300명, 총 380명으로 편성된 해병대가 창설식을 가졌다. 창설식이 끝난 후의 기념행사부터 해병대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간부와 사병 전원이 완전군장을 하고 해발 500m의 천자봉(天子峰) 정상까지 행군을 한 것이다.
시작부터 남달랐던 해병대는 6·25전쟁 중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무적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 1950년 8월, 북한군 7사단 선발대가 경남 통영까지 밀고 내려왔다. 8월 17일, 김성은이 지휘하는 1개 대대의 해병대가 통영에 상륙하여 북한군 7사단 선발대를 궤멸시켰다. 이 작전으로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951년 6월에는 강원도 도솔산지구를 배경으로 공방을 벌인 도솔산전투에서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북한군이 24개의 요새를 구축한 도솔산지구는 세계 최강이라는 미 해병 1사단도 탈환에 실패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런 곳을 한국 해병 1연대가 단 보름여 만에 탈환하자, 이에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이 해병 1연대에게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내린 것이다.
무(無)에서 시작하여 ‘귀신 잡는 해병’을 창조한 신현준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공훈장 중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했다. 대한민국 군인들 중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한 사람은 신현준 장군이 유일하다.
그런 까닭에 신현준은 부대의 위치, 병력, 무기, 보급품 등 모든 창설 업무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이렇듯 해병대 창설이 신현준 한 사람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후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경상북도 금릉(현재의 김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난 신현준은 처절할 정도의 가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극심한 궁핍에 시달리던 신현준의 아버지는 신현준이 네 살 때인 1919년,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국땅인 만주에서의 생활은 고향보다 더 힘들었다. 신현준 가족은 만주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소작 농사를 지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928년에는 가족 모두가 하얼빈 시내에 설치된 빈민구제소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신현준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자식을 교육시켰다. 이 덕분에 신현준은 하얼빈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에 이어 만주까지 집어삼켰다.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그해, 신현준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하얼빈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 부대에서 통역 일을 하게 된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서였다.
1934년, 신현준이 전속으로 통역을 했던 일본군 장교가 만주군 수석고문으로 전출을 가게 됐다. 만주군으로 옮겨가 통역 일을 계속하던 신현준은 만주군 군관학교인 봉천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한다. 장교가 되어 좀 더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였다.
1936년 4월, 봉천군관학교 제5기 군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신현준은 만주군 장교로 변신하게 된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1937년 7월, 일본은 만주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스스로 파멸의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결국 일본은 연합국 측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다.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던 신현준은 한동안 광복군 평진대대 대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46년 5월에 부산으로 귀국했다. 그해 6월에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에 견습사관(見習士官)으로 입대한 신현준은 11월 21일, 부위(중위)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49년 2월 1일,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1949년 4월 15일, 드디어 진해 덕산비행장(德山飛行場)에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사병 300명, 총 380명으로 편성된 해병대가 창설식을 가졌다. 창설식이 끝난 후의 기념행사부터 해병대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간부와 사병 전원이 완전군장을 하고 해발 500m의 천자봉(天子峰) 정상까지 행군을 한 것이다.
시작부터 남달랐던 해병대는 6·25전쟁 중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무적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 1950년 8월, 북한군 7사단 선발대가 경남 통영까지 밀고 내려왔다. 8월 17일, 김성은이 지휘하는 1개 대대의 해병대가 통영에 상륙하여 북한군 7사단 선발대를 궤멸시켰다. 이 작전으로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951년 6월에는 강원도 도솔산지구를 배경으로 공방을 벌인 도솔산전투에서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북한군이 24개의 요새를 구축한 도솔산지구는 세계 최강이라는 미 해병 1사단도 탈환에 실패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런 곳을 한국 해병 1연대가 단 보름여 만에 탈환하자, 이에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이 해병 1연대에게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내린 것이다.
무(無)에서 시작하여 ‘귀신 잡는 해병’을 창조한 신현준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공훈장 중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했다. 대한민국 군인들 중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한 사람은 신현준 장군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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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대한민국 해병대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해병대가 창설되기 전에 먼저 사령관부터 임명하고, 그 사령관에게 알아서 부대를 만들게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뿌리인 '하나'가 바로 신현준(申鉉俊) 장군이다.
'해병대의 뿌리, 신현준'은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장군의 치열했던 삶을 다룬 평전(評傳)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신현준 개인의 삶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복잡다단했던 20세기 초 동북아의 상황을 다룬 이 책의 전반부는 마치 대하소설을 읽는 것 같은 감흥을 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씨줄로 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들의 증언(회고록들과 평전들)을 날줄로 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
책의 후반부는 창군과 6·25전쟁이라는 방대한 역사를 한 눈에 조망하게 해준다.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주요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국방역사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이 책에는 수많은 역사적 비화(?話)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독자들의 흥미를 배가하고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수많은 관련 사진과 도표들을 곁들여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돋보이는 부분은 인간 신현준의 진솔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해병대는 막강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사람들은 신현준 장군이 불같은 성격의 용장(勇將)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신현준 본인이 쓴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다른 장군들이 남긴 회고록들, 그리고 각종 공간사(公刊史)들에 등장하는 신현준이라는 인물은 다정하고 인자한 성품을 지닌 덕장(德將)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신현준은 군인보다는 학자나 종교인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사에 성실하고, 진지하며, 자기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는 효자였으며,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 성품이 그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이끌었을 것이다.
신현준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군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군인이었으며,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치부(致富)와 축재(蓄財)를 하지 않은 청빈한 공직자였다. 또한 신에게 봉사하는 삶을 산 참 종교인이기도 했다.
만주군으로 복무했던 신현준 장군에게는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1952년 10월과 1953년 10월)한 국가 유공자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군인들 중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한 사람은 신현준 장군이 유일하다. 분명한 것은 신현준 장군이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군을 지극히 사랑했던 해병대의 대부(代父)라는 사실이다.
'해병대의 뿌리, 신현준'은 국군 장병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할만한 책이다.
[책속으로 추가]
1949년 2월 1일,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이 신현준 중령을 초대 해병대사령관에 임명하고, 해병대 창설 업무를 맡겼다. 부대를 만들기 전에 먼저 사령관부터 임명한 것이다.
막상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됐지만, 신현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부대의 위치, 병력, 무기, 보급품 등 모든 준비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이렇듯 해병대 창설이 신현준 한 사람에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후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과 함께 일할 유능한 장교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신현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진해 해군통제부 교육부장을 맡고 있는 김성은 중령이었다.
1949년 2월의 어느 날, 신현준이 부인과 함께 김성은의 관사를 찾아갔다. 신현준은 김성은에게 해병대로 전과(轉科)하여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김성은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미 해군에서 선두주자 중의 한 명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김성은 중령으로서는 해군에서 파생되는 신설부대인 해병대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해군 예하이기 때문에 부대의 규모가 작은 것은 물론, 진급의 기회도 그만큼 제한적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열악한 조건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해군에서 쌓은 모든 경력과 기득권을 버리고 과감하게 해병대를 선택한다는 것은 정말 결정하기 힘든 모험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신현준은 일주일 간격으로 세 번이나 김성은을 찾아가 부탁했고, 신현준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한 김성은은 결국 해병대로 전과하게 된다. 신현준은 김성은을 해병대 참모장에 임명했다.
지나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유비의 삼고초려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세 번째까지 찾아오자 나로서도 감동이 되었다.
동시에 '이 분은 진정한 덕장이시다.'라는 생각과 제갈량 같은 뛰어난 전략가도 유비의 삼고초려에 머리 숙이고 출사했다는데, 뛰어난 전략가도 아니고 만주군이나 일본군 같은 군 경험자도 아닌 나를 택해 세 번씩이나 찾아준 그 분의 인격에 감동되었다. 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놓는다는 말이 생각나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마음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제가 사양하는데도 찾아와 주시니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충성스러운 부하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성은,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P.127.)
신현준은 계속해서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 중인 김동하(金東河) 소령과 인천기지사령관 시절의 부하 고길훈(高吉勳) 대위를 찾아가 해병대에서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다. 신현준은 이런 식으로 인재들을 설득하여 해병대 간부진을 구성해나갔다.
신현준의 안목은 정확했다. 김성은과 고길훈, 김동하 세 사람은 후일 6·25전쟁에서 천하의 명장으로 용명(勇名)을 떨치게 된다. 특히 김성은은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한국 해병대에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이 붙게 한다.
일단 간부진을 구성한 신현준은 신병들을 교육시킬 하사관 선발에 들어갔다. 말이 좋아 선발이지 강제 차출이었는데, 이 때 선발된 하사관들도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사들이었다.
이와 함께 신병 교육 요원으로서 일할 하사관들을 모집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 나는 당시 진해에 있던 해군 각 부서에서 두세 명씩을 강제 차출하는 방법으로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병대 창설 요원의 차출을 강제했던 각 부서는 평소 맡은 바 직무를 착실하게 잘 수행하고 있던 모범적인 하사관들은 그대로 잔류시켰다. 그리고는 주로 정의감이 강하고 용감하며 씩씩한 사나이들이지만, 가끔 부대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였던 하사관들을 차출해서 보내주었다. 결국 이들이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유명한 해병대 특유의 기질과 전통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신현준, 「노해병의 회고록」, P.105.)
부탁하고, 설득하고, 강제 차출하여 부대 편성에 필요한 장교와 하사관 80명을 확보했다. 사병은 해군 신병 제13기 800여 명 중에서 300명을 선발했다. 해병 1기들 또한 강단 있는 사병들로만 골라 뽑았다.
모병관들이 신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육해공 삼군 안에서 가장 용맹한 부대다. 적을 앞에 두고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여 적을 섬멸해야 하는데 이때 우리도 전멸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륙작전은 진짜 사나이들만이 할 수 있다. 지원할 사람 있나?"
그러자 8백여 명 모두가 손을 들었다 한다.
"너무 많아 300명만 골라 데려 가겠다."
그러고는 그들을 세워 놓아 체격이 완강한 신병을 먼저 고르고, 팔씨름을 시켜 완력이 센 신병이나 싸움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 신병 등 300명을 데리고 왔다.
모병부터 특별한 이런 전통은 강군 해병대로서 면모를 갖추는 계기도 되었지만 지나친 혈기로 불명예스러운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질들이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서 무서운 용맹으로 변했고, 한국전쟁 중 그 어느 군도 따라오지 못할 상승 해병대의 전통을 세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김성은,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P.129.)
'해병대의 뿌리, 신현준'은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장군의 치열했던 삶을 다룬 평전(評傳)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신현준 개인의 삶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복잡다단했던 20세기 초 동북아의 상황을 다룬 이 책의 전반부는 마치 대하소설을 읽는 것 같은 감흥을 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씨줄로 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들의 증언(회고록들과 평전들)을 날줄로 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
책의 후반부는 창군과 6·25전쟁이라는 방대한 역사를 한 눈에 조망하게 해준다.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주요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국방역사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이 책에는 수많은 역사적 비화(?話)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독자들의 흥미를 배가하고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수많은 관련 사진과 도표들을 곁들여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돋보이는 부분은 인간 신현준의 진솔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해병대는 막강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사람들은 신현준 장군이 불같은 성격의 용장(勇將)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신현준 본인이 쓴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다른 장군들이 남긴 회고록들, 그리고 각종 공간사(公刊史)들에 등장하는 신현준이라는 인물은 다정하고 인자한 성품을 지닌 덕장(德將)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신현준은 군인보다는 학자나 종교인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사에 성실하고, 진지하며, 자기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는 효자였으며,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 성품이 그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이끌었을 것이다.
신현준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군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군인이었으며,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치부(致富)와 축재(蓄財)를 하지 않은 청빈한 공직자였다. 또한 신에게 봉사하는 삶을 산 참 종교인이기도 했다.
만주군으로 복무했던 신현준 장군에게는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1952년 10월과 1953년 10월)한 국가 유공자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군인들 중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한 사람은 신현준 장군이 유일하다. 분명한 것은 신현준 장군이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군을 지극히 사랑했던 해병대의 대부(代父)라는 사실이다.
'해병대의 뿌리, 신현준'은 국군 장병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할만한 책이다.
[책속으로 추가]
1949년 2월 1일,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이 신현준 중령을 초대 해병대사령관에 임명하고, 해병대 창설 업무를 맡겼다. 부대를 만들기 전에 먼저 사령관부터 임명한 것이다.
막상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됐지만, 신현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부대의 위치, 병력, 무기, 보급품 등 모든 준비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이렇듯 해병대 창설이 신현준 한 사람에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후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과 함께 일할 유능한 장교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신현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진해 해군통제부 교육부장을 맡고 있는 김성은 중령이었다.
1949년 2월의 어느 날, 신현준이 부인과 함께 김성은의 관사를 찾아갔다. 신현준은 김성은에게 해병대로 전과(轉科)하여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김성은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미 해군에서 선두주자 중의 한 명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김성은 중령으로서는 해군에서 파생되는 신설부대인 해병대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해군 예하이기 때문에 부대의 규모가 작은 것은 물론, 진급의 기회도 그만큼 제한적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열악한 조건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해군에서 쌓은 모든 경력과 기득권을 버리고 과감하게 해병대를 선택한다는 것은 정말 결정하기 힘든 모험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신현준은 일주일 간격으로 세 번이나 김성은을 찾아가 부탁했고, 신현준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한 김성은은 결국 해병대로 전과하게 된다. 신현준은 김성은을 해병대 참모장에 임명했다.
지나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유비의 삼고초려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세 번째까지 찾아오자 나로서도 감동이 되었다.
동시에 '이 분은 진정한 덕장이시다.'라는 생각과 제갈량 같은 뛰어난 전략가도 유비의 삼고초려에 머리 숙이고 출사했다는데, 뛰어난 전략가도 아니고 만주군이나 일본군 같은 군 경험자도 아닌 나를 택해 세 번씩이나 찾아준 그 분의 인격에 감동되었다. 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놓는다는 말이 생각나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마음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제가 사양하는데도 찾아와 주시니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충성스러운 부하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성은,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P.127.)
신현준은 계속해서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 중인 김동하(金東河) 소령과 인천기지사령관 시절의 부하 고길훈(高吉勳) 대위를 찾아가 해병대에서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다. 신현준은 이런 식으로 인재들을 설득하여 해병대 간부진을 구성해나갔다.
신현준의 안목은 정확했다. 김성은과 고길훈, 김동하 세 사람은 후일 6·25전쟁에서 천하의 명장으로 용명(勇名)을 떨치게 된다. 특히 김성은은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한국 해병대에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이 붙게 한다.
일단 간부진을 구성한 신현준은 신병들을 교육시킬 하사관 선발에 들어갔다. 말이 좋아 선발이지 강제 차출이었는데, 이 때 선발된 하사관들도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사들이었다.
이와 함께 신병 교육 요원으로서 일할 하사관들을 모집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 나는 당시 진해에 있던 해군 각 부서에서 두세 명씩을 강제 차출하는 방법으로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병대 창설 요원의 차출을 강제했던 각 부서는 평소 맡은 바 직무를 착실하게 잘 수행하고 있던 모범적인 하사관들은 그대로 잔류시켰다. 그리고는 주로 정의감이 강하고 용감하며 씩씩한 사나이들이지만, 가끔 부대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였던 하사관들을 차출해서 보내주었다. 결국 이들이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유명한 해병대 특유의 기질과 전통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신현준, 「노해병의 회고록」, P.105.)
부탁하고, 설득하고, 강제 차출하여 부대 편성에 필요한 장교와 하사관 80명을 확보했다. 사병은 해군 신병 제13기 800여 명 중에서 300명을 선발했다. 해병 1기들 또한 강단 있는 사병들로만 골라 뽑았다.
모병관들이 신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육해공 삼군 안에서 가장 용맹한 부대다. 적을 앞에 두고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여 적을 섬멸해야 하는데 이때 우리도 전멸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륙작전은 진짜 사나이들만이 할 수 있다. 지원할 사람 있나?"
그러자 8백여 명 모두가 손을 들었다 한다.
"너무 많아 300명만 골라 데려 가겠다."
그러고는 그들을 세워 놓아 체격이 완강한 신병을 먼저 고르고, 팔씨름을 시켜 완력이 센 신병이나 싸움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 신병 등 300명을 데리고 왔다.
모병부터 특별한 이런 전통은 강군 해병대로서 면모를 갖추는 계기도 되었지만 지나친 혈기로 불명예스러운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질들이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서 무서운 용맹으로 변했고, 한국전쟁 중 그 어느 군도 따라오지 못할 상승 해병대의 전통을 세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김성은,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P.129.)
목차
목차
시작하는 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다
격동의 땅, 만주
신해혁명과 청 왕조의 멸망
군벌들의 전국시대
만주의 지배자 장작림과 관동군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군벌
독립군의 전초기지, 간도
만주의 유랑민
만주에 불어온 붉은 바람
굶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
북벌에 나선 중국 국민당
만주사변
만주국 건국
일본군 통역이 되다
동북항일연군의 투쟁
일본군에서 만주군으로
일본군과 만주군 안의 조선인 장교
봉천군관학교 입교
중일전쟁
관동군과 공비
간도특설대
태평양전쟁
열하성에서 팔로군과 싸우다
일본의 패망과 소속을 잃은 조선인들
광복 후의 광복군, 평진대대
허리가 잘린 한반도
해방병단과 국방경비대
27년만의 귀국
천붕(天崩)과 참척(慘慽)의 슬픔
조선해안경비대 장교가 되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여수 14연대반란사건
해병대 창설
해병대의 첫 임무, 진주 공비 토벌
해병대, 제주도로 이동
6·25전쟁 발발과 해병대 증강
인천상륙작전과 한·미 해병대의 우정
UN군의 북진과 중공군 참전
또 다시 참척(慘慽)의 슬픔을 겪다
계속되는 무적해병의 신화
사천강~장단지구전투
가톨릭에 귀의하다
정전협정 체결과 해병 제1여단 창설
4·19의거와 5·16 군사쿠데타의 격랑 속에서
전역과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 유학
외교관으로 변신하다
초대 주 모로코 대사 시절의 비화
생활고에 시달린 전직 해병대사령관
초대 교황청 대사가 되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교황청 대사 퇴임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성실한 가장이며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신현준
이력과 경력
참고문헌
인명색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다
격동의 땅, 만주
신해혁명과 청 왕조의 멸망
군벌들의 전국시대
만주의 지배자 장작림과 관동군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군벌
독립군의 전초기지, 간도
만주의 유랑민
만주에 불어온 붉은 바람
굶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
북벌에 나선 중국 국민당
만주사변
만주국 건국
일본군 통역이 되다
동북항일연군의 투쟁
일본군에서 만주군으로
일본군과 만주군 안의 조선인 장교
봉천군관학교 입교
중일전쟁
관동군과 공비
간도특설대
태평양전쟁
열하성에서 팔로군과 싸우다
일본의 패망과 소속을 잃은 조선인들
광복 후의 광복군, 평진대대
허리가 잘린 한반도
해방병단과 국방경비대
27년만의 귀국
천붕(天崩)과 참척(慘慽)의 슬픔
조선해안경비대 장교가 되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여수 14연대반란사건
해병대 창설
해병대의 첫 임무, 진주 공비 토벌
해병대, 제주도로 이동
6·25전쟁 발발과 해병대 증강
인천상륙작전과 한·미 해병대의 우정
UN군의 북진과 중공군 참전
또 다시 참척(慘慽)의 슬픔을 겪다
계속되는 무적해병의 신화
사천강~장단지구전투
가톨릭에 귀의하다
정전협정 체결과 해병 제1여단 창설
4·19의거와 5·16 군사쿠데타의 격랑 속에서
전역과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 유학
외교관으로 변신하다
초대 주 모로코 대사 시절의 비화
생활고에 시달린 전직 해병대사령관
초대 교황청 대사가 되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교황청 대사 퇴임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성실한 가장이며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신현준
이력과 경력
참고문헌
인명색인
저자
저자
김선덕
저자 김선덕
(金善德)
1961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국방일보 기자로 7년, 국군영화 감독으로 10년,
그리고 국방TV PD로 13년, 도합 30년 동안
오로지 군 매체에서 봉직
저서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本紀 上』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本紀 下』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 함명수』 列傳
『무적해병의 전설, 공정식』 列傳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 列傳
『육군의 산파역, 이응준』 列傳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列傳
(金善德)
1961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국방일보 기자로 7년, 국군영화 감독으로 10년,
그리고 국방TV PD로 13년, 도합 30년 동안
오로지 군 매체에서 봉직
저서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本紀 上』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本紀 下』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 함명수』 列傳
『무적해병의 전설, 공정식』 列傳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 列傳
『육군의 산파역, 이응준』 列傳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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