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바다에 심상의 배를 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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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삶의 성찰적 사유(思惟)를 통한 관조(觀照)와
율격(律格)의 미학(美學)이 빚어내는
『이동훈/이명옥/최부열/김라영/모금자』
5人의 詩世界
如草 허광빈
(시인, 한국문예협회장. 도서출판『영혼의숲』 발행인)
『들어가며』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함께
삶의 성찰적 사유(思惟)를 통한 공감각적 심상(共感覺的心象)
불교에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있다. ('푸른 바다
배 간 자취 찾을 길 없고/청산에는 학 난 흔적 볼 수가 없
네.')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 버리는 느낌, 분명
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은 인간의 욕망을 만
족시키는 가치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언가 울려오는
떨림, 그 미묘함을 소중히 느낀다. 명나라 사진(謝榛)은 그의
사명시화(四溟詩話)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시를 지음에
핍진(逼眞)한 것은 마땅치 않다. "마치 아침에 가서 산을 보
면 청산의 아름다운 빛이 은은하여 사랑스럽고, 안개와 노을
은 변화가 무상하여 무어라 이름 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그
러나 막상 올라가 보면 별반 기이한 경치가 아니고, 오직 바
위 덩어리와 몇 그루의 나무일뿐이다. 멀고 가까움에 본 바
가 같지 않기 때문이니, 묘(妙)는 어렴풋함에 있어, 그러한
속에서 비로소 솜씨가 드러나게 된다." 시에서 입상진의(立
像盡意)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인이 말하
고자 하는 것은 몇 줄의 교훈이거나, 아니면 무어라 할 수도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뿐이다. 그러므로 형상을 세워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해야 한다. 여기서 형상을 세운다는 것
은, 시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말로 표현한다.
서정시는 시인이 스스로 겪은 절절한 경험과 기억, 어떤
대상을 향한 강렬한 매혹과 동경(憧憬)의 흔적을 함축적으
로 담아가는 언어예술이다. 그 안에는 성공적인 해피엔딩의
완결성보다는 미완의 그리움이나 비극적 생의 진실이 핵심
적인 본령으로 농울치고 있게 마련이다. 서정시를 읽는 이들
도 시인의 이러한 특별한 경험과 기억, 매혹과 동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살펴보기도 하고 시인과 동행하면서 전혀 새
로운 삶의 의지를 충일하게 가지기도 한다. 그만큼 서정시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경험적 소통을 전제로 한 대화 양식이
다.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소소한 대상들일지
라도 서정시의 문맥으로 흡수되는 순간 그것은 미학적으로
변형되면서 새로운 의미망을 띠어간다. 이때 시인은 자신만
의 경험과 기억을 거기에 얹어감으로써 스스로를 미학적 존
재로 거듭나게끔 하는 것이다.
(『이동훈/이명옥/최부열/김라영/모금자』) 5人의 시는 서
정시가 갖는 이러한 소통 지향성과 새로운 경험의 제시라는
속성을 가장 격정적이고 아름답게 성취해낸 〈"삶의 성찰적
사유(思惟)를 통한 관조(觀照)와 율격(律格)의 미학(美學)이
빚어내는"〉詩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시는 난
해하지 않고 부자연스럽지 않고 독자 모두를 어떤 동일성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는데, 특별히 5人 공
저 시집 『사유(思惟)의 바다에 심상(心像)의 배를 띄워』를 상
재한다. 시인 자신이 겪어온 남다른 일상에 대한 경험의 너
비와 깊이를 버무려 온전하게 함유함으로써 '다섯 시인의
성향적 시세계를 넉넉하게 만나게끔 해주는 장(場)이 되고
있다. (첫 번째 이동훈 시인의 (『사랑』), 두 번째 이명옥 시인
의 (『길 위의 시선』), 세 번째 최부열 시인의 (『인연』), 네 번
째 김라영 시인의 (『봄을 기다리며』), 다섯 번째 모금자 시인
의 (『마음이 머무는 자리』)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개성 넘치
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러한 시인의 경험에 흔연하게 동
참하는 일이 되며, 그 경험의 내질(內質)을 통해 그들이 우
리에게 선사하는 각자의 삶의 경험을 통한 사물과 소통하고
그것을 선명한 감각으로 재현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발원하
는 것임을 보여주며, 시인 자신에 대한 구별 가능한 개성과
동경을 만나보는 일이 될 것이다. 이번 5인 시집은 그 점에
서 그들의 요람과 무덤이 될 인생의 삶과 처절함에 대한 성
찰, 빛과 그늘, 자긍(自矜)과 치욕의 언어적 현장이 그리움으
로 점철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들 다섯 시인의 詩
세계를 천천히 음미하며 산책해 보기로 한다.
1. 『이동훈 詩人』
신앙적 삶의 관조(觀照)를 통한 믿음 생활의 신실한 자의식
(自意識)을 통해 가닿는 소멸(消滅)의 잔상(殘像)
이동훈 시인의 (『사랑』)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히 시인이
얼마나 사람 좋고 현실 생활을 신앙과 믿음의 뿌리로 지탱
하고 긍정적 사고로 즐기며 시로서 대상을 즉상적(卽象的)
인 시점으로 탐닉하고 성찰하여 그 의미를 도출하는 李시인
만의 진실한 생활인으로서 세상을 바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시인에게서 참된 습관을 토대로 태어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반추하게 된다. 본 시집 1부에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외 4
편, 2부 〈초가을 창문을 열면〉 외 4편, 3부 〈성화聖化 -주님
을 닮아가는 길〉 외 4편, 4부 〈베데스터 연못〉 외 4편, 20
편이 수록되었다. 그 시세계를 여기저기 소요하면서 그 시의
향취를 음미해본다.
당신의 뜻을 음성으로만 알았습니다
고음이면 당신의 피곤함을
저음이면 당신의 화남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뜻을 얼굴표정으로 알았습니다
환한 얼굴은 기쁨인 것을 알았고
화난 얼굴은 성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감춘 얼굴표정, 음성만이
진실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속을 쓸어내리는 아픔을 웃음으로 대신하고
기쁨은 성남으로 답하는 것을 알았고
강인한 것이 여자이고
한없이 약한 것이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나의 목 젓을 흔들릴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눈으로 말합니다
당신의 기쁨 슬픔 아픔 고통까지도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나타내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 이동훈 「사랑은 눈으로 하는 것」 전문
이국의 모랫 바람이 민낯을 스치면
추억의 그리움이 노을빛에 머물고
머언 하늘 흰 구름에 고향의 안부를 묻는다
젊은 날은 모래알 위에 반짝이는 보석
사막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머나먼 타국 낯선 존재의 눈가에
마음속 고된 땀방울이 눈물 되어 흠씬 맺힌다
해거름 녘 바지선 위에 붉게 물든
홍해의 짭조름한 잔물결에 얼비친
선홍빛 산호초 부끄러운 듯 볼 붉히면
바다의 외로움이 파도에 밀려온다
덤프트럭이 모래바람에 날린다
그레이더의 광음과 포크레인의 마찰음이
하루의 시작을 재촉하며 아침을 열면
어머니 생각에 문득
그리운 문장들이 황혼빛에 물든다
- 이동훈 「나의 고향 어머니」 전문
이동훈 시인의 시는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를 섬세
하게 그린 성찰의 기록이다. 처음 화자는 상대의 마음을 음
성의 높낮이와 얼굴의 표정이라는 외형적 신호로 읽어내
려 한다. 그러나 삶의 경험 속에서 그 신호들이 진실의 전부
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웃음 속의 아픔, 성남 속의 기
쁨처럼 인간의 감정은 종종 겉과 속이 어긋난 채 존재하기 때문이다.
詩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비로소 눈이라는 더 깊은
언어에 도달한다. 눈은 말과 표정을 넘어서는 영혼의 징후이
며, 사랑이란 결국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일
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연정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이란 상대의 말이 아니라 침묵까지도 들
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늦은 깨달음의 서정을 담
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은 말과
표정을 넘어, 눈에 스며든 침묵을 읽어내는 일이라는 깨달음
의 시."인 것이다.
이 시인의 (「나의 고향 어머니」)는 타국의 노동과 고향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그리움의 정서를 담담
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시의 배경은 사막과 홍해라는 이국적
공간이지만, 그 풍경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결국 고향과 어
머니의 얼굴이다.
시인은 모래바람, 사막의 태양, 홍해의 잔물결 같은 자연
적 이미지와 텀프트럭·그레이더·포그레인 같은 노동의 기계
적 풍경을 병치하며, 타향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의 현실을 사
실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세계의 대비는 시의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거친 노동의 현장 속에서도 마음은 늘 고
향을 향해 흐르는 내면의 강처럼 움직인다. 특히 "해거름과
황혼"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하루의 노동이 끝나는 시간
에 밀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사막의 고된 땀방울이 눈물이 되고,"/ "붉은 노을과 산호
초의 색채가 감정의 깊이를 더하며,"〉 결국 시의 중심은 타
향의 외로움 속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모성의 기억으로 귀결
된다. 이 시는 화려한 수사보다 경험에서 우러난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낯선 풍경과 고된 노동의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을 조
용히 말한다. "타향에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풍경은 결
국 고향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1) 삶과 자연에 대한 관조와 회화적 이미지
시인이 빚은 시적 상상의 공간은 삶의 현실을 넘어 중력도
때로는 우주의 질서마저 넘어선다. 인간 존재의 내면에서 시
작해 자연의 순환과 신앙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영적 서정을
담은 작품이다. 시는 어둠과 나락,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내
면의 깊은 층위에서 출발하여, 여명의 빛을 통해 존재의 각
성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는 인간이 절망과 혼돈
을 통과하면서도 결국 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을 암시한
다. 이어지는 사계절의 비유는 행복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해석한다. 〈봄의 손길, 여름의 불씨, 가을의 붉은 숨결, 겨울
의 체온〉은 각각 삶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의 온기를 상징하
며, 행복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순환 속에서 형성되
는 깊은 체험임을 보여준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자연적 이미
지가 점차 신앙적 상징으로 옮겨간다. 〈"십자가와 말씀, 성
심의 빛"〉이라는 종교적 언어는 개인의 감정적 행복을 넘어
공동체와 신앙 안에서 완성되는 영적 행복을 드러낸다. 결
국 이 시는 인간의 행복이 단순한 기쁨의 상태가 아니라,
통과 시간, 사랑과 믿음을 통과하여 신성한 빛으로 귀결되는
존재의 여정임을 말한다.
어둠이 육신을 감싸고
몽롱한 정신은 나락으로 떨어지면
무의식은 의식을 깨우고
의식은 우리의 존재를 각인하며
여명의 빛이 우리를 감싼다
봄은 살며시 놓인 한 송이 손길
여름은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씨
가을은 익어 떨어지는 붉은 숨결
겨울은 서로의 체온으로 여미는 한 벌의 믿음
초겨울 빗줄기 사랑 열정 낭만과 믿음이
가늘게 겹쳐 울리는 한 줄기 숨결
하늘 높은 곳에서 향기처럼 내려와
높푸른 구름의 숨결이 마음을 적신다
십자가 위에 걸린 깊은 네 줄기 음성
주님의 숨결이 되어 교회를 감싸고
말씀의 울림은 한 몸의 화음으로 엮여
성심(聖心)의 빛은 행복한 사랑이 되어 흐른다
- 이동훈 「행복」 전문
가슴에 사무친 애달픈 임이여!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을
흐르는 빗물의 마음에 상처 씻으려
지워지지 않는 것은 당신의 환상
그리움이 조각되어 흘러간 세월이
흘러 흘러 강물 되어 내 곁에 떠나도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두 손 모아 받아든 빗물
당신의 고운 얼굴이 투영되어
내 얼굴 비추고 추억의 발자취를 더듬어
마음속에 품으며
나, 간직하리라
아름다운 세월을
즐거웠던 순간을
행복했던 시간을
빗속의 하루
마음속에 빗물 되어 흐르네
- 이동훈 「빗물이 내 마음에 흐를 때」 전문
이동훈의 詩人의(「빗물이 내 마음에 흐를 때」)는 빗물을 매
개로 지나간 사랑과 그리움을 회상하는 정서적 서정시이다.
시인은 빗물을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비
추는 거울로 사용한다. 흐르는 빗물은 세월의 흐름을 상징
하고, 그 속에 투영되는 얼굴은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
을 나타낸다. 특히 〈"두 손에 받아든 빗물 속에"/"임의 얼굴
이 비친다"〉는 장면은 이 시의 핵심 이미지로, 시간이 흘러
도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지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은 이미 지나간 시간일지라도, 빗물처럼 마음
속에서 계속 흐르며 기억을 적신다.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아름다운 세월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며, 그것을
잊기보다 마음속에 간직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지나간 사랑을 삶의 일
부로 받아들이는 잔잔한 회상의 미학을 담고 있다.
"빗물을 통해 지나간 사랑과 추억이 마음속에서 계속 흐르
고 있음을 그린 서정적 회상의 시라 하겠다."
(2) 신앙 속에서 발견하는 일상의 평안의 심상(心象)
다음 시는 ("하루의 시작을 통해 욕망을 비우고 신앙 속에서
평온한 행복을 발견하는 삶의 명상적 기록.")의 시편이다.
육체는 지쳐 혼란한 마음으로 떠밀리는 인생
갈 수 없어 이룰 수 없는 무음의 외침
가벼운 외침에 떨어져 나간 깃털
허공에 날려 눈물처럼 떨어진다
천사의 잔물방울은 허상의 실체
삼십팔 년의 긴 세월 지친 인간의 발걸음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간절함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세상
'낫기를 원하느냐?' 묻는 임
'함께 동행하는 자가 없나이다'
"일어나 함께 가자 함께 가자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는 것이
베네스터 연못" (요5:1~9)
- 이동훈 「베데스터 연못」 전문
하루의 창을 열면
내 마음의 창도 열린다
어제의 피곤함은 뒤로 삼키고
헛된 욕망의 쓰레기는 허공에 날아간다
뒤돌아보면 허공의 잔재가 남아 있을 뿐
나의 자취는 서서히 사라진다
성전의 뜰에 한발을 담고
한발은 삶의 현장에 담고
그 갈림길에 고뇌하며 성전의 계단을 오른다
"주님은 나의 반석, 방패시니"
시편 18절을 생각하며 오늘도 하루를 연다
한 계단 한 계단
걸을 수 있어 감사함으로 오른다
평온함이
나를 감싸고
오늘의 행복을 만끽한다
- 이동훈 「하루의 창을 열면」 전문
이동훈 시인의 작품은 성서적 사건과 개인의 일상적 신앙
체험을 연결한 묵상적 서정시라 할 수 있다. 시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의 이미지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무력함과 기다림을 상징한다. 삼십팔 년의 세월 동안 치유를
기다리는 병자의 모습은, 삶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흔들
리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함께 동행하는
자가 없나이다"〉라는 고백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구원
의 손길을 기다리는 인간의 영적 고독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는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일어나 함께 가자"라
는 부름을 통해 시적 화자는 기다림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신앙적 각성을 경험한다. 이는 기적의 순간을 넘어, 인간이
믿음 속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전환점으로 해석된다.
이어지는 후반부의 「"하루의 창을 열면"」은 이러한 깨달음
이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는가를 보여준다. 어제
의 피로와 욕망을 내려놓고 성전과 삶의 현장 사이에서 균
형을 찾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은, 신앙이 특정한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임을 드러낸
다. 성전의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는 장면은 인간이 매일의
삶 속에서 감사와 믿음으로 자신을 새롭게 세워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결국 이 시는 고통 속에서 부름을 듣고, 그 부름을
따라 일상의 하루를 감사로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담고
있다. 베데스다 연못의 치유 사건이 개인의 삶 속에서 다시
해석되며, 신앙이란 기적의 순간보다 하루를 감사로 시작하
는 태도 속에서 완성된다는 메시지를 시인 자신과 독자에게
겸손하게 전달하고 있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 신앙과 기억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신
앙적 성찰을 통한 묵상의 시편"인 것이다.
2. 『이명옥 詩人』
삶의 자아성찰과 관조를 통한
페이소스(pathos)적 심상(心象)
이명옥 詩人의 『길 위의 시선』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히 시
인이 얼마나 명랑하고 밝고 현실 생활을 낙천과 믿음의 뿌
리로 지탱하고 긍정적 사고로 즐기며 李시인만의 진실한
생활인으로서 실상 버거운 삶을 가슴으로 안아 받아 세상을
힘겨운 가운데 바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시인임을 토대로 태
어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반추하게 된다. 본 시집 1부에 〈엄
마의 품〉 외 4편, 2부 〈같은 듯 다른 하루〉 외 4편, 3부 〈외
길의 끝에서〉 외 4편, 4부 〈강물의 길〉 외 4편, 총 20편이
수록되었다. 이명옥의 시세계를 차분하게 들여다보면서 시
향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그 대상이 있으므로 해서 가능한 것이
며, 그 대상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을 본질로 한
다면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내면의 거울을 볼 줄 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보고
듣느냐를 두고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할 때 시인은 페이소스
적인 정서적 호소력이 있다.
대상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상대성원리가 삶의 진리에 이
어지는 심오한 철학을 느끼게 하며, 또 대상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끼는 페이소스가 강렬하다. 작품 〈엄마의 품
〉,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 등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세계를 표출하였을 때 감동과 언어의 마
력을 공감하게 된다.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의 각 연
에서의 구성적 묘미와 역설 기교를 느끼게 한다. "1연에서는
시간적 긴장감, 2연에서는 대상에 대한 배려, 3연에서는 애
틋한 사랑의 그리움, 4연에서는 역설적인 수사법, 자신의 성
관(誠款)을 통해 감출 수 없는 사랑의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1) "유년의 온기와 성인의 고독을 함께 품은 조용한 위로의 시."
이명옥 시인은 〈"아카시아 향기처럼 지지 않던 당신의 온
기"〉라는 구절은 자연의 향기를 어머니의 사랑과 겹쳐 놓음
으로써,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모성의 영원성을 아름
답게 드러낸다.
여름의 문턱
아카시아 흐드러진 길 위로
어디서 날아왔나 코끝 간지럽히는 달큰한 향기
걸음 멈추고 한참을 올려다보던
하얀 꽃송이마다 매달린 어린 날의 꿈
등줄기 적신 땀방울 식힐 새도 없이
골목 끝까지 달려가 안기던 곳
세상에서 가장 깊고 포근했던 엄마의 품
아카시아 향기처럼 지지 않던 당신의 온기
작은 손 꼭 잡고 걷던 저녁노을 길
엄마의 품은 언제나
나를 키우고 잠재우던 아늑한 둥지였습니다
- 이명옥 「엄마의 품」 전문
밤새 뒤척인 고단한 숨결을 지우려
익숙한 마스크로 표정을 덮습니다
어깨 위 내려앉은 삶의 무게와
차마 들키고 싶지 않은 얼룩진 마음들
짙은 화장 아래 겹겹이 봉인합니다
투명한 가면 너머
억지로 피워낸 마른 미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안부를 전하지만
진심은 가장 깊은 서랍에 넣어둔 채
오늘도 씩씩한 척 세상 속을 걷습니다
붉게 칠한 입술 위로
삼켜버린 아픈 이야기들이 잠든 시간
애써 웃음 짓느라 고생한 당신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가만히 등을 토닥입니다
- 이명옥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 전문
이명옥의 두 편의 시를 한마디로 함축해 평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상처와 기억을 품은 인간의 내면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
만진 서정."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기억은 향기로,
상처는 미소로 감싸 안은 인간 내면의 서정적 기록."/"유년
의 온기와 성인의 고독을 함께 품은 조용한 위로의 시."/ "삶
의 상처를 숨기면서도 끝내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
선."〉 "이 시편은 기억의 향기와 삶의 가면 사이에서 인간의
상처와 위로를 동시에 길어 올린 서정적 내면의 기록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으로 빛이 먼저 들어온다
어제와 닮은 풍경이
오늘을 조용히 열어준다
부엌의 공기
천천히 움직이는 시간
모든 것이 무사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하루의 기적이 된다
나는 같은 하루를 바라며
다른 하루를 살아낸다
- 이명옥 「같은 듯 다른 하루」 전문
함께 있어도 외롭다면
우리는 무소의 뿔을 달고
나아가야 한다
영원이라 믿고 걸어온 시간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외면해온 순간들을
기억한다
후회는 접어두고
앞으로 가야 할 때
같은 길을 걸어온 우리는
갈래 길에 서서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저마다의 별을 향해
서로 다른 길로 떠난다
- 이명옥 「외길의 끝에서」 전문
李 시인의 시는 "평범한 하루의 고요한 기적과 결국 각자
의 길로 떠나는 인간 존재의 고독을 담담하게 성찰한 서정
적 사유이다." 〈"나는 같은 하루를 바라며/다른 하루를 살
아낸다."〉 이 구절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일이 조금
씩 다른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시인은 평범한 아침
의 풍경을 통해 '반복 속의 변화'라는 삶의 역설을 조용히 드
러낸다. 같은 듯 보이는 하루가 사실은 매번 새로운 시간이
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또한 매일 새롭게 만들
어진다는 점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또 다른 인상적인 구절은〈"저마다의 별을 향해/서로 다른
길로 떠난다."〉 이 문장은 함께 걸어온 시간 이후에도 결국
인간은 각자의 운명과 삶의 방향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별'이라는 이미지는 각자의 꿈, 삶의 의미, 혹은 존재의 목
적을 암시하며, 시는 관계의 따뜻함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존재적 고독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이 시편은 반복되는 하루
의 평온과 관계의 끝에서 마주하는 고독을 통해, 인간이 결
국 각자의 별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임을 담담하고 서정적으
로 보여주고 있다.
(2) 인연을 통한 존재론적 그리움의 미학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고 인연에 따라 결혼
을 하는 등 생물학적, 사회적 욕구를 채움에도 불구하고 인
간은 외롭고 고독하며 늘 무엇을 그리워한다.
그 존재의 근원을 찾지 못하였기에 이명옥 시인은 그 존재
론적 근원을 찾기 위해 가슴에 있는 큰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시를 쓰고 공허함을 시로 표출하고 있다
친구야
시장가자
시장에 가서
구경도 하고
사람 결에 휩쓸리다 보면
좋은 생각 하나쯤
불쑥 떠오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시장에 가자
웅성웅성
사람 모인 곳에 섞여
소리도 듣고
휘적휘적 길을 걷다
문을 열면 풍경소리가 들리는
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자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 둘 곳 없을 때
아무 말 말고
시장에 가자
- 이명옥 「시장에 가자」 전문
초점 없는 안개 속을 걷느라
길을 잃고 헤매던 날들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마다
세상을 바로 볼 안경을 간절히 찾았다
비로소 안경 너머 선명해진 길 위로
지문처럼 몸에 새겨진 흉터들이 보인다
이것은 상처가 아니라 나만의 이정표
잠시 쉬어도 돌아가도 괜찮다는 응원이다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걷는 길
아물어버린 흉터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오늘도 내 몸이 기억하는 지도를 믿고
담담히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다
- 이명옥 「몸이 기억하는 지도」 전문
李 詩人의 詩 「시장에 가자」는 복잡한 생각과 마음의 막힘
을 사람 사는 소리와 일상의 풍경 속에서 풀어내려는 생활
철학을 담고 있다. 시장의 웅성거림, 발걸음, 찻집의 풍경소
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의 답을 거창한 곳이 아닌 일
상의 현장에서 찾으라는 따뜻한 제안이 된다. 시는 '시장'이
라는 공간을 통해 사람 속에서 치유되는 인간의 마음을 소
박하고 정겹게 그려낸다.
(「몸이 기억하는 지도」) 이 詩는 길을 잃었던 시간과 상처
의 흔적을 삶을 안내하는 이정표로 바라보는 성찰의 시이다.
시인은 흉터를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알려주는
지도로 재해석하며,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결국 삶을 이끄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
과 '몸이 기억하는 지도'라는 표현은 삶의 고통을 성장의 방
향으로 바꾸는 깊은 사유를 드러낸다.
한 편은 사람 속에서 마음을 풀어내는 일상의 위로를, 다
른 한 편은 상처 속에서 길을 찾는 존재의 성찰을 보여주며
삶을 따뜻하게 견디는 방식을 말하는 이명옥 시인만의 삶의
옹울한 면을 우려낸 울림의 시편이다.
3. 『최부열 詩人』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과 관조(觀照)의 여정으로
빚어내는 철학적 선언
최부열 詩人의 『인연』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히 崔시인은
서문序文에서 화가 '폴 고갱'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명작을
인류에게 남김으로써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에게 저마다의 삶을 관조하고 인생을 조망하는데 한줄기 사
유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혈연 속에서 시작해 사회 속에서 피어나고, 다
시 알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여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짧은 순간 속에서도 피와 땀과 눈물로 땅
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삶은 더욱 숭
고하고 소중하다. 문학을 통해 작품을 남긴다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붙잡아 삶의 본질을 더듬어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록 사유는 깊지 않을지라도, 이 글들이 자신을 돌
아보는 모든 이의 마음에 봄 햇살 같은 따뜻한 사색의 순간
이 되기를 바란다.
얼마나 밝고 반듯한 마음가짐과 배려와 믿음의 뿌리로 지
탱하고 긍정적 사고로 세상을 바로 보고 살아가는 성실한
시인임을 토대로 태어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반추하게 된다.
본 시집 1부에 〈내가 바라는 건〉 외 4편, 2부 〈구름〉 외 4
편, 3부 〈고귀한〉 외 4편, 4부 〈달과 당신〉 외 4편, 총 20편
이 수록되었다. 최부열 시인의 내면과 사물이 만나는 접점에
서 형성되어, 감각의 구체를 통해 어떤 근원적 사유로 번져
가는 미학적 특성을 일관되게 보여준 결실의 잠언처럼 펼쳐
진 시편 속으로 시향을 음미하며 사색하기로 하자.
(1) 숭고한 삶의 철학적 사유(思惟)를 통한 여백(餘白)의 함의(含意)
사랑이 붉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정열이_
오월의 장미빛에 취하였거나
몸 안을 흐르는
선홍색의 혈액에서 가져온
채색일 것이다
뜨거운 태양이거나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만이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은 아닌 것을
살아온 시간의 타래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깨닫는다
선명하고 분명한 것들은
짧은 시간 속에서도 퇴색되어 가고
무엇을 하였고 하지 않았는가
모든 순간에
우리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마음에 품고 있는
낡은 나침반은
지금도 갈 길을 가리킨다
제 가슴보다 큰 사랑을 안고
사람들은 오늘도 말이 없다
- 최부열 「사랑」 전문
하루에 네 번 오는 읍내 버스
다랭이 논둑 같은 시골길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흘러서 간다
두툼한 점퍼에 모자를 눌러쓴
노인 서넛이 병원으로 장터로
지친 다리로 무심히
차창 밖을 바라보면
봄나물 찾던 숲길
호미질 하던 비탈 밭
황소와 써래질 하던 무논마저
지나간 세월만큼 손에 잡힐 듯 저만치
빠르게 지나쳐 간다
하루에 버스는 몇 번이고 지나는데
좋은 시절 다시 오지 않고
자갈길 자욱한 먼지 속에서
살아갈 시간만을 더듬은 세월
첫 차에 등교하는 아이들 돌아볼 새 없이
흘린 땀방울
막차에 모두 모인 저녁 밥상에
어둠 짙도록 부뚜막의 물기는 마르지 않았다
모두 제 길을 가고
전화는 가까워도 만남은 멀다
이제는 아이들 없는 시골 버스만이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다
인생은 다 그런 거라고 그르렁거리며
- 최부열 「시내버스」 전문
최부열 시인의 詩 「사랑」과 (「시내버스」)는 서로 다른 장면
을 다루고 있지만, 철학적 시선에서 보면 인간의 시간과 존
재, 그리고 삶의 방향을 사유하게 하는 시로 읽힌다.
(「사랑」) 감정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사랑의 철학, 이 시는 사
랑을 흔히 말하는 붉은 열정이나 불꽃같은 감정으로만 보지
않는다. 시인은 오월의 장미빛, 혈액의 선홍색 같은 상징을 언
급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님을 조용히 말한다.
살아온 시간 속에서 깨닫게 되는 사랑은 격렬한 감정보다
오래 남는 진심의 방향성이다. 〈"마음에 품고 있는 낡은 나
침반"〉이라는 표현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
리키는 내면의 윤리적 기준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에서 사랑은 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시간이 지
나도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존재의 나침반이며, 말없이
품고 살아가는 삶의 깊은 진실로 나타난다.
(「시내버스」) 이 시는 "시간 속을 지나가는 인간 존재",(「시
내버스」)는 한적한 시골 버스의 풍경을 통해 인간의 삶을 시
간의 흐름 속에 놓인 존재로 바라본다. 하루에 몇 번씩 같은
길을 오가는 버스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
가는 방식을 상징한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논과 밭, 과거
의 노동과 가족의 기억들은 모두 지나간 삶의 흔적이다. 그
러나 버스는 계속 다니고, 사람들은 늙고, 아이들은 떠난다.
이 詩는 결국 인간이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진실을 말한다.
삶은 되돌릴 수 없고,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최 시인이 살
아온 삶의 상징적 숨결이 가슴 깊은 곳에서 뼛속까지 흐르
는 내면의 외침인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의 〈"인생은 다 그런 거라고 그르렁거리며"〉
라는 구절은 체념이 아니라, 삶의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최 시
인 자신과 독자를 향한 존재적 깨달음의 외침일 것이다.
비탈진 산 중턱
커다란 떡갈나무
갈색의 마른 잎을 떨구며 서 있다
봄비에 젖은
가지 끝마다 귀를 열어
끝없이 들었던 생의 이야기
새는 둥지를 원하고
곤충은 원망하듯 귀를 갉기도 했다
가려운 곳을 기대오는 산짐승
한걸음 움직이지 않아도
내줄 것 들어줄 일은
가을 낙엽처럼 쌓여만 간다
호젓하게 비 오는 밤과
저마다 향기를 가진 바람들
다가왔다 사라지는
모든 것을 품고도 생명이 사라진 듯
고요한 어디에 뜨거운
태양의 기운이 깃들어 있는지
대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나무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다
추운 계절이 오면 흰 눈이 쌓이고_
산은 길을 잃은 짐승처럼
방황할 것이다
열매를 모두 떨구고
마지막 잎새도 흔들리는
나무가 지난 계절에 그랬듯이
작은 생명과 겨울을 버틸 것이다
소리도 없이 산을 지킬 것이다
- 최부열 「고귀한」 전문
재 너머 울울한 산에
오래된 절
산사는 고즈넉이
구름처럼 세월은 가고
보퉁이 이고 가던 산길에는
인적이 없다
다랑논 비탈밭에 기대어
열둘을 낳고
아홉을 키워낸 할머니에게
부족한 것은 많고
소망은 깊었다
새로 바른 문풍지처럼
환하게 보였던 기도 길에는
어미 품에 안기던 얼굴과 목소리
체온마저 따라가는 회한이 있었다
약사여래 앞에 절을 하고
시든 감꽃처럼 빌었을 당신
얼마큼의 기도로
위로 할 수 있는지
고개 넘어오던
그 옛날 오솔길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 최부열 「위로(慰勞)할 수 있다면」 전문
최 詩人의 시 (「고귀한」)는 "존재의 침묵과 자연의 윤리" 칸
트는 인간은 감각과 이성의 틀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시에서 떡갈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묵묵히 존재하는 삶의 상징이다. 새와 곤충, 짐승들이 나무를
찾아와 기대고 상처를 남기고 떠나지만, 나무는 한걸음도 움
직이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나무는 베풂이
나 희생을 의식하지 않는 존재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말
없이 주고, 말없이 견디며, 말없이 시간을 통과한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삶을 비추는 철학적 은유가 된다. 삶
의 고귀함은 거대한 행위나 영웅적 결단에서 오는 것이 아
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계절을 견디며 존재하는 태도
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시에서 '고귀함'이란 특별한 가치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끝까지 지켜내는 침묵의 힘이다.
최 시인의 (「위로(慰勞)할 수 있다면」) 이 시는 산사와 할머
니의 삶을 통해 인간의 고단한 생애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기도를 보여준다. 열둘을 낳아 아홉을 키워낸 삶, 다랑논과
비탈밭의 노동, 그리고 절 앞에서의 기도는 모두 인간 존재
가 짊어진 고통과 희망의 기록이다. 특히 시 속의 산사는 단
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 머무는 장소로 등장한다.
사람은 사라지고 길도 비어 있지만, 기도의 흔적과 삶의 체
온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이 시는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얼마큼의 기도
로 위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종교적 물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며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위로의 한계와 가능성을 묻는 철학적
물음이다.
두 시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장면을 통해 존재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나무는 말없이 산을 지키며 존재
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산사는 인간의 삶과 기도의 흔적을
통해 기억의 위로를 남긴다. 결국 이 시들은 인간의 삶이란
자연처럼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서로의 고통을 완전히 위로
할 수는 없어도 그 기억을 바라보는 일 속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의 여정임을 보여준다.
(2) 가파른 삶을 진중하게 '성찰'하는 '사유'의 절창
"'서정'은 사물의 이치를 순간적으로 포착·표현하는 원리
이다. 물론 이때의 '순간'은 일회적 시간성의 개념이 아니라
'충만한 현재성'으로서의 순간이다. 말하자면 서정시가 구현
하는 '순간'은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통합한 '충만한 현
재형'으로서의 강렬하고 집중된 시간의 형식이다. 그래서 시
적 '순간'은 그야말로 오랜 경험과 시간이 반복·축적되어 있
는 집중의 형식으로서의 '순간'이 된다. 우리 시대의 서정 시
인들은 바로 그 순간의 형식을 통해 '충만한 현재형'으로서
의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침묵의 파문』, 유성호)
최부열 시인의 (「구도의 씨앗」), (「달과 당신」), 「잠」은 서로
다른 정경을 그리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삶의 가파른 비탈
을 묵묵히 걸어가는 인간 존재의 성찰이 깊게 흐른다. 이 세
편의 시는 자연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추
며, 고통과 기다림, 그리고 견딤의 시간을 사유하는 조용하
지만 깊은 절창을 이루고 있다.
상사화 예쁘다 하여
전라도 영광 산사로 향한다
세상사에는 모두 때가 있다는데
속세가 아닌 곳도 그러하다
상사화 꽃잎은
떠난 연인의 눈물같이
붉은 얼룩만 남기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줄기
사랑을 잃은 서러움에
일어설 줄 모른다
땅으로 숙어지는 꽃대는
아래로 낮춰지는 육신
낮추어 되뇌이는 一向의 마음
꽃도 잎도 아닌 씨앗의 구도자
산사에는 꽃잎이 지고
하루가 저문다
석등은 가만히
예불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단청은 달빛에 젖어 황홀한 꿈을 꾼다
씨앗 품은 꽃대가 법당에 피어 있다
- 최부열 「구도의 씨앗」 전문
초저녁달에
살이 올랐다
제 마음 그대로여도
열어주는 것 같을 수 없지
반쪽으로 소담하게 부풀어오면
뜻 모를 따스함이 이슬처럼 스며든다
제 흥에 겨웠던 밤들이 지나고 만월도
시나브로 옷깃을 여미면
찬바람 속에서 별자리 바라며
네가 어디서 얼만큼으로
사위는지 난 궁금하다
여윈 얼굴 안쓰러워
달력을 짚어보고
기다림도 행복이라
시선은 너에게 향한다
- 최부열 「달과 당신」 전문
하루가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른다
오늘을 지탱한 지친 몸을
낮게 뉘우고
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베갯잇에서 실처럼 풀어지는
말과 손짓들
나를 흔들던 세상에
이불을 끌어 돌아눕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두가 잠들 시간
가슴엔 아직 깨어 있는 돌들이
깨뜨리고 깨뜨려
먼지처럼 날려야 하는데
생각은 어느새 꿈으로 따라와
거칠게 나를 ?는다
뒤척이다 바라본 새벽하늘
별은 밤하늘을 지키고 있다
괜찮아 괜찮다
별이 깜빡거린다
- 최부열 「잠」 전문
삶의 비탈에서 피어나는 구도의 사유 - (「구도의 씨앗」)
이 시에서 상사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사랑과 상실을 통
과한 존재의 수행적 상징으로 등장한다. 붉은 꽃잎이 떠난
연인의 눈물처럼 얼룩져 있고, 비스듬히 기운 줄기는 사랑을
잃은 존재의 자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기울어짐은 단순
한 상처가 아니라 낮아짐과 깨달음의 몸짓이다. 땅으로 숙어
지는 꽃대는 스스로를 낮추는 수행자의 육신이며, 꽃도 잎도
아닌 씨앗의 상태는 생의 본질을 향한 구도의 시간을 암시
한다. 산사에 내려앉은 달빛과 예불 소리 속에서 꽃대가 법
당에 피어 있다는 마지막 장면은, 고통과 상실을 통과한 존
재가 결국 내면의 깨달음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달과 당신」) 이 시에서 달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기다림과 사랑의 시간성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초저녁달에
서 만월로, 그리고 다시 여위어 가는 달의 변화는 인간 감정
의 리듬과 겹쳐진다. 시인은 달의 변화 속에서 사랑의 시간
과 마음의 온도를 읽어낸다. 특히 〈"기다림도 행복이라"〉는
구절은 사랑의 본질이 소유나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다리는 시간 자체에 깃든 의미임을 보여준다. 이 시는 결국
사랑을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존재의 체온으로 바라보는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잠」은 하루를 견디고 돌아온 인간이 마주하는 내면의 어
둠과 화해의 과정을 그린 시이다. 낮 동안 지탱해 온 삶의 무
게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가슴엔 아직 깨어
있는 돌들이 서걱거린다"〉는 구절은 인간 내면에 남아 있는
상처와 기억을 상징한다. 그것들은 깨뜨리고 날려버려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서 별이 깜빡이며 〈"괜찮아 괜찮
다"〉고 속삭인다. 이 장면은 절망을 극복하는 거창한 선언
이 아니라, 우주적 침묵 속에서 건네는 작은 위로이다. 인간
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별빛 같은 위로 속에
서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결국 최 시인은 습작의 내공이 엿보이는 이 시편들은 가파
른 삶의 비탈을 걸어온 인간이 자연과 시간 속에서 자신을
비추며, 고통과 기다림을 견디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성찰하
는 깊은 사유의 절창이라 할 수 있다.
4. 『김라영 詩人』
기다리는 시간과 삶을 견디는 존재(存在)의
성찰 자체에 깃든 의미
김라영 詩人의 (『봄을 기다리며』)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
히 金 詩人은 서문序文에서 〈"우리는 붙잡지 못한 것들을 아
쉬워하며 살아가듯 이 시들은 늦게 찾아온 마음의 기록이
다."〉,〈"설렘 속에 아직 부족하지만 남겨진 발자국처럼 말
하지 못한 것들이 조용히 나를 써내려갔다."〉라고 말한다.
그의 사유와 감각은 자연 형상의 속성을 매우 새로운 이미
지로 드러내면서 자신의 시적 개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만
큼 시인에게 자연 형상은 순수한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자
신의 사유와 감각을 투사하는 상상적 실재인 동시에, 인간
보편의 존재론을 성찰케 해주는 물리적 상관물이 되기도 한
다. 金 詩人의 본 시집 1부에 〈연두빛 봄날〉 외 4편, 2부 〈고
향 스케치(夏)〉 외 4편, 3부 〈가을 잔상〉 외 4편, 4부 〈어느
날 문득〉 외 4편, 총 20편이 수록되었다. 오랜 침묵과 그리
움으로 가 닿는 근원적 사유와 감각을 향한 사계의 추억어
린 시편을 따라 청초한 시향의 숨결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아름다운 계절은
너의 손을 잡고
내게로 온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햇살처럼
어느 날은 비가 되고
바람이 되어
때로는 고요한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와
내 마음의 풍경 앞에서
살갑게 바라보며 속삭인다
인생이 그리 대단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네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행복은
흔들림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진솔한 순간의 마음이라고
- 김라영 「너라는 계절」 전문
아침 이슬 머무는 오솔길
은은한 향이 짙어지면
마음자리 달콤한 숨결처럼
가던 길 멈춰 서게 한다
향기에 취해 길을 서성이면
순수했던 젊은 날의 그리움
바람에 꽃잎 되어 흩어지고
기억 너머 두고 온 추억이
보랏빛 향기로 물들면
막 피어난 꽃처럼
수줍던 첫사랑이 봄바람에 벙근다
아련한 추억 가슴속에 스며들면
안개 속으로 손 내밀 듯
아스라이 피어나는 너에게
흐드러진 꽃봉오리
엽신에 담아
달빛 서린 창가에 안부를 묻는다
- 김라영 「라일락꽃 엽서」 전문
김라영 詩人의 「너라는 계절」과 (「라일락꽃 엽서」)는 서로
다른 정서를 품고 있지만, 두 詩 모두 여성적 감수성의 은은
한 시상 전개로 삶과 사랑, 그리고 기억을
율격(律格)의 미학(美學)이 빚어내는
『이동훈/이명옥/최부열/김라영/모금자』
5人의 詩世界
如草 허광빈
(시인, 한국문예협회장. 도서출판『영혼의숲』 발행인)
『들어가며』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함께
삶의 성찰적 사유(思惟)를 통한 공감각적 심상(共感覺的心象)
불교에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있다. ('푸른 바다
배 간 자취 찾을 길 없고/청산에는 학 난 흔적 볼 수가 없
네.')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 버리는 느낌, 분명
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은 인간의 욕망을 만
족시키는 가치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언가 울려오는
떨림, 그 미묘함을 소중히 느낀다. 명나라 사진(謝榛)은 그의
사명시화(四溟詩話)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시를 지음에
핍진(逼眞)한 것은 마땅치 않다. "마치 아침에 가서 산을 보
면 청산의 아름다운 빛이 은은하여 사랑스럽고, 안개와 노을
은 변화가 무상하여 무어라 이름 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그
러나 막상 올라가 보면 별반 기이한 경치가 아니고, 오직 바
위 덩어리와 몇 그루의 나무일뿐이다. 멀고 가까움에 본 바
가 같지 않기 때문이니, 묘(妙)는 어렴풋함에 있어, 그러한
속에서 비로소 솜씨가 드러나게 된다." 시에서 입상진의(立
像盡意)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인이 말하
고자 하는 것은 몇 줄의 교훈이거나, 아니면 무어라 할 수도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뿐이다. 그러므로 형상을 세워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해야 한다. 여기서 형상을 세운다는 것
은, 시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말로 표현한다.
서정시는 시인이 스스로 겪은 절절한 경험과 기억, 어떤
대상을 향한 강렬한 매혹과 동경(憧憬)의 흔적을 함축적으
로 담아가는 언어예술이다. 그 안에는 성공적인 해피엔딩의
완결성보다는 미완의 그리움이나 비극적 생의 진실이 핵심
적인 본령으로 농울치고 있게 마련이다. 서정시를 읽는 이들
도 시인의 이러한 특별한 경험과 기억, 매혹과 동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살펴보기도 하고 시인과 동행하면서 전혀 새
로운 삶의 의지를 충일하게 가지기도 한다. 그만큼 서정시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경험적 소통을 전제로 한 대화 양식이
다.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소소한 대상들일지
라도 서정시의 문맥으로 흡수되는 순간 그것은 미학적으로
변형되면서 새로운 의미망을 띠어간다. 이때 시인은 자신만
의 경험과 기억을 거기에 얹어감으로써 스스로를 미학적 존
재로 거듭나게끔 하는 것이다.
(『이동훈/이명옥/최부열/김라영/모금자』) 5人의 시는 서
정시가 갖는 이러한 소통 지향성과 새로운 경험의 제시라는
속성을 가장 격정적이고 아름답게 성취해낸 〈"삶의 성찰적
사유(思惟)를 통한 관조(觀照)와 율격(律格)의 미학(美學)이
빚어내는"〉詩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시는 난
해하지 않고 부자연스럽지 않고 독자 모두를 어떤 동일성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는데, 특별히 5人 공
저 시집 『사유(思惟)의 바다에 심상(心像)의 배를 띄워』를 상
재한다. 시인 자신이 겪어온 남다른 일상에 대한 경험의 너
비와 깊이를 버무려 온전하게 함유함으로써 '다섯 시인의
성향적 시세계를 넉넉하게 만나게끔 해주는 장(場)이 되고
있다. (첫 번째 이동훈 시인의 (『사랑』), 두 번째 이명옥 시인
의 (『길 위의 시선』), 세 번째 최부열 시인의 (『인연』), 네 번
째 김라영 시인의 (『봄을 기다리며』), 다섯 번째 모금자 시인
의 (『마음이 머무는 자리』)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개성 넘치
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러한 시인의 경험에 흔연하게 동
참하는 일이 되며, 그 경험의 내질(內質)을 통해 그들이 우
리에게 선사하는 각자의 삶의 경험을 통한 사물과 소통하고
그것을 선명한 감각으로 재현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발원하
는 것임을 보여주며, 시인 자신에 대한 구별 가능한 개성과
동경을 만나보는 일이 될 것이다. 이번 5인 시집은 그 점에
서 그들의 요람과 무덤이 될 인생의 삶과 처절함에 대한 성
찰, 빛과 그늘, 자긍(自矜)과 치욕의 언어적 현장이 그리움으
로 점철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들 다섯 시인의 詩
세계를 천천히 음미하며 산책해 보기로 한다.
1. 『이동훈 詩人』
신앙적 삶의 관조(觀照)를 통한 믿음 생활의 신실한 자의식
(自意識)을 통해 가닿는 소멸(消滅)의 잔상(殘像)
이동훈 시인의 (『사랑』)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히 시인이
얼마나 사람 좋고 현실 생활을 신앙과 믿음의 뿌리로 지탱
하고 긍정적 사고로 즐기며 시로서 대상을 즉상적(卽象的)
인 시점으로 탐닉하고 성찰하여 그 의미를 도출하는 李시인
만의 진실한 생활인으로서 세상을 바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시인에게서 참된 습관을 토대로 태어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반추하게 된다. 본 시집 1부에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외 4
편, 2부 〈초가을 창문을 열면〉 외 4편, 3부 〈성화聖化 -주님
을 닮아가는 길〉 외 4편, 4부 〈베데스터 연못〉 외 4편, 20
편이 수록되었다. 그 시세계를 여기저기 소요하면서 그 시의
향취를 음미해본다.
당신의 뜻을 음성으로만 알았습니다
고음이면 당신의 피곤함을
저음이면 당신의 화남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뜻을 얼굴표정으로 알았습니다
환한 얼굴은 기쁨인 것을 알았고
화난 얼굴은 성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감춘 얼굴표정, 음성만이
진실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속을 쓸어내리는 아픔을 웃음으로 대신하고
기쁨은 성남으로 답하는 것을 알았고
강인한 것이 여자이고
한없이 약한 것이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나의 목 젓을 흔들릴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눈으로 말합니다
당신의 기쁨 슬픔 아픔 고통까지도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나타내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 이동훈 「사랑은 눈으로 하는 것」 전문
이국의 모랫 바람이 민낯을 스치면
추억의 그리움이 노을빛에 머물고
머언 하늘 흰 구름에 고향의 안부를 묻는다
젊은 날은 모래알 위에 반짝이는 보석
사막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머나먼 타국 낯선 존재의 눈가에
마음속 고된 땀방울이 눈물 되어 흠씬 맺힌다
해거름 녘 바지선 위에 붉게 물든
홍해의 짭조름한 잔물결에 얼비친
선홍빛 산호초 부끄러운 듯 볼 붉히면
바다의 외로움이 파도에 밀려온다
덤프트럭이 모래바람에 날린다
그레이더의 광음과 포크레인의 마찰음이
하루의 시작을 재촉하며 아침을 열면
어머니 생각에 문득
그리운 문장들이 황혼빛에 물든다
- 이동훈 「나의 고향 어머니」 전문
이동훈 시인의 시는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를 섬세
하게 그린 성찰의 기록이다. 처음 화자는 상대의 마음을 음
성의 높낮이와 얼굴의 표정이라는 외형적 신호로 읽어내
려 한다. 그러나 삶의 경험 속에서 그 신호들이 진실의 전부
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웃음 속의 아픔, 성남 속의 기
쁨처럼 인간의 감정은 종종 겉과 속이 어긋난 채 존재하기 때문이다.
詩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비로소 눈이라는 더 깊은
언어에 도달한다. 눈은 말과 표정을 넘어서는 영혼의 징후이
며, 사랑이란 결국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일
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연정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이란 상대의 말이 아니라 침묵까지도 들
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늦은 깨달음의 서정을 담
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은 말과
표정을 넘어, 눈에 스며든 침묵을 읽어내는 일이라는 깨달음
의 시."인 것이다.
이 시인의 (「나의 고향 어머니」)는 타국의 노동과 고향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그리움의 정서를 담담
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시의 배경은 사막과 홍해라는 이국적
공간이지만, 그 풍경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결국 고향과 어
머니의 얼굴이다.
시인은 모래바람, 사막의 태양, 홍해의 잔물결 같은 자연
적 이미지와 텀프트럭·그레이더·포그레인 같은 노동의 기계
적 풍경을 병치하며, 타향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의 현실을 사
실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세계의 대비는 시의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거친 노동의 현장 속에서도 마음은 늘 고
향을 향해 흐르는 내면의 강처럼 움직인다. 특히 "해거름과
황혼"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하루의 노동이 끝나는 시간
에 밀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사막의 고된 땀방울이 눈물이 되고,"/ "붉은 노을과 산호
초의 색채가 감정의 깊이를 더하며,"〉 결국 시의 중심은 타
향의 외로움 속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모성의 기억으로 귀결
된다. 이 시는 화려한 수사보다 경험에서 우러난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낯선 풍경과 고된 노동의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을 조
용히 말한다. "타향에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풍경은 결
국 고향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1) 삶과 자연에 대한 관조와 회화적 이미지
시인이 빚은 시적 상상의 공간은 삶의 현실을 넘어 중력도
때로는 우주의 질서마저 넘어선다. 인간 존재의 내면에서 시
작해 자연의 순환과 신앙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영적 서정을
담은 작품이다. 시는 어둠과 나락,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내
면의 깊은 층위에서 출발하여, 여명의 빛을 통해 존재의 각
성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는 인간이 절망과 혼돈
을 통과하면서도 결국 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을 암시한
다. 이어지는 사계절의 비유는 행복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해석한다. 〈봄의 손길, 여름의 불씨, 가을의 붉은 숨결, 겨울
의 체온〉은 각각 삶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의 온기를 상징하
며, 행복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순환 속에서 형성되
는 깊은 체험임을 보여준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자연적 이미
지가 점차 신앙적 상징으로 옮겨간다. 〈"십자가와 말씀, 성
심의 빛"〉이라는 종교적 언어는 개인의 감정적 행복을 넘어
공동체와 신앙 안에서 완성되는 영적 행복을 드러낸다. 결
국 이 시는 인간의 행복이 단순한 기쁨의 상태가 아니라,
통과 시간, 사랑과 믿음을 통과하여 신성한 빛으로 귀결되는
존재의 여정임을 말한다.
어둠이 육신을 감싸고
몽롱한 정신은 나락으로 떨어지면
무의식은 의식을 깨우고
의식은 우리의 존재를 각인하며
여명의 빛이 우리를 감싼다
봄은 살며시 놓인 한 송이 손길
여름은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씨
가을은 익어 떨어지는 붉은 숨결
겨울은 서로의 체온으로 여미는 한 벌의 믿음
초겨울 빗줄기 사랑 열정 낭만과 믿음이
가늘게 겹쳐 울리는 한 줄기 숨결
하늘 높은 곳에서 향기처럼 내려와
높푸른 구름의 숨결이 마음을 적신다
십자가 위에 걸린 깊은 네 줄기 음성
주님의 숨결이 되어 교회를 감싸고
말씀의 울림은 한 몸의 화음으로 엮여
성심(聖心)의 빛은 행복한 사랑이 되어 흐른다
- 이동훈 「행복」 전문
가슴에 사무친 애달픈 임이여!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을
흐르는 빗물의 마음에 상처 씻으려
지워지지 않는 것은 당신의 환상
그리움이 조각되어 흘러간 세월이
흘러 흘러 강물 되어 내 곁에 떠나도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두 손 모아 받아든 빗물
당신의 고운 얼굴이 투영되어
내 얼굴 비추고 추억의 발자취를 더듬어
마음속에 품으며
나, 간직하리라
아름다운 세월을
즐거웠던 순간을
행복했던 시간을
빗속의 하루
마음속에 빗물 되어 흐르네
- 이동훈 「빗물이 내 마음에 흐를 때」 전문
이동훈의 詩人의(「빗물이 내 마음에 흐를 때」)는 빗물을 매
개로 지나간 사랑과 그리움을 회상하는 정서적 서정시이다.
시인은 빗물을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비
추는 거울로 사용한다. 흐르는 빗물은 세월의 흐름을 상징
하고, 그 속에 투영되는 얼굴은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
을 나타낸다. 특히 〈"두 손에 받아든 빗물 속에"/"임의 얼굴
이 비친다"〉는 장면은 이 시의 핵심 이미지로, 시간이 흘러
도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지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은 이미 지나간 시간일지라도, 빗물처럼 마음
속에서 계속 흐르며 기억을 적신다.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아름다운 세월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며, 그것을
잊기보다 마음속에 간직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지나간 사랑을 삶의 일
부로 받아들이는 잔잔한 회상의 미학을 담고 있다.
"빗물을 통해 지나간 사랑과 추억이 마음속에서 계속 흐르
고 있음을 그린 서정적 회상의 시라 하겠다."
(2) 신앙 속에서 발견하는 일상의 평안의 심상(心象)
다음 시는 ("하루의 시작을 통해 욕망을 비우고 신앙 속에서
평온한 행복을 발견하는 삶의 명상적 기록.")의 시편이다.
육체는 지쳐 혼란한 마음으로 떠밀리는 인생
갈 수 없어 이룰 수 없는 무음의 외침
가벼운 외침에 떨어져 나간 깃털
허공에 날려 눈물처럼 떨어진다
천사의 잔물방울은 허상의 실체
삼십팔 년의 긴 세월 지친 인간의 발걸음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간절함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세상
'낫기를 원하느냐?' 묻는 임
'함께 동행하는 자가 없나이다'
"일어나 함께 가자 함께 가자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는 것이
베네스터 연못" (요5:1~9)
- 이동훈 「베데스터 연못」 전문
하루의 창을 열면
내 마음의 창도 열린다
어제의 피곤함은 뒤로 삼키고
헛된 욕망의 쓰레기는 허공에 날아간다
뒤돌아보면 허공의 잔재가 남아 있을 뿐
나의 자취는 서서히 사라진다
성전의 뜰에 한발을 담고
한발은 삶의 현장에 담고
그 갈림길에 고뇌하며 성전의 계단을 오른다
"주님은 나의 반석, 방패시니"
시편 18절을 생각하며 오늘도 하루를 연다
한 계단 한 계단
걸을 수 있어 감사함으로 오른다
평온함이
나를 감싸고
오늘의 행복을 만끽한다
- 이동훈 「하루의 창을 열면」 전문
이동훈 시인의 작품은 성서적 사건과 개인의 일상적 신앙
체험을 연결한 묵상적 서정시라 할 수 있다. 시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의 이미지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무력함과 기다림을 상징한다. 삼십팔 년의 세월 동안 치유를
기다리는 병자의 모습은, 삶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흔들
리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함께 동행하는
자가 없나이다"〉라는 고백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구원
의 손길을 기다리는 인간의 영적 고독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는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일어나 함께 가자"라
는 부름을 통해 시적 화자는 기다림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신앙적 각성을 경험한다. 이는 기적의 순간을 넘어, 인간이
믿음 속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전환점으로 해석된다.
이어지는 후반부의 「"하루의 창을 열면"」은 이러한 깨달음
이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는가를 보여준다. 어제
의 피로와 욕망을 내려놓고 성전과 삶의 현장 사이에서 균
형을 찾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은, 신앙이 특정한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임을 드러낸
다. 성전의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는 장면은 인간이 매일의
삶 속에서 감사와 믿음으로 자신을 새롭게 세워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결국 이 시는 고통 속에서 부름을 듣고, 그 부름을
따라 일상의 하루를 감사로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담고
있다. 베데스다 연못의 치유 사건이 개인의 삶 속에서 다시
해석되며, 신앙이란 기적의 순간보다 하루를 감사로 시작하
는 태도 속에서 완성된다는 메시지를 시인 자신과 독자에게
겸손하게 전달하고 있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 신앙과 기억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신
앙적 성찰을 통한 묵상의 시편"인 것이다.
2. 『이명옥 詩人』
삶의 자아성찰과 관조를 통한
페이소스(pathos)적 심상(心象)
이명옥 詩人의 『길 위의 시선』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히 시
인이 얼마나 명랑하고 밝고 현실 생활을 낙천과 믿음의 뿌
리로 지탱하고 긍정적 사고로 즐기며 李시인만의 진실한
생활인으로서 실상 버거운 삶을 가슴으로 안아 받아 세상을
힘겨운 가운데 바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시인임을 토대로 태
어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반추하게 된다. 본 시집 1부에 〈엄
마의 품〉 외 4편, 2부 〈같은 듯 다른 하루〉 외 4편, 3부 〈외
길의 끝에서〉 외 4편, 4부 〈강물의 길〉 외 4편, 총 20편이
수록되었다. 이명옥의 시세계를 차분하게 들여다보면서 시
향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그 대상이 있으므로 해서 가능한 것이
며, 그 대상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을 본질로 한
다면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내면의 거울을 볼 줄 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보고
듣느냐를 두고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할 때 시인은 페이소스
적인 정서적 호소력이 있다.
대상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상대성원리가 삶의 진리에 이
어지는 심오한 철학을 느끼게 하며, 또 대상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끼는 페이소스가 강렬하다. 작품 〈엄마의 품
〉,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 등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세계를 표출하였을 때 감동과 언어의 마
력을 공감하게 된다.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의 각 연
에서의 구성적 묘미와 역설 기교를 느끼게 한다. "1연에서는
시간적 긴장감, 2연에서는 대상에 대한 배려, 3연에서는 애
틋한 사랑의 그리움, 4연에서는 역설적인 수사법, 자신의 성
관(誠款)을 통해 감출 수 없는 사랑의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1) "유년의 온기와 성인의 고독을 함께 품은 조용한 위로의 시."
이명옥 시인은 〈"아카시아 향기처럼 지지 않던 당신의 온
기"〉라는 구절은 자연의 향기를 어머니의 사랑과 겹쳐 놓음
으로써,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모성의 영원성을 아름
답게 드러낸다.
여름의 문턱
아카시아 흐드러진 길 위로
어디서 날아왔나 코끝 간지럽히는 달큰한 향기
걸음 멈추고 한참을 올려다보던
하얀 꽃송이마다 매달린 어린 날의 꿈
등줄기 적신 땀방울 식힐 새도 없이
골목 끝까지 달려가 안기던 곳
세상에서 가장 깊고 포근했던 엄마의 품
아카시아 향기처럼 지지 않던 당신의 온기
작은 손 꼭 잡고 걷던 저녁노을 길
엄마의 품은 언제나
나를 키우고 잠재우던 아늑한 둥지였습니다
- 이명옥 「엄마의 품」 전문
밤새 뒤척인 고단한 숨결을 지우려
익숙한 마스크로 표정을 덮습니다
어깨 위 내려앉은 삶의 무게와
차마 들키고 싶지 않은 얼룩진 마음들
짙은 화장 아래 겹겹이 봉인합니다
투명한 가면 너머
억지로 피워낸 마른 미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안부를 전하지만
진심은 가장 깊은 서랍에 넣어둔 채
오늘도 씩씩한 척 세상 속을 걷습니다
붉게 칠한 입술 위로
삼켜버린 아픈 이야기들이 잠든 시간
애써 웃음 짓느라 고생한 당신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가만히 등을 토닥입니다
- 이명옥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 전문
이명옥의 두 편의 시를 한마디로 함축해 평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상처와 기억을 품은 인간의 내면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
만진 서정."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기억은 향기로,
상처는 미소로 감싸 안은 인간 내면의 서정적 기록."/"유년
의 온기와 성인의 고독을 함께 품은 조용한 위로의 시."/ "삶
의 상처를 숨기면서도 끝내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
선."〉 "이 시편은 기억의 향기와 삶의 가면 사이에서 인간의
상처와 위로를 동시에 길어 올린 서정적 내면의 기록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으로 빛이 먼저 들어온다
어제와 닮은 풍경이
오늘을 조용히 열어준다
부엌의 공기
천천히 움직이는 시간
모든 것이 무사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하루의 기적이 된다
나는 같은 하루를 바라며
다른 하루를 살아낸다
- 이명옥 「같은 듯 다른 하루」 전문
함께 있어도 외롭다면
우리는 무소의 뿔을 달고
나아가야 한다
영원이라 믿고 걸어온 시간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외면해온 순간들을
기억한다
후회는 접어두고
앞으로 가야 할 때
같은 길을 걸어온 우리는
갈래 길에 서서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저마다의 별을 향해
서로 다른 길로 떠난다
- 이명옥 「외길의 끝에서」 전문
李 시인의 시는 "평범한 하루의 고요한 기적과 결국 각자
의 길로 떠나는 인간 존재의 고독을 담담하게 성찰한 서정
적 사유이다." 〈"나는 같은 하루를 바라며/다른 하루를 살
아낸다."〉 이 구절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일이 조금
씩 다른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시인은 평범한 아침
의 풍경을 통해 '반복 속의 변화'라는 삶의 역설을 조용히 드
러낸다. 같은 듯 보이는 하루가 사실은 매번 새로운 시간이
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또한 매일 새롭게 만들
어진다는 점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또 다른 인상적인 구절은〈"저마다의 별을 향해/서로 다른
길로 떠난다."〉 이 문장은 함께 걸어온 시간 이후에도 결국
인간은 각자의 운명과 삶의 방향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별'이라는 이미지는 각자의 꿈, 삶의 의미, 혹은 존재의 목
적을 암시하며, 시는 관계의 따뜻함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존재적 고독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이 시편은 반복되는 하루
의 평온과 관계의 끝에서 마주하는 고독을 통해, 인간이 결
국 각자의 별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임을 담담하고 서정적으
로 보여주고 있다.
(2) 인연을 통한 존재론적 그리움의 미학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고 인연에 따라 결혼
을 하는 등 생물학적, 사회적 욕구를 채움에도 불구하고 인
간은 외롭고 고독하며 늘 무엇을 그리워한다.
그 존재의 근원을 찾지 못하였기에 이명옥 시인은 그 존재
론적 근원을 찾기 위해 가슴에 있는 큰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시를 쓰고 공허함을 시로 표출하고 있다
친구야
시장가자
시장에 가서
구경도 하고
사람 결에 휩쓸리다 보면
좋은 생각 하나쯤
불쑥 떠오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시장에 가자
웅성웅성
사람 모인 곳에 섞여
소리도 듣고
휘적휘적 길을 걷다
문을 열면 풍경소리가 들리는
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자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 둘 곳 없을 때
아무 말 말고
시장에 가자
- 이명옥 「시장에 가자」 전문
초점 없는 안개 속을 걷느라
길을 잃고 헤매던 날들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마다
세상을 바로 볼 안경을 간절히 찾았다
비로소 안경 너머 선명해진 길 위로
지문처럼 몸에 새겨진 흉터들이 보인다
이것은 상처가 아니라 나만의 이정표
잠시 쉬어도 돌아가도 괜찮다는 응원이다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걷는 길
아물어버린 흉터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오늘도 내 몸이 기억하는 지도를 믿고
담담히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다
- 이명옥 「몸이 기억하는 지도」 전문
李 詩人의 詩 「시장에 가자」는 복잡한 생각과 마음의 막힘
을 사람 사는 소리와 일상의 풍경 속에서 풀어내려는 생활
철학을 담고 있다. 시장의 웅성거림, 발걸음, 찻집의 풍경소
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의 답을 거창한 곳이 아닌 일
상의 현장에서 찾으라는 따뜻한 제안이 된다. 시는 '시장'이
라는 공간을 통해 사람 속에서 치유되는 인간의 마음을 소
박하고 정겹게 그려낸다.
(「몸이 기억하는 지도」) 이 詩는 길을 잃었던 시간과 상처
의 흔적을 삶을 안내하는 이정표로 바라보는 성찰의 시이다.
시인은 흉터를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알려주는
지도로 재해석하며,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결국 삶을 이끄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
과 '몸이 기억하는 지도'라는 표현은 삶의 고통을 성장의 방
향으로 바꾸는 깊은 사유를 드러낸다.
한 편은 사람 속에서 마음을 풀어내는 일상의 위로를, 다
른 한 편은 상처 속에서 길을 찾는 존재의 성찰을 보여주며
삶을 따뜻하게 견디는 방식을 말하는 이명옥 시인만의 삶의
옹울한 면을 우려낸 울림의 시편이다.
3. 『최부열 詩人』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과 관조(觀照)의 여정으로
빚어내는 철학적 선언
최부열 詩人의 『인연』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히 崔시인은
서문序文에서 화가 '폴 고갱'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명작을
인류에게 남김으로써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에게 저마다의 삶을 관조하고 인생을 조망하는데 한줄기 사
유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혈연 속에서 시작해 사회 속에서 피어나고, 다
시 알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여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짧은 순간 속에서도 피와 땀과 눈물로 땅
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삶은 더욱 숭
고하고 소중하다. 문학을 통해 작품을 남긴다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붙잡아 삶의 본질을 더듬어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록 사유는 깊지 않을지라도, 이 글들이 자신을 돌
아보는 모든 이의 마음에 봄 햇살 같은 따뜻한 사색의 순간
이 되기를 바란다.
얼마나 밝고 반듯한 마음가짐과 배려와 믿음의 뿌리로 지
탱하고 긍정적 사고로 세상을 바로 보고 살아가는 성실한
시인임을 토대로 태어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반추하게 된다.
본 시집 1부에 〈내가 바라는 건〉 외 4편, 2부 〈구름〉 외 4
편, 3부 〈고귀한〉 외 4편, 4부 〈달과 당신〉 외 4편, 총 20편
이 수록되었다. 최부열 시인의 내면과 사물이 만나는 접점에
서 형성되어, 감각의 구체를 통해 어떤 근원적 사유로 번져
가는 미학적 특성을 일관되게 보여준 결실의 잠언처럼 펼쳐
진 시편 속으로 시향을 음미하며 사색하기로 하자.
(1) 숭고한 삶의 철학적 사유(思惟)를 통한 여백(餘白)의 함의(含意)
사랑이 붉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정열이_
오월의 장미빛에 취하였거나
몸 안을 흐르는
선홍색의 혈액에서 가져온
채색일 것이다
뜨거운 태양이거나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만이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은 아닌 것을
살아온 시간의 타래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깨닫는다
선명하고 분명한 것들은
짧은 시간 속에서도 퇴색되어 가고
무엇을 하였고 하지 않았는가
모든 순간에
우리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마음에 품고 있는
낡은 나침반은
지금도 갈 길을 가리킨다
제 가슴보다 큰 사랑을 안고
사람들은 오늘도 말이 없다
- 최부열 「사랑」 전문
하루에 네 번 오는 읍내 버스
다랭이 논둑 같은 시골길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흘러서 간다
두툼한 점퍼에 모자를 눌러쓴
노인 서넛이 병원으로 장터로
지친 다리로 무심히
차창 밖을 바라보면
봄나물 찾던 숲길
호미질 하던 비탈 밭
황소와 써래질 하던 무논마저
지나간 세월만큼 손에 잡힐 듯 저만치
빠르게 지나쳐 간다
하루에 버스는 몇 번이고 지나는데
좋은 시절 다시 오지 않고
자갈길 자욱한 먼지 속에서
살아갈 시간만을 더듬은 세월
첫 차에 등교하는 아이들 돌아볼 새 없이
흘린 땀방울
막차에 모두 모인 저녁 밥상에
어둠 짙도록 부뚜막의 물기는 마르지 않았다
모두 제 길을 가고
전화는 가까워도 만남은 멀다
이제는 아이들 없는 시골 버스만이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다
인생은 다 그런 거라고 그르렁거리며
- 최부열 「시내버스」 전문
최부열 시인의 詩 「사랑」과 (「시내버스」)는 서로 다른 장면
을 다루고 있지만, 철학적 시선에서 보면 인간의 시간과 존
재, 그리고 삶의 방향을 사유하게 하는 시로 읽힌다.
(「사랑」) 감정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사랑의 철학, 이 시는 사
랑을 흔히 말하는 붉은 열정이나 불꽃같은 감정으로만 보지
않는다. 시인은 오월의 장미빛, 혈액의 선홍색 같은 상징을 언
급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님을 조용히 말한다.
살아온 시간 속에서 깨닫게 되는 사랑은 격렬한 감정보다
오래 남는 진심의 방향성이다. 〈"마음에 품고 있는 낡은 나
침반"〉이라는 표현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
리키는 내면의 윤리적 기준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에서 사랑은 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시간이 지
나도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존재의 나침반이며, 말없이
품고 살아가는 삶의 깊은 진실로 나타난다.
(「시내버스」) 이 시는 "시간 속을 지나가는 인간 존재",(「시
내버스」)는 한적한 시골 버스의 풍경을 통해 인간의 삶을 시
간의 흐름 속에 놓인 존재로 바라본다. 하루에 몇 번씩 같은
길을 오가는 버스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
가는 방식을 상징한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논과 밭, 과거
의 노동과 가족의 기억들은 모두 지나간 삶의 흔적이다. 그
러나 버스는 계속 다니고, 사람들은 늙고, 아이들은 떠난다.
이 詩는 결국 인간이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진실을 말한다.
삶은 되돌릴 수 없고,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최 시인이 살
아온 삶의 상징적 숨결이 가슴 깊은 곳에서 뼛속까지 흐르
는 내면의 외침인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의 〈"인생은 다 그런 거라고 그르렁거리며"〉
라는 구절은 체념이 아니라, 삶의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최 시
인 자신과 독자를 향한 존재적 깨달음의 외침일 것이다.
비탈진 산 중턱
커다란 떡갈나무
갈색의 마른 잎을 떨구며 서 있다
봄비에 젖은
가지 끝마다 귀를 열어
끝없이 들었던 생의 이야기
새는 둥지를 원하고
곤충은 원망하듯 귀를 갉기도 했다
가려운 곳을 기대오는 산짐승
한걸음 움직이지 않아도
내줄 것 들어줄 일은
가을 낙엽처럼 쌓여만 간다
호젓하게 비 오는 밤과
저마다 향기를 가진 바람들
다가왔다 사라지는
모든 것을 품고도 생명이 사라진 듯
고요한 어디에 뜨거운
태양의 기운이 깃들어 있는지
대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나무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다
추운 계절이 오면 흰 눈이 쌓이고_
산은 길을 잃은 짐승처럼
방황할 것이다
열매를 모두 떨구고
마지막 잎새도 흔들리는
나무가 지난 계절에 그랬듯이
작은 생명과 겨울을 버틸 것이다
소리도 없이 산을 지킬 것이다
- 최부열 「고귀한」 전문
재 너머 울울한 산에
오래된 절
산사는 고즈넉이
구름처럼 세월은 가고
보퉁이 이고 가던 산길에는
인적이 없다
다랑논 비탈밭에 기대어
열둘을 낳고
아홉을 키워낸 할머니에게
부족한 것은 많고
소망은 깊었다
새로 바른 문풍지처럼
환하게 보였던 기도 길에는
어미 품에 안기던 얼굴과 목소리
체온마저 따라가는 회한이 있었다
약사여래 앞에 절을 하고
시든 감꽃처럼 빌었을 당신
얼마큼의 기도로
위로 할 수 있는지
고개 넘어오던
그 옛날 오솔길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 최부열 「위로(慰勞)할 수 있다면」 전문
최 詩人의 시 (「고귀한」)는 "존재의 침묵과 자연의 윤리" 칸
트는 인간은 감각과 이성의 틀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시에서 떡갈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묵묵히 존재하는 삶의 상징이다. 새와 곤충, 짐승들이 나무를
찾아와 기대고 상처를 남기고 떠나지만, 나무는 한걸음도 움
직이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나무는 베풂이
나 희생을 의식하지 않는 존재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말
없이 주고, 말없이 견디며, 말없이 시간을 통과한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삶을 비추는 철학적 은유가 된다. 삶
의 고귀함은 거대한 행위나 영웅적 결단에서 오는 것이 아
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계절을 견디며 존재하는 태도
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시에서 '고귀함'이란 특별한 가치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끝까지 지켜내는 침묵의 힘이다.
최 시인의 (「위로(慰勞)할 수 있다면」) 이 시는 산사와 할머
니의 삶을 통해 인간의 고단한 생애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기도를 보여준다. 열둘을 낳아 아홉을 키워낸 삶, 다랑논과
비탈밭의 노동, 그리고 절 앞에서의 기도는 모두 인간 존재
가 짊어진 고통과 희망의 기록이다. 특히 시 속의 산사는 단
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 머무는 장소로 등장한다.
사람은 사라지고 길도 비어 있지만, 기도의 흔적과 삶의 체
온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이 시는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얼마큼의 기도
로 위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종교적 물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며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위로의 한계와 가능성을 묻는 철학적
물음이다.
두 시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장면을 통해 존재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나무는 말없이 산을 지키며 존재
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산사는 인간의 삶과 기도의 흔적을
통해 기억의 위로를 남긴다. 결국 이 시들은 인간의 삶이란
자연처럼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서로의 고통을 완전히 위로
할 수는 없어도 그 기억을 바라보는 일 속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의 여정임을 보여준다.
(2) 가파른 삶을 진중하게 '성찰'하는 '사유'의 절창
"'서정'은 사물의 이치를 순간적으로 포착·표현하는 원리
이다. 물론 이때의 '순간'은 일회적 시간성의 개념이 아니라
'충만한 현재성'으로서의 순간이다. 말하자면 서정시가 구현
하는 '순간'은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통합한 '충만한 현
재형'으로서의 강렬하고 집중된 시간의 형식이다. 그래서 시
적 '순간'은 그야말로 오랜 경험과 시간이 반복·축적되어 있
는 집중의 형식으로서의 '순간'이 된다. 우리 시대의 서정 시
인들은 바로 그 순간의 형식을 통해 '충만한 현재형'으로서
의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침묵의 파문』, 유성호)
최부열 시인의 (「구도의 씨앗」), (「달과 당신」), 「잠」은 서로
다른 정경을 그리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삶의 가파른 비탈
을 묵묵히 걸어가는 인간 존재의 성찰이 깊게 흐른다. 이 세
편의 시는 자연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추
며, 고통과 기다림, 그리고 견딤의 시간을 사유하는 조용하
지만 깊은 절창을 이루고 있다.
상사화 예쁘다 하여
전라도 영광 산사로 향한다
세상사에는 모두 때가 있다는데
속세가 아닌 곳도 그러하다
상사화 꽃잎은
떠난 연인의 눈물같이
붉은 얼룩만 남기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줄기
사랑을 잃은 서러움에
일어설 줄 모른다
땅으로 숙어지는 꽃대는
아래로 낮춰지는 육신
낮추어 되뇌이는 一向의 마음
꽃도 잎도 아닌 씨앗의 구도자
산사에는 꽃잎이 지고
하루가 저문다
석등은 가만히
예불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단청은 달빛에 젖어 황홀한 꿈을 꾼다
씨앗 품은 꽃대가 법당에 피어 있다
- 최부열 「구도의 씨앗」 전문
초저녁달에
살이 올랐다
제 마음 그대로여도
열어주는 것 같을 수 없지
반쪽으로 소담하게 부풀어오면
뜻 모를 따스함이 이슬처럼 스며든다
제 흥에 겨웠던 밤들이 지나고 만월도
시나브로 옷깃을 여미면
찬바람 속에서 별자리 바라며
네가 어디서 얼만큼으로
사위는지 난 궁금하다
여윈 얼굴 안쓰러워
달력을 짚어보고
기다림도 행복이라
시선은 너에게 향한다
- 최부열 「달과 당신」 전문
하루가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른다
오늘을 지탱한 지친 몸을
낮게 뉘우고
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베갯잇에서 실처럼 풀어지는
말과 손짓들
나를 흔들던 세상에
이불을 끌어 돌아눕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두가 잠들 시간
가슴엔 아직 깨어 있는 돌들이
깨뜨리고 깨뜨려
먼지처럼 날려야 하는데
생각은 어느새 꿈으로 따라와
거칠게 나를 ?는다
뒤척이다 바라본 새벽하늘
별은 밤하늘을 지키고 있다
괜찮아 괜찮다
별이 깜빡거린다
- 최부열 「잠」 전문
삶의 비탈에서 피어나는 구도의 사유 - (「구도의 씨앗」)
이 시에서 상사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사랑과 상실을 통
과한 존재의 수행적 상징으로 등장한다. 붉은 꽃잎이 떠난
연인의 눈물처럼 얼룩져 있고, 비스듬히 기운 줄기는 사랑을
잃은 존재의 자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기울어짐은 단순
한 상처가 아니라 낮아짐과 깨달음의 몸짓이다. 땅으로 숙어
지는 꽃대는 스스로를 낮추는 수행자의 육신이며, 꽃도 잎도
아닌 씨앗의 상태는 생의 본질을 향한 구도의 시간을 암시
한다. 산사에 내려앉은 달빛과 예불 소리 속에서 꽃대가 법
당에 피어 있다는 마지막 장면은, 고통과 상실을 통과한 존
재가 결국 내면의 깨달음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달과 당신」) 이 시에서 달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기다림과 사랑의 시간성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초저녁달에
서 만월로, 그리고 다시 여위어 가는 달의 변화는 인간 감정
의 리듬과 겹쳐진다. 시인은 달의 변화 속에서 사랑의 시간
과 마음의 온도를 읽어낸다. 특히 〈"기다림도 행복이라"〉는
구절은 사랑의 본질이 소유나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다리는 시간 자체에 깃든 의미임을 보여준다. 이 시는 결국
사랑을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존재의 체온으로 바라보는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잠」은 하루를 견디고 돌아온 인간이 마주하는 내면의 어
둠과 화해의 과정을 그린 시이다. 낮 동안 지탱해 온 삶의 무
게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가슴엔 아직 깨어
있는 돌들이 서걱거린다"〉는 구절은 인간 내면에 남아 있는
상처와 기억을 상징한다. 그것들은 깨뜨리고 날려버려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서 별이 깜빡이며 〈"괜찮아 괜찮
다"〉고 속삭인다. 이 장면은 절망을 극복하는 거창한 선언
이 아니라, 우주적 침묵 속에서 건네는 작은 위로이다. 인간
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별빛 같은 위로 속에
서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결국 최 시인은 습작의 내공이 엿보이는 이 시편들은 가파
른 삶의 비탈을 걸어온 인간이 자연과 시간 속에서 자신을
비추며, 고통과 기다림을 견디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성찰하
는 깊은 사유의 절창이라 할 수 있다.
4. 『김라영 詩人』
기다리는 시간과 삶을 견디는 존재(存在)의
성찰 자체에 깃든 의미
김라영 詩人의 (『봄을 기다리며』) 첫 시집을 상재한다. 특
히 金 詩人은 서문序文에서 〈"우리는 붙잡지 못한 것들을 아
쉬워하며 살아가듯 이 시들은 늦게 찾아온 마음의 기록이
다."〉,〈"설렘 속에 아직 부족하지만 남겨진 발자국처럼 말
하지 못한 것들이 조용히 나를 써내려갔다."〉라고 말한다.
그의 사유와 감각은 자연 형상의 속성을 매우 새로운 이미
지로 드러내면서 자신의 시적 개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만
큼 시인에게 자연 형상은 순수한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자
신의 사유와 감각을 투사하는 상상적 실재인 동시에, 인간
보편의 존재론을 성찰케 해주는 물리적 상관물이 되기도 한
다. 金 詩人의 본 시집 1부에 〈연두빛 봄날〉 외 4편, 2부 〈고
향 스케치(夏)〉 외 4편, 3부 〈가을 잔상〉 외 4편, 4부 〈어느
날 문득〉 외 4편, 총 20편이 수록되었다. 오랜 침묵과 그리
움으로 가 닿는 근원적 사유와 감각을 향한 사계의 추억어
린 시편을 따라 청초한 시향의 숨결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아름다운 계절은
너의 손을 잡고
내게로 온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햇살처럼
어느 날은 비가 되고
바람이 되어
때로는 고요한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와
내 마음의 풍경 앞에서
살갑게 바라보며 속삭인다
인생이 그리 대단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네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행복은
흔들림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진솔한 순간의 마음이라고
- 김라영 「너라는 계절」 전문
아침 이슬 머무는 오솔길
은은한 향이 짙어지면
마음자리 달콤한 숨결처럼
가던 길 멈춰 서게 한다
향기에 취해 길을 서성이면
순수했던 젊은 날의 그리움
바람에 꽃잎 되어 흩어지고
기억 너머 두고 온 추억이
보랏빛 향기로 물들면
막 피어난 꽃처럼
수줍던 첫사랑이 봄바람에 벙근다
아련한 추억 가슴속에 스며들면
안개 속으로 손 내밀 듯
아스라이 피어나는 너에게
흐드러진 꽃봉오리
엽신에 담아
달빛 서린 창가에 안부를 묻는다
- 김라영 「라일락꽃 엽서」 전문
김라영 詩人의 「너라는 계절」과 (「라일락꽃 엽서」)는 서로
다른 정서를 품고 있지만, 두 詩 모두 여성적 감수성의 은은
한 시상 전개로 삶과 사랑, 그리고 기억을
목차
목차
1. 이동훈 시인
사 랑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10
사랑은 눈으로 하는 것 12
나의 고향 어머니 14
영광의 빛 15
잊을 수 없는 그대에게 16
아름다운 모습 -교구 축제의 의미 18
초가을 창문을 열면 20
행복 21
편백나무 숲에서 22
망초꽃 연가 24
하루의 행복 25
이담 26
이슬 28
성화聖化 -주님을 닮아가는 길- 29
시선 30
빗물이 내 마음에 흐를 때 32
베데스터 연못 33
하루의 창을 열면 34
나의 분신 유리병 35
가을 마을 36
2. 이명옥 시인
길 위의 시선
엄마의 품 42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 43
비워낸 길 44
안경 45
숨바꼭질 46
같은 듯 다른 하루 47
어머니라는 소나무 48
새벽의 눈 소식 49
땅의 비밀 50
다시 움직이는 아침 51
외길의 끝에서 52
빗소리 들으며 53
사과 54
시장에 가자 55
국수 56
강물의 길 57
길 위의 시선 -연작시1 58
흉터의 교훈 1 -연작시2 59
흉터의 교훈 2 -연작시3 60
몸이 기억하는 지도 -연작시4 61
3. 최부열 시인
인연
내가 바라는 건 66
사랑 68
얼굴 70
바다 72
시내버스 74
구름 76
외사랑 78
해변을 거닐며 79
생일 80
추억 82
고귀한 84
위로(慰勞)할 수 있다면 86
구도의 씨앗 88
낙엽 90
삭발 92
달과 당신 93
성묘 94
파티가 끝난 후 95
잠 96
햇살 아래에서 98
4. 김라영 시인
봄을 기다리며
연두빛 봄날 104
너라는 계절 105
라일락꽃 엽서 106
꿈 107
대나무 108
명상 110
고향 스케치(夏) 111
시간을 걷다 112
이슬 맺힌 그리움 114
모두가 잠든 사이 115
서녘을 걷는 어머니 116
가을 잔상 118
국화 향 깊어질 때 119
가을, 시간의 단상 120
낙엽 121
어느 날 문득 122
어머니 생각 123
어색함에 대하여 124
눈물 125
겨울에 핀 꽃 126
5. 모금자 시인
마음이 머무는 자리
아침 편지 130
바람 따라 보낸 마음 131
눈물 132
당신의 삶 속에서 134
비가 오는 날에는 136
우화 138
민들레 친구 139
어린 시절 내 고향은 140
군대 간 곰 친구 141
농부의 손녀 142
밤 한 톨에 대한 소고(小考) 143
텀블러에 담긴 가을 커피 144
코스모스 145
반려 식물 다육이(시조) 146
꽃이 좋은 이유 147
추석 풍경 148
배식 시간 150
새치염색을 하며 151
하나를 위한 연가 152
사랑으로 153
서 평 154
사 랑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10
사랑은 눈으로 하는 것 12
나의 고향 어머니 14
영광의 빛 15
잊을 수 없는 그대에게 16
아름다운 모습 -교구 축제의 의미 18
초가을 창문을 열면 20
행복 21
편백나무 숲에서 22
망초꽃 연가 24
하루의 행복 25
이담 26
이슬 28
성화聖化 -주님을 닮아가는 길- 29
시선 30
빗물이 내 마음에 흐를 때 32
베데스터 연못 33
하루의 창을 열면 34
나의 분신 유리병 35
가을 마을 36
2. 이명옥 시인
길 위의 시선
엄마의 품 42
붉은 입술 뒤에 잠든 이야기 43
비워낸 길 44
안경 45
숨바꼭질 46
같은 듯 다른 하루 47
어머니라는 소나무 48
새벽의 눈 소식 49
땅의 비밀 50
다시 움직이는 아침 51
외길의 끝에서 52
빗소리 들으며 53
사과 54
시장에 가자 55
국수 56
강물의 길 57
길 위의 시선 -연작시1 58
흉터의 교훈 1 -연작시2 59
흉터의 교훈 2 -연작시3 60
몸이 기억하는 지도 -연작시4 61
3. 최부열 시인
인연
내가 바라는 건 66
사랑 68
얼굴 70
바다 72
시내버스 74
구름 76
외사랑 78
해변을 거닐며 79
생일 80
추억 82
고귀한 84
위로(慰勞)할 수 있다면 86
구도의 씨앗 88
낙엽 90
삭발 92
달과 당신 93
성묘 94
파티가 끝난 후 95
잠 96
햇살 아래에서 98
4. 김라영 시인
봄을 기다리며
연두빛 봄날 104
너라는 계절 105
라일락꽃 엽서 106
꿈 107
대나무 108
명상 110
고향 스케치(夏) 111
시간을 걷다 112
이슬 맺힌 그리움 114
모두가 잠든 사이 115
서녘을 걷는 어머니 116
가을 잔상 118
국화 향 깊어질 때 119
가을, 시간의 단상 120
낙엽 121
어느 날 문득 122
어머니 생각 123
어색함에 대하여 124
눈물 125
겨울에 핀 꽃 126
5. 모금자 시인
마음이 머무는 자리
아침 편지 130
바람 따라 보낸 마음 131
눈물 132
당신의 삶 속에서 134
비가 오는 날에는 136
우화 138
민들레 친구 139
어린 시절 내 고향은 140
군대 간 곰 친구 141
농부의 손녀 142
밤 한 톨에 대한 소고(小考) 143
텀블러에 담긴 가을 커피 144
코스모스 145
반려 식물 다육이(시조) 146
꽃이 좋은 이유 147
추석 풍경 148
배식 시간 150
새치염색을 하며 151
하나를 위한 연가 152
사랑으로 153
서 평 154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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