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
알랭 바디우의 『진리의 내재성』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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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는 철학자가 될 수 없다.”(플라톤) “철학자가 드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알랭 바디우) 정신분석가 박영진의 새 책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은 이렇게 두 마디의 인용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시작은, 철학의 본령은 참된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에 있고, 참된 삶은 사랑이라는 독특한 진리의 버팀목 위에서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누가 사랑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진리는 증발하고 의견만 난립하는 탈진리의 시대,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아무도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에 사랑을 ‘절대성의 여정’이라 정의하는 이 책은 일종의 반反시대적 탐구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책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알랭 바디우의 근작 『진리의 내재성』(2018)의 여정을 따라가지만, 바디우가 선언하는 ‘진리-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바디우와 라캉의 뒤얽힘이라는 저자 특유의 방법론을 더욱 세공함으로써 사랑이 사랑 고유의 난관에 맞서면서 진리를 향한 여정을 지속하는 길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논증의 치열함에 더해 적소의 문학 텍스트 인용이 주는 설득력과 울림을 지닌 이 빼어난 철학적 에세이가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를 배회하는 이들에게 나침판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진리는 증발하고 의견만 난립하는 탈진리의 시대,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아무도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에 사랑을 ‘절대성의 여정’이라 정의하는 이 책은 일종의 반反시대적 탐구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책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알랭 바디우의 근작 『진리의 내재성』(2018)의 여정을 따라가지만, 바디우가 선언하는 ‘진리-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바디우와 라캉의 뒤얽힘이라는 저자 특유의 방법론을 더욱 세공함으로써 사랑이 사랑 고유의 난관에 맞서면서 진리를 향한 여정을 지속하는 길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논증의 치열함에 더해 적소의 문학 텍스트 인용이 주는 설득력과 울림을 지닌 이 빼어난 철학적 에세이가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를 배회하는 이들에게 나침판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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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진리가 무너지고 의견이 지배하는 탈진리의 시대.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아무도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에, 진리의 철학자 바디우를 통해 '진리로서의 사랑'을 성찰하는 한 정신분석가의 탐구
#너희가 사랑을 믿느냐?
플라톤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는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는 이렇게 첨언한다. "철학자가 드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철학의 본령은 참된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참된 삶은 사랑이라는 독특한 진리의 버팀목 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 누가 사랑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용기를 낼 수 있는가?
'탈진실' '탈진리'의 시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지도 한참이다. 진리가 무너진 자리에 의견만 무성한 탈진리의 시대에 사랑 또한 온전할 리 없다. 한마디로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아무도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이다. 감정·관계·관습·제도·돈·섹슈얼리티로서의 사랑은 그토록 흔한 반면, 진리로서의 사랑은 매우 드물다. 동시대 한국사회가 바로 그러하다. 외모 지상주의는 사랑을 성적 매력으로 환원하고, 연애자본은 사랑에 자격을 내걸어 계층 분할을 야기하며, 결혼 규범은 자유로운 주체 간의 공동체 구축보다 집안배경이라는 계산적 조건에 따른 거래를 양산하고, N포 세대는 사랑은 커녕 연애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며, 젠더 갈등은 사랑의 재료로 활용되어야 할 성적 차이를 양성 혐오로 변형시킨다.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낭만주의적 신비로 격상되거나 일상에서 동물적 섹슈얼리티로 격하될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불가역적으로 보이고,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순응하거나 체념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정신분석학자 박영진의 새 책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은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어쩌면 반反시대적 고찰로 여겨질 만하다. 2019년에 출간된 『라캉, 사랑, 바디우』(2019)에서도 저자는 철학과 정신분석의 긴장된 결합을 통해 사랑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 바 있는데 그것은 인간 주체에 대한 정의를 가차 없이 뒤흔들었던 도발적인 반反철학자 라캉과 사랑에 진리의 위치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철학자 바디우 사이에서 그 둘의 뒤얽힘을 통해 사랑에 대한 사상적 계보를 재구성하고 거기에 개입하려는 창의적인 시도였다. 이제 저자는 다시 일종의 연속적 작업으로서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을 통해 사랑이라는 진리가 갖는 희귀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더욱 세공된 내용과 형식으로 입증하고 펼쳐 보인다. "사랑에 관한 말하기는 가장 급진적인 잘못 말하기이다." 『라캉, 사랑, 바디우』의 첫머리에 놓인 말이다. 이 말은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에 와서도 유효하다 할 것이다. 저자는 "다시 한 번 시도하기, 다시 한 번 망쳐버리기, 다시 한 번 더 잘 망쳐버리기"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도전을 따라 사랑에 관해 잘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껴안으면서 다시 새로운 말하기를 시도한다. 누구도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지만, 철학이 참된 삶에 관계하는 학문인 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철학의 숙명이므로.
#『진리의 내재성』-'유한-무한-작품'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은 부제가 암시하듯 사랑의 철학자라 불리기도 하는 알랭 바디우의 근작 『진리의 내재성L'Immanence des v?rit?s』(2018)에 대한 독해에 기반하여 사랑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바디우의 책은 크게 '유한-무한-작품'으로 나뉘는데, 동시대 세계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유한(성)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서 시작해 무한(성)의 왕국에 대한 탐사를 거쳐,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작품을 해명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절대성의 여정은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이 작품이라는 형태의 진리로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의미라고도 요약할 수 있다.
유한성에 갇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자기 정체성에 집착하여 타자를 부정하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필연의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되풀이되는 반복의 틀에 갇혀 유한성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로서의 사랑은 이 유한성에 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 깊숙이 자리 잡은 모종의 중심 바깥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 보는 것, 관성적이지 않은 원심력이 그려지도록, 기존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여 예견 불가능한 경로로 흘러가는 원반이 새로움을 수놓도록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는 행위가 여는 가능성이다. 사랑은 유한한 정체성을 벗어버린 이름 없는 둘이 되는 것이고, 유한의 세계가 고착시킨 분리의 경계들, 이를테면 선과 악의 구분 또한 가로지른다.
사랑은 유한의 세계에 갇혀 있지만 벽을 뚫고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바디우가 탐색하는 무한의 왕국은, 유한성의 장치에 의해서는 도달되지 않는 초월성으로서의 무한, 분리를 거부하는 통합적인 힘으로서의 무한, 고립이 아닌 뒤얽힘, 원자가 아닌 그물망에서 출현하는, 이질적인 다수성의 촘촘한 연결망으로 구성되는 거대한 부분으로서의 무한, 사랑은 이러한 무한에 가닿으려는 안간힘을 통해 삶과 실존을 급진적으로 변형한다. 무한을 내포한 진리로서의 사랑은 절대성에 근접하려는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진리는 어떤 초월적인 절대성의 하강도 아니며, 어떤 근원적인 자기 동일성의 특수한 확증도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는 절대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유한에 의해 은폐되었던 것들은 더 이상 은폐되지 않으며, 진리들이 실존하는 모든 가능한 차원 안에 있는 무한한 새로운 잠재성이 출현한다.
절대적인 진리는 실존하지만, 절대성의 진리와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절대성에서는 불투명한 지대가 존재한다. 우회ㆍ굴곡ㆍ선회ㆍ매개 없이 단번에 직접적이고 특권적인 방식으로 절대성에 닿으려는 시도는 파국을 초래한다. 이는 사랑이 절대적인 하나에 이르는 초월적인 여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하나를 겨냥할 때 도래하는 것은 죽은 사랑이거나 미친 사랑이다.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듯, 일자적인 사랑은 절대 사멸한다. 절대성에 관한 이러한 욕망에 경계를 촉구한 후에 바디우는 이제 『진리의 내재성』의 핵심인 '작품'의 이론을 전개한다.
작품의 이론이 중요한 까닭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진리가 세계 안에 물질적 실존성을 갖는 '작품'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무한의 능동적인 효과로 실존하는 유한이다. 그것은 유한하되 무한에 개방되어 있다. 작품은 무한에 열린 독특한 유한으로서 진리의 절대성의 지표를 품고 있다. 사랑이라는 진리에서는 '나는 당신을 사랑해'가 지표의 역할을 맡는다. 그 지표는 사랑이 어떤 외적 상황과 무관하게, 덧없는 에피소드로 전락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을 지시하면서 존재한다는 표식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는 지표의 부재는 사랑을 썸으로, 일탈로, 찌꺼기로, 하룻밤의 정사로 전락시킨다. 거기서는 가시적으로는 성교가 일어나더라도 구조적으로, 그리고 실재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관계와 비관계
사랑은 독특한 둘에 관한 진리, 차이 그 자체에 관한 진리다. "성관계란 없다"는 말과 함께 라캉은 사랑이란 성관계의 결여를 보충하는 것이라는 테제를 제기한다. 바디우는 라캉과 함께 비관계가 성의 차원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한편, 라캉을 넘어서 사랑은 어떤 관계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성적 비관계와 질적으로 다른 것, 어떤 유사-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하나 더하기 하나"나 "황홀한 하나"가 아니라 "둘의 무대"를 조직하는 데 있다. 즉, 사랑은 비관계의 절대적인 우위나 관계의 절대적인 우위에 놓인 상태가 아니라 비관계에 맞서 관계를 구축하는 행위이다.
한편으로는 성적 욕망의 대상에 관한 오해로 점철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공통 경험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이중적 기능으로 인해 사랑은 결코 똑바로 걷지 못하는 발걸음, 즉 "절뚝거림"이 된다. 사랑이 하나의 "노고勞苦"가 되는 까닭이다. 욕망의 대상에 관한 오해를 막을 수 없으며 하나의 위력이 둘의 궤적을 수시로 침범하는 상황을 충실하고 집요하게 돌파해나가는 노고 말이다. 이 노고를 견딤으로 연인들은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함께 경험하고, 그렇게 공유된 경험은 주체적인 반복을 통해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내재적인 절대성에 참여하는 인류의 형상을 목도한다. 인류와 사랑을 연관시키는 것이 곧 철학 자체의 몸짓이다.
#사랑과 찌꺼기, 혹은 무의식과 구멍
바디우에게 있어서 성적인 것을 자기화하지 못한 사랑, 성적 비관계의 난관을 어떤 식으로든 돌파하지 못한 사랑은 찌꺼기에 머문다. 성적 비관계의 난관에 지속적으로 맞서면서 둘의 무대를 구축하는 데 도달한 사랑만이 작품이 될 수 있다. 반면 라캉은 자신의 분석행위와 찌꺼기를 다르게 설명한다. 라캉은 찌꺼기가 분석 행위와 양립 가능하다고 말한다. 분석 행위가 찌꺼기와 양립 가능한 이유는 분석가가 내담자의 상징계 바깥으로 밀려난 해석 불가능한 주이상스를 포착하고 내담자의 주체적 실재를 비추는 찌꺼기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분석가의 그러한 찌꺼기 기능만이 강박증자가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하기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진리-사랑에 라캉적인 보충이 요구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라캉에게 절대성은 하나의 구멍이자 공백이다. 그에게 사랑의 형상은 어떤 영원성이나 조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영원성과 조화가 용해되는 곳에서 성적 비관계의 구멍에 당황하고 고통 받거나 그 구멍을 메우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분석 작업은 때로 내담자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분석가의 본의는 오히려 내담자로 하여금 아무리 힘겹게 도달된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의 구멍을 통과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쟁점은 단순히 작품의 창조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고 또 그러한 창조를 통해 구멍을 보존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억압"이 유한성의 장치라면, 분석 작업은 무의식이라는 내재적인 무한을 통해 억압이라는 유한성의 장치를 해방시키는 데 있다. 무의식이란 유한성과 무한성의 뒤얽힘 그 자체다. 만약 개인의 무의식이 그토록 압제적인 유한성에 걸려 있지 않다면 어째서 내담자가 분석 작업에서 그토록 반복되는 연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또 무의식이 내재적인 무한성을 함유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분석 작업이 주체적 변화라는 실질적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분석은 해묵은 환상에 붙들려 있는 병리적 욕망의 유한성으로부터 주체의 해방을 도모하는 데 있다.
#사랑의 노고... 절뚝거림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둘의 무대는 오직 절뚝거림을 통해서만 구축되고, 절뚝거림으로서의 사랑은 일자의 권력과 둘의 노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 사랑의 주체는 일자에의 치명적인 유혹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노고는 실재를 헤쳐나가는 말더듬 행위이면서 진리를 구축해나가는 절뚝거리는 발걸음이다. 사랑의 진정한 절대성은 진리 너머에서 초-절대적인 영역을 개방한다. 우리에게는 초-절대적 노고에 헌신할지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사랑하는 이는 절대성에 의해서조차 제약되거나 한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절대적으로 놓여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유형의 행위자일까?
라캉은 사랑의 주체란 없고 사랑의 희생자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은 성관계라는 진공의 블랙홀이 유발하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반면 바디우는 인간 동물의 성욕을 진리의 몸을 통해 변형시키는 사랑의 주체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은 성의 유한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둘의 무한성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초-절대성에 어울리는 것은 사랑의 희생자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장인匠人이다. 오직 사랑의 장인만이 최고의 작품에 심혈을 기울일 줄 아는 만큼이나 조각난 사랑의 잔해를 따스하게 포용할 줄 안다. 그것이 곧 사랑의 노고에 담긴 초절대성이 그에게 허락한 초절 기교이기 때문이다.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은 둘 모두 공통으로 중시하는 논리적 형식화를 통해,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 형식화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을 통해 바라본 사랑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해답을 우리는 독일 철학자 요하네스 피히테의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랑이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향한 욕망이고, 그것의 실존은 오직 그것을 향한 욕구에 의해서만, 어떤 불편함에 의해서만,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을 탐색하지만 끝내 그것이 어디에서 실현될지 알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공백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여기서 피히테가 말하는 사랑은 비대상적이고 무한을 향한다는 점에서 바디우적이며, 동시에 그것은 욕망과 관련되고 불편함과 공백에 의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라캉적이다.
사랑은 그 구조적 한계에서 침몰하고 그 절대적 흔적에서 존속한다. 바캉적(라캉인면서 바디우적인) 사랑은 하나의 '난관'이자 '통과'로 드러난다. 『세미나 22권』에서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사랑은 소중합니다! 사랑은 드물게 실현되고,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잠시 동안만 지속되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본질적으로 벽의 파열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 벽에 부딪혀 이마에 혹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라캉에게 사랑의 소중함ㆍ희귀함ㆍ덧없음은 사랑이 곧 사랑 고유의 난관을 깨트리려는 시도라는 사실에 결부된다. 그러나 그 난관은 결코 손쉬운 탈출구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의 벽을 돌파하려는 시도는 무엇이든 이마의 혹이라는 상처를 유발한다. 여기서 사랑은 '통과할 수 없는 난관'으로 나타난다. 한편, 바디우에게 관건은 단순히 벽의 파열이 아니라 유한성에 근거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너머를 지향하면서 벽을 뛰어넘는 것이다. 사랑의 작품을 만드는 자는 벽을 회피하기 위해 기성 규범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벽 안에 갇혀서도 안 된다. 사랑은 이마에 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 고유의 난관에 맞서서 절대성의 지표를 간직한다. 이때 사랑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통과'로 나타난다. 우리는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을 통해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 사랑은 통과할 수 없는 난관과 흔들리지 않는 통과 사이에 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 둘과 비관계, 진리와 구멍, 절대성과 진공, 작품과 찌꺼기, 난관과 통과 사이에서 명멸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사랑은 통합의 에로스가 아니라 간극의 방황이다. 방황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가운데 불발된 사랑의 부스러기더미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우리 모두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둘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입니다. 사랑이라는 생각은 거기서 시작됩니다."(라캉)
#너희가 사랑을 믿느냐?
플라톤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는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는 이렇게 첨언한다. "철학자가 드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철학의 본령은 참된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참된 삶은 사랑이라는 독특한 진리의 버팀목 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 누가 사랑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용기를 낼 수 있는가?
'탈진실' '탈진리'의 시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지도 한참이다. 진리가 무너진 자리에 의견만 무성한 탈진리의 시대에 사랑 또한 온전할 리 없다. 한마디로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아무도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이다. 감정·관계·관습·제도·돈·섹슈얼리티로서의 사랑은 그토록 흔한 반면, 진리로서의 사랑은 매우 드물다. 동시대 한국사회가 바로 그러하다. 외모 지상주의는 사랑을 성적 매력으로 환원하고, 연애자본은 사랑에 자격을 내걸어 계층 분할을 야기하며, 결혼 규범은 자유로운 주체 간의 공동체 구축보다 집안배경이라는 계산적 조건에 따른 거래를 양산하고, N포 세대는 사랑은 커녕 연애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며, 젠더 갈등은 사랑의 재료로 활용되어야 할 성적 차이를 양성 혐오로 변형시킨다.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낭만주의적 신비로 격상되거나 일상에서 동물적 섹슈얼리티로 격하될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불가역적으로 보이고,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순응하거나 체념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정신분석학자 박영진의 새 책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은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어쩌면 반反시대적 고찰로 여겨질 만하다. 2019년에 출간된 『라캉, 사랑, 바디우』(2019)에서도 저자는 철학과 정신분석의 긴장된 결합을 통해 사랑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 바 있는데 그것은 인간 주체에 대한 정의를 가차 없이 뒤흔들었던 도발적인 반反철학자 라캉과 사랑에 진리의 위치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철학자 바디우 사이에서 그 둘의 뒤얽힘을 통해 사랑에 대한 사상적 계보를 재구성하고 거기에 개입하려는 창의적인 시도였다. 이제 저자는 다시 일종의 연속적 작업으로서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을 통해 사랑이라는 진리가 갖는 희귀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더욱 세공된 내용과 형식으로 입증하고 펼쳐 보인다. "사랑에 관한 말하기는 가장 급진적인 잘못 말하기이다." 『라캉, 사랑, 바디우』의 첫머리에 놓인 말이다. 이 말은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에 와서도 유효하다 할 것이다. 저자는 "다시 한 번 시도하기, 다시 한 번 망쳐버리기, 다시 한 번 더 잘 망쳐버리기"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도전을 따라 사랑에 관해 잘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껴안으면서 다시 새로운 말하기를 시도한다. 누구도 사랑을 믿지 않는 시대지만, 철학이 참된 삶에 관계하는 학문인 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철학의 숙명이므로.
#『진리의 내재성』-'유한-무한-작품'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은 부제가 암시하듯 사랑의 철학자라 불리기도 하는 알랭 바디우의 근작 『진리의 내재성L'Immanence des v?rit?s』(2018)에 대한 독해에 기반하여 사랑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바디우의 책은 크게 '유한-무한-작품'으로 나뉘는데, 동시대 세계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유한(성)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서 시작해 무한(성)의 왕국에 대한 탐사를 거쳐,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작품을 해명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절대성의 여정은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이 작품이라는 형태의 진리로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의미라고도 요약할 수 있다.
유한성에 갇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자기 정체성에 집착하여 타자를 부정하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필연의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되풀이되는 반복의 틀에 갇혀 유한성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로서의 사랑은 이 유한성에 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 깊숙이 자리 잡은 모종의 중심 바깥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 보는 것, 관성적이지 않은 원심력이 그려지도록, 기존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여 예견 불가능한 경로로 흘러가는 원반이 새로움을 수놓도록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는 행위가 여는 가능성이다. 사랑은 유한한 정체성을 벗어버린 이름 없는 둘이 되는 것이고, 유한의 세계가 고착시킨 분리의 경계들, 이를테면 선과 악의 구분 또한 가로지른다.
사랑은 유한의 세계에 갇혀 있지만 벽을 뚫고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바디우가 탐색하는 무한의 왕국은, 유한성의 장치에 의해서는 도달되지 않는 초월성으로서의 무한, 분리를 거부하는 통합적인 힘으로서의 무한, 고립이 아닌 뒤얽힘, 원자가 아닌 그물망에서 출현하는, 이질적인 다수성의 촘촘한 연결망으로 구성되는 거대한 부분으로서의 무한, 사랑은 이러한 무한에 가닿으려는 안간힘을 통해 삶과 실존을 급진적으로 변형한다. 무한을 내포한 진리로서의 사랑은 절대성에 근접하려는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진리는 어떤 초월적인 절대성의 하강도 아니며, 어떤 근원적인 자기 동일성의 특수한 확증도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는 절대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유한에 의해 은폐되었던 것들은 더 이상 은폐되지 않으며, 진리들이 실존하는 모든 가능한 차원 안에 있는 무한한 새로운 잠재성이 출현한다.
절대적인 진리는 실존하지만, 절대성의 진리와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절대성에서는 불투명한 지대가 존재한다. 우회ㆍ굴곡ㆍ선회ㆍ매개 없이 단번에 직접적이고 특권적인 방식으로 절대성에 닿으려는 시도는 파국을 초래한다. 이는 사랑이 절대적인 하나에 이르는 초월적인 여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하나를 겨냥할 때 도래하는 것은 죽은 사랑이거나 미친 사랑이다.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듯, 일자적인 사랑은 절대 사멸한다. 절대성에 관한 이러한 욕망에 경계를 촉구한 후에 바디우는 이제 『진리의 내재성』의 핵심인 '작품'의 이론을 전개한다.
작품의 이론이 중요한 까닭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진리가 세계 안에 물질적 실존성을 갖는 '작품'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무한의 능동적인 효과로 실존하는 유한이다. 그것은 유한하되 무한에 개방되어 있다. 작품은 무한에 열린 독특한 유한으로서 진리의 절대성의 지표를 품고 있다. 사랑이라는 진리에서는 '나는 당신을 사랑해'가 지표의 역할을 맡는다. 그 지표는 사랑이 어떤 외적 상황과 무관하게, 덧없는 에피소드로 전락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을 지시하면서 존재한다는 표식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는 지표의 부재는 사랑을 썸으로, 일탈로, 찌꺼기로, 하룻밤의 정사로 전락시킨다. 거기서는 가시적으로는 성교가 일어나더라도 구조적으로, 그리고 실재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관계와 비관계
사랑은 독특한 둘에 관한 진리, 차이 그 자체에 관한 진리다. "성관계란 없다"는 말과 함께 라캉은 사랑이란 성관계의 결여를 보충하는 것이라는 테제를 제기한다. 바디우는 라캉과 함께 비관계가 성의 차원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한편, 라캉을 넘어서 사랑은 어떤 관계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성적 비관계와 질적으로 다른 것, 어떤 유사-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하나 더하기 하나"나 "황홀한 하나"가 아니라 "둘의 무대"를 조직하는 데 있다. 즉, 사랑은 비관계의 절대적인 우위나 관계의 절대적인 우위에 놓인 상태가 아니라 비관계에 맞서 관계를 구축하는 행위이다.
한편으로는 성적 욕망의 대상에 관한 오해로 점철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공통 경험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이중적 기능으로 인해 사랑은 결코 똑바로 걷지 못하는 발걸음, 즉 "절뚝거림"이 된다. 사랑이 하나의 "노고勞苦"가 되는 까닭이다. 욕망의 대상에 관한 오해를 막을 수 없으며 하나의 위력이 둘의 궤적을 수시로 침범하는 상황을 충실하고 집요하게 돌파해나가는 노고 말이다. 이 노고를 견딤으로 연인들은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함께 경험하고, 그렇게 공유된 경험은 주체적인 반복을 통해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내재적인 절대성에 참여하는 인류의 형상을 목도한다. 인류와 사랑을 연관시키는 것이 곧 철학 자체의 몸짓이다.
#사랑과 찌꺼기, 혹은 무의식과 구멍
바디우에게 있어서 성적인 것을 자기화하지 못한 사랑, 성적 비관계의 난관을 어떤 식으로든 돌파하지 못한 사랑은 찌꺼기에 머문다. 성적 비관계의 난관에 지속적으로 맞서면서 둘의 무대를 구축하는 데 도달한 사랑만이 작품이 될 수 있다. 반면 라캉은 자신의 분석행위와 찌꺼기를 다르게 설명한다. 라캉은 찌꺼기가 분석 행위와 양립 가능하다고 말한다. 분석 행위가 찌꺼기와 양립 가능한 이유는 분석가가 내담자의 상징계 바깥으로 밀려난 해석 불가능한 주이상스를 포착하고 내담자의 주체적 실재를 비추는 찌꺼기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분석가의 그러한 찌꺼기 기능만이 강박증자가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하기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진리-사랑에 라캉적인 보충이 요구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라캉에게 절대성은 하나의 구멍이자 공백이다. 그에게 사랑의 형상은 어떤 영원성이나 조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영원성과 조화가 용해되는 곳에서 성적 비관계의 구멍에 당황하고 고통 받거나 그 구멍을 메우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분석 작업은 때로 내담자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분석가의 본의는 오히려 내담자로 하여금 아무리 힘겹게 도달된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의 구멍을 통과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쟁점은 단순히 작품의 창조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고 또 그러한 창조를 통해 구멍을 보존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억압"이 유한성의 장치라면, 분석 작업은 무의식이라는 내재적인 무한을 통해 억압이라는 유한성의 장치를 해방시키는 데 있다. 무의식이란 유한성과 무한성의 뒤얽힘 그 자체다. 만약 개인의 무의식이 그토록 압제적인 유한성에 걸려 있지 않다면 어째서 내담자가 분석 작업에서 그토록 반복되는 연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또 무의식이 내재적인 무한성을 함유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분석 작업이 주체적 변화라는 실질적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분석은 해묵은 환상에 붙들려 있는 병리적 욕망의 유한성으로부터 주체의 해방을 도모하는 데 있다.
#사랑의 노고... 절뚝거림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둘의 무대는 오직 절뚝거림을 통해서만 구축되고, 절뚝거림으로서의 사랑은 일자의 권력과 둘의 노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 사랑의 주체는 일자에의 치명적인 유혹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노고는 실재를 헤쳐나가는 말더듬 행위이면서 진리를 구축해나가는 절뚝거리는 발걸음이다. 사랑의 진정한 절대성은 진리 너머에서 초-절대적인 영역을 개방한다. 우리에게는 초-절대적 노고에 헌신할지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사랑하는 이는 절대성에 의해서조차 제약되거나 한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초-절대적으로 놓여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유형의 행위자일까?
라캉은 사랑의 주체란 없고 사랑의 희생자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은 성관계라는 진공의 블랙홀이 유발하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반면 바디우는 인간 동물의 성욕을 진리의 몸을 통해 변형시키는 사랑의 주체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은 성의 유한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둘의 무한성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초-절대성에 어울리는 것은 사랑의 희생자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장인匠人이다. 오직 사랑의 장인만이 최고의 작품에 심혈을 기울일 줄 아는 만큼이나 조각난 사랑의 잔해를 따스하게 포용할 줄 안다. 그것이 곧 사랑의 노고에 담긴 초절대성이 그에게 허락한 초절 기교이기 때문이다.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은 둘 모두 공통으로 중시하는 논리적 형식화를 통해,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 형식화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을 통해 바라본 사랑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해답을 우리는 독일 철학자 요하네스 피히테의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랑이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향한 욕망이고, 그것의 실존은 오직 그것을 향한 욕구에 의해서만, 어떤 불편함에 의해서만,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을 탐색하지만 끝내 그것이 어디에서 실현될지 알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공백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여기서 피히테가 말하는 사랑은 비대상적이고 무한을 향한다는 점에서 바디우적이며, 동시에 그것은 욕망과 관련되고 불편함과 공백에 의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라캉적이다.
사랑은 그 구조적 한계에서 침몰하고 그 절대적 흔적에서 존속한다. 바캉적(라캉인면서 바디우적인) 사랑은 하나의 '난관'이자 '통과'로 드러난다. 『세미나 22권』에서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사랑은 소중합니다! 사랑은 드물게 실현되고,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잠시 동안만 지속되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본질적으로 벽의 파열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 벽에 부딪혀 이마에 혹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라캉에게 사랑의 소중함ㆍ희귀함ㆍ덧없음은 사랑이 곧 사랑 고유의 난관을 깨트리려는 시도라는 사실에 결부된다. 그러나 그 난관은 결코 손쉬운 탈출구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의 벽을 돌파하려는 시도는 무엇이든 이마의 혹이라는 상처를 유발한다. 여기서 사랑은 '통과할 수 없는 난관'으로 나타난다. 한편, 바디우에게 관건은 단순히 벽의 파열이 아니라 유한성에 근거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너머를 지향하면서 벽을 뛰어넘는 것이다. 사랑의 작품을 만드는 자는 벽을 회피하기 위해 기성 규범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벽 안에 갇혀서도 안 된다. 사랑은 이마에 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 고유의 난관에 맞서서 절대성의 지표를 간직한다. 이때 사랑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통과'로 나타난다. 우리는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을 통해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 사랑은 통과할 수 없는 난관과 흔들리지 않는 통과 사이에 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 둘과 비관계, 진리와 구멍, 절대성과 진공, 작품과 찌꺼기, 난관과 통과 사이에서 명멸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사랑은 통합의 에로스가 아니라 간극의 방황이다. 방황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가운데 불발된 사랑의 부스러기더미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우리 모두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둘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입니다. 사랑이라는 생각은 거기서 시작됩니다."(라캉)
목차
목차
서문
들어가며
1. 유한성
2. 현대적 유한성
3. 무한의 왕국
4. 유한의 패배
5. 절대성에 관한 어떤 유혹
6. 작품의 이론
7. 사랑의 작품
8. 사랑: 초-절대성과 그 사면
참고문헌
들어가며
1. 유한성
2. 현대적 유한성
3. 무한의 왕국
4. 유한의 패배
5. 절대성에 관한 어떤 유혹
6. 작품의 이론
7. 사랑의 작품
8. 사랑: 초-절대성과 그 사면
참고문헌
저자
저자
박영진
연세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라캉과 바디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ole de la Cause freudienne 소속 분석가와 교육분석을 진행했고, 정신분석가 브루스 핑크에게 수퍼비전을 받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정신분석을 강의하고 있으며, '라캉정신분석연구소'에서 분석가로 활동 중이다. 발표한 논문으로 「반철학, 철학, 사랑: 무라카미 하루키의 '토니 타키타니' 읽기」,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 읽기: 라캉과 바디우 사이」, 「바디우의 '진리의 내재성'의 사랑에 대한 라캉적 보충」이 있으며, 저서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 사랑, 바디우』, 역서에 『임상사례로 읽는 라캉의 정신분석』, 『라캉의 사랑』 등이 있다. 네이버 카페 '라캉 정신분석'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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