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꺼내 썼다(달아실시선 51)
고은수 시집
박성현 시인이 짚어냈듯이 이번 시집의 핵심은 “응시”에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된다”라고 한 랭보의 말은 어쩌면 이번 고은수 시집을 통괄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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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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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수 시집 『모자를 꺼내 썼다』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은수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모자를 꺼내 썼다』를 펴냈다.
2018년 첫 번째 시집(『히아신스를 포기해』)에서 사물들의 틈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틈의 미학'을 발견해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응시를 통해 주체의 심연에 다다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박성현 시인은 이번 시집을 "응시, 혹은 주체의 심연으로 다가서기"라는 말로 요약하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시각'의 경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상-이미지'로까지 확대된다면 단어와 단어 사이의 경계는 재배치되며 시각화된 단어들의 연쇄가 빚어내는 매혹적인 환영-예컨대, 바슐라르의 존재론적인 '떨림'-을 충분히 표현하는 단어들도 이끌어낼 수 있다. 요컨대, '가파른 바위산을 조심스레 내려오는 / 하얀 염소처럼, // 내려오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눈을 맑게 / 뜨는 두 발'(「2월」」)에서 보여주는 '시각'은 '응시'로써 더욱 깊어지고 '상상'을 통해 비약한다.
그런데 고은수 시인은 왜 이러한 '응시'를 시작(詩作)의 심급으로, 주요한 방편으로 삼았던 것일까. '응시'가 대상으로부터 무한한 가능성(잠재력)을 이끌어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구체적이고 세밀한 '운동-이미지(상상)'까지도 포획하는 그 강력한 확장성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인이 사물을 향해 그물망처럼 던진 이 '응시'가 단순한 형상의 기술, 혹은 1차원적 묘사 등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마음이 없다면 / 찬란할 것도 없는'(「저녁달」」) 것으로, 시인이 포획한 대상과 시인 자신의 감각적 상승 혹은 재편을 유발하면서 역동적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고은수 시인에게 있어 '응시'란 세계 속 사물들의 저 우연하고도 무질서한 분산(chaos)에서 '일관된 깊이'를 보는 것이다. 또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의미를 잘라내고 그 '너머', 곧 사물의 '공백'과 '없음'까지도 찾아내는 것이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창문은 / 먼 데 보는 얼굴만 갈아끼우고 있다'(「雨요일」 전문). 이 생경하고도 놀라운 문장을 천천히 읽어보자.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창문'이라는 첫 행의 문장을 통해 마치 압핀으로 단단히 고정되어버린 주체의 우울과 멜랑콜리가 쏟아진다. 그런데 곧바로 '먼 데(를) 보는 얼굴'이라는 문장이 이어지면서 화자는 자신이 하던 일, 혹은 해야만 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고 주의를 집중한다. 이것이 바로 '응시'다; 대상에 붙박임, 주체의 움직일 수 없음, 그러나 더욱 더 대상 속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운명, 곧 보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
박성현 시인이 짚어냈듯이 이번 시집의 핵심은 "응시"에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된다"라고 한 랭보의 말은 어쩌면 이번 고은수 시집을 통괄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분홍은 조용히 저쪽에 있다
희열을 말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조금씩 말라가고 있다
잊고, 잊고, 잊고
그래도 아직 분홍이다
지금은 여름이고 장마철인데
예쁘다 하고는 언제 잊어버렸나
색깔이 분홍이니 봄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하다니,
쓸 수 있다, 써진다
의미가 없어도, 말이 맞지 않아도
느낌은 흘러나온다
분홍이 구멍을 내고 있다
마른 우물처럼 먼지바람이 날린다
윙윙거리며 우는 소리,
예전에 품에 품던 다정함을
까먹고 사랑을 잃었다고 짐작한다
- 「분홍 펜」 전문
고은수 시인의 응시는 마침내 "분홍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오랫동안 응시하다 보면 눈물이 나고 눈이 아파오겠지만, 그 결과 사물에 틈이 벌어지고 뚜렷했던 경계가 흐려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분홍에 구멍이 나는 그 지점에 펼쳐지는 진경을 독자는 보게 될 터, 고은수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존재의 심연이겠다.
내뱉는 입김이 공기를 데운다
가파른 바위산을 조심스레 내려오는
하얀 염소처럼,
내려오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눈을 맑게
뜨는 두 발처럼,
내향적인 들판에 귀를 기울여본다
바람의 입은 훈풍을 노래할 것이다
나는 어딘가로 갈 생각이다
신성해지는 돌을 안고,
- 「2월」 전문
우연이겠지만, 그의 이번 시집이 2022년 2월에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의 시집 마지막에 배치된 시가 「2월」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마지막 시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었다. 그는 아무래도 더 "어딘가로 갈 생각"인데, 그의 다음 시집이 기다려지는 까닭이겠다.
목차
목차
1부
다시 걷기
내 안의 느티나무
안부를 묻다
낯선 아침
돌아갈 수 있을까요
모자를 꺼내 썼다
인기척
계속 태어나는 일
여기만 비가 오지 않아서
여름에 아픈 사람
아쉬운 노래
D-1
그다음 날
회복기
2부
새로 쓰는 마음
물웅덩이
당신에게 전화를 걸지도
네가 온다면
저런 빨강
저녁달
노란 꽃
라, 라, 라
너는 어쩔래
장미 서른 송이
오후 네 시
누가 말 좀 해봐
출구
기도가 필요한 시간
3부
눈 오는 날
메타세쿼이아가 붉어졌다
오타루
벽화 앞에서
옷을 뒤집어 입고
구름의 내면
다 거짓말이었어
노을과 통화 중
가을이라서
옥천
깊은 색
퇴폐적인 기분
누구신지요
다시 돌아오는 것들
부디 황혼 안에 머물기를
4부
구석이 살아난다
나비야 놀자
빙고
충분해요
나는 매일 우체국에 간다
오늘 강
분홍 펜
여기서 봄이 잘 보인다
날씨가 왜 이래요
슬픔이 구구구
무늬
雨요일
안톨로기아
아침 일기
2월
해설 _ 응시, 혹은 주체의 심연으로 다가서기 _ 박성현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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