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차원 놀이터(창연기획시선 13)
임창연 시집
경남 창원에서 활동 중인 임창연 시인이 창연기획시선 시리즈 열세 번째 시집 『사차원 놀이터』를 창연출판사에서 펴냈다. 1부에는 ‘바다의 꽃’ 외 9편의 시, 2부에는 ‘전지전능·2’ 외 9편의 시, 3부에는 ‘비밀번호’ 외 9편의 시, 4부에는 ‘시루봉 얼레지꽃’ 외 9편의 시 등 총 40편의 시와 문학평론가인 유성호 교수의 시집 해설 ‘존재론적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 꿈의 세계’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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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임창연 시집 『사차원 놀이터』는 남다른 경험과 기억을 성찰의 의지로 갈무리한 미학적 결과이다. 자신의 시적 수심(水深)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자신만의 시적 표지(標識)를 아름답게 이루어냈다. 그 과정은 퇴행적이거나 회고적이지 않고, 오히려 경험과 기억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역동적 꿈의 세계를 잃지 않는다. 물론 그 꿈은 존재론적 비원(悲願)을 품고 있지만 시인의 존재론적 도약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삶의 굳건한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 임창연 시인은 삶의 비의(秘義)와 고통을 증언하면서도, 베르그송(H. Bergson)이 '지속의 내면적 느낌'이라고 부른 시간의 흐름을 순정하게 펼쳐갔다. 기억이나 회상을 통해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주체의 마음에 따라 조정된 시간을 재구성해간 것이다.
-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집 해설]
존재론적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 꿈의 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삶의 비전을 새롭게 창출하는 경험적 방법론
임창연의 신작시집 『사차원 놀이터』(창연출판사, 2022)는 시인 자신이 오랜 시간 겪어온 삶의 경험에 대한 스스럼없는 고백과 새로운 삶을 설계하려는 서정적 개진 의지가 결속된 은은한 내면의 화첩(?帖)이다. 시인은 "문자는 일차원의 종이에 쓰지만 문장 자체는 삼차원과 사차원을 오간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언어가 여러 차원에서 생성되고 구축되어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오랫동안 축적해온 기억과 그것을 성찰로 끌어올리는 의지 사이에서 그의 시는 발원해온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완성된 이번 시집은 '시(詩)'라는 언어적 구성물에 대한 외경과 신뢰를 실어 보여주는 예술적 기록이기도 한데, 이는 서정시가 구현하는 시간예술로서의 속성을 충족하면서 시인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과 궁극을 유추하게끔 해주는 유력한 형질로 기능하고 있다. 그만큼 임창연 시인의 필치는 서정시가 쌓아온 핵심 기율로서의 기억을 진솔하게 반영하면서 망각된 가치들을 복원해가는 과정에 심혈을 기울여간다. 그는 삶의 비전을 새롭게 창출하는 경험적 방법론으로서 시를 써가는 것이다.
2. 오랜 시쓰기의 기율과 시인으로서의 존재론
원래 풍경 묘사의 본질은 산뜻하고 선명한 대상 재현 과정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사물의 순수한 외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본령을 두지 않고, 시인 자신의 삶과 정신을 적극적으로 매개하여 풍경을 선택적으로 변형함으로써 그 안에 새로운 존재론을 투영하는 데 힘을 기울이게 된다. 서정시가 근원적으로 일인칭 고백의 속성을 널리 견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서정시는 시인 스스로의 고유한 시선과 필치를 통해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서 삶의 다양한 육체를 발견하는 과정을 담게 마련이다. 이때 시가 담아내는 풍경은 사실적 외관과 함께 시인의 해석이 개입된 형상을 띨 수밖에 없다. 사물과 풍경을 적극적으로 외화(外化)하는 과정에서 임창연의 시는 풍경이 내면과의 접면(interface)을 통해 드러나는 것임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른바 '은유로서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풍경은 내면과 유추적 등가성을 띠면서 펼쳐지고, 그 안에는 시인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랄까 페이소스랄까 하는 것이 형상적으로 담겨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 작품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자.
윤슬은 바다의 꽃
찰나로 피었다 지는 꽃
바다의 들판에 태양이 피워내는 꽃
가끔은 숭어가
빛으로 피워낸 꽃을 따 먹으려 솟구치고
떨어지면 더 많은 윤슬꽃이 피어난다
바람도 덩달아 꽃빛을 드넓게 피우고
바다를 가르며 지나던 뱃전에도
수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바다 위
수억 송이의 꽃빛으로
찬란한 하루가 피고 진다
- 「바다의 꽃」 전문
임창연 시인은 바다의 외관이 파생해가는 은유적 성격을 시 안쪽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두루 알다시피 '윤슬'은 달빛이나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하는데, 그것을 일러 시인은 찰나에 피었다 지는 "바다의 꽃"이라고 명명한다. 윤슬은 바다라는 들판에 태양이 피워낸 꽃인 것이다. 그렇게 순간의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가 사라져가는 윤슬을 가끔씩 바다의 식솔들이 따 먹으려고 솟구쳤다가 떨어지면 바다 위에는 역설적으로 더욱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그렇게 수많은 꽃들이 피고 이울어갈 때 시인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바다 위/수억 송이의 꽃빛"이야말로 "찬란한 하루"를 피고 지게 하는 미학적 원천임을 노래한다. 그렇게 "바다의 꽃"은 시인이 열망하는 예술적 함의를 띤 채 바다 위로 천천히 번져간다. 이처럼 임창연의 미학적 시선은 "문득 내 마음에 남겨질 물방울 자국들"(「생목生目」)처럼 "태양이 영원하듯이 당신의 가슴속에서/꺼지지 않는 불로 남아"(「사랑의 기억 」 화양연화·3」) 있을 문양을 발견하고 채록하고 있다. 아름다운 예술적 의장(意匠)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세상의 비밀을 들려주는 자
별들의 노래를 받아 적고
바다의 눈물을 보는 자
시인은 곡비 노릇을 하는 자
로드킬 당한 짐승에 마음 아파하고
억울한 사람의 죽음에 잠 못 들고 우는 자
시인은 신의 대언자
꽃잎 속에서 우주의 소리를 듣고
나무에서 바람의 목소리를 듣는 자
- 「시인」 전문
그러니 자연스럽게 '시인'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비밀을 들려주는 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별들의 노래"나 "바다의 눈물"은 시인의 몸과 마음에 차례차례 새겨지고 들어앉게 된다. 그것을 받아 적고 바라볼 수 있는 '견자(見者, Voyant)'가 말하자면 '시인'이다. 그리고 시인의 존재론은 '곡비(哭婢)'와도 같아 누군가를 위해 아파하고 잠 못 들고 울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로드킬 당한 짐승"처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불행에 흔연하게 동참하는 '시인'은 결국 "신의 대언자"로 몸을 바꾸고, 바다 위에서 윤슬꽃을 발견하듯이, "꽃잎 속에서 우주의 소리"를 듣거나 "나무에서 바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지 않는가. 그렇게 임창연의 내면에서 '시인'이란 "눈으로 처음 보고 가슴 두근거렸던 기억"(「시루봉 얼레지꽃」)을 통해 오래고도 빛나는 결정(結晶)으로서 예술적 각인을 수행하는 자로 비상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임창연 시인은 풍경과 내면의 접점을 통해 시쓰기의 기율과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을 깊이 사유해간다. 서정시가 시인 스스로 겪어온 시간에 대한 경험 형식으로 씌어지는 양식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그의 지속성은 이채롭고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서정시가 시간에 대한 경험적 재구성의 양식이라고 할 때, 풍경과 내면의 결속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 가닿는 과정을 그는 환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임창연의 시를 읽으면서 '바다의 꽃'과 '신의 대언자'를 만나게 되고 폐허의 시대를 훌쩍 건너갈 수 있게 된다. 그의 시에 담긴 시간의 심층에 몸을 기대면서 한세상을 상상적으로 견뎌가는 것이다. 그 점에서 임창연은 오랜 시간을 순간적으로 발화하면서 이 불모의 시대를 견디게 해주는 귀한 시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고 치유해가는 상상력
아닌 게 아니라 '시인'이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존재 전환을 하염없이 꿈꾸는 존재일 것이다. '시인'은 일상 현실을 벗어나 전혀 새로운 곳으로 상상적 이동을 꾀하기도 하는데, 그때 이루어지는 경험이야말로 세계를 향한 한없는 원심력을 띠다가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구심력을 견지하게 마련이다. 임창연 시인은 이러한 서정시의 확장성과 회귀성을 동시에 치러가는 미학적 장인(匠人)이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시종 바깥쪽에 대한 가열한 탐구 의지와 안쪽에 대한 내밀한 발견의 감각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할 것이다.
중국의 어느 깊은 골짜기에 사는
소수민족의 인사말은
"어느 산에 가십니까"이다
길을 잃고 돌아오지 않으면
그 산으로 찾으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으면 인사말로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끼니를 거르지 말고 건강을 잘 챙기란 말이겠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출근할 때
"차 조심해라"라고 늘 말씀하셨다
퇴근할 때쯤이면 늘 베란다에 서 계셨다
가끔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마음속으로 인사를 한다
"어머니, 거기서는 아프지 않으시지요"
- 「인사법」 전문
이 따뜻한 작품에 나타난 '인사법'은 '시법(詩法)'이기도 하고 '인생론'이기도 할 것이다. 중국 어느 소수민족의 인사법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누군가를 찾아야 했던 오랜 지혜가 모아진 것이다. 누군가가 떠나는 "어느 산"은 깊은 골짜기에서 살아간 그들의 삶터이자 길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하는 절애(絶崖)이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인사법에는 한 공동체의 습속과 지혜가 담기게 되는데, 가령 식사하셨느냐는 인사에는 건강 잘 챙기라는 권면이 담겨 있고, "차 조심해라" 하고 당부하는 말씀에는 자식 걱정을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배어 있다.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해 시인이 마음속으로 건네는 인사법은 아프시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인이 들려주는 인사법은 "죽음이 기억을 지울 때까지/영원히 숨쉬고 있을"(「사랑의 기억 」 화양연화·3」) 어떤 간절함과 고마움을 안고 있다 할 것이다.
아침마다 주 씨는 일찍 일어나
골판지 박스를 가게 앞에 쌓는다
먼저 세탁소를 하던 손 씨는
아들 사업에 집을 담보 잡혔다가
가게를 보증금까지 털리고 세탁소를 닫았다
여전히 세탁이라고 달린 보조 간판 하나
아직도 그 이름은 유효한 듯
주 씨는 리어카로 종이박스들을 날라온다
뒷골목에 위치한 가게가 임대가 안 돼
자신이 손수 버려진 박스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덕에 종이값은 세 배가 올라
주 씨는 더 부지런히 종이박스를 나른다
인류의 핏값이 종이값을 올리는
모순된 경제학
나비효과로 주 씨는 요즘 살 만하다
- 「세탁소 주 씨」 전문
이 작품은 세탁소에서 일하는 누군가를 향한 관찰의 결실이다. 그런데 주인공 '세탁소 주 씨'는 언제나 아침 일찍부터 골판지 박스를 가게 앞에 쌓는 일을 반복한다. 먼저 세탁소를 운영하던 이가 문을 닫고 나서 세탁소를 맡았을 그는 세탁이라고 쓰인 간판을 그대로 둔 채 리어카로 종이 박스들을 날라 오는 일에 열중한다. 그런데 그는 뒷골목 가게가 임대가 안 되어 하는 수 없이 시작한 박스 모으기 덕에 살 만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종이값이 오른 탓이다. 이를 두고 시인은 "인류의 핏값이 종이값을 올리는/모순된 경제학"이라고 일갈한다. 비록 그 나비효과로 살 만해진 '세탁소 주 씨'의 이야기가 작품 배면(背面)을 이루고 있지만, 시인으로서는 전쟁이 가져온 희유(稀有)의 파생효과를 반어적으로 담아냄으로써 시대의 반영체로서의 시를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은 지문"(「말의 지문」)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감염병과 전쟁이 겹쳐진 우리 시대의 불구적 초상으로 손색이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를 향한 애정 어린 관찰과 관심은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그 형상은 가장 사사로운 맥락으로부터 공공적 흐름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위에 편재적으로 존재한다. 감각적 표현으로부터 사회적 호소에 이르기까지 그 관찰과 관심은 폭 넓게 걸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언어를 임창연 시인은 그만의 단정하고도 결기 있는 시법으로 노래해간다. 우리는 그의 시가 삶의 축도(縮圖)로서 '인사법'이나 '나비효과'를 담아낸 형상을 바라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고통을 드러내고 치유하는 쪽으로 그의 시가 정향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고 치유해가는 상상력을 그의 시에서 일관되게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4. 언어를 단련하고 조율하면서 성숙해가는 과정
나아가 우리는 임창연 시인이 견지하는 '시'에 대한 강렬한 자의식을 두고두고 기릴 수 있다. 그의 시는 시간예술로서의 면모를 충실하게 견지하는 범례에 해당하는데, 앞에서도 강조한 이러한 시의 속성은 과거로부터 절연된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괄하는 '충만한 현재형'에 본질을 두고 있을 것이다. 과거를 되살리면서도 미래를 함께 암시하는 현재형을 통해 임창연은 지나간 것들의 흔적을 생생하게 복원하면서 '오래된 미래'를 꿈꾼다. 이때 강렬한 기억은 현재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 되고 미래적 비전은 복원의 형식을 통해 현현하게 된다. 이러한 상상적 복원과 탈환 과정을 수행하면서 임창연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되돌아보는 성찰 자세를 줄곧 유지해간다.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그러한 과정을 균형 있게 수행하게끔 하는 원천이 되어주고 있다.
물에 젖어야만 읽히는 경전이 있었다 억겁의 시간 동안 빛나는 달빛 아래, 오천 년 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벼루에 먹을 갈아, 천년 된 여우꼬리 붓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며, 수정동굴에서 죽을 때까지 책만 만들었다 소문만 무성했고 정작 서책을 본 사람은 없었다 글을 쓰는 동안 피를 흘린 고기는 먹지 않고, 풀도 뿌리째 먹으며 잘 말린 곡식만 먹었다 그의 생각을 적은 것도 아니었고, 이제껏 세상 사람들은 본 적 없는 문장들이었다 서책이 완성되자 그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동굴을 나와 책을 가진 채 우물로 뛰어들었다 우물은 폐쇄되고 입구는 돌로 메워졌다 그 이후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우물 곁을 지나던 사람들이 무언가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서책을 만든 사람은 죽었고 본 사람은 없으니 내용도 알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책 중에 하나는 이렇게 볼 수가 없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다 죽고 난 후 우물이 마르고 땅이 뒤집힌 후에 그 책은 열리게 될 것이다
- 「전설·2」 전문
이 단단하게 짜인 작품은 '시'를 향한 시인의 의식이 함축된 빼어난 가편(佳篇)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전설의 형상은 "물에 젖어야만 읽히는 경전"이다. 전설 속의 경전은 '그'로 통칭되는 누군가가 억겁의 시간 동안 빛나는 달빛 아래서 오래된 우물물을 길어 먹을 갈아 여우꼬리 붓으로 적어내려 간 결과물이다. 동굴에서 죽을 때까지 책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정작 그 책을 본 사람은 없다. 음식까지 가려먹으면서 완성해간 그 책은 이제껏 세상 사람들이 전혀 본 적 없는 문장을 품고 있다. 그런데 책이 완성되자 '그'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우물이 메워진 후 보름달 뜨는 밤이면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이 "울음소리"를 듣곤 했다. 시간이 흐른 후 이러한 일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죽고 나면 우물이 마르고 땅이 뒤집혀 그 책이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라는 전설을 시인은 우리에게 건넨다. 그러고 보면 전설 속 경전은 서정시의 궁극적 차원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얼음의 결정처럼 빛"(「주남도서관 」- 청둥오리)으로 서늘한 문장들, "시간이라는 힘을/믿고 기다리는"(「악의 꽃」) 마음이 해독할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것이 어쩌면 궁극적 언어를 향한 시인의 소망이 육체를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은 또 어떠한가.
부산 조방로 33번길
금강 목공 김 씨가 원형 톱날의 날을 세운다
회전 연마 숫돌에 물을 부어가며 불꽃을 잠재우고 있다
톱날은 마그마에 단련되어 담금질 되었지만
보르네오 밀림의 땅속 기운을 받은
단단해진 근육의 나뭇결과 부딪히며
쇳날은 서서히 무디어졌다
나무가 머금은 세월의 이빨은 얼마나 단단한가!
세상에 만만한 상대란 없는 법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순한 누우도 떼로 뭉치면
밀림의 왕자 사자도 도망간다
종이가 손을 베어 피를 내듯
톱날은 나무 근육을 자르면서
자신의 쇳날도 날아갔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칼부림으로 죽은 사람보다
말의 칼로 내상을 입고
죽어간 사람이 더 많다는 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혓바닥에 감춘 칼로
남도 죽이고 때로는 자결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 「말의 칼」 전문
이번에 시인은 "금강 목공 김 씨"를 호출한다. 부산 조방로에 있는 이 목공소의 주인공은 "원형 톱날"을 세우는 숙련된 전문가이다. 회전 연마 숫돌에 불꽃을 잠재우면서 그가 만들어가는 톱날은 마그마에 단련되어 담금질되기도 했지만, 나무가 머금은 단단한 "세월의 이빨"에 그 날카로움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언뜻 보아 쇠와 나무는 압도적 우열 관계로 보이지만 시인은 종이가 손을 베듯이 톱날도 나무 근육을 자르면서 스스로 훼손된 시간이 있음을 끌어온 것이다. 그렇듯 사람과 사람도 칼부림보다는 "말의 칼로 내상을 입고/죽어간" 경우가 더 많다는 소문을 시인은 우리에게 들려준다. 말하자면 "저마다 혓바닥에 감춘 칼"로 남도 자신도 죽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때 시인이 함축하는 "말의 칼"이야말로 서늘한 언어적 충격의 가능성과 리스크의 가능성을 함께 보여준다. "대중은 늘 이성보다는 감성"(「프로파간다」) 편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적 폭력을 저지를 때가 많다. 시인은 "무언가 자신이 쓴 글들의 의미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지"(「문장의 살해」)를 생각하면서 그러한 '말의 칼'을 단련하고 조율하면서 내적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갈 것을 간접적으로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임창연 시인은 온전한 의미에서 '시'가 가지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깊이 사유한다. 전설 속의 '경전'과 누군가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말의 칼'은 상호 절제와 균형을 통해 오롯한 시인의 존재론을 구축해갈 것이다. 그렇게 그의 시는 언어가 가지는 긍정적 의미의 결과를 희원하지만 그것을 미완에 그치게 하는 완강한 언어의 부정적 속성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시는 이러한 언어(말)가 가지는 유니크한 기능들이 때로 협업하면서 때로 갈등하면서 자연스러운 세계로 천천히 전이되어가는 세계인 셈이다.
5. 존재론적 기원과 궁극의 초상
우리 시대를 규율하는 문화적 추동력은 단연 영상이 주도하는 다매체 시대라는 규정 속에 깃들여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파른 미디어 환경에서 활자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서정시는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성거리며 반추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힘겹게 수행할 수밖에 없다. 한 시대의 주변이나 외곽을 자임하는 이러한 서정시의 기능은 자연스럽게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간극을 좁혀가는 동일성 원리를 준용하는 세계로 펼쳐지게 마련이다. 임창연의 시는 몸과 마음의 동일성을 한껏 아름다운 형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기 기원(origin)과 궁극을 동시에 향하는 열정을 담아낸 결실로서 다가온다. 시집 표제 시편이기도 한 다음 작품은 시인이 바라본 그러한 존재론적 기원과 궁극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올라가는 것들은 새처럼 가벼워야 한다
풍선에 가득 찬 수소는 바람처럼 빠르게 오른다
터질 듯 임계점에 이르면 수류탄처럼 폭발한다
콧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철없는 것들은 길에 떨어진 소금처럼 가볍다
장난을 치면서 밟히고 넘어지고 다친다
어린것들은 마음 없는 미소처럼 가볍다
소리들은 모기처럼 공중을 날아다닌다
바람의 등을 타고 날아다니는 소리들
말 많은 사람들은 입에 날개를 달고 가벼워진다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가짜 뉴스들
들리는 소문들은 먼지처럼 가볍다
늘 가짜 소문들은 예쁜 무늬 포장지로 감싼다
길을 헤매던 언어들이 책꽂이의 시집처럼 쌓여간다
- 「사차원 놀이터」전문
'사차원 놀이터'는 시인이 처한 현재적 조건이라기보다는 그가 새삼 도약하려는 상상의 세계를 함의하고 있다. 바람처럼 빠르고 수류탄처럼 폭발력 있게 하늘로 올라가는 것들은 새처럼, 소금처럼, 미소처럼, 가볍게 공중을 날아다닌다. "바람의 등을 타고 날아다니는 소리들"은 먼지처럼 가볍게 흘러 다니기도 하지만 "길을 헤매던 언어들이 책꽂이의 시집처럼 쌓여"가는 시간을 오롯하게 남기기도 한다. 이렇게 가볍게 비상하는 장소로서의 '사차원 놀이터'야말로 "눈가의 주름처럼 흔적만 남기고"(「사랑은 늘 시간에게 백기를 든다」) 사라질지라도 "만났던 모든 이들이 고마웠다고"(「첫눈을 기다리며」) 말을 건네는 순간을 허락하는 미학적 모형인 셈이다. 그곳에서 임창연의 시가 씌어지고 삶이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고 헤매지만 방향을 잃지 않는 시인의 기원과 궁극이 그 안에서 밀도 있게 다가온다. 이처럼 임창연의 시는 시인 자신이 겪은 남다른 경험과 기억의 깊이를 함유하면서 그 안으로 우리를 동참시킨다. 그 경험과 기억의 내질(內質)이 오랜 시간 만나온 대상을 향한 한없는 그리움과 매혹으로 이어져가게끔 해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천천히 읽어왔듯이, 임창연 시집 『사차원 놀이터』는 남다른 경험과 기억을 성찰의 의지로 갈무리한 미학적 결과이다. 자신의 시적 수심(水深)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자신만의 시적 표지(標識)를 아름답게 이루어냈다. 그 과정은 퇴행적이거나 회고적이지 않고, 오히려 경험과 기억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역동적 꿈의 세계를 잃지 않는다. 물론 그 꿈은 존재론적 비원(悲願)을 품고 있지만 시인의 존재론적 도약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삶의 굳건한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
임창연 시인은 삶의 비의(秘義)와 고통을 증언하면서도, 베르그송(H. Bergson)이 '지속의 내면적 느낌'이라고 부른 시간의 흐름을 순정하게 펼쳐갔다. 기억이나 회상을 통해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주체의 마음에 따라 조정된 시간을 재구성해간 것이다. 이때 시인은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과 궁극을 탐색하면서 '시'를 향한 짙은 자의식을 드러내는 방향을 취했다. 이제 우리는, 대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시를 향한 치열한 자의식을 아름답게 보여준 이번 시집을 딛고, 그가 더욱 원숙한 시적 진경(進境)으로 나아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보는 것이다.
목차
목차
제1부
바다의 꽃
시인
프로파간다
말의 지문
목욕탕
전설·2
물고기의 하루
피터팬 증후군
사랑의 기억
악의 꽃
제2부
전지전능·2
여탕의 추억
배롱나무는 오래도록 꽃을 피운다
여름이 온다고 하자
가포 수리봉 해변
생목生目
여름을 떠나보내며
문장의 살해
푸른 하늘 은하수
세탁소 주 씨
제3부
비밀번호
아버지
죽음은 날래다
주남도서관
젓가락을 놓다
영암사지 전설
말의 칼
오영수 문학관
사차원 놀이터
인사법
제4부
시루봉 얼레지꽃
사랑은 늘 시간에게 백기를 든다
문신미술관
해동解冬
임화를 생각함
내 발끝에 사는 이여
협잡의 시대
바보들의 행진
도둑놈 우화
민주라는 이름으로
첫눈을 기다리며
■ 시집 해설
존재론적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 꿈의 세계
-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자
저자
1978년 고등학교 시절 학생중앙문단에 고 박두진 선생께 시 2회 추천
1998년 무크지 〈매혹〉으로 시 등단, 2013년 〈시선〉으로 시 등단
2015년 〈한비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디카시집 『화양연화』, 시집 『한 외로움 다가와 마음을 흔들면』
『아주 특별한 선물』 『꽃꿈』 『아버지 뿔났다』 『사차원 놀이터』
현재 한국문인협회, 경남시인협회, 민들레문학회 회원, 경남문인협회 이사,
마산문인협회 부회장, 붓꽃문학회 회장, 창연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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