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현상학(창연기획시선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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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시인은 시를 매개로 안과 밖을 왕래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심화하고 확대하는 과정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시인 김용권은 끊임없이 타자와 사물과의 관계를 사유하는 시인이다. 그는 생활세계에서 만나는 사물과 사건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예민하게 감각하며 공명한다. 결코 주체를 우위에 두지 않으며 대칭성 관계를 통한 이해를 위하여 노력한다. 다섯 번째 시집 『시간의 현상학』에도 이와 같은 만남의 시학을 지속한다. 마르틴 부버는 "온갖 참된 삶은 만남"(『나와 너』에서)이라고 하였다. 김용권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진정성도 이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 구모룡(문학평론가)
[시집 해설]
관계를 사유하는 만남의 시학
- 구모룡(문학평론가)
매우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시인은 누구나 세 가지 차원과 맞닥뜨린다. 시적 주체와 세계 그리고 언어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면 시인이 더 비중을 두는 차원에 따라서 시관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언어 그 자체의 시적 기능을 따라서 미학적 위계를 설정하는 시인은 제작에 공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음으로 주체를 중시하는 시인은 세계를 자아화하는 자기중심의 표현에 집중하지만 점차 내부에서 외부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기를 제쳐두고 세계를 재현하는 시인은 대체로 의도한 목적을 지니며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시작에서 주체의 표현과 세계의 재현이 엄밀하게 나누어지진 않는다. 오로지 자기를 말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시인이 없을뿐더러 자기를 배제하고 세상만 말하는 시인도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를 매개로 안과 밖을 왕래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심화하고 확대하는 과정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시인 김용권은 끊임없이 타자와 사물과의 관계를 사유하는 시인이다. 그는 생활세계에서 만나는 사물과 사건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예민하게 감각하며 공명한다. 결코 주체를 우위에 두지 않으며 대칭성 관계를 통한 이해를 위하여 노력한다. 다섯 번째 시집 『시간의 현상학』에도 이와 같은 만남의 시학을 지속한다. 마르틴 부버는 "온갖 참된 삶은 만남"(『나와 너』에서)이라고 하였다. 김용권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진정성도 이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집에서 첫 번째 시편과 마지막 시편은 모두 같은 표제를 단 「횡단보도」이다. 시집의 수미를 상관하는 두 시편의 배치가 의미심장하다. 첫 「횡단보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너는 건너오고/나는 건너간다/
서로의 이름을 건너로 옮기는 동안,/밟아간 그 사이가/
백 년이나 깊었다.
짧은 시편이지만 시인은 중요한 의식과 의미를 내장한다. 우선 건너오는 이를 "너"로 지칭하여 대상화하지 않는다. '너'는 '나'에게 '너'이고 '나'는 '너'에게 '나'이다. 이는 주체가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대칭성을 지니며 서로 만나는 현상을 뜻한다. 또한 모두 고유한 이름을 지닌 주체이다. 이러한 '나-너'의 관계에 "사이"가 있다. 어느 일방의 동일성의 폭력이 작동할 수 없는 거리인데 시적 화자는 "사이가/백 년이나 깊었다"라고 진술한다. 이처럼 시인은 만남을 '나'가 타인을 향해 가고 타인인 '너'가 '나'를 향해 오는, 전 생애를 담보한 사건으로 인식한다. 여기에서 사건은 존재의 가능성과 진리를 인식하는 계기를 말하는데, 일상을 사건으로 지각하는 시인의 태도를 주목하게 한다. 이는 "섬에 갇혔다"로 시작하는 또 하나의 「횡단보도」에 의하여 보충되기도 한다. 이 시편에서 시적 화자는 "악마에게 홀릴 영혼을 주인으로 모신 이들이/붉은 눈동자를 끌고 간다"라는 진술로써 속도가 지배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면 첫 시편에 상응하는 마지막 시편 「횡단보도」는 어떠할까?
깜박인다/위험신호일까?/줄은 이미 길게, 꼬리를 물고 있다/
냉기가 몸속을 횡단한다/건너가면 그만인 것을/망설인다/
길은 무너졌지만 당신은 얼마나/먼 곳에서 왔는지/
먼 곳으로 가는지도 모를,/저 건너에는/무료급식소가 있다
(「횡단보도」 전문)
"깜박인다/위험신호일까?"라는 시적 화자의 물음 속에 위험사회라는 현실인식이 내재해 있다.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를 위한 도로에서 파란불조차 점멸하며 건너는 이를 재촉하는데, 시간이 돈이고 속도가 강제하는 국면을 "냉기가 몸속을 횡단하는" 존재의 위협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건너가면 그만인 것을/망설"이는 형국에서 시적 화자는 "당신"을 떠올린다. 이 시편은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환기 효과가 크다. "길은 무너졌지만"이라는 상황인식과 더불어 "당신"이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먼 곳에서 왔는지/먼 곳으로 가는지도 모를" "당신"이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너'를 아우르는 관계를 총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이는 "저 건너에는/무료급식소가 있다"라는 결구와 조응하는 바, 시적 화자는 낮은 위치에서 '너'를 부르고 만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지점에 김용권이 인식하는 실존과 개성적인 시적 지평이 있다.
비의 전부를 그려놓고/버려지는 나를 본다/
비는 순례자 시처럼 내리지만/시는 부랑아 비처럼 온다/
젖어버린 종이를 아궁이에 넣는다/엉켜버린 묵서지편,/
타닥, 타닥 비의 리듬만 남았다/
나는 나에게 공연한 시비를 건다/
고요가 떨어져 시끄러웠다/너도 나에게 시비를 걸어도 좋다
(「시와 비」 전문)
표제와 내용을 통하여 약간의 언어유희(pun)를 가미한 시편이지만 단순하지 않은 시에 관한 시편(metapoem)에 해당한다. 먹으로 비를 그리고 시를 쓰면서 애쓴 과정이 도로(徒勞)가 되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나"의 표정이 역력하다. "비는 순례자 시처럼" 내리나 "시는 부랑아 비처럼" 오는 역설의 형국에서 "비의 리듬만" 남게 된다. 그림이며 시편은 불로 사라지고 다시 무위의 가능성이나 기다림의 반복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 "나는 나에게 공연한 시비를" 한다. 이 시편의 묘미는 이러한 시작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 데 있다. "고요가 떨어져 시끄러웠다"라는 대목에서 반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로 "고요"에 관한 자각이 생기면서 "너도 나에게 시비를 걸어도 좋다"라고 열린 마음을 개진한다. 이처럼 김용권은 일상을 사건으로 지각하면서 존재의 안과 바깥을 교호하는 시적 지평을 확장하는 시법을 보여준다.
김용권의 시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첫째 '나-너'의 만남과 대화의 형식을 드러내고 둘째 사물과 사건을 통하여 '나'의 바깥에 관한 자각과 인식을 크게 하는 과정으로 발현한다. 가령 「나는 달린다」에서 '너'는 "쏜살같은 질주 본능"을 지닌 "경주마처럼" "바람을 깨트리는 야성"을 지니지만 '나'는 "차"와 "사람"과 경쟁하면서 "나를 양보 없이" 앞지르는 "달리는 생"의 "과속"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너'를 통하여 "오늘을 건너가는 지도"도 없이 야성을 상실한 '나'를 반성한다. 이와 같은 형태는 「불살개」에서 일정한 차이를 만들면서 반복한다.
달 한 줄 그려놓고/둥둥 떠내려가는 시간을 창문에 바른다/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너를 구부려놓고/눈을 찌른 절망,/
반듯하다/구린내 나는 종이를 구겨서 아궁이로 던진다/
나를 태우는 붉은 문장,/환생이다, 백발로 날아간다
(「불살개」 전문)
어떤 의미에서 「시와 비」와 같은 계열의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이상인 '너'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의 곤경을 "눈을 찌른 절망"이라고 선연하게 표현하면서 "구린내 나는 종이를 구겨서 아궁이로" 던지는 행위를 표출한다. 이처럼 높은 '너'가 있기에 낮은 '나'는 "나를 태우는 붉은 문장"을 경유하면서 "환생"으로 상승한다. 허무를 경험하고 무위가 시적 가능성임을 인식한다. 또한 '나와 너'의 만남은 사물과 대대(待對)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꽃무릇」과 「만년교」와 「오징어」 등의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한번쯤은/저래야 한다/산은 푸른데/걸음은 하혈한 듯 붉다/
네 푸름이 번져 모른다하고/내 붉음이 번져 모른다하고/
불갑산 허리를 둘러메고 가는/그리움이란 무릇,/
하루에 한번쯤은/저래야 한다
(「꽃무릇」 전문)
시적 대상인 '꽃무릇'이 의미하는 "그리움"을 '너'와 '나'의 관계로 풀이하였다. "산"의 푸름과 "걸음"의 붉음을 병치하면서 '꽃무릇'이라는 작은 사물을 크게 확대하여 숭고에 육박하게 만든다. 물론 "그리움이란 무릇"이라는 언어유희를 가미하였기에 숭고는 압도적이지 않고 명랑하다. 이러한 표정은 「오징어」에서 "뒤집어진 물속,/너와 나는 매번 뒤바뀐 꿈을 꾸다가/오늘도 빛나는 순간"을 맞는 형태로 변주하며 "바람 많은 덕장에서/유영하는 바다의 미라"인 '오징어'가 "꿈의 가지로 휘저을 때마다/사거리 좌판에 걸어 둔 날개가 퍼덕"거리는 비약으로 나타난다. 「만년교」에서 시적 화자는 "너를 가만히 올려두고 천년, 만년/떠받치고 견디는 힘을 배운다"라고 진술한다. "저편에 있는 네가 이쪽에 닿을 때까지" "당신이 걸어오는 곳에 나를 걸어" 두겠다는 의지적 수행의 표출이다. 사물을 단순하게 의인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대상화하여 소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로 만나 '나'를 변화하고자 한다. 「언플러그」에서 시적 화자는 "네온사인 입간판에 납작하게 붙어있는 청개구리"를 보면서 '나'는 "식당 문이 닫힐 때까지 너와 같은 자세로 국밥을 먹는다"라고 진술하고 "어디에도 뛰어들 수 없는 울음 가득한 암전"을 공유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대칭 관계를 확인한다. 이처럼 김용권은 '나와 너'의 시법을 통하여 타자와 사물을 대상화하는 현실의 지각 양식을 극복하려 한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은 「반려동물」에서 "나는 고양이의 반려동물"이라는 전도가 가능하듯이 시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실천에 가깝다. 나아가서 시인은 자연 사물과의 대대는 물론 장소를 통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도하며(「수로역을 지나면 황옥역이 있다」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의 길을 열기도(「법성게-실수와 실패」에서) 한다.
혼불처럼 퍼지는/당신의 말//내 심장으로 뿌려져/
왜 그리 뜨겁든지//바람만 실금 불어도/수만 송이 불길인 것을//
꽃잎 한 장 떨구는 것도/고백의 음계로/
나를 관통하는 몸짓이었네//바람에 물린 자리/
구름이 밟은 자리/한 사나흘 머물다가는 봄이라니//
노랗게 번지는 것을/너라고 말할 때,//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타고 있다
(「유채의 말」 전문)
김용권이 보이는 만남의 시학은 이 시편에서 사물의 부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유채의 말'을 듣고 그로부터 환기되는 '나'의 정동(affect)이 뜨겁다. "꽃잎 한 장 떨구는 것도/고백의 음계로/나를 관통하는 몸짓"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상호적인 만남의 극치에 다다른다. 이는 단순한 동화나 투사의 은유가 아니다. 이보다 사물이 환기하는 힘에 이끌리면서 '나'의 변화가 초래하는 경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노랗게 번지는 것을/너라고 말할 때,//가만히 들여다보면/내가 타고 있다"라는 결구에 이르면 상호간에 어떠한 배타성의 기미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 시편처럼 김용권은 일상을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실존의 감각을 돌올하게 표출한다. 이럴 때에 '나와 너'의 시법과는 달리 경험적인 '나'의 자각과 인식이 결구에 이르러 크게 부각하는 형식을 보인다.
밑밥으로 친/새우 한 마리, 바다를 걸고 있다/
걸림이 심한 곳에서 나는/물고기 노래를 부른다/
푸른 수심 저 아래에는/입 큰 물고기가 살고 있어서,/
걸려도 너무 큰 바다가 걸릴 것 같아서,/
수중으로 나를 묶어 내린다/
아무래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나를 뽑아 올리다가/팽팽하던 줄이 툭 끊어지면/
멋진 이유 속에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겠다/파도의 흰머리가/
어망 속으로 들어간다/번번이 걸리는 바닥에는/
내가 키운 고래 한 마리 살고 있다
(「고래밥」 전문)
시적 화자는 "새우 한 마리"로 "바다를" 걸 수 있는 데서 "나는/물고기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푸른 수심 저 아래" "너무 큰 바다"를 걸기 위해서 "나를 묶어" 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입 큰 물고기"나 깊은 바다를 알려면 자기를 미끼로 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인데 이해의 지평을 구체적으로 은유한다. 그런데 시편의 후반은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나를 뽑아 올리다가/팽팽하던 줄이 툭 끊어지면/멋진 이유 속에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겠다"라고 진술하며 비우고 버리는 태도를 강조한다. 이는 "번번이 걸리는 바닥"에 "내가 키운 고래 한 마리 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존재의 생성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를 향하여 투신하거나 자기를 버리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물론 「고래밥」에서 상상의 비약을 촉발한 계기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이다. '고래밥'이라는 과자를 연상할 수 있듯이 「홈 키퍼」처럼 단어의 사소한 의미를 빌린 가족애의 서술도 가능하고 「북돋우다」와 같이 "씨감자 눈을 따러/튼실한 근간을" 심는 일을 "나를 심는" 행위로 치환하고 "북돋우는 일이 일생이" 된 사건으로 비약할 수도 있다. 시인은 「빨래방」의 결구가 "지금 나는 찌든 때를 빼는 중이다"라고 말하듯이 생활세계에서 만나는 일들을 자기를 반성하는 사건으로 소환한다.
청량사 보살이 놋그릇을 닦고 있네/닦아야만 피는 꽃처럼,/
빙 둘러앉아 고봉으로 닦고 있네/꽃처럼 피는 것도 맨날/
제 빈 밥그릇 닦는 일이었나/
금강계단에 걸었던 얼굴이 손끝에 걸렸네/
구름의 말씀 한번 지나고/바람의 미소 한번 지나고/
당신 얼굴 닦는 일이 내 얼굴 닦는 일이었네
(「불두화」 전문)
이 시편의 처음은 "청량사 보살이 놋그릇을 닦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를 통하여 시적 화자는 닦음의 의미를 새기면서 "금강계단에 걸었던 얼굴"이 그릇에 "꽃처럼 피는" 사태에 직면한다. "구름의 말씀"과 "바람의 미소"를 깨닫는 순간이다. 이로써 "당신 얼굴 닦는 일이 내 얼굴 닦는 일"이 되며 모든 내면성이 사라져 '누구의 얼굴도 아닌 얼굴'을 만난다. 경우에 따라서 소소하고 사소한 사건만 시가 되는 게 아니다. "아랫동네 할머니/가을을 소각하다가 떠났다"라는 첫 구절로 시작하는 「불장난」처럼 "바람의 장난"에 그치지 않는 우연한 죽음의 각성도 있다. 그래서 「가을 다비식」은 "오늘 하루/가장 붉을 때,//얼른 와서 보고 가//내일이면/저 속으로 익사하는 내가//어찌 될지 모르겠거든"이라고, 짧지만 함축적인 형태의 진술을 얻기도 한다. 「환승」 또한 "장례식장에서 국밥을 말아먹는 나는/자꾸 무거워지는 화물입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사람은 죽음을 통하여 존재를 자각한다.
잠의 껍질을 벗긴다/어젯밤 운명은 내가 죽는 것이었다/
살아서 자기 죽음을 보다니/어둠을 흘려보내는/
꿈의 밑둥치를 잘랐다/깎다 보니 사람이었다/
끌어다 덮은 자리에서 손이 나왔다/
어디까지 훔쳐봐야 하는 걸까/춤추는 아이 손을 잡고/
바람이 불러내는 환상의 섬으로 갔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나무에서 났다/꿈의 보자기를 펼쳐 들고/
밤하늘에 떨어지는 것을/아이와 함께 주워 담았다/
구멍 숭숭한 돌에다/검은 몽상들을 묶어놓았다/
어둠은 어쩌지도 못하고/노란 입술에 꽉 물려 있었다
(「밀감」 전문)
밀감의 껍질을 벗기는 행위를 "잠의 껍질을" 벗기는 일로 전치하였다. 잠 속의 꿈에 "자기 죽음"을 보고 "춤추는 아이 손을 잡고/바람이 불러내는 환상의 섬" 제주를 향하며 묵시처럼 "밤하늘에 떨어지는 것을/아이와 주워" 담기도 한다. 꿈은 "검은 몽상"과 다를 바 없는데 밀감을 깎으며 그 "노란 입술"같은 껍질에 "꽉 물려" 있는 "어둠"을 "어쩌지도" 못한다. 이 시편은 시인의 놀라운 공감과 감수성을 보여준다. 제주산 밀감을 매개로 죽음과 억울한 영혼을 환기하고 있다. 이로써 시인의 사물에 관한 지각이 단독자의 감성으로 회귀하지 않고 사회 역사적 지평을 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횡단보도」로 시집을 시종(始終)한 사태와도 연관한다. 그만큼 삶과 존재에 관한 감각이 민활하고 예민하다. 가령 「관전 포인트」는 "개활지를 가로질러/고라니를 쫓고 있는 유기견 무리들"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구경꾼"에서 "나도 언제/저렇게 쫓긴 적이 있었던가"라고 자문하면서 "산으로 간 발자국이 하얗게 찍혀있는 아랫동네에서 나는//마지막 주자가 되어/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라고 존재의 유한성을 상기한다. "대들보에/파리 끈끈이를" 달아놓은 일에서 "운문사 비로전에 매달려 있는" "악착보살"을 떠올리며 "죽음을 구원하는/성스러운 의식"과 결부하는 「악착보살」은 다시 과수원에서 따라온 "도꼬마리 풀씨 몇 개"로 변주하며 "이곳을 줄 없이 건너가는 방법"을 상상하게 만든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 지평의 개진이다. 또한 「이웃들」과 「까치집」도 상관적인 시편으로 철거되는 까치집을 통하여 "빈 집으로 지은 슬픈 꿈"의 의미를 되새긴다.
스스로 발광하지 않았다면/
물끄러미,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떨어져 죽어도 메아리가 없는 그곳에는/
어둠의 화장장이 있어서,/은하수 터진 주둥이를/
밤이라는 인큐베이터에 걸어놓고/
실직으로 가는 새벽에 눈이 멀었다
(「별」 전문)
실직이라는 삶의 한 현상을 별이 떨어지는 밤 풍경에 유비하는 감각이 돌올한 시편이다. "실직으로 가는 새벽에 눈이 멀었다"라는 결구의 함축에서 비장미가 묻어난다. 이러한 풍경의 유비는 「백화등과 마삭줄」에서 "바닥으로" 기어가다 "야무지게 붙잡고 일어서면" "환한 백화등"이 되고 "푸른 노동의 옷을 입고/꿈의 활차를 밀고 가다가 벽을 만나면" "마삭줄"로 "이름을 바꿔 달고서라도 꽃이" 피는 의지와 낙관의 형국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시인은 사물과 뭍 생명의 시선으로 생을 긍정하는데 "나를 깨트리는 봄을 믿는다"(「바람의 시선」에서)라는 진술로 표출되기도 한다. "말라서 하얀 사랑처럼,/고요해서 굳건한 안개는/내일 또, 일어설 안개는"이라는 결구를 지닌 「안개 노선」이 말하는 생의 지향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수구레국밥」과 「마수걸이」와 「화포」와 「남지장날」 등에 등장하는 삶의 풍경과 장소를 통하여 시인은 "낮은 곳에 산다는 게 이런 것"(「법수반점」에서)이라는 사실을 어김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처럼 생을 긍정하는 감각이 존재의 유한성, 상실과 추억, 단절과 슬픔 등과 함께 하는 일이 모순은 아니다.
그대가 가고 나면/남은 게 하나 있다//나를 녹이던 체온도/
그윽이 바라보던 눈빛도 아니다/다시 오마고 했던/
그 말은 더더욱 아니다//흔적 없이,/그대가 가고 나면/
땅에 박힌 그림자처럼 어디에도 없다/다 가져가 버렸다//
빈 병처럼 놓인/남은 게 하나 있다/
그래야 하는 듯이 하나가 남았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도 가버렸고/다시 온다는 날은 너무 멀고//
슬픔을 데우는 얼음주머니를 차고/금방 늙어버리는/
나만 남아있다
(「그대가 가고 나면」 전문)
김용권은 「시인의 말」을 통하여 "시간은 왜 주름상자 속으로 들어갔을까?"라고 묻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인용한 시편인 「그대가 가고 나면」이 아닌가 한다. 이 시편에서 "그대"는 시인에게서 모든 '너'라고 해도 되겠다. 특히 여러 시편에서 등장하는 "어머니"는 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장화」는 "시도 때도 없이/천둥, 번개 요란한 날//어머니는/나의 이름을 신고 갔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 시편의 처음인 "비의 이름으로 살았다"라는 구절이 마지막인 "걸어가는 곳마다 비가 내렸다"라는 구절과 상응하는 데 이르러 그 슬픔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할머니"(「대밭에 대꽃이 피어」에서)의 추억이나 "아버지"(「간고등어」와 「퇴장」에서)의 기억이 없지 않으나 「산불진화론」과 「당간지주-어머니와 빨랫줄」 등에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각별하고 유난하여 아주 큰 상실감을 환기한다. 어머니의 "타다 남은 사랑"이 남아서 "불 속을 벗어났는가 싶었는데/요동치는 불 속"(「산불진화론」에서)에 여전히 있다는 화자의 진술이 가열하다. 이래서 인용한 「그대가 가고 나면」에서 "슬픔을 데우는 얼음주머니를 차고/금방 늙어버리는/나만 남아있다"라는 결구가 던지는 울림이 크다. "어머니"와 "내 기억에 오래 머문"(「석빙고」에서) 유년과 "소떼를 풀어 다녀놓은/바람의 발자국을 따라//그 푸른 동네"인 고향의 추억은 김용권 시인에게 시적 원형이며 시인됨을 부여하는 밑자리이다. 이러한 서정적 바탕 위에서 그는 사랑(「봄비」에서)과 행복(「깻단을 털며」에서)을 지향하며 타자와 사물을 만나는 시적 삶을 지속한다. 김용권에게 시는 인생의 방법이자 깨달음의 지평을 열어가는 중요한 삶의 방편이다.
- 구모룡(문학평론가)
[시집 해설]
관계를 사유하는 만남의 시학
- 구모룡(문학평론가)
매우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시인은 누구나 세 가지 차원과 맞닥뜨린다. 시적 주체와 세계 그리고 언어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면 시인이 더 비중을 두는 차원에 따라서 시관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언어 그 자체의 시적 기능을 따라서 미학적 위계를 설정하는 시인은 제작에 공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음으로 주체를 중시하는 시인은 세계를 자아화하는 자기중심의 표현에 집중하지만 점차 내부에서 외부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기를 제쳐두고 세계를 재현하는 시인은 대체로 의도한 목적을 지니며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시작에서 주체의 표현과 세계의 재현이 엄밀하게 나누어지진 않는다. 오로지 자기를 말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시인이 없을뿐더러 자기를 배제하고 세상만 말하는 시인도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를 매개로 안과 밖을 왕래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심화하고 확대하는 과정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시인 김용권은 끊임없이 타자와 사물과의 관계를 사유하는 시인이다. 그는 생활세계에서 만나는 사물과 사건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예민하게 감각하며 공명한다. 결코 주체를 우위에 두지 않으며 대칭성 관계를 통한 이해를 위하여 노력한다. 다섯 번째 시집 『시간의 현상학』에도 이와 같은 만남의 시학을 지속한다. 마르틴 부버는 "온갖 참된 삶은 만남"(『나와 너』에서)이라고 하였다. 김용권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진정성도 이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집에서 첫 번째 시편과 마지막 시편은 모두 같은 표제를 단 「횡단보도」이다. 시집의 수미를 상관하는 두 시편의 배치가 의미심장하다. 첫 「횡단보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너는 건너오고/나는 건너간다/
서로의 이름을 건너로 옮기는 동안,/밟아간 그 사이가/
백 년이나 깊었다.
짧은 시편이지만 시인은 중요한 의식과 의미를 내장한다. 우선 건너오는 이를 "너"로 지칭하여 대상화하지 않는다. '너'는 '나'에게 '너'이고 '나'는 '너'에게 '나'이다. 이는 주체가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대칭성을 지니며 서로 만나는 현상을 뜻한다. 또한 모두 고유한 이름을 지닌 주체이다. 이러한 '나-너'의 관계에 "사이"가 있다. 어느 일방의 동일성의 폭력이 작동할 수 없는 거리인데 시적 화자는 "사이가/백 년이나 깊었다"라고 진술한다. 이처럼 시인은 만남을 '나'가 타인을 향해 가고 타인인 '너'가 '나'를 향해 오는, 전 생애를 담보한 사건으로 인식한다. 여기에서 사건은 존재의 가능성과 진리를 인식하는 계기를 말하는데, 일상을 사건으로 지각하는 시인의 태도를 주목하게 한다. 이는 "섬에 갇혔다"로 시작하는 또 하나의 「횡단보도」에 의하여 보충되기도 한다. 이 시편에서 시적 화자는 "악마에게 홀릴 영혼을 주인으로 모신 이들이/붉은 눈동자를 끌고 간다"라는 진술로써 속도가 지배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면 첫 시편에 상응하는 마지막 시편 「횡단보도」는 어떠할까?
깜박인다/위험신호일까?/줄은 이미 길게, 꼬리를 물고 있다/
냉기가 몸속을 횡단한다/건너가면 그만인 것을/망설인다/
길은 무너졌지만 당신은 얼마나/먼 곳에서 왔는지/
먼 곳으로 가는지도 모를,/저 건너에는/무료급식소가 있다
(「횡단보도」 전문)
"깜박인다/위험신호일까?"라는 시적 화자의 물음 속에 위험사회라는 현실인식이 내재해 있다.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를 위한 도로에서 파란불조차 점멸하며 건너는 이를 재촉하는데, 시간이 돈이고 속도가 강제하는 국면을 "냉기가 몸속을 횡단하는" 존재의 위협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건너가면 그만인 것을/망설"이는 형국에서 시적 화자는 "당신"을 떠올린다. 이 시편은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환기 효과가 크다. "길은 무너졌지만"이라는 상황인식과 더불어 "당신"이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먼 곳에서 왔는지/먼 곳으로 가는지도 모를" "당신"이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너'를 아우르는 관계를 총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이는 "저 건너에는/무료급식소가 있다"라는 결구와 조응하는 바, 시적 화자는 낮은 위치에서 '너'를 부르고 만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지점에 김용권이 인식하는 실존과 개성적인 시적 지평이 있다.
비의 전부를 그려놓고/버려지는 나를 본다/
비는 순례자 시처럼 내리지만/시는 부랑아 비처럼 온다/
젖어버린 종이를 아궁이에 넣는다/엉켜버린 묵서지편,/
타닥, 타닥 비의 리듬만 남았다/
나는 나에게 공연한 시비를 건다/
고요가 떨어져 시끄러웠다/너도 나에게 시비를 걸어도 좋다
(「시와 비」 전문)
표제와 내용을 통하여 약간의 언어유희(pun)를 가미한 시편이지만 단순하지 않은 시에 관한 시편(metapoem)에 해당한다. 먹으로 비를 그리고 시를 쓰면서 애쓴 과정이 도로(徒勞)가 되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나"의 표정이 역력하다. "비는 순례자 시처럼" 내리나 "시는 부랑아 비처럼" 오는 역설의 형국에서 "비의 리듬만" 남게 된다. 그림이며 시편은 불로 사라지고 다시 무위의 가능성이나 기다림의 반복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 "나는 나에게 공연한 시비를" 한다. 이 시편의 묘미는 이러한 시작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 데 있다. "고요가 떨어져 시끄러웠다"라는 대목에서 반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로 "고요"에 관한 자각이 생기면서 "너도 나에게 시비를 걸어도 좋다"라고 열린 마음을 개진한다. 이처럼 김용권은 일상을 사건으로 지각하면서 존재의 안과 바깥을 교호하는 시적 지평을 확장하는 시법을 보여준다.
김용권의 시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첫째 '나-너'의 만남과 대화의 형식을 드러내고 둘째 사물과 사건을 통하여 '나'의 바깥에 관한 자각과 인식을 크게 하는 과정으로 발현한다. 가령 「나는 달린다」에서 '너'는 "쏜살같은 질주 본능"을 지닌 "경주마처럼" "바람을 깨트리는 야성"을 지니지만 '나'는 "차"와 "사람"과 경쟁하면서 "나를 양보 없이" 앞지르는 "달리는 생"의 "과속"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너'를 통하여 "오늘을 건너가는 지도"도 없이 야성을 상실한 '나'를 반성한다. 이와 같은 형태는 「불살개」에서 일정한 차이를 만들면서 반복한다.
달 한 줄 그려놓고/둥둥 떠내려가는 시간을 창문에 바른다/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너를 구부려놓고/눈을 찌른 절망,/
반듯하다/구린내 나는 종이를 구겨서 아궁이로 던진다/
나를 태우는 붉은 문장,/환생이다, 백발로 날아간다
(「불살개」 전문)
어떤 의미에서 「시와 비」와 같은 계열의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이상인 '너'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의 곤경을 "눈을 찌른 절망"이라고 선연하게 표현하면서 "구린내 나는 종이를 구겨서 아궁이로" 던지는 행위를 표출한다. 이처럼 높은 '너'가 있기에 낮은 '나'는 "나를 태우는 붉은 문장"을 경유하면서 "환생"으로 상승한다. 허무를 경험하고 무위가 시적 가능성임을 인식한다. 또한 '나와 너'의 만남은 사물과 대대(待對)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꽃무릇」과 「만년교」와 「오징어」 등의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한번쯤은/저래야 한다/산은 푸른데/걸음은 하혈한 듯 붉다/
네 푸름이 번져 모른다하고/내 붉음이 번져 모른다하고/
불갑산 허리를 둘러메고 가는/그리움이란 무릇,/
하루에 한번쯤은/저래야 한다
(「꽃무릇」 전문)
시적 대상인 '꽃무릇'이 의미하는 "그리움"을 '너'와 '나'의 관계로 풀이하였다. "산"의 푸름과 "걸음"의 붉음을 병치하면서 '꽃무릇'이라는 작은 사물을 크게 확대하여 숭고에 육박하게 만든다. 물론 "그리움이란 무릇"이라는 언어유희를 가미하였기에 숭고는 압도적이지 않고 명랑하다. 이러한 표정은 「오징어」에서 "뒤집어진 물속,/너와 나는 매번 뒤바뀐 꿈을 꾸다가/오늘도 빛나는 순간"을 맞는 형태로 변주하며 "바람 많은 덕장에서/유영하는 바다의 미라"인 '오징어'가 "꿈의 가지로 휘저을 때마다/사거리 좌판에 걸어 둔 날개가 퍼덕"거리는 비약으로 나타난다. 「만년교」에서 시적 화자는 "너를 가만히 올려두고 천년, 만년/떠받치고 견디는 힘을 배운다"라고 진술한다. "저편에 있는 네가 이쪽에 닿을 때까지" "당신이 걸어오는 곳에 나를 걸어" 두겠다는 의지적 수행의 표출이다. 사물을 단순하게 의인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대상화하여 소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로 만나 '나'를 변화하고자 한다. 「언플러그」에서 시적 화자는 "네온사인 입간판에 납작하게 붙어있는 청개구리"를 보면서 '나'는 "식당 문이 닫힐 때까지 너와 같은 자세로 국밥을 먹는다"라고 진술하고 "어디에도 뛰어들 수 없는 울음 가득한 암전"을 공유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대칭 관계를 확인한다. 이처럼 김용권은 '나와 너'의 시법을 통하여 타자와 사물을 대상화하는 현실의 지각 양식을 극복하려 한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은 「반려동물」에서 "나는 고양이의 반려동물"이라는 전도가 가능하듯이 시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실천에 가깝다. 나아가서 시인은 자연 사물과의 대대는 물론 장소를 통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도하며(「수로역을 지나면 황옥역이 있다」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의 길을 열기도(「법성게-실수와 실패」에서) 한다.
혼불처럼 퍼지는/당신의 말//내 심장으로 뿌려져/
왜 그리 뜨겁든지//바람만 실금 불어도/수만 송이 불길인 것을//
꽃잎 한 장 떨구는 것도/고백의 음계로/
나를 관통하는 몸짓이었네//바람에 물린 자리/
구름이 밟은 자리/한 사나흘 머물다가는 봄이라니//
노랗게 번지는 것을/너라고 말할 때,//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타고 있다
(「유채의 말」 전문)
김용권이 보이는 만남의 시학은 이 시편에서 사물의 부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유채의 말'을 듣고 그로부터 환기되는 '나'의 정동(affect)이 뜨겁다. "꽃잎 한 장 떨구는 것도/고백의 음계로/나를 관통하는 몸짓"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상호적인 만남의 극치에 다다른다. 이는 단순한 동화나 투사의 은유가 아니다. 이보다 사물이 환기하는 힘에 이끌리면서 '나'의 변화가 초래하는 경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노랗게 번지는 것을/너라고 말할 때,//가만히 들여다보면/내가 타고 있다"라는 결구에 이르면 상호간에 어떠한 배타성의 기미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 시편처럼 김용권은 일상을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실존의 감각을 돌올하게 표출한다. 이럴 때에 '나와 너'의 시법과는 달리 경험적인 '나'의 자각과 인식이 결구에 이르러 크게 부각하는 형식을 보인다.
밑밥으로 친/새우 한 마리, 바다를 걸고 있다/
걸림이 심한 곳에서 나는/물고기 노래를 부른다/
푸른 수심 저 아래에는/입 큰 물고기가 살고 있어서,/
걸려도 너무 큰 바다가 걸릴 것 같아서,/
수중으로 나를 묶어 내린다/
아무래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나를 뽑아 올리다가/팽팽하던 줄이 툭 끊어지면/
멋진 이유 속에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겠다/파도의 흰머리가/
어망 속으로 들어간다/번번이 걸리는 바닥에는/
내가 키운 고래 한 마리 살고 있다
(「고래밥」 전문)
시적 화자는 "새우 한 마리"로 "바다를" 걸 수 있는 데서 "나는/물고기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푸른 수심 저 아래" "너무 큰 바다"를 걸기 위해서 "나를 묶어" 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입 큰 물고기"나 깊은 바다를 알려면 자기를 미끼로 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인데 이해의 지평을 구체적으로 은유한다. 그런데 시편의 후반은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나를 뽑아 올리다가/팽팽하던 줄이 툭 끊어지면/멋진 이유 속에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겠다"라고 진술하며 비우고 버리는 태도를 강조한다. 이는 "번번이 걸리는 바닥"에 "내가 키운 고래 한 마리 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존재의 생성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를 향하여 투신하거나 자기를 버리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물론 「고래밥」에서 상상의 비약을 촉발한 계기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이다. '고래밥'이라는 과자를 연상할 수 있듯이 「홈 키퍼」처럼 단어의 사소한 의미를 빌린 가족애의 서술도 가능하고 「북돋우다」와 같이 "씨감자 눈을 따러/튼실한 근간을" 심는 일을 "나를 심는" 행위로 치환하고 "북돋우는 일이 일생이" 된 사건으로 비약할 수도 있다. 시인은 「빨래방」의 결구가 "지금 나는 찌든 때를 빼는 중이다"라고 말하듯이 생활세계에서 만나는 일들을 자기를 반성하는 사건으로 소환한다.
청량사 보살이 놋그릇을 닦고 있네/닦아야만 피는 꽃처럼,/
빙 둘러앉아 고봉으로 닦고 있네/꽃처럼 피는 것도 맨날/
제 빈 밥그릇 닦는 일이었나/
금강계단에 걸었던 얼굴이 손끝에 걸렸네/
구름의 말씀 한번 지나고/바람의 미소 한번 지나고/
당신 얼굴 닦는 일이 내 얼굴 닦는 일이었네
(「불두화」 전문)
이 시편의 처음은 "청량사 보살이 놋그릇을 닦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를 통하여 시적 화자는 닦음의 의미를 새기면서 "금강계단에 걸었던 얼굴"이 그릇에 "꽃처럼 피는" 사태에 직면한다. "구름의 말씀"과 "바람의 미소"를 깨닫는 순간이다. 이로써 "당신 얼굴 닦는 일이 내 얼굴 닦는 일"이 되며 모든 내면성이 사라져 '누구의 얼굴도 아닌 얼굴'을 만난다. 경우에 따라서 소소하고 사소한 사건만 시가 되는 게 아니다. "아랫동네 할머니/가을을 소각하다가 떠났다"라는 첫 구절로 시작하는 「불장난」처럼 "바람의 장난"에 그치지 않는 우연한 죽음의 각성도 있다. 그래서 「가을 다비식」은 "오늘 하루/가장 붉을 때,//얼른 와서 보고 가//내일이면/저 속으로 익사하는 내가//어찌 될지 모르겠거든"이라고, 짧지만 함축적인 형태의 진술을 얻기도 한다. 「환승」 또한 "장례식장에서 국밥을 말아먹는 나는/자꾸 무거워지는 화물입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사람은 죽음을 통하여 존재를 자각한다.
잠의 껍질을 벗긴다/어젯밤 운명은 내가 죽는 것이었다/
살아서 자기 죽음을 보다니/어둠을 흘려보내는/
꿈의 밑둥치를 잘랐다/깎다 보니 사람이었다/
끌어다 덮은 자리에서 손이 나왔다/
어디까지 훔쳐봐야 하는 걸까/춤추는 아이 손을 잡고/
바람이 불러내는 환상의 섬으로 갔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나무에서 났다/꿈의 보자기를 펼쳐 들고/
밤하늘에 떨어지는 것을/아이와 함께 주워 담았다/
구멍 숭숭한 돌에다/검은 몽상들을 묶어놓았다/
어둠은 어쩌지도 못하고/노란 입술에 꽉 물려 있었다
(「밀감」 전문)
밀감의 껍질을 벗기는 행위를 "잠의 껍질을" 벗기는 일로 전치하였다. 잠 속의 꿈에 "자기 죽음"을 보고 "춤추는 아이 손을 잡고/바람이 불러내는 환상의 섬" 제주를 향하며 묵시처럼 "밤하늘에 떨어지는 것을/아이와 주워" 담기도 한다. 꿈은 "검은 몽상"과 다를 바 없는데 밀감을 깎으며 그 "노란 입술"같은 껍질에 "꽉 물려" 있는 "어둠"을 "어쩌지도" 못한다. 이 시편은 시인의 놀라운 공감과 감수성을 보여준다. 제주산 밀감을 매개로 죽음과 억울한 영혼을 환기하고 있다. 이로써 시인의 사물에 관한 지각이 단독자의 감성으로 회귀하지 않고 사회 역사적 지평을 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횡단보도」로 시집을 시종(始終)한 사태와도 연관한다. 그만큼 삶과 존재에 관한 감각이 민활하고 예민하다. 가령 「관전 포인트」는 "개활지를 가로질러/고라니를 쫓고 있는 유기견 무리들"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구경꾼"에서 "나도 언제/저렇게 쫓긴 적이 있었던가"라고 자문하면서 "산으로 간 발자국이 하얗게 찍혀있는 아랫동네에서 나는//마지막 주자가 되어/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라고 존재의 유한성을 상기한다. "대들보에/파리 끈끈이를" 달아놓은 일에서 "운문사 비로전에 매달려 있는" "악착보살"을 떠올리며 "죽음을 구원하는/성스러운 의식"과 결부하는 「악착보살」은 다시 과수원에서 따라온 "도꼬마리 풀씨 몇 개"로 변주하며 "이곳을 줄 없이 건너가는 방법"을 상상하게 만든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 지평의 개진이다. 또한 「이웃들」과 「까치집」도 상관적인 시편으로 철거되는 까치집을 통하여 "빈 집으로 지은 슬픈 꿈"의 의미를 되새긴다.
스스로 발광하지 않았다면/
물끄러미,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떨어져 죽어도 메아리가 없는 그곳에는/
어둠의 화장장이 있어서,/은하수 터진 주둥이를/
밤이라는 인큐베이터에 걸어놓고/
실직으로 가는 새벽에 눈이 멀었다
(「별」 전문)
실직이라는 삶의 한 현상을 별이 떨어지는 밤 풍경에 유비하는 감각이 돌올한 시편이다. "실직으로 가는 새벽에 눈이 멀었다"라는 결구의 함축에서 비장미가 묻어난다. 이러한 풍경의 유비는 「백화등과 마삭줄」에서 "바닥으로" 기어가다 "야무지게 붙잡고 일어서면" "환한 백화등"이 되고 "푸른 노동의 옷을 입고/꿈의 활차를 밀고 가다가 벽을 만나면" "마삭줄"로 "이름을 바꿔 달고서라도 꽃이" 피는 의지와 낙관의 형국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시인은 사물과 뭍 생명의 시선으로 생을 긍정하는데 "나를 깨트리는 봄을 믿는다"(「바람의 시선」에서)라는 진술로 표출되기도 한다. "말라서 하얀 사랑처럼,/고요해서 굳건한 안개는/내일 또, 일어설 안개는"이라는 결구를 지닌 「안개 노선」이 말하는 생의 지향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수구레국밥」과 「마수걸이」와 「화포」와 「남지장날」 등에 등장하는 삶의 풍경과 장소를 통하여 시인은 "낮은 곳에 산다는 게 이런 것"(「법수반점」에서)이라는 사실을 어김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처럼 생을 긍정하는 감각이 존재의 유한성, 상실과 추억, 단절과 슬픔 등과 함께 하는 일이 모순은 아니다.
그대가 가고 나면/남은 게 하나 있다//나를 녹이던 체온도/
그윽이 바라보던 눈빛도 아니다/다시 오마고 했던/
그 말은 더더욱 아니다//흔적 없이,/그대가 가고 나면/
땅에 박힌 그림자처럼 어디에도 없다/다 가져가 버렸다//
빈 병처럼 놓인/남은 게 하나 있다/
그래야 하는 듯이 하나가 남았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도 가버렸고/다시 온다는 날은 너무 멀고//
슬픔을 데우는 얼음주머니를 차고/금방 늙어버리는/
나만 남아있다
(「그대가 가고 나면」 전문)
김용권은 「시인의 말」을 통하여 "시간은 왜 주름상자 속으로 들어갔을까?"라고 묻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인용한 시편인 「그대가 가고 나면」이 아닌가 한다. 이 시편에서 "그대"는 시인에게서 모든 '너'라고 해도 되겠다. 특히 여러 시편에서 등장하는 "어머니"는 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장화」는 "시도 때도 없이/천둥, 번개 요란한 날//어머니는/나의 이름을 신고 갔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 시편의 처음인 "비의 이름으로 살았다"라는 구절이 마지막인 "걸어가는 곳마다 비가 내렸다"라는 구절과 상응하는 데 이르러 그 슬픔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할머니"(「대밭에 대꽃이 피어」에서)의 추억이나 "아버지"(「간고등어」와 「퇴장」에서)의 기억이 없지 않으나 「산불진화론」과 「당간지주-어머니와 빨랫줄」 등에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각별하고 유난하여 아주 큰 상실감을 환기한다. 어머니의 "타다 남은 사랑"이 남아서 "불 속을 벗어났는가 싶었는데/요동치는 불 속"(「산불진화론」에서)에 여전히 있다는 화자의 진술이 가열하다. 이래서 인용한 「그대가 가고 나면」에서 "슬픔을 데우는 얼음주머니를 차고/금방 늙어버리는/나만 남아있다"라는 결구가 던지는 울림이 크다. "어머니"와 "내 기억에 오래 머문"(「석빙고」에서) 유년과 "소떼를 풀어 다녀놓은/바람의 발자국을 따라//그 푸른 동네"인 고향의 추억은 김용권 시인에게 시적 원형이며 시인됨을 부여하는 밑자리이다. 이러한 서정적 바탕 위에서 그는 사랑(「봄비」에서)과 행복(「깻단을 털며」에서)을 지향하며 타자와 사물을 만나는 시적 삶을 지속한다. 김용권에게 시는 인생의 방법이자 깨달음의 지평을 열어가는 중요한 삶의 방편이다.
목차
목차
시인의 말ㆍ05
제1부
횡단보도ㆍ13
북돋우다ㆍ14
홈 키퍼ㆍ15
수구레국밥ㆍ16
횡단보도ㆍ17
봄비ㆍ18
빨래방ㆍ19
불두화ㆍ20
화순ㆍ21
틈ㆍ22
장화ㆍ23
자랑질ㆍ24
산불진화론ㆍ25
불장난ㆍ26
환승ㆍ27
법수반점ㆍ28
제2부
반려동물ㆍ31
동강할미꽃ㆍ32
마수걸이ㆍ33
가을 다비식ㆍ34
간고등어ㆍ35
악착보살ㆍ36
오징어ㆍ37
언플러그ㆍ38
나는 달린다ㆍ39
수로역을 지나면 황옥역이 있다ㆍ40
화포ㆍ41
퇴장ㆍ42
주름상자 속사람들ㆍ43
이웃들ㆍ44
오래된 골목ㆍ45
내가 쏜다ㆍ46
제3부
악착보살ㆍ49
슬도ㆍ50
석빙고ㆍ51
불살개ㆍ52
분내ㆍ53
병풀ㆍ54
법성게ㆍ55
바위손ㆍ56
바람의 시선ㆍ57
밀감ㆍ58
만년교ㆍ59
대밭에 대꽃은 피어ㆍ60
당간지주ㆍ61
남지장날ㆍ62
제4부
꽃무릇ㆍ65
까치집ㆍ66
그대가 가고나면ㆍ67
관전 포인트ㆍ68
고철의 무게ㆍ69
고래밥ㆍ70
홍도야 울지마라ㆍ71
파리채는 왜 빨강인가ㆍ72
진우도ㆍ73
유채의 말ㆍ74
안개 노선ㆍ75
시와 비ㆍ76
백화등과 마삭줄ㆍ77
부부ㆍ78
별ㆍ79
깻단을 털며ㆍ80
횡단보도ㆍ81
해설_관계를 사유하는 만남의 시학ㆍ82
구모룡(문학평론가)
제1부
횡단보도ㆍ13
북돋우다ㆍ14
홈 키퍼ㆍ15
수구레국밥ㆍ16
횡단보도ㆍ17
봄비ㆍ18
빨래방ㆍ19
불두화ㆍ20
화순ㆍ21
틈ㆍ22
장화ㆍ23
자랑질ㆍ24
산불진화론ㆍ25
불장난ㆍ26
환승ㆍ27
법수반점ㆍ28
제2부
반려동물ㆍ31
동강할미꽃ㆍ32
마수걸이ㆍ33
가을 다비식ㆍ34
간고등어ㆍ35
악착보살ㆍ36
오징어ㆍ37
언플러그ㆍ38
나는 달린다ㆍ39
수로역을 지나면 황옥역이 있다ㆍ40
화포ㆍ41
퇴장ㆍ42
주름상자 속사람들ㆍ43
이웃들ㆍ44
오래된 골목ㆍ45
내가 쏜다ㆍ46
제3부
악착보살ㆍ49
슬도ㆍ50
석빙고ㆍ51
불살개ㆍ52
분내ㆍ53
병풀ㆍ54
법성게ㆍ55
바위손ㆍ56
바람의 시선ㆍ57
밀감ㆍ58
만년교ㆍ59
대밭에 대꽃은 피어ㆍ60
당간지주ㆍ61
남지장날ㆍ62
제4부
꽃무릇ㆍ65
까치집ㆍ66
그대가 가고나면ㆍ67
관전 포인트ㆍ68
고철의 무게ㆍ69
고래밥ㆍ70
홍도야 울지마라ㆍ71
파리채는 왜 빨강인가ㆍ72
진우도ㆍ73
유채의 말ㆍ74
안개 노선ㆍ75
시와 비ㆍ76
백화등과 마삭줄ㆍ77
부부ㆍ78
별ㆍ79
깻단을 털며ㆍ80
횡단보도ㆍ81
해설_관계를 사유하는 만남의 시학ㆍ82
구모룡(문학평론가)
저자
저자
김용권
김용권 시인은 경남 창녕 남지 출생으로 《서정과 현실》 등단했다. 들불문학제 대상, 박재삼 사천지역문학상, 경남문협 우수작품집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수혜(2018), 장애인문화예술원 창작기금수혜(2022),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창작기금 수혜(2025)를 받았다. 시집으로 『수지도를 읽다』 『무척』 『땀의 채굴학』 『그림자는 그림자놀이를 한다』 『시간의 현상학』이 있다. 현재 석필 동인, 시향, 시산맥 영남시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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