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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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죽음과 대결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철학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죽음도 존재의 일이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은 자, 성숙한 인간의 도리인지 모른다. 생성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자연)의 본질이다. 죽음도 바로 생성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도법자연(道法自然),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이다.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 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반면 동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받아들인 철학이다. 서양 철학은 ‘앎(지식)’을 추구하였고, 동양 철학은 ‘삶(도학)’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은 지식과 법칙을 탐구하는 문명이었고, 동양 문명은 도덕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기 위해 서양 문명과 철학의 결정체인 현대의 최고 철학자, 즉 니체, 들뢰즈, 데리다, 하이데거를 자신의 일반성의 철학, 소리 철학의 관점에서 해체한다.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 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반면 동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받아들인 철학이다. 서양 철학은 ‘앎(지식)’을 추구하였고, 동양 철학은 ‘삶(도학)’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은 지식과 법칙을 탐구하는 문명이었고, 동양 문명은 도덕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기 위해 서양 문명과 철학의 결정체인 현대의 최고 철학자, 즉 니체, 들뢰즈, 데리다, 하이데거를 자신의 일반성의 철학, 소리 철학의 관점에서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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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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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죽음과 대결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철학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죽음도 존재의 일이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은 자, 성숙한 인간의 도리인지 모른다. 생성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자연)의 본질이다. 죽음도 바로 생성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도법자연(道法自然),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이다.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 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반면 동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받아들인 철학이다. 서양 철학은 '앎(지식)'을 추구하였고, 동양 철학은 '삶(도학)'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은 지식과 법칙을 탐구하는 문명이었고, 동양 문명은 도덕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서양 철학의 고정 불변의 존재인 자아, 영혼, 영원, 영생, 신(여기서 신은 신이 아니다神可道 非常神.)이라는 말은 위로와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대화를 위해서 혹은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삶의 기법이다. 생멸은 분명히 동시적인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사이(間)-간격(間隔)을 줌으로써 자연을 자기의 존재 방식으로 해석한 존재가 인간 현존재의 특성이다. 사이-간격은 바로 시공간을 의미한다.
시공간은 동일성(실체)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생사(生死)와 유무(有無)를 만든 것이 인간이다.
흔히 이성 중심의 철학에서 욕망 중심의 철학을 발견한 '의심의 철학자군'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이성 중심의 근대 철학자와는 달리 후기 근대 철학자들로 분류하지만, 실은 이성과 욕망은 같은 것이다. 욕망은 신체적 이성이고, 이성은 대뇌적 욕망임을 안다면 서양 철학자들은 결국 한통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헤겔의 유심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 헤겔의 절대정신과 니체 권력의 의지는 겉모양(기표)은 다른 것 같지만, 의미(기의)는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양 철학의 이성이든, 욕망이든 결국 대상과 목적, 그리고 현상(표상, 실체)에 치중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모두 현상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요컨대 무의식을 설명하는 것이 의식이고, 물질을 규정하는 것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서로 가역 왕래하고 있다. 그리고 권력을 해부하는 것이 이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끝없음은 이성의 끝없음과 다를 바가 없다.
유일신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범신론이 아닌 유물론(범재신론)에 이르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의 차이성은 차이성이 아닌 들뢰즈의 기계론(생성-기계)에 이르고, 유심론을 추구한 헤겔의 유심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유물론으로 둔갑하게 된다. 유일-순수-절대를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은 결국 자연에 대한 반동으로 인류를 멸종으로 빠트릴 것이다. 욕망(경험)-이성(신화)-권력(제도)-기계(기술)는 원형과 변형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적인 것이다. 그 원형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적 이성도 실은 욕망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존재(Being)는 생성(becoming)의 욕망(이성, 권력,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멸종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서양 문화권이 주도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추구하는 동양 문화권의 도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역설적 존재다. 서양의 동일성(실체론)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과 욕망이 아닌 제3의 철학, 즉 눈과 머리에 의해 이끌어지는 '소유의 철학'이 아니라 귀와 신체에 의해 이끌어지는 '존재의 철학', 즉 수신과 수도(수양)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성과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소유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놓아버려야 한다. 소유를 넘어가는 것은 아직 다른 이성과 욕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은폐할 수 있다.
요컨대 천국과 극락이라는 것도 이성과 욕망의 마지막 굴레(현상학적 굴레)다. 기억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無憶, 無念) 그것마저 놓아버리는 것(莫妄)이야말로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고, 진정한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해탈은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다른 욕망의 그림자이다. 그런 점에서 해체철학자들, 후기 근대 철학자들의 요란한 철학적 역설과 제스처는 이성과 욕망의 은폐 혹은 기만이거나 변태(변태 성욕자)일 수 있다.
서양 철학의 동일성(동일률)은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였고, 모순율과 배중율과 총족이유율은 동일성의 다른 말이다. 동일성(동일률)은 처음부터 모순율(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변증법적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은 보편성과 개체성과 실체성을 추구한다. 고정 불변의 존재, 즉 실체(힘, 권력)를 추구하는 서양문명은 욕망의 창조성(무한대), 창조의 악마성(소유적 존재), 유일신(절대주의)의 전체성, 자연의 도구성(이용효율성)을 토대로 구축된, 인간이 해석하고 자연으로부터 반전시킨 문명의 바벨탑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성경은 자연과 문명의 역설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사유와 존재(자연)를 뒤바꾼, 존재에 사유를 뒤집어씌운 서양의 근대 철학은 그대로 자연과학과 궤를 같이하는 철학이었다. 그 결과가 유물론, 기계론, 기계신(機械神), 인간신(人間神)인 것이다. 중세의 신을 반동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이 된 인간신의 모습이다. 인간신-기계신의 정지는 인류의 멸종으로밖에 해결할 길이 없을 것인가?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현상이라고 규정한 서양 철학은 고정 불변의 존재(동일성)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양 철학의 생기존재론은 현상학적 차원의 주체-대상의 존재론(실체론)에 불과하다. '주체-대상'의 대상은 대상 그 자체(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주체(나)가 본 대상이기 때문에 순수한 대상이 아니다.
'주체-대상'의 주체 또한 대상을 통해서 드러난 존재기 때문에 순수한 주체가 아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교차(가역 왕래)될 수 있는 실체다. 현상학적 이분법에서 주체와 대상은 실은 같은 것이다. 둘 다 실재(존재)를 기준으로 볼 때 허상(가상,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실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가상이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자신을 실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은 자연을 (존재로 보지 않고) 현상으로 보면서 현상의 이면에 고정 불변의 존재로서 본질(essence)인 이데아(idea)가 있다고 보았다. 이데아는 그런 점에서 현상(대상)의 이면에 종속된(subject to object) 존재로서 출발하게 되었는데 'subject'가 종속된 존재에서 주체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역전하게 된다. 그후 'subject'는 주체가 된다. 주체와 대상의 상호 가역 왕래는 서양 철학의 핵심 내용이 되면서 헤겔에 이르러 이것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서양 철학에서 'sub(subject)-'는 'sup(supersubject)-'로 교차가 된다. 서양 철학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은 같은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에 의해 제안된 정신분석학이라는 것도 심층심리적 층위를 설정한 일종의 '수직적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수평적 현상학'이라면 말이다. 프로이트의 초의식과 의식은 현상학적 인식론의 주관적 초월(초월적 주관)에 부합하고, 무의식(Libido)은 사물(Id, It)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현상학은 언어에 의해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현상학의 일종이다. 초월이든 내재이든,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모두 언어에 의해 존재(실재계)와 이미지(상상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꿈의 해석학이든 현상학적인 해석학이든 모두 라캉의 언어(상징계)해석학이다. 헤겔의 유심론은 입장을 바꾸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다. 또한 주인은 노예가 된다.
대상(object)에 종속된(subject to) 것에서 출발한 주체(subject), 노예에서 출발한 주체는 계속적으로 초월적 주체(supersubject)로 새롭게 태어나는 한편, 대상은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으로 계속해서 무한대로 연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상학이다. 이것이 니체에 이르러 운명애(Amor Fati)가 되고, 영원 회귀(eternal recession)가 된다. 이것을 서양 철학의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 철학의 이러한 특성을 두고 필자는 '현상학적 굴레'라고 말하였다.
서양 철학사에서 필자가 가장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이데거(1889∼1976)와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태어난 해가 1889년으로 같다는 점이다. 이에 더하여 히틀러(1889∼1945)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는 말로 유명하다. 물론 논리실증주의자인 비트겐슈타인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해 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하이데거의 '존재'라는 개념을 대입하면 영락없이 통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의 세계는 서로 다른 문법의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양 철학과 문명사에서 일자(一者) 혹은 절대(絶對)에 대한 집념은 그야말로 시종일관(始終一貫)이다. 그런데 이 일자(一者)가 신(God)도 될 수 있지만 절대 군주, 그리고 전체주의도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자(一者)는 하이데거의 용어로는 '존재자'이지만, 라캉의 용어로는 대타자(Autre)다. 서양 문명에는 기독교자유주의도 있지만 기독교마르크시즘도 있다. '일자(一者)의 권력'은 때로는 전체주의로 돌변할 수 있음을 국가사회주의자(파시즘)인 히틀러와 공산사회주의자인 스탈린은 증명하고 있다.
서양 문명이 주도한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오늘날 인공지능(AI)과 사물 인터넷, 사이보그 인간, 기계 인간의 출현을 예고할 정도로 극단적 기술주의에 빠졌고, 이러한 고도 기술 사회를 다스리는 관료주의도 극한을 달리고 있다. 기술은 항상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인류를 기술관료-전체주의로 몰아갈 위험마저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인간과 자연은 본래존재의 위상을 되찾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에 있다.
자연은 본래 생성적 존재로 하나(一如)다. 서양 철학의 주체와 대상은 자연의 생성(생멸)을 존재로서 봄으로써 생성에서 존재를 각인시키는 메커니즘의 전통을 수립했다고 볼 수 있다. 변증법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후기 근대 철학의 차연(差延)이라는 것도 실은 차연의 변증법에 불과한 것으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자연은 실은 본래존재로서의 하나인데 이를 이분함으로써 실체(허상)을 만든 것이 서양 철학이다. 결국 이 둘은 서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초월적 존재와 내재적 존재는 하나로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신과 자연과 인간은 본래 하나라고 말한다. 본래 하나가 본래존재다.
서양 철학과 기독교는 고정 불변의 존재(Being)를 찾는 여정이었다. 이것은 생성(becoming)의 자연을 '존재'로 환원하는 매우 인간적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연의 사건, 즉 생성적 사건에 대한 서양철학과 문명의 해석이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존재는 이데아, 유일신, 이성, 수학, 기계 등을 의미한다. 생성으로서의 자연적 존재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서양 철학은 여성-되기, 동물-되기 등 '무엇-되기(being-becoming)'를 통해 생성을 포함하는 것처럼 하지만 전정한 존재, 본래존재는 그러한 개별적 존재자의 되기, 즉 '개별(individual)-되기'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 되기는 잠시 시적(詩的)인 환상을 심어주지만 본래존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 본래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한(해석한) 존재가 아닌, 존재 그 자체, 생성적 존재이다.
필자의 한글 철학인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생성(becoming) 철학을 기초로 한다. 반면 서양 철학은 존재(Being) 철학을 기초로 한다. 존재 철학은 일자(一者)를 추구하는 반면, 생성 철학은 일여(一如)을 추구한다. 생성이든, 존재이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어떤 행위(사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하다(doing)는 모든 존재의 삶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다'는 존재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존엄스러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철학적으로 흔히 제조신(製造神)이라고 한다. 반면 천부경의 신은 조화신(造化神)이다. 제조신(製造神)의 창조하는 것도 하는 것이고, 조화신(造化神)의 변화하는 것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생성(becoming)-존재(Being)-하다(doing)라는 '존재 삼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하는 것(working)도 하는 것이고, 노는 것(enjoying)도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제조신은 현상학적인 신으로서 '창조-종말(有始-有終)'의 신이다. 천부경의 조화신은 존재론적인 신으로 '무시(無始)-무종(無終)'의 신을 말한다. 결국 이 책은 조화신을 되찾기 위한 철학적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조신은 결국 기계신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고, 조화신은 인간에서 자연(본래존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문명은 이데아의 동일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후기 근대 철학의 차이성이라는 것도 동일성의 이면 혹은 속임수이다. 동일성은 이분법과 개념을 낳고, 개념은 과학과 기계적 세계관을 낳았다. 번면 동양 문명은 음양의 상보성(상관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음양은 이중성과 상징을 낳고, 상징은 시(詩)와 의미적 세계를 낳았다. 기계는 '기표 연쇄(환유 연쇄)'로 의미가 죽은 것이고, 시는 '기의 연쇄(은유 연쇄)'로 무궁한 의미를 생산한다. 기계는 결국 도구(이용)고, 의미는 생명 그 자체다.
동서양 문명이 다를지라도 인간은 현상학적인 차원과 존재론적인 차원의 융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말은 제조신과 조화신의 융합과 화해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존재론은 의식학(현상학)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 이유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유를 찾는 동물이다. 존재는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찾는 동물이다. 삶은 앎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앎을 찾는 동물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의미는 의식에 따라 있고 없음이 결정된다. 의식은 대상(목적)의식이어서 있음도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된다.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 추천사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니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더구나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아무튼 이 책을 내가 처음 들어본 문장의 복합이라는 점에서 어떤 미증유의 선언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니! 근대에 들어 철학이라고 하면 서양 철학을 먼저 떠올리고, 철학을 지망하던 학생들은 모두 서양으로 유학을 간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니. 서양 철학이 어떤 점 때문에 종언되었다는 것인가. 서양 철학이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대담한 선언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서양 철학의 종언을 선포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니! 그렇다면 그동안 한글로 구성된 철학이 없었다는 뜻인가. 한국 철학은 있었지만,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개념)로 된 철학이어서 그것은 진정한 한국 철학이 아니라는 의미마저 깔려 있다. 유영모(柳永模)의 '없이 계심'과 '주체 전체' 사상과 함석헌(咸錫憲)의 '씨알 사상'이 있었지만, 그것은 전통 사상으로서 개인의 이름을 건 철학이 되기 어렵고, 그것의 체계에 있어서도 서양 철학의 정치(精緻)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저자 나름의 평가가 전제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기독교 사상가라는 점에서 철학의 시대정신에 미흡하다는 의견 때문일까.
박정진 박사의 철학 인류학 저술에 몇 차례 추천사를 썼던 기억이 난다. 언론계 후배인 그는 문화 인류학자이지만, 특히 철학과 예술에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서울대 철학과 동기인 김형효(金炯孝) 박사(전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와 그는 오랜 친분을 쌓으면서 철학적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아마도 김형효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김 박사와 나는 그의 『일반성의 철학과 포노로지』(2014년), 『네오샤머니즘』(2018년)에 함께 추천사를 썼다.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2015년)에는 김 박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혼자 추천사를 썼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우리 세 사람은 묘한 인연이다. 김 박사가 2018년 2월, 갑작스럽게 타계한 뒤 『신체적 존재론』(2020년)에는 나 혼자 추천사를 썼다. 이번에 박 박사는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대작을 써서 내게 보여주었다.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철학서에 분류되어도 좋을 십여 권의 철학서를 쓰는 것을 보면 우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철학사를 보면 근대 철학은 1백여 년 정도다. 그동안 서양 철학을 배우느라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학자는 많았지만, 아직 자신의 철학으로서 자생 철학을 내놓은 학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동서 철학을 섭렵한 차원에서 그것도 이 땅의 역사와 전통을 통섭한 가운데 자생 철학을 운위한 학자는 필자의 은사인 박종홍(朴鍾鴻) 선생 정도가 선구가 아닌가 한다.
박정진은 1백여 권의 저술을 가진 인문학의 기린아이면서 1천여 편의 시를 읊은 대시인이지만, 자생 철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적 풍토에서 연이어 철학적 대작들을 써대는 그를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를 보면 철학에도 재능이 있는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동안 철학 공부를 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정작 철학 하는(philosophiren)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 철학 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철학 하는 일은 자신이 태어난 땅과 언어, 역사와 풍토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에 그가 내놓으려는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은 특히 철학 인류학자로서 회심의 역작인 것 같다. 서양 철학자 스스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적은 있었지만, 서양 이외의 지역에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더구나 그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한글 철학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적 경계에서 종언과 탄생, 즉 생사의 이중성을 표방하는 것이기에 내심 기대하는 바가 크다. 나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순수 한글로 근대적 의미의 철학 체계를 달성한 예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저작의 원고를 보니 후기 근대 철학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는 니체를 기점으로 그의 추종자들인 들뢰즈, 데리다 등 해체 철학자들을 비판의 대상에 올려놓았으며, 하이데거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대담하게 서양 철학을 '현상학'이라고 규정하고, 동양 철학을 '도학'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을 이미 다른 책에서 내보인 바 있다. 그의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을 요약하는 힘이 대단한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서양의 대가들과 대결하는(einandersetzung) 자세는 일찍이 우리 철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는데 따라서 그에게서 어떤 신기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철학 인류학적 저술만 해도 폭넓게 잡으면 거의 20여 권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도 그가 쓴 백여 권을 넘는 저술들은 철학적 구성의 튼실함을 말하는 한편, 웬만한 비판에 대해서도 상당한 방어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만큼 그는 한국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류학자인 그는 현대 철학의 인류학적 지식의 인용이나 패러다임의 도입이 유행하는 시대를 만난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양 철학을 이른바 4T인 '사물(Thing)-시간(Time)-텍스트(Text)-기술(Technology)'로 요약한다. 이것에 대응하는 서양 철학자로 '칸트-하이데거-데리다-들뢰즈'를 들고 있다.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를 철학적 토론의 장으로 다시 불러온 인물이 하이데거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내놓은 한글 철학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는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말이기에 동시에 낯익기도 하다. 그리고 한글의 원음(原音)이라고 할 수 있는 '알-얼-올-울-을-일'이라는 여섯 글자를 '몸-마음-시간-공간-대상(목적)-일'로 풀이하는 것은 빼어난 철학 하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것을 서양의 육하원칙(六何原則)인 'who-when-where-what-how-why'에 대입하는 철학적 재능은 실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우 자주 쓰는 그 단어(명사와 동사)가 한글 철학의 골간을 이룬다니! 그리고 인간의 철학과 역사라는 것을 '생명과 이용의 계보학'으로 재단하는 그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아무튼 박정진 박사는 인문학적 저술이 120권에 이른 인문학의 기린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이나 철학이 단순하게 공표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어떤 반론에도 나름대로 반박할 내공을 가진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전공인 인류학에서 시작하여 신화학, 역사학, 문학, 예술 철학, 사회학, 동양 철학, 서양 철학, 그리고 의학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학자로서 단단한 내공의 소유자다.
그를 보면 우리나라도 이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대중 가요 등 문화 예술에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문화 총량과 문화 능력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 가운데서도 자생 철학의 부재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큰 결격 사유로 여겨지던 터다. 자생 철학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이 된 예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을 비롯해서 인문학 분야에서도 세계적 기린아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박정진 박사의 학문적 행운을 기대해본다. -崇峰 孔鍾源(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 리뷰
한국인의 존재 지혜, 철학의 신기원을 열다
30여 년 전부터 사대주의, 식민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하는 한국의 자생 철학을 모색하며 동서고금의 철학적 사태들을 소통해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해온 박정진 박사(이하 저자)의 결정판!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
아마도 이번에 저자가 내놓은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은 특히 철학 인류학자로서 회심의 역작인 것 같다. 서양 철학자 스스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적은 있었지만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 서양 이외의 지역에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더구나 저자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한글 철학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적 경계에서 종언과 탄생, 즉 생사의 이중성을 표방하는 것이기에 내심 기대하는 바가 크다. 나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순수한글로 근대적 의미의 철학 체계를 달성한 예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성, 종교성, 예술성이 풍부한 한국 문화와 역사 속에서 길어낸 '알-나-스스로-하나'의 순우리말 철학! 이 철학은 사람이 태어나서(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독립적인 존재(인격)로 성장하는 것과 자연과 하나님을 깨닫는 과정을 한글로 체계화한 것이다. 한글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더불어 우리말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힘이 대단하다.
이번 저작의 원고를 보니 후기 근대 철학의 대가인 니체를 기점으로 그의 추종자들인 들뢰즈, 데리다 등 해체철학자들을 비판의 대상에 올려놓았으며, 하이데거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자는 대담하게 서양철학을 '현상학'이라고 규정하고, 동양철학을 '도학'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을 이미 다른 책에서 내보인 바 있다. 저자의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요약하는 힘이 대단한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서양의 대가들과 대결하는(einandersetzung) 자세는 일찍이 한국 철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는데 따라서 저자에게서 어떤 신기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기 위해 서양 문명과 철학의 결정체인 현대의 최고 철학자, 즉 니체, 들뢰즈, 데리다, 하이데거를 자신의 일반성의 철학, 소리 철학의 관점에서 해체한다. 해체하는 관점과 칼의 날카로움에 압도되어 묘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니체 철학을 한마디로 '문명의 해체와 힘에의 복귀'로 정리한다든지 또는 하이데거의 대표적 개념인 '세계-내-존재'를 '존재-내-세계'로 바꾸어 완전히 다른 사태에 눈뜨게 하는 힘은 정말 철학적 통찰에 더해 시적 광기까지 느끼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서양 철학의 이성이든 욕망이든 결국 대상과 목적, 그리고 현상(표상, 실체)에 치중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모두 현상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저자는 서양 철학을 '현상학으로서 남성 철학'이라고 본다. 남성적 '권력에의 의지'만 추구한다면 인류는 머지않아 공멸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가 최근 목도하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비롯한 각종 전쟁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 양극화, 종교와 인종 간의 갈등, 배타적 민족주의 등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지구촌 도전 과제들을 가만히 반성해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어떤 '폭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빼앗으려는 폭력! 땅이건 재물이건 사람이건 간에 서로 빼앗으려는 힘에의 의지, 더 강해져서 주위를 내 이기심의 테두리 안에 가두려는 전체주의적 폭력의 유혹에 노출된 인류!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향후 인류가 멸종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서양문명이 주도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추구하는 동양문화의 도학(道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양의 동일성(실체론)을 벗어나기 위해 이성과 욕망이 아닌 제3의 철학, 즉 눈과 머리에 의해 이끌어지는 '소유의 철학'이 아니라 귀와 신체에 의해 이끌어지는 '존재의 철학', 즉 수신과 수도(수양)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는 '존재론으로서 여성 철학'으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위한 존재론으로서 여성 철학이 바로 한글 철학이다.
저자가 내놓은 한글 철학,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는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말이기에 동시에 낯익기도 하다. 그리고 한글의 원음(原音)이라고 할 수 있는 '알-얼-올-울-을-일'이라는 여섯 글자를 '몸-마음-시간-공간-대상(목적)-일'로 풀이하는 것은 빼어난 철학 하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것을 서양의 육하원칙인 'who-when-where-what-how-why'에 대입하는 철학적 재능은 실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우 자주 쓰는 그 단어(명사와 동사)가 한글 철학의 골간을 이룬다니! 그리고 인간의 철학과 역사를 '생명과 이용의 계보학'으로 재단하는 저자의 솜씨는 가히 철학과 문학 그리고 인류학 등 거의 모든 동서고금의 고전을 회통한 자의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면모를 갖추기까지 개인의 노력과 수고만 있었을까. 저자를 둘러싼 가정과 사회 그리고 우리 국민 전체가 버티고 살아온 한국인의 존재 지혜가 저자를 통해 사건화한 것은 아닐까.
강대국 틈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온 긴 세월, 이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으로 발돋움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다. 영화, 대중가요 등 문화예술에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문화 총량과 문화 능력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 가운데서도 자생철학의 부재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큰 결격사유로 여겨진다. 자생철학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이 된 예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서양철학의 종언이 선포되었다. 아니 해명되었다. 나아가 『천부경』의 천지인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한글 철학이 제시되었다. 이 땅에서 우리말로 생각하고 세상과 부딪치며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인의 존재 지혜의 일단락이 정리되었다. 모름지기 어떤 사태의 종언을 얘기하는 자는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기 마련이다. 철학의 신기원을 느끼고 그 사태를 우리말로 써내는 철학자가 가까이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 많은 이가 저자가 시도한 모험의 길을 따라 우리말, 우리 문화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쳤으면 좋겠다. 진정한 한류, 이제 시작이다. -조형국(한국하이데거학회 대외협력이사)
철학은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죽음과 대결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철학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죽음도 존재의 일이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은 자, 성숙한 인간의 도리인지 모른다. 생성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자연)의 본질이다. 죽음도 바로 생성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도법자연(道法自然),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이다.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 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반면 동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받아들인 철학이다. 서양 철학은 '앎(지식)'을 추구하였고, 동양 철학은 '삶(도학)'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은 지식과 법칙을 탐구하는 문명이었고, 동양 문명은 도덕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서양 철학의 고정 불변의 존재인 자아, 영혼, 영원, 영생, 신(여기서 신은 신이 아니다神可道 非常神.)이라는 말은 위로와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대화를 위해서 혹은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삶의 기법이다. 생멸은 분명히 동시적인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사이(間)-간격(間隔)을 줌으로써 자연을 자기의 존재 방식으로 해석한 존재가 인간 현존재의 특성이다. 사이-간격은 바로 시공간을 의미한다.
시공간은 동일성(실체)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생사(生死)와 유무(有無)를 만든 것이 인간이다.
흔히 이성 중심의 철학에서 욕망 중심의 철학을 발견한 '의심의 철학자군'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이성 중심의 근대 철학자와는 달리 후기 근대 철학자들로 분류하지만, 실은 이성과 욕망은 같은 것이다. 욕망은 신체적 이성이고, 이성은 대뇌적 욕망임을 안다면 서양 철학자들은 결국 한통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헤겔의 유심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 헤겔의 절대정신과 니체 권력의 의지는 겉모양(기표)은 다른 것 같지만, 의미(기의)는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양 철학의 이성이든, 욕망이든 결국 대상과 목적, 그리고 현상(표상, 실체)에 치중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모두 현상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요컨대 무의식을 설명하는 것이 의식이고, 물질을 규정하는 것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서로 가역 왕래하고 있다. 그리고 권력을 해부하는 것이 이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끝없음은 이성의 끝없음과 다를 바가 없다.
유일신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범신론이 아닌 유물론(범재신론)에 이르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의 차이성은 차이성이 아닌 들뢰즈의 기계론(생성-기계)에 이르고, 유심론을 추구한 헤겔의 유심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유물론으로 둔갑하게 된다. 유일-순수-절대를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은 결국 자연에 대한 반동으로 인류를 멸종으로 빠트릴 것이다. 욕망(경험)-이성(신화)-권력(제도)-기계(기술)는 원형과 변형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적인 것이다. 그 원형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적 이성도 실은 욕망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존재(Being)는 생성(becoming)의 욕망(이성, 권력,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멸종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서양 문화권이 주도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추구하는 동양 문화권의 도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역설적 존재다. 서양의 동일성(실체론)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과 욕망이 아닌 제3의 철학, 즉 눈과 머리에 의해 이끌어지는 '소유의 철학'이 아니라 귀와 신체에 의해 이끌어지는 '존재의 철학', 즉 수신과 수도(수양)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성과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소유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놓아버려야 한다. 소유를 넘어가는 것은 아직 다른 이성과 욕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은폐할 수 있다.
요컨대 천국과 극락이라는 것도 이성과 욕망의 마지막 굴레(현상학적 굴레)다. 기억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無憶, 無念) 그것마저 놓아버리는 것(莫妄)이야말로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고, 진정한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해탈은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다른 욕망의 그림자이다. 그런 점에서 해체철학자들, 후기 근대 철학자들의 요란한 철학적 역설과 제스처는 이성과 욕망의 은폐 혹은 기만이거나 변태(변태 성욕자)일 수 있다.
서양 철학의 동일성(동일률)은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였고, 모순율과 배중율과 총족이유율은 동일성의 다른 말이다. 동일성(동일률)은 처음부터 모순율(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변증법적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은 보편성과 개체성과 실체성을 추구한다. 고정 불변의 존재, 즉 실체(힘, 권력)를 추구하는 서양문명은 욕망의 창조성(무한대), 창조의 악마성(소유적 존재), 유일신(절대주의)의 전체성, 자연의 도구성(이용효율성)을 토대로 구축된, 인간이 해석하고 자연으로부터 반전시킨 문명의 바벨탑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성경은 자연과 문명의 역설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사유와 존재(자연)를 뒤바꾼, 존재에 사유를 뒤집어씌운 서양의 근대 철학은 그대로 자연과학과 궤를 같이하는 철학이었다. 그 결과가 유물론, 기계론, 기계신(機械神), 인간신(人間神)인 것이다. 중세의 신을 반동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이 된 인간신의 모습이다. 인간신-기계신의 정지는 인류의 멸종으로밖에 해결할 길이 없을 것인가?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현상이라고 규정한 서양 철학은 고정 불변의 존재(동일성)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양 철학의 생기존재론은 현상학적 차원의 주체-대상의 존재론(실체론)에 불과하다. '주체-대상'의 대상은 대상 그 자체(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주체(나)가 본 대상이기 때문에 순수한 대상이 아니다.
'주체-대상'의 주체 또한 대상을 통해서 드러난 존재기 때문에 순수한 주체가 아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교차(가역 왕래)될 수 있는 실체다. 현상학적 이분법에서 주체와 대상은 실은 같은 것이다. 둘 다 실재(존재)를 기준으로 볼 때 허상(가상,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실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가상이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자신을 실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은 자연을 (존재로 보지 않고) 현상으로 보면서 현상의 이면에 고정 불변의 존재로서 본질(essence)인 이데아(idea)가 있다고 보았다. 이데아는 그런 점에서 현상(대상)의 이면에 종속된(subject to object) 존재로서 출발하게 되었는데 'subject'가 종속된 존재에서 주체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역전하게 된다. 그후 'subject'는 주체가 된다. 주체와 대상의 상호 가역 왕래는 서양 철학의 핵심 내용이 되면서 헤겔에 이르러 이것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서양 철학에서 'sub(subject)-'는 'sup(supersubject)-'로 교차가 된다. 서양 철학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은 같은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에 의해 제안된 정신분석학이라는 것도 심층심리적 층위를 설정한 일종의 '수직적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수평적 현상학'이라면 말이다. 프로이트의 초의식과 의식은 현상학적 인식론의 주관적 초월(초월적 주관)에 부합하고, 무의식(Libido)은 사물(Id, It)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현상학은 언어에 의해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현상학의 일종이다. 초월이든 내재이든,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모두 언어에 의해 존재(실재계)와 이미지(상상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꿈의 해석학이든 현상학적인 해석학이든 모두 라캉의 언어(상징계)해석학이다. 헤겔의 유심론은 입장을 바꾸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다. 또한 주인은 노예가 된다.
대상(object)에 종속된(subject to) 것에서 출발한 주체(subject), 노예에서 출발한 주체는 계속적으로 초월적 주체(supersubject)로 새롭게 태어나는 한편, 대상은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으로 계속해서 무한대로 연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상학이다. 이것이 니체에 이르러 운명애(Amor Fati)가 되고, 영원 회귀(eternal recession)가 된다. 이것을 서양 철학의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 철학의 이러한 특성을 두고 필자는 '현상학적 굴레'라고 말하였다.
서양 철학사에서 필자가 가장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이데거(1889∼1976)와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태어난 해가 1889년으로 같다는 점이다. 이에 더하여 히틀러(1889∼1945)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는 말로 유명하다. 물론 논리실증주의자인 비트겐슈타인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해 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하이데거의 '존재'라는 개념을 대입하면 영락없이 통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의 세계는 서로 다른 문법의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양 철학과 문명사에서 일자(一者) 혹은 절대(絶對)에 대한 집념은 그야말로 시종일관(始終一貫)이다. 그런데 이 일자(一者)가 신(God)도 될 수 있지만 절대 군주, 그리고 전체주의도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자(一者)는 하이데거의 용어로는 '존재자'이지만, 라캉의 용어로는 대타자(Autre)다. 서양 문명에는 기독교자유주의도 있지만 기독교마르크시즘도 있다. '일자(一者)의 권력'은 때로는 전체주의로 돌변할 수 있음을 국가사회주의자(파시즘)인 히틀러와 공산사회주의자인 스탈린은 증명하고 있다.
서양 문명이 주도한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오늘날 인공지능(AI)과 사물 인터넷, 사이보그 인간, 기계 인간의 출현을 예고할 정도로 극단적 기술주의에 빠졌고, 이러한 고도 기술 사회를 다스리는 관료주의도 극한을 달리고 있다. 기술은 항상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인류를 기술관료-전체주의로 몰아갈 위험마저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인간과 자연은 본래존재의 위상을 되찾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에 있다.
자연은 본래 생성적 존재로 하나(一如)다. 서양 철학의 주체와 대상은 자연의 생성(생멸)을 존재로서 봄으로써 생성에서 존재를 각인시키는 메커니즘의 전통을 수립했다고 볼 수 있다. 변증법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후기 근대 철학의 차연(差延)이라는 것도 실은 차연의 변증법에 불과한 것으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자연은 실은 본래존재로서의 하나인데 이를 이분함으로써 실체(허상)을 만든 것이 서양 철학이다. 결국 이 둘은 서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초월적 존재와 내재적 존재는 하나로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신과 자연과 인간은 본래 하나라고 말한다. 본래 하나가 본래존재다.
서양 철학과 기독교는 고정 불변의 존재(Being)를 찾는 여정이었다. 이것은 생성(becoming)의 자연을 '존재'로 환원하는 매우 인간적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연의 사건, 즉 생성적 사건에 대한 서양철학과 문명의 해석이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존재는 이데아, 유일신, 이성, 수학, 기계 등을 의미한다. 생성으로서의 자연적 존재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서양 철학은 여성-되기, 동물-되기 등 '무엇-되기(being-becoming)'를 통해 생성을 포함하는 것처럼 하지만 전정한 존재, 본래존재는 그러한 개별적 존재자의 되기, 즉 '개별(individual)-되기'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 되기는 잠시 시적(詩的)인 환상을 심어주지만 본래존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 본래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한(해석한) 존재가 아닌, 존재 그 자체, 생성적 존재이다.
필자의 한글 철학인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생성(becoming) 철학을 기초로 한다. 반면 서양 철학은 존재(Being) 철학을 기초로 한다. 존재 철학은 일자(一者)를 추구하는 반면, 생성 철학은 일여(一如)을 추구한다. 생성이든, 존재이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어떤 행위(사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하다(doing)는 모든 존재의 삶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다'는 존재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존엄스러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철학적으로 흔히 제조신(製造神)이라고 한다. 반면 천부경의 신은 조화신(造化神)이다. 제조신(製造神)의 창조하는 것도 하는 것이고, 조화신(造化神)의 변화하는 것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생성(becoming)-존재(Being)-하다(doing)라는 '존재 삼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하는 것(working)도 하는 것이고, 노는 것(enjoying)도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제조신은 현상학적인 신으로서 '창조-종말(有始-有終)'의 신이다. 천부경의 조화신은 존재론적인 신으로 '무시(無始)-무종(無終)'의 신을 말한다. 결국 이 책은 조화신을 되찾기 위한 철학적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조신은 결국 기계신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고, 조화신은 인간에서 자연(본래존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문명은 이데아의 동일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후기 근대 철학의 차이성이라는 것도 동일성의 이면 혹은 속임수이다. 동일성은 이분법과 개념을 낳고, 개념은 과학과 기계적 세계관을 낳았다. 번면 동양 문명은 음양의 상보성(상관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음양은 이중성과 상징을 낳고, 상징은 시(詩)와 의미적 세계를 낳았다. 기계는 '기표 연쇄(환유 연쇄)'로 의미가 죽은 것이고, 시는 '기의 연쇄(은유 연쇄)'로 무궁한 의미를 생산한다. 기계는 결국 도구(이용)고, 의미는 생명 그 자체다.
동서양 문명이 다를지라도 인간은 현상학적인 차원과 존재론적인 차원의 융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말은 제조신과 조화신의 융합과 화해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존재론은 의식학(현상학)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 이유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유를 찾는 동물이다. 존재는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찾는 동물이다. 삶은 앎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앎을 찾는 동물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의미는 의식에 따라 있고 없음이 결정된다. 의식은 대상(목적)의식이어서 있음도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된다.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 추천사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니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더구나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아무튼 이 책을 내가 처음 들어본 문장의 복합이라는 점에서 어떤 미증유의 선언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니! 근대에 들어 철학이라고 하면 서양 철학을 먼저 떠올리고, 철학을 지망하던 학생들은 모두 서양으로 유학을 간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니. 서양 철학이 어떤 점 때문에 종언되었다는 것인가. 서양 철학이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대담한 선언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서양 철학의 종언을 선포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니! 그렇다면 그동안 한글로 구성된 철학이 없었다는 뜻인가. 한국 철학은 있었지만,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개념)로 된 철학이어서 그것은 진정한 한국 철학이 아니라는 의미마저 깔려 있다. 유영모(柳永模)의 '없이 계심'과 '주체 전체' 사상과 함석헌(咸錫憲)의 '씨알 사상'이 있었지만, 그것은 전통 사상으로서 개인의 이름을 건 철학이 되기 어렵고, 그것의 체계에 있어서도 서양 철학의 정치(精緻)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저자 나름의 평가가 전제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기독교 사상가라는 점에서 철학의 시대정신에 미흡하다는 의견 때문일까.
박정진 박사의 철학 인류학 저술에 몇 차례 추천사를 썼던 기억이 난다. 언론계 후배인 그는 문화 인류학자이지만, 특히 철학과 예술에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서울대 철학과 동기인 김형효(金炯孝) 박사(전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와 그는 오랜 친분을 쌓으면서 철학적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아마도 김형효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김 박사와 나는 그의 『일반성의 철학과 포노로지』(2014년), 『네오샤머니즘』(2018년)에 함께 추천사를 썼다.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2015년)에는 김 박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혼자 추천사를 썼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우리 세 사람은 묘한 인연이다. 김 박사가 2018년 2월, 갑작스럽게 타계한 뒤 『신체적 존재론』(2020년)에는 나 혼자 추천사를 썼다. 이번에 박 박사는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대작을 써서 내게 보여주었다.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철학서에 분류되어도 좋을 십여 권의 철학서를 쓰는 것을 보면 우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철학사를 보면 근대 철학은 1백여 년 정도다. 그동안 서양 철학을 배우느라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학자는 많았지만, 아직 자신의 철학으로서 자생 철학을 내놓은 학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동서 철학을 섭렵한 차원에서 그것도 이 땅의 역사와 전통을 통섭한 가운데 자생 철학을 운위한 학자는 필자의 은사인 박종홍(朴鍾鴻) 선생 정도가 선구가 아닌가 한다.
박정진은 1백여 권의 저술을 가진 인문학의 기린아이면서 1천여 편의 시를 읊은 대시인이지만, 자생 철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적 풍토에서 연이어 철학적 대작들을 써대는 그를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를 보면 철학에도 재능이 있는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동안 철학 공부를 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정작 철학 하는(philosophiren)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 철학 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철학 하는 일은 자신이 태어난 땅과 언어, 역사와 풍토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에 그가 내놓으려는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은 특히 철학 인류학자로서 회심의 역작인 것 같다. 서양 철학자 스스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적은 있었지만, 서양 이외의 지역에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더구나 그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한글 철학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적 경계에서 종언과 탄생, 즉 생사의 이중성을 표방하는 것이기에 내심 기대하는 바가 크다. 나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순수 한글로 근대적 의미의 철학 체계를 달성한 예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저작의 원고를 보니 후기 근대 철학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는 니체를 기점으로 그의 추종자들인 들뢰즈, 데리다 등 해체 철학자들을 비판의 대상에 올려놓았으며, 하이데거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대담하게 서양 철학을 '현상학'이라고 규정하고, 동양 철학을 '도학'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을 이미 다른 책에서 내보인 바 있다. 그의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을 요약하는 힘이 대단한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서양의 대가들과 대결하는(einandersetzung) 자세는 일찍이 우리 철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는데 따라서 그에게서 어떤 신기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철학 인류학적 저술만 해도 폭넓게 잡으면 거의 20여 권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도 그가 쓴 백여 권을 넘는 저술들은 철학적 구성의 튼실함을 말하는 한편, 웬만한 비판에 대해서도 상당한 방어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만큼 그는 한국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류학자인 그는 현대 철학의 인류학적 지식의 인용이나 패러다임의 도입이 유행하는 시대를 만난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양 철학을 이른바 4T인 '사물(Thing)-시간(Time)-텍스트(Text)-기술(Technology)'로 요약한다. 이것에 대응하는 서양 철학자로 '칸트-하이데거-데리다-들뢰즈'를 들고 있다.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를 철학적 토론의 장으로 다시 불러온 인물이 하이데거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내놓은 한글 철학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는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말이기에 동시에 낯익기도 하다. 그리고 한글의 원음(原音)이라고 할 수 있는 '알-얼-올-울-을-일'이라는 여섯 글자를 '몸-마음-시간-공간-대상(목적)-일'로 풀이하는 것은 빼어난 철학 하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것을 서양의 육하원칙(六何原則)인 'who-when-where-what-how-why'에 대입하는 철학적 재능은 실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우 자주 쓰는 그 단어(명사와 동사)가 한글 철학의 골간을 이룬다니! 그리고 인간의 철학과 역사라는 것을 '생명과 이용의 계보학'으로 재단하는 그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아무튼 박정진 박사는 인문학적 저술이 120권에 이른 인문학의 기린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이나 철학이 단순하게 공표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어떤 반론에도 나름대로 반박할 내공을 가진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전공인 인류학에서 시작하여 신화학, 역사학, 문학, 예술 철학, 사회학, 동양 철학, 서양 철학, 그리고 의학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학자로서 단단한 내공의 소유자다.
그를 보면 우리나라도 이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대중 가요 등 문화 예술에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문화 총량과 문화 능력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 가운데서도 자생 철학의 부재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큰 결격 사유로 여겨지던 터다. 자생 철학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이 된 예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을 비롯해서 인문학 분야에서도 세계적 기린아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박정진 박사의 학문적 행운을 기대해본다. -崇峰 孔鍾源(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 리뷰
한국인의 존재 지혜, 철학의 신기원을 열다
30여 년 전부터 사대주의, 식민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하는 한국의 자생 철학을 모색하며 동서고금의 철학적 사태들을 소통해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해온 박정진 박사(이하 저자)의 결정판!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
아마도 이번에 저자가 내놓은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은 특히 철학 인류학자로서 회심의 역작인 것 같다. 서양 철학자 스스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적은 있었지만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 서양 이외의 지역에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더구나 저자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한글 철학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적 경계에서 종언과 탄생, 즉 생사의 이중성을 표방하는 것이기에 내심 기대하는 바가 크다. 나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순수한글로 근대적 의미의 철학 체계를 달성한 예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성, 종교성, 예술성이 풍부한 한국 문화와 역사 속에서 길어낸 '알-나-스스로-하나'의 순우리말 철학! 이 철학은 사람이 태어나서(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독립적인 존재(인격)로 성장하는 것과 자연과 하나님을 깨닫는 과정을 한글로 체계화한 것이다. 한글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더불어 우리말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힘이 대단하다.
이번 저작의 원고를 보니 후기 근대 철학의 대가인 니체를 기점으로 그의 추종자들인 들뢰즈, 데리다 등 해체철학자들을 비판의 대상에 올려놓았으며, 하이데거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자는 대담하게 서양철학을 '현상학'이라고 규정하고, 동양철학을 '도학'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을 이미 다른 책에서 내보인 바 있다. 저자의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요약하는 힘이 대단한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서양의 대가들과 대결하는(einandersetzung) 자세는 일찍이 한국 철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는데 따라서 저자에게서 어떤 신기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기 위해 서양 문명과 철학의 결정체인 현대의 최고 철학자, 즉 니체, 들뢰즈, 데리다, 하이데거를 자신의 일반성의 철학, 소리 철학의 관점에서 해체한다. 해체하는 관점과 칼의 날카로움에 압도되어 묘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니체 철학을 한마디로 '문명의 해체와 힘에의 복귀'로 정리한다든지 또는 하이데거의 대표적 개념인 '세계-내-존재'를 '존재-내-세계'로 바꾸어 완전히 다른 사태에 눈뜨게 하는 힘은 정말 철학적 통찰에 더해 시적 광기까지 느끼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서양 철학의 이성이든 욕망이든 결국 대상과 목적, 그리고 현상(표상, 실체)에 치중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모두 현상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저자는 서양 철학을 '현상학으로서 남성 철학'이라고 본다. 남성적 '권력에의 의지'만 추구한다면 인류는 머지않아 공멸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가 최근 목도하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비롯한 각종 전쟁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 양극화, 종교와 인종 간의 갈등, 배타적 민족주의 등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지구촌 도전 과제들을 가만히 반성해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어떤 '폭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빼앗으려는 폭력! 땅이건 재물이건 사람이건 간에 서로 빼앗으려는 힘에의 의지, 더 강해져서 주위를 내 이기심의 테두리 안에 가두려는 전체주의적 폭력의 유혹에 노출된 인류!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향후 인류가 멸종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서양문명이 주도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추구하는 동양문화의 도학(道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양의 동일성(실체론)을 벗어나기 위해 이성과 욕망이 아닌 제3의 철학, 즉 눈과 머리에 의해 이끌어지는 '소유의 철학'이 아니라 귀와 신체에 의해 이끌어지는 '존재의 철학', 즉 수신과 수도(수양)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는 '존재론으로서 여성 철학'으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위한 존재론으로서 여성 철학이 바로 한글 철학이다.
저자가 내놓은 한글 철학,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는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말이기에 동시에 낯익기도 하다. 그리고 한글의 원음(原音)이라고 할 수 있는 '알-얼-올-울-을-일'이라는 여섯 글자를 '몸-마음-시간-공간-대상(목적)-일'로 풀이하는 것은 빼어난 철학 하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것을 서양의 육하원칙인 'who-when-where-what-how-why'에 대입하는 철학적 재능은 실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우 자주 쓰는 그 단어(명사와 동사)가 한글 철학의 골간을 이룬다니! 그리고 인간의 철학과 역사를 '생명과 이용의 계보학'으로 재단하는 저자의 솜씨는 가히 철학과 문학 그리고 인류학 등 거의 모든 동서고금의 고전을 회통한 자의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면모를 갖추기까지 개인의 노력과 수고만 있었을까. 저자를 둘러싼 가정과 사회 그리고 우리 국민 전체가 버티고 살아온 한국인의 존재 지혜가 저자를 통해 사건화한 것은 아닐까.
강대국 틈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온 긴 세월, 이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으로 발돋움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다. 영화, 대중가요 등 문화예술에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문화 총량과 문화 능력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 가운데서도 자생철학의 부재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큰 결격사유로 여겨진다. 자생철학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이 된 예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서양철학의 종언이 선포되었다. 아니 해명되었다. 나아가 『천부경』의 천지인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한글 철학이 제시되었다. 이 땅에서 우리말로 생각하고 세상과 부딪치며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인의 존재 지혜의 일단락이 정리되었다. 모름지기 어떤 사태의 종언을 얘기하는 자는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기 마련이다. 철학의 신기원을 느끼고 그 사태를 우리말로 써내는 철학자가 가까이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 많은 이가 저자가 시도한 모험의 길을 따라 우리말, 우리 문화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쳤으면 좋겠다. 진정한 한류, 이제 시작이다. -조형국(한국하이데거학회 대외협력이사)
목차
목차
서문
1. 서양 철학의 종언
1.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적인
- 니체, 문명의 해체와 힘에의 복귀
1. 생기존재론生起存在論: 생성론인가, 존재론인가
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의 세계'와 니체 '힘에의 의지'
3. 니체의 영원 회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4. 힘에의 의지는 현상학인가, 존재론인가
5.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했는가?
6. 존재 철학, 생성 철학: 남성 철학, 여성 철학
7. 유라시아(인도유럽어) 문명의 관점에서 본 쇼펜하우어와 니체
1) 자기 투사의 철학: 서양 철학 내의 결여와
필요, 이성과 의지와 욕망
2) 니체 '힘에의 의지': 실체의 확대 재생산
3) 과학적 제도: 가부장과 동일성의 존재·허상·우상
4) 인간은 자기 투사적-자기 최면적-자기 도착적 존재
8. 니체를 넘어서, 화평부동론和平不同論의 세계
1) 일반성의 철학과 화평부동론
9. 니체를 통해 서양 철학을 비판하다
1) 해석학적 인식과 음양(상징)해석학
2) 유시유종有始有終과 무시무종無始無終
2. 들뢰즈의 욕망과 도착, 기계주의
- 세계 전체를 물질과 기계로 본 대뇌적 환상의 미로
1. 들뢰즈의 현대 철학적 의미와 반성
2. 들뢰즈의 노마드-리좀학에 대한 온정적 이해
3. 들뢰즈 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반론 50항목
3. 데리다, 해체주의와 평론적 철학, 그리고 표절
- 남의 철학에 대한 평론이 자신의 철학은 아니다
1. 현상학: 신God, 정신Geist, 유령Ghost
2. 현상학을 벗어나는 신체적 존재론
3. 베르그송의 시간은 의식의 생성
4.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불임의 철학
- 대뇌는 거짓말을 좋아한다
5. 소리에서 포노로지Phonology 의 탄생
1) 말-소리중심주의logo-phonocentrism의 착오
2) 하이데거와 데리다 이해의 혼선과 비판
- 데리다의 시간론과 현상학적 존재론의 모순
4. 하이데거, 존재론과 서양 철학의 한계
- 세계-내-존재에서 존재-내-세계로
1. 서양 철학에 대한 근본적 반성
2. 서양 문명의 절대성과 실체성에 대한 반성
3. 서양 철학의 '초월-추상-기계'를 넘어서야
4. 하이데거의 사방 세계와 『천부경』
5. 불교 화엄학과 하이데거 존재론 비교
2. 서양 철학과 문명에 대한 반성과 전망
1. 물신 숭배에서 신물 숭배로
- 동일성과 차이성, 자연주의와 평화
1) 물신-기계 시대의 인간 소외
2)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인가?
3) 서구 보편성의 한계와 종말
2. 평화에 대한 현상학과 존재론의 역동성
- 서양 철학과 기독교는 불교에서 구원을 찾는다
1) 역사현상학의 불안전한 평화
2) 불교적 존재론의 평화
3) 철학의 미래와 네오샤머니즘
- 신인간神人間과 신물神物의 회복을 위한 철학적 기도
3. 여성 철학과 존재론
1) 현상학으로서의 남성 철학과 존재론으로서의 여성 철학
2) 자유는 사유-합리-기계가 아니라 생명-신체-존재의 문제다
3. 한글 철학의 탄생
1. 한글은 세계 언어의 모어母語다
1) 한글의 원소리, 아A, 안AN, 알AL
2) 한글의 원형적 세계관
- 소리를 통해 본 인류 문화의 원源 소리
3) 한글의 육원음六原音과 육하원칙六何原則
4) 한국어의 기원, 홍산紅山 문화
2. 순우리말 철학: 알-나-스스로-하나 718
1) '알-나-스스로-하나'의 순우리말 철학
2) 위인성신爲人成神:자신自身-자신自信-자신自新-자신自神
3) 순우리말 철학과 천지인·원방각·아리랑
3. 삶(생명, 존재)과 앎(이용, 지식)의 고고학
4. '하나'와 '한'과 '하나님'의 상징성에 대하여
5. 철학의 십계명
6. God, Geist, Ghost에서 하나님주의Godism으로
추천사
1. 서양 철학의 종언
1.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적인
- 니체, 문명의 해체와 힘에의 복귀
1. 생기존재론生起存在論: 생성론인가, 존재론인가
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의 세계'와 니체 '힘에의 의지'
3. 니체의 영원 회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4. 힘에의 의지는 현상학인가, 존재론인가
5.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했는가?
6. 존재 철학, 생성 철학: 남성 철학, 여성 철학
7. 유라시아(인도유럽어) 문명의 관점에서 본 쇼펜하우어와 니체
1) 자기 투사의 철학: 서양 철학 내의 결여와
필요, 이성과 의지와 욕망
2) 니체 '힘에의 의지': 실체의 확대 재생산
3) 과학적 제도: 가부장과 동일성의 존재·허상·우상
4) 인간은 자기 투사적-자기 최면적-자기 도착적 존재
8. 니체를 넘어서, 화평부동론和平不同論의 세계
1) 일반성의 철학과 화평부동론
9. 니체를 통해 서양 철학을 비판하다
1) 해석학적 인식과 음양(상징)해석학
2) 유시유종有始有終과 무시무종無始無終
2. 들뢰즈의 욕망과 도착, 기계주의
- 세계 전체를 물질과 기계로 본 대뇌적 환상의 미로
1. 들뢰즈의 현대 철학적 의미와 반성
2. 들뢰즈의 노마드-리좀학에 대한 온정적 이해
3. 들뢰즈 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반론 50항목
3. 데리다, 해체주의와 평론적 철학, 그리고 표절
- 남의 철학에 대한 평론이 자신의 철학은 아니다
1. 현상학: 신God, 정신Geist, 유령Ghost
2. 현상학을 벗어나는 신체적 존재론
3. 베르그송의 시간은 의식의 생성
4.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불임의 철학
- 대뇌는 거짓말을 좋아한다
5. 소리에서 포노로지Phonology 의 탄생
1) 말-소리중심주의logo-phonocentrism의 착오
2) 하이데거와 데리다 이해의 혼선과 비판
- 데리다의 시간론과 현상학적 존재론의 모순
4. 하이데거, 존재론과 서양 철학의 한계
- 세계-내-존재에서 존재-내-세계로
1. 서양 철학에 대한 근본적 반성
2. 서양 문명의 절대성과 실체성에 대한 반성
3. 서양 철학의 '초월-추상-기계'를 넘어서야
4. 하이데거의 사방 세계와 『천부경』
5. 불교 화엄학과 하이데거 존재론 비교
2. 서양 철학과 문명에 대한 반성과 전망
1. 물신 숭배에서 신물 숭배로
- 동일성과 차이성, 자연주의와 평화
1) 물신-기계 시대의 인간 소외
2)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인가?
3) 서구 보편성의 한계와 종말
2. 평화에 대한 현상학과 존재론의 역동성
- 서양 철학과 기독교는 불교에서 구원을 찾는다
1) 역사현상학의 불안전한 평화
2) 불교적 존재론의 평화
3) 철학의 미래와 네오샤머니즘
- 신인간神人間과 신물神物의 회복을 위한 철학적 기도
3. 여성 철학과 존재론
1) 현상학으로서의 남성 철학과 존재론으로서의 여성 철학
2) 자유는 사유-합리-기계가 아니라 생명-신체-존재의 문제다
3. 한글 철학의 탄생
1. 한글은 세계 언어의 모어母語다
1) 한글의 원소리, 아A, 안AN, 알AL
2) 한글의 원형적 세계관
- 소리를 통해 본 인류 문화의 원源 소리
3) 한글의 육원음六原音과 육하원칙六何原則
4) 한국어의 기원, 홍산紅山 문화
2. 순우리말 철학: 알-나-스스로-하나 718
1) '알-나-스스로-하나'의 순우리말 철학
2) 위인성신爲人成神:자신自身-자신自信-자신自新-자신自神
3) 순우리말 철학과 천지인·원방각·아리랑
3. 삶(생명, 존재)과 앎(이용, 지식)의 고고학
4. '하나'와 '한'과 '하나님'의 상징성에 대하여
5. 철학의 십계명
6. God, Geist, Ghost에서 하나님주의Godism으로
추천사
저자
저자
박정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수료 ▲한양대 문리과대학 국문과 졸업 ▲영남대학교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박사 학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세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평화연구소장 역임 ▲월간 『현대시』 신인상으로 시단에 등단 ▲「시를 파는 가게」, 「대모산」, 「독도」, 「타향에서」 등 12권의 시집을 펴냄 ▲현대시회 2대 회장(1997년) ▲서울문예상(2006년, 강남구) 수상 ▲울릉도 독도박물관에 「독도」, 서울 강남구 대모산에 「대모산」, 경기도 연천군 '종자와 시인' 박물관 시공원에 「타향에서」 시비 세움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을 비롯해서 시집을 포함 120여 권의 저서 ▲天正宮 'THINK TANK 2022 정책연구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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