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정원
월정 이숙자 육필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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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 이숙자 시인이 붓펜으로 시조를 엮었다.
성경 전문을 붓펜으로 완성한 저력이다.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비우고 또 채우며 자박자박 걸어온 길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깨어보니
이 나이가 되어있다.
문득, 바쁜 마음이 들어 생각에 생각을 안고
그동안 코로나19로 갇힌 생활에서 기록한
단시조 80편을 묶었다.
‘시조’ 생각하며, 창조하며,
지정한 하나를 얻기 위해 아낌없이
여럿을 버릴 줄 아는 비움의 지혜임을
배우며 남은 날은 단시조의 기품처럼
깔끔하게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
성경 전문을 붓펜으로 완성한 저력이다.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비우고 또 채우며 자박자박 걸어온 길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깨어보니
이 나이가 되어있다.
문득, 바쁜 마음이 들어 생각에 생각을 안고
그동안 코로나19로 갇힌 생활에서 기록한
단시조 80편을 묶었다.
‘시조’ 생각하며, 창조하며,
지정한 하나를 얻기 위해 아낌없이
여럿을 버릴 줄 아는 비움의 지혜임을
배우며 남은 날은 단시조의 기품처럼
깔끔하게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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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자연 표상과 그리움 또는 전통미의 재현
─월정月井 이숙자 시조 평설
김봉군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문학평론가
1. 여는 말
시조 쓰기란 행간에 침묵을 심는 행위라는 말은 시조 문법상의 금언이다. 인간의 화법話法은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말을 필요한 만큼만 할 때 효율도가 높다. 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시조는 우리 고전 문학 32개 장르 가운데 지금까지 원형을 훼손치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양식이다.
전통 율격에 실린 간결한 언어 미학 덕이리라. 3장 6구 12 음보의 짧은 형식으로 자연·인생사·세계·사유思惟의 우주까지 싸안아야 하는 것이 우리 고유 문학 양식인 시조다. 시조 쓰기는 시인의 창조적 응집력과 모(국)어를 절착탁마하는'노작勞作의 분투'를 요구한다.
월정月井 이숙자 시인은 1998년 겨울 《시조생활》 38호로 등단한 원로 시조 시인이다.
24년여 년을 헤아리는 그의 시력詩歷은 그의 시조가 원숙경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지표다.
월정은 가만가만한 어조에 말수가 적고 늘 온유한 항심恒心의 시인이다.
이번 시조집은 선하디선한 그의 심성이 빚은 최선의 '보석'일 것이라는 '설레는 선입견'으로
평설의 문을 열기로 한다.
2. 이숙자 시조의 특성
문학 작품 창작은 소재 선택에서 비롯된다. 작가의 소재 선택은 창조적 상상력의 찰나적'섬광 효 과'에 지배되지만, 민족이나 국민의 소재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우리 민족 예술의 소재 전통은 자연 친화적이다.
그에 작용하는 심미적 지향성은 통합적이다. 본격적으로 서구 문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 문학이 분석적, 분리적인 것과 대비된다.
월정의 시조를 자연, 인간·인생, 사회·역사, 고향의 네 가지 소재 지향성에 비추어 탐독하기로 한다.
(1) 자연
월정 자신이 전통적 인간상을 대표하는 시조 시인이어서, 그의 시조에는 자연 지향성을 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풀벌레 구성진 밤/ 소녀는 잠 못 들고//
초승달 쉬어가는/ 솔숲엔 여린 바람//
별똥별 빗금을 치며/ 이별하듯 흐르네 ─〈오늘을 살며〉
풀벌레, 초승달, 솔숲, 바람, 별똥별 등 동원된 소재들이 모두 자연이다. 이 자연 표상들의 감성적
특성은 '여림'이다. 그러기에 별똥별의 흐름마저 여리다. 우리의 전통적 자연 표상은 이 같은 정적미靜寂美로 표출된다. 박명薄明의 전통미가 '이별하듯'에 가 맺힌다. 오늘을 사는 월정의 시 세계에는 원시적 자연 표상이 신화인 양 살아난다. 아름다운 시조다.
겨울 아직 멀었는데/ 기별 같은 눈이 온다
첫사랑 미련인 듯/ 묻어놓은 밀어들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시공 밖을 맴돈다 ─〈너, 눈〉
기별 같은 눈, 묻어놓은 밀어들이 '아련한 그리움'에 영근다. 시공 밖을 맴돈다는 것은 '만남'의 기약이 가뭇없어 보임이리라. 기별 같은 눈에 마음은 설레나, 묻어놓은 밀어들이 시공 밖을 맴도는 상황. 해소될 수 없는 그리움. 이것은 우리 전통 미학의 고정 화소話素다.
해묵은 가지마다/ 긴 사연을 간직한 채//
자작나무 우듬지로/ 건듯 이는 바람 한 줄//
길손들/한숨까지도/ 끌어안네 풍요의 숲 ─〈가을 산에 오르면〉
연륜이 쌓인 가을 숲이 풍요와 포용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늙마의 시인들이 빠지기 쉬운 조락凋落의
적막감 대신 풍요의 충만감에 젖게 하는 월정의 긍정적 시정詩情이 귀하다.
때로는 그립다가/ 더러는 미워져서//
각혈을 쏟아낼 듯/ 몸부림치고 있다//
마른잎 지는 소리에/ 떨고 있는 홍시 한 알 ─〈만추晩秋〉
이 시조의 지배소支配素는 홍시다. 그것도 한 알이다. 인고忍苦와 초려焦慮, 산고産苦의 결정체結晶體, 그런 예술품과도 같은 홍시 한 알. 그야말로 전율을 환기하는 장면이다. 정적미의 시인 월정에게도 이런 치열한 어조tone가 숨어 있다니. 독자를 자못 숙연케 한다.
마음이 찌든 시절/ 가뭄까지 더 보태서//
목젖은 아려오고/ 탄식은 더 깊어가고//
시름을 몽땅 쓸어갈/ 소나기는 소식 없네 ─〈초복 즈음〉
가뭄에 목타는 초복 즈음의 수난기受難記에 갈음되는 시조다.
월정의 자연 지향성은 고운 정적미로 표상화한 것이 주류主流다. 하지만 때로 치열한 어조로 직핍 해들 때에 그의 어조는 숙연하게도 치열성을 띈다. 이 또한 인고와 초려가 빚어낸 전통미의 표상이다.
(2) 인간·인생
월정의 인간과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표출한 작품들도 다수다. 산수傘壽를 넘어선 그의 인생풀이는 어떤 표상으로 독자들을 맞이하는가?
해루해 짧다는 듯/ 분주히 둘레면서//
서산 허리 기진한 채/ 휘청휘청 버티었네//
삐에로 한생의 고달픔/ 붉은 해를 토해낸다 ─〈해넘이〉
해돋이가 아닌 해넘이 표상이요 노년의 상념이다. 하루해는 종장에서 '한생'으로 치환되고, 이는
곧 서정적 자아의 일생이 된다. 시간에 쫓기듯이 부산을 떨며 허위허위 살아온 삶이 이제 기진한 채
버티고 있는 피에로(무언극의 어릿광대) 모습이다. 그래도 마지막 안간힘으로 핏빛 정념을 분출하고픈 욕망은 살아있다.
젖 물리고 눈 맞추던/ 황홀한 그 순간이//
모성의 극치런가/ 행복의 절정인가//
해맑은 눈빛 속에서/ 반짝이는 참사랑 ─〈극치〉
고달픈 한생이어도 삶의 극치는 있었다. '젖 물리고 눈 맞추던 그 순간',
육아의 기쁨은 사랑의 극치요 한생애의 절정이었다.
해넘이는 그 절정의 앤티클라이맥스일 뿐이다.
텅 빈 듯 넘치는 건/ 둥근 달의 배풂이라//
굴렁쇠 굴러가듯/ 하릴없이 도는 세월//
사는 일 다 그러려니/ 아우르며 사는 거 ─〈순리, 그리고〉
삶을 달관한 예지叡智의시다. '그러려니'의 달관을 표상하는 것이'둥근 달'의 심미적 윤리러니.
'텅빈'이 '넘침'이라는 동아시아 현자賢者들의 역설이 이에서 융융하다.
구름 한 점 띄워둔 채/ 창밖은 적적하고//
역병에 지쳐버린/ 해거름도 요요寥寥한데//
뒤뜰에 낙엽이 진다/ 바람조차 숨죽인 날 ─〈적요〉
온 누리는 세기의 역병 코비드COVID 19로 질식할 듯한 공포 분위기. 그런데 이 서정 시조의 시공時空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동아시아적 '고요로움'의 평정심과 그 분위기야말로 가히 극적이다.
차 한 잔 앞에 놓고/ 알맞게 식히려다//
국화차 향에 젖어/ 아차 너무 식혔네//
삶이란 헛발도 짚으며/ 후회도 하는 거지 ─〈차 향에 젖어〉
식은 찻잔이라는 예각적 체험이 인생훈人生訓으로 고양되었다. 그냥 '촉발생심觸發生心'으로 쓴 즉물 시조가 아니라, 삭이고 삭인 달관의 경지에서 빚어진 눅은 지혜의 소산이다.
어디쯤 와 있을까/ 내 꿈의 수레바퀴//
한 점의 구름으로/ 떨리는 몸짓으로//
휑하니/ 바람 진 자리에/ 등불 밝혀 오시려나 ─〈여월女月〉
제목 〈여월〉이 살풋 상징적이다. '내 꿈의 수레바퀴', 여월女月은 상투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가 보다. 전율할 만큼 결곡한 그는 '등불 밝혀 올 임'일시 분명하다.
동아시아 공간 미학을 채우는 농익은 그리움의 표상을 보라 수작秀作이다.
멈추다 일렁이다/ 반짝이는 물결 위에//
세월로 쌓은 더께/ 한겹 두겹 지워가며//
기진한/ 그림자 하나/ 해 지는 줄 모른다 ─〈기다림〉
기다림의 시공時空은 순탄치 않았다. '세월로 쌓인더께'에 인고지정忍苦之情이 서렸다. 종장 첫 음보'기진한'에서 시상詩想은 꺾인다. 전환이다. '해 지는 줄 모르는' 질긴 기다림은 설부진說不盡이다.
무엇이 그리 급해/ 서두르며 가시나요//
이름 석 자 잊혀질까/ 썼다가 또 썼다가//
별 하늘 영의 세계엔/ 돌림병이 없기를 ─〈이별, 그 이후 1〉
2020년 1월 20일부터 코비드19에 시달린 역사적 배경이 투영된 작품이다. 화법이 직설적이어서
시적 위기를 보이나, 시대를 이야기했기에 함께 읽기로 한다. 인생 5고苦에 드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함에도 헤어져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이름 석 자를 쓰고 또 쓰는 시적 자아의 통고 체험痛苦體驗이 심히 아리다. 그들의 죽음은 뉴스 매체 속에서 무심히 숫자로만 기록될 뿐이다. 타이완 보건 장관은 최초의 사망자 한 사람 소식을 전하면서 울었고, 대량 희생자를 낸 초기에 이탈리아 총리는 추도식을 했다.
월정은 이렇게 시조를 남긴다. 사랑의 첫 걸음은 '관심'이다.
아득한 차안此岸 너머/ 그대 소식 알고 싶어//
낮달이 반겨주는/ 청산에 올라본다//
못다 한 사랑의 노래/ 목청껏 부르면서 ─〈여백의 정원〉
피안을 향한 그리움의 노래다. 산상 고창高唱의 못다 한 사랑 노래다. 월정의 시조는 기다림과 그리움, 사랑에 자주 목이 켕긴다. 본디 사랑의 사람인 까닭이다. 이 그리움과 기다림과 사랑을 어찌할 것인가.
넘침도 모자람도/ 비움으로 대신하고//
초승달 살 오르도록/ 은혜로이 품을 키워//
보이나 보이지 않는/ 임의 섭리 우러른다 ─〈여일餘日은〉
월정은 삶과 사랑의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본연성을 회복한다. 비움이 채움이라는 역설의 진리 터득의 어조다.
절대자의 섭리 말이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못다 한 인생사에 대한 회한이 불끈거리는 것이 인생이다.
묵정밭 망초꽃이/ 이리도 야속할 줄//
들장미 꿈만 꾸다/ 헛발질을 하며 왔나//.
한 세월 미완성 교향곡/ 남긴 족적 서러워라 ─〈미련〉
대중가요 가사에도 있듯이 인생이란 본디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들장미 인생은 꿈이었고,
묵정밭 망초꽃은 현실태現實態다. 어쩌랴. 돌아볼수록 마뜩찮고 미진한 것이 인생이 아닌가.
다 떠난 빈자리는/ 시공 너머 허전해도//
사계절이 절로 가듯/ 순리 따라 살다 보면//
먼 하늘 당신 곁으로/ 순명하듯 가리라 ─〈순명順命〉
순명은 그리스도교 용어다. 자연의 질서가 그렇듯이 청조주의 섭리에 따르겠다는 신앙 고백이다.
동아시아인이 섬겨온 천명天命 사상의 초월적 심성의 표출이다.
이런 섭리 사관을 섬기는 사람의 삶은 비관적 비극일 수가 없다.
호수 위엔 봄 햇살이/ 잔잔히 찰랑대고//
양어장 물살 헤쳐/ 치어 떼가 솟구침은//
활기찬/ 생명의 몸짓/ 야시장 풍경 같다 ─〈생명의 외침〉
순명의 길을 더위 잡은 시인의 초월적 자아에게 이제 삶은 이렇듯이 약동하는 생명력으로
낙관적 지평을 연다. 인생 승리다.
(3) 역사·사회
월정의 서정 시조에 수용된 역사 의식과 사회 의식은 간절한 어조를 띤다.
독자들이 지나쳐서 안될 대목이다.
아리수 눈에 드는/ 풍관 좋은 벤치에서//
물결의 아우성을/ 시퍼렇게 들어가며//
젊은이 꿈을 펼치려/ 아픈 역사 다시 쓴다 ─〈한강 둔치〉
아리수는 한강의 옛 이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의 남진 사건 기록에도 실린 말이다.
한강은 우리 수도 한복판을 꿰뚫어 흐르는 민족사의 동맥이다. 그 동맥에서 파동치는 아우성을 감지하는 시적 자아의 '각성도'는 범연치 않고 '시퍼렇다'. 월정의 역사적 자아는 '젊은 꿈'을 환기함으로써 낙관적 지평을 연다.
그의 역사적 지평에서도 비탄悲嘆은 사윈다.
옛 촛불 어디 가고/ 간절함만 남아있나//
새벽종에 울려 퍼진/ 어머니의 소원처럼//
이념에 얼룩진 땅에도/ 정녕 봄은 오겠지 ─〈어느 날의 기도〉
우선 '옛 촛불'에 마음이 간다. 촛불의 본디 뜻이 무엇이냐는 근본적 질문이다.
촛불은 인공적인 불이기에 본디 원초적 신화성을 품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화톳불이나 호롱불 같은 실용성과는 달리 종교적, 의례적인 상징성을 띤 것이 촛불이다.
촛불이 신화적 원형 상징의 표상인 이유다. 촛불은 ①신령의 빛, ②축귀逐鬼, 즉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 때를 씻어내는 표상, ③조상 신의 길 밝힘, ④제물, ⑤남녀의 구합, ⑥순결한 마음, ⑦정화淨化, ⑧세상을 구제할 광명, ⑨다산多産과 다복, ⑩살신성인殺身成仁, ⑪서러움·외로움의 상징 표상이다. 월정이 개탄하는 것은 이같이 성스러운 영적 표상인 촛불을 그릇된 이념 집단이 악용하여
'저주의 굿판'을 벌인 역사적 파행 현상이다. 이 역시 소망의 기도로 끝맺음된다. 축도다.
코로나 아니어도/ 이 거리는 어두운데//
노오란 꽃송이로/ 얄밉게 흩날리네//
하늘도/ 야속하여라/ 억장이 또 무너진다 ─〈미세 먼지 속에〉
중국발 황사에 미세 먼지까지 자욱한 우리나라. 인류의 기계 문명에 침탈당한 대자연의 역습이다.
지구 온난화가 북극권까지 위협하고, 가뭄·태풍· 홍수의 기상 이변이 빚은 재앙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는 생태주의 시조다.
서정 시조가 놓치기 쉬운 역사 의식과 사회 의식이 월정의 작품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다만, 이런 사회시의 '말하기 방식a way of saying'이 직설적 웅변의 어조를 띠어 미학적 위기를 불러오기 십상이라는 것이 문제다.
극복되어야 할 시조 시학의 주요 과제다.
(4) 고향
농경 사회에서 성장한 노년에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현저한 소재가 고향이다.
고향 시조 2수만 읽기로 한다.
휘몰이로 몰아치는/ 실개천의 돌림 노래//
처마 밑 나리꽃이/ 잡초 속에 영롱한데//
초례청 새색시인가/ 봉선화도 수줍다 ─〈여름 고향집〉
동원된 소재 실개천·나리꽃·봉선화가다 자연 상관물이다. 이런 식물성 자연성이 자아화하여 그리움을 환기한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detachment의 비극에서 구원하는'만남의 기쁨'이 은근하다.
나리꽃과 봉선화가 조성하는 정적미靜寂美가 실개천 소리로 인해 생기를 띤다.
잡을 수 없는 세월/ 뉘엿뉘엿 저물녘에//
에움길 돌아나서/ 달려 달려 가고 싶다//
빗소리 애잔한 가락/ 고향 생각 부추긴다 -〈비 오는 날〉
작품의 배경은 인생 저물녘이다. 첩경이 아닌 에움길이나 부리나케 달려가고 싶은 고향. 향수鄕愁를 자아내는 것이 애잔한 빗소리 가락이다. 시인은 향수를 촉발하는 구체적 상관물 빗소리를 종장에 불러옴으로써 시적 효과를 높였다.
월정의 고향 노래. 어조가 실히 눅었다.
(5) 동심
동시조 7수의 시상詩想과 이미지 표상이 몹시 곱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빛 너무 고와//
구름 위에 걸터 앉아/ 설핏 졸다 내려다본//
발 아래 펼쳐진 세상엔/ 제 길 찾는 개미떼 -〈파란 별〉
시인의 좌표는 구름 자리 하늘이다. 파란 별 자리에서 고운 하늘빛 전신에 감싼 채 지상 첨경을 내려다본다.
개미떼 같은 생령들. 삶이란 저리 분주하다. 자아의 객관화 기법이다.
웃는 모습 곱던 친구/ 어디에서 편안한가//
풀꽃 반지 나눠 끼며/ 꽃길로만 가자 했지//
내 잠시 발길 멈추니/ 풀밭에서 네가 웃네 -〈동무 생각〉
초장과 중장은 과거 회상, 종장은 변용된 재현再現의 표상이다. 종장 첫 음보 '내 잠시'에서 시상은 절묘히 전환한다.
풀꽃 반지 나눠 끼던 옛 동무 모습이 '발길 멈추는'에서야 피어난다. 부질없이 부대끼던 일상의 관성을 깨뜨리는 순간은 곧 멈추는 자리에서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홀로'에서 '더불어'의 그리움으로 변용되는 감동이 있는 시조다.
어른이 쓴 동시조. 아이들이 얼마만큼 감동할까? 문학 현상론적 소통의 과제다.
3. 맺는 말
이 글은 시조 쓰기란 행간에 침묵을 심는 행위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 소재 선택은 창조적 상상력의 '찰나적 섬광 효과' 뿐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소재 전통에 빚을 지게 마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다.
우리 정신사의 전통적 특징은 인간과 자연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인식함에 있으며, 월정月井 이숙자李淑子 시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월정 시조의 자연 지향성과 심미적 윤리는 만남과 통합이다.
그의 시조에서는 우리 전통 예술의 정적미靜寂美와 박명薄明의 미학이 신화인 양 살아난다.
그의 시조에 아로새겨진 감수성의 곡절은 서정시의 광맥인 그리움이다.
월정 시조의 으뜸가는 창조적 특질은 긍정의 시학이다. 애면글면 자지러질 상황이나 비탄의 고비에서도 그의 시조는 소망의 표상으로 여여如如하다. 조락凋落의 가을 숲도 풍요와 포용의 세계에 현현顯現한다.
그의 시조에는 여읍여소如泣如訴의 비애나 인고忍苦·초려焦慮의 전통 정서가 창조적·개성적으로 재현된다.
때로 특유의 치열한 어조로 변용된 현대 미학의 절정을 가늠하기도 하는 것이 현저한 예다
그는 사람의 시인이며, 가령 육아의 극적 순간이 그 절정을 표상한다. 그가 자주 쓰는 지혜의 시는
촉발생심觸發生心에 따른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삭이고 눅인 인고忍苦와달관達觀의 결실이다.
나아가 그의 죽음 의식은 아리디아린 애별리고愛別離苦의일단一端이며, 이는 인류애로 확산될 실마리에 갈음된다.
그의 시조는 마침내 '비음이 채움'이라는 역설의 지혜와 절대적 진리의 근원인 '당신'에게로 귀착하는 순명順命의 경지에 이른다.
이 같은 섭리 사관을 섬기는 월정의 삶과 예술이 비관적 비전에 견인될 리 없다.
월정 시조의 역사 의식은 '아픈 흐름'속에 있으나 '젊은 꿈'을 소환함으로써 낙관적 지평을 연다.
아울러 성스러움의 상징인 촛불을 이념화하는 이 땅의 현실을 인파한다.
그의 고향 의식에 어린 그리움엔 '홀로'의 외로움과 함께 '더불어'의 기쁨이 서려 있다.
월정의 동시조도 '멈춤'의 자리에서 천진한 동심으로 꽃피며, 그것은 생기에 찬 그리움의 장면으로 재현된다.
요컨대, 월정 이숙자 시인의 시조 쓰기는 유한적정幽閑寂靜한 전통미의 창조적 재현 행위이다.
독자들은 월정 시조의 행간에 심기어 있는 침묵의 의미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전통 정서와 그 곡절 풀이로써 깊은 유열愉悅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요조숙녀의 표징으로 기림받는 월정 이숙자 시인의 여생이 은혜 속에서 평안한 나날이 되기를 빌며, 새 시조집 상재上梓에 삼가 축도를 올린다.
판권지
월정 이숙자 제3시조집(육필시조)
여백의 정원
─월정月井 이숙자 시조 평설
김봉군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문학평론가
1. 여는 말
시조 쓰기란 행간에 침묵을 심는 행위라는 말은 시조 문법상의 금언이다. 인간의 화법話法은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말을 필요한 만큼만 할 때 효율도가 높다. 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시조는 우리 고전 문학 32개 장르 가운데 지금까지 원형을 훼손치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양식이다.
전통 율격에 실린 간결한 언어 미학 덕이리라. 3장 6구 12 음보의 짧은 형식으로 자연·인생사·세계·사유思惟의 우주까지 싸안아야 하는 것이 우리 고유 문학 양식인 시조다. 시조 쓰기는 시인의 창조적 응집력과 모(국)어를 절착탁마하는'노작勞作의 분투'를 요구한다.
월정月井 이숙자 시인은 1998년 겨울 《시조생활》 38호로 등단한 원로 시조 시인이다.
24년여 년을 헤아리는 그의 시력詩歷은 그의 시조가 원숙경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지표다.
월정은 가만가만한 어조에 말수가 적고 늘 온유한 항심恒心의 시인이다.
이번 시조집은 선하디선한 그의 심성이 빚은 최선의 '보석'일 것이라는 '설레는 선입견'으로
평설의 문을 열기로 한다.
2. 이숙자 시조의 특성
문학 작품 창작은 소재 선택에서 비롯된다. 작가의 소재 선택은 창조적 상상력의 찰나적'섬광 효 과'에 지배되지만, 민족이나 국민의 소재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우리 민족 예술의 소재 전통은 자연 친화적이다.
그에 작용하는 심미적 지향성은 통합적이다. 본격적으로 서구 문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 문학이 분석적, 분리적인 것과 대비된다.
월정의 시조를 자연, 인간·인생, 사회·역사, 고향의 네 가지 소재 지향성에 비추어 탐독하기로 한다.
(1) 자연
월정 자신이 전통적 인간상을 대표하는 시조 시인이어서, 그의 시조에는 자연 지향성을 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풀벌레 구성진 밤/ 소녀는 잠 못 들고//
초승달 쉬어가는/ 솔숲엔 여린 바람//
별똥별 빗금을 치며/ 이별하듯 흐르네 ─〈오늘을 살며〉
풀벌레, 초승달, 솔숲, 바람, 별똥별 등 동원된 소재들이 모두 자연이다. 이 자연 표상들의 감성적
특성은 '여림'이다. 그러기에 별똥별의 흐름마저 여리다. 우리의 전통적 자연 표상은 이 같은 정적미靜寂美로 표출된다. 박명薄明의 전통미가 '이별하듯'에 가 맺힌다. 오늘을 사는 월정의 시 세계에는 원시적 자연 표상이 신화인 양 살아난다. 아름다운 시조다.
겨울 아직 멀었는데/ 기별 같은 눈이 온다
첫사랑 미련인 듯/ 묻어놓은 밀어들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시공 밖을 맴돈다 ─〈너, 눈〉
기별 같은 눈, 묻어놓은 밀어들이 '아련한 그리움'에 영근다. 시공 밖을 맴돈다는 것은 '만남'의 기약이 가뭇없어 보임이리라. 기별 같은 눈에 마음은 설레나, 묻어놓은 밀어들이 시공 밖을 맴도는 상황. 해소될 수 없는 그리움. 이것은 우리 전통 미학의 고정 화소話素다.
해묵은 가지마다/ 긴 사연을 간직한 채//
자작나무 우듬지로/ 건듯 이는 바람 한 줄//
길손들/한숨까지도/ 끌어안네 풍요의 숲 ─〈가을 산에 오르면〉
연륜이 쌓인 가을 숲이 풍요와 포용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늙마의 시인들이 빠지기 쉬운 조락凋落의
적막감 대신 풍요의 충만감에 젖게 하는 월정의 긍정적 시정詩情이 귀하다.
때로는 그립다가/ 더러는 미워져서//
각혈을 쏟아낼 듯/ 몸부림치고 있다//
마른잎 지는 소리에/ 떨고 있는 홍시 한 알 ─〈만추晩秋〉
이 시조의 지배소支配素는 홍시다. 그것도 한 알이다. 인고忍苦와 초려焦慮, 산고産苦의 결정체結晶體, 그런 예술품과도 같은 홍시 한 알. 그야말로 전율을 환기하는 장면이다. 정적미의 시인 월정에게도 이런 치열한 어조tone가 숨어 있다니. 독자를 자못 숙연케 한다.
마음이 찌든 시절/ 가뭄까지 더 보태서//
목젖은 아려오고/ 탄식은 더 깊어가고//
시름을 몽땅 쓸어갈/ 소나기는 소식 없네 ─〈초복 즈음〉
가뭄에 목타는 초복 즈음의 수난기受難記에 갈음되는 시조다.
월정의 자연 지향성은 고운 정적미로 표상화한 것이 주류主流다. 하지만 때로 치열한 어조로 직핍 해들 때에 그의 어조는 숙연하게도 치열성을 띈다. 이 또한 인고와 초려가 빚어낸 전통미의 표상이다.
(2) 인간·인생
월정의 인간과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표출한 작품들도 다수다. 산수傘壽를 넘어선 그의 인생풀이는 어떤 표상으로 독자들을 맞이하는가?
해루해 짧다는 듯/ 분주히 둘레면서//
서산 허리 기진한 채/ 휘청휘청 버티었네//
삐에로 한생의 고달픔/ 붉은 해를 토해낸다 ─〈해넘이〉
해돋이가 아닌 해넘이 표상이요 노년의 상념이다. 하루해는 종장에서 '한생'으로 치환되고, 이는
곧 서정적 자아의 일생이 된다. 시간에 쫓기듯이 부산을 떨며 허위허위 살아온 삶이 이제 기진한 채
버티고 있는 피에로(무언극의 어릿광대) 모습이다. 그래도 마지막 안간힘으로 핏빛 정념을 분출하고픈 욕망은 살아있다.
젖 물리고 눈 맞추던/ 황홀한 그 순간이//
모성의 극치런가/ 행복의 절정인가//
해맑은 눈빛 속에서/ 반짝이는 참사랑 ─〈극치〉
고달픈 한생이어도 삶의 극치는 있었다. '젖 물리고 눈 맞추던 그 순간',
육아의 기쁨은 사랑의 극치요 한생애의 절정이었다.
해넘이는 그 절정의 앤티클라이맥스일 뿐이다.
텅 빈 듯 넘치는 건/ 둥근 달의 배풂이라//
굴렁쇠 굴러가듯/ 하릴없이 도는 세월//
사는 일 다 그러려니/ 아우르며 사는 거 ─〈순리, 그리고〉
삶을 달관한 예지叡智의시다. '그러려니'의 달관을 표상하는 것이'둥근 달'의 심미적 윤리러니.
'텅빈'이 '넘침'이라는 동아시아 현자賢者들의 역설이 이에서 융융하다.
구름 한 점 띄워둔 채/ 창밖은 적적하고//
역병에 지쳐버린/ 해거름도 요요寥寥한데//
뒤뜰에 낙엽이 진다/ 바람조차 숨죽인 날 ─〈적요〉
온 누리는 세기의 역병 코비드COVID 19로 질식할 듯한 공포 분위기. 그런데 이 서정 시조의 시공時空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동아시아적 '고요로움'의 평정심과 그 분위기야말로 가히 극적이다.
차 한 잔 앞에 놓고/ 알맞게 식히려다//
국화차 향에 젖어/ 아차 너무 식혔네//
삶이란 헛발도 짚으며/ 후회도 하는 거지 ─〈차 향에 젖어〉
식은 찻잔이라는 예각적 체험이 인생훈人生訓으로 고양되었다. 그냥 '촉발생심觸發生心'으로 쓴 즉물 시조가 아니라, 삭이고 삭인 달관의 경지에서 빚어진 눅은 지혜의 소산이다.
어디쯤 와 있을까/ 내 꿈의 수레바퀴//
한 점의 구름으로/ 떨리는 몸짓으로//
휑하니/ 바람 진 자리에/ 등불 밝혀 오시려나 ─〈여월女月〉
제목 〈여월〉이 살풋 상징적이다. '내 꿈의 수레바퀴', 여월女月은 상투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가 보다. 전율할 만큼 결곡한 그는 '등불 밝혀 올 임'일시 분명하다.
동아시아 공간 미학을 채우는 농익은 그리움의 표상을 보라 수작秀作이다.
멈추다 일렁이다/ 반짝이는 물결 위에//
세월로 쌓은 더께/ 한겹 두겹 지워가며//
기진한/ 그림자 하나/ 해 지는 줄 모른다 ─〈기다림〉
기다림의 시공時空은 순탄치 않았다. '세월로 쌓인더께'에 인고지정忍苦之情이 서렸다. 종장 첫 음보'기진한'에서 시상詩想은 꺾인다. 전환이다. '해 지는 줄 모르는' 질긴 기다림은 설부진說不盡이다.
무엇이 그리 급해/ 서두르며 가시나요//
이름 석 자 잊혀질까/ 썼다가 또 썼다가//
별 하늘 영의 세계엔/ 돌림병이 없기를 ─〈이별, 그 이후 1〉
2020년 1월 20일부터 코비드19에 시달린 역사적 배경이 투영된 작품이다. 화법이 직설적이어서
시적 위기를 보이나, 시대를 이야기했기에 함께 읽기로 한다. 인생 5고苦에 드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함에도 헤어져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이름 석 자를 쓰고 또 쓰는 시적 자아의 통고 체험痛苦體驗이 심히 아리다. 그들의 죽음은 뉴스 매체 속에서 무심히 숫자로만 기록될 뿐이다. 타이완 보건 장관은 최초의 사망자 한 사람 소식을 전하면서 울었고, 대량 희생자를 낸 초기에 이탈리아 총리는 추도식을 했다.
월정은 이렇게 시조를 남긴다. 사랑의 첫 걸음은 '관심'이다.
아득한 차안此岸 너머/ 그대 소식 알고 싶어//
낮달이 반겨주는/ 청산에 올라본다//
못다 한 사랑의 노래/ 목청껏 부르면서 ─〈여백의 정원〉
피안을 향한 그리움의 노래다. 산상 고창高唱의 못다 한 사랑 노래다. 월정의 시조는 기다림과 그리움, 사랑에 자주 목이 켕긴다. 본디 사랑의 사람인 까닭이다. 이 그리움과 기다림과 사랑을 어찌할 것인가.
넘침도 모자람도/ 비움으로 대신하고//
초승달 살 오르도록/ 은혜로이 품을 키워//
보이나 보이지 않는/ 임의 섭리 우러른다 ─〈여일餘日은〉
월정은 삶과 사랑의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본연성을 회복한다. 비움이 채움이라는 역설의 진리 터득의 어조다.
절대자의 섭리 말이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못다 한 인생사에 대한 회한이 불끈거리는 것이 인생이다.
묵정밭 망초꽃이/ 이리도 야속할 줄//
들장미 꿈만 꾸다/ 헛발질을 하며 왔나//.
한 세월 미완성 교향곡/ 남긴 족적 서러워라 ─〈미련〉
대중가요 가사에도 있듯이 인생이란 본디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들장미 인생은 꿈이었고,
묵정밭 망초꽃은 현실태現實態다. 어쩌랴. 돌아볼수록 마뜩찮고 미진한 것이 인생이 아닌가.
다 떠난 빈자리는/ 시공 너머 허전해도//
사계절이 절로 가듯/ 순리 따라 살다 보면//
먼 하늘 당신 곁으로/ 순명하듯 가리라 ─〈순명順命〉
순명은 그리스도교 용어다. 자연의 질서가 그렇듯이 청조주의 섭리에 따르겠다는 신앙 고백이다.
동아시아인이 섬겨온 천명天命 사상의 초월적 심성의 표출이다.
이런 섭리 사관을 섬기는 사람의 삶은 비관적 비극일 수가 없다.
호수 위엔 봄 햇살이/ 잔잔히 찰랑대고//
양어장 물살 헤쳐/ 치어 떼가 솟구침은//
활기찬/ 생명의 몸짓/ 야시장 풍경 같다 ─〈생명의 외침〉
순명의 길을 더위 잡은 시인의 초월적 자아에게 이제 삶은 이렇듯이 약동하는 생명력으로
낙관적 지평을 연다. 인생 승리다.
(3) 역사·사회
월정의 서정 시조에 수용된 역사 의식과 사회 의식은 간절한 어조를 띤다.
독자들이 지나쳐서 안될 대목이다.
아리수 눈에 드는/ 풍관 좋은 벤치에서//
물결의 아우성을/ 시퍼렇게 들어가며//
젊은이 꿈을 펼치려/ 아픈 역사 다시 쓴다 ─〈한강 둔치〉
아리수는 한강의 옛 이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의 남진 사건 기록에도 실린 말이다.
한강은 우리 수도 한복판을 꿰뚫어 흐르는 민족사의 동맥이다. 그 동맥에서 파동치는 아우성을 감지하는 시적 자아의 '각성도'는 범연치 않고 '시퍼렇다'. 월정의 역사적 자아는 '젊은 꿈'을 환기함으로써 낙관적 지평을 연다.
그의 역사적 지평에서도 비탄悲嘆은 사윈다.
옛 촛불 어디 가고/ 간절함만 남아있나//
새벽종에 울려 퍼진/ 어머니의 소원처럼//
이념에 얼룩진 땅에도/ 정녕 봄은 오겠지 ─〈어느 날의 기도〉
우선 '옛 촛불'에 마음이 간다. 촛불의 본디 뜻이 무엇이냐는 근본적 질문이다.
촛불은 인공적인 불이기에 본디 원초적 신화성을 품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화톳불이나 호롱불 같은 실용성과는 달리 종교적, 의례적인 상징성을 띤 것이 촛불이다.
촛불이 신화적 원형 상징의 표상인 이유다. 촛불은 ①신령의 빛, ②축귀逐鬼, 즉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 때를 씻어내는 표상, ③조상 신의 길 밝힘, ④제물, ⑤남녀의 구합, ⑥순결한 마음, ⑦정화淨化, ⑧세상을 구제할 광명, ⑨다산多産과 다복, ⑩살신성인殺身成仁, ⑪서러움·외로움의 상징 표상이다. 월정이 개탄하는 것은 이같이 성스러운 영적 표상인 촛불을 그릇된 이념 집단이 악용하여
'저주의 굿판'을 벌인 역사적 파행 현상이다. 이 역시 소망의 기도로 끝맺음된다. 축도다.
코로나 아니어도/ 이 거리는 어두운데//
노오란 꽃송이로/ 얄밉게 흩날리네//
하늘도/ 야속하여라/ 억장이 또 무너진다 ─〈미세 먼지 속에〉
중국발 황사에 미세 먼지까지 자욱한 우리나라. 인류의 기계 문명에 침탈당한 대자연의 역습이다.
지구 온난화가 북극권까지 위협하고, 가뭄·태풍· 홍수의 기상 이변이 빚은 재앙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는 생태주의 시조다.
서정 시조가 놓치기 쉬운 역사 의식과 사회 의식이 월정의 작품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다만, 이런 사회시의 '말하기 방식a way of saying'이 직설적 웅변의 어조를 띠어 미학적 위기를 불러오기 십상이라는 것이 문제다.
극복되어야 할 시조 시학의 주요 과제다.
(4) 고향
농경 사회에서 성장한 노년에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현저한 소재가 고향이다.
고향 시조 2수만 읽기로 한다.
휘몰이로 몰아치는/ 실개천의 돌림 노래//
처마 밑 나리꽃이/ 잡초 속에 영롱한데//
초례청 새색시인가/ 봉선화도 수줍다 ─〈여름 고향집〉
동원된 소재 실개천·나리꽃·봉선화가다 자연 상관물이다. 이런 식물성 자연성이 자아화하여 그리움을 환기한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detachment의 비극에서 구원하는'만남의 기쁨'이 은근하다.
나리꽃과 봉선화가 조성하는 정적미靜寂美가 실개천 소리로 인해 생기를 띤다.
잡을 수 없는 세월/ 뉘엿뉘엿 저물녘에//
에움길 돌아나서/ 달려 달려 가고 싶다//
빗소리 애잔한 가락/ 고향 생각 부추긴다 -〈비 오는 날〉
작품의 배경은 인생 저물녘이다. 첩경이 아닌 에움길이나 부리나케 달려가고 싶은 고향. 향수鄕愁를 자아내는 것이 애잔한 빗소리 가락이다. 시인은 향수를 촉발하는 구체적 상관물 빗소리를 종장에 불러옴으로써 시적 효과를 높였다.
월정의 고향 노래. 어조가 실히 눅었다.
(5) 동심
동시조 7수의 시상詩想과 이미지 표상이 몹시 곱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빛 너무 고와//
구름 위에 걸터 앉아/ 설핏 졸다 내려다본//
발 아래 펼쳐진 세상엔/ 제 길 찾는 개미떼 -〈파란 별〉
시인의 좌표는 구름 자리 하늘이다. 파란 별 자리에서 고운 하늘빛 전신에 감싼 채 지상 첨경을 내려다본다.
개미떼 같은 생령들. 삶이란 저리 분주하다. 자아의 객관화 기법이다.
웃는 모습 곱던 친구/ 어디에서 편안한가//
풀꽃 반지 나눠 끼며/ 꽃길로만 가자 했지//
내 잠시 발길 멈추니/ 풀밭에서 네가 웃네 -〈동무 생각〉
초장과 중장은 과거 회상, 종장은 변용된 재현再現의 표상이다. 종장 첫 음보 '내 잠시'에서 시상은 절묘히 전환한다.
풀꽃 반지 나눠 끼던 옛 동무 모습이 '발길 멈추는'에서야 피어난다. 부질없이 부대끼던 일상의 관성을 깨뜨리는 순간은 곧 멈추는 자리에서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홀로'에서 '더불어'의 그리움으로 변용되는 감동이 있는 시조다.
어른이 쓴 동시조. 아이들이 얼마만큼 감동할까? 문학 현상론적 소통의 과제다.
3. 맺는 말
이 글은 시조 쓰기란 행간에 침묵을 심는 행위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 소재 선택은 창조적 상상력의 '찰나적 섬광 효과' 뿐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소재 전통에 빚을 지게 마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다.
우리 정신사의 전통적 특징은 인간과 자연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인식함에 있으며, 월정月井 이숙자李淑子 시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월정 시조의 자연 지향성과 심미적 윤리는 만남과 통합이다.
그의 시조에서는 우리 전통 예술의 정적미靜寂美와 박명薄明의 미학이 신화인 양 살아난다.
그의 시조에 아로새겨진 감수성의 곡절은 서정시의 광맥인 그리움이다.
월정 시조의 으뜸가는 창조적 특질은 긍정의 시학이다. 애면글면 자지러질 상황이나 비탄의 고비에서도 그의 시조는 소망의 표상으로 여여如如하다. 조락凋落의 가을 숲도 풍요와 포용의 세계에 현현顯現한다.
그의 시조에는 여읍여소如泣如訴의 비애나 인고忍苦·초려焦慮의 전통 정서가 창조적·개성적으로 재현된다.
때로 특유의 치열한 어조로 변용된 현대 미학의 절정을 가늠하기도 하는 것이 현저한 예다
그는 사람의 시인이며, 가령 육아의 극적 순간이 그 절정을 표상한다. 그가 자주 쓰는 지혜의 시는
촉발생심觸發生心에 따른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삭이고 눅인 인고忍苦와달관達觀의 결실이다.
나아가 그의 죽음 의식은 아리디아린 애별리고愛別離苦의일단一端이며, 이는 인류애로 확산될 실마리에 갈음된다.
그의 시조는 마침내 '비음이 채움'이라는 역설의 지혜와 절대적 진리의 근원인 '당신'에게로 귀착하는 순명順命의 경지에 이른다.
이 같은 섭리 사관을 섬기는 월정의 삶과 예술이 비관적 비전에 견인될 리 없다.
월정 시조의 역사 의식은 '아픈 흐름'속에 있으나 '젊은 꿈'을 소환함으로써 낙관적 지평을 연다.
아울러 성스러움의 상징인 촛불을 이념화하는 이 땅의 현실을 인파한다.
그의 고향 의식에 어린 그리움엔 '홀로'의 외로움과 함께 '더불어'의 기쁨이 서려 있다.
월정의 동시조도 '멈춤'의 자리에서 천진한 동심으로 꽃피며, 그것은 생기에 찬 그리움의 장면으로 재현된다.
요컨대, 월정 이숙자 시인의 시조 쓰기는 유한적정幽閑寂靜한 전통미의 창조적 재현 행위이다.
독자들은 월정 시조의 행간에 심기어 있는 침묵의 의미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전통 정서와 그 곡절 풀이로써 깊은 유열愉悅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요조숙녀의 표징으로 기림받는 월정 이숙자 시인의 여생이 은혜 속에서 평안한 나날이 되기를 빌며, 새 시조집 상재上梓에 삼가 축도를 올린다.
판권지
월정 이숙자 제3시조집(육필시조)
여백의 정원
목차
목차
* 시인의 말 …… 4
* 평설 …… 107
제1부|오늘을 살며·13
1 오늘을 살며 …… 15
2 생명력 …… 16
3 극치 …… 17
4 석양 …… 18
5 순리 그리고 …… 19
6 어쩔 수 없어 …… 20
7 갈바람 …… 21
8 적요 …… 22
9 해넘이 …… 23
10 만추 …… 24
11 돌아보니 …… 25
12 순명 …… 26
13 모정 …… 27
14 차 향에 젖어……28
15 은 절로 오고 …… 29
16 바다는 …… 30
제2부|여백의 정원·31
17 여백의 정원 …… 33
18 복수초 …… 34
19 봄비 …… 35
20 무념, 무상 …… 36
21 모과차를 마시며 …… 37
22 풍향계 …… 38
23 여름, 가고 있네 …… 39
24 고향의 봄 …… 40
25 찔레꽃 …… 41
26 내 가을은 …… 42
27 한강 둔치 …… 43
28 너, 눈 …… 44
29 여월 …… 45
30 봄날 …… 46
31 하늘 웃다 …… 47
32 빈자리……48
33 반란 …… 49
제3부|봄, 그리고·51
34 생명의 외침 …… 53
35 숲 속 한낮 …… 54
36 꿈길 …… 55
37 깨달음 …… 56
38 청명 …… 57
39 어느 날 …… 58
40 초복 즈음 …… 59
41 여름, 고향집 …… 60
42 비오는날은……61
43 가을 산에 오르면 …… 62
44 노을 공원 …… 63
45 입동 무렵 …… 64
46 기다림 …… 65
47 포르투갈의 목가 …… 66
48 바람(願) …… 67
제4부|자화상, 지구·69
49 하늘, 화났다 …… 71
50 집중 호우 …… 72
51 그 사월 진달래는 …… 73
52 어느 날의 기도 …… 74
53 미세 먼지 속에 …… 75
54 눈 속에도 …… 76
55 어쩔거나 …… 77
56 역병 속에서도 …… 78
57 격리된 날 …… 79
58 복권 판매소를 지나며 …… 80
59 분리 수거 …… 81
60 몸살 …… 82
61 열대야 …… 83
62 다시, 생명 …… 84
63 이별, 그후 1 …… 85
64 이별, 그후 2 …… 86
65 이별, 그후 3 …… 87
제5부|하늘·89
66 여일은 …… 91
67 그런 거지 …… 92
68 회한 …… 93
69 질경이 …… 94
70 그리움 …… 95
71 중환자실 소꿉친구 …… 96
72 생로병사 …… 97
73 미련 …… 98
74 파란 별 …… 99
75 동무 생각 …… 100
76 꽃잎 안부 …… 101
77 제라늄꽃 …… 102
78 고마리꽃 …… 103
79 벚꽃 나들이…… 104
80 쉼터 …… 105
* 평설 …… 107
제1부|오늘을 살며·13
1 오늘을 살며 …… 15
2 생명력 …… 16
3 극치 …… 17
4 석양 …… 18
5 순리 그리고 …… 19
6 어쩔 수 없어 …… 20
7 갈바람 …… 21
8 적요 …… 22
9 해넘이 …… 23
10 만추 …… 24
11 돌아보니 …… 25
12 순명 …… 26
13 모정 …… 27
14 차 향에 젖어……28
15 은 절로 오고 …… 29
16 바다는 …… 30
제2부|여백의 정원·31
17 여백의 정원 …… 33
18 복수초 …… 34
19 봄비 …… 35
20 무념, 무상 …… 36
21 모과차를 마시며 …… 37
22 풍향계 …… 38
23 여름, 가고 있네 …… 39
24 고향의 봄 …… 40
25 찔레꽃 …… 41
26 내 가을은 …… 42
27 한강 둔치 …… 43
28 너, 눈 …… 44
29 여월 …… 45
30 봄날 …… 46
31 하늘 웃다 …… 47
32 빈자리……48
33 반란 …… 49
제3부|봄, 그리고·51
34 생명의 외침 …… 53
35 숲 속 한낮 …… 54
36 꿈길 …… 55
37 깨달음 …… 56
38 청명 …… 57
39 어느 날 …… 58
40 초복 즈음 …… 59
41 여름, 고향집 …… 60
42 비오는날은……61
43 가을 산에 오르면 …… 62
44 노을 공원 …… 63
45 입동 무렵 …… 64
46 기다림 …… 65
47 포르투갈의 목가 …… 66
48 바람(願) …… 67
제4부|자화상, 지구·69
49 하늘, 화났다 …… 71
50 집중 호우 …… 72
51 그 사월 진달래는 …… 73
52 어느 날의 기도 …… 74
53 미세 먼지 속에 …… 75
54 눈 속에도 …… 76
55 어쩔거나 …… 77
56 역병 속에서도 …… 78
57 격리된 날 …… 79
58 복권 판매소를 지나며 …… 80
59 분리 수거 …… 81
60 몸살 …… 82
61 열대야 …… 83
62 다시, 생명 …… 84
63 이별, 그후 1 …… 85
64 이별, 그후 2 …… 86
65 이별, 그후 3 …… 87
제5부|하늘·89
66 여일은 …… 91
67 그런 거지 …… 92
68 회한 …… 93
69 질경이 …… 94
70 그리움 …… 95
71 중환자실 소꿉친구 …… 96
72 생로병사 …… 97
73 미련 …… 98
74 파란 별 …… 99
75 동무 생각 …… 100
76 꽃잎 안부 …… 101
77 제라늄꽃 …… 102
78 고마리꽃 …… 103
79 벚꽃 나들이…… 104
80 쉼터 …… 105
저자
저자
이숙자
月井 李淑子
공무원, 초중등교사 정년퇴직
시조생활사 주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시조생활사 제정 38회 신인문학상(1998)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최우수상 수상
세계전통시인협회 작품상 수상 외
(사)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한국문인
협회, 여성문학인회.여성시조협회 회원
기장 여신도회회보 기자, 숲 생태해설가
세브란스병원 어린이 호스피스,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현)
- 저서
《손톱에 꽃물 삭힐 때》(토함 동인지) 외
《늘어진 시간 조이기》(삼연회 동인지) 외
-시조집
제1집《발가락의 무게만큼 고왔지》
제2집《풀꽃, 참 예쁘다》
제3집《여백의 정원》
공무원, 초중등교사 정년퇴직
시조생활사 주최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시조생활사 제정 38회 신인문학상(1998)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최우수상 수상
세계전통시인협회 작품상 수상 외
(사)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한국문인
협회, 여성문학인회.여성시조협회 회원
기장 여신도회회보 기자, 숲 생태해설가
세브란스병원 어린이 호스피스,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현)
- 저서
《손톱에 꽃물 삭힐 때》(토함 동인지) 외
《늘어진 시간 조이기》(삼연회 동인지) 외
-시조집
제1집《발가락의 무게만큼 고왔지》
제2집《풀꽃, 참 예쁘다》
제3집《여백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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