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못 절길(양장본 Hardcover)
구상회 시집
공주 동학농민혁명 자료 발굴과 해석에 헌신한 시인 구상회. 시인은 신동엽 시인과 걷던 금강과 우금티의 기억과 분단조국의 아픔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시로 형상화하여 후손에게 남기셨고 동학군의 절절한 사연들을 일일히 찾고 옮긴 자료가 있다. 이제 후손에게 남긴 그 원고를 옮겨 유고집으로 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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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1. 구상회의 성장과 학문의 배경
소연素然 구상회具尙會(음력 1930.3.15~양력 2010.8.20)는 1930년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 사람이다. 조부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중·고등학교 검정시험을 통해 단국대 사학과로 진학한 후 6·25전쟁 중 대전과 부산에 설치된 전시연합대학 2, 3학년을 다니고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재학 중 신동엽, 이상비 시인과 교유했다. 당시 신동엽(1930~1969)은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이상비는 민족종교 증산도에 깊이 심취했고, 구상회는 노자 사상에 빠져 각각 자신의 관심사에 독서하고 토론했다. 이들은 평생 함께 공부하고 교유했다. 훗날 구상회는 졸업 후 공주여고, 강경여고, 서라벌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신동엽은 주산농고, 명성여고 교사가 되었고 장편서사시 『금강』을 썼다. 이상비(1932~2007)는 시인, 평론가로 원광대 교수가 되었고, 퇴직 후 한밝사상을 전하는 교주로 활동했다.
구상회가 노자 사상에 몰입한 것은 그의 가문과 무관하지 않다. 구상회는 공주시 의당면 중흥리를 세거지世居地로 정한 능성 구씨 병사공파 구득원具得源 후손으로 그의 가문은 입향조 이후 학문과 절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입향조 구득원은 정3품 첨지중추부사로서 무관이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자 입신을 위한 뜻을 접고 공주로 내려왔다. 같은 시기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반대하여 공주로 내려온 류충걸의 처가가 구득원의 가문이다. 류충걸은 인조반정 후 조정으로 진출하였으나 구득원은 은둔 처사로 근신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증직으로 호조참판에 이른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조정과 학계에 진출하여 명문가를 이루었다. 공주박물관이 보관하는 병사공파 종가 자료들을 보면 교지와 함경도 함흥의 〈함흥읍도〉가 있는데 구득원의 후손 구칙(具1680-1754)과 구재중(具載重 1770-1832)이 각각 함경도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 장진도호부사(長津都護府使)로 근무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구상회는 노자 '제4장 무원(无源) 편'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통상 노자를 공부하는 이들의 해석과 다르나 인용문은 구상회의 해석에 따랐다.
「길은 비고 쓰이는 것이라 혹 차지 않는가 하니 깊기도 하구나 만물의 뿌리처럼 그 뾰족함이 잘리고 그 얽힘이 풀리며 그 빛 녹아 그 본지 한 가지니 맑기도 하구나 마치 혹 있는가 할 만큼 누구의 아들인지 우리가 몰라도 한울님보다 앞선 모습이어라」1)
(第4章 无源.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구상회는 공주에 살면서 노자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고자 했다. 이로움과 편함을 멀리하고자 했고, 염치를 생각하고 세상의 떳떳한 이치를 궁구하고자 했다. 부여로 찾아가 만난 전주사범학교 학생 신동엽과 교유하며 하늘의 이치와 땅의 섭리, 인본의 도리를 토론했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벗어나 물자와 용역의 무상 분배와 이익의 공유를 주장하는 러시아의 자유주의 철학자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의 이론은 구상회와 신동엽의 화두가 되었다. 구상회와 신동엽은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여 교사와 청년운동에 참여했으며, 수시로 공주와 부여에서 만나 문학청년들의 모임 '야화(들불)'를 꾸린다.
이 시기 신동엽과 구상회는 사찰계 형사의 요주의 인물로 집중되어 감시받게 된다. 당시 부여경찰서 사찰계 형사이던 노문盧文이 남긴 기록이다.
「1948~1949년 무렵, 신동엽은 좌경학생운동단체에 가담했던 연고로 전주사범학교를 퇴학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부여읍 소재 신동엽문학관 외벽에 누군가에 쫓기거나 숨어 엿보는 형식을 담은 조형물 「쉿! 저기 신동엽이 있다」가 설치되어 있다. 이 시기 신동엽의 활동을 암시하는 모습이다. 본디 조각가 구본주가 87항쟁 시기 시위에 나선 넥타이부대의 위기감을 표현한 「위기의식」이란 제목의 작품인데, 그 의미에 공감하여 신동엽 사후 50년에 옮긴 작품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 신동엽은 이미 구상회와 교류하고 있었고, 구상회 가족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기 신동엽은 공주시 의당면 구상회의 집에서 여러 날씩 머물고 함께 공부했으며 그들이 함께 단국대 사학과에서 공부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은 이 청년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적 격동의 시기다. 물론 구상회와 신동엽은 전시 대학생으로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입대하지 않은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된다. 1950년 7월 금강지역 전투에서 승리한 인민군은 공주를 거쳐 부여, 논산, 익산, 전주로 진군한다. 인민군은 점령지의 청년들을 모아 지역 치안과 사상 교육을 담당할 청년동맹을 결성하게 한다. 부여에서 청년운동을 하던 신동엽은 인민군이 진주하자 부여민주청년동맹에 가담하여 선전선동부장으로 활동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달아나게 되자 신동엽은 부여를 벗어나 1달 정도 빨치산 대열에 동참했다. 이후 빨치산 대열에서 이탈했고 국군이 서울을 탈환한 이후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좌익활동을 한 지식인으로 몰리게 된다. 부득이 1950년 국민방위군으로 지원하지만 1951.4.30. 국민방위군 해체로 귀향하게 된다. 이 시기 구상회도 자원입대하여 복무하다가 의가사 조치를 받아 귀향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신동엽은 공군학도간부후보생에 지원 합격했으나 임관되지 못하고 귀가 조치된다.
구상회는 국어교사로 공주여고, 강경여고에 근무했고, 서라벌대학 문학을 강의한 바 있으며 명성여고에 근무하던 신동엽과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구상회의 관심은 오로지 신동엽, 노문, 이상비 등과의 문학적 교류와 창작 활동에 있었고, 특히 신동엽과는 동학 답사 기행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구상회의 가족과 신동엽의 가족들도 서로 왕래했으나 1969년 신동엽이 사망하자 잠시 단절되었다. 이 시기 구상회 홀로 공주 동학 전투 지역 답사와 채록은 구상회의 고독한 시간을 달래는 방편이었다.
구상회는 1972년 교직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에 전념했다. 서울에서 금융업과 전자기기상을 했고, 공주로 내려와 섬유공장 경영, 전문식당 경영, 보령 성주탄광 사업, 자연농원 등을 경영했다. 신동엽의 부친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구상회의 농원을 수시로 찾아왔다.
2. 구상회의 동학 답사 기행
가. 구상회의 시에 반영된 동학농민혁명 전투를 보는 시각
구상회가 공주에 살면서 집안의 가풍과는 결이 다른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하게 된 이유를 바로 찾기는 쉽지 않다. 그와 함께 동학 답사 기행에 참가했던 이들의 말과 글에서도 뚜렷한 이유가 드러난 것은 없다. 다만 그가 남긴 시에서 동학군을 의병들의 한 모습으로 노래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동학 연구는 의리와 자긍심을 지키려는 가풍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구상회는 하늘이 내려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잊지 말고 지켜야 할 덕목을 '세만지'로 정한다.
(전략)
지나는 길손이
중얼중얼
〈삼만지〉 명당이란다
바람 물 맛 좋고
땅 집 사람 모두다
〈인지 만지〉해서
그냥 살 곳이라 여겨
하는 말이라네
(하략) (「세만지」 부분)
삼만지는 땅, 집,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삼만지'의 주인인 두 사람을 되살린다. 시적 자아와 다른 한 사람은 나이 사십에 타계한 신동엽이다. 구상회는 평생 신동엽을 잊지 않고 그와 거닐던 우금티 동학의 흔적과 우금티 싸움이 남긴 상처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우금티 싸움의 흔적에서 동학군의 모습을 찾아냈고 동학군이 남긴 절규를 시로 남겨 기억하고자 했다.
(전략)
할아비 철푸덕 주저앉아 팔뚝 걷어부치고
하늘에 삿대질하며
없는 놈은 승도 없는 줄 알어
무쇠가 달구면 뜬쇠여
맨무리가 하늘이어
맨무리는 밥이 하늘이고
너희들 밥만 먹이면 되는 것이여
(하략) ( 「송장배미」 부분)
철퍼덕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벌떡 일어나 싸움터로 선뜻 나선 이들, 무쇠를 달구어 뜬쇠로 창칼로 벼리고 밥이 하늘이라 외치며 살고 싶은 절규로 나선 이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고민해야 한다. 구상회가 절규하는 시 속의 동학군은 고통을 견디고 살기 위해 자식들 밥을 챙기는 소박한 백성들이고 분노하는 민중으로 모두 영웅이 된다.
이들은 구상회의 의식 속에 남아 있던 조선 의병들과 다르지 않다. 구상회가 남긴 다른 138행의 장시 「장구동에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황간영동 노응규, 팔도의군부 유인석, 임병찬, 청병사절단 이재윤, 매천 황현 등은 모두 청양군 목면 장구마을 모덕사에 봉헌한 조선 유림 최익현의 죽음과 직간접으로 연계된 의병들이다. 대마도에서 죽은 최익현을 장사 지내기 위해 몰린 농민, 일본 유학생, 조선 학생, 기생, 시신이 지나는 고을 수령, 제자, 장꾼들 모두가 구상회의 의식 속에서는 「송장배미」 싸움을 위해 나선 이들과 다를 것이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백두 천지와 한라 백록의 삼신, 용왕, 한울님의 계시로 세운 나라의 백성들로 '말을 삭이고 살을 녹여/ 기쁨 슬픔 한마음 나누고/ 아닌 일 치레 짓에/ 아무도 진 빠지는 일 없이 하소서//섬기고 따르리니/ 일어지이다 절하나이다'(「하늘못 절말」 부분) 비는 이들이다.
구상회의 「송장배미」에 담긴 농민군들에 대한 연민과 서정, 분노 등은 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조선 민중 저항의 또 다른 실체라고 봐야 한다. 구상회는 동학군을 조선 의병의 하나로 보았고, 공주 우금티전투에서 그 의병들이 몰살한 것을 연민하고 분노하여 평생을 답사에 나서서 남은 기록을 찾고 잊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닌가 한다.
근래에 이르러 동학 관련 전공자들이 늘어나면서 동학의 교리와 실체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동학 교리 연구자들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동학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동학농민혁명전쟁이 일어난 곳을 중심으로 탐사 활동을 하고 문화적 가치를 따지는 문화론자 등 여러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구상회는 동학농민혁명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찾고 시로 극화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상회는 동학교도라는 어떤 증거도 없으니 미루어 짐작해도 동학교인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오히려 노자의 도덕경을 중시하고 단군으로부터 현재의 분단 조국 현실을 걱정하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식으로 구상회 가문이 견지한 민족주의 가풍에서 기인한다. 구상회의 장조카는 최익현의 현손 최창규의 여동생과 혼인한다.
구상회를 공주의 향토사학자로 보는 이들이 많다. 이는 구상회가 동학이론 연구보다는 현장답사와 실제를 기록하는 채록자 역할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상회의 현장 채록을 중시하는 활동은 신동엽과의 문학동인 활동과 동학 전투 지역에 대한 답사 기행과 토론으로 이어져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 구상회가 남긴 동학농민혁명 전투 자료와 의미
구상회가 남긴 자료 중에 그가 동학의 교리를 해석하거나 주문으로 외거나 노래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공주 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 인정하는 자료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자료 :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숨 쉬는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전적지 안내』 책자의 「공주에서 동학군과의 싸움-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1894.10.24.~11.9)를 중심으로」 번역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은 이인, 효포, 우금티 싸움을 중심으로 동학군토벌관군 좌선봉장 이규태의 전투일기를 요약한 기록이다.
둘째자료 : 관군 경리청 장교 백낙완이 동학 관련 전투를 개인적으로 기록한 『남정록』을 번역한 문건이다.
셋째자료 : 구상회가 공주 우금티전투와 관련된 지역을 답사하고 그 피해와 관련 사실들을 채록한 기록이다.
구상회가 동학농민혁명 전투와 관련한 자료에서 가장 중시했던 것은 현장을 실사하여 주민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기록으로 남기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현장실사는 실제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93년 공주동학기념사업회 결성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1993년 이전의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연구실 안에서의 사료 중심이거나 교리 중심의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구상회는 이런 연구 풍토에서 벗어나 현장 탐사와 실사를 중시했으나 동참하는 이들이 아주 적었다. 1993년 이후 구상회의 연구 방식에 동조하는 연구자, 답사자들이 늘어났다. 구상회를 자주 찾아온 이들 중 민족사학자 이이화, 우윤 씨가 대표적이다. 특히 우윤은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창작과비평사. 1993)의 저자로 관심이 컸다. 구상회의 답사에 동참한 이들은 연구자부터 행정 관계자, 학생, 시민 등 다양하다. 이들 중 문화원 관계자들이 많았다. 천안 이원표(작고), 예산 이상재(작고), 서천 박수환, 정읍 최현식, 고창 이기화, 김제 최순식(작고), 장흥 강수의, 진주 김범수(작고) 등이다.
구상회의 노년까지 동학 답사 학습의 동참자는 정선원 박사(원광대)다. 정선원은 공주사대 역사교육과 출신으로 공주우금티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실무를 맡았던 연구자로 원광대 박맹수 교수와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모시는사람들. 2015) 공동저자다.
위 책에서 정선원이 채록한 '육성으로 듣는 공주와 우금티의 동학 이야기' 사례연구는 구상회의 지도를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자료라고 정선원은 증언한다. 정선원은 구술자료 중심의 증언 문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인 답사지역의 주민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능숙한 화술과 지역 노인들의 이야기를 정성껏 듣고 기록하는 진실성 등을 구상회에게 배웠다고 말한다. 구상회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채록조차 정선원에게 내주고 연구 활동에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필자는 이 글을 집필하며 정선원이 챙긴 자료가 도움이 컸음을 밝힌다. 〈김홍정, 소설가〉
목차
목차
제1부 하늘못 절길
수수한 하루 12
세만지 14
벗 16
한두미 18
하늘못 절길 20
- 절미절글 20
- 구름 복숭아 21
- 하늘못 23
- 하늘못 절말 25
- 천지가 열린다 27
그리고 눈알을 30
벗의 예순돌에 35
- 항아리 울음 35
- 절미 38
- 소종이라 답하다 42
사람 44
장구동에서 48
누이 마음 56
길나래비 57
눈물 60
삼내림 62
흑산도에 64
옛 보고 이제보니 70
기러기와 고무신 71
미운다섯 살 75
제2부 혼잣말
문턱 80
혼잣말 82
쓴약 한방울 83
먼저여라 85
한목소리로 86
별 하나 나 하나 88
바르셀로나 89
배웅 90
다짐 91
약손 92
곰나루 93
알돌을 안친다 99
제3부 매화타령
대로나 102
네소 이야기 104
우리별 1호 105
뒷간 106
할매는 108
제모습 109
매화타령 110
알고모를 일 112
서울나드리 113
길막고 물어봐 115
송장배미 117
해설 / 김홍정(소설가) 122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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