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그린 그림(한국디카시학 디카시선 13)(한국디카시학 디카시선 13)
박준홍 디카시집
한국디카시학 디카시선 13권. 박준홍 시집. 사진은 시각을 통해서 사진이 내장하고 있는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게 해준다. 시는 문맥을 통해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의미(상징 또는 비유가 가리키는 것을)를 파악해야 한다. 시와 사진은 분명히 그 의미 기호가 같을 수는 없다. 이질적인 이 의미 기호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의미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될 때, 그것은 경이로움으로 우리에게 깨우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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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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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속에서 찾아낸 영원
강남주(시인, 전 부경대학교 총장)
진리는 설명으로써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깨달아야 한다. 시도 그렇다.
박준홍 시인은 옛날에 내가 근무했던 직장의 선후배로서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왔다. 그는 좋은 원고를 쓰는 재능 있는 PD로서 나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몇 년 전에 시집을 한 권 보내왔다. 그가 시도 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그 뒤 그의 또 다른 시집에서 그의 시를 읽은 몇 마디 소감을 말했던 일도 있었다.
정년을 한 뒤 그가 시인으로서 변신한 것이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랜 세월을 방송에서 언어의 조탁에 훈련을 쌓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언어로써 구축해 놓은 시의 성城을 보고 놀라울 것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시가 제대로 되려면 시인의 세계 인식이 새롭고 깊어야 함에는 무슨 다른 이론이 있을 것인가. 그는 자신의 경험과 경륜만큼 세계를 인식하기에 충분히 심도 있는 눈도 가지고도 있었다. 다만 부족했던 시 쓰기의 훈련을 그동안 그는 몇 권의 시집을 내면서 스스로 계속해 오고 있었던 듯했다.
그랬던 그가 며칠 전 디카 사진과 시를 한 묶음으로 엮은 새로운 디카시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롭게 펴내고자 하는 시집 원고를 한 뭉치 보냈다. 읽어봤다. 그런 뒤 아득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시에는 맹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이와 같은 시가 새로운 시의 장르를 차지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또 경남 고성에서 발신된 디카시가 새로운 시의 장르로서 국내는 물론, 이미 국경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고 있음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흐름의 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바 없는 필자로서는 이 작품들을 앞에 놓고 아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시와 사진을 한 묶음으로 엮은 디카시를 한 편씩을 차례로 살펴봤다. '디카시란 문엇인가'를 생각도 하면서 살펴봤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시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에 차츰 놀랐다. 그 디카시에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카 사진과 시가 서로 협력하면서 새로운 아름다움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놀라움, 거기에다 설명을 제거해버리고 오로지 깨우침의 방법을 택하고 있는 이 시의 창작수법에 어떻게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그동안 시를 써오면서 이런 감각, 이런 시의 세계에 눈을 떴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창작을 감행해 새로운 시집을 펴내고, 그 가치를 한번 물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로서는 새로운 시의 세계에 일종의 도전장을 내민 행위 같았다,
순간의 포착과 영원성의 탐구
박준홍 시인은 오래전부터 사진기를 들고 다녔다. 가벼운 카메라는 물론 무겁고 다리까지 장착된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니기도 했다. 사진에 대한 취미가 예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넘겨버렸던 일이 있었다.
정년 후에도 그는 이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편으로 들어왔다. 집에 암실까지 마련, 작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특별한 취미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러던 그가 현대 시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쳐 시집을 내기도 했으니 그 승패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재미있게 사는가? 부러웠다.
그가 들고 온 한 묶음의 디카시집 원고에는 90편 정도의 사진과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사진에 곁들인 시는 짧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빨랐다. 그러나 순간순간 읽기 속도를 멈칫거렸다. 짧은 몇 줄의 시와 사진이 주는 의미를 동시적으로 파악해야 했다.
어떤 작품에는 왜 이런 사진을 썼을까? 또 이런 시와 하나가 되게 했을까?
그런 호기심 깃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마치 어렸을 때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 숨겨진 의미 찾기에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시각을 통해서 사진이 내장하고 있는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게 해준다. 시는 문맥을 통해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의미(상징 또는 비유가 가리키는 것을)를 파악해야 한다. 시와 사진은 분명히 그 의미 기호가 같을 수는 없다. 이질적인 이 의미 기호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의미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될 때, 그것은 경이로움으로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름대로 가장 손쉬운 예 하나를 들어보겠다. 이 디카시집에 첫 번째로 수록된 작품이 그것이다.(사진은 작품집에서 확인할 것)
이 디카시의 제명은 「진달래 길」이다. 마치 전시장에서나 또는 사진첩 속에서 보는 것처럼 한 장의 사진이 지면 위쪽에 실려 있다. 그 아래 실려 있는 불과 3줄밖에 안 되는 간단한 시가 눈길을 끈다.
소꿉동무 순이
어디서 살까
즈려밟고 외길 찾아간다
극히 짧은 시다. 이 시만으로써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위의 사진 한 장이 이 시의 의미를 넉넉하게 해준다. 사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진만으로써는 그냥 호젓한 산길, 그 길로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이 사진과 시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이 디카시는 복층적 의미를 띠고 우리에게 한 편의 디카시로서 감동을 던져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즈려밟고 외길 찾아간다.'라는 이 시의 시제가 「진달래 길」이고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연상하게 해주기는 한다.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뿐 아니다. 짧은 이 시에서 등장하는 '즈려밟고'가 아무 부담 없고 친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 만난 '사뿐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의 성공적 오미쥬Hommage 기법에 의해서라고 생각된다. 익숙하고 보편화된 호감 있는 대상을 닮고 싶어 하는, 용인되는, 또는 바람직한 창작기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범한 산길. 지워지지 않은 푸르름 사이로 진달래가 피어 있다. 화자의 생각에 꼬투리가 되어주는 오브제다. 구체적인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순이'라는 보통명사 같기도 한 이름, 그 이름이 갖는 그리움의 대상이 시와 사진으로 한 묶음이 되게 해서 화자의 그리움에 대한 정서를 환기 시켜주고 있다.
이 디카시는 산길을 돌아 사라져가는 찰나를 포착해서 '그리움'이라는 인간 심상의 영원성을 성공적으로 완성해 내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정신으로 듣는 절규
이 디카시집의 책장을 넘기다가 「뭉크의 절규」에서 필자의 눈이 한참 머물렀다.
뭉크(1863~1944)는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다. 뭉크의 「절규」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 이름이다. 이 작품에 덧붙여져 있는 글은 다음과 같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붉어졌고 나는 한 줄기 우울을 느꼈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가는 것 같았다.(이하 생략)'
바로 이 작품의 이름이 「절규」다. 뭉크는 이 작품에서 귀신의 형상 같기도 한 사람의 형상이 공포에 질려 절규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공포를 이렇게 표출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놀라움, 또는 공포 같은 것은 어디서 오는가? 느낌이 상상과 어우러질 때 온다.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공포나 불안이 어느 순간 외적인 자극에 의해서 병뚜껑이 열리듯 무의식으로부터 현재화顯在化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사물을 접할 때 그 대상에 대해서 사람마다 각각 다른 형상, 의미로 그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게도 된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박준홍 시인의 이 디카시 「뭉크의 절규」가 아닌가 한다. 독자들은 이 시집 속의 「뭉크의 절규」를 먼저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이 사진은 낡은 폐타이어가 녹슨 쇠줄에 묶여 붕괴방지를 위한 버팀둑의 버팀목 같은 것에 걸려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담장 같기도 하고 둑 같기도 한 것에 장치된 버팀목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사진 전체의 화조도 녹슬어 보여 퇴색과 퇴락을 느끼게 해준다.
하늘이시여
제가 무슨 죄를 지절렀나이까
재발 이 지옥불 천벌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험한 길이나 큰길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굴러다니던 자동차 타이어. 자유와 번영, 그리고 강인함을 상징이라도 하듯 달리던 자동차 타이어가 낡고 닳아 헐겁고 못쓰게 되었을 때 가야 할 곳은 어딘가?
이 시인은 그런 행선지를 이 디카시 속에서 찾아내고 공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종착지를 형벌 속에 갇힌 지옥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해석은 한 장의 사진을 이렇게 돌올하고도 의미 있는 것으로 변형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뭉크의 절규를 발견해내고 있으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버려진 폐타이어는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서는 무심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아 넘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시인은 녹슨 쇠줄에 묶여있는 폐타이어를 유의미한 것으로, 운명이 다한 뒤에 닥쳐오는 피할 수 없는 업장業障으로 파악하고 '지옥불 천벌을/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가령, 사진은 사진대로 시는 시대로 분리해서 전시한다면 그 의미는 또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이 포착한 이 사진의 운명적 순간은 짧은 시 몇 줄과 하나로 엮임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숙명과 연결 지워지며 새로운 정신적 절규로 환치된 것이다.
디카시에 대해서 여기서 잠간 사진과 시의 교효 작용을 생각해 보자. 디카시는 시와 사진이 하나의 의미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시와 사진은 분리불가능이다.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을 분리시켜도 그것은 의미의 본령에서 엇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앞에서 예를 든 「진달래 꽃」에서 볼 수 있는 시는 3행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뭉크의 절규」에서는 시가 5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다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를 것이 없다. 표현의 방식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에 묶일 것은 없다. 그러나 압축을 생명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언어가 갖는 특징인 3.4.조나 전혀 대화체가 되어서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본다. 다만, 어떻게 압축해서 형상화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추상과 구상
디카시가 지향하는 복층적 의미
여기서는 잠시 디카시 「물이 그린 그림」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결인지 바람결인지, 아니면 빛의 영향인지 한 장의 사진이 수많은 굴절된 빛의 파장을 보여주고 있다. 빛에 굴절된 파노라마와도 같은 현상을 순간 포착한 것이 여기 실린 물결사진이다. 작품명에서 '물'이란 말을 제시하지 않으면 물인지 마저도 알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을 촬영한 것이지만, 자세히 봐도 역시 물결 같지 않다. 물을 소재로 한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들과는 전혀 다르다.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다. 현란하다. 마치 추상화를 보는 듯도 하다.
몽환적이기도 한 이 사진은 언뜻 초현실주의 미술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빛에 굴절되는 색깔은 가지가지다. 기막힌 순간 포착이다. 그러나 거기서 얻을 수는 있지만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오랜 생명의 가치, 이 시인은 그런 가치를 여기서 발견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이 수없는 순간을 촬영해서 갈무리한 것 가운데 유용한 것을 뽑아 쓸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특징이다. 그 특징을 극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이 시인인 것 같다.
수평의 반란이 만들어낸 명작이 있다
일어서려는 음모를 포기한
춤사위에 몰입하다
제 몸의 언어마저 망각하는
몰아의 경지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장면은 언제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장소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또 날씨에 따라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가 순간 사라져버린다. 수없는 수평의 반란이다. 그 반란은 우리가 개념하고 있는 물의 수평 지향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관념으로 환치시켜 놓는다.
순간적으로 형성되는 미의 극치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있을 때 이런 극치의 순간은 포착된다. 이런 경우 오브제는 형체가 고정되지 않아 관습적 감각으로 파악되기보다 반관념적이고 형이상적인 그 어떤 것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박준홍 시인은 이와 같은 비고정非固定 절정의 순간을 포착하는 눈, 그런 감각을 가진 시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그런 순간을 '몰아의 경지'라고 과감하게 캡션Caption을 붙인다. 이는 그의 감각이자 언어 구사 능력이다. 돌연히 파국이라도 맞은 듯 오직 다섯 글자 '몰아의 경지'로써 시를 돌연히 매듭 지워버리는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종결의미 방법을 동원해서 이 시를 이렇게 끝맺는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다.
추상화는 필자와 같은 관객에게는 의미에 접근이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 부자유를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 그의 이 시다. 다섯 행의 이 시가 없으면 이 사진은 필자의 눈을 느닷없는 방랑객이 되게 해줄 것이다, 사진과 시가 합쳐서 경우에 따라서는 필자와 같은 맹목의 독자(또는 관람자)에게는 구상화처럼 되어주기도 한다.
미와 추는 인식의 소산물
마지막으로 껍질을 벗고 있는 나무 표피의 변화과정을 「어떤 추상화」라고 본 디카시, 그리고 잔가지를 모두 전지를 해버린 앙상한 나무둥치에서 토루소 조각 기법을 유추해낸 디카시 「살아 있는 토루소」 등 두 편의 작품을 함께 살펴보는 것으로써 필자의 디카시에 대한 졸견을 매듭짓고자 한다.
「어떤 추상화」는 인고의 세월을 버텨내다가 마침내는 껍질을 벗어버려야 하는 나무, 보기에 따라서는 그 얼룩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흉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껍질, 이제 떨궈내야만 하는 그런 시간을 추상화로 받아들이고 있는 디카시가 바로 이 작품이다. 사진만 놓고 보면 영락없이 화랑에서나 만날 수 있는 추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켜켜이 쌓인 나무의 시간, 나무의 생애가 엉겨 있고 생명유지를 위한 험로가 지도처럼 드러나 있다. 그런 시간 속을 굳건히 생명을 이끌어 온 인고의 세월이 한 나무의 둥치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이 디카시인의 눈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보는 것처럼 나무의 표피는 이렇게 시공을 견뎌온 한 그루 나무의 생애를 무언의 스토리로 감싸고 있다. 그 스토리는 나무의 히스토리다. 비장하다.
그래서 이 디카시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것을 벗겨지는 나무껍질에 빗대어 환유의 수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작품은 화자가 되어 독자에게 무언가를 자꾸 일러주고 있다.
마음에 달라붙은 얼룩들
삶이 저질러 놓은 업장
틈틈이 벗기고 지워보건만
자고나면 두꺼워지는 덧칠
업장들
이 나무껍질의 최후가 인간이 맞는 최후와 생명의 수평에서 본다면 무엇이 다르겠는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삶이란 결국 이렇게 세월을 견디며 낡아가야 하는 피할 길 없는 일종의 업이 아니겠는가. 의도적으로는 죄짓지 않은 악업. 그런데도 얼룩으로 매듭 지워진 이 문신은 모든 삶의 종착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이 시인은 말라비틀어져 벗겨져 떨어지려는 나무껍질을 보면서 생명이란 이렇게 업장으로 마지막을 접수하게 된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놀라운 각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끝으로 디카시 「살아 있는 토루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잔가지를 모두 쳐낸 앙상한 가로수의 몸통이 이 시인의 감각망에 포착되었다. 이와 같은 비정상의 피조물을 그는 그의 시야에서 흘려버리지 않았다. 나무의 형체가 아니라 나무와는 무관한, 조각가가 손으로 빚어낸 미완의 조각품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첨단 전지 솜씨로 빚어낸
명품 가로수
예술 향기 그윽한 그늘이 욱어지면
도시는 참말로 행복할까
먼저 디카 사진을 보자. 첨단 전동 톱이 나무의 잔가지를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원래의 나무 형태를 철저하게 헝클어 자연 속의 나무 모습을 지워버린 것이다. 기계가 자연의 영역에 뛰어들어 저지른 폭거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환경미화의 명분을 걸고 들어낸 것은 창조주가 만든 나무를 나무가 아닌 괴물스런 예술품이 되게 하고 만 것이다.
시인이 이 작품을 '명품 가로수'라고 한 것은 그래서 역설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거리의 가로수, 아니면 잎이 우거져 공원 풍경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자연 속의 나무가 전동 톱에 의해서 그 형체가 본디 모양과는 전혀 다르게 되어버린 것은 다시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다. 시인이 창조인지, 아니면 파괴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필자는 위에서 살펴본 박준홍 시인의 디카시를 읽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디카시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공부하게 되었다. 우리 시 영역에서 새롭고 단단한 예술세계를 구축한 것이 분명하다고 느낀 것이 그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한국적 시문학 장르로서 자리매김한 디카시는 앞으로도 그 수평을 계속 넓혀갈 것으로 예견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박준홍 시인의 디카시에 대해서 필자가 자의로 해석하고 언급했거나 그 가치를 재단했던 것은 그래서 필자에게는 분외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일은 책임져야 할 필자의 몫이다.
그동안 그의 시집을 통해 그의 시를 읽어왔던 것이 인연이 되어 그가 시도하는 디카시의 원고를 읽게 된 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 맹목의 필자가 디카시에 대해서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새로운 시문학 분야에서 노마드의 길을 떠나는 박 시인에게 디카시의 푸른 초원을 거침없이 헤쳐 나가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목차
목차
진달래 길
볼레길 산책
몽돌 해변
가족
벅수가 아니거든
뭉크의 절규
삐리
해로
꽃자리
단층 읽기
후회
골무꽃
길
푸른색 진통
이름표
동백꽃
2부 물이 그린 그림
텃새의 조건
물이 그린 그림
초록 우산
너와 나는
바다의 자장가
금낭화 사랑
차렷 경례
머금다
말씀을 향하여
장마 그치면
정류장에서
묵언수행
좌초
어떤 추상화
봄비
별주부 통신
연화지 밤 벚꽃
3부 중얼거리는 풍경
중얼거리는 풍경
잠자리를 깔다
노루귀
자화상
팔레트
귀로
볼레길 해국
메멘토 모리
가까운 사이
즐거운 투정
길에는
만다라
꽃의 탄생
살아있는 토루소
꿈꾸는 봉래산
파문
4부 나이테
등 뒤의 시간
물소리
춘설
아버지의 세상 나들이
가야할 시간
다대포에서
시걸 루덴스
어떤 일몰
지금은 없는 탑
여로
노을
빨간 우체통
포노사피엔스
봄비 체온
박준홍 디카시 해설
_ 강남주 (시인, 전 부경대학교 총장)
저자
저자
계간 문예창작 문학상 시 부문 본상
시집 『노닥거리는 하오 풍경』 외 6권
부산MBC PD 정년퇴직
PSB(현KNN) 〈물은 생명입니다〉 객원PD
동서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겸임교수
〈박준홍의 창〉 〈영광도서 갤러리〉외 사진 작품전
한국방송대상 외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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