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시인수첩 시인선 66)
김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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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찰나’를 기다리는 고통의 시간들을 엮어내다
김겸 시인의 첫 번째 시집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가 출간되었다. 평론가·소설가로도 활동하는 시인은 문학이라는 장르 안에서 쉽게 ‘익숙한 것’으로 변해 버리는 풍경과 감정들을 ‘낯선 것’, 즉 가공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것으로 보존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는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통해 특정한 형태 안에 갇혀 있는 말들을 일상적인 공간에 풀어주고, 그것이 우리 모두와 만나게 해 주었다. 이번에 펴내는 시집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에서도 시인은 그러한 언어적 자유로 구성된 풍경들을 담았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단어인 ‘슬픔’은 우리를 쉽게 울게 하거나 감상에 빠지게 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하지만 우리 곁에 늘 함께 존재하는 무한한 시공간과 평범한 일상 사이에 생긴 균열을 의미한다. 시인이 ‘슬픔’이라고 명명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가 가장 낯설게 여겼던, 하지만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우리 자신의 감정과 사유들이 거기에 있다. 그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슬픔’은 한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성찰의 열쇠와 같은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시는 분명 고통의 언어다. 이렇게 자신의 재앙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시인은 시집 출간 전에 한 지면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를 통해 독자들도 일상의 매끄러운 감정을 걷어내고 자기 자신의 온전한 내면과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겸 시인의 첫 번째 시집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가 출간되었다. 평론가·소설가로도 활동하는 시인은 문학이라는 장르 안에서 쉽게 ‘익숙한 것’으로 변해 버리는 풍경과 감정들을 ‘낯선 것’, 즉 가공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것으로 보존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는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통해 특정한 형태 안에 갇혀 있는 말들을 일상적인 공간에 풀어주고, 그것이 우리 모두와 만나게 해 주었다. 이번에 펴내는 시집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에서도 시인은 그러한 언어적 자유로 구성된 풍경들을 담았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단어인 ‘슬픔’은 우리를 쉽게 울게 하거나 감상에 빠지게 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하지만 우리 곁에 늘 함께 존재하는 무한한 시공간과 평범한 일상 사이에 생긴 균열을 의미한다. 시인이 ‘슬픔’이라고 명명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가 가장 낯설게 여겼던, 하지만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우리 자신의 감정과 사유들이 거기에 있다. 그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슬픔’은 한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성찰의 열쇠와 같은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시는 분명 고통의 언어다. 이렇게 자신의 재앙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시인은 시집 출간 전에 한 지면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를 통해 독자들도 일상의 매끄러운 감정을 걷어내고 자기 자신의 온전한 내면과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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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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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이름의 형벌을 넘어서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사내는 100년 전 프라하의 카프카가 그러했듯이 낮에는 생계를 위해 몸부림치고, 밤이 되면 "책상에 앉아"(「낮달」) 어둠과 고독 속에서 "하루 종일 차오른 슬픔"(「나의 사료」)을 되새기면서 글을 쓴다. 빛을 두려워하는 심해어처럼 그는 "다시 시작될 내일이 두려워/쏟아지는 졸음을 애써 쫓으며 밤을/연장해"(「병(病)」) 나가면서 밤마다 언어의 '집'을 짓는다. 어둠이 실존의 배후가 되는 오직 그 짧은 시간 동안에만 사내는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된다. "홀로 환해지는 것"(「낮달」), 그것은 휘황찬란한 '낮'의 세계를 채우고 있는 빛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낮'의 세계에서는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 드러내는 존재의 빛, 즉 어둠의 빛을 의미한다. 사내는 "반백 년"(「루틴」)을 살아왔으나 한 번도 자신이 '살다'의 주체로, 그러니까 자신의 의지대로 산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다의 숙명으로/살아온 나"(「레퀴엠」)라는 진술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숙명의 힘에 떠밀려 이곳에 도달했으니, 그에게 삶이란 "버티는 생"(「구름의 경전」)이거나 기껏해야 "살아냄"(「변신」)일 따름이다. 그에게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사내에게는 돌아갈 곳은 있으나 마음을 누일 곳, 즉 실존의 거소(居巢)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주소도 없는/무허가 건물"(「수취인 불명」)에 비유한다. 무허가 건물이란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존재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허가 건물'로서의 삶은 부재로서의 삶, 즉 삶이 되지 못하는 삶이다. 그가 밤마다 짓는 '언어의 집'은, 따라서 현실에서 확인되지 않는 존재감, 요컨대 실존적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적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실감하지 못하는 존재감을 언어의 세계를 통해 확인받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글'을 통해 실존의 부재를 보상받으려는 사내의 노력은 실패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사내는 시집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특히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빌려 존재감의 부재, 그 부재를 보상받으려는 노력이 실패로 귀결되는 좌절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 이 실패로 인해 김겸의 시는 삶과 운명, 아니 운명적인 삶을 향한 처절한 '모질음'(「prayer」)이 된다.
방 한구석에 세워진 옷걸이엔
낡은 점퍼나 무릎 나온 바지가
걸려 있기 마련이지요
아버지의 낡은 외투도
불행과 우울의
독한 담뱃진이 눌어붙은 채
항상 거기에
목을 매달고 있었지요
견고한 시간의 벽을
가볍게 뛰어넘어
아버지처럼
어느 날 옷걸이가
그렇게 서 있는 거예요
얼떨결에 인사를 했지 뭐예요
아버지 여기서 뭐 하세요
너의 불운을 날마다
지켜보느라 여기 서 있단다
옷걸이에 매달린 옷깃
속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 「변신」 부분(본문 32~34페이지)
사내의 일생은 "어떡하지, 어떡하지, 가 나를 허물고 다시 세워 여기까지 데리고"(「귀로」) 왔다. "어떡하지"라는 말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운명적 삶에 대해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던 듯하다. 그 운명의 무게가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사내는 음울한 목소리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낮달」)라고 되묻는다. 김겸의 시에서 한 개인의 삶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는 그의 시가 한편으로는 '시간'의 계열을,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의 계열을 중심으로 실존의 부재에 대해 진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용시 「변신」은 '시간'의 층위에서 사내의 질문에 응답하고 있다. 요컨대 "아버지의 낡은 외투도/불행과 우울의/독한 담뱃진이 눌어붙은 채/항상 거기에/목을 매달고 있었지요"라는 진술은 사내의 불행이 가계(家系)를 따라 이어진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초독(楚毒)의 연대기"와 "능욕의 유전자"를 통해 사내에게 상속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낡은 점퍼나 무릎 나온 바지"로 살았던 아버지가 "견고한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 아들, 즉 사내의 '불운'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사내가 경험하고 있는 결핍감이 과거에 대한 상상, 그러니까 시인 백석이 유년의 아름다웠던 원형적 시간을 회상하면서 불행한 현재를 견뎠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르마콘-시간」은 사내의 이러한 실존적 시간 감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과거는 먹이가 되고/미래는 그물이 되네"나 "어제 아래 오늘/최악 아래 최악"이라는 진술처럼 '시간'은 결코 사내의 편이 아니다. 특히 그가 겪고 있는 불행이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된 것이라는 사실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불행할 운명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절망감은 사내를 '죽음'의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으니, 그의 실존은 삶과 죽음 사이의 어딘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미확인 물체 같다,
지금껏 살아온 나라는 것이
그 어떤 것도 나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
누군가는 나에게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얘기했지만
그것은 가당찮은 위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확인 물체 같다,
나라는 피조물은
"전 믿어요. 천사가 필요해서 데려가셨다고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자신이 믿는 신과 맺은 타협
이 말을 들은 자식을 잃은 또 다른 부모의 반론
"천사가 필요하면 천사를 만들면 되죠."
한 번도 이렇게 일갈해 보지 못한
충성스러운 신민
수많은 비극은 나를 한 번도 거른 적 없고
갈 곳 없는 행운마저 나를 피해 가는 필사적 광경
신은 사디스트라고 말하고 싶어도
스스로 메저키스트임을 자처하며 침묵했던 시간들
거기서 피어난 버섯 같은 비극들
날마다 슬픔의 밥을 먹고도
아무런 증명도 얻지 못한다
미확인 물체 같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떠돌이별
그 위에 올라탄
내가 만든 나의 천사
내가 만든 우주만큼 큰 우주
-「증명 불가」전문(본문 110~112페이지)
'달'은 '밤'의 종족이다. 그것은 어둠을 배경으로 빛나는 존재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낮달'은 계절을 잘못 찾아온 존재라는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시인은 현실에서 실존의 근거를 찾지 못한, 그리하여 현실을 "유형의 시간"(「마음의 지평선」)으로 경험하는 자신의 운명을 '낮달'(「낮달」)에 비유한다. '밤'의 종족인 달은 '낮'의 세계에서 시민권이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빛'의 세계에 '어둠'의 자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민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있지만 소용에 닿지 못하는 것"이거나 "쓸모없음을 열심으로 증거하는 것"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확인받지 못하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을 '낮달'이라는 사물을 통해 환기하고 있다. 물론, 이 불합리한 상황을 "때를 잘못 만났다"라고, 그러니까 "밤이 오면 광명할 것"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겸의 시에서 그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시인은 이처럼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자신의 유령적 삶을 가리켜 "미확인 물체"(「증명 불가」)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알지 못한다.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된다는 것은 말을 해도 그것이 말이 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영역 모두에서 추방된 상태, 그리하여 한 인간이 무(無)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 상태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처를 핥으며/내 피를 내가 마시며/그렇게 만든/꿈의 카타콤,/내 전장의 참호, 씀"(「것이,」)이라는 진술처럼 글을 쓰는 것이 전부이다. 왜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인용시에 '아이'와 관련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먼저, "누군가는 나에게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를 얘기했지만"이라는 문장. 알다시피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어려서부터 자폐증을 앓고 있는 히카리라는 아들이 있다.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던 히카리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본 오에 겐자부로가 음악 선생님을 초빙하여 아들에게 피아노와 기보법을 가르쳤고, 그 결과 중증장애인이었던 히카리가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영화 〈래빗 홀〉에 나오는 대사("천사가 필요하면 천사를 만들면 되죠."). 〈래빗 홀〉은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한 부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실의 슬픔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그런데 이들 두 사례 앞에서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한 번도 이렇게 일갈해 보지 못한/충성스러운 신민"이라고 규정한다. 누적된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세상에 맞서는 법을 상실한 시인이 선택한 것은 오에 겐자부로와 〈래빗 홀〉의 경우와 달리 스스로를 '메저키스트'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백미러에 어른거릴 때마다
수고와 헛수고는 정거장으로
사이좋게 이어져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비탈을 오른다
패배를 자인하는 것은 쉽지만
재귀되는 비난은
느리게 느리게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처럼
불행을 재생한다
도로에 난데없이 나타난 강아지처럼
서로의 만남이 재앙의 시발이었던
비운의 시간표
매번 늦고 매번 헐떡이게 하는
최악의 노선도
뙤약볕 내리쬐는 책망의 정거장 지나
비바람 몰아치는 비난의 정거장 향해 오른다
당신이 휘두르는 혀의 채찍에
노새처럼 기어오르는
불쌍한 피학 기계
이제는 더 오르지 못할 것 같다고
모질음 낼 때
불타는 노을이
조금만 더 참으면
이 한살이도 끝이 보인다고
바알간 빛을 던져
엉덩이를 밀어 올린다
악다구니의 생에 갇혀
홀로 버둥대는
기억되지 못할
저 외진 안간힘
-「늙은 마을버스의 노래」전분(본문 37~39페이지)
사내에게 삶은 '속죄의 형식'으로 경험된다. 그에게 삶은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어,/할 때마다 통제할 수 없는 지점이 열"리는 불행,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동인형처럼 복창했던/인내와 기망의 약속"(「속죄의 형식」)을 반복하는 일이다. 앞에서 우리는 사내에게 '시간'이 "과거는 먹이가 되고/미래는 그물이 되네"(「파르마콘-시간」)처럼 진퇴양난의 "구원 없는 생"(「누이 생각」)으로 인식되며, 그 속에서 그가 "근거 없는 호사(好事)를 바라기보다/어김없는 다마(多魔)를 믿"(「극적인 조우」)으며 살아왔음을 확인했다. "세상에 언제나 뒤처지는/나"(「오전의 식당」)로서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삶은 "조락하는 생"(「연어에게」)의 과정이었던 듯하다. 사내는 종종 이러한 자신의 실존적 내면을 '메저키스트'라고 명명하는데, 이로 인해 사내와 세상은 "가학과 피학의 사슬"(「속죄의 형식」) 관계를 형성한다.
김겸의 시는 이러한 유령적 삶의 슬픔과 고독을 다양한 사물을 통해 변주한다. 앞에서 살펴본 "미확인 물체"(「증명불가」)나 "무허가 건물"(「수취인 불명」)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인용시 「늙은 마을버스의 노래」에서 시인은 '늙은 마을버스'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다시 한 번 세상의 가장자리로 내밀리며 살아온 자신의 불행한 삶을 드러낸다. 시인은 모질음을 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 사이를 느리게 흘러가는 낡은 마을버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힘겹게 비탈을 오르는 모습은 "기억되지 못할/저 외진 안간힘"으로 살아온 자신의 생애를 닮았고, "다시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과 "이제는 더 오르지 못할 것 같다"라는 회한과 힘겨움에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이 중첩된다. 또한 "매번 늦고 매번 헐떡이게 하는/최악의 노선도"는 '치욕'과 '굴욕'을 "견디고 견디면"(「나의 사료」)서 살아온 시인의 일생을 닮았다.
내상(內傷)을 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은 이 세계의 사물과 풍경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한다. 김겸의 시는 삶의 부재라는 질병으로 세계를 검게 물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의 시가 보여주는 다양한 증상들은 그의 삶이 하나의 질병, 즉 삶/존재의 부재라는 단일한 문제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이응」에서 화자는 '첫소리 이응'을 자신에게 찾아오는 "악순환의 고리"로 받아들인다. 또한 「악수」에서 그는 "저 속이 내 속 같아 마침내 느껴 우는, 아, 뜨거운 악수"라는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낡은 다리'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한다. 「시계에 관한 명상」에서는 돌아가는 '시계'를 보면서 "치욕을 먹고/돌아"가는 자신의 삶을 읽어내고, 「오전의 식당」에서는 오래된 '고물 라디오'와 때가 아닌 시간에 밥을 먹는 여자의 모습에서 "세상에 언제나 뒤처지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는 세상의 모든 후락한 풍경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존재감의 결핍은 휴일 오후에 찾은 바다에서 파도 소리를 "늙은 작부"가 자신에게 하는 핀잔으로 경험하는 장면, 그리하여 자신을 "찢어진 가방"(「소멸에 대하여」)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 「설원(雪原)」 전문(본문 18~19페이지)
시인의 등단작인 이 시에는 사내의 삶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일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투영한 작품으로 읽힌다. 실제로 눈으로 뒤덮인 "막막한 눈밭"에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에게 쓰고 싶다"라는 화자의 진술은 시인으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는 존재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 그 해석은 '설원=너'를 재현적인 층위에서 눈 덮인 풍경으로 간주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요컨대 그 해석은 "너의 불운"이나 "너의 허기진 영혼" 같은 표현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선 이 시에서 '설원'이라는 기호가 재현과 비유의 두 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먼저 '설원'은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라는 일상적 대상을 지시한다. 이것으로 인해 이 시는 특유의 겨울 풍경, 그 풍경을 마주하고 선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으로 읽힌다. 다음으로 '설원'은 '너'를, 풍경에 대한 의인화가 아니라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특정한 존재를 가리킨다. 이 인물의 정체는 "순일한 마음", "영어(囹圄)에 갇힌 너",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내 먹물 같은 설움" 등이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시인이 자신의 필명을 '김겸'으로 정한 내력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시인은 '김겸'이라는 필명이 자신의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에 나오는 아들의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3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소설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승호라는 인물이 자폐아인 아들 겸이와 함께 죽음을 향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으로서 주인공 승호가 직면한 불행한 현실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 이야기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이야기와 대부분 일치한다. 이처럼 소설가 김정남의 문학과 삶 사이에는 아주 약간의 허구만이 개입되어 있는데, '김겸'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하는 이번 시집에서는 그 약간의 허구마저도 배제되어 있는 듯하다. 「증명 불가」에 오에 겐자부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설원(雪原)」은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을 시적 형식으로 다시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설원(雪原)」으로 돌아가자. 시인은 자신을 '쓰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지금 눈가루가 휘몰아치는 눈밭이 펼쳐져 있으니, 그는 그 설원 위에 "정방향의 칸"을 만들어 '너'를, '너'에 대해, '너'에게 무언가를 쓰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쓰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것이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한 것인지,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한 것인지, 혹은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한 것인지 자문(自問)하고 있다. 이 물음은 2연에서 "깨어나지 못한 너의/침묵"에 대한 것인지,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한 것인지, "끼니마다/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너의 차갑게 굳어진 습(習)"에 대한 것인지, 라는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요컨대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순백의 설원은 그로 하여금 자폐아인 아들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이 이미지의 연상작용으로 인해 무언가를 쓰려는 시인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너를 쓰고 싶다"라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시인은 "너를 쓰고 싶다"라는 진술을 반복하는 것일까? 추측건대 그것은 그가 자신의 아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에 오랫동안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글을 쓰려는 시인의 욕망은 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혈육과 소통하기를 갈망하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소통에 대한 시인의 욕망은 쉽사리 성취되지 않는다. 3연에서 시인은 그 불가능성을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너를 쓸 수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소통이 불가능한 원인을 '너'가 아닌 '나'에게서, '나'의 무능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1연과 2연에서 소통에의 욕망을 표상하던 "정방형의 칸"이 3연에서는 "그물 같은 붉은 칸"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 지점에 이르러 시인은 "너의 눈발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라는 진술처럼 아들을 향했던 자신의 소통에의 욕망이 순수한 세계에 "그물 같은 붉은 칸", 즉 강제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려던 폭력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깨달음과 동시에 '너=아들'은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이라는 표현처럼 시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타자성의 세계로 인식된다. 1~2연에서의 소통 욕망이 타자인 아들을 자신의 세계로 편입시키려던 동일화의 의지였다면, 3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설원'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윤리적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것이야말로 '너=아들'만의 고유한 세계인 것이다.
앞서 걷는 아들의 뒷모습을 본다
터덜터덜 내딛는 저 팔자걸음
어디선가 많이 본 것인데
저 속에 틀림없이
내 아버지의 뒷모습이
박혀 있다
저 뒷전으로 이어진
소의 등허리같이
고집 세면서도 부드러운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
- 「뒷모습」 전문(본문 135페이지)
시인은 첫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아들의 '뒷모습'에 관한 시를 배치하고 있다. 그는 우연히 목격한 아들의 '뒷모습'에서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시인은 결코 볼 수 없겠지만, 그것은 시인 자신의 뒷모습과도 상당히 닮았을 것이다. 이 뒷모습을 통해 시인은 '아버지-나-아들'로 연결되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의 계보를 확인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앞에서 우리는 불행이 '좀비'처럼 들러붙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한 사내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아왔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전 계열에 걸쳐 지속되는 불행은 그의 삶을 "구원 없는 생"(「누이 생각」)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시인이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불행의 기원이 현실에서의 소외라는 사회적 원인에서 발생한 것임을 추론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런 절망의 끝자락에서 시인이 아들의 타자성을 소통 불능이 부정적 현실이 아니라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설원(雪原)」)처럼 특이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뒷모습'을 통한 혈통의 연속성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시인이 김정남이라는 자신의 이름 대신 '김겸'이라는 아들의 이름을 필명으로 선택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이 김정남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에서 주인공 승호는 아들과 동반자살을 하기 위해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고향을 다시 찾는다. 7번 국도에 이어진 고향 속초는 월남한 실향민 아버지가 터전을 잡고 살던 곳으로, 주인공은 죽음을 향한 이 여행에서 자신의 상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가 여행의 마지막에서 "생은 난처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오래된 가르침을 기억하라"라는 호피 족의 말을 떠올리면서 "충분치는 않지만 생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비록 유예된 형태로나마 자신의 삶과 화해하려는 몸짓이라고 읽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은 이번 시집의 마지막에서 '아들의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읽어냄으로써 두 사람을 잇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의 힘을 발견한다. 자신의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 계보에는, 비록 생략되어 있지만, '나'의 존재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가 매개하는 이 연속성은 이들 세 사람의 화해, 즉 시인이 '아들'과 '아버지'를 상처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긍정하는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의 필명을 '김겸'으로 결정했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아들의 목소리로 발화하겠다는, 아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사내는 100년 전 프라하의 카프카가 그러했듯이 낮에는 생계를 위해 몸부림치고, 밤이 되면 "책상에 앉아"(「낮달」) 어둠과 고독 속에서 "하루 종일 차오른 슬픔"(「나의 사료」)을 되새기면서 글을 쓴다. 빛을 두려워하는 심해어처럼 그는 "다시 시작될 내일이 두려워/쏟아지는 졸음을 애써 쫓으며 밤을/연장해"(「병(病)」) 나가면서 밤마다 언어의 '집'을 짓는다. 어둠이 실존의 배후가 되는 오직 그 짧은 시간 동안에만 사내는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된다. "홀로 환해지는 것"(「낮달」), 그것은 휘황찬란한 '낮'의 세계를 채우고 있는 빛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낮'의 세계에서는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 드러내는 존재의 빛, 즉 어둠의 빛을 의미한다. 사내는 "반백 년"(「루틴」)을 살아왔으나 한 번도 자신이 '살다'의 주체로, 그러니까 자신의 의지대로 산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다의 숙명으로/살아온 나"(「레퀴엠」)라는 진술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숙명의 힘에 떠밀려 이곳에 도달했으니, 그에게 삶이란 "버티는 생"(「구름의 경전」)이거나 기껏해야 "살아냄"(「변신」)일 따름이다. 그에게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사내에게는 돌아갈 곳은 있으나 마음을 누일 곳, 즉 실존의 거소(居巢)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주소도 없는/무허가 건물"(「수취인 불명」)에 비유한다. 무허가 건물이란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존재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허가 건물'로서의 삶은 부재로서의 삶, 즉 삶이 되지 못하는 삶이다. 그가 밤마다 짓는 '언어의 집'은, 따라서 현실에서 확인되지 않는 존재감, 요컨대 실존적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적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실감하지 못하는 존재감을 언어의 세계를 통해 확인받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글'을 통해 실존의 부재를 보상받으려는 사내의 노력은 실패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사내는 시집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특히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빌려 존재감의 부재, 그 부재를 보상받으려는 노력이 실패로 귀결되는 좌절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 이 실패로 인해 김겸의 시는 삶과 운명, 아니 운명적인 삶을 향한 처절한 '모질음'(「prayer」)이 된다.
방 한구석에 세워진 옷걸이엔
낡은 점퍼나 무릎 나온 바지가
걸려 있기 마련이지요
아버지의 낡은 외투도
불행과 우울의
독한 담뱃진이 눌어붙은 채
항상 거기에
목을 매달고 있었지요
견고한 시간의 벽을
가볍게 뛰어넘어
아버지처럼
어느 날 옷걸이가
그렇게 서 있는 거예요
얼떨결에 인사를 했지 뭐예요
아버지 여기서 뭐 하세요
너의 불운을 날마다
지켜보느라 여기 서 있단다
옷걸이에 매달린 옷깃
속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 「변신」 부분(본문 32~34페이지)
사내의 일생은 "어떡하지, 어떡하지, 가 나를 허물고 다시 세워 여기까지 데리고"(「귀로」) 왔다. "어떡하지"라는 말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운명적 삶에 대해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던 듯하다. 그 운명의 무게가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사내는 음울한 목소리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낮달」)라고 되묻는다. 김겸의 시에서 한 개인의 삶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는 그의 시가 한편으로는 '시간'의 계열을,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의 계열을 중심으로 실존의 부재에 대해 진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용시 「변신」은 '시간'의 층위에서 사내의 질문에 응답하고 있다. 요컨대 "아버지의 낡은 외투도/불행과 우울의/독한 담뱃진이 눌어붙은 채/항상 거기에/목을 매달고 있었지요"라는 진술은 사내의 불행이 가계(家系)를 따라 이어진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초독(楚毒)의 연대기"와 "능욕의 유전자"를 통해 사내에게 상속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낡은 점퍼나 무릎 나온 바지"로 살았던 아버지가 "견고한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 아들, 즉 사내의 '불운'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사내가 경험하고 있는 결핍감이 과거에 대한 상상, 그러니까 시인 백석이 유년의 아름다웠던 원형적 시간을 회상하면서 불행한 현재를 견뎠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르마콘-시간」은 사내의 이러한 실존적 시간 감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과거는 먹이가 되고/미래는 그물이 되네"나 "어제 아래 오늘/최악 아래 최악"이라는 진술처럼 '시간'은 결코 사내의 편이 아니다. 특히 그가 겪고 있는 불행이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된 것이라는 사실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불행할 운명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절망감은 사내를 '죽음'의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으니, 그의 실존은 삶과 죽음 사이의 어딘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미확인 물체 같다,
지금껏 살아온 나라는 것이
그 어떤 것도 나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
누군가는 나에게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얘기했지만
그것은 가당찮은 위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확인 물체 같다,
나라는 피조물은
"전 믿어요. 천사가 필요해서 데려가셨다고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자신이 믿는 신과 맺은 타협
이 말을 들은 자식을 잃은 또 다른 부모의 반론
"천사가 필요하면 천사를 만들면 되죠."
한 번도 이렇게 일갈해 보지 못한
충성스러운 신민
수많은 비극은 나를 한 번도 거른 적 없고
갈 곳 없는 행운마저 나를 피해 가는 필사적 광경
신은 사디스트라고 말하고 싶어도
스스로 메저키스트임을 자처하며 침묵했던 시간들
거기서 피어난 버섯 같은 비극들
날마다 슬픔의 밥을 먹고도
아무런 증명도 얻지 못한다
미확인 물체 같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떠돌이별
그 위에 올라탄
내가 만든 나의 천사
내가 만든 우주만큼 큰 우주
-「증명 불가」전문(본문 110~112페이지)
'달'은 '밤'의 종족이다. 그것은 어둠을 배경으로 빛나는 존재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낮달'은 계절을 잘못 찾아온 존재라는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시인은 현실에서 실존의 근거를 찾지 못한, 그리하여 현실을 "유형의 시간"(「마음의 지평선」)으로 경험하는 자신의 운명을 '낮달'(「낮달」)에 비유한다. '밤'의 종족인 달은 '낮'의 세계에서 시민권이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빛'의 세계에 '어둠'의 자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민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있지만 소용에 닿지 못하는 것"이거나 "쓸모없음을 열심으로 증거하는 것"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확인받지 못하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을 '낮달'이라는 사물을 통해 환기하고 있다. 물론, 이 불합리한 상황을 "때를 잘못 만났다"라고, 그러니까 "밤이 오면 광명할 것"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겸의 시에서 그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시인은 이처럼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자신의 유령적 삶을 가리켜 "미확인 물체"(「증명 불가」)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알지 못한다.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된다는 것은 말을 해도 그것이 말이 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영역 모두에서 추방된 상태, 그리하여 한 인간이 무(無)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 상태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처를 핥으며/내 피를 내가 마시며/그렇게 만든/꿈의 카타콤,/내 전장의 참호, 씀"(「것이,」)이라는 진술처럼 글을 쓰는 것이 전부이다. 왜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인용시에 '아이'와 관련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먼저, "누군가는 나에게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를 얘기했지만"이라는 문장. 알다시피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어려서부터 자폐증을 앓고 있는 히카리라는 아들이 있다.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던 히카리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본 오에 겐자부로가 음악 선생님을 초빙하여 아들에게 피아노와 기보법을 가르쳤고, 그 결과 중증장애인이었던 히카리가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영화 〈래빗 홀〉에 나오는 대사("천사가 필요하면 천사를 만들면 되죠."). 〈래빗 홀〉은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한 부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실의 슬픔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그런데 이들 두 사례 앞에서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한 번도 이렇게 일갈해 보지 못한/충성스러운 신민"이라고 규정한다. 누적된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세상에 맞서는 법을 상실한 시인이 선택한 것은 오에 겐자부로와 〈래빗 홀〉의 경우와 달리 스스로를 '메저키스트'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백미러에 어른거릴 때마다
수고와 헛수고는 정거장으로
사이좋게 이어져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비탈을 오른다
패배를 자인하는 것은 쉽지만
재귀되는 비난은
느리게 느리게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처럼
불행을 재생한다
도로에 난데없이 나타난 강아지처럼
서로의 만남이 재앙의 시발이었던
비운의 시간표
매번 늦고 매번 헐떡이게 하는
최악의 노선도
뙤약볕 내리쬐는 책망의 정거장 지나
비바람 몰아치는 비난의 정거장 향해 오른다
당신이 휘두르는 혀의 채찍에
노새처럼 기어오르는
불쌍한 피학 기계
이제는 더 오르지 못할 것 같다고
모질음 낼 때
불타는 노을이
조금만 더 참으면
이 한살이도 끝이 보인다고
바알간 빛을 던져
엉덩이를 밀어 올린다
악다구니의 생에 갇혀
홀로 버둥대는
기억되지 못할
저 외진 안간힘
-「늙은 마을버스의 노래」전분(본문 37~39페이지)
사내에게 삶은 '속죄의 형식'으로 경험된다. 그에게 삶은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어,/할 때마다 통제할 수 없는 지점이 열"리는 불행,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동인형처럼 복창했던/인내와 기망의 약속"(「속죄의 형식」)을 반복하는 일이다. 앞에서 우리는 사내에게 '시간'이 "과거는 먹이가 되고/미래는 그물이 되네"(「파르마콘-시간」)처럼 진퇴양난의 "구원 없는 생"(「누이 생각」)으로 인식되며, 그 속에서 그가 "근거 없는 호사(好事)를 바라기보다/어김없는 다마(多魔)를 믿"(「극적인 조우」)으며 살아왔음을 확인했다. "세상에 언제나 뒤처지는/나"(「오전의 식당」)로서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삶은 "조락하는 생"(「연어에게」)의 과정이었던 듯하다. 사내는 종종 이러한 자신의 실존적 내면을 '메저키스트'라고 명명하는데, 이로 인해 사내와 세상은 "가학과 피학의 사슬"(「속죄의 형식」) 관계를 형성한다.
김겸의 시는 이러한 유령적 삶의 슬픔과 고독을 다양한 사물을 통해 변주한다. 앞에서 살펴본 "미확인 물체"(「증명불가」)나 "무허가 건물"(「수취인 불명」)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인용시 「늙은 마을버스의 노래」에서 시인은 '늙은 마을버스'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다시 한 번 세상의 가장자리로 내밀리며 살아온 자신의 불행한 삶을 드러낸다. 시인은 모질음을 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 사이를 느리게 흘러가는 낡은 마을버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힘겹게 비탈을 오르는 모습은 "기억되지 못할/저 외진 안간힘"으로 살아온 자신의 생애를 닮았고, "다시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과 "이제는 더 오르지 못할 것 같다"라는 회한과 힘겨움에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이 중첩된다. 또한 "매번 늦고 매번 헐떡이게 하는/최악의 노선도"는 '치욕'과 '굴욕'을 "견디고 견디면"(「나의 사료」)서 살아온 시인의 일생을 닮았다.
내상(內傷)을 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은 이 세계의 사물과 풍경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한다. 김겸의 시는 삶의 부재라는 질병으로 세계를 검게 물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의 시가 보여주는 다양한 증상들은 그의 삶이 하나의 질병, 즉 삶/존재의 부재라는 단일한 문제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이응」에서 화자는 '첫소리 이응'을 자신에게 찾아오는 "악순환의 고리"로 받아들인다. 또한 「악수」에서 그는 "저 속이 내 속 같아 마침내 느껴 우는, 아, 뜨거운 악수"라는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낡은 다리'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한다. 「시계에 관한 명상」에서는 돌아가는 '시계'를 보면서 "치욕을 먹고/돌아"가는 자신의 삶을 읽어내고, 「오전의 식당」에서는 오래된 '고물 라디오'와 때가 아닌 시간에 밥을 먹는 여자의 모습에서 "세상에 언제나 뒤처지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는 세상의 모든 후락한 풍경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존재감의 결핍은 휴일 오후에 찾은 바다에서 파도 소리를 "늙은 작부"가 자신에게 하는 핀잔으로 경험하는 장면, 그리하여 자신을 "찢어진 가방"(「소멸에 대하여」)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 「설원(雪原)」 전문(본문 18~19페이지)
시인의 등단작인 이 시에는 사내의 삶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일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투영한 작품으로 읽힌다. 실제로 눈으로 뒤덮인 "막막한 눈밭"에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에게 쓰고 싶다"라는 화자의 진술은 시인으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는 존재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 그 해석은 '설원=너'를 재현적인 층위에서 눈 덮인 풍경으로 간주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요컨대 그 해석은 "너의 불운"이나 "너의 허기진 영혼" 같은 표현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선 이 시에서 '설원'이라는 기호가 재현과 비유의 두 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먼저 '설원'은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라는 일상적 대상을 지시한다. 이것으로 인해 이 시는 특유의 겨울 풍경, 그 풍경을 마주하고 선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으로 읽힌다. 다음으로 '설원'은 '너'를, 풍경에 대한 의인화가 아니라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특정한 존재를 가리킨다. 이 인물의 정체는 "순일한 마음", "영어(囹圄)에 갇힌 너",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내 먹물 같은 설움" 등이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시인이 자신의 필명을 '김겸'으로 정한 내력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시인은 '김겸'이라는 필명이 자신의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에 나오는 아들의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3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소설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승호라는 인물이 자폐아인 아들 겸이와 함께 죽음을 향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으로서 주인공 승호가 직면한 불행한 현실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 이야기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이야기와 대부분 일치한다. 이처럼 소설가 김정남의 문학과 삶 사이에는 아주 약간의 허구만이 개입되어 있는데, '김겸'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하는 이번 시집에서는 그 약간의 허구마저도 배제되어 있는 듯하다. 「증명 불가」에 오에 겐자부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설원(雪原)」은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을 시적 형식으로 다시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설원(雪原)」으로 돌아가자. 시인은 자신을 '쓰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지금 눈가루가 휘몰아치는 눈밭이 펼쳐져 있으니, 그는 그 설원 위에 "정방향의 칸"을 만들어 '너'를, '너'에 대해, '너'에게 무언가를 쓰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쓰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것이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한 것인지,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한 것인지, 혹은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한 것인지 자문(自問)하고 있다. 이 물음은 2연에서 "깨어나지 못한 너의/침묵"에 대한 것인지,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한 것인지, "끼니마다/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너의 차갑게 굳어진 습(習)"에 대한 것인지, 라는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요컨대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순백의 설원은 그로 하여금 자폐아인 아들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이 이미지의 연상작용으로 인해 무언가를 쓰려는 시인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너를 쓰고 싶다"라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시인은 "너를 쓰고 싶다"라는 진술을 반복하는 것일까? 추측건대 그것은 그가 자신의 아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에 오랫동안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글을 쓰려는 시인의 욕망은 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혈육과 소통하기를 갈망하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소통에 대한 시인의 욕망은 쉽사리 성취되지 않는다. 3연에서 시인은 그 불가능성을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너를 쓸 수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소통이 불가능한 원인을 '너'가 아닌 '나'에게서, '나'의 무능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1연과 2연에서 소통에의 욕망을 표상하던 "정방형의 칸"이 3연에서는 "그물 같은 붉은 칸"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 지점에 이르러 시인은 "너의 눈발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라는 진술처럼 아들을 향했던 자신의 소통에의 욕망이 순수한 세계에 "그물 같은 붉은 칸", 즉 강제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려던 폭력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깨달음과 동시에 '너=아들'은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이라는 표현처럼 시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타자성의 세계로 인식된다. 1~2연에서의 소통 욕망이 타자인 아들을 자신의 세계로 편입시키려던 동일화의 의지였다면, 3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설원'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윤리적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것이야말로 '너=아들'만의 고유한 세계인 것이다.
앞서 걷는 아들의 뒷모습을 본다
터덜터덜 내딛는 저 팔자걸음
어디선가 많이 본 것인데
저 속에 틀림없이
내 아버지의 뒷모습이
박혀 있다
저 뒷전으로 이어진
소의 등허리같이
고집 세면서도 부드러운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
- 「뒷모습」 전문(본문 135페이지)
시인은 첫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아들의 '뒷모습'에 관한 시를 배치하고 있다. 그는 우연히 목격한 아들의 '뒷모습'에서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시인은 결코 볼 수 없겠지만, 그것은 시인 자신의 뒷모습과도 상당히 닮았을 것이다. 이 뒷모습을 통해 시인은 '아버지-나-아들'로 연결되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의 계보를 확인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앞에서 우리는 불행이 '좀비'처럼 들러붙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한 사내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아왔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전 계열에 걸쳐 지속되는 불행은 그의 삶을 "구원 없는 생"(「누이 생각」)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시인이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불행의 기원이 현실에서의 소외라는 사회적 원인에서 발생한 것임을 추론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런 절망의 끝자락에서 시인이 아들의 타자성을 소통 불능이 부정적 현실이 아니라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설원(雪原)」)처럼 특이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뒷모습'을 통한 혈통의 연속성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시인이 김정남이라는 자신의 이름 대신 '김겸'이라는 아들의 이름을 필명으로 선택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이 김정남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에서 주인공 승호는 아들과 동반자살을 하기 위해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고향을 다시 찾는다. 7번 국도에 이어진 고향 속초는 월남한 실향민 아버지가 터전을 잡고 살던 곳으로, 주인공은 죽음을 향한 이 여행에서 자신의 상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가 여행의 마지막에서 "생은 난처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오래된 가르침을 기억하라"라는 호피 족의 말을 떠올리면서 "충분치는 않지만 생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비록 유예된 형태로나마 자신의 삶과 화해하려는 몸짓이라고 읽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은 이번 시집의 마지막에서 '아들의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읽어냄으로써 두 사람을 잇는 "무디고 선한 유전자"의 힘을 발견한다. 자신의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 계보에는, 비록 생략되어 있지만, '나'의 존재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가 매개하는 이 연속성은 이들 세 사람의 화해, 즉 시인이 '아들'과 '아버지'를 상처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긍정하는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의 필명을 '김겸'으로 결정했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아들의 목소리로 발화하겠다는, 아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목차
목차
시인의 말·5
1부-구름의 경전
귀로·15
낮달·16
설원(雪原)·18
번역가의 고독·20
The real·22
섬·24
이응·26
구름의 경전·28
숨은 신·30
변신·32
2부-수선화
늙은 마을버스의 노래·37
불망(不忘)·40
수선화·42
극적인 조우·44
말 달리자·46
숨·48
춘설(春雪)·50
prayer·52
나의 사료·54
개화·56
연어에게·58
3부-심야우중
레퀴엠·61
소주 달력처럼·64
호모 메모리즈·66
파르마콘 - 시간·68
숲에 들다·70
심야우중·72
것이,·74
다른 시간, 다른 곳에·77
돌본다는 것·80
숲의 전언·82
누이 생각·84
4부-마음의 지평선
악수·89
시계에 관한 명상·90
끝물·92
피안·94
오전의 식당·96
탈은폐·98
워커홀릭·100
수취인 불명·102
밤바다·105
마음의 지평선·108
증명 불가·110
5부-뒷모습
루틴·115
비린내·118
소멸에 대하여·119
언제나 해가 지는 쪽으로·122
병(病)·124
뼈대에 대하여·126
잎새들의 행간·128
척,·130
속죄의 형식·132
뒷모습·135
해설 | 고봉준(문학평론가)
삶이라는 이름의 형벌을 넘어서·137
1부-구름의 경전
귀로·15
낮달·16
설원(雪原)·18
번역가의 고독·20
The real·22
섬·24
이응·26
구름의 경전·28
숨은 신·30
변신·32
2부-수선화
늙은 마을버스의 노래·37
불망(不忘)·40
수선화·42
극적인 조우·44
말 달리자·46
숨·48
춘설(春雪)·50
prayer·52
나의 사료·54
개화·56
연어에게·58
3부-심야우중
레퀴엠·61
소주 달력처럼·64
호모 메모리즈·66
파르마콘 - 시간·68
숲에 들다·70
심야우중·72
것이,·74
다른 시간, 다른 곳에·77
돌본다는 것·80
숲의 전언·82
누이 생각·84
4부-마음의 지평선
악수·89
시계에 관한 명상·90
끝물·92
피안·94
오전의 식당·96
탈은폐·98
워커홀릭·100
수취인 불명·102
밤바다·105
마음의 지평선·108
증명 불가·110
5부-뒷모습
루틴·115
비린내·118
소멸에 대하여·119
언제나 해가 지는 쪽으로·122
병(病)·124
뼈대에 대하여·126
잎새들의 행간·128
척,·130
속죄의 형식·132
뒷모습·135
해설 | 고봉준(문학평론가)
삶이라는 이름의 형벌을 넘어서·137
저자
저자
김겸
2002년《현대문학》평론. 2007년《매일신문》 소설. 2021년 《강원일보》 시 등단.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 평론집 『비평의 오쿨루스』 등이 있음.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 평론집 『비평의 오쿨루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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