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그래프(시인수첩 시인선 68)
강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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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운 현실을 견디는 ‘나들’에게 공간을 선물하다
강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크로노그래프』가 출간되었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시인은 이전에 출간한 두 권의 시집(『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내적 동력을 담백한 색감의 시어들로 치환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내밀한 언어와 매혹적인 사유가 결합한 감각적 화폭을 보여주는 시인”(유성호 평론가), “가난한 잠과 꿈을 부풀려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신동옥 시인)와 같은 찬사는 현실적 고통과 시적 색감 사이의 먼 거리를 독창적인 시적 상상력으로 연결해온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나들’을 자신의 비밀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타인’과 ‘나’라는 경계선을 통해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이다.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여러 곳에 출몰하여 국경선을 확인”하는, 그래서 “수많은 감정과 정서, 사유와 인식” 사이에서 “당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당신으로 인해 위로받”(《시인수첩》 2022년 가을호 「시여, ‘나들’을 구원하라」중에서)게 되는 시인의 특별한 손님들이다. 시인이 창조해낸 공간들은 그런 ‘나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현실과의 관계를 끊고 “밤의 동사들”인 자신의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시인이 창조해낸 섬세한 언어의 길을 따라 들어가며, 그동안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나’와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무능한 ‘나들’ 대신 나의 퍼소나들이 힘든 세상에서 선한 공적 정의(구원)를 실현해 주길 소망”하는 시인과 독자의 공통된 소망이 실현될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버거운 현실 속에서 삶의 동력을 찾기 힘들었을 독자들에게, 우리를 해방시키는 “착한 마녀”의 언어를 담은 강순 시인의 시집 『크로노그래프』는 특별한 위로의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강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크로노그래프』가 출간되었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시인은 이전에 출간한 두 권의 시집(『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내적 동력을 담백한 색감의 시어들로 치환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내밀한 언어와 매혹적인 사유가 결합한 감각적 화폭을 보여주는 시인”(유성호 평론가), “가난한 잠과 꿈을 부풀려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신동옥 시인)와 같은 찬사는 현실적 고통과 시적 색감 사이의 먼 거리를 독창적인 시적 상상력으로 연결해온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나들’을 자신의 비밀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타인’과 ‘나’라는 경계선을 통해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이다.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여러 곳에 출몰하여 국경선을 확인”하는, 그래서 “수많은 감정과 정서, 사유와 인식” 사이에서 “당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당신으로 인해 위로받”(《시인수첩》 2022년 가을호 「시여, ‘나들’을 구원하라」중에서)게 되는 시인의 특별한 손님들이다. 시인이 창조해낸 공간들은 그런 ‘나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현실과의 관계를 끊고 “밤의 동사들”인 자신의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시인이 창조해낸 섬세한 언어의 길을 따라 들어가며, 그동안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나’와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무능한 ‘나들’ 대신 나의 퍼소나들이 힘든 세상에서 선한 공적 정의(구원)를 실현해 주길 소망”하는 시인과 독자의 공통된 소망이 실현될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버거운 현실 속에서 삶의 동력을 찾기 힘들었을 독자들에게, 우리를 해방시키는 “착한 마녀”의 언어를 담은 강순 시인의 시집 『크로노그래프』는 특별한 위로의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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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나'의 언어들이 '역사'와 만나는 새로운 방식
잊을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잊었다고 발음해보는 노력처럼, 반어의 형식은 김소월 시인이 「먼 후일」에서 표현했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에 강순 시인의 시가 시간이라는 주제와 반어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은 곧 강순 시인의 서정적 뿌리는 현대성에 대한 체험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내밀한 체험에 기댄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크로노그래프』에서 시인이 지속하려는 "아픈 화법"(「시인의 말」)은 범시대적인 존재론적 고통, 즉 누구나 겪는 필연적인 상실 앞에서 쉽게 확답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세를 암시한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시인이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존재의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컨대 그의 시에서 자기 자신을 피노키오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밤의 나라」)을 만나게 되고, 말을 할 때마다 자라나는 그의 코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기억을 해독하는 어둠 속"에서 나침반을 당신에게 빼앗기고 헤매면서, 조금씩 신체의 절반을 잃어가는 사람을 목격하기도 한다(「한밤에 내가 배달된다」). 이처럼 그의 시에서 반복하는 모티프는 오롯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자기 신체이고 오롯이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기억이다.
가만히 있어도 밤이 우리를 움직인다
동사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합한 말
숨을 내쉬면 네가 썰물처럼 쓸려가고
숨을 들이쉬면 내가 너를 해변에 심어 놓는다
우리는 밀려갔다 밀려왔다 밀었다 당겼다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지구와 달처럼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밤에 슬피 쓰고 있다
-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 부분(본문 19~21쪽)
기억은 존재보다 큰 것이다. 무엇보다 시인은 그러한 기억이 '밤' 혹은 '한밤'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넘쳐 온다고 말한다. 그의 시에서 '밤'은 시간이 움트고 움직이며, 마치 하나의 사역동사인 양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순간이다. 사람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간이 '우리'에게 틈입하여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버리는 현기증의 체험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식으로 불현듯 그리움이 찾아오는 밤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음미할 것은 그리움의 완미한 속도와 이율배반이다. 시인은 어떠한 속도로 그리워하는가. 숨을 내쉬고 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그리움이라면, 그는 '썰물'의 속도로 숨을 내쉬려 한다. 또한 당신을 해변에 심고 자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숨을 들이쉬려 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리움은 씨앗의 속도로 자라고, 썰물의 속도로 빠져나간다. 이 더딘 호흡법은 실은 가쁜 그리움을 피하려는 몸짓이다. 그리움을 견디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추어 보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리움의 이율배반 또한 이 작품은 형상화한다. 당신을 해변에 심어 놓는 손짓을 주목해보자. 그 손짓은 당신이라는 추억이 다시금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따라서 아이러니하게 읽히는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음미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당신을 잊을 수 없다고 발음하는 혀끝과 당신을 떠나보낸다고 발음하는 혀끝 사이에서 어느 쪽이 견딜 만한 것일까. 그는 이 물음을 간직한 채 휘청거리고 있다. "지구와 달처럼" "인력과 원심력"처럼, '우리'의 추억과 현재 사이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슬피 쓰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떠올려야 할 것은 떠나보내려는 각오와 떠나보낼 수 없는 슬픔 사이에서 헤매는 자의 모습이다. 해변에 남는 것은 그의 휘청거리는 발자국이고 슬픈 문장이다.
표제시 「크로노그래프」는 이 시집의 주제와 형식의 본질을 눈여겨보게 한다. 즉 상기하려는 의지와 잊어보려는 노력 사이에서, 그래서 때론 자신을 달래듯 잊었다고 말해보고 그것이 거짓임을 아는 이율배반 속에서 강순 시인의 아픈 화법은 빚어졌다. 그렇다면 강순 시인에게 시간은 관능이다. 이 관능성은 시인이 그리움에 기대어 시간을 가늠하고 시간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요컨대 강순 시인에게 추억한다는 것은 상기의 문제가 아니라 살의 접촉이다. 떠올린다는 것은 애인의 육체를 떠올리는 것이다. 잊는다는 것은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당신의 피부를 느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집의 1부에서 반복하는 존재의 자세이다. 이를 관능의 존재론이라고 명명한다면, 관능의 존재론이란 삶의 매 순간을 접촉으로 번역해보는 형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접촉은 시간을 배반한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의 접촉조차 시간을 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관능적인 접촉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산다. 마찬가지로 강순 시인의 시에서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은 당신과의 관계에 깃든 희로애락의 서사를 떠올린다는 의미보다 아름다웠던 접촉의 순간을 떠올린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 물고기 밥이 되기 전에 그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 그러니 애인아 자본주의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하고 에로틱한 허벅지를 보여 줘"(「The Lake」)라는 문장처럼, 시인은 애인의 허벅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만사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부르는 너와 따뜻한 물속으로 같이 들어가는 네가 한꺼번에 구겨질 순 없는 거야?"(「빈자리」)라는 물음처럼, 아름답고 가슴 저미는 추억을 향해 그는 손 내민다.
문득 당신의 물음표가 한밤중 침대에서 발견될 때 나는 허겁지겁 일기장에 보관합니다 만년필을 침대맡에 둔 이유입니다 당신의 물음표는 색깔과 크기가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의사를 만나고 왔으니 안심입니다 내 증상에 대해 의사는 항상 고개를 왼쪽으로 이십삼 점 오 도 정도 기울입니다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조언합니다 의사는 지구의 자전축 각도만큼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당의 의자는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내일을 기다립니다 당신의 물음표를 거기다 올려놓을 테니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 「오늘의 처방전」 부분(본문 36~38쪽)
시간을 관능으로 느끼는 자에게 처방전은 당신일 수밖에 없다. 또한 당신을 향한 '나'의 물음을 던져 놓는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물음표"가 무엇인지 떠올리고 느껴보려고 희구할 수밖에 없다. 관능적 주체는 항상 듣는 입장에 선다. 이 작품에서 일기장은 당신의 목소리를 간직하려는 수납장이고 보석함이며 '나의 귀'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손끝의 응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의사는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나'에게 조언하고 있다. 그것은 삶이 계속된다는 자명한 사실, 즉 앞으로의 미래를 향해 눈 돌리라는 처방이다. 또한 지구의 자전축과 마찬가지로 이십삼 점 오 도 고개를 기울인 의사처럼, 물리적 우주의 각도와 일치하는 조언이기도 하다.
추억을 수납하려는 손끝과 삶의 목표를 찾으라는 처방 사이에서, 상충하는 두 삶의 태도를 절묘하게 이어놓듯 강순 시인은 이렇게 말해본다. "마당의 의자는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내일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기다림도 삶의 목적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일도 당신을 위한 마당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 그렇게 기다림에 기대어 지속하는 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워하는 자세와 그리움을 회피하는 자세 사이에서, 슬쩍 강순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그리움을 빗겨 놓는 방식이다. 더 넉넉해진 그리움의 문법이다. 당신과 '접촉'하던 내밀한 순간을 그리던 마음은 이제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도 좋다는 여유로 나아간다. 그것은 애써 그리운 것을 쥐려 하지 않는 손이다. 당신을 애써 눈에 담지 않으려는 인내이다. 대신 그의 마음은 그리운 것을 초대하는 마당이 된다.
오월 속에서 죽은 사람들이 쏟아져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묻힌 휘장 속에서, 전단을 뿌리듯 손을 내밀어요
저 손들을 덥석 잡고 싶어요 무슨 사연인지 받아들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같은 잠일지 몰라요 계절 지난 꽃잎을 일기장 갈피에서 꺼내듯 메마르게 바스러지는 목숨들 우크라이나에서 미얀마에서 예멘에서 광주에서 제주에서 사월에서 오월에서 아무렇게나 쏟아져요
어떤 장면은 TV 뉴스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으로 쓰러지며 말을 잃고 어떤 장면은 영화 속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다 눈을 감아요 또 다른 장면, 바닥에 버려지는 사람들의 연속, 그들은 폭풍 같은 악몽 속에서 몸부림치다 서서히 잠잠해져요
- 「오월의 레퀴엠」 부분(본문 84~85쪽)
강순 시인의 시에서 반복하는 것은 저편의 타자와 '손을 잡으려는' 열망이다. 그러나 어떤 손은 쥘 수 없다. 죽은 이의 절망과 아픔을 이해하려는 가없는 심려를 이 작품은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심려는 수많은 역사적 혁명과 참혹을 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제목의 '오월'은 단순히 광주민주화운동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서 '오월'이란 "메마르게 바스러지는 목숨들", 그렇게 말을 잃고 신음하며 쓰러져 간 고통과 익명의 죽음을 가리키기 위한 기표처럼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월은 "우크라이나에서 미얀마에서 예멘에서 광주에서 제주에서 사월에서 오월에서" 반복되었던 참혹에 대한 역사적 알레고리가 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 형상화된 오월의 근본적인 이미지는 버려지고 상처 입으며 아무렇게나 뒤섞인 '죽은 이의 손'이다. 그 '손'을 맞잡아보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상상해보는 순간이다.
그런데 관능의 존재론을 벗어나서 이 시를 이해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죽어간 사람과 미얀마에서 죽어간 사람은 정말 서로에게 손 내밀기를 바랐을까. 또한 반대로 그들을 살해한 손에 대해서는, 사람을 살해하는 손 역시 사람의 것이라는 진실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어떤 의미로 강순 시인의 심려는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이고, 피해자의 죽음만을 부각한다는 점에서는 선택적이다. 그러한 사실을 시인이 성찰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러나 말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바닥에 버려지는 사람들의 연속"을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싸늘해진 손 무더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듯, 찾아오는 "폭풍 같은 악몽 속에서 몸부림치"던 밤이 있었다. 강순 시인의 시 앞에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냉담하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당신의 손을 쥘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는 자세란 무엇인가. 설령 죽은 이와 손을 맞잡는 순간이 가능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순간을 희구하는 욕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마음에는 탈출구도 해답도 없다. 다만 사람은 제 몫의 시간을 살아내고, 제 몫의 마음을 견뎌낼 뿐이다. 어쩌면 신만이 그러한 운명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줄곧 이 시집에서 신을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신은 햇살을 어디에"(「질문의 원본을 들고」) 놓아두었을까. 그러나 쉽게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신이 침묵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빵'이 상징하는 물신으로 대체되어 버린 신(「새로운 신」)과 "불면과 기도, 질문과 대답에 무관심한 신"(「그때 버린 신」)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막막한 질문들, 답을 청했던 순간들은 공허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앞서 관능이 곧 살의 맞댐이자 고통의 분유임을 논했다. 그런데 시집의 4부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좀 더 생생한 고통의 감각, 예컨대 아픈 가족사에 대한 고백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 시집에서 마주하는 고백에 따르면, 어릴 적 빚 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있었고(「내가 파먹는 열 살의 그림자」), 또한 요양병원에 모신 어머니의 아픈 목소리가 있었다(「다항식」). 어떤 아픔은 유년기부터 뿌리 깊이 지속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나쁜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보기도 했고(「나무 이후」), 이후에는 "나의 썩은 뿌리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해"(「나비 트랩」)보던 순간도 있었다. 자신이 일생 견뎌낸 슬픔에 대해서 시인은 "그리 오래 어둠을 키운 건/너무 일찍 배운 슬픔의 구조 때문"(「그때 버린 신(神)」)이라고 표현한다.
이 '슬픔의 구조'란 단순히 그가 견뎌낸 멜랑콜리와 불안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신과 함께 살아온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의 고통과 오래 감응했기 때문에 견뎌내야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신체가 기억의 각도를 닮았다고 말한다. 시인은 제 몫의 아픔을 견디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든 기억은 왼쪽으로 스며들어서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나의 오른쪽 목이 조금 더 늘어나 있다"(「미래의 기억」)라고 쓰고 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을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늘어난' 신체로 묘사한다. 삶의 왼편을 오래 바라본 사람, 그것은 자기 몫의 아픔보다 당신의 아픔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자세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세를 우리는 "슬픔의 방향"(「밀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자세는 너무 오래 당신을 향해 있었고, 그래서 당신의 편으로 기울어진 신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충분히 기울어진 것일까. 사람은 알지 못한다. 충분히 견딘 것일까. 답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견딘 것이 당신이 아니라 슬픔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루만진 것은 당신의 마음 자체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슬픔이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시인은 당신의 방향이 아니라 슬픔의 방향을 향했다고 쓸 수밖에 없다. 다만 헤매며 구했을 뿐이니까.
사람의 일이란 본래 그런 것임을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란 서로 오독하고 해묵은 난문을 주고받으며 "우리 안에 가장 헐벗은 문장 하나 찾아내어"(「지우개 하나 빌려줘요」) 가는 과정임을 그는 안다. 슬픔이 우리를 쓰러지게 만들려 할 때도 "서러운 귀가 여름을 다시 필사하고 있어"(「수국 중에서 슬픔을 뭉친 부분」)라는 문장처럼, 그 슬픔을 견디는 마음 자체가 여름 수국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것임을 그는 믿는다. 또한 그가 "나무 이후에 아이는 진짜 어른이 되나요?"(「나무 이후」)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이 슬픔을 모두 견디고 난 이후에야 찾아오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리 답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당신이 견딘 만큼 당신이 이룬 나무가 있다고 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강순 시인은 답을 구하고 답해보는 마음 사이에서 서성인다. 그 서성임 자체를 우리는 나무라고 말하고 싶다. 슬픔 이후를 미리 발음해보는 그의 입술을 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잊을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잊었다고 발음해보는 노력처럼, 반어의 형식은 김소월 시인이 「먼 후일」에서 표현했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에 강순 시인의 시가 시간이라는 주제와 반어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은 곧 강순 시인의 서정적 뿌리는 현대성에 대한 체험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내밀한 체험에 기댄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크로노그래프』에서 시인이 지속하려는 "아픈 화법"(「시인의 말」)은 범시대적인 존재론적 고통, 즉 누구나 겪는 필연적인 상실 앞에서 쉽게 확답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세를 암시한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시인이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존재의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컨대 그의 시에서 자기 자신을 피노키오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밤의 나라」)을 만나게 되고, 말을 할 때마다 자라나는 그의 코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기억을 해독하는 어둠 속"에서 나침반을 당신에게 빼앗기고 헤매면서, 조금씩 신체의 절반을 잃어가는 사람을 목격하기도 한다(「한밤에 내가 배달된다」). 이처럼 그의 시에서 반복하는 모티프는 오롯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자기 신체이고 오롯이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기억이다.
가만히 있어도 밤이 우리를 움직인다
동사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합한 말
숨을 내쉬면 네가 썰물처럼 쓸려가고
숨을 들이쉬면 내가 너를 해변에 심어 놓는다
우리는 밀려갔다 밀려왔다 밀었다 당겼다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지구와 달처럼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밤에 슬피 쓰고 있다
-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 부분(본문 19~21쪽)
기억은 존재보다 큰 것이다. 무엇보다 시인은 그러한 기억이 '밤' 혹은 '한밤'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넘쳐 온다고 말한다. 그의 시에서 '밤'은 시간이 움트고 움직이며, 마치 하나의 사역동사인 양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순간이다. 사람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간이 '우리'에게 틈입하여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버리는 현기증의 체험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식으로 불현듯 그리움이 찾아오는 밤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음미할 것은 그리움의 완미한 속도와 이율배반이다. 시인은 어떠한 속도로 그리워하는가. 숨을 내쉬고 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그리움이라면, 그는 '썰물'의 속도로 숨을 내쉬려 한다. 또한 당신을 해변에 심고 자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숨을 들이쉬려 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리움은 씨앗의 속도로 자라고, 썰물의 속도로 빠져나간다. 이 더딘 호흡법은 실은 가쁜 그리움을 피하려는 몸짓이다. 그리움을 견디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추어 보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리움의 이율배반 또한 이 작품은 형상화한다. 당신을 해변에 심어 놓는 손짓을 주목해보자. 그 손짓은 당신이라는 추억이 다시금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따라서 아이러니하게 읽히는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음미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당신을 잊을 수 없다고 발음하는 혀끝과 당신을 떠나보낸다고 발음하는 혀끝 사이에서 어느 쪽이 견딜 만한 것일까. 그는 이 물음을 간직한 채 휘청거리고 있다. "지구와 달처럼" "인력과 원심력"처럼, '우리'의 추억과 현재 사이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슬피 쓰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떠올려야 할 것은 떠나보내려는 각오와 떠나보낼 수 없는 슬픔 사이에서 헤매는 자의 모습이다. 해변에 남는 것은 그의 휘청거리는 발자국이고 슬픈 문장이다.
표제시 「크로노그래프」는 이 시집의 주제와 형식의 본질을 눈여겨보게 한다. 즉 상기하려는 의지와 잊어보려는 노력 사이에서, 그래서 때론 자신을 달래듯 잊었다고 말해보고 그것이 거짓임을 아는 이율배반 속에서 강순 시인의 아픈 화법은 빚어졌다. 그렇다면 강순 시인에게 시간은 관능이다. 이 관능성은 시인이 그리움에 기대어 시간을 가늠하고 시간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요컨대 강순 시인에게 추억한다는 것은 상기의 문제가 아니라 살의 접촉이다. 떠올린다는 것은 애인의 육체를 떠올리는 것이다. 잊는다는 것은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당신의 피부를 느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집의 1부에서 반복하는 존재의 자세이다. 이를 관능의 존재론이라고 명명한다면, 관능의 존재론이란 삶의 매 순간을 접촉으로 번역해보는 형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접촉은 시간을 배반한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의 접촉조차 시간을 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관능적인 접촉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산다. 마찬가지로 강순 시인의 시에서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은 당신과의 관계에 깃든 희로애락의 서사를 떠올린다는 의미보다 아름다웠던 접촉의 순간을 떠올린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 물고기 밥이 되기 전에 그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 그러니 애인아 자본주의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하고 에로틱한 허벅지를 보여 줘"(「The Lake」)라는 문장처럼, 시인은 애인의 허벅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만사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부르는 너와 따뜻한 물속으로 같이 들어가는 네가 한꺼번에 구겨질 순 없는 거야?"(「빈자리」)라는 물음처럼, 아름답고 가슴 저미는 추억을 향해 그는 손 내민다.
문득 당신의 물음표가 한밤중 침대에서 발견될 때 나는 허겁지겁 일기장에 보관합니다 만년필을 침대맡에 둔 이유입니다 당신의 물음표는 색깔과 크기가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의사를 만나고 왔으니 안심입니다 내 증상에 대해 의사는 항상 고개를 왼쪽으로 이십삼 점 오 도 정도 기울입니다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조언합니다 의사는 지구의 자전축 각도만큼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당의 의자는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내일을 기다립니다 당신의 물음표를 거기다 올려놓을 테니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 「오늘의 처방전」 부분(본문 36~38쪽)
시간을 관능으로 느끼는 자에게 처방전은 당신일 수밖에 없다. 또한 당신을 향한 '나'의 물음을 던져 놓는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물음표"가 무엇인지 떠올리고 느껴보려고 희구할 수밖에 없다. 관능적 주체는 항상 듣는 입장에 선다. 이 작품에서 일기장은 당신의 목소리를 간직하려는 수납장이고 보석함이며 '나의 귀'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손끝의 응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의사는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나'에게 조언하고 있다. 그것은 삶이 계속된다는 자명한 사실, 즉 앞으로의 미래를 향해 눈 돌리라는 처방이다. 또한 지구의 자전축과 마찬가지로 이십삼 점 오 도 고개를 기울인 의사처럼, 물리적 우주의 각도와 일치하는 조언이기도 하다.
추억을 수납하려는 손끝과 삶의 목표를 찾으라는 처방 사이에서, 상충하는 두 삶의 태도를 절묘하게 이어놓듯 강순 시인은 이렇게 말해본다. "마당의 의자는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내일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기다림도 삶의 목적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일도 당신을 위한 마당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 그렇게 기다림에 기대어 지속하는 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워하는 자세와 그리움을 회피하는 자세 사이에서, 슬쩍 강순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그리움을 빗겨 놓는 방식이다. 더 넉넉해진 그리움의 문법이다. 당신과 '접촉'하던 내밀한 순간을 그리던 마음은 이제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도 좋다는 여유로 나아간다. 그것은 애써 그리운 것을 쥐려 하지 않는 손이다. 당신을 애써 눈에 담지 않으려는 인내이다. 대신 그의 마음은 그리운 것을 초대하는 마당이 된다.
오월 속에서 죽은 사람들이 쏟아져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묻힌 휘장 속에서, 전단을 뿌리듯 손을 내밀어요
저 손들을 덥석 잡고 싶어요 무슨 사연인지 받아들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같은 잠일지 몰라요 계절 지난 꽃잎을 일기장 갈피에서 꺼내듯 메마르게 바스러지는 목숨들 우크라이나에서 미얀마에서 예멘에서 광주에서 제주에서 사월에서 오월에서 아무렇게나 쏟아져요
어떤 장면은 TV 뉴스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으로 쓰러지며 말을 잃고 어떤 장면은 영화 속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다 눈을 감아요 또 다른 장면, 바닥에 버려지는 사람들의 연속, 그들은 폭풍 같은 악몽 속에서 몸부림치다 서서히 잠잠해져요
- 「오월의 레퀴엠」 부분(본문 84~85쪽)
강순 시인의 시에서 반복하는 것은 저편의 타자와 '손을 잡으려는' 열망이다. 그러나 어떤 손은 쥘 수 없다. 죽은 이의 절망과 아픔을 이해하려는 가없는 심려를 이 작품은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심려는 수많은 역사적 혁명과 참혹을 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제목의 '오월'은 단순히 광주민주화운동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서 '오월'이란 "메마르게 바스러지는 목숨들", 그렇게 말을 잃고 신음하며 쓰러져 간 고통과 익명의 죽음을 가리키기 위한 기표처럼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월은 "우크라이나에서 미얀마에서 예멘에서 광주에서 제주에서 사월에서 오월에서" 반복되었던 참혹에 대한 역사적 알레고리가 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 형상화된 오월의 근본적인 이미지는 버려지고 상처 입으며 아무렇게나 뒤섞인 '죽은 이의 손'이다. 그 '손'을 맞잡아보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상상해보는 순간이다.
그런데 관능의 존재론을 벗어나서 이 시를 이해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죽어간 사람과 미얀마에서 죽어간 사람은 정말 서로에게 손 내밀기를 바랐을까. 또한 반대로 그들을 살해한 손에 대해서는, 사람을 살해하는 손 역시 사람의 것이라는 진실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어떤 의미로 강순 시인의 심려는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이고, 피해자의 죽음만을 부각한다는 점에서는 선택적이다. 그러한 사실을 시인이 성찰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러나 말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바닥에 버려지는 사람들의 연속"을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싸늘해진 손 무더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듯, 찾아오는 "폭풍 같은 악몽 속에서 몸부림치"던 밤이 있었다. 강순 시인의 시 앞에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냉담하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당신의 손을 쥘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는 자세란 무엇인가. 설령 죽은 이와 손을 맞잡는 순간이 가능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순간을 희구하는 욕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마음에는 탈출구도 해답도 없다. 다만 사람은 제 몫의 시간을 살아내고, 제 몫의 마음을 견뎌낼 뿐이다. 어쩌면 신만이 그러한 운명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줄곧 이 시집에서 신을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신은 햇살을 어디에"(「질문의 원본을 들고」) 놓아두었을까. 그러나 쉽게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신이 침묵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빵'이 상징하는 물신으로 대체되어 버린 신(「새로운 신」)과 "불면과 기도, 질문과 대답에 무관심한 신"(「그때 버린 신」)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막막한 질문들, 답을 청했던 순간들은 공허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앞서 관능이 곧 살의 맞댐이자 고통의 분유임을 논했다. 그런데 시집의 4부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좀 더 생생한 고통의 감각, 예컨대 아픈 가족사에 대한 고백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 시집에서 마주하는 고백에 따르면, 어릴 적 빚 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있었고(「내가 파먹는 열 살의 그림자」), 또한 요양병원에 모신 어머니의 아픈 목소리가 있었다(「다항식」). 어떤 아픔은 유년기부터 뿌리 깊이 지속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나쁜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보기도 했고(「나무 이후」), 이후에는 "나의 썩은 뿌리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해"(「나비 트랩」)보던 순간도 있었다. 자신이 일생 견뎌낸 슬픔에 대해서 시인은 "그리 오래 어둠을 키운 건/너무 일찍 배운 슬픔의 구조 때문"(「그때 버린 신(神)」)이라고 표현한다.
이 '슬픔의 구조'란 단순히 그가 견뎌낸 멜랑콜리와 불안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신과 함께 살아온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의 고통과 오래 감응했기 때문에 견뎌내야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신체가 기억의 각도를 닮았다고 말한다. 시인은 제 몫의 아픔을 견디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든 기억은 왼쪽으로 스며들어서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나의 오른쪽 목이 조금 더 늘어나 있다"(「미래의 기억」)라고 쓰고 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을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늘어난' 신체로 묘사한다. 삶의 왼편을 오래 바라본 사람, 그것은 자기 몫의 아픔보다 당신의 아픔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자세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세를 우리는 "슬픔의 방향"(「밀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자세는 너무 오래 당신을 향해 있었고, 그래서 당신의 편으로 기울어진 신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충분히 기울어진 것일까. 사람은 알지 못한다. 충분히 견딘 것일까. 답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견딘 것이 당신이 아니라 슬픔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루만진 것은 당신의 마음 자체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슬픔이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시인은 당신의 방향이 아니라 슬픔의 방향을 향했다고 쓸 수밖에 없다. 다만 헤매며 구했을 뿐이니까.
사람의 일이란 본래 그런 것임을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란 서로 오독하고 해묵은 난문을 주고받으며 "우리 안에 가장 헐벗은 문장 하나 찾아내어"(「지우개 하나 빌려줘요」) 가는 과정임을 그는 안다. 슬픔이 우리를 쓰러지게 만들려 할 때도 "서러운 귀가 여름을 다시 필사하고 있어"(「수국 중에서 슬픔을 뭉친 부분」)라는 문장처럼, 그 슬픔을 견디는 마음 자체가 여름 수국처럼 아름답게 피어난 것임을 그는 믿는다. 또한 그가 "나무 이후에 아이는 진짜 어른이 되나요?"(「나무 이후」)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이 슬픔을 모두 견디고 난 이후에야 찾아오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리 답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당신이 견딘 만큼 당신이 이룬 나무가 있다고 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강순 시인은 답을 구하고 답해보는 마음 사이에서 서성인다. 그 서성임 자체를 우리는 나무라고 말하고 싶다. 슬픔 이후를 미리 발음해보는 그의 입술을 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목차
목차
시인의 말·5
1부-새 언어를 배운 지 삼십 일
미소가 나를 택할 때·15
밤의 나라·16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19
한밤에 내가 배달된다·22
함구증·24
빈자리·26
시베리아행·28
The Lake·30
안구건조증·32
무리수·34
오늘의 처방전·36
노란 그림자 실종 사건에 대해 말할 때
당신도 울고 있나요·39
감정이 산다·42
번아웃 증후군·44
미문을 생각하다가·46
2부-신은 햇살을 어디에
새로운 신(神)·51
질문의 원본을 들고·54
엄마는 꿈이 뭐였어요·56
엄마 되기·58
개미의 봄·60
서울역 프로메테우스·63
사춘기 나무·66
리라(lyra)·68
증언·71
어느 날 아이가 죽고 싶다고 말했다·74
늪 속의 노랑·76
어떤 하루는 상용로그 함수·79
오후 세 시에는 40킬로의 용기가 필요해·82
오월의 레퀴엠·84
온종일 걸었다·86
3부-모두 다 내 이름이야
발목 기다리기 - 꽃 1·91
다락방은 그런 곳이에요·94
18(의 세계)·96
사과의 유흔·98
예컨대, 회전초·100
목마른 계절의 백서(白書)·102
전사(戰士) - 꽃 2·104
의자의 깊이 1·107
기린이 오는 방식·108
애월 녹턴·110
글린다 - 꽃 3·112
멈추지 않는 나무·115
그레텔의 숲·118
의자의 깊이 2·120
4부-눈물의 진화 쪼금 있음
폐기차, 너머의 몽환도·123
미래의 기억·126
올바른 결혼 생활 - 마녀일기 9·128
앨리스 증후군·130
첫사랑의 필름·132
병상 창가에 새가 출몰했다 - 마녀일기 10·134
밀교·135
내가 파먹는 열 살의 그림자·136
나비 트랩·138
지우개 하나 빌려줘요·140
수국 중에서 슬픔을 뭉친 부분·142
나무 이후·144
그때 버린 신(神)·146
집의 방향 - 마녀일기 11·149
다항식·152
당신 눈에 내가 안 보이는 이유·155
해설 | 박동억(문학평론가)
관능과 슬픔의 존재론·159
1부-새 언어를 배운 지 삼십 일
미소가 나를 택할 때·15
밤의 나라·16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19
한밤에 내가 배달된다·22
함구증·24
빈자리·26
시베리아행·28
The Lake·30
안구건조증·32
무리수·34
오늘의 처방전·36
노란 그림자 실종 사건에 대해 말할 때
당신도 울고 있나요·39
감정이 산다·42
번아웃 증후군·44
미문을 생각하다가·46
2부-신은 햇살을 어디에
새로운 신(神)·51
질문의 원본을 들고·54
엄마는 꿈이 뭐였어요·56
엄마 되기·58
개미의 봄·60
서울역 프로메테우스·63
사춘기 나무·66
리라(lyra)·68
증언·71
어느 날 아이가 죽고 싶다고 말했다·74
늪 속의 노랑·76
어떤 하루는 상용로그 함수·79
오후 세 시에는 40킬로의 용기가 필요해·82
오월의 레퀴엠·84
온종일 걸었다·86
3부-모두 다 내 이름이야
발목 기다리기 - 꽃 1·91
다락방은 그런 곳이에요·94
18(의 세계)·96
사과의 유흔·98
예컨대, 회전초·100
목마른 계절의 백서(白書)·102
전사(戰士) - 꽃 2·104
의자의 깊이 1·107
기린이 오는 방식·108
애월 녹턴·110
글린다 - 꽃 3·112
멈추지 않는 나무·115
그레텔의 숲·118
의자의 깊이 2·120
4부-눈물의 진화 쪼금 있음
폐기차, 너머의 몽환도·123
미래의 기억·126
올바른 결혼 생활 - 마녀일기 9·128
앨리스 증후군·130
첫사랑의 필름·132
병상 창가에 새가 출몰했다 - 마녀일기 10·134
밀교·135
내가 파먹는 열 살의 그림자·136
나비 트랩·138
지우개 하나 빌려줘요·140
수국 중에서 슬픔을 뭉친 부분·142
나무 이후·144
그때 버린 신(神)·146
집의 방향 - 마녀일기 11·149
다항식·152
당신 눈에 내가 안 보이는 이유·155
해설 | 박동억(문학평론가)
관능과 슬픔의 존재론·159
저자
저자
강순
본명 강수원. 제주에서 태어났으며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크로노그래프』가 있다.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에 선정되어 기금을 받았다.(2019)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2021)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시집으로 『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크로노그래프』가 있다.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에 선정되어 기금을 받았다.(2019)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2021)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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