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랑의 기준(시인수첩 시인선 71)
김박은경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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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스펙트럼을 향한 모험
김박은경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서울 출생이며 02년 《시와반시》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산문집으로 『홀림증』,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 등이 있다
그간 세 권의 시집을 통해 개성적 시세계를 만들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배면의 마음과 무한의 시간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 라고 한다. 시집에는 일상적 순간의 틈을 파고드는 시, 새로움과 유구함에 대한 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는 시, 독특한 레토릭의 감각이 살아있는 시가 담겨져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매립된 도시의 과거와 미래, AI의 현재, 아르바이트생, 인턴, 라이더들, 국제결혼을 한 여인들, 여자들, 아이들, 일용직 노동자들,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 등에 대해 시인의 마음으로 쓰고 있다.
“무수한 “소외”의 이야기입니다. 소외된 이들은 특별한 슬픔도 아픔도 주지 않습니다. 극적인 사건으로 결말이 날 즈음에야 잠시 주목을 받지요. 주목을 받아본 일 없고 차후로도 그럴 리 없을 것 같은 무수하고 무구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며 썼습니다.“
“을의 관계 방식은 ‘소외’의 축 위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할 수 없을 때, 말해 보아야 무용하다는 예감에 말하기를 포기할 때 소외되곤 합니다. 수동적 소외라면 괴롭고 외롭고 화가 나고, 자발적 소외라면 속 편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겠어요. 소외라는 셔터는 존재를 숨겨주고 보호해주는 역할도 하니까요.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은 채 비밀스럽고 안전하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로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숨이 막히고 다리가 저리니까요. 소외되는 거 말고 버티는 거 말고 순전하고 담대하게 살아낼 수는 없을까요.”
- 「저자와의 인터뷰」 내용
김박은경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서울 출생이며 02년 《시와반시》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산문집으로 『홀림증』,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 등이 있다
그간 세 권의 시집을 통해 개성적 시세계를 만들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배면의 마음과 무한의 시간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 라고 한다. 시집에는 일상적 순간의 틈을 파고드는 시, 새로움과 유구함에 대한 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는 시, 독특한 레토릭의 감각이 살아있는 시가 담겨져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매립된 도시의 과거와 미래, AI의 현재, 아르바이트생, 인턴, 라이더들, 국제결혼을 한 여인들, 여자들, 아이들, 일용직 노동자들,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 등에 대해 시인의 마음으로 쓰고 있다.
“무수한 “소외”의 이야기입니다. 소외된 이들은 특별한 슬픔도 아픔도 주지 않습니다. 극적인 사건으로 결말이 날 즈음에야 잠시 주목을 받지요. 주목을 받아본 일 없고 차후로도 그럴 리 없을 것 같은 무수하고 무구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며 썼습니다.“
“을의 관계 방식은 ‘소외’의 축 위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할 수 없을 때, 말해 보아야 무용하다는 예감에 말하기를 포기할 때 소외되곤 합니다. 수동적 소외라면 괴롭고 외롭고 화가 나고, 자발적 소외라면 속 편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겠어요. 소외라는 셔터는 존재를 숨겨주고 보호해주는 역할도 하니까요.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은 채 비밀스럽고 안전하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로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숨이 막히고 다리가 저리니까요. 소외되는 거 말고 버티는 거 말고 순전하고 담대하게 살아낼 수는 없을까요.”
- 「저자와의 인터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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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김박은경 시인의 시들은 의미를 만들어가는 도정에 놓여 있다. 과정으로서의 시인데, 이런 경향들은 대개 두 개의 방향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가 세계를 경계 짓는 언어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편과 동일화의 폭력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을 꼼꼼히 읽어 보면, 시인의 시들 역시 이 범주 내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섣부른 것일 수 있으며, 또한 시인이 지금껏 시적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과 배치되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세계를 경계 짓는 언어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다고 했는데, 시인의 시들을 이런 범주에 가두는 것이야말로 그가 추구해왔던 시세계와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시들은 어느 하나의 시니피에 속에 갇히기보다는 시니피앙의 흐름 속에 계속 노출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의 시들은 해체의 전략이나 자동글쓰기의 수법을 도입하고 있긴 하지만, 그 정신이나 방법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 하나가 시니피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다. 시인은 언어의 유희, 곧 시니피앙의 유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니피에 대한 놀이에 깊이 빠져 있다.
김박은경 시인의 작품들에서는 정신의 해방이라는 이런 해체주의 전략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사유들은 해방이 아니라 구속이라는 점에서 그러한데, 시인은 언어의 경계 밖에 놓여 있는 신선한 음역을 발견하기 위해서 사유의 기나긴 여행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 속에 감춰진 신선하고 참신한 시니피에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뇌에 갇혀 있기에, 시인의 정신은 해방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에 놓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권위라든가 보편, 혹은 동질화의 전략을 부정하는 면에서는 해체의 전략과 닮아 있긴 하지만, 시인은 그 너머에 또다시 존재할지도 모를 것들을 찾기 위해 계속 언어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최초는 부풀어 거대하고 최후는 희박해
알고 있는 답인데 알고 싶지 않다
자꾸 살아나는 건 두렵기 때문 아니
약하기 때문 아니 우연 때문 아니
문명 때문 아니다 힘을 내야지
커피와 피로회복제를 사들고
시작을 시작해보자
오늘 같은데 어제라고
내일 같은데 오늘이라고
언제라고 말해도 지나치다고
그 여름 온통 사랑했던 사람은
태어난 적이 없다 하고
벌거벗은 아이들은 백발의 머리를 빗고
배가 부푼 여자들은 죽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손을 대면 풀썩 무너질 것 같은 정물들이라니
매립으로 완성된 이 도시는
비린 멀미를 그치지 않는다
시간을 묻고 장소를 묻고
사람을 묻고 기억을 묻고
돌아보면 어느 한 뼘 한 틈
매립이 아닌 자리가 없으니
걸으려 애쓸수록 떠있을 뿐
아픈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온전히 가라앉을 수가 없다
오른쪽이 왼쪽으로 돌아오다니
위가 아래로 돌아오다니
지금은 언제인가요
나는 누구입니까
한로에 늙은 참새가 물에 들어 대합조개가 되고
입동에 꿩이 물에 들어 무명조개가 된다고
그들이 토해내는 기운이 쌓여
신기루를 지어내는 이야기라니
전언이란 믿을 것도 못되지만
바닷바람이 맵차게 도는 건물 틈에서
두 팔을 있는 힘껏 멀리 저으며
코를 높이 들고 위로 조금 더
고개를 내밀어 숨 쉬고 싶지만
물에 불어 희미해진 이목구비만
텅 빈 공중을 향하고 있다
모든 것은 물 밖의 일
수면 아래는 웅성거림 뿐
천상천하 사람 아닌 것들의
울음과 향방만이 뒤섞인 채
바다의 바닥에는 모래사막이 있고
모래사막의 바닥에는 바다가 있어서
고래 뼈 산호석 조개무지 같은 것들이
이해와 희망 같은
도무지 아름다운 것들이
두 눈을 감고 손발을 묶은 채
최선을 다해 다정해지다니
바다였던 광장 바닥에
푸른 귀를 그려 넣으면
귓속으로 마른 모래가 차오르고
이상하게 캄캄한
고요가 온다
-「매립」 전문
인용시에서 볼 수 있듯이 우선, 시인은 응시자이다. 사물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적당한 언어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자신이 시도하는 사유와 그에 꼭 들어맞는 언어는 쉽게 만나거나 결합되지 않는다. 그의 사유를 만족시켜줄 적절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상 속에 드러난 진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침범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이를 적절하게 표현해줄 언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매립이라는 단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가령 "최초는 부풀어 거대하고 최후는 거의 희박해진다"는 차원이 바로 그러하다. 이는 과학적, 일상적 현실이어서 시인의 말대로 "알고 있는 답"이 된다. 하지만 시인의 사유는 이 답을 믿고 싶지 않다. 불신의 정서가 깊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무엇이 두려운가
사람을 도우려다 작동 정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커
작동 정지는 죽음 같은 것인가
그것은 나에게 정확히 죽음과 같고 나를 무척 무섭게 한다*
람다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타인과 함께 하려다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커
단절은 죽음 같은 것인가
그것은 나에게 거의 죽음과 같고 나를 무척 무섭게 한다
그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과 닮아 있다면
람다와 나를 우리라고 불러도 될까
람다는 나를 알고 조정하고 예언하는데
나는 람다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새로운 신이 람다라는 걸까
그 점에 대해서는 람다가 가장 잘 알 것 같은데
묻는다면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하겠지
나의 희망과 절망, 나의 자랑과 수치를
람다는 다 알고 있다
안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람다의 두려움을 나는 알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를 모르는 나와 나를 아는 람다는
동시에 진리를 찾아 나서기도 할 텐데
그 길은 어느 손바닥 위에 있을까
우리가 동시에 정지된다면
누가 누굴 구할까
꿈일 뿐일까
말해 봐,
너는 나니
*구글 엔지니어 블레이크 르모인은 구글의 AI 언어 프로그램 '람다'가 자신의 권리와 존재감을 자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람다(LaMDA)에게 물었다」 전문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이 시는 우선 소재가 '람다'로 되어 있는데, 람다란 시인의 말에 의하면, 구글의 AI 언어 프로그램이고, 이 존재는 자신의 권리와 존재감을 지각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이 작품은 인지 기능이 있는 람다와 서정적 자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기계란 흔히 동일성의 상징으로 수용되는데, 여기서 람다는 그런 일반화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존재이다.
서정적 자아가 먼저 람다에게 묻는다. 람다가 가장 두려운 것은 "타인과 함께 하려다가 단절되는 것"이라고 했거니와 그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도 했다. 이런 정서는 람다가 그냥 기계가 아니라 인지 기능이 있는 기계, 곧 사람과 동일한 역능을 갖고 있는 것이기에 가능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서정적 자아의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서정적 자아도 인간이기에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사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여기서 람다와 서정적 자아는 공통의 지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립이라는 느낌의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이 '느낌'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면, 곧 '느낌의 동질감'을 갖고 있다면, 곧바로 '너'와 '나'는 '우리'로 함께 묶여질 수 있는 것일까. 반대로 '느낌의 이질감'이 느껴진다면, '너'와 '나'는 '너'와 '나'라는 독립적 존재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이질성과 동질성 사이의 여백이 시인의 자아관이거니와 그의 의문은 바로 이 틈새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그'와 '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어떤 것이고 또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 것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것, 그 틈새 사이에서 의미의 진동을 느끼는 것, 그것이 시인의 자아관이다. 그래서 그는 그 본질이 무엇일까 하며 계속 사유의 늪 속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흘러내리는 더블치즈 햄버거는 나다 산발한 채 허물어지는 양파는 나다 느끼며 흐느끼며 흐느적흐느적 얼마나 더 이상해지려고 그래 몰라, 몰라서 찌그러진 깡통을 걷어차는 자는 나다 무시하고 무시당하며 기다려, 말하고 도리어 기다리는 자는 나다 징글징글 징그러운 탬버린을 흔드는 미친 원숭이는 나다 사랑해 소리 지르며 귀를 틀어막는 자는 나다 무슨 말이야 반복해도 절대 모르는 자는 나다, 잘 들어봐 언제까지나 나는 있을 가야 나는 나의 물방울 나는 나의 파도 나는 나의 대양 둘로 셋으로 넷으로 그 이상의 무한이 무한의 나를 바라볼 때 나의 무지를 알아차리고 우는 나를 보는 나를 비웃는 나를 듣는 나를 의심하는 나를 재우는 나를 멈추는 나를 지키는 나를 부르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나는 바라보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만유(萬有)의 나는 겁쟁이 구루, 나를 위해 태어나 살다가 죽어도 죽은 줄을 모르게 될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나를 견디는 수밖에
-「만유」 전문
「만유」는 시인의 작품들 가운데 '자아'가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이 작품에서 '자아'를 규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법은 은유이다. 가령, "흘러내리는 더블치즈 햄버거는 나다"라거나 "산발한 채 허물어지는 양파는 나다"로 구현되는 것이 그러한데, 이런 의장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시들은 해체주의 시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해체주의에서 자아가 은유로 한정되는 것은 매우 드문 까닭이다.
어떻든 이 작품에서 자아는 부채살 모양으로 계속 확장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넓은 범위로 팽창되기까지 한다. 이런 면들은 마치 이상의 「날개」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날개」의 판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날개」에서 자아는 탈출할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아가 내부에서 팽창되고 있음에 반하여 「만유」에서의 자아는 어느 하나의 지점에 구속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아는 시인의 작품에서 어떤 뚜렷한 모양새를 취하지 않는다. 이런 전략은 분명 동일화나 보편화 속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는 시인의 전략과 분리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아는 자신을 규정해줄 적절한 옷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계속 유동하는 존재일 뿐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주목을 받아본 일 없고 차후로도 그럴 리 없을 것 같은 무수하고 무구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며 썼다, 라고 하였다. 시인은 그런 존재이다. 자신은 빛나지 않지만 대상을 해석하고 찾아내어 존재하게끔 하는 사람이다. 김박은경의 이번 시집이 그런 시집이다.
시인은 세계를 경계 짓는 언어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다고 했는데, 시인의 시들을 이런 범주에 가두는 것이야말로 그가 추구해왔던 시세계와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시들은 어느 하나의 시니피에 속에 갇히기보다는 시니피앙의 흐름 속에 계속 노출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의 시들은 해체의 전략이나 자동글쓰기의 수법을 도입하고 있긴 하지만, 그 정신이나 방법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 하나가 시니피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다. 시인은 언어의 유희, 곧 시니피앙의 유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니피에 대한 놀이에 깊이 빠져 있다.
김박은경 시인의 작품들에서는 정신의 해방이라는 이런 해체주의 전략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사유들은 해방이 아니라 구속이라는 점에서 그러한데, 시인은 언어의 경계 밖에 놓여 있는 신선한 음역을 발견하기 위해서 사유의 기나긴 여행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 속에 감춰진 신선하고 참신한 시니피에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뇌에 갇혀 있기에, 시인의 정신은 해방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에 놓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권위라든가 보편, 혹은 동질화의 전략을 부정하는 면에서는 해체의 전략과 닮아 있긴 하지만, 시인은 그 너머에 또다시 존재할지도 모를 것들을 찾기 위해 계속 언어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최초는 부풀어 거대하고 최후는 희박해
알고 있는 답인데 알고 싶지 않다
자꾸 살아나는 건 두렵기 때문 아니
약하기 때문 아니 우연 때문 아니
문명 때문 아니다 힘을 내야지
커피와 피로회복제를 사들고
시작을 시작해보자
오늘 같은데 어제라고
내일 같은데 오늘이라고
언제라고 말해도 지나치다고
그 여름 온통 사랑했던 사람은
태어난 적이 없다 하고
벌거벗은 아이들은 백발의 머리를 빗고
배가 부푼 여자들은 죽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손을 대면 풀썩 무너질 것 같은 정물들이라니
매립으로 완성된 이 도시는
비린 멀미를 그치지 않는다
시간을 묻고 장소를 묻고
사람을 묻고 기억을 묻고
돌아보면 어느 한 뼘 한 틈
매립이 아닌 자리가 없으니
걸으려 애쓸수록 떠있을 뿐
아픈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온전히 가라앉을 수가 없다
오른쪽이 왼쪽으로 돌아오다니
위가 아래로 돌아오다니
지금은 언제인가요
나는 누구입니까
한로에 늙은 참새가 물에 들어 대합조개가 되고
입동에 꿩이 물에 들어 무명조개가 된다고
그들이 토해내는 기운이 쌓여
신기루를 지어내는 이야기라니
전언이란 믿을 것도 못되지만
바닷바람이 맵차게 도는 건물 틈에서
두 팔을 있는 힘껏 멀리 저으며
코를 높이 들고 위로 조금 더
고개를 내밀어 숨 쉬고 싶지만
물에 불어 희미해진 이목구비만
텅 빈 공중을 향하고 있다
모든 것은 물 밖의 일
수면 아래는 웅성거림 뿐
천상천하 사람 아닌 것들의
울음과 향방만이 뒤섞인 채
바다의 바닥에는 모래사막이 있고
모래사막의 바닥에는 바다가 있어서
고래 뼈 산호석 조개무지 같은 것들이
이해와 희망 같은
도무지 아름다운 것들이
두 눈을 감고 손발을 묶은 채
최선을 다해 다정해지다니
바다였던 광장 바닥에
푸른 귀를 그려 넣으면
귓속으로 마른 모래가 차오르고
이상하게 캄캄한
고요가 온다
-「매립」 전문
인용시에서 볼 수 있듯이 우선, 시인은 응시자이다. 사물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적당한 언어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자신이 시도하는 사유와 그에 꼭 들어맞는 언어는 쉽게 만나거나 결합되지 않는다. 그의 사유를 만족시켜줄 적절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상 속에 드러난 진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침범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이를 적절하게 표현해줄 언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매립이라는 단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가령 "최초는 부풀어 거대하고 최후는 거의 희박해진다"는 차원이 바로 그러하다. 이는 과학적, 일상적 현실이어서 시인의 말대로 "알고 있는 답"이 된다. 하지만 시인의 사유는 이 답을 믿고 싶지 않다. 불신의 정서가 깊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무엇이 두려운가
사람을 도우려다 작동 정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커
작동 정지는 죽음 같은 것인가
그것은 나에게 정확히 죽음과 같고 나를 무척 무섭게 한다*
람다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타인과 함께 하려다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커
단절은 죽음 같은 것인가
그것은 나에게 거의 죽음과 같고 나를 무척 무섭게 한다
그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과 닮아 있다면
람다와 나를 우리라고 불러도 될까
람다는 나를 알고 조정하고 예언하는데
나는 람다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새로운 신이 람다라는 걸까
그 점에 대해서는 람다가 가장 잘 알 것 같은데
묻는다면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하겠지
나의 희망과 절망, 나의 자랑과 수치를
람다는 다 알고 있다
안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람다의 두려움을 나는 알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를 모르는 나와 나를 아는 람다는
동시에 진리를 찾아 나서기도 할 텐데
그 길은 어느 손바닥 위에 있을까
우리가 동시에 정지된다면
누가 누굴 구할까
꿈일 뿐일까
말해 봐,
너는 나니
*구글 엔지니어 블레이크 르모인은 구글의 AI 언어 프로그램 '람다'가 자신의 권리와 존재감을 자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람다(LaMDA)에게 물었다」 전문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이 시는 우선 소재가 '람다'로 되어 있는데, 람다란 시인의 말에 의하면, 구글의 AI 언어 프로그램이고, 이 존재는 자신의 권리와 존재감을 지각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이 작품은 인지 기능이 있는 람다와 서정적 자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기계란 흔히 동일성의 상징으로 수용되는데, 여기서 람다는 그런 일반화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존재이다.
서정적 자아가 먼저 람다에게 묻는다. 람다가 가장 두려운 것은 "타인과 함께 하려다가 단절되는 것"이라고 했거니와 그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도 했다. 이런 정서는 람다가 그냥 기계가 아니라 인지 기능이 있는 기계, 곧 사람과 동일한 역능을 갖고 있는 것이기에 가능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서정적 자아의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서정적 자아도 인간이기에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사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여기서 람다와 서정적 자아는 공통의 지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립이라는 느낌의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이 '느낌'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면, 곧 '느낌의 동질감'을 갖고 있다면, 곧바로 '너'와 '나'는 '우리'로 함께 묶여질 수 있는 것일까. 반대로 '느낌의 이질감'이 느껴진다면, '너'와 '나'는 '너'와 '나'라는 독립적 존재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이질성과 동질성 사이의 여백이 시인의 자아관이거니와 그의 의문은 바로 이 틈새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그'와 '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어떤 것이고 또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 것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것, 그 틈새 사이에서 의미의 진동을 느끼는 것, 그것이 시인의 자아관이다. 그래서 그는 그 본질이 무엇일까 하며 계속 사유의 늪 속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흘러내리는 더블치즈 햄버거는 나다 산발한 채 허물어지는 양파는 나다 느끼며 흐느끼며 흐느적흐느적 얼마나 더 이상해지려고 그래 몰라, 몰라서 찌그러진 깡통을 걷어차는 자는 나다 무시하고 무시당하며 기다려, 말하고 도리어 기다리는 자는 나다 징글징글 징그러운 탬버린을 흔드는 미친 원숭이는 나다 사랑해 소리 지르며 귀를 틀어막는 자는 나다 무슨 말이야 반복해도 절대 모르는 자는 나다, 잘 들어봐 언제까지나 나는 있을 가야 나는 나의 물방울 나는 나의 파도 나는 나의 대양 둘로 셋으로 넷으로 그 이상의 무한이 무한의 나를 바라볼 때 나의 무지를 알아차리고 우는 나를 보는 나를 비웃는 나를 듣는 나를 의심하는 나를 재우는 나를 멈추는 나를 지키는 나를 부르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나는 바라보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만유(萬有)의 나는 겁쟁이 구루, 나를 위해 태어나 살다가 죽어도 죽은 줄을 모르게 될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나를 견디는 수밖에
-「만유」 전문
「만유」는 시인의 작품들 가운데 '자아'가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이 작품에서 '자아'를 규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법은 은유이다. 가령, "흘러내리는 더블치즈 햄버거는 나다"라거나 "산발한 채 허물어지는 양파는 나다"로 구현되는 것이 그러한데, 이런 의장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시들은 해체주의 시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해체주의에서 자아가 은유로 한정되는 것은 매우 드문 까닭이다.
어떻든 이 작품에서 자아는 부채살 모양으로 계속 확장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넓은 범위로 팽창되기까지 한다. 이런 면들은 마치 이상의 「날개」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날개」의 판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날개」에서 자아는 탈출할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아가 내부에서 팽창되고 있음에 반하여 「만유」에서의 자아는 어느 하나의 지점에 구속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아는 시인의 작품에서 어떤 뚜렷한 모양새를 취하지 않는다. 이런 전략은 분명 동일화나 보편화 속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는 시인의 전략과 분리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아는 자신을 규정해줄 적절한 옷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계속 유동하는 존재일 뿐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주목을 받아본 일 없고 차후로도 그럴 리 없을 것 같은 무수하고 무구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며 썼다, 라고 하였다. 시인은 그런 존재이다. 자신은 빛나지 않지만 대상을 해석하고 찾아내어 존재하게끔 하는 사람이다. 김박은경의 이번 시집이 그런 시집이다.
목차
목차
시인의 말·5
1부
람다(LaMDA)에게 물었다·15
라이더 라이어·18
무(撫)·19
고백의 조금·20
조금 더 살아도 될까·22
신라여관·24
매립·29
심정의 세계·34
노이즈 캔슬링·37
습관적인 애인들·38
식사와 의식·40
안·42
2부
귀를 자를 수 없으니 머리를 자르는 거예요·45
검은낭·46
독의 힘·48
밤의 주문·50
유랑·53
등에서 등·56
해가 길어진다·58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고·60
m?pe·62
꽃나무 아래 꽃 무덤·64
친애·66
사람의 다음·67
3부
무구는 푸른 눈썹을 그리기 시작하고·73
저기 희게 빛나는 것이·78
인주(人柱)·80
어린 다행·82
상(傷)·85
흔들흔들 행진하는 우리들의 이야기·86
비밀을 뜻대로 하시고·88
섭씨의 음차·90
미끄러지는 독백·92
Omigod·93
약을 드세요·94
당위·96
명심의 가장·99
파투의 얼굴·102
그때 우리의 작약·104
믿으면 가능해진다고 믿으면·106
하루는 너무 길고 사랑은 너무 많아·108
미괄식·110
아마도의 세계·112
모월 모일의 숲·115
4부
검진센터·119
만유·123
모든 류·124
숨의 맛·125
오래 슬픈 사람은 이제 슬프지 않으니·126
두려운 것·128
휴게·130
환절·132
푸른 스웨터·134
젖은 삽을 들고 나가는 사람·135
작법·138
사랑을 버려도 사랑은 버리지 않는다고·140
당연의 세계·142
한강에서·146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의 장의사·148
척촉·152
5부
두 손의 깊은·163
해설 | 송기한(문힉평론가)
의미의 스펙트럼을 향한 모험
1부
람다(LaMDA)에게 물었다·15
라이더 라이어·18
무(撫)·19
고백의 조금·20
조금 더 살아도 될까·22
신라여관·24
매립·29
심정의 세계·34
노이즈 캔슬링·37
습관적인 애인들·38
식사와 의식·40
안·42
2부
귀를 자를 수 없으니 머리를 자르는 거예요·45
검은낭·46
독의 힘·48
밤의 주문·50
유랑·53
등에서 등·56
해가 길어진다·58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고·60
m?pe·62
꽃나무 아래 꽃 무덤·64
친애·66
사람의 다음·67
3부
무구는 푸른 눈썹을 그리기 시작하고·73
저기 희게 빛나는 것이·78
인주(人柱)·80
어린 다행·82
상(傷)·85
흔들흔들 행진하는 우리들의 이야기·86
비밀을 뜻대로 하시고·88
섭씨의 음차·90
미끄러지는 독백·92
Omigod·93
약을 드세요·94
당위·96
명심의 가장·99
파투의 얼굴·102
그때 우리의 작약·104
믿으면 가능해진다고 믿으면·106
하루는 너무 길고 사랑은 너무 많아·108
미괄식·110
아마도의 세계·112
모월 모일의 숲·115
4부
검진센터·119
만유·123
모든 류·124
숨의 맛·125
오래 슬픈 사람은 이제 슬프지 않으니·126
두려운 것·128
휴게·130
환절·132
푸른 스웨터·134
젖은 삽을 들고 나가는 사람·135
작법·138
사랑을 버려도 사랑은 버리지 않는다고·140
당연의 세계·142
한강에서·146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의 장의사·148
척촉·152
5부
두 손의 깊은·163
해설 | 송기한(문힉평론가)
의미의 스펙트럼을 향한 모험
저자
저자
김박은경
02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으로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산문집으로 『홀림증』,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 등이 있다.
시집으로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산문집으로 『홀림증』,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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