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릿 시냇가
한정옥 시집
한정옥韓貞玉의 시집 『그릿 시냇가』(문학세계사, 2023)는 정갈하고 단정한, 그러나 내면으로는 활력의 언어를 깊이 내장한 실존적이고 예술적인 고백록이다. 시인은 신성한 빛을 향한 수직적 상승 의지와 스스로를 반성하고 낮추는 겸양의 마음을 결속하고 교차하면서 자신의 실존적 역동성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시인의 상상력은 삶의 모순과 맞서 긴장하고 싸워가는 존재론적 균형감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한정옥의 시로 하여금 때로는 신앙적 다짐으로, 때로는 인생론적 지혜로 나아가게끔 해준다. 시인은 그 활력과 침묵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형상화함으로써 탐닉과 혐오를 동시에 넘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겸허한 성찰을 불러오고 있다. 우주에 가득한 신성의 질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미학적 차원을 견고하게 획득해 가면서 한결같이 어떤 영적 경험과 유니크한 예술적 세계를 마련해 간다. 이번 시집은 이러한 한정옥 시인만의 사유와 감각을 새겨 넣은 유의미한 세계로서 그 깊이와 너비를 선명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 안에는 건강한 반성적 사유와 심미적인 궁극적 관심이 빚어낸 고백의 양상들이 깊이 무르녹아 있다 할 것이다. 이제 그 세계 안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들어가 또렷하고도 풍요로운 그의 전언에 귀 기울여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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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한정옥 시인은 성서적 인유引喩나 신앙적 고백을 담은 언어를 시집 곳곳에 전면화함으로써 종교적 상상력의 한 범례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이 점이 그의 독특한 특성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현대인의 영혼에 짙게 드리운 내면 진공 상태를 치유하려는 대안적 사유 방식으로써 그가 구축하는 종교적 상상력은 우뚝하게 다가온다. 또한 그가 노래하는 종교적 경험이란 우리의 마음을 원초적으로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반응으로써, 지정의知情意를 통합한 인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점에서 신성을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진 근대의 이성중심주의는 시인에게 깃들일 여지가 전혀 없다. 이러한 사유 방식을 바탕으로 한정옥 시인은 그 특유의 상상력을 펼쳐간다.
사람이 있는 풍경의 아름다움
한정옥의 시는 상실과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한 시간들을 넘어 새로운 생성과 도약의 순간을 구축해 가는 명품이다.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던 순간을 훌쩍 넘어서면서, 그 시간들로 하여금 세계 내적 원리를 긍정과 소망으로 바꾸어 가게끔 한다. 우리 시대가 기쁨과 평화보다는 우울과 불모성을 드러내는 정도가 강해져 갈 때, 한정옥의 시는 삶의 역설을 통한 종교적 긍정으로 훤칠하게 나아간다. 이러한 그만의 시 세계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기억에 토대를 두면서도, 시인이 그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견지한다. 그 긍정의 밑바닥에 바로 '무릎'이라는 핵심 이미지가 가로놓인다.
참으로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습니다
여러 날 뒤척이던 생각으로도
출렁거리는 시간 잡지 못하고
좋은 시절 다 지나가는 줄 몰랐습니다
무거운 생각들로 엎어져 있었습니다
소설小雪 지나 묵은 솔방울 떨어지고
새 이름 풀 이름 불러오던 일 접자
사람이 찾아오네요
사람이 있는 풍경
입이 열렸습니다
-「새벽 무릎」 전문
'새벽 무릎'은 아마도 오랜 기도의 시간을 은유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새벽 제단을 쌓아온 그에게 그동안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그는 뒤척이던 생각으로도 시간을 잡지 못하고 무거운 생각들에 늘 짓눌려 있었지만, 새벽 무릎의 공력으로 "소설小雪 지나 묵은 솔방울 떨어지고/새 이름 풀 이름 불러오던 일"을 마치자 "사람이 있는 풍경"을 맞은 것이다. 그 시간을 생각해 보면 "내 몸에 가시/무한은혜"(「부르시는 그날까지」)였으며 "몇 발자국 뒤로/마음에서 물러나자/비로소 가난해지는 마음"(「그가 네 길을 ─칼더를 생각하며」)을 통해 "마음 잘 풀어가는 사람들"(「감히 고백하건대」)을 만나게 된 과정이었다. 사람살이의 가능성이 새벽처럼 환하게 열린 것이다.
한정옥 시인은 무릎으로 가닿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가장 신성하고 근원적인 차원을 상상하게끔 해준다. 모든 근대적 징후들이 절정이자 황혼을 맞고 있는 이때, 시인은 종교적 사유와 실천을 통해 고통을 치유하고 예술로 승화해 가는 도정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것은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 대한 찬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구체적 외경과 긍정에서 가능했던 것일 터이다.
계시의 순간을 가져다주는 침묵의 의미
나아가 한정옥의 시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그 안에서 힘겨운 실존을 구성하는 자신에 대한 격정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세계 내적 존재로서의 운명에 대한 응시와 성찰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시의 표면에는 그의 몸속 깊이 새겨져 있을 상처의 흔적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것을 다스리며 치유해 가려는 주체의 의지가 지속적으로 관류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오랜 시간 속에서 자신이 겪은 실존적 경험들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파동치는 시간의 깊이를 쓰는 시인이다. 그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시 쓰기의 결실이 어떤 '계시啓示'로 다가오는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잎 지자 시냇물 서둘러 내려가고 골짝 더욱 깊어졌습니다. 적적함을 품어 안으니 모든 것이 한갓집니다. 적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긴 바람 골짝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면 소식이 한 묶음입니다.
이들이들한 사철 잎 쇠어져 싯푸른데,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것들이 더 뻣뻣합니다. 싸리 울타리 없다면 바람 한 발 물러서겠습니까. 에둘리면 각지지 않습니다.
산에 들어 서로 위한다는 말 하도 지극해서 아래 위 가장자리 중심 따로 없으니 돌올한 아름다움만 은은합니다. 두런거리다 보면 금세 새벽달 지니 바람 사나워도 입동산立冬山을 탑니다. 산간의 접빈다례接賓茶禮, 산에선 만나는 이가 누구든 마음에 환한 창 하나 뜨지 않을까요.
- 「침묵을 우려내다 4」 전문
침묵을 오래도록 우려내면서 시인은 스스로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잎이 지고 난 후의 깊어진 골짜기에는 '적적함'과 '한갓짐'이 이미 하나다. 시인은 소식 한 묶음을 안고 다시 올라오면 산에 들어 서로 위한다는 지극한 말을 침묵 속에서 듣는다. 중심과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침묵을 품어 안고 산간은 아름다운 돌올함으로 은은하기만 하다. 그 고요한 산간에서 손님을 맞고 차를 나누는 것은 "만나는 이가 누구든 마음에 환한 창 하나" 뜨게 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의 뼈 마디마디/흰 가시로 빛날"(「침묵을 우려내다 1」) 조건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침묵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침묵이 계시와 존재론적으로 등가가 되는 순간이다.
형이상학적 열망을 이어가려는 소중한 의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것처럼, 한정옥의 시는 깊은 인생론적 사색과 신앙적 자아의 내면적 고백이 어우러진 결실이었다. 특별히 이성과 신앙이 충돌하고 의식과 무의식이 끝없이 교차하면서 그의 서정적 주체는 표층과 심층, 빛과 어둠, 현상과 본질, 문면文面과 행간을 함께 읽어가는 역동성을 양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에서 절망 뒤에 피어나는 은혜의 심연을 느끼게 되고, 비극성 너머 있는 초월 의지를 놓치지 않으려는 독법讀法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긴장된 이중 독법을 그의 시에서 완성해 내는 것 또한 독자들이 수행해 가야 할 작업일 것이다.
이처럼 한정옥의 작품 안에는 다양한 정서적, 인지적 형질이 자연스럽게 얽혀 있다. 이때 그의 시에 나타나는 비극성은 희망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치를 투시함으로써 그 현실과 친화하려는 열망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그의 낭만적 의지 또한 도피의 산물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지상의 삶을 견디고 감당하고 극복하려는 상상적 고투인 셈이다. 초월적 지위에서 모든 텍스트의 권위를 보장하던 '성스러운 말씀Word'의 권위가 부정되고 모든 것이 속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에, 이처럼 종교적 상상력을 통한 형이상학적 열망을 이어가는 한정옥 시인의 의지는 매우 귀하고 소중하다.
목차
목차
청와헌에서 ______ 10
위에서 보면 원 ______ 11
그릿 시냇가 ______ 12
도배하는 날 ______ 13
흰 꽃 ______ 14
샤려니숲 ______ 15
나의 나 된 것은 ______ 16
다메섹에서 묻다 ______ 17
인자가 무엇이기에 ______ 18
그늘이고저 ______ 1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달라 ______ 20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______ 21
사흘 길 광야에서 ______ 22
근신 ______ 23
생각이 많았습니다 ______ 24
여호와의 산에 올라 ______ 25
입술을 티끌에 대다 ______ 26
사랑할 시간밖에는 ______ 27
응답 ______ 28
우거 ______ 29
2 부족한 자에게 존귀를
감히 고백하건대 ______ 32
험곡에 가도 ______ 33
부르시는 그날까지 ______ 34
고통이 유익 ______ 36
고라 자손의 시詩 ______ 37
새벽 무릎 ______ 38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______ 39
두 손 들다 ______ 40
쑥과 담즙 ______ 41
그가 네 길을 ______ 42
고요한 밤 ______ 43
흰 길 ______ 44
일탈 ______ 45
노을, 신비해요 ______ 46
노을, 처음인 듯 ______ 47
참 아름다워라 ______ 48
하농 연습 ______ 49
핀초 언덕 ______ 50
하고초 ______ 51
호사비오리 ______ 52
시수詩瘦 ______ 53
3 뭇별
섬 1 ______ 56
섬 2 ______ 57
섬 3 ______ 59
섬 4 ______ 60
섬 5 ______ 61
섬 6 ______ 62
섬 7 ______ 63
섬 8 ______ 64
섬 9 ______ 65
섬 10 ______ 66
섬 11 ______ 67
섬 12 ______ 68
섬 13 ______ 69
섬 14 ______ 70
섬 15 ______ 71
4 신을 벗다
침묵을 우려내다 1 ______ 74
침묵을 우려내다 2 ______ 76
침묵을 우려내다 3 ______ 77
침묵을 우려내다 4 ______ 78
침묵을 우려내다 5 ______ 79
침묵을 우려내다 6 ______ 80
침묵을 우려내다 7 ______ 81
침묵을 우려내다 8 ______ 82
침묵을 우려내다 9 ______ 83
침묵을 우려내다 10 ______ 84
침묵을 우려내다 11 ______ 85
침묵을 우려내다 12 ______ 86
침묵을 우려내다 13 ______ 87
침묵을 우려내다 14 ______ 88
침묵을 우려내다 15 ______ 90
┃해설┃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은은하게 내면을 울리는 '무릎'과 '침묵'의 시 ______ 91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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