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지 못하는 바람
이병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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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삼베의 결에 적힌 달보드레함의 시학
이병초(시인, 전북작가회의)
1.
산중 속의 산중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덕유산 자락 칠연폭포 근처에 시인 이병수가 살고 있다. 산이 내준 땅을 일궈 씨 뿌리고 거두며 600년 넘게 사람의 품을 넓혀온 동네. 예부터 선비골이었다는 이 동네에는 되글로 배워서 말글로 사용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선인들이 여기를 두문리(斗文里)로 쓴 모양이다.
여간한 일에는 언행을 서두르는 법 없고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되 매일 끼니 챙기기가 여북했을지라도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치들을 벌레처럼 대했다던 두문리 옛 선비의 혈맥이 이병수의 시편들 어디에 닿았는지 아직 알 길은 없다. 또한 그의 시 특질이 뭔지 그의 시편들 속 형상들은 삶의 행위에서 채취한 어떤 모양새를 간직하고 있는지 그것도 이번에 짚어볼 생각이다.
그는 문단에 데뷔한 뒤에도 바깥 출입을 삼가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데다 정말로 몇 년 만에 만났을 때도 자신의 농가꾼 근황을 끄집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시를 꺼낼 수 있었으랴. 어째서 여기 말씨는 전라도도 아니고 경상도도 아닌 독특한 말씨냐고, 그 이유가 뭐냐고 따질 수 있었으랴. 나를 만나면 왜 맨날 꾸지뽕 백숙만 사주냐고 산삼 백숙 좀 내놓으라고 떼쓸 수 없는 것처럼.
2.
그는 첫 시집 『뜨겁게 익은 하늘을 얼마나 달려가야 정점은 올까』(두엄, 2006)와 『달을 보니 별이 그립다』(두엄, 2019)는 시집을 냈다. 그러므로 지금 읽는 이 시집이 이병수의 세 번째 시집인데 그의 시편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 한쪽이 맑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편의 결결에 언뜻 눈물마저 비끼는 형상은 밤하늘을 밝히는 달빛이나 별빛과는 다른 질감이었다. 농사일에 접목된 삶의 행위를 원고지 위에 쏟아놨으되 문명적 색채나 순 싸구려 말장난이 끼어들기는커녕 사람의 정체가 원래 자연인이었음을 올 굵은 삼베 결의 화법으로 다가올 때면 내 마음이 서늘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병수 시편이 가진 삼베의 질감은 때로 쓰라렸다. 시의 숨결 마디마디에 오롯한 단어의 쓰임새가 소박하고 정갈하면서도 속정이 도타울지언정 시 바깥의 일상은 꽤 자주 농사꾼 이병수의 숨통을 조이곤 했던 것이다.
봄이 섬진강 나룻배 타고 수분령 고개를 너머와
할머니 치마를 반쯤 걷어 올리는 능청에
덕유산 하얀 눈은 달빛을 적시며 녹고 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하던데
덕산제 저수지 얼음장 위에 돌멩이가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양지바른 황골 바람 바위 아래
산수유꽃이 부지런 떨며 세상에 피어난 보람으로 웃고 있다
?
서둘러 헛간에 처박혀 봄날만 기다리고 있는
쟁기를 꼼꼼히 챙겨
이랑 긴 밭 빨리 갈아야 하고
천수답도 일찍이 갈아엎어야지
그래야 물도 가두고 모를 심지,?하면서도
논밭 갈아 곡식 심어 뭐 하겠나
목숨 줄 쥐고 천년 잘 나가던 쌀도
수입이란 죄명으로 싸 빠지고
톡 쏘는 고추도 문명의 화려함에 떠밀려 헐값이 되고
단백질 황태자로 살던 콩은 지은 죄 없이
천덕꾸러기로 떨어져 사가는 놈도 가뭄에 콩나듯 한다
이제,?농사는 짓지 말아야 않겠나
그러면,?농사 안 지면 뭘 먹고 살 긴 데
설마,?농사 안 진다고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하겠나
으름장이 아픔을 삭이며 꽃으로 피어난다
-「눈이 녹으면」, 전문.
시(詩)가 무엇인지도 단숨에 보여줄 수는 없지만 삶의 구체성을 도외시하는 언술이 시는 아닐 터이다. 이병수의 시가 촉발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 유통기한 지난 깡통처럼 버려진 오늘을 앓는다. 대대로 농사 지어먹은 논밭뙈기와 농사일 그리고 목숨의 근본인 자연을 순식간에 똥값으로 매겨버리는 야만의 경제를 앓고 있다. 논밭의 현실에 자본의 논리를 들이대는 부박한 거래 풍토에 농심은 천심(天心)이란 말도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글줄도 닿지 않는다는 점을 순 알몸뚱이로 들이받고 싶은 시의 욕망이 시의 곳곳에서 쓰라리게 자리하는 것이다.
돈만 된다면 조상의 혼백도 팔아먹는다는 시절에 사람의 체취가 간직된 언어미학이라니. 시에 적힌 헛간, 쟁기, 이랑, 모, 천수답 등의 단어에 맞물린 정서에는 모두 가난했고 사는 게 불편했어도 사람을 잃지 않았던 체취를 물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이런 단어들이 물고 있는 풍정은 아예 버려졌다. 이병수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종자들이 농촌을 거대한 양로원으로 만들어버렸는지를, 농사꾼들이 수확한 농작물을 정부가 제값을 받도록 정책을 똑바로 시행함으로써 맘 놓고 농사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논밭에서 거둔 농산물이 풍작이면 똥값이 되거나 아예 농작물을 수입하기도 한다.
시의 색채가 어둡다. 수입농산물이라는 이따위 얼토당토 않는 일을 너무 당해와서 인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의 시에 "이제, 농사는 짓지 말아야 않겠나"라는 자조적 색감도 드러낸다. 이 자조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농사꾼 전체에 묻는 것인지 아니면 반어적 하소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농사를 짓지 않으면 먹고살 게 없다는 시행을 되받아치듯 "설마, 농사 안 진다고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하겠나"에 뒤이어 "으름장이 아픔을 삭이며" 산수유꽃의 개화로 시가 마무리된다. 이를 침울한 반어라고 읽으면 오독일까. 철 따라 씨를 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1차 산업의 지루한 반복이 농사꾼 삶의 회로임을 이병수의 시가 모를 리 없다. 농사일을 작파하지 않는 한 누구도 이 회로에서 벗어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으리라. 평생 지어온 농사를 버릴까, 다시 지게에 거름짐을 질까- 이 문제는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농사일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 논밭을 지킨 분들 모두의 오늘이다. 하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답이 없었는지를 알았는지 그의 「눈이 녹으면」에 핀 산수유꽃이 불총에 댄 것처럼 시의 살결에 쓰리다.
내가 다 가져가도록 내어주는 말그리 골목길
올봄에도 할미꽃은 고개 숙여 바람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도 가져갈 것도 줄 것도 없는 말그리를 떠나지
못하고 논을 채우며 밭을 비우고 산다
모래댁이 시집을 오고 배골댁이 시집살이 했던 말그리에
부엉이 서너 번 울고 났더니 노인들
지팡이에 힘을 실어 요양병원 바라보며 자기 이름도 잊고 있다
주름진 손등에 계절은 변함없이 찾아오고
서리태 콩 황토밭에서 튼실하게 자라고
옥수수 밭둑에서 잘 크고 있다
나를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는 두문길에
세단차도 잊지 않고 지나가고
덕유산로에 리무진 투어 차도 지나쳐 간다
?
늘 그랬듯이 오늘도
-「두문길」, 전문.
한때 두문리를 '말글'이라고도 불렀고 지금도 동네 별칭으로 말그리로 불리는 모양이다. 말글을 입소리로 낼 때 발음하기가 까다롭기도 했을 테니 시에 적힌 말그리란 단어는 이해가 간다. 시골 동네가 그렇듯 새로워 보이는 것은 없다. 위에서 잠시 살펴보았듯 농사일을 작파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변함없이 지나가고 그 철에 맞춰 할미꽃이 피고 황토밭에 서리태며 옥수수가 잘 자라고 있다. 농작물이 사람처럼 "말그리를 떠나지/ 못하고 논을 채우며 밭을 비우고 있"는 것이다.
시는 이 풍정을 몸에 들이며 "부엉이 서너 번 울고 났더니 노인들/ 지팡이에 힘을 실어 요양병원 바라보며 자기 이름도" 잊었다는 시 구절을 얻는다. 동네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다. 한 자연인의 시간을 순식간에 이름도 잊은 노년으로 비약시켜버린 시의 보폭, 이것이 이병수 시가 갖는 특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동네의 모습은 두문리만의 풍경이 아니다. 농사꾼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흔하디흔한 오늘인 것이다.
이때 두문길에 '세단차'가 지나간다. 두문길에 잇대어져 있는 "덕유산로에 리무진 투어 차도 지나져 간"다. 논밭에 나가려고 나섰거나 아니면 병원에 갈 요량으로 큰길가에 나왔을- 그런 노인들 동네에 세단, 투어 차 등의 문명적 색감의 단어가 버젓이 지나간다. 시상이 돌연 생뚱해진다. 시의 끝부분에 비정상적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는 낌새는 없었다. 그런데 이 어색한 풍경이 "늘 그랬듯이 오늘도"라면서 시가 마무리되는 순간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생뚱맞은 현상이 익숙해지는 과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왜인가. 산골 중의 산골에 세단과 투어 차가 만나서 도대체 어떤 미학적 층위를 감내하고 있단 말인가. 우울한 스냅사진이라고 나는 쓴다. 주식과 AI와 양자역학이란 말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도 덕유산 자락 칠연폭포 근처는 농사를 지으며 사람들이 산다. 돈이 최고든 정보 문명이 최고든 그딴 것은 위에 잘난 것들에 맡기고 두문리 사람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호미질 삽질 괭이질로 농사꾼 삶의 이유를 밝힌다. 이쯤 되면 문명이나 자본에 소외되었다는 말 자체가 두문리에선 되레 궁색해질 법하다. 그러나 두문리의 스냅사진은 우울하다. 평생을 논밭에 맡긴 분들을 뒤로 내몰 듯 승용차와 투어 차가 속도감 있게, 도시와 농촌 그리고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묵살하듯 속도감 있게 비껴가는 정경은 올 굵은 삼베에 속살이 스친 것처럼 쓰리다.
하지만 이병수의 시는 의연하다.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비일상적인 현실을 남 얘기처럼 객관화하고 시의 내면을 아예 감춰버렸다. 시의 새 삶을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 「두문길」은 자연을 자본의 질서를 거절하는 시적 장치로만 허비할 뿐인 생태계 시학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농사일에 접목된 삶의 행위에 근거를 둔 시의 생명력을 농촌시로 한정 짓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농촌과 도시 또는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스냅사진의 동거- 이 지점이 현대를 사는 모두의 일상임을 환기하는 시의 욕망이 시의 몫이자 이병수 시의 현주소이겠다.
3.
뽕나무 숯가루에 불을 붙여서 어둠을 밝히는 불꽃놀이라니. 밤하늘에 튀어 올랐다가 방죽으로 지는 모습이 꽃과 같다고 해서 낙화놀이라고 부른다던가. 말그리 즉 두문리 사람들이 모두 방죽 가로 나와 무작정 탄성을 지르며 어깨춤이 저절로 어울렸을 법하다. 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조선까지 이어진 민속놀이지만 일제 때 거의 없어졌다가 2006년부터 두문리에서 다시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월 단오나 칠월 백중에 조선 팔도 곳곳에서 타올랐다던 불꽃놀이. 경상도 함안이며 안동, 부산에서도 행해진다는 불꽃놀이.
중장비 없이 삽과 괭이로 땅을 파고
비지땀 흘려가며 바지게로 흙을 운반하여
가뭄을 대비하여 윗담 방죽을 만들었다
작은 방죽 위에 가로세로 질러 외줄을 타고
말그리 사람들 손끝으로 뽕나무 숯가루에 불이 붙어
신이 감추어 놓은 여인의 치마 속 깊이 흩날리는 낙화 꽃
밤하늘이 옷고름 풀어 마음속 깊은 곳으로 포옹을 한다
전국에서 정신없이 달려와 보고 또 보고 싶은 불꽃
스님의 염불 소리보다 바람이 먼저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
?
지은 죄 있는지 없는지 신부님의 설교보다 더 깊이
낙화 불꽃은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부활하고 눈물을 감춘다
투정만 부리고 말썽만 일으키던 불효자식은
부모님의 인자한 영혼으로 파고들어 대못으로 박힌다
복은 지질이도 없는 보릿고개 못난 여인네 한이
낙화 꽃에 주렁주렁 매달려 물속 깊이 밤을 새운다
어머니 치마폭에 파묻혀 어리광만 피우던 막둥이
서당으로 달려가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을 닦아
낙화 불꽃으로 장원급제 꿈을 이루어 덩실덩실 춤을 춘다
-「말그리 밤하늘에 낙화불꽃이 피다」, 전문.
시에 신명이 난다. 마른 쑥 심지에 불을 붙이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피어난다는 꽃. 당신의 답답한 속내를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밤하늘에 찬란하게 터지는 꽃, 지신만 알고 있는 꿈의 갈피를 조목조목 속내로 들이며 저절로 환성이 되는 꽃. 여인의 치마 속 깊이 흩날린다는 꽃. 밤하늘이 옷고름을 풀도록 휘황하게 피어나는 꽃.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구경 온다는 불꽃. 방죽 양 끝에 매단 외줄을 타고 황홀하게 피고 지는 불꽃들에 반해 "스님의 염불 소리보다 바람이 먼저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던가. 신부님의 설교보다 더 깊이 더 오래 꽃을 피운다던가. 불효자식도 부모님의 영혼도 보릿고개에 시달렸던 여인네도 막둥이도 외로움도 서러움도 누렁이도 야옹이도 장원급제도 노름꾼도 도둑놈도 과부도 망나니도 머슴도 양반도 굶주림도 수배범도 얼자도 삼팔따라지 같은 이네 세월도 속절없이 맞물며 영육의 화신처럼 선명하게 타오른다는 두문리의 불꽃.
어떤 문헌에 이 불꽃놀이가 소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낙화놀이의 주된 기획자 이병수 시인도 문헌의 기록을 들먹이기보다는 예로부터 전해진 얘기를 전해줄 뿐이다. 하지만 문헌의 기록이 없다고 해서 이 불꽃놀이의 가치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이 놀이가 단오와 백중에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낙화놀이가 민중적 색채를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모내기라는 고단한 작업이 끝난 뒤에 즐기는 단오와 아예 머슴날이라고 규정한 백중에 행해졌기 때문이다. 두문리 서민들 모두가 놀이의 주체가 되어, 너나들이가 되어 노동의 고단함을 서로 위로하고 서로 위로를 받았을 터이다. 제 잇속에 눈먼 것들이 떵떵거리는 못난 세상- 사는 게 힘들고 고단할지라도 때로 사는 게 원통절통할지라도 밤하늘에 폭죽처럼 터지는 불꽃, 불꽃들을 즐기면서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는 목숨의 불씨를 틔웠을 것이다. 공동체라는 말이 없어도 두문리 사람들은 낙화놀이의 마당에서 스스로 두문리가 되고 두문산이 되고 덕유산이 되어 칠연폭포의 맑은 물소리가 되었을 터이다.
이병수 시에 흥겨움이 있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어떤 시를 써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밑그림과 같다. 그러나 삶이 그렇듯 이 밑그림에 색이 칠해지는 순간 본래의 뜻과 영 딴판으로 시가 써지기도 할 것이다. 이 점이 시의 행로를 내면에 들이는 시인의 서글픈 숙명인지도 모른다. 사실이 이럴지라도 이병수의 시는 「농업은 종합예술이다」에서와 같이 신바람 넘치는 시의 행로에 익숙해지리라. 시 질량의 매 순간을 그는 멀리서 찾지 않고 자신의 일상에서 찾을 줄 아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의 시편들이 고독이나 세월의 흔적에 메말라 있었으랴.
덕유산 만추의 저녁 그냥저냥 들 밭에서
살아왔던 날들 황혼에 깊게 빠져
단풍은 소슬바람에 비파를 뜯고
별은 갈대숲에서 숨어 속삭인다
한섬 씩 익어가던 뜨거웠던 날들
한 편의 시를 지어 구름에 달을 엮어
내 강가에 띄우고 그리다 그리다가
다 못 그린 당신 모습
당신 따라온 그림자까지
달빛 머무는 내 강물에 띄웠네
?
하늘이 선택한 이 세상에 태어나
뒤뚱거리는 걸음마로 뭉게뭉게 뜬구름이 쫓아
이만큼 달려온 세월 지금 어디쯤 왔을까
사철 벗은 바람은 쉼 없이 연정에 일렁이고
가을이 서럽도록 물들인 단풍
그대가 뿌려놓은 그리움으로
오늘도 당신을 그리고 있다.
- 「다 못 그린 당신」, 전문.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인생 고희를 넘겼어도 여전히 사춘기 소년 같은 시인 이병수. 사랑에는 늦었다는 말이 없다니 지금이라도 가슴 속에서 애타는 그 사람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누군들 그리운 사람이 없으랴, 누군들 그리운 그 사람의 이름을 가슴 속 깊이 꽁꽁 냉동 보관시킨 사연이 없으랴. 소슬바람에 비파를 뜯는 단풍잎처럼 그리운 그 사람에게 달려간들 흉이 되랴.
"한 섬씩 익어가던 뜨거웠던 날들"을 엮어 "뒤뚱거리는 걸음마로 뭉게뭉게 뜬구름이 쫓아/ 이만큼 달려온 세월"을 엮어 그 사람에게 달려가면 바람도 살갑겠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새삼 이런 감정이 남사스럽지 않냐는 시인 이병수의 눈매가 보인다. 서글서글하면서도 깊은 눈망울 이면에 분홍빛을 애써 감추는 눈매에는 세월이 남긴 잔금들이 꽤 굵게 긁혀 있다. 하지만 눈매에 적힌 잔금이 무슨 거리낄 일이 되랴. 하물며 사나이 이병수가 가는 길에 장애가 되랴. 누구나 나이를 먹고 누구나 때가 되면 가을산이 되는 게 인간사의 이치인 것처럼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된 그리움을 꺼내어 이를 찾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더 지체할 일도 아니다.
끝내 "다 못 그린 당신"이 먼저 시인 이병수를 찾아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기대할 만한 일이 못 된다. 그건 이병수 자신의 그리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시인 이병수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게 순리가 아닐까. 사랑을 받고 미움을 당하는 수동적 자세보다 자신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진리보다 귀하다는 것을 시인 이병수가 모를 리 없으리라. 다른 것에는 다 자신이 있으면서도 자기 사랑에만 유독 얼굴이 붉어지는 소년 이병수. 내 좋은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는 충분하겠다. 내게 기꺼운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의 씨앗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세월의 뒤뚱거리는 걸음은 자랑스럽지 않은가. 몇 년 전인가 칠연폭포 근처 꾸지뽕 백숙집에서 이병초의 못 나빠진 사랑 얘기를 듣다가 말고 그는 힘주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과 그리움이 이 세계를 지키는 또 한 개의 보루라고.
4.
괭이를 어깨에 메고 산밭으로 들어서는 시인 이병수. 흙냄새 올라오는 산길에서 만나는 별별 새소리가 반갑고 귀를 낮추면 덕유산 계곡이 낳은 개울물 소리가 들릴 터이다. 이슬이 채이는 밭두렁 풀섶에 여치가 반짝 튀어 오를 법하고 이 여름을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이른 아침부터 매미가 오달지게 짝을 불러낼지도 모르겠다.
이런 자연이 오랜 벗이어서일까. 이병수의 시편엔 어려운 말이 없다. 시적 상황을 억지로 꾸며댄 흔적도 없다. 예쁘고 귀엽고 뭔가 좀 모자라고 그래서 더 살가운 모양새들이 올 굵은 삼베 같은 시의 품에 오롯하다. 삶의 행위에서 파생된 언어가 물질화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시단 풍토며 이미지나 서법 등의 외래 문학 이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상을 응시하는 이병수의 시의 총명함 속에는 담채색 서정의 무늬가 어려 있다.
하지만 이병수 시인이 걸림새없이 써 내려간 시구절 중에서 '무임으로 승차하여'(「세월」)가 마음에 아팠다. 그는 시 편편에 자신의 내력을 거의 내보이지 않았다. 시의 행로에 일상의 작은 상처들이 언표되기는 했지만 그 상처의 내막이나 구체적 정황을 시의 뒤편에 은폐시켜 놓은 것이다. 그의 시편마다 두문리 선비 기질이 유전형질로 완강하게 뿌리 박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에 보인 600년의 세월도 어쩌지 못하는 산업화. 그것의 담보로 유채꽃이며 "양귀비 버들마편초 핑크뮬리 해바라기 금계국 샤스타데이지"가 피었지만 시인은 이런 자연 현상이 반가워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무임으로 승차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세금 잘 내고 국가의 농정책에 순응했을 터이며 누구에게 감정살 언행도 안 했을 터이다. 무임으로 승차하지 않고 논밭에서 뼈 빠지게 세월을 평생 동안 지불했어도 그의 일상이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인다. 그의 시가 작금의 인간사를 모르고 창작되었을 리는 없다. 세계는 이성과 지성으로 조화롭게 운행되는 게 아니라 터무니없는 모순과 폭력과 혼돈의 아수라장임을, 야만의 경제가 판을 치는 막장의 현재가 어제오늘 일이 아님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이런 면에서 「세월」의 '무임으로 승차하여' 은 반어로 읽어야 하리라.
「세월」분만이 아니다. 그의 시편들 속에는 농사꾼 일상의 절망감에서 돋아난 햇살 같은 언어의 씨앗들이 꽤 자주 발견된다. 자신의 시편이 산간벽지에 갇힌 감정의 잉여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본과 문명에서 벗어나고 싶을수록 되레 이것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햇살 같은 언어의 씨앗에 빗댄 것으로도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편들 속에 발견되는 외로움과 막막함의 뿌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성에 있지 않고 사회적 소외감에 더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 글은 이병수 시의 특질로 여겨지는 작품들만으로 발문의 얼개를 짰다. 누구나 사람으로 와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이병수 시인만큼은 이런 이치에 거리를 둔 것으로 느껴진다. 사람보다 먼저 농사꾼으로 이 땅에 온 것 같고 농사짓는 일상을 먼저 챙긴 뒤에 사람이라는 말을 실감했을 것이며 그런 뒤에 시인이라는 말에 자신의 존재감을 실감했을 것 간다. 여타의 빛나는 작품들은 눈이 맑은 독자들 몫으로 남긴다. 이는 내가 못 본 이병수 시의 미학적 층위를 야물게 발굴해 달라는 요구임과 동시에 농경문화에 목숨의 끈을 잇댄 일상의 생명력을 더 끈질기게 형상화해달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타 시인들 시가 기계 문명적 색채에 오염되었든 또 다른 여타의 시인들 시에 나타난 자연이 공존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본의 질서를 거절하는 시적 장치에 불과하더라도 이런 풍토에 눈비음하지 않는 이병수의 시. 세상이 눈에 안 보이는 막된 것들의 험한 짓거리에 함부로 패대기쳐지더라도 이런 세태에 의연한 이병수의 시. 올 굵은 삼베의 결에 적힌 '달보드레'함의 정서를 아끼듯 그는 오늘도 시의 일상을 추리고 있을 터이다.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여인을 그리워하듯.
이병초(시인, 전북작가회의)
1.
산중 속의 산중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덕유산 자락 칠연폭포 근처에 시인 이병수가 살고 있다. 산이 내준 땅을 일궈 씨 뿌리고 거두며 600년 넘게 사람의 품을 넓혀온 동네. 예부터 선비골이었다는 이 동네에는 되글로 배워서 말글로 사용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선인들이 여기를 두문리(斗文里)로 쓴 모양이다.
여간한 일에는 언행을 서두르는 법 없고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되 매일 끼니 챙기기가 여북했을지라도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치들을 벌레처럼 대했다던 두문리 옛 선비의 혈맥이 이병수의 시편들 어디에 닿았는지 아직 알 길은 없다. 또한 그의 시 특질이 뭔지 그의 시편들 속 형상들은 삶의 행위에서 채취한 어떤 모양새를 간직하고 있는지 그것도 이번에 짚어볼 생각이다.
그는 문단에 데뷔한 뒤에도 바깥 출입을 삼가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데다 정말로 몇 년 만에 만났을 때도 자신의 농가꾼 근황을 끄집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시를 꺼낼 수 있었으랴. 어째서 여기 말씨는 전라도도 아니고 경상도도 아닌 독특한 말씨냐고, 그 이유가 뭐냐고 따질 수 있었으랴. 나를 만나면 왜 맨날 꾸지뽕 백숙만 사주냐고 산삼 백숙 좀 내놓으라고 떼쓸 수 없는 것처럼.
2.
그는 첫 시집 『뜨겁게 익은 하늘을 얼마나 달려가야 정점은 올까』(두엄, 2006)와 『달을 보니 별이 그립다』(두엄, 2019)는 시집을 냈다. 그러므로 지금 읽는 이 시집이 이병수의 세 번째 시집인데 그의 시편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 한쪽이 맑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편의 결결에 언뜻 눈물마저 비끼는 형상은 밤하늘을 밝히는 달빛이나 별빛과는 다른 질감이었다. 농사일에 접목된 삶의 행위를 원고지 위에 쏟아놨으되 문명적 색채나 순 싸구려 말장난이 끼어들기는커녕 사람의 정체가 원래 자연인이었음을 올 굵은 삼베 결의 화법으로 다가올 때면 내 마음이 서늘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병수 시편이 가진 삼베의 질감은 때로 쓰라렸다. 시의 숨결 마디마디에 오롯한 단어의 쓰임새가 소박하고 정갈하면서도 속정이 도타울지언정 시 바깥의 일상은 꽤 자주 농사꾼 이병수의 숨통을 조이곤 했던 것이다.
봄이 섬진강 나룻배 타고 수분령 고개를 너머와
할머니 치마를 반쯤 걷어 올리는 능청에
덕유산 하얀 눈은 달빛을 적시며 녹고 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하던데
덕산제 저수지 얼음장 위에 돌멩이가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양지바른 황골 바람 바위 아래
산수유꽃이 부지런 떨며 세상에 피어난 보람으로 웃고 있다
?
서둘러 헛간에 처박혀 봄날만 기다리고 있는
쟁기를 꼼꼼히 챙겨
이랑 긴 밭 빨리 갈아야 하고
천수답도 일찍이 갈아엎어야지
그래야 물도 가두고 모를 심지,?하면서도
논밭 갈아 곡식 심어 뭐 하겠나
목숨 줄 쥐고 천년 잘 나가던 쌀도
수입이란 죄명으로 싸 빠지고
톡 쏘는 고추도 문명의 화려함에 떠밀려 헐값이 되고
단백질 황태자로 살던 콩은 지은 죄 없이
천덕꾸러기로 떨어져 사가는 놈도 가뭄에 콩나듯 한다
이제,?농사는 짓지 말아야 않겠나
그러면,?농사 안 지면 뭘 먹고 살 긴 데
설마,?농사 안 진다고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하겠나
으름장이 아픔을 삭이며 꽃으로 피어난다
-「눈이 녹으면」, 전문.
시(詩)가 무엇인지도 단숨에 보여줄 수는 없지만 삶의 구체성을 도외시하는 언술이 시는 아닐 터이다. 이병수의 시가 촉발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 유통기한 지난 깡통처럼 버려진 오늘을 앓는다. 대대로 농사 지어먹은 논밭뙈기와 농사일 그리고 목숨의 근본인 자연을 순식간에 똥값으로 매겨버리는 야만의 경제를 앓고 있다. 논밭의 현실에 자본의 논리를 들이대는 부박한 거래 풍토에 농심은 천심(天心)이란 말도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글줄도 닿지 않는다는 점을 순 알몸뚱이로 들이받고 싶은 시의 욕망이 시의 곳곳에서 쓰라리게 자리하는 것이다.
돈만 된다면 조상의 혼백도 팔아먹는다는 시절에 사람의 체취가 간직된 언어미학이라니. 시에 적힌 헛간, 쟁기, 이랑, 모, 천수답 등의 단어에 맞물린 정서에는 모두 가난했고 사는 게 불편했어도 사람을 잃지 않았던 체취를 물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이런 단어들이 물고 있는 풍정은 아예 버려졌다. 이병수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종자들이 농촌을 거대한 양로원으로 만들어버렸는지를, 농사꾼들이 수확한 농작물을 정부가 제값을 받도록 정책을 똑바로 시행함으로써 맘 놓고 농사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논밭에서 거둔 농산물이 풍작이면 똥값이 되거나 아예 농작물을 수입하기도 한다.
시의 색채가 어둡다. 수입농산물이라는 이따위 얼토당토 않는 일을 너무 당해와서 인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의 시에 "이제, 농사는 짓지 말아야 않겠나"라는 자조적 색감도 드러낸다. 이 자조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농사꾼 전체에 묻는 것인지 아니면 반어적 하소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농사를 짓지 않으면 먹고살 게 없다는 시행을 되받아치듯 "설마, 농사 안 진다고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하겠나"에 뒤이어 "으름장이 아픔을 삭이며" 산수유꽃의 개화로 시가 마무리된다. 이를 침울한 반어라고 읽으면 오독일까. 철 따라 씨를 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1차 산업의 지루한 반복이 농사꾼 삶의 회로임을 이병수의 시가 모를 리 없다. 농사일을 작파하지 않는 한 누구도 이 회로에서 벗어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으리라. 평생 지어온 농사를 버릴까, 다시 지게에 거름짐을 질까- 이 문제는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농사일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 논밭을 지킨 분들 모두의 오늘이다. 하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답이 없었는지를 알았는지 그의 「눈이 녹으면」에 핀 산수유꽃이 불총에 댄 것처럼 시의 살결에 쓰리다.
내가 다 가져가도록 내어주는 말그리 골목길
올봄에도 할미꽃은 고개 숙여 바람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도 가져갈 것도 줄 것도 없는 말그리를 떠나지
못하고 논을 채우며 밭을 비우고 산다
모래댁이 시집을 오고 배골댁이 시집살이 했던 말그리에
부엉이 서너 번 울고 났더니 노인들
지팡이에 힘을 실어 요양병원 바라보며 자기 이름도 잊고 있다
주름진 손등에 계절은 변함없이 찾아오고
서리태 콩 황토밭에서 튼실하게 자라고
옥수수 밭둑에서 잘 크고 있다
나를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는 두문길에
세단차도 잊지 않고 지나가고
덕유산로에 리무진 투어 차도 지나쳐 간다
?
늘 그랬듯이 오늘도
-「두문길」, 전문.
한때 두문리를 '말글'이라고도 불렀고 지금도 동네 별칭으로 말그리로 불리는 모양이다. 말글을 입소리로 낼 때 발음하기가 까다롭기도 했을 테니 시에 적힌 말그리란 단어는 이해가 간다. 시골 동네가 그렇듯 새로워 보이는 것은 없다. 위에서 잠시 살펴보았듯 농사일을 작파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변함없이 지나가고 그 철에 맞춰 할미꽃이 피고 황토밭에 서리태며 옥수수가 잘 자라고 있다. 농작물이 사람처럼 "말그리를 떠나지/ 못하고 논을 채우며 밭을 비우고 있"는 것이다.
시는 이 풍정을 몸에 들이며 "부엉이 서너 번 울고 났더니 노인들/ 지팡이에 힘을 실어 요양병원 바라보며 자기 이름도" 잊었다는 시 구절을 얻는다. 동네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다. 한 자연인의 시간을 순식간에 이름도 잊은 노년으로 비약시켜버린 시의 보폭, 이것이 이병수 시가 갖는 특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동네의 모습은 두문리만의 풍경이 아니다. 농사꾼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흔하디흔한 오늘인 것이다.
이때 두문길에 '세단차'가 지나간다. 두문길에 잇대어져 있는 "덕유산로에 리무진 투어 차도 지나져 간"다. 논밭에 나가려고 나섰거나 아니면 병원에 갈 요량으로 큰길가에 나왔을- 그런 노인들 동네에 세단, 투어 차 등의 문명적 색감의 단어가 버젓이 지나간다. 시상이 돌연 생뚱해진다. 시의 끝부분에 비정상적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는 낌새는 없었다. 그런데 이 어색한 풍경이 "늘 그랬듯이 오늘도"라면서 시가 마무리되는 순간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생뚱맞은 현상이 익숙해지는 과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왜인가. 산골 중의 산골에 세단과 투어 차가 만나서 도대체 어떤 미학적 층위를 감내하고 있단 말인가. 우울한 스냅사진이라고 나는 쓴다. 주식과 AI와 양자역학이란 말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도 덕유산 자락 칠연폭포 근처는 농사를 지으며 사람들이 산다. 돈이 최고든 정보 문명이 최고든 그딴 것은 위에 잘난 것들에 맡기고 두문리 사람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호미질 삽질 괭이질로 농사꾼 삶의 이유를 밝힌다. 이쯤 되면 문명이나 자본에 소외되었다는 말 자체가 두문리에선 되레 궁색해질 법하다. 그러나 두문리의 스냅사진은 우울하다. 평생을 논밭에 맡긴 분들을 뒤로 내몰 듯 승용차와 투어 차가 속도감 있게, 도시와 농촌 그리고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묵살하듯 속도감 있게 비껴가는 정경은 올 굵은 삼베에 속살이 스친 것처럼 쓰리다.
하지만 이병수의 시는 의연하다.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비일상적인 현실을 남 얘기처럼 객관화하고 시의 내면을 아예 감춰버렸다. 시의 새 삶을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 「두문길」은 자연을 자본의 질서를 거절하는 시적 장치로만 허비할 뿐인 생태계 시학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농사일에 접목된 삶의 행위에 근거를 둔 시의 생명력을 농촌시로 한정 짓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농촌과 도시 또는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스냅사진의 동거- 이 지점이 현대를 사는 모두의 일상임을 환기하는 시의 욕망이 시의 몫이자 이병수 시의 현주소이겠다.
3.
뽕나무 숯가루에 불을 붙여서 어둠을 밝히는 불꽃놀이라니. 밤하늘에 튀어 올랐다가 방죽으로 지는 모습이 꽃과 같다고 해서 낙화놀이라고 부른다던가. 말그리 즉 두문리 사람들이 모두 방죽 가로 나와 무작정 탄성을 지르며 어깨춤이 저절로 어울렸을 법하다. 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조선까지 이어진 민속놀이지만 일제 때 거의 없어졌다가 2006년부터 두문리에서 다시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월 단오나 칠월 백중에 조선 팔도 곳곳에서 타올랐다던 불꽃놀이. 경상도 함안이며 안동, 부산에서도 행해진다는 불꽃놀이.
중장비 없이 삽과 괭이로 땅을 파고
비지땀 흘려가며 바지게로 흙을 운반하여
가뭄을 대비하여 윗담 방죽을 만들었다
작은 방죽 위에 가로세로 질러 외줄을 타고
말그리 사람들 손끝으로 뽕나무 숯가루에 불이 붙어
신이 감추어 놓은 여인의 치마 속 깊이 흩날리는 낙화 꽃
밤하늘이 옷고름 풀어 마음속 깊은 곳으로 포옹을 한다
전국에서 정신없이 달려와 보고 또 보고 싶은 불꽃
스님의 염불 소리보다 바람이 먼저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
?
지은 죄 있는지 없는지 신부님의 설교보다 더 깊이
낙화 불꽃은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부활하고 눈물을 감춘다
투정만 부리고 말썽만 일으키던 불효자식은
부모님의 인자한 영혼으로 파고들어 대못으로 박힌다
복은 지질이도 없는 보릿고개 못난 여인네 한이
낙화 꽃에 주렁주렁 매달려 물속 깊이 밤을 새운다
어머니 치마폭에 파묻혀 어리광만 피우던 막둥이
서당으로 달려가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을 닦아
낙화 불꽃으로 장원급제 꿈을 이루어 덩실덩실 춤을 춘다
-「말그리 밤하늘에 낙화불꽃이 피다」, 전문.
시에 신명이 난다. 마른 쑥 심지에 불을 붙이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피어난다는 꽃. 당신의 답답한 속내를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밤하늘에 찬란하게 터지는 꽃, 지신만 알고 있는 꿈의 갈피를 조목조목 속내로 들이며 저절로 환성이 되는 꽃. 여인의 치마 속 깊이 흩날린다는 꽃. 밤하늘이 옷고름을 풀도록 휘황하게 피어나는 꽃.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구경 온다는 불꽃. 방죽 양 끝에 매단 외줄을 타고 황홀하게 피고 지는 불꽃들에 반해 "스님의 염불 소리보다 바람이 먼저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던가. 신부님의 설교보다 더 깊이 더 오래 꽃을 피운다던가. 불효자식도 부모님의 영혼도 보릿고개에 시달렸던 여인네도 막둥이도 외로움도 서러움도 누렁이도 야옹이도 장원급제도 노름꾼도 도둑놈도 과부도 망나니도 머슴도 양반도 굶주림도 수배범도 얼자도 삼팔따라지 같은 이네 세월도 속절없이 맞물며 영육의 화신처럼 선명하게 타오른다는 두문리의 불꽃.
어떤 문헌에 이 불꽃놀이가 소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낙화놀이의 주된 기획자 이병수 시인도 문헌의 기록을 들먹이기보다는 예로부터 전해진 얘기를 전해줄 뿐이다. 하지만 문헌의 기록이 없다고 해서 이 불꽃놀이의 가치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이 놀이가 단오와 백중에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낙화놀이가 민중적 색채를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모내기라는 고단한 작업이 끝난 뒤에 즐기는 단오와 아예 머슴날이라고 규정한 백중에 행해졌기 때문이다. 두문리 서민들 모두가 놀이의 주체가 되어, 너나들이가 되어 노동의 고단함을 서로 위로하고 서로 위로를 받았을 터이다. 제 잇속에 눈먼 것들이 떵떵거리는 못난 세상- 사는 게 힘들고 고단할지라도 때로 사는 게 원통절통할지라도 밤하늘에 폭죽처럼 터지는 불꽃, 불꽃들을 즐기면서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는 목숨의 불씨를 틔웠을 것이다. 공동체라는 말이 없어도 두문리 사람들은 낙화놀이의 마당에서 스스로 두문리가 되고 두문산이 되고 덕유산이 되어 칠연폭포의 맑은 물소리가 되었을 터이다.
이병수 시에 흥겨움이 있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어떤 시를 써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밑그림과 같다. 그러나 삶이 그렇듯 이 밑그림에 색이 칠해지는 순간 본래의 뜻과 영 딴판으로 시가 써지기도 할 것이다. 이 점이 시의 행로를 내면에 들이는 시인의 서글픈 숙명인지도 모른다. 사실이 이럴지라도 이병수의 시는 「농업은 종합예술이다」에서와 같이 신바람 넘치는 시의 행로에 익숙해지리라. 시 질량의 매 순간을 그는 멀리서 찾지 않고 자신의 일상에서 찾을 줄 아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의 시편들이 고독이나 세월의 흔적에 메말라 있었으랴.
덕유산 만추의 저녁 그냥저냥 들 밭에서
살아왔던 날들 황혼에 깊게 빠져
단풍은 소슬바람에 비파를 뜯고
별은 갈대숲에서 숨어 속삭인다
한섬 씩 익어가던 뜨거웠던 날들
한 편의 시를 지어 구름에 달을 엮어
내 강가에 띄우고 그리다 그리다가
다 못 그린 당신 모습
당신 따라온 그림자까지
달빛 머무는 내 강물에 띄웠네
?
하늘이 선택한 이 세상에 태어나
뒤뚱거리는 걸음마로 뭉게뭉게 뜬구름이 쫓아
이만큼 달려온 세월 지금 어디쯤 왔을까
사철 벗은 바람은 쉼 없이 연정에 일렁이고
가을이 서럽도록 물들인 단풍
그대가 뿌려놓은 그리움으로
오늘도 당신을 그리고 있다.
- 「다 못 그린 당신」, 전문.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인생 고희를 넘겼어도 여전히 사춘기 소년 같은 시인 이병수. 사랑에는 늦었다는 말이 없다니 지금이라도 가슴 속에서 애타는 그 사람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누군들 그리운 사람이 없으랴, 누군들 그리운 그 사람의 이름을 가슴 속 깊이 꽁꽁 냉동 보관시킨 사연이 없으랴. 소슬바람에 비파를 뜯는 단풍잎처럼 그리운 그 사람에게 달려간들 흉이 되랴.
"한 섬씩 익어가던 뜨거웠던 날들"을 엮어 "뒤뚱거리는 걸음마로 뭉게뭉게 뜬구름이 쫓아/ 이만큼 달려온 세월"을 엮어 그 사람에게 달려가면 바람도 살갑겠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새삼 이런 감정이 남사스럽지 않냐는 시인 이병수의 눈매가 보인다. 서글서글하면서도 깊은 눈망울 이면에 분홍빛을 애써 감추는 눈매에는 세월이 남긴 잔금들이 꽤 굵게 긁혀 있다. 하지만 눈매에 적힌 잔금이 무슨 거리낄 일이 되랴. 하물며 사나이 이병수가 가는 길에 장애가 되랴. 누구나 나이를 먹고 누구나 때가 되면 가을산이 되는 게 인간사의 이치인 것처럼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된 그리움을 꺼내어 이를 찾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더 지체할 일도 아니다.
끝내 "다 못 그린 당신"이 먼저 시인 이병수를 찾아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기대할 만한 일이 못 된다. 그건 이병수 자신의 그리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시인 이병수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게 순리가 아닐까. 사랑을 받고 미움을 당하는 수동적 자세보다 자신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진리보다 귀하다는 것을 시인 이병수가 모를 리 없으리라. 다른 것에는 다 자신이 있으면서도 자기 사랑에만 유독 얼굴이 붉어지는 소년 이병수. 내 좋은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는 충분하겠다. 내게 기꺼운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의 씨앗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세월의 뒤뚱거리는 걸음은 자랑스럽지 않은가. 몇 년 전인가 칠연폭포 근처 꾸지뽕 백숙집에서 이병초의 못 나빠진 사랑 얘기를 듣다가 말고 그는 힘주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과 그리움이 이 세계를 지키는 또 한 개의 보루라고.
4.
괭이를 어깨에 메고 산밭으로 들어서는 시인 이병수. 흙냄새 올라오는 산길에서 만나는 별별 새소리가 반갑고 귀를 낮추면 덕유산 계곡이 낳은 개울물 소리가 들릴 터이다. 이슬이 채이는 밭두렁 풀섶에 여치가 반짝 튀어 오를 법하고 이 여름을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이른 아침부터 매미가 오달지게 짝을 불러낼지도 모르겠다.
이런 자연이 오랜 벗이어서일까. 이병수의 시편엔 어려운 말이 없다. 시적 상황을 억지로 꾸며댄 흔적도 없다. 예쁘고 귀엽고 뭔가 좀 모자라고 그래서 더 살가운 모양새들이 올 굵은 삼베 같은 시의 품에 오롯하다. 삶의 행위에서 파생된 언어가 물질화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시단 풍토며 이미지나 서법 등의 외래 문학 이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상을 응시하는 이병수의 시의 총명함 속에는 담채색 서정의 무늬가 어려 있다.
하지만 이병수 시인이 걸림새없이 써 내려간 시구절 중에서 '무임으로 승차하여'(「세월」)가 마음에 아팠다. 그는 시 편편에 자신의 내력을 거의 내보이지 않았다. 시의 행로에 일상의 작은 상처들이 언표되기는 했지만 그 상처의 내막이나 구체적 정황을 시의 뒤편에 은폐시켜 놓은 것이다. 그의 시편마다 두문리 선비 기질이 유전형질로 완강하게 뿌리 박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에 보인 600년의 세월도 어쩌지 못하는 산업화. 그것의 담보로 유채꽃이며 "양귀비 버들마편초 핑크뮬리 해바라기 금계국 샤스타데이지"가 피었지만 시인은 이런 자연 현상이 반가워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무임으로 승차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세금 잘 내고 국가의 농정책에 순응했을 터이며 누구에게 감정살 언행도 안 했을 터이다. 무임으로 승차하지 않고 논밭에서 뼈 빠지게 세월을 평생 동안 지불했어도 그의 일상이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인다. 그의 시가 작금의 인간사를 모르고 창작되었을 리는 없다. 세계는 이성과 지성으로 조화롭게 운행되는 게 아니라 터무니없는 모순과 폭력과 혼돈의 아수라장임을, 야만의 경제가 판을 치는 막장의 현재가 어제오늘 일이 아님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이런 면에서 「세월」의 '무임으로 승차하여' 은 반어로 읽어야 하리라.
「세월」분만이 아니다. 그의 시편들 속에는 농사꾼 일상의 절망감에서 돋아난 햇살 같은 언어의 씨앗들이 꽤 자주 발견된다. 자신의 시편이 산간벽지에 갇힌 감정의 잉여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본과 문명에서 벗어나고 싶을수록 되레 이것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햇살 같은 언어의 씨앗에 빗댄 것으로도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편들 속에 발견되는 외로움과 막막함의 뿌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성에 있지 않고 사회적 소외감에 더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 글은 이병수 시의 특질로 여겨지는 작품들만으로 발문의 얼개를 짰다. 누구나 사람으로 와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이병수 시인만큼은 이런 이치에 거리를 둔 것으로 느껴진다. 사람보다 먼저 농사꾼으로 이 땅에 온 것 같고 농사짓는 일상을 먼저 챙긴 뒤에 사람이라는 말을 실감했을 것이며 그런 뒤에 시인이라는 말에 자신의 존재감을 실감했을 것 간다. 여타의 빛나는 작품들은 눈이 맑은 독자들 몫으로 남긴다. 이는 내가 못 본 이병수 시의 미학적 층위를 야물게 발굴해 달라는 요구임과 동시에 농경문화에 목숨의 끈을 잇댄 일상의 생명력을 더 끈질기게 형상화해달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타 시인들 시가 기계 문명적 색채에 오염되었든 또 다른 여타의 시인들 시에 나타난 자연이 공존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본의 질서를 거절하는 시적 장치에 불과하더라도 이런 풍토에 눈비음하지 않는 이병수의 시. 세상이 눈에 안 보이는 막된 것들의 험한 짓거리에 함부로 패대기쳐지더라도 이런 세태에 의연한 이병수의 시. 올 굵은 삼베의 결에 적힌 '달보드레'함의 정서를 아끼듯 그는 오늘도 시의 일상을 추리고 있을 터이다.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여인을 그리워하듯.
목차
목차
저자
저자
이병수 1953년 무주 안성 출생. 2000년 《순수문학》으로 등단. 시집??『뜨겁게 익은 하늘을 향해 얼마나 달려가야 종점은 올까』, 『달을 보니 별이 그립다』, 공저?『겨울새가 젖은 날개로 날아와 앉았다』, 『그대가 사는 마을에 가고 싶어 편지를 쓴다』.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회원, (사)한국작가회의 무주지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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