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주의의 종언과 예수님의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
바로 보는 역설의 <로마서>의 시각
조동화의 『칼뱅주의의 종언과 예수님의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는 〈칼뱅주의가 가진 믿음에 대한 탐욕적 이해의 극복〉,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란 무엇인가〉 등 바로 보는 역설의 〈로마서〉의 시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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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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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은 행위와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므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하였고 의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였습니다(롬1:17).
그 말씀은 구원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 바와 같이, 의인 다윗도 상한 마음으로 회개한 바와 같이 의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죄의 필연을 가지고 있으므로(롬5:12, 갈3:22, 롬11:32)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자신이 범한 율법을 올바로 행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 의에 이를 수 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믿지 않으면 행할 수 없고, 믿을 때 행할 수 있으므로 사도바울은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함과(롬2:13) 동시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였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될 때 온전한 사람(엡4:13), 곧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율법의 행위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율법의 행위가 아니면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일조와 각종 절기와 제사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그 누구보다 철저히 행하였지만 외식으로 행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믿음을 버렸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마23:23).
다시 말하면 의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는 '죄의 결정력의 속박(죄의 필연)' 이것이 대속의 믿음의 대전제이고, 〈로마서〉의 대전제이고, 긍휼과 대속의 믿음의 성립 조건입니다. 이로써 의인도 믿음(대속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인 정의를 행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의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죄의 필연에 매여 있으므로 무궁한 긍휼로써 서로의 죄를 용서하여 죄로 인하여 발생하는 증오와 정죄함과 원수됨이라는 죄의 악한 영향력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율법을 범한 것을 회개하여 올바로 행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 예수님이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더 나은 의'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율법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죄의 필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죄의 삯으로 영원한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이고(롬7:12),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롬7:10).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죄의 결정력에 속박되어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라는 규정에 의하여 죄의 삯으로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야 하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탄식한 이유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거나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죄의 결정력의 속박에 의하여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이 우리를 생명(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영원한 사망이라는 저주를 불러오는 역설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죄의 필연은 율법의 저주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으로 인하여
범죄를 더하게 만들어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죄의 필연, 그것이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율법이 가진
죄와 사망의 법을 발생시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는 죄의 결정력의 속박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가지게 되면 그 누구도 율법을 행하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율법을 지키기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15:32)"라는 사도바울의 말씀과 같이 먹고 마시자 하면서 모든 죄의 근원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육신에 있게 하여(롬7:5) 율법을 지키지 않는 범죄를 더하게 하고(롬5:20) 죄가 왕처럼 지배하게(롬5:21) 하고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롬7:13)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입니다(롬7:5).
사도바울은 죄의 결정력의 속박으로 일어나는 율법의 저주와, 범죄를 더하게 하고(롬5:20)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롬7:13),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에 대하여 율법이 가진 "죄와 사망의 법(롬8:2)"이라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각자의 신앙고백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구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믿음으로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위의 성경말씀은 사도바울이 오직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함과(롬2:13) 동시에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누구든지 믿어야 행할 수 있으므로 행위와 동일체임을 말합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형을 따르는 제자 된 참된 믿음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 된 삶을 사는 것의 최소한은 믿음으로 회개하여 율법의 행함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인 '더 나은 의'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끊임없이 자라가는, 깨어 있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것은(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범한 죄를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올바로 율법을 행하는 것을 말하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제자 된 삶은 믿음으로 회개하여 율법의 행함이 끊임없이 일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인 '더 나은 의'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는 깨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2. 이 책의 기본 구성 - 예수님의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
완결의 복음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인 '더 나은 의'를 구성하는 것은 정의와 긍휼과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임을 귀납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그 구성상 가장 치밀하고 과학적이고 완결된 복음서입니다.
〈마태복음〉 저자(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구성하는 정신은 정의와 긍휼과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임을 귀납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을 통하여 우리가 믿음의 삶에서 반드시 싸워 지켜야 하는 것은 정의와 긍휼과 대속의 믿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를 구성하고 있는 정의와 긍휼과 대속의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마귀의 계략과 그 계략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말씀하였습니다(마4:1-11).
두 번째로 예수님은 칠복에서 구원받은 자의 영성, 곧 심령이 가난한 자의 영성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심령이 가난한 자의 영성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 온유에까지 자라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씀하였습니다(마5:1-12).
세 번째로 예수님은 구원의 조건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5:20). 예수님이 정의 내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버렸던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23:23)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확고히 가질 때 회개하게 하는 대속의 믿음이 동력이 되어 정의와 긍휼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화시켜갈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공의가 충만한 완성된 정의의 계명을 새롭게 주었습니다. 그 정의의 계명은 긍휼이 충만하고, 긍휼로 성립되는 공의가 완전하여 정의의 이름으로조차도 폭력이 발생하지 않고, 평화가 존재할 수 없는 죄의 결정력의 속박 속에서도 평화를 이루게 하는 계명입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를 내세적, 현세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완전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라는 율법의 행위는
죄를 전제로하기 때문에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자신이 범한 율법을 온전히 행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에 이를 수 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자라가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믿음은 행위와 죄 사함을
동시에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는 죄의 결정력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완전한 의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더 나은 의'라는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더 나은 의'는 완전하지 않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곧 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더 나은 의'를 이루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자신이 범한 정의를 회복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더 나은 의'는 행위의 미완이므로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행위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끊임없이 성화되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따라서 '더 나은 의'가 가진 함의는 '더 나은 의'라는 율법의 행위와 대속의 믿음을 같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한 것 또한 대속의 믿음은 회개하여 자신이 범한 율법을 온전히 행하게 하는 율법의 행위를 이루는 것이므로(롬3:31) 대속의 믿음은 행위와 죄 사함을 동시에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3)"라고 말씀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은 죄의 결정력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롬3:27-28)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으면 행할 수 없으므로 믿어야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나은 의'를 구성하는 것을
함의로 구체적으로 정의(定意)로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구체적인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의) 예수님은 첫 번째 구원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이 율법(정의)을 지켜 행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였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사도바울 또한 다음과 같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3)
위 성경말씀의 공통점은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철저히 율법을 지켜 행하였음에도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표현될 정도의 막강한 종교권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자신들이 영광 받고 탐욕을 채울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되는, 성회로 모이는 것과 월삭과 안식일과 할례와 제사와 십일조와 같은 표면적인 율법들은 철저히 지켰지만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고(마23:23)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실천하는 계명들인 정의를 폐하였거나(막7:11) 행하더라도 사랑이 소멸된 외식(마6:2)으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철저히 지향하였던 표면적인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에게도 무거운 짐이고, 하나님이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사1:11-17). 그러므로 사람들에게도 무거운 짐이 되어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있어도 더 중요한 정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마23:23).
(긍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긍휼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마6:14-15, 마18:35).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에 이르게 하는 무궁한 긍휼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마18:22).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에 이르게 하는 무궁한 긍휼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용서하지 못하면, 정의의 잣대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이 세상에는 정죄함과 증오와 원수 됨이라는 죄의 악한 영향력이 넘쳐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의 정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의 도구가 되어 사탄의 계략에 이용됩니다.
긍휼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에서 두 번째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므로 긍휼은 대속의 믿음보다 우선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하는 죄를 지었고, 전도한 교인을 자신보다 두 배나 더 지옥에 들어가게 하는 죄를 지었고, 선지자 아벨의 피에서 사가랴의 피까지 담당할 정도로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짓는 등(마23:13-36) 일곱 가지 화를 받을 만큼 큰 죄를 지었던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들은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 먹는 것조차 비판할 정도로 죄인들을 향한 비판과 정죄함이 너무나 강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용서하여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인 긍휼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있어도 율법의 더 중한 긍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마23:23).
그러한 그들의 비판에 대하여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그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죄인의 눈 속에 있는 티만큼 작은 죄는 보고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자기 눈 속의 들보만 한 죄는 깨닫지 못하는 것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믿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 자신을 말미암지 않고는, 곧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고, 사도바울 또한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요14:6).
우리가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 행할 수 있으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의 결정력의 속박에 의하여 아무리 정의와 긍휼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행한다 할지라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대속의 믿음은 회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행2:38, 눅24:47) 회개의 목적인, 자신이 지은 죄에서 돌이켜 회개 이전보다 더 나은 율법의 정의와 긍휼을 행하여 '더 나은 정의'와 긍휼을 이루는 것입니다.
앞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라는 말씀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라는 말씀으로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은 율법의 행위를 더욱 굳게 세우는 것이며 율법에 더욱 복종하게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에 더하여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의 행위를 이루게 한다고 하였습니다(롬8:3-4).
죄 사함을 받는 대속의 믿음은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하여 회개 이전보다 '더 나은 의'라는 율법의 행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결정력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더 나은 의'를 이루어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에 의한 회개를 통하여 회개 이전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룬다는 것은 완전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나은 의'로 자신의 믿음의 분량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함을 말합니다(엡4:13).
우리는 죄의 결정력의 속박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므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어떤 율법을 범한다 할지라도 언제든지 단번에 드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자신이 범한 계명을 바르게 행하게 되면 죄 사함을 받아 의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롬10:4)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믿음을 버렸다고 하였는데(마23:23) 그것은 정의와 긍휼을 범한 것을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돌이키는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지지 않았던 대속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이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루는 세 번째 구원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조건으로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신 것은 원죄 이후 죄의 결정력의 속박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의 자유의지가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더 나은 의'를 이루어가게 하는 의지로서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곧, 원죄 이후의 자유의지는 완전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더 나은 의'를 이루기 위한 의지로 전환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더 나은 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의 생명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견고하게 유지하게 하였습니다. '더 나은 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는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의 능력으로 율법의 행위의 크기 또는 순종의 크기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게 하는 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신
'더 나은 의 '라는 율법의 행위는 쉽고 가볍습니다.
정의는 율법 중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계명들이므로 정의를 행함의 이익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고 서로의 무거운 짐을 나누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므로 쉼을 얻겠다 하였고(마11:28-30),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라는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나은 의'라는 율법의 행위는 그들이 버렸던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23:23)을 조금이라도 되찾으면 되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은 쉽고 가볍습니다.
모든 사람은 정의와 긍휼을 가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도록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정의와 긍휼을 조금이라도 되찾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정의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무거운 짐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일5:3)" 하였으므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 서로의 무거운 짐을 나누는 것이므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만큼 각자의 짐은 쉽고 가벼워지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더 중요한 계명인 정의보다
율법 중에서 표면적 계명이 우선할 때 율법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마23:2) 표현할 정도로 막강한 종교권력을 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인 정의를 버렸고(마23:23),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자신들이 영광 받기 위하여 율법 중에서 성회로 모이는 것과 월삭과 각종 제사와 절기를 지키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십일조 등과 같은 표면적 계명만을 철저히 행하거나, 율법 중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계명들인 정의를 행하더라도 외식으로 행하였습니다(마6:2).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인 정의를 버리고(마23:23) 표면적인 율법만을 행하면 행할수록 그 행위의 이익은 모두 종교권력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들에게 돌아가고 반대로 백성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됩니다.
율법의 더 중요한 계명인 정의를 행하게 하는 것을 무력화 시키는
칼뱅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거역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성경은 절대적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구성하는 요소는 정의와 공의라 하였습니다(시89:14, 97:2).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시89:14)
곧, 정의와 공의는 절대적 주권자인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고 우리가 가지는,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의를 흔드는 것은 절대적 주권자의 권위를 흔드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은 사도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므로(롬8:3-4), 곧 성령은 율법의 행위를 이루게 하는 일을 하므로,율법에서의 자유를 근거로 구원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다 하고 행위는 상급의 문제일 뿐 구원의 문제와는 상관없다 하는 칼뱅주의자들의 주장은 성령이 하시는 일인 율법을 행하게 하는 일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용서받지 못합니다(마12:32).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나니(갈5:16-17)"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은 모든 죄의 근원인 육체의 탐욕을 이루지 못하게 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율법의 행위를) 이루게 합니다/롬8:3-4)
또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칼뱅은 율법의 행위는 구원과는 상관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양심으로서 지켜 행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지만 율법에서의 자유는 오히려 율법을 더 잘 지키게 한다는 이해 불가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본질적으로는 구원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는(롬8:3-4) 성령을 거역하는 주장입니다.
목차
목차
ㆍ 칼뱅주의의 종언을 시작하면서
Ⅰ. 칼뱅주의가 가진 믿음에 대한 탐욕적 이해의 극복
1. 믿음에 대한 탐욕적 이해 - 율법에서의 자유
ㆍ 율법의 더 중요한 계명인 정의와 표면적 계명
ㆍ 구원이 부재하는 믿음에 대한 탐욕적 이해 - 칼뱅의 율법에서의 자유
2. 자유의지의 흐름과 원죄 이후의 자유의지의 새로운 정신
- 정의와 긍휼과 믿음
ㆍ 원죄 이후 믿음으로 주어진 '더 나은 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
ㆍ 자유의지의 위기와 회복과정
ㆍ 원죄 이후 자유의지의 새로운 정신
ㆍ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한 또 한 번 더 자유의지의 소멸의 위기
ㆍ 십자가의 피로 불어넣어진 최후의 자유의지의 생명력
3. 칼뱅의 예정론의 해체
- 칼뱅의 예정론의 저주와 예정론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
ㆍ 사도바울의 예정 받은 자
ㆍ 영화롭게 된 예정 받은 자
ㆍ 온유의 영성 영화로움
ㆍ 땅에서의 심각한 불평등을 하늘에서 평등을 회복하는 자
ㆍ 예정 받은 자에게 적용되는 공의
ㆍ 칼뱅의 예정의 저주와 예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
Ⅱ.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란 무엇인가
1.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으로서의 정의, 정의는 정의로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ㆍ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정의의 범위
ㆍ 평화의 왕 예수님이 완성하신 정의
ㆍ 정의,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ㆍ 죽은 정의와 정의의 생명
ㆍ 예수님이 지향하였던 율법주의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지향하였던 율법주의
ㆍ 정의는 정의로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ㆍ 신권의 음모 - 사탄이 정의를 폐하는 방식
2. 긍휼이란 무엇인가
구원의 소망으로서의 긍휼, 긍휼로서 실현하는 하나님의 공의
ㆍ 긍휼의 탄생 - 우리의 원죄로 드러낸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
ㆍ 소망으로서의 긍휼(긍휼의 또 다른 이름 소망)
ㆍ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의 시작점
ㆍ 죄의 결정력의 속박 속에서 공의를 실현하는 긍휼
ㆍ 긍휼의 원칙 '무궁함'
긍휼을 위한 욥과 요나와 모세 이야기
ㆍ 긍휼 없는 심판
ㆍ 욥 - 긍휼 없는 자가 받은 긍휼 없는 심판
ㆍ 요나 - 긍휼이 풍성하지 않은 자가 받은 긍휼 없는 심판
ㆍ 모세 - 긍휼이 풍성한자가 긍휼에서 실족하여 받은 긍휼 없는 심판
3. 바로 보는 역설의 〈로마서〉의 시각 - 믿음이란 무엇인가
ㆍ 율법을 굳게 세우는 대속의 믿음
ㆍ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서 이루어지는 것
ㆍ 믿음의 탄생, 아브라함의 믿음
ㆍ 믿음의 상징
ㆍ 정의와 공의가 젖과 꿀처럼 흐르게 하는 대속의 믿음의 탄생
ㆍ 생명의 율법 그러나 죄와 사망의 역설
ㆍ 죄 사함을 주는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 그러나 율법을 굳게 세우는 역설
ㆍ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두 개의 믿음
ㆍ 사도바울이 말한, 율법에 대한 탐욕적으로 이해하는 자가 받을 저주
ㆍ 바로 보는 역설의 〈로마서〉와 믿음에 대한 탐욕적 이해
ㆍ 구약의 율법에 따라 동물의 피로 드리는 대속의 제사가 가진 한계
ㆍ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제사) 그 생명의 성령의 법
ㆍ 헛된 논쟁 - 칭의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 / Ⅲ,Ⅳ,Ⅴ
ㆍ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를 시작하면서
Ⅲ. 예수님이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싸워 지킨 세 개의 복음의 정신
우리가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싸워 지켜야 하는
복음의 정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
ㆍ 예수님이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싸워 지킨 복음의 정신
1. 첫 번째 시험 - 정의를 놓고 벌이는 영적 전쟁
ㆍ 정의에 대한 믿음의 성립
ㆍ 율법의 더 중요한 계명인 정의에 대한 믿음의 성립
2. 두 번째 시험 - 긍휼을 놓고 벌이는 영적 전쟁
ㆍ 긍휼에 대한 믿음의 성립
ㆍ 긍휼 그 시간의 탐욕과의 싸움에서의 승리
3. 세 번째 시험-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을 놓고 벌이는 영적 전쟁
ㆍ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믿음의 성립
ㆍ 정의와 긍휼을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가게 하는 대속의 믿음의 성립
Ⅳ. 영성 칠복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에 까지 성화되어가는 영성의 전개과정
ㆍ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성의 전개
ㆍ 칠복의 구성
1. 칠복 - 심령이 가난한 자 편(구원 받은 자의 영성)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ㆍ 육의 소욕을 비워 온유에 까지 자라가고 있는 자
①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성하는 첫 번째 영성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정의를 주리고 목마르게 구하는 자)
②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성하는 두 번째 영성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5:7)"
(자신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한 무궁한 용서와 사랑의 회복의지)
③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성하는 세 번째 영성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7)" 5:8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
④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성하는 네 번째 영성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10)"
(개인적 구원을 삶을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극복해야하는 박해)
2. 칠복 - 애통하는 자 편(구원을 확장해 가는 영성)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ㆍ 전도 하는 자(개인적 구원 그 다음의 영적 과제)
① 애통하는 자를 구성하는 첫 번째 영성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전도의 열매를 맺는 자)
② 애통하는 자를 구성하는 두 번째 영성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 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 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 이 박해를 받았느니라(마5:11-12)"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삶을 사는 애통하는 자가 극복해야 하는 박해)
3. 칠복 - 온유한 자 편(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자란 영성)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심령이 가난함의 완성-심령이 가난한 자의 완성된 영성)
Ⅴ. 예수님이 말씀하신 쉽고 가벼운 구원의 조건 '더 나은 의'
1. 깨어있는 믿음 - 믿음의 순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자라가게 하는 믿음의 순환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쉽고 가벼운 구원의 조건 - '더 나은 의'
ㆍ 죄의 결정력의 속박 속에서 믿음으로
ㆍ 이루어가는 율법의 행위, 정의와 긍휼
ㆍ '더 나은 의'가 가진 함의
ㆍ '더 나은 의'에 대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말씀
ㆍ '더 나은 의'에 대한 예수님이 내린 정의
ㆍ '더 나은 의' - "온전한 사람(엡4:13)"
ㆍ '더 나은 의' - 열 처녀의 비유 깨어있는 믿음
3.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의 완성
ㆍ 구원에 이르는 길
ㆍ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 - '더 나은 의'
ㆍ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의 완성 - 온전한 사람의 온전함
저자
저자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인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믿음으로 가슴을 찢는 듯이 말씀에 의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였고 기도하는 만큼 회개하였고 회개하는 만큼 깨끗해졌고 깨끗해진 만큼 하나님, 곧 성경이 보였습니다. 이 책을 쓴 저의 경력은 회개라는 경력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는 경력이자 자격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를 청결하게 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곧 성경에 대한 앎을 여는 큰 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은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요14:21, 요일2:3). 그러므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버렸던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인 정의와 긍휼에 대하여 회개의 믿음으로 끊임없이 '더 나은 의'를 이루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죄의 필연에 가두어 두었다 하였으므로(갈3:22, 롬11:32, 롬3:9, 롬3:10)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전함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율법의 행위가 쉼 없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고 있을 때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 하였습니다(엡4:13).
저는 지금도 끊임없이 회개하고 있고 기도를 쉬지 않는 만큼 회개도 쉬지 않을 것이고 회개의 기도를 쉬지 않는 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고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에까지성화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좀 더 많이 갖추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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