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계절
오일구 장편소설
위로의 바다를 떠다니는 남녀의 비리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오일구의 소설 『위로의 계절』. 사랑하는 바다를 버리고 도시를 선택한 김미영. 그러나 바다와의 단절은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참혹한 일을 당하게 되고 자신의 영혼을 만난다. 영혼을 오가며 방황하는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떠나간 여자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벽에 은거한 박정훈. 그는 어느 날 종이를 찢고 있는 낯선 여자를 만난다. 깊은 슬픔에 빠진 그녀의 몸짓은 박정훈을 또다시 집착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두 여자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박정훈 앞에 그를 집착으로 몰아가는 또 다른 존재가 끝없이 나타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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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위로의 바다를 떠다니는 남녀의 비리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조수 웅덩이에 갇힌 아기 물고기 같은 여자 김미영
사랑하는 바다를 버리고 도시를 선택한 김미영. 그러나 바다와의 단절은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참혹한 일을 당하게 되고 자신의 영혼을 만난다. 영혼을 오가며 방황하는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끝없는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은 남자 박정훈
떠나간 여자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벽에 은거한 박정훈. 그는 어느 날 종이를 찢고 있는 낯선 여자를 만난다. 깊은 슬픔에 빠진 그녀의 몸짓은 박정훈을 또다시 집착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두 여자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박정훈 앞에 그를 집착으로 몰아가는 또 다른 존재가 끝없이 나타나는데…….
출판사 서평
가을보다 앞서 다가와 우리의 상처를 끌어안은 계절-
상처의 계절이 끝나고 위로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위로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을 심도 있게 그려낸 소설『위로의 계절』
소설 『위로의 계절』이 독자에게 던지는 단 하나의 물음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지하철역에서 정신이 분열한 한 여자가 위로를 갈망하며 허깨비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녀가 당신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민다면, 당신의 위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면 당신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함께 춤을 출 수 있나요?
우리는 함께 종잇조각을 흩뿌리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춤을 추면서,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우리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경멸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창피하지도 모욕감도 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추는 춤이,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내 춤이, 내가 뿌린 위로의 종자씨가 통로로, 도시로, 세상으로 퍼져나가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랐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함께 위로의 춤을 추며 그녀의 상처를,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기를 바랐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탁한 공기에 갇혀 있는 세상이 청명한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어머니처럼 정신이 분열한 사람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랐다. -소설 『위로의 계절』중에서
책속으로 추가
나는 바닥을 둘러보았지만 그가 말한 종잇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가 팔을 뻗어 카페 안쪽에 있는 빈자리를 가리켰다.
"손에 있는 것도 저한테 주시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주시겠습니까?"
'손……?'
그러고 보니 손 안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손을 펼치자 잘게 찢어진 종이 쪼가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주위에 흩어져 있는 종이 쪼가리들이 보이고, 내 머리 위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바닥으로 빛의 조각들이 쏟아져 내린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종잇조각을 뿌려대기라도 한 걸까?'
등골이 오싹했다.
'아, 어떡해. 나 어떡해.'
환한 광채가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몸이 기울었다.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앞치마를 두른 사내의 모습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손님들의 모습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어깨가 바닥에 닿는 순간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김미영이 다가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 김미영 3 중에서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도 종이를 찢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몸을 움츠리고 종이를 찢고 있는 그녀의 온몸이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흐느낌은 흡사 위로를 갈구하는 몸짓 같았는데, 그 처절한 갈망의 몸짓은 나를 전율케 했다.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음에도 위로를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영혼을 힘겹게 감내하고 있었다.
종이를 찢을 때 그녀의 흐느낌은 잦아들었지만 이내 다시 떨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의 몸짓에 이끌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참담한 향기를 맡고 말았다.
그녀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열차가 막 압구정역을 출발할 때였다. 그녀는 열차 안을 넓게 둘러보고는 슬픈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종이를 찢고 열차 안을 둘러보며 또다시 슬픈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이 그녀의 슬픈 눈은 행복한 눈빛으로, 그녀의 미소는 소리 없는 웃음으로 변해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손에 쥐고 있는 종잇조각을 그녀의 머리 위로, 사방으로 뿌려대기 시작했다. 뒷골을 타고 내려온 찌릿한 전율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온몸에 실을 감은 채 웃고 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 박정훈 4 중에서
'……나를 위로해주세요, 나는 위로받고 싶어요.'
유리처럼 매끈한 해수면에서 일어난, 울컥거리는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위태로워 보였다. 곧 먹구름이 폭풍우로 변해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어서 도망가요,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어요!'
'괜찮아요, 바다가 나를 보호해줄 거예요. 바다는 나를 사랑하니까…….'
'폭풍우에 휘말리면 소용없어요!'
'바다는 나를 사랑해요.'
'아가씨!'
'바다는 나를 사랑해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눈꼬리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박정훈 4 중에서
나는 그녀가 바위틈에 숨어서 폭풍우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그 믿음으로 숨을 쉰다.
그러나 그런 가식적인 믿음으로 내 마음의 불안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급기야 내 불안은 폭풍우에 갈기갈기 찢긴 그녀의 육신이 해안가에 흩어져 있는 환영으로 화하고, 내 마음은 또다시 나를 비굴한 도피자로 몰아갔다. 내 목구멍은 뇌우에 노출된 갈대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녀를 찾아,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민 그녀의 손을 맞잡고 함께 춤추며 그녀의 영혼을 위로해야 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있는 폭풍우를 잠재워야 했다. 그것 말고는 딴 방법이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하로 달려갔다. 나는 미친 듯이, 광기에 갇힌 사람처럼 열차를 오가며 그녀를 찾았다. 나는 교통약자석과 승객을 비집고 다니며 배추흰나비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고 내 육신도 그녀의 육신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들었다. 잊어야 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그녀의 눈동자를 지워야 했다. 그녀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 박정훈 4 중에서
3일 동안의 행적, 무단결근을 한 이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모든 건 의문투성이고 남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이런 삶을 원치는 않았지만, 이제 내 일상은 평범하지 않은 삶이 되어버렸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바다로 돌아갈까?'
바다가 보였다. 해안가에 서서 유리처럼 매끈한 밤바다의 물결을 따라 흐르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아이도 보였다. 기억 속의 그날처럼 여자아이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파도가 쓸리는 소리, 자갈이 달그락거리며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밤바다를 아름답게 하는 소리, 생명의 소리, 자유를 부르는 소리, 여자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소리였다. 나를 기쁘게 하는 떨림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아서 밤이 내리면 맨발로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태양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뜨거운 모래에 앉아서 어둠 속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별을 헤아렸다. 어느 날엔가는 수평선으로 해가 솟아오를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바다, 내 마음의 안식처…….'
마침내 내 귓전에도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 열차에서 들은 소리였다.
'미쳤나 봐!' - 김미영 4 중에서
'내가 이곳에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나는 망설였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내 삶을 정신과 의사 외에는 그 누구도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의사가 물어보면?'
무단결근을 했는데 무단결근을 한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내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내 휴지통에 종잇조각을 버린다고 해야 하나, 무단결근을 한 3일 동안의 행적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낯익은 하얀 타일과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이 떠오르면 누군가 기억을 차단하고 나선다고 해야 하나, 하루 종일 휴지통을 지키고 앉아 있었는데도 종잇조각이 나타난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 내 숄더백에 종잇조각을 넣는다고 해야 하나, 세상 사람이 나만 바라본다고 해야 하나, 나는 안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내가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 같다고, 그것 말고 또 있을까?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많은 일을 다 기억한다면 머리가 터지겠지. 그래서 사라지는 거야. 저절로 사라지는 거야. 어쩌면 스스로 없애 버리는 건지도 몰라.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오묘한 거야.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잊어버리고, 착각하며 사는 거야.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사는 거야. - 김미영 4 중에서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꿈인가 싶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꿈.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로하는 그녀의 마음이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쪼그라들어 할딱이는 내 가슴은 사랑으로 부풀어 오르고 내 모든 상처와 슬픔과 집착은 한꺼번에 사라졌다. 나는 눈을 뜨고 그녀의 손을 맞잡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은행나무 밑에 서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내 손을 맞잡고 있는 그녀는 일순간에 열기가 되어 사라졌다. 나를 안아준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만든, 그녀의 형상을 한 나였다. 나는 처절한 슬픔에 잠긴 채 인도를 따라 걸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향한 내 집착의 골은 그녀의 형상을 한 또 하나의 나를 만들 만큼 깊어졌다. - 박정훈 5 중에서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이, 용암처럼 흐르는 자동차들의 풍경이 각막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보였다. 도심에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는 젖어 있었다. 어디선가 커엉! 커엉! 하는, 거대한 물고기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암초의 냄새, 심해의 냄새도 날아왔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소리를 쫓았다. 대기에서 나타난 거대한 물고기들이 정류장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등에 태우고 빌딩 사이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었다.
내 시선은 물고기의 행렬을 쫓았다. 물고기의 넓은 등과 넓은 등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느러미와 꼬리는 햇살을 받아 매끈하게 빛나고 있었다. 행렬 뒤로 멀리 물빛이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해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바위는 언제나처럼 돌올했다. 심술궂은 파도는 오늘도 활처럼 휜 해안선을 부드럽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곶은 유리 같은 해수면 아래에 잠기어 있었다. 해안가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이 나를 향해 몸을 흔들어댔다.
'미영아, 우리도 친구들 곁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서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춤추며 살자. 친구들이 우리의 관객이 되어줄 거야!'
내 마음속의 심연에 살고 있는 미영이가 나를 바다로 이끌었다.
'그래, 처음부터 도시는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니었어. 그동안 너도 많이 힘들었지.'
어두운 대기에서 불어온 묵직하고 유연한 바람이 물결이 되어 나를 바닷속으로 이끌었다. 바닷속에는 해수면을 뚫고 내려온 햇살이 수면 아래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바닷속 한켠에, 울창한 해조의 숲에 펼쳐져 있는 나만의 아지트가 보였다. 외로움의 뿌리가 자란 곳, 고독을 잉태한 곳……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쌍쌍이 짝을 짓고 있는 온갖 생명들 사이로 여자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는 혼자였다. 나는 항상 혼자였다. - 김미영 5 중에서
내 그림자를 소멸하고 사라진 태양을 찾고 있는 지금의 내 일상은, 그녀가 내 그림자를 밟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내 삶은, 그녀를 향한 애증의 늪이다. 십여 년 전, 대책 없는 사랑에 빠져든 그 순간에도, 사랑의 열매가 터지고 집착의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사랑에 빠져 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숨통을 열어놓는 사랑, 간절히 원하면 죽음조차도 잊게 하는 사랑. 사랑은 고통과 희망을 섞어 완전한 사랑을 행할 것 같은 오만을 마음에 심는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사랑을 향해 치닫게 한다. 인간의 심성에 판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사랑은 슬픔이라는 놈의 배만 불린다.
그러나 사랑은 내 삶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막아주는 보호막과 같아서 나를 절망과 격리하고 행복 속을 비행하게 하며 끝내는 오묘한 떨림으로 승화한다.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 뒤에 펼쳐진 놀라운 세상 ― 도대체 어떤 쓸데없는 인간이 사랑의 광희를 겨우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던가 ― 을 만난다. 나는 매일 그녀와 함께 그런 세상, 사랑 뒤에 있는 세상을 여행한다. 전생, 현생, 내생을 윤회하는 그런 이별의 고통이 없는 완벽한 낙원을……. - 박정훈 6 중에서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는 듯이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열리지 않고, 새까만 눈동자 속에 있는 희망의 잔광이 깜박거리다 이윽고 꺼졌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의 심해로 이어진 끝없는 길을 따라 유영하는 한 마리의 인어를 보았다. 인어가 심해로 사라진 순간 그녀의 눈꺼풀이 카메라 셔터처럼 닫히며 그녀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타일 위로. - 박정훈 6 중에서
오피스텔을 나섰다. 골목은 온통 푸른빛에 잠겨 있었다. 내 마음도 날아갈 듯이 기쁘기에 상쾌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새벽에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직장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랄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 처절한 몸부림의 대가로 얻었다. 지금 몸담고 있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나는 125장의 이력서와 125장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나는 자기소개서의 지면 위에 김미영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모두 적어 125명의 인사 담당자에게 보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엄마의 기억과 아빠의 슬픈 눈동자, 냉소적인 할머니, 하나뿐인 남동생, 설명으로 풀어갈 수 없는, 심해에 사는 그 누군가를 향한 사랑, 바닷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 소중하고 귀한 내 흔적의 조각들은 자기소개서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타인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내가 보낸 125명의 김미영은 아직도 고물상 구석에 처박혀 있는 컴퓨터의 하드에 갇혀 있거나, 제지회사의 야적장에서 재생용지로 다시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 정말 지루하고 허기지는 시간이었다 ― 면접을 보는 기적 같은 순간을 상상하는 동안 나는 모든 것에서 소외된 채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아야 했다. 스스로의 위안이 희망이 되고, 죽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유혹하고 있을 때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나를 새벽으로 이끌었다.
출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도시에도 바다가 있다는 걸 몰랐다. 바다를 품은 새벽이 있다는 걸 몰랐다. 여자아이로 살았던 시절 푸르스름한 빛에 잠긴 새벽 바다를 걷고, 부산과 부산 근교 그리고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새벽에 파묻혀 살았지만 바닷가에 살 때 나는 새벽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아이였고,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새벽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 급박한 삶을 살았다.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로 올라와서 힘겹게 직장을 구하고 안정을 찾고 나서야 나는 바다를 닮은 도시의 새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새벽은 내 마음의 바다다. - 김미영 6 중에서
목차
목차
김미영 1
박정훈 2
김미영 2
박정훈 3
김미영 3
박정훈 4
김미영 4
박정훈 5
김미영 5
박정훈 6
김미영 6
작가의 말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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