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자유(양장본 Hardcover)
남과 북을 사랑한 삼석(三石) 지창보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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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사랑한 지창보 선생의
고독과 자유의 길
1923년 평양 근교에서 태어나 광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주오(中央)대학(1943)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규슈의 야하타 곡사포 부대에 배치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서울에서 연세대학원을 다니며 국대안 반대운동을 한 연유로 우익 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따라서 미국으로 도피가 살길이라 생각한 저자는 1953년 기독교세계봉사회 부산 근무 시절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 후 듀크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1959)를 받고 웨이크포레스트대학과 드루대학을 거쳐 롱아일랜드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다.
교수시절 월남전 반대를 외치며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저자는 1971년 북미 교포사회에서는 최초로 이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만나기 위해 극비리에 알제리를 통해 평양을 방문한다. 때문에(방북과 민주화운동 경력) 군사정부의 혹독한 감시를 받았고, 따라서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듬해(1994)에야 무려 40여년 만에 남녘 조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조국 이북과 이남에 대해서 동등한 애정을 가진 저자는, 격랑의 우리 현대사 속에서 고뇌해 온 진보적 지식인의 굴곡진 삶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고독과 자유의 길
1923년 평양 근교에서 태어나 광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주오(中央)대학(1943)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규슈의 야하타 곡사포 부대에 배치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서울에서 연세대학원을 다니며 국대안 반대운동을 한 연유로 우익 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따라서 미국으로 도피가 살길이라 생각한 저자는 1953년 기독교세계봉사회 부산 근무 시절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 후 듀크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1959)를 받고 웨이크포레스트대학과 드루대학을 거쳐 롱아일랜드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다.
교수시절 월남전 반대를 외치며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저자는 1971년 북미 교포사회에서는 최초로 이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만나기 위해 극비리에 알제리를 통해 평양을 방문한다. 때문에(방북과 민주화운동 경력) 군사정부의 혹독한 감시를 받았고, 따라서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듬해(1994)에야 무려 40여년 만에 남녘 조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조국 이북과 이남에 대해서 동등한 애정을 가진 저자는, 격랑의 우리 현대사 속에서 고뇌해 온 진보적 지식인의 굴곡진 삶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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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민족의 수난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지창보 선생의 삶!
올해로 99세를 맞으신 저자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평양근교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오(中央)대학에 유학했다.
저자는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울컥해서 벌떡 일어나 의견을 말하는 성격 때문에 그 시대의 민감한 이슈에 직접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유학 중 '조선인 유학생 특별지원병 궐기대회' 때 육당 최남선에게 "총독부에 매수당해서 왔으면 그저 솔직히 나가 죽으라고 하지, 왜 빙빙 돌려서 말을 합니까? 우리는 절대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겠소."라고 돌직구를 날려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또 징집을 피해 평양으로 도피중인 처지에도 불구하고 연극 공연을 보다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즐겁게 웃고 있는 관중들을 보고 피가 끓어 갑자기 강단으로 뛰어올라가 일제의 만행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결국 저자는 규슈 야하타 군사공업지역의 산언덕에서 미군폭격기를 조준하는 고사포 부대에 1등 고사포 사수로 배치된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돕는 미군 비행기에 포가 맞지 않도록 일부러 오포를 쏘았다고 한다. 그러나 폭탄 수백 발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비행기를 맞추려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전쟁 말기 원래 원자폭탄 투하는 야하타 인근의 고쿠라가 제2 우선 지역이었지만 일기가 나빠 투하지역이 나가사키로 바뀐 덕분에 살아남았다.
해방 후 1945년 11월 저자는 서울의 구혈단에서 보낸 진남환이라는 작은 어선에 노인 10여명과 함께 부산으로 향한다. 배가 일본영해를 지나자 선미에 태극기를 걸고 우에노 음대출신 학병의 지휘로 애국가를 부르며 갑판에서 엎어져 통곡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그러나 부산항에서 이미 38선이 그어져 있다는 현실을 맞이했고 가까스로 평양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는 10일 만에 단신으로 서울에 와 연세대학원에서 고학생활을 한다.
그러나 학교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미군정시기 신탁통치와 국대안을 반대하다가 서북청년단으로부터 테러를 당하고 어쩔 수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그 후 일본 유학시절 친구의 도움으로 미 군정청 영화과에 다니며 한국영화의 태동기를 목격하고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나 그마저도 좌익으로 몰려 쫓겨나고 피난민구호기구인 기독교세계봉사회 부산사무소에서 일하다 6.25를 맞는다. 하지만 부산에서도 삼일사(육군특무부대)에 두 번이나 잡혀 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고 난 다음에는 살기 위해 한국 탈출을 결심한다. 1953년 1월 미국선교사의 도움으로 드디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하여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듀크대학 젠센 교수의 추천으로 웨이크포레스트대학 교수가 되고 드루대학을 거쳐 롱아일랜드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대 교수와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최윤애 씨를 만나서 연애를 했는데, 두 분은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듀크대학원에서 1955년 다시 만났다. 그러나 윤애 씨는 홀로 두고 온 어머니를 위해 귀국해 두 분은 40년간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
문학과 예술을 진정 사랑한 동양화가 지창보
1960년대 초 웨이크포리스트대 교수시절 한 교수가 붓과 먹 그루를 주어 어릴 적 서당 다닐 때 배운 붓동작을 생각하며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저자는 미술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뉴욕 허친스 갤러리(Hutchins Gallery) 등에서 15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인 김환기, 김창열, 김보현, 이응노 화백들과도 교류했다.
김환기 화백과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와의 인연은 특별했다. 한번은 김향안 여사와 만나 일본 유학 시절 이야기를 하던 중 시(詩)인 '이상'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김향안 여사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는데,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김향안은 이상의 전 부인 변동림이었던 것이다. 그 후 연락을 끊고 있던 김향안은 1974년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장례를 포함한 마지막 순간을 저자에게 맡긴다.
그가 좋아한 문인으로는 '한국계 미국문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전적 소설 '초당'의 작가 강용흘 선생이다. 강 선생이 사는 곳은 롱아일랜드대 근처였는데, 저자가 이곳에 교수로 이직하면서 가까와졌다. 강 선생은 미군정청 근무 때 한국이 경찰국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보고서를 미국무부에 올려 이승만 정부로부터 미움을 샀다. 나중에는 좌익으로 몰려 미국의 매카시즘의 열풍과 함께 KCIA의 집요한 방해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집만 있는 노숙자' 생활을 해온 강 선생은 플로리다주 아들 집에서 1972년 쓸쓸히 운명을 달리했다.
〈파리에서 이응노 화백과 함께(1982).〉
그 외 문인으로는 해방 후 이북 고학생들이 기숙생활을 하던 공제회에서 친하게 된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이 있고 또 저자의 도움으로 롱아일랜드대의 교환 학자로 와있던 황석영과의 인연도 있다. 저자를 황석영은 오랜 독신생활에서 오는 미묘한 '고독과 자유'의 분이라고 말했는데, 고독과 자유는 이 회고록의 제목이 되었다. 지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황 작가의 소설 『오래된 정원(2000)』에서 짤막한 에피소드로 다루어졌다.
이 회고록에는 수필과 시와 함께 저자의 많은 동양화가 삽화로 실렸다. 모두 '고독과 자유'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일세기에 걸친 그의 삶은 시(詩) '미움과 사랑'에서도 읽을 수 있다.
"미움과 사랑은 하나요.
마치 흰 연꽃이 감탕
흙 속에서 피어나듯이"
1세대 재미 민주화·평화통일 운동가들 -임창영, 로광욱, 지창보 선생
1971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있었던 북한관련 세미나에서 저자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꾼 기회를 맞는다. 그 자리에서 북한을 방문했던 한 미국기자를 만났는데, 저자는 그의 도움으로 알제리를 통해 북미동포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저자가 이북을 방문하게 된 이유는 평양에 두고 온 그리운 가족을 만나고 당시 사회학자들의 관심사였던 전쟁 후 북한의 발달 상황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였다. 몇 번에 걸친 북녘 방문에서 저자는 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어머니와 형은 죽었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향마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친척은 고아로 자랐던 두 여동생을 만나게 된다.
엄혹한 시절이어서 그는 이북을 다녀온 기록을 영어 일기로 남겼고, 혹시 만났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본인만 알 수 있는 약자로 사람을 표기했다고 한다. 사진을 많이 찍었으나 혹시 그것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대부분 폐기해서 이 책에는 그런 사진들을 실을 수 없게 됐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몇몇 사진도 있고 실제로 여동생 가족과 찍은 사진들은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
〈1994년 문익환 목사 추모비 건립식에 참석한 지 교수(앞줄 가운데 양복 차림).
도미 후 41년 만에 남녘 땅을 처음 밟았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민주화통일운동가인 계훈제 선생.〉
앞서 얘기했듯 남녘 방문은 1994년 문익환 목사 장례식 때 단기 10일 단기비자로 40년 만에 처음 방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문한 1977년에는 연인 최윤애 씨도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독신으로 지낸 두 분은 2002년 다시 만났으나 최윤애 씨는 장님이 되어있었다. 그 후 사망소식은 슬프게도 전화로 전해 들었다.(2016년)
해방 후 재미동포 민주화·통일운동은 기독교계 보수파들과 임창영, 로광욱, 지창보 등 진보파의 양대 산맥으로 전개되어 왔다. 보수파가 민주화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진보파는 민주화·통일운동 모두에 방점을 두었다.
지창보 선생은 임창영 박사(뉴욕주립대 정치학 교수, 1909~96), 로광욱(음악가·치과의사, 1922~2014) 선생 등과 함께 1973년 재미민주한인협회(의장: 임창영, The Association of Democratic Koreans in America 약칭 민협)의 창설멤버로 활약했고 이후 이 단체는 1977년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으로 확대되어 미주지역 민주화·통일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90년대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코리아영세중립화추진위원회 위원 등 활동을 했으며, 드루대학 교수시절에는 월남전 반대운동에도 주도적 역활을 했다. 때문에 저자는 많은 민주 인사들과 교류했다.
임창영 박사는 미군정청 고문(1947~48), 채텀대 교수(1949~60)를 거쳐 장면 정부 시절 UN대사로 있다가 5ㆍ16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를 비판하며 미국으로 망명하고 뉴욕주립대 교수(1961~78)로 활동하신 분이다. 로광욱 선생은 치과의사, 작곡가, 민주평화통일운동가로 워싱턴 디시에 거주하였는데, 윤이상 선생을 소개해준 분으로 광성중학교 2년 선배이기도 하여 저자는 로 선생을 친형님으로 여겼다. 널리 알려져 있는 「고려산천 내사랑」은 대표적인 로 선생의 작시·작곡이다. 로 선생은 2001년에 역사문제연구소, 참여연대,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주최로 서울 선재아트센터에서 '로광욱 통일염원 가곡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동백림사건의 피해자인 윤이상 선생과도 가까웠다. 그분은 뉴욕에 올 때마다 지 교수 집에 장단기로 머물며 투옥 중 고문으로 인한 휴우증 때문에 괴로와했다. 어느 날 윤 선생으로부터 JFK가던 중 "(북한의)세습을 어떻게 생각하오?"하는 질문을 받았으나 더 이상 대화를 하지 못했는데, 그게 윤이상 선생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해외 민주인사 초청으로 청와대를 예방해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던 모습(2002).〉
지창보 선생은 격랑의 우리 현대사를 고뇌 속에서 살아온 분이다. 조국 이북과 이남에 대해 동등한 애정을 가진,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민주화운동, 반전운동, 통일운동을 하신 진보 운동가이며 동시에 아름답고 정열적인 미술 작품을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저자는 사상적 성향을 따지는 정치인들과 달리, 서로 다른 체제에 살게 된 한민족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항상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던 분이었다.
회고록을 펴내며
인생의 체험은 뿌리도 원인도 없이 무조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시대와 장소, 환경 속에서 발생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시대의 역사적 주변 사건과 연관되어 계속되는 역사의 거울이다. 그러므로 보잘것없는 평범한 무명 인사의 생애도 역사의 거울로 들여다보면 역사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어떤 시인이 한 포기의 풀 위에 맺힌 이슬방울도 우주를 알려 준다고 했듯이, 인간 각자의 '삶'도 그만큼 귀중하고 신비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은 모든 인간과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자연, 우주는 서로 엉키어 있다. 나는 그러한 각도에서 나의 존재와 '삶'을 인식하고 싶다. 나의 체험과 존재 의식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공통된 연관성 위에서 일치한다면 우리는 '삶'의 공통성을 찾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기쁨도 쓰라림도 그 체험에서는 공통되는 것이기에 인류 역사는 계속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회고록을 펴내며(저자)
올해로 99세를 맞으신 저자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평양근교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오(中央)대학에 유학했다.
저자는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울컥해서 벌떡 일어나 의견을 말하는 성격 때문에 그 시대의 민감한 이슈에 직접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유학 중 '조선인 유학생 특별지원병 궐기대회' 때 육당 최남선에게 "총독부에 매수당해서 왔으면 그저 솔직히 나가 죽으라고 하지, 왜 빙빙 돌려서 말을 합니까? 우리는 절대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겠소."라고 돌직구를 날려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또 징집을 피해 평양으로 도피중인 처지에도 불구하고 연극 공연을 보다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즐겁게 웃고 있는 관중들을 보고 피가 끓어 갑자기 강단으로 뛰어올라가 일제의 만행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결국 저자는 규슈 야하타 군사공업지역의 산언덕에서 미군폭격기를 조준하는 고사포 부대에 1등 고사포 사수로 배치된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돕는 미군 비행기에 포가 맞지 않도록 일부러 오포를 쏘았다고 한다. 그러나 폭탄 수백 발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비행기를 맞추려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전쟁 말기 원래 원자폭탄 투하는 야하타 인근의 고쿠라가 제2 우선 지역이었지만 일기가 나빠 투하지역이 나가사키로 바뀐 덕분에 살아남았다.
해방 후 1945년 11월 저자는 서울의 구혈단에서 보낸 진남환이라는 작은 어선에 노인 10여명과 함께 부산으로 향한다. 배가 일본영해를 지나자 선미에 태극기를 걸고 우에노 음대출신 학병의 지휘로 애국가를 부르며 갑판에서 엎어져 통곡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그러나 부산항에서 이미 38선이 그어져 있다는 현실을 맞이했고 가까스로 평양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는 10일 만에 단신으로 서울에 와 연세대학원에서 고학생활을 한다.
그러나 학교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미군정시기 신탁통치와 국대안을 반대하다가 서북청년단으로부터 테러를 당하고 어쩔 수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그 후 일본 유학시절 친구의 도움으로 미 군정청 영화과에 다니며 한국영화의 태동기를 목격하고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나 그마저도 좌익으로 몰려 쫓겨나고 피난민구호기구인 기독교세계봉사회 부산사무소에서 일하다 6.25를 맞는다. 하지만 부산에서도 삼일사(육군특무부대)에 두 번이나 잡혀 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고 난 다음에는 살기 위해 한국 탈출을 결심한다. 1953년 1월 미국선교사의 도움으로 드디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하여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듀크대학 젠센 교수의 추천으로 웨이크포레스트대학 교수가 되고 드루대학을 거쳐 롱아일랜드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대 교수와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최윤애 씨를 만나서 연애를 했는데, 두 분은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듀크대학원에서 1955년 다시 만났다. 그러나 윤애 씨는 홀로 두고 온 어머니를 위해 귀국해 두 분은 40년간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
문학과 예술을 진정 사랑한 동양화가 지창보
1960년대 초 웨이크포리스트대 교수시절 한 교수가 붓과 먹 그루를 주어 어릴 적 서당 다닐 때 배운 붓동작을 생각하며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저자는 미술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뉴욕 허친스 갤러리(Hutchins Gallery) 등에서 15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인 김환기, 김창열, 김보현, 이응노 화백들과도 교류했다.
김환기 화백과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와의 인연은 특별했다. 한번은 김향안 여사와 만나 일본 유학 시절 이야기를 하던 중 시(詩)인 '이상'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김향안 여사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는데,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김향안은 이상의 전 부인 변동림이었던 것이다. 그 후 연락을 끊고 있던 김향안은 1974년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장례를 포함한 마지막 순간을 저자에게 맡긴다.
그가 좋아한 문인으로는 '한국계 미국문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전적 소설 '초당'의 작가 강용흘 선생이다. 강 선생이 사는 곳은 롱아일랜드대 근처였는데, 저자가 이곳에 교수로 이직하면서 가까와졌다. 강 선생은 미군정청 근무 때 한국이 경찰국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보고서를 미국무부에 올려 이승만 정부로부터 미움을 샀다. 나중에는 좌익으로 몰려 미국의 매카시즘의 열풍과 함께 KCIA의 집요한 방해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집만 있는 노숙자' 생활을 해온 강 선생은 플로리다주 아들 집에서 1972년 쓸쓸히 운명을 달리했다.
〈파리에서 이응노 화백과 함께(1982).〉
그 외 문인으로는 해방 후 이북 고학생들이 기숙생활을 하던 공제회에서 친하게 된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이 있고 또 저자의 도움으로 롱아일랜드대의 교환 학자로 와있던 황석영과의 인연도 있다. 저자를 황석영은 오랜 독신생활에서 오는 미묘한 '고독과 자유'의 분이라고 말했는데, 고독과 자유는 이 회고록의 제목이 되었다. 지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황 작가의 소설 『오래된 정원(2000)』에서 짤막한 에피소드로 다루어졌다.
이 회고록에는 수필과 시와 함께 저자의 많은 동양화가 삽화로 실렸다. 모두 '고독과 자유'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일세기에 걸친 그의 삶은 시(詩) '미움과 사랑'에서도 읽을 수 있다.
"미움과 사랑은 하나요.
마치 흰 연꽃이 감탕
흙 속에서 피어나듯이"
1세대 재미 민주화·평화통일 운동가들 -임창영, 로광욱, 지창보 선생
1971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있었던 북한관련 세미나에서 저자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꾼 기회를 맞는다. 그 자리에서 북한을 방문했던 한 미국기자를 만났는데, 저자는 그의 도움으로 알제리를 통해 북미동포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저자가 이북을 방문하게 된 이유는 평양에 두고 온 그리운 가족을 만나고 당시 사회학자들의 관심사였던 전쟁 후 북한의 발달 상황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였다. 몇 번에 걸친 북녘 방문에서 저자는 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어머니와 형은 죽었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향마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친척은 고아로 자랐던 두 여동생을 만나게 된다.
엄혹한 시절이어서 그는 이북을 다녀온 기록을 영어 일기로 남겼고, 혹시 만났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본인만 알 수 있는 약자로 사람을 표기했다고 한다. 사진을 많이 찍었으나 혹시 그것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대부분 폐기해서 이 책에는 그런 사진들을 실을 수 없게 됐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몇몇 사진도 있고 실제로 여동생 가족과 찍은 사진들은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
〈1994년 문익환 목사 추모비 건립식에 참석한 지 교수(앞줄 가운데 양복 차림).
도미 후 41년 만에 남녘 땅을 처음 밟았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민주화통일운동가인 계훈제 선생.〉
앞서 얘기했듯 남녘 방문은 1994년 문익환 목사 장례식 때 단기 10일 단기비자로 40년 만에 처음 방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문한 1977년에는 연인 최윤애 씨도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독신으로 지낸 두 분은 2002년 다시 만났으나 최윤애 씨는 장님이 되어있었다. 그 후 사망소식은 슬프게도 전화로 전해 들었다.(2016년)
해방 후 재미동포 민주화·통일운동은 기독교계 보수파들과 임창영, 로광욱, 지창보 등 진보파의 양대 산맥으로 전개되어 왔다. 보수파가 민주화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진보파는 민주화·통일운동 모두에 방점을 두었다.
지창보 선생은 임창영 박사(뉴욕주립대 정치학 교수, 1909~96), 로광욱(음악가·치과의사, 1922~2014) 선생 등과 함께 1973년 재미민주한인협회(의장: 임창영, The Association of Democratic Koreans in America 약칭 민협)의 창설멤버로 활약했고 이후 이 단체는 1977년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으로 확대되어 미주지역 민주화·통일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90년대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코리아영세중립화추진위원회 위원 등 활동을 했으며, 드루대학 교수시절에는 월남전 반대운동에도 주도적 역활을 했다. 때문에 저자는 많은 민주 인사들과 교류했다.
임창영 박사는 미군정청 고문(1947~48), 채텀대 교수(1949~60)를 거쳐 장면 정부 시절 UN대사로 있다가 5ㆍ16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를 비판하며 미국으로 망명하고 뉴욕주립대 교수(1961~78)로 활동하신 분이다. 로광욱 선생은 치과의사, 작곡가, 민주평화통일운동가로 워싱턴 디시에 거주하였는데, 윤이상 선생을 소개해준 분으로 광성중학교 2년 선배이기도 하여 저자는 로 선생을 친형님으로 여겼다. 널리 알려져 있는 「고려산천 내사랑」은 대표적인 로 선생의 작시·작곡이다. 로 선생은 2001년에 역사문제연구소, 참여연대,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주최로 서울 선재아트센터에서 '로광욱 통일염원 가곡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동백림사건의 피해자인 윤이상 선생과도 가까웠다. 그분은 뉴욕에 올 때마다 지 교수 집에 장단기로 머물며 투옥 중 고문으로 인한 휴우증 때문에 괴로와했다. 어느 날 윤 선생으로부터 JFK가던 중 "(북한의)세습을 어떻게 생각하오?"하는 질문을 받았으나 더 이상 대화를 하지 못했는데, 그게 윤이상 선생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해외 민주인사 초청으로 청와대를 예방해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던 모습(2002).〉
지창보 선생은 격랑의 우리 현대사를 고뇌 속에서 살아온 분이다. 조국 이북과 이남에 대해 동등한 애정을 가진,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민주화운동, 반전운동, 통일운동을 하신 진보 운동가이며 동시에 아름답고 정열적인 미술 작품을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저자는 사상적 성향을 따지는 정치인들과 달리, 서로 다른 체제에 살게 된 한민족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항상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던 분이었다.
회고록을 펴내며
인생의 체험은 뿌리도 원인도 없이 무조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시대와 장소, 환경 속에서 발생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시대의 역사적 주변 사건과 연관되어 계속되는 역사의 거울이다. 그러므로 보잘것없는 평범한 무명 인사의 생애도 역사의 거울로 들여다보면 역사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어떤 시인이 한 포기의 풀 위에 맺힌 이슬방울도 우주를 알려 준다고 했듯이, 인간 각자의 '삶'도 그만큼 귀중하고 신비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은 모든 인간과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자연, 우주는 서로 엉키어 있다. 나는 그러한 각도에서 나의 존재와 '삶'을 인식하고 싶다. 나의 체험과 존재 의식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공통된 연관성 위에서 일치한다면 우리는 '삶'의 공통성을 찾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기쁨도 쓰라림도 그 체험에서는 공통되는 것이기에 인류 역사는 계속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회고록을 펴내며(저자)
목차
목차
회고록을 펴내며 / 지창보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 드리고자 / 박중련
추천사 - 한국계 미국인 교수의 99년 치열한 삶의 여정 / 하용화
추천사 - '조용한 남자'에게 경의를 / 강석원
추천사 -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 열정적이고 용감한 전사 / 존 배
추천사 - 이따금 지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 김차섭
1 평양 근교에서 보낸 어린 시절(1923-1937)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안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신 어머니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가죽 구두
마을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2 배움의 길로(1930-1942)
배움의 길로
광성고보 시절
잊을 수 없는 나의 첫사랑
물거품이 된 짝사랑
일본 유학을 향한 꿈
방황과 혁신
3 도쿄 유학 시절(1942-1943)
일제강점기의 도쿄 상황
나의 은사 이지린(李趾麟) 선생
대학 입학시험 준비
고향에서의 요양 생활
도쿄 주오(中央)대학 입학
즐거운 도쿄 유학 생활
4 육당 최남선에게 돌직구를 날리다(1943-1944)
학도지원병 공고
육당 최남선에게 돌직구를 날리다
학병 피하려 도쿄에서 잠적
부관 여객선을 타고 일본 탈출
고향에서 검거되다
5 학병으로 8·15 해방을 맞이하다(1944-1945)
원폭 투하 예정지 야하타에서 보낸 학병 생활
일본의 항복
일본에서 고향으로 귀국
종전 후 수십 년 만에 일본 방문
6 해방 후 서울에서의 고학 생활(1945-1950)
서울에서의 고학 생활
감 이야기
전라남도 순천에서의 추억
셰익스피어의 비극 같은 종필 군 이야기
통행금지 시간에 찾아온 창선이
병상의 친구를 통해서 느낀 고독감
콩나물 키우던 먼 친척 형
어머니를 그립게 만든 포근한 장면
짧았던 미 군정청 영화과 시절
서울 한성중학교 영어 선생 시절
7 부산에서의 피난 생활(1950-1953)
구호사무소 직원으로
6·25전쟁이 발발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밤 손님의 작별 인사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광성학교 재건을 위한 노력
전쟁과 세잔(Paul Cezanne)
아아, 잘 있거라. 언제 다시 보게 될까?
8 미국 유학 생활과 새내기 교수 시절(1953-1966)
미국 유학기: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베이비시팅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돈과 인간
자신과의 대화
베트남전 반전 데모에 뛰어들다
미국 성조기: 정치와 종교
9 잊지 못할 소중한 만남(1966-2016)
나의 영원한 연인 최윤애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 씨를 생각하며
문필가 강용흘 선생과 친교하다
김환기 화백과 부인 김향안 씨와의 교류
영화배우 버트 랭커스터와 '마티니 선생, 지(Chee)'
김보현 화백과의 만남
친형님으로 여겼던 로광욱 선생
작곡가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
10 모국 방문기(1971-2008)
첫 번째 평양 방문: 대동강 물은 흐른다(1971)
두 번째 평양 방문: 여동생 가족들과의 만남(1973)
우리나라 지도와 민족의식
김진계의 『조국』을 읽고
남녘 방문(1994, 1997, 1998, 2002, 2005)
존댓말과 반말
11 나는 영화인이 되고 싶었다
〈연을 쫓는 아이〉를 보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우리나라 영화를 보고
고행과 해탈의 길
12 그림은 말 없는 시(詩)
화가 아닌 그림쟁이
예술은 창작 그것으로 끝나야
수박
13 고독과 자유를 즐기는
황석영 작가의 편지 한 장
뜻을 잃어버린 말들
나의 친구 '선댄스'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
대설에 고향 생각에 잠기다
14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다 살아난 일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면서
목적 없는 여행
15 시화(詩?) 모음
친구
눈이 오네
눈이 내리는 날
첫눈
해바라기
새해
봄을 기다리며
가을 단풍나무
늙은 소나무
미움과 사랑
지창보 교수 작품 전시회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 드리고자 / 박중련
추천사 - 한국계 미국인 교수의 99년 치열한 삶의 여정 / 하용화
추천사 - '조용한 남자'에게 경의를 / 강석원
추천사 -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 열정적이고 용감한 전사 / 존 배
추천사 - 이따금 지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 김차섭
1 평양 근교에서 보낸 어린 시절(1923-1937)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안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신 어머니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가죽 구두
마을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2 배움의 길로(1930-1942)
배움의 길로
광성고보 시절
잊을 수 없는 나의 첫사랑
물거품이 된 짝사랑
일본 유학을 향한 꿈
방황과 혁신
3 도쿄 유학 시절(1942-1943)
일제강점기의 도쿄 상황
나의 은사 이지린(李趾麟) 선생
대학 입학시험 준비
고향에서의 요양 생활
도쿄 주오(中央)대학 입학
즐거운 도쿄 유학 생활
4 육당 최남선에게 돌직구를 날리다(1943-1944)
학도지원병 공고
육당 최남선에게 돌직구를 날리다
학병 피하려 도쿄에서 잠적
부관 여객선을 타고 일본 탈출
고향에서 검거되다
5 학병으로 8·15 해방을 맞이하다(1944-1945)
원폭 투하 예정지 야하타에서 보낸 학병 생활
일본의 항복
일본에서 고향으로 귀국
종전 후 수십 년 만에 일본 방문
6 해방 후 서울에서의 고학 생활(1945-1950)
서울에서의 고학 생활
감 이야기
전라남도 순천에서의 추억
셰익스피어의 비극 같은 종필 군 이야기
통행금지 시간에 찾아온 창선이
병상의 친구를 통해서 느낀 고독감
콩나물 키우던 먼 친척 형
어머니를 그립게 만든 포근한 장면
짧았던 미 군정청 영화과 시절
서울 한성중학교 영어 선생 시절
7 부산에서의 피난 생활(1950-1953)
구호사무소 직원으로
6·25전쟁이 발발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밤 손님의 작별 인사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광성학교 재건을 위한 노력
전쟁과 세잔(Paul Cezanne)
아아, 잘 있거라. 언제 다시 보게 될까?
8 미국 유학 생활과 새내기 교수 시절(1953-1966)
미국 유학기: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베이비시팅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돈과 인간
자신과의 대화
베트남전 반전 데모에 뛰어들다
미국 성조기: 정치와 종교
9 잊지 못할 소중한 만남(1966-2016)
나의 영원한 연인 최윤애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 씨를 생각하며
문필가 강용흘 선생과 친교하다
김환기 화백과 부인 김향안 씨와의 교류
영화배우 버트 랭커스터와 '마티니 선생, 지(Chee)'
김보현 화백과의 만남
친형님으로 여겼던 로광욱 선생
작곡가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
10 모국 방문기(1971-2008)
첫 번째 평양 방문: 대동강 물은 흐른다(1971)
두 번째 평양 방문: 여동생 가족들과의 만남(1973)
우리나라 지도와 민족의식
김진계의 『조국』을 읽고
남녘 방문(1994, 1997, 1998, 2002, 2005)
존댓말과 반말
11 나는 영화인이 되고 싶었다
〈연을 쫓는 아이〉를 보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우리나라 영화를 보고
고행과 해탈의 길
12 그림은 말 없는 시(詩)
화가 아닌 그림쟁이
예술은 창작 그것으로 끝나야
수박
13 고독과 자유를 즐기는
황석영 작가의 편지 한 장
뜻을 잃어버린 말들
나의 친구 '선댄스'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
대설에 고향 생각에 잠기다
14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다 살아난 일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면서
목적 없는 여행
15 시화(詩?) 모음
친구
눈이 오네
눈이 내리는 날
첫눈
해바라기
새해
봄을 기다리며
가을 단풍나무
늙은 소나무
미움과 사랑
지창보 교수 작품 전시회
저자
저자
지창보
池昶補, Changboh Chee, 아호 삼석(三石)
1923년 11월 28일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북사리 140번지 출생
1942년 평양 광성중학교 졸업
1943년 일본 동경 주오(中央)대학 입학
1944년 일본 학도병 징집. 기타규슈 야하타(八幡) 고사포부대 배치)
1946년 연세대 편입, 1947년 국대안 반대운동으로 연세대 대학원 제적
1948년 미 군정청 공보처 영화과 근무
1949년 서울 한성중학교 영어교사
1950년 기독교세계봉사회 부산사무소 근무 (구호물자 처리업무)
1953년 시카고 조지윌리엄스대 유학
1955년 노스센트럴대 사회학 학사
1956년 듀크대 사회학 석사, 1959년 박사
1959년 웨이크포리스트대 조교수
1964년 드루대 부교수, 동서양 문화 프로그램 대표
1966년 뉴욕 롱아일랜드대 교수(사회학·아시아학)
1994년 교수직 은퇴, 롱아일랜드대 Korea Center 창설
2006년 전 뉴욕 아름다운재단 발기인 겸 이사
1970~80년대 재미민주한인협회,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 결성·활동
19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코리아영세중립화추진위원회 위원
2000년대 6·15민족공동행사 재미준비위원회 고문
2010년대 남·북·해외 연석회의 미국지역준비위원회 고문
1923년 11월 28일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북사리 140번지 출생
1942년 평양 광성중학교 졸업
1943년 일본 동경 주오(中央)대학 입학
1944년 일본 학도병 징집. 기타규슈 야하타(八幡) 고사포부대 배치)
1946년 연세대 편입, 1947년 국대안 반대운동으로 연세대 대학원 제적
1948년 미 군정청 공보처 영화과 근무
1949년 서울 한성중학교 영어교사
1950년 기독교세계봉사회 부산사무소 근무 (구호물자 처리업무)
1953년 시카고 조지윌리엄스대 유학
1955년 노스센트럴대 사회학 학사
1956년 듀크대 사회학 석사, 1959년 박사
1959년 웨이크포리스트대 조교수
1964년 드루대 부교수, 동서양 문화 프로그램 대표
1966년 뉴욕 롱아일랜드대 교수(사회학·아시아학)
1994년 교수직 은퇴, 롱아일랜드대 Korea Center 창설
2006년 전 뉴욕 아름다운재단 발기인 겸 이사
1970~80년대 재미민주한인협회,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 결성·활동
19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코리아영세중립화추진위원회 위원
2000년대 6·15민족공동행사 재미준비위원회 고문
2010년대 남·북·해외 연석회의 미국지역준비위원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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