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났다(모악시인선 4)
정동철 시집
2006년「광주일보」와「전남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한 정동철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나타났다]. 시집에는 숲처럼 깊고 울창한 5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정동철 시인은 날카롭고 적확한 시어들로 우주적 세계를 촘촘하게 직조해내고 있다. 성긴 마디 없이 충실하게 짚어내는 ‘언어의 책무’는 시집의 시편들마다 고유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부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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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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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났다』
"살아 숨 쉬는 것들에 대한 경배와 존엄,
곡진한 삶에 최선의 예의를 다하는 시편들!"
"순정한 시간을 견뎌낸 전광석화 같은 시어들,
한 편 한 편이 뭉클하고 뜨겁고 육중하다!"
문태준, 손택수, 박성우, 세 중견시인이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모악시인선」에서 정동철 시인의 『나타났다』가 출간되었다. 2006년「광주일보」와「전남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정동철 시인의 첫 시집 『나타났다』에는 숲처럼 깊고 울창한 5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집 첫머리에 배치한 "마침내//나는//세상과 끊어졌다"(「폭설」전문)는 시인이 세상을 대하는 자아상(自我像)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3연으로 구성되었지만, 기실 이 시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동철 시인에게 이 한 문장은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구축하는 아르케(arche)이자 시집 『나타났다』를 관통하는 시적 영감이다.「폭설」에서 '나'는 '마침내'와 '세상과 끊어졌다'를 연결하는 중심으로 작용한다. '마침내'라는 시간 요소와 '세상과 끊어졌다'는 공간 요소를 결합시켜서 '나'는 하나의 우주(university)적 세계를 구축한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시적 세계를 창조해내는 '인간의 의무'를 수행한다.
정동철 시인은 날카롭고 적확한 시어들로 우주적 세계를 촘촘하게 직조해내고 있다. 성긴 마디 없이 충실하게 짚어내는 '언어의 책무'는 시집 『나타났다』의 시편들마다 고유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부여해놓았다.
살아가는 일은 미래의 나를 만나러 가는 것
시집 『나타났다』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로 "삑 삐-익 울어대던"(「뜸, 뜸, 뜸부기」) 유년기의 삽화들을 '폭설'의 이미지에 겹쳐놓았다. 폭설 속에 갇혀 있는 유년기가 현재 시인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무의식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1부의 시편들은 시인의 시적 지향점을 짐작하게 한다. 시인은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는/가난한 씨앗"(「집」)을 싹틔워 세상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2부의 시들은 '가난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2부의 첫 시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가 보여주듯,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다. "참, 아버지/지금도 아버진 제 자전거 뒤를 잡고 오시는 거지요?"(「원형 탈모증」)에서 우리는 '가난한' 것들을 대하는 시인의 순수하면서도 촉촉한 시적 정서를 만날 수 있다.
3부에는 새로운 세계를 배태하고 있는 '씨앗'들을 발견해내는 시편들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지금//내 몸의 뼈//마디란 마디마다//한 편씩 시(詩)를 새기고 있는 중이다"(「감기 몸살」전문)에서 보듯, 시인은 '시'라는 새로운 세계를 세상에 새겨나간다. 그러한 세상은 "불발탄 지역"(「불발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허물어져가며/가벼워지는 기억들에게/마른 젖퉁이 물리고 있는 집"(「허물어져가며」)이 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폭발의 가능성과 함께 스스로를 해체하는 갱신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4부의 시편들은 순정(純正)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소박한 믿음을 담고 있다. 살아가는 일은 곧 미래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약속한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을 위한 시편들을 거쳐 마침내 시인은 "길 잃을 염려가 없다는데/왜 자꾸만 눈시울이/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냐"(「눈물다랑어」)는 깨달음에 이른다.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하는 시인의 숙명
나타났다
라는 말이 힐끗 내 기억 저쯤에서 모습을 보였다
- 엄마, 엄마
나타났다, 라는 말이 무슨 말이야?
저녁노을 속으로 나와 누이와 동생들이 숨어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곤소곤 구구단을 외웠다
아침이면 책가방을 들고 논둑길을 걸었다
논둑길을 따라 배미콩 포기들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꽁지 붉은 잠자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녁은 금세 황톳길까지 숨차게 달음박질쳐 왔다
엄마는 논둑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 나타났다는 말은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거야
숨어있다는 말
몸을 웅크리고 때가 되길 기다리는 말
갑자기 나타나는 말
남부시장 한 모퉁이 채소를 팔던 할머니가 나를 외면했을 때
서둘러 떡집 골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그 말
내 마음 속 어딘가 모습을 숨겼던
귀신고래처럼 기억의 심해 속에서 잠들어 있던
그 말이 내게 나타났다
할머니
―「나타났다」 전문
무릇 좋은 시는 '발견'의 지점을 거느리고 있다. 그 지점에서 시는 탁월한 혜안을 보여주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을 독자 앞에 내놓기도 한다. 정동철 시인의 시에서 '발견'의 지점은 '기억' 아래 묻혀 있는 익숙한 것들이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을 언어의 세계로 끄집어냄으로써 시인은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준다. 이러한 시적 자세와 태도가 소중한 것은 시인이 발견해낸 지점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소멸하지 않고 견뎌낸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정동철 시인은「나타났다」에서 '언어의 책무'를 교묘하게 수행한다. '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가계도가 상징하는 것은 인류사를 지탱해온 순환적 창조의 힘이다. 할머니는 엄마를, 엄마는 나라는 새로운 생명을 세계 속에 실현시켜놓았다. 그런데 '나'는 '누이'와의 관계 속에서 알 수 있듯 남성성으로 제시되어 있다. 할머니나 엄마와는 다른 방식의 창조적 역량을 '나'는 발휘해야 하는데, 시인에게 그것은 '언어의 책무'를 다하는 일이다.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것이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시적 세계관이 아닐까?
전광석화 같은 언어의 독경, 곡진한 삶에 대한 최선의 예의
정동철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문태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정동철 시인의 시가 갖고 있는 시심의 매력은 다른 생명에 대한 돌봄과 보호에 있다. 앞가슴에서 나온 배려와 사랑이 있다. 이러한 마음은 "오밀조밀 달동네처럼 모여" 살고 있는, "온갖 종류의 생활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첫 시집은 시를 쓰는 일에 기울인 정성이 매우 극진하다. 마치 성의를 다해 풀을 먹이고 다듬질한 이불 홑청 같다. 한 편 한 편이 곡진하며 뭉클하다. 이 시집은 뜨겁고 육중하다.
문태준 시인이 간파한 것처럼, 정동철 시인의 시에는 '곡진'한 삶에 대한 최선의 예의가 담겨 있다. 정동철 시인은 "그 짐승 움찔 뒷걸음질 몇 번 하더니 이내 콧등을 들어 허공을 핥는 것"(「노루」)에 마음 자락이 아프게 쓸린다. 창조된 모든 생명들에 대한 거룩한 시심은 "혼자서 불타다 혼자서 사라지는 단풍나무" 앞에서 "세상의 쓸쓸한 일로 분함을 삭이지 못하"(「직소폭포 가랑이에 머물다」)고, "명태의 두 눈을 따라/망망대해로 떠나고 싶"(명태를 따라)어 한다.
이처럼 시란 살아 숨 쉬는 것들을 향한 거룩한 경배와 존엄을 불러일으키는 것. 정동철 시인은 그것들 앞에 곡진한 예의를 갖추어 시를 쓴다. 그리하여 시집 『나타났다』에 전광석화 같은 언어의 칼날을 번뜩이게 한다. 몇 편의 짧은 시를 읽다보면, 정중동의 언어에 기습당한 시심이 오래 아파오기도 하고, 현기증 나는 삶의 깨달음 앞에서 눈매가 날카롭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대/부끄러운 두 눈/푸른 가시로 찔러라//나는/흰 눈처럼 고개 떨구고/한평생 살아가겠다"(「탱자꽃」 전문)는 각오가 푸른 결기로 가득한 것은 탱자가시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오래 겨냥하여 마침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시어의 단단함이 있다. 이 예사롭지 않은 언어 감각은 정동철 시인의 순정함에서 비롯한다.
동근 입을 옴죽거려 황금빛
씨 한 알을 톡
세상에다 뱉는다
저 씨 자라나
초록 가지 끝에
청동으로 만든 입술을 달았다
봄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한 입들이
쉴 새 없이 종알댄다
중얼중얼 오월 하늘에 독경을 한다
나도 마음속의 당나귀 귀가 가려워
깊은 잠 못 이룰 지경이니
바람아
감나무 좀 건드리지 말고
가만 좀 있거라
―「금강경을 읽는 오월」 전문
시인에게 시어는 순수한 세계이다. 어떤 의미나 감각이 이미 주어져 있는 사전적 의미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그 순간의 순정(純情)한 감각을 새겨낼 수 있는 순수한 언어여야 한다. 그러한 시어는 "황금빛/씨 한 알을 톡/세상에다 뱉는" 것에서 시작한다. 정동철 시인은 그 순수한 언어를 "독경"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혼자 고독하게 말을 하는 행위를 순수한 의미에서의 주술이라고 해도 좋다. 모든 혼잣말들은 발화자의 마음에 새기는 주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경'의 화법은 인류 최초의 화법이자 인류 최후의 발화이다.
정동철 시인은 이러한 말하기 방식이야말로 순정한 시의 화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인이 "고장 난 자크 한 줄로/이빨을 악물고 있는 이유"(「가죽가방」)를 물어올 때, 그리고 "잠자는 여인의 마른 사타구니 같은/사막을 막 건넌 낙타의 검은 눈동자"(「가뭄」)를 들여다볼 때, 우리는 시인의 '독경'을 유일하게 듣고 있는 것이다.
도저한 깊이에 가라앉아 있는 독자의 기억을 깨우는 시편들
무엇보다 이 첫 시집은 시를 쓰는 일에 기울인 정성이 매우 극진하다. 마치 성의를 다해 풀을 먹이고 다듬질한 이불 홑청 같다. 한 편 한 편이 곡진하며 뭉클하다. 이 시집은 뜨겁고 육중하다.
-문태준(시인)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물기 없는 것은 없다. 쇠붙이도 슬픔을 안다면 눈물 몇 방울은 착하게 흘릴 것이다. 슬픔을 대하는 정동철 시인의 방식이 이와 같다. 강골이다.
-안상학(시인)
시집 『나타났다』의 매력은 시간의 깊이에서 나온다. 아득한 시간의 기저까지 가 닿는 시선, 시인의 언어는 마치 두레박처럼 도저한 깊이에 가라앉아 있던 독자들의 기억을 천천히 끌어올린다.
-김병용(소설가)
목차
목차
1부 아무렇지 않게 혼자가 되었다
폭설 13
노루 14
나비 16
겨울편지 17
나타났다 18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20
허공 위에 뜬 집 22
금강 하굿둑에 가서 24
뜸, 뜸, 뜸부기 25
오래된 우물 26
포릉포릉 28
홀딱 벳겨 30
배추흰나비떼를 따라가다 31
늦봄 32
집 33
2부 얼음 열쇠
젖무덤 41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42
얼음 열쇠 44
직소폭포 가랑이에 머물다 46
실상사 철조여래좌불을 만나다 48
웃음주머니 50
웃는 돌 52
명태를 따라 53
봉서댁은 느티나무다 54
비암 구덕 56
원형 탈모증 58
동백꽃 붉은 60
습격 62
식물인간 64
금강경을 읽는 오월 66
3부 천 개의 술잔과 입을 맞추다
탱자꽃 69
감기 몸살 70
천 개의 술잔을 들고 71
재회 72
안녕, 키다리 아저씨 74
슬픈여(礖)에서 말 걸기 76
물고기자리별 78
하전사 김진철 80
멧돼지 잡아라 82
불발탄 83
붉은 노을 84
보신탕을 먹는다 86
서고사 저녁공양 88
허물어져가며 89
청개구리 90
밀향고래를 찾아서 92
곡우(穀雨) 94
4부 발가락을 씹어봤는가
눈물다랑어 97
가죽가방 98
매미와 나 100
톱질하는 남자 102
천불산에는 천 개의 하늘이 있다 104
날아라, 로켓맨 106
여국(女國)을 아뢰나이다 108
발가락을 씹어봤는가 110
시간여행자를 만나다 112
호텔 아쿠아리아 114
가뭄 116
발문 마침내, 나타났다, 오래된 기억 | 김병용 118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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