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령에는 시인이 산다
정성철 시집
추령은 순창군 복흥면에 속해 있다. 이 곳은 장승만 20년 넘게 만들고 있는 촌장님이 살고 있다. 시인은 임실군 강진면에서 지구별 여행을 시작했다. 시집 [추령에는 시인이 산다]는 추령과 임실이라는 두 자연적 공간이 배경이 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살고 있는, 살아왔던 이들과의 교감이 시집 곳곳에 투영된다. 그가 바라보는 사람들은 늘 웃고 있다. 라캉의 거울이론에 의하면 그가 바라보는 거울 속 사람들은 늘 환한 미소로 그에게 답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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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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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를 쓰는 이들이 참 많다. 읽고 쓰고 감상하고 나누는 일은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또한 매우 반가운 일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은 뒤처진 것이라는 대중적 합의가 대세인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디지털적 감성이 세련된 것이고 우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일종의 겉멋이 번지르르한 환상이나 허상이 늘 대중적 관심의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첫 번째 기능은 치유healing이다. 그것도 '자기치유'의 과정으로 기능하는 시는 대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과정을 밟는다. 대중적인 시는 대개 이 지점에서 멈춘다. 시의 자기치유적 기능을 넘어선 뒤에는 어떤 길이 펼쳐질까?
시는 감성과 두 종류의 감상으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감성sensitivity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느낌을 받아들이는 성질', 즉 감수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감성은 그냥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대상을 바라볼 때, 즉 마음을 두고 바라볼 때에만 발화되는 특성을 지닌다. 같은 대상을 보고도 감흥이 다른 이유는 바로 이 감수성의 영역이 어느 만큼 계발되어 있는지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 감정이 조금씩 정화되어, 다만 대화와 의사소통의 기능으로써만 언어가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 한 두번쯤 체에 걸러서 행과 연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 우리는 이것을 '시poem'라고 부른다.
인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말과 글.
인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머리와 가슴.
또는 이성과 감성.
시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장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감성을 정제된 질서 안에서 표현하는 것, 이것이 시다. 진짜 그럴까? 감성도 육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다분히 물질적이고 즉물적인 외피를 입은 감성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치열한 정제의 과정을 거쳐 일정한 사유를 요구하는 감성이 있을 수 있다.
감상이란 두 가지의 영역이 있다.
첫번째 감상은 sentiment로서의 감상으로 이는 감정이나 느낌을 날것으로 표현하는, 기표와 기의를 분리시킬 수 없는 일차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으로서의 감상이다. 이 날것은 육적이고 물질적이고 즉물적이다. 내가 대상으로부터 받은 인상이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두번째 감상은 appreciation으로서의 감상이다. 이 단어는 여러가지 속뜻을 지니고 있는데, '감사, 이해, 진가, 진가를 인정하거나 인식함'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미학적 가치로서의 감성적인 알아차림'을 뜻한다.
시란 결국 센티멘털로서의 감상이 아니라 미학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알아차린 뒤에라야만 들어설 수 있는 영역인 셈이다.
시는 객관과 주관이 미묘하게 결합된, 수준높은 감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날것으로도 사용되지만 매우 정교하기도 하다. 이 정교함은 말하자면 그 문장을 읽고 난 뒤에도 뭔가 표현하기 힘든 아릿한 느낌이 남아 하루종일 웅얼거리게 되는 노래처럼 내 가슴 주변을 서성거리게 만든다. 그게 바로 시가 아닐까. 라캉은 이 지점을 실재계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한다. 그는 언어는 일종의 상징계이며 거울에 비친 자아, 즉 내 눈에 비치는 대상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는 상상계가 있으며 상상할 수도 없고 상징계에 의해, 즉 언어에 의해 통합될 수도 없는, 모든 말이 멈춘 곳을 실재계라고 정의했는데 바로 이 지점, 설명할 수 없으나 미묘하게 마음에 남아 내 안에서 내 입술에서 맴돌게 하는 어떤 것, 실체를 표현할 순 없지만 즐거움이나 기쁨, 쾌락을 넘어선 어떤 것의 발화, 이게 바로 진정으로 시가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2
그의 글은 투명하다. 그는 때로 안개를 데려오지만 안개 너머를 볼 수 있다. 상수리나무 꼭대기까지 우리를 데려간다. 우듬지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그를 따라가볼 수 있다. 다른 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초점을 맞춰야 할 곳이다. 바로 그의 시선. 그가 바라보는 곳은 자연이다. 숲이다. 나무다. 꽃이다. 사람이다. 그에게는 사람도 하나의 자연이고 숲의 일부이며 나무이고 꽃이다. 그의 글은 심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그러나 정결하다. 이는 그의 영혼이 글 속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디지털 세상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늘 자가용 운전자라기보다 터벅터벅 시골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그가 구조화되고 인공적으로 축조된 세상이 아니라 생래적이고 자연스러운, 자연에 가까운, 아니 그 자신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노래하는 대상은 늘 그의 손을 잡고 있다. 정성철 시인이 지향하는 바는 사람과 자연의 유대다. 그 끈끈함이다. 그는 메마르고 비정한 도시에서도 꽃을 피운다. 그는 건축된 인공의 구조물들에게 자연을 선물한다. 언뜻 계산에 서투르고 이재에 밝지 않아 바보 이반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밝기도 어둡기도 우울하기도 경쾌하기도 차분하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내면과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결국 조화와 상생에 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우세하고 다른쪽은 열세인 공격과 경쟁과 비교로 인한 상처와 분노의 관계가 아니라 너도 좋고 나도 행복한 관계의 구축, 이것이 그가 원하고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세상이다.
그의 글은 장식도 현란한 수사도 없다. 다만 함께 걸으며 눈 맞추는 이들과의 진솔한 교감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시 [표지목을 찾아서] 1연을 살펴 보자.
추령의 새벽을 걸어
내장의 숲에 안긴다
잎을 보낸 애기사과나무를 지나서
선홍감 잎 한 장
연두빛 모과 하나
짖어대는 삽사리
안개에걸린 추령마루
더붉은옻나무이파리
둘렛길에피어난벼랑의구절초
빈가지에서는두리번거리는메추리몇마리
느릅나무열매의날개
키작아붉은애기사과
숲에서흘러내린흙들을가둔
사방댐
퍼득이며오르는장끼
너른홍송가지사이를날아다니는까마귀
갈참나무를쪼고있는줄무늬딱따구리
체잭체잭낯선새울음
하행의목계단과
산죽나무로이어진
갈랫길에서잠시멈칫,한다
띄어쓰기가 몇 행 진행되다가 모든 문장들이 이어붙여진다. 이 시를 읽다보면 숲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숲속에는 온갖 꽃들과 나무들과 새들과 사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 빽빽한 어울림이 표현되어 있는 이러한 진행방식으로 쓰인 몇 편의 시가 있다. 숲속의 새벽을 산책하는 시인의 시선은 온통 자연의 모습에게 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자연은 곧 그 자신이기도 하다. 자신의 생애를 두 발로 걸으며 조우했던 숱한 사람들도 그에게는 숲속 생명들처럼 애틋하지 않았을까. 그는 이 모두를 호명하려 애쓴다. '체잭체잭' 낯선 새 울음과 조우하였을 때 그는 당황하였을지도 모른다. 호명할 수 있는 이름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추령은 순창군 복흥면에 속해 있다. 이 곳은 장승만 20년 넘게 만들고 있는 촌장님이 살고 있다. 시인은 임실군 강진면에서 지구별 여행을 시작했다. 시집 [추령에는 시인이 산다]는 추령과 임실이라는 두 자연적 공간이 배경이 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살고 있는, 살아왔던 이들과의 교감이 시집 곳곳에 투영된다. 그가 바라보는 사람들은 늘 웃고 있다. 라캉의 거울이론에 의하면 그가 바라보는 거울 속 사람들은 늘 환한 미소로 그에게 답례하는 듯하다. 세상이 비정하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이고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에게는 부재하다. 이러한 일방적인 절대긍정의 세계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커다란 거울이어서 그는 다른 어떤 잣대를 들이대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묵묵의 장승들이' '줄줄이 서서 하냥 웃는'([추령가] 중에서) 모습만 보이고, '너털웃음을 바람에 털어내며/ 장승과 함께 서서 웃는 사람'([나무꾼과 선녀] 중에서)만 보이며, 한 번 눈이 내리면 사흘 줄곧 내려 앞산도 뒷산도 첩첩해져도 '바다 건너 따뜻한 화산섬'([빙하시대] 중에서)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이 여유는 빈한한 상황속에서도, 그 추운 겨울을 지나 '진노란 활엽의/화석나무들이/줄줄이 길을 열고 있었다.'([빙하시대] 중에서)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누구에겐들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겠는가. 그럴 때 시인은 홀로 눈물을 흘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하냥 말없이/ 살 속으로 눈을 떠/ 고샅고샅을 몸으로 들여다봐야'([아, 봉준이] 중에서)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겨우살이가/ 새봄의 가지를 키우는'([추령가] 중에서) 중임을 잊지 않고 '산짐승의 소리마저/잠든 추령숲에서/나는 깨어 무엇을 하'([순례 1] 중에서)느냐고 스스로에게 자꾸 되새겨 물을 줄 알고, '산다는 것이/구불구불한 면발 마냥/고갯길인 날이 많다/오르고 올라도 다시/굽이 고갯길로 다가서는/아흔아홉구비 갈재길 마냥/미로의 연속'([추령솟대는 날개를 가슴에 두고 있다] 중에서)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실족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삶의 방점을 찍을 줄 안다. 하여 그는 '억새 너덜겅의/ 덤불 숲 속으로/소리 없이/저벅저벅 뒤뚱 걸음'([새] 중에서)으로 멈추지 않고 걸어갈 줄 안다. '더부살이 삶'도 '아름다울 수'([겨우살이] 중에서) 있음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인격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를 짐작하게 하는 지점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나 그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는 점점 과거와는 다른 현재를 살 수 있고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설정할 수 있다. 불완전하고 미숙한 한 존재가 완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또한 현재의 것도 아니다. 미완의 존재인 인간은 바로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앞으로 한 걸음씩 진보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장이며 성숙이다.
그 순간 우리는 '상수리나무 꼭대기/꽁꽁 언 겨울에/푸른 잎을 올려/꽃을 피'([겨우살이] 중에서)우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며 '빈 나무 가지 끝에'서 새로운 '삶을 피'([겨우살이] 중에서)워낼 수 있는 것이다. [겨우살이] 전문을 다시 읽어보자.
상수리나무 꼭대기
꽁꽁 언 겨울에
푸른 잎을 올려
꽃을 피웠다
더부살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빈 나무 가지 끝에
삶을 피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한겨울 동풍이 분다
부풀어 퍼질 바람이
분다
북카페 뒷산
추령에
바람이 분다*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행적이 어떤 길이었는지 판단하고 정의내릴 수 있는 타자는 존재할 수 없다. 삶이란 온전히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으리라. 그의 언어 속에 함의된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늘 비탈길을 걸어온 사람인 듯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애틋한 시선을 획득하기에 이른 듯하다. 그는 '비탈길을/제발로' 직접 '올라가본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안다. '비탈길에솟아있는/돌뿌리하나/한낱이름없는풀들이/얼마나소중한생명'([인산을 오르며] 중에서)인지를. 그러한 삶에의 통찰 혹은 인식을 가지고 세상과 조우한다면 그의 시선은 온 우주에 가닿을 수 있으리라. 앞으로의 그를 기대한다. 그가 노래한, 미처 다하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 대한 조망은 다음 지면을 빌기로 한다.
3
언어는 고도의 상징들의 조합이다. 언어란 그 속에 그림들이 숨어 있다. 이 그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하나의 풍경들이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고도의 상징체계를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일상어가 갖는 단순한 상징에서 은유와 환유라는 고도의 상징까지 인간은 언어 속에서 태어나 언어 속에서 사라진다. 언어라는 고도의 상징을 은유나 환유라는 비유 속에 집어 넣어 온갖 이미지와 풍경들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인 우리들은 문명화된 체계 속에서 그 혜택을 구가한다.
시는 하나의 그림이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는 바로 시인의 역량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그림을 택할 것인가. 그것은 독자의 취향이 결정한다. 쓰는 자는 부지런히 읽는 자를 반드시 담보해야 하고 읽는 자는 쓰는 자를 부지런히 격려해야 한다. 독자가 있으니 작가가 있고 작가가 있으니 독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손등과 손바닥은 꼭 붙어 있다. 독자와 작가는 서로에게 늘 빚지고 있는 관계이며 따라서 공생의 관계이다. 이 두 관계의 교집합이 무한대로 커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늘 책 한 권쯤은 어디에 가든지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문화 속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두 관계가 무한대의 교집합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바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조건인 바, 깨어 있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공감이 서로의 관계를 끈끈한 유대로 묶는다. 한 사람의 시인, 정성철 시인에게 무한한 격려와 사랑을 부탁드린다. 성장은 곧 공생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정성철 시인이 늘 시의 산을 즐거이 오르기를 바란다. 여기서 논의되는 즐거움 속에는 '고통'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고통이나 노고 없는 즐거움이란 껍질만 아름다울 뿐 알멩이는 텅 비어 있는 호두와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통을 동반한 즐거움의 경지를 늘 일상으로 구가할 수 있을 때에라야 그는 더욱 높고 숭고한 지점의 시의 산에 이르러 독자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의정은 가라! 그가 발음하는 '자연'이라는 단어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탈인칭화되고 비인칭화되어 닿는 자리가 우리 모두에게 이르러 그가 새로운 시적 미학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를.*
이서영/ 작가 컬럼니스트
목차
목차
그곳의 찔레꽃은 시월에 피기 시작했다
가을 마중
대바람 소리
향수
처서 밤꽃
추령장
마을버스
부리로 부르는 소리
달맞이꽃 1
달맞이꽃 2
눈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눈으로
거꾸로 가는 시계추
서
버스 안에서
구암사 가는 길
#제2부ㅡ령(고개)
솟대 앞에서 1
솟대 앞에서2
표지목을 찾아서
나뭇꾼과 선녀
추령 중앙에는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추령숲의 장승가
아, 봉준이
장승숲에서
추령가
순례1
순례2
순례3
추령솟대는 날개를 가슴에 두고 있다
빙하시대
새
가시벅금자는 첩첩 눈 속에서도 검붉다
계절
겨우살이
사랑
위원장님
#제3부ㅡ시(시)
열목에서
대수리의 소망 하나ㅡ장군목에서
간이 승강장의 버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노을 하나
사진 1과 2
새벽
어둠 속으로 비가 내린다
끌망을 끌며
끌망 속에 쌓이는 것들
밤 강에서
비 내리던 밤
밤벚꽃
춘향
봄, 대숲에서
축하
눈꼽
인생표지판
선물
#제4부ㅡ인(사람)
너희들이 쉬어야 할 곳
인산을 오르며
아버지
베틀가
철없는 숫돌
아버지의 빈 길
아버지의 허리
어느날
매제에게
빈집
삶 1
삶 2
499개의퍼즐과마지막하나
아흔아홉 구비 깔딱고개를 넘어가며
각시붓꽃
희망
저자
저자
지금은 순창군 복흥면 추령 장승마을, 북카페에서 사는 시인으로 늘 자연과 교감하는 지구별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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