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마을, 하나-10년 후, 다시 만난 대추리
10년 후, 다시 만난 대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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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밀양, 대추리.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같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만, 바깥사람들은 또 잊는다. 그래서 기록하기 시작한, 아직 대추리에 사는 사람들이 묻고 답한 ‘온갖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
평균 출생연도가 2003년생인 청소년 17명이 묻고, 평균 출생연도가 1947년인 대추리 주민 11명이 답한, 매번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옛날과 그때와 오늘의 대추리’에 대한 기록.
평균 출생연도가 2003년생인 청소년 17명이 묻고, 평균 출생연도가 1947년인 대추리 주민 11명이 답한, 매번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옛날과 그때와 오늘의 대추리’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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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대추리, 기억하시나요?
1936년생 방승률의 고향은 대추리다. 일제강점기 방승률은 첫 번째 대추리에서 쫓겨났다. 태평양 전쟁을 치르던 일제는 방승률의 고향이 이제부터 '군사 기지'라고 했다. 얼마 후 방승률은 두 번째 대추리에서 다시 쫓겨난다. 공산당 괴뢰군과 싸우려면 미군 비행장이 필요한데 방승률이 살고 있던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방승률은 세 번째 대추리에서 또 쫓겨난다. 전국에 흩어진 미군 기지를 한곳으로 모을 계획인데, 미군들이 모일 땅에서 방승률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2019년 현재 방승률은 네 번째 대추리에서 살고 있다.
조선말을 했다며 방승률을 두들겨 패던 교원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열여섯 소년에게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교통호를 파게 했던 한국전쟁은 멈췄고, 벼가 자라야 할 들판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들도 떠났지만, 방승률은 '아직' 대추리에 살고 있다. 이 책 〈〈거기, 마을, 하나-10년 후 다시 만난 대추리〉〉는 대추리에 살고 있는 '아직'에 대한 이야기다.
1936년생의 기억을 2002년생과 2003년생이 듣다
2006년 5월 4일, 미군 기지 확장 이전 지역 안에 있었던 대추분교를 강제퇴거하고, 공사 대상지에 관계자 외 출입을 막기 위해 철조망을 치는 행정대집행이 진행되었다. 경찰은 새벽 4시 반경부터 1만여 명의 인원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 투입했다. 국방부는 보병, 공병 등 3천여 명의 병력을 보냈다. 철거 용역 직원 700여 명과 3천여 명의 군인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20km가 넘는 철조망을 설치했다. 행정대집행에 반대하는 시위대 1천여 명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공권력과 시위대의 충돌로 1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왔고, 시위대 가운데 60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연행되었다. 방승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별안간 그 군인들이 와 가지고 그 농토에다가, 동네 가상에다가 홀을 파고, 철조망을 가져다 막 치고, 그 원형 철망, 동그란 거 있잖아. 그걸 가져다 막 집어넣고. 그 군인들꺼정 들어온 거여. 저 쪽 그 오성면 쪽에서 강을 건너 가지고, 그 도강을 해서 막 들어오고, 헬리콥터루다가 철조망 같은 걸 날라서 막 연결을 해놔. 그렇게 하고선 주민들이 농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원형 철조망을 해놓고. 차가 오면 그 차를 타고 학교에 가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승낙을 해야지 갈 수 있었어. 그런데 분하잖아. 이게 우리를 고립시키고 동네를 그냥 포위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떤 방법을 썼냐, 멍석이라는 게 있어. 짚을 엮어서 이런 자리만하게 만든 게 멍석이야. 그거를 원형 철조망에다 덮어씌우고 그리고 넘어가고 그랬어."
_ 본문 71쪽, 〈방승률(1936년생)의 이야기를 전혜진(2002년생)과 김가현(2003년생)이 듣다.〉
이름까지 빼앗겼다는 것은 아시나요?
150여 가구에 이르던 마을은 40여 가구로 반의 반토막이 났지만 여전히 대추리에 살고 싶은 이들과, 마지막까지 싸우던 지킴이들 가운데 일부가 함께 이주했다. 2010년 새 마을로 이사를 왔지만, 대추리라는 이름을 가져오고 싶었던 주민들의 바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네 번째 대추리의 행정 구역상 명칭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다. 1956년생 이경분의 마음은 2000년생 한유빈과 2004년생 김서진이 들었다.
"지금 제일 자존심 상하는 게 뭐냐면, 우리가 나올 때 정부와 협상볼 적에 대추리라는 명칭은 꼭 갖게 해준다고 했었던 거, 그게 안 되는 거 그게 제일 자존심 상하는 거야. 우리 이장님도 그런 거야. 제일 마음에 걸려 가지고 지금까지도 그 미련을 못 버리고 소송까지 가느니 어쩌는지 했으니까는. 지금은 주소지가…지금 대추안길로 돼 있어도 본주소지는 노와리야. 여기는 노와리 번지이기 때문에, 그런 게 제일 자존심 상하는 거지. 다른 건 어디 갔던 간에, 에이 싫잖아(한탄)…
투쟁을 뭐 하고 안 하고 이런 거 그거 따른 시선 따갑게 보는 거 뭐, 빨갱이 한 번 전쟁(싸움) 났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그런 시선을 받아줄 수는 있는데, 그런 소리까지 들으면서 지금까지 살았는데, 내 부락 이름 명칭 그거 하나도 못 받아 가지고 이렇게… 지금 행정으로는 우리 부락이 없어요. 대추리 자체가 없어. 그리고 우리 부락에 이장 없어. 그냥 부락에서 만들어서 이장이지 행정상 이장은 없어요. 그런 실체인거라. 그거는 행정 계통 같은 데서 무슨 혜택 같은 거 볼 수 있는 것도 제대로 못 보는 거야. 하다못해 뭐, 이런 거 씨앗 종자 같은 거 신청을 할라고 해도 이웃 부락 이장한테 가서 해야 되니까. 난 이런 실체가 너무 기가 막히는 거지."
_ 본문 161쪽, 〈이경분(1956년생)의 이야기를 한유빈(2000년생)과 김서진(2004년생)이 듣다.〉
일제강점기에도 땅은 빼앗겼을망정 마을 이름은 빼앗기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땅도 마을 이름도 잃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온갖 마음으로 살고 있다. 평택평화센터는 주민들의 이 온갖 마음이 사라져 없어지기 전에 흔적을 남기기로 했다. 정부와 이주협상이 타결된 2007년 이후 10년이 지나 다시 주민들을 기록하는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평택평화센터는 아름다운재단의 '2017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사업으로 '청소년 구술 작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평균 출생연도가 1947년인 대추리 주민 11명의 마음을, 평균 출생연도가 2003년생인 청소년 17명이 들었다. 묻고 답하는 이들 사이에는 60년이 있었다. 인권기록네트워크 〈소리〉의 멤버들은 이 차이를 가운데에서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인터뷰도 함께 정리했다.
바깥 사람들은 늘, 또, 쉽게 잊는다
평택 미군 기지 확장 이전 공사를 위한 대추리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공권력과 시위대의 충돌은 뉴스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군인들은 헬리콥터로 철조망을 가져와 공사 예정 구간에 설치하고, 무장한 경찰이 이를 호위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만장을 만들기 위해 모아둔 대나무를 뽑아서 공권력과 대치했고 싸움이 일어났다. 시위대와 경찰, 군인, 용역회사 직원들은 물론이고, 그곳에 없던 시민들도 TV로 현장이 중계되는 것을 지켜봤다. '2006년씩이나 되었음에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로 다들 괴로워했지만, 솔직해져야 한다. 바깥 사람들이 느끼는 이런 괴로움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
2015년 1월 31일, 서귀포시 강정동에서 제주 해군 기지 공사를 위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되었다. 오전 7시경부터 경찰과 해군에서 의뢰한 용역 직원 등 1,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제주 해군 기지 공사장 입구에 시위대가 설치한 천막 등이 철거되었고, 부상자와 연행자가 나왔다. 2014년 6월 11일, 밀양시 산외면, 상동면, 부북면에서 초고압 송전탑 건설 공사를 위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되었다. 새벽 6시부터 경찰 2,000여 명과 밀양시와 한국전력 직원 200여 명 등은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농성장을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다쳤다. 2012년과 2013년에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대추리 행정대집행 이후에도 비슷한 일은 계속된다. 강정에도 밀양에도 아직 사람이 살고 있듯이 대추리에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 1956년생 이경분의 마음을 2000년생 한유빈과 2004년생 김서진은 좀더 들었다.
"주민들은 그게 상처가 깊어요. 그냥 솔직히 말해서 나 연관이 아니고 가서 그냥 도와주는 거하고, 나도 직접 이렇게 연관이 되어 내 피부에 와 닿은 거하고 다른 거야. 왜냐면 주민들은 상처가 굉장히 깊다는 거. 그니까는 잊혀지지는 않어. 그렇지만 두 번 다시 그걸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은 거야. 그래서 벌써 부락에서 우리 부녀 사업하는 것도, 안 도와주는 사람 많아요. 몇 사람 와서 할 만한 사람도 안 해줘. 그런 게 싫은 거야."
_ 본문 172쪽, 〈이경분(1956년생)의 이야기를 한유빈(2000년생)과 김서진(2004년생)이 듣다.〉
대추리, 밀양, 강정마을, 성주까지,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바탕은 약했고, 마무리는 늘 최소한을 규정한 제도에 기댔으며, 제도가 규정한 최소한에는 '남을 사람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 책은 자리 없이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잠깐 듣는 자리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대추리에서 벌어졌던 싸움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고, 싸움을 지켜보면서 혹은 참여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다시 잊어버리겠지만, 잠깐이나마, 아직 대추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1936년생 방승률의 고향은 대추리다. 일제강점기 방승률은 첫 번째 대추리에서 쫓겨났다. 태평양 전쟁을 치르던 일제는 방승률의 고향이 이제부터 '군사 기지'라고 했다. 얼마 후 방승률은 두 번째 대추리에서 다시 쫓겨난다. 공산당 괴뢰군과 싸우려면 미군 비행장이 필요한데 방승률이 살고 있던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방승률은 세 번째 대추리에서 또 쫓겨난다. 전국에 흩어진 미군 기지를 한곳으로 모을 계획인데, 미군들이 모일 땅에서 방승률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2019년 현재 방승률은 네 번째 대추리에서 살고 있다.
조선말을 했다며 방승률을 두들겨 패던 교원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열여섯 소년에게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교통호를 파게 했던 한국전쟁은 멈췄고, 벼가 자라야 할 들판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들도 떠났지만, 방승률은 '아직' 대추리에 살고 있다. 이 책 〈〈거기, 마을, 하나-10년 후 다시 만난 대추리〉〉는 대추리에 살고 있는 '아직'에 대한 이야기다.
1936년생의 기억을 2002년생과 2003년생이 듣다
2006년 5월 4일, 미군 기지 확장 이전 지역 안에 있었던 대추분교를 강제퇴거하고, 공사 대상지에 관계자 외 출입을 막기 위해 철조망을 치는 행정대집행이 진행되었다. 경찰은 새벽 4시 반경부터 1만여 명의 인원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 투입했다. 국방부는 보병, 공병 등 3천여 명의 병력을 보냈다. 철거 용역 직원 700여 명과 3천여 명의 군인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20km가 넘는 철조망을 설치했다. 행정대집행에 반대하는 시위대 1천여 명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공권력과 시위대의 충돌로 1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왔고, 시위대 가운데 60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연행되었다. 방승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별안간 그 군인들이 와 가지고 그 농토에다가, 동네 가상에다가 홀을 파고, 철조망을 가져다 막 치고, 그 원형 철망, 동그란 거 있잖아. 그걸 가져다 막 집어넣고. 그 군인들꺼정 들어온 거여. 저 쪽 그 오성면 쪽에서 강을 건너 가지고, 그 도강을 해서 막 들어오고, 헬리콥터루다가 철조망 같은 걸 날라서 막 연결을 해놔. 그렇게 하고선 주민들이 농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원형 철조망을 해놓고. 차가 오면 그 차를 타고 학교에 가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승낙을 해야지 갈 수 있었어. 그런데 분하잖아. 이게 우리를 고립시키고 동네를 그냥 포위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떤 방법을 썼냐, 멍석이라는 게 있어. 짚을 엮어서 이런 자리만하게 만든 게 멍석이야. 그거를 원형 철조망에다 덮어씌우고 그리고 넘어가고 그랬어."
_ 본문 71쪽, 〈방승률(1936년생)의 이야기를 전혜진(2002년생)과 김가현(2003년생)이 듣다.〉
이름까지 빼앗겼다는 것은 아시나요?
150여 가구에 이르던 마을은 40여 가구로 반의 반토막이 났지만 여전히 대추리에 살고 싶은 이들과, 마지막까지 싸우던 지킴이들 가운데 일부가 함께 이주했다. 2010년 새 마을로 이사를 왔지만, 대추리라는 이름을 가져오고 싶었던 주민들의 바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네 번째 대추리의 행정 구역상 명칭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다. 1956년생 이경분의 마음은 2000년생 한유빈과 2004년생 김서진이 들었다.
"지금 제일 자존심 상하는 게 뭐냐면, 우리가 나올 때 정부와 협상볼 적에 대추리라는 명칭은 꼭 갖게 해준다고 했었던 거, 그게 안 되는 거 그게 제일 자존심 상하는 거야. 우리 이장님도 그런 거야. 제일 마음에 걸려 가지고 지금까지도 그 미련을 못 버리고 소송까지 가느니 어쩌는지 했으니까는. 지금은 주소지가…지금 대추안길로 돼 있어도 본주소지는 노와리야. 여기는 노와리 번지이기 때문에, 그런 게 제일 자존심 상하는 거지. 다른 건 어디 갔던 간에, 에이 싫잖아(한탄)…
투쟁을 뭐 하고 안 하고 이런 거 그거 따른 시선 따갑게 보는 거 뭐, 빨갱이 한 번 전쟁(싸움) 났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그런 시선을 받아줄 수는 있는데, 그런 소리까지 들으면서 지금까지 살았는데, 내 부락 이름 명칭 그거 하나도 못 받아 가지고 이렇게… 지금 행정으로는 우리 부락이 없어요. 대추리 자체가 없어. 그리고 우리 부락에 이장 없어. 그냥 부락에서 만들어서 이장이지 행정상 이장은 없어요. 그런 실체인거라. 그거는 행정 계통 같은 데서 무슨 혜택 같은 거 볼 수 있는 것도 제대로 못 보는 거야. 하다못해 뭐, 이런 거 씨앗 종자 같은 거 신청을 할라고 해도 이웃 부락 이장한테 가서 해야 되니까. 난 이런 실체가 너무 기가 막히는 거지."
_ 본문 161쪽, 〈이경분(1956년생)의 이야기를 한유빈(2000년생)과 김서진(2004년생)이 듣다.〉
일제강점기에도 땅은 빼앗겼을망정 마을 이름은 빼앗기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땅도 마을 이름도 잃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온갖 마음으로 살고 있다. 평택평화센터는 주민들의 이 온갖 마음이 사라져 없어지기 전에 흔적을 남기기로 했다. 정부와 이주협상이 타결된 2007년 이후 10년이 지나 다시 주민들을 기록하는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평택평화센터는 아름다운재단의 '2017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사업으로 '청소년 구술 작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평균 출생연도가 1947년인 대추리 주민 11명의 마음을, 평균 출생연도가 2003년생인 청소년 17명이 들었다. 묻고 답하는 이들 사이에는 60년이 있었다. 인권기록네트워크 〈소리〉의 멤버들은 이 차이를 가운데에서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인터뷰도 함께 정리했다.
바깥 사람들은 늘, 또, 쉽게 잊는다
평택 미군 기지 확장 이전 공사를 위한 대추리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공권력과 시위대의 충돌은 뉴스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군인들은 헬리콥터로 철조망을 가져와 공사 예정 구간에 설치하고, 무장한 경찰이 이를 호위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만장을 만들기 위해 모아둔 대나무를 뽑아서 공권력과 대치했고 싸움이 일어났다. 시위대와 경찰, 군인, 용역회사 직원들은 물론이고, 그곳에 없던 시민들도 TV로 현장이 중계되는 것을 지켜봤다. '2006년씩이나 되었음에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로 다들 괴로워했지만, 솔직해져야 한다. 바깥 사람들이 느끼는 이런 괴로움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
2015년 1월 31일, 서귀포시 강정동에서 제주 해군 기지 공사를 위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되었다. 오전 7시경부터 경찰과 해군에서 의뢰한 용역 직원 등 1,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제주 해군 기지 공사장 입구에 시위대가 설치한 천막 등이 철거되었고, 부상자와 연행자가 나왔다. 2014년 6월 11일, 밀양시 산외면, 상동면, 부북면에서 초고압 송전탑 건설 공사를 위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되었다. 새벽 6시부터 경찰 2,000여 명과 밀양시와 한국전력 직원 200여 명 등은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농성장을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다쳤다. 2012년과 2013년에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대추리 행정대집행 이후에도 비슷한 일은 계속된다. 강정에도 밀양에도 아직 사람이 살고 있듯이 대추리에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 1956년생 이경분의 마음을 2000년생 한유빈과 2004년생 김서진은 좀더 들었다.
"주민들은 그게 상처가 깊어요. 그냥 솔직히 말해서 나 연관이 아니고 가서 그냥 도와주는 거하고, 나도 직접 이렇게 연관이 되어 내 피부에 와 닿은 거하고 다른 거야. 왜냐면 주민들은 상처가 굉장히 깊다는 거. 그니까는 잊혀지지는 않어. 그렇지만 두 번 다시 그걸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은 거야. 그래서 벌써 부락에서 우리 부녀 사업하는 것도, 안 도와주는 사람 많아요. 몇 사람 와서 할 만한 사람도 안 해줘. 그런 게 싫은 거야."
_ 본문 172쪽, 〈이경분(1956년생)의 이야기를 한유빈(2000년생)과 김서진(2004년생)이 듣다.〉
대추리, 밀양, 강정마을, 성주까지,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바탕은 약했고, 마무리는 늘 최소한을 규정한 제도에 기댔으며, 제도가 규정한 최소한에는 '남을 사람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 책은 자리 없이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잠깐 듣는 자리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대추리에서 벌어졌던 싸움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고, 싸움을 지켜보면서 혹은 참여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다시 잊어버리겠지만, 잠깐이나마, 아직 대추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목차
발간사 015
강권석(1942년생)과 한대수(1942년생)의 이야기를 김윤아(2004년생)와 정인하(2004년생)가 듣다. 018
김택균(1964년생)의 이야기를 오은택(2004년생)과 오창영(2004년생)이 듣다. 030
민병대(1938년생)의 이야기를 이시현(2001년생)과 유정윤(2004년생)이 듣다. 058
방승률(1936년생)의 이야기를 전혜진(2002년생)과 김가현(2003년생)이 듣다. 070
송재국(1938년생)의 이야기를 서우경(2002년생)과 신하준(2003년생)이 듣다. 084
신종원(1963년생)의 이야기를 김혜래(2002년생)와 김가람(2002년생)이 듣다. 104
심정섭(1942년생)의 이야기를 김성용(2004년생)이 듣다. 132
이경분(1956년생)의 이야기를 한유빈(2000년생)과 김서진(2004년생)이 듣다. 148
한만수(1949년생)와 조임순(1952년생)의 이야기를 박상우(2004년생)와 이동현(2004년생)이 듣다. 174
사진 기록 183
강권석(1942년생)과 한대수(1942년생)의 이야기를 김윤아(2004년생)와 정인하(2004년생)가 듣다. 018
김택균(1964년생)의 이야기를 오은택(2004년생)과 오창영(2004년생)이 듣다. 030
민병대(1938년생)의 이야기를 이시현(2001년생)과 유정윤(2004년생)이 듣다. 058
방승률(1936년생)의 이야기를 전혜진(2002년생)과 김가현(2003년생)이 듣다. 070
송재국(1938년생)의 이야기를 서우경(2002년생)과 신하준(2003년생)이 듣다. 084
신종원(1963년생)의 이야기를 김혜래(2002년생)와 김가람(2002년생)이 듣다. 104
심정섭(1942년생)의 이야기를 김성용(2004년생)이 듣다. 132
이경분(1956년생)의 이야기를 한유빈(2000년생)과 김서진(2004년생)이 듣다. 148
한만수(1949년생)와 조임순(1952년생)의 이야기를 박상우(2004년생)와 이동현(2004년생)이 듣다. 174
사진 기록 183
저자
저자
강권석 외
강권석, 김가람, 김가현, 김서진, 김성용, 김윤아, 김택균, 김혜래, 루트, 명숙, 묘량, 민병대, 박상우, 방승률, 서우경, 송재국, 송효정, 신종원, 신하준, 심정섭, 오은택, 오창영, 유정윤, 이경분, 이동현, 이시현, 전혜진, 정인하, 조임순, 한대수, 한만수, 한유빈, 홍세미, 홍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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