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로 오는 바다(시의 시간들 미래시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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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곁에서 받아 적은 생의 물결들
- 백종덕 시에서 읽는 돌봄의 언어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백종덕의 시집 『가나다로 오는 바다』를 읽으면 먼저 '돌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시인이 요양원을 운영하며 노년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말은 이 시집의 중요한 정조나 사유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그것은 '곁에 있음'의 경험에서 얻게 된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누군가의 쇠약해지는 몸, 자주 되풀이되는 말, 사라지는 기억, 견디기 힘든 그리움 같은 쉽게 말로 정리되지 않는 고통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끝 자리에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 생각을 통해 시인은 "가, 나, 다"라는 가장 처음의 말, "부르던 이름 하나, 붙잡고 싶은 얼굴 하나, 마지막까지 건네고 싶었던 마음 하나"로 돌아간다. 이 시집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그 처음의 말로 돌아가는 이 느린 귀향의 과정이다.
시인의 말에서 그는 "누군가는 이름을 잊어가고, 누군가는 같은 문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분은 창밖의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분은 다 식은 국물 한 숟갈에 평생의 그리움을 담아내기도" 한다고 쓴다. 여기서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상실의 현상 자체보다 그 상실 속에서도 버리지 못한 삶의 흔적이다. 이름을 잊는 사람에게도 이름을 향한 그리움은 남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에게도 반복을 통해 붙잡고 싶은 삶의 장면은 남는다. 백종덕의 시가 돌봄의 윤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돌봄은 결핍을 관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돌봄은 사라지는 것들의 표면 아래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돌봄의 가치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잊고, 더디게 말하고,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을 맞는다. 그러나 속도와 효율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느린 몸과 반복되는 말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생산성과 성과로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에서 노년의 몸은 쉽게 주변부로 밀려난다.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사람, 하루 대부분을 침상 위에서 보내는 사람은 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돌봐야 한다. 그래서 돌봄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윤리적 가치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돌봄은 인간을 기능으로 환산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느린 존재의 시간을 함께 견디겠다는 약속이다. 백종덕의 시는 바로 이 약속의 언어를 시로 옮긴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 돌봄은 연민만을 감상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돌봄은 구체적이고 생활 감각적이다. 고무줄을 당기며 웃고, 배식차가 지나가고, 기저귀를 갈고, 섹션기 속으로 가래 끓는 소리가 빨려 들어가고, 어르신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그리움을 담은 식은 국물 한 숟갈을 본다. 이 시집의 언어가 생생한 까닭은 이렇듯 돌봄의 현장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냄새와 소리와 욕설과 농담과 신음이 그대로 들어온다. 이 구체성이 시를 살아 있게 한다. 돌봄은 막연한 선의에서 확인되는 것이기보다 한 사람의 몸 곁에 머무는 시간이며, 그 몸이 내는 소리를 끝까지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2. 곁의 마음과 돌봄의 실천
『가나다로 오는 바다』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은 '곁'이다. 곁은 단순한 위치를 뜻하지 않는다. 곁은 마음의 방향이며, 이는 타인의 시간 안으로 잠시 들어가는 사랑의 실천이다. 백종덕의 시에서 곁은 타인을 구경하고 관찰하는 자리가 아닌 함께 견디는 위치를 말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누군가의 몸이 무너지는 동안 그 무너짐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장소이며, 누군가의 말이 흩어지는 동안 그 말의 남은 음절을 받아 적는 자리이다.
「마음이라는 꽃」은 이 곁의 의미를 가장 단순하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옆을 바라본다는 건
경계의 마음
뒤를 바라본다는 건
의심의 마음
위를 바라본다는 건
겸손의 마음
너를 바라본다는 건
사랑의 마음
하늘을 바라본다는 건
기도의 마음
곁을 바라본다는 건
배려의 마음
마음이란
내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내 시선이 닿는 곳에 피는 꽃이었다.
- 「마음이라는 꽃」 전문
이 시의 핵심은 마음을 내면의 고정된 실체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음은 시선이 닿는 곳에서 피어난다. 백종덕의 돌봄 시학은 이 발견에서 출발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베푸는 행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선을 옮겨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내 중심에서 타인의 곁으로, 나의 편의에서 타인의 불편으로, 나의 속도에서 타인의 더딘 시간으로 시선을 옮기는 일이다. "곁을 바라본다는 건 / 배려의 마음"이라는 구절이 이 모든 것을 다 함축해 보여준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돌봄의 시작이 시선의 전환에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가능할 때 나의 마음은 꽃이 되어 누군가를 기쁘게 하거나 위로할 수 있다. 배려와 돌봄은 이렇게 시선에서 나온다.
「문고리」 역시 곁의 사유를 사물의 이미지로 구체화한다. 문고리는 안과 밖을 잇는 장치다. 그것은 닫힘과 열림 사이에 놓여 있다. 시인은 "손이 닿으면 안과 밖이 잠깐 흔들린다"고 말한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다는 것은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잠시 흔드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곁으로 가는 일의 출발이기도 하다. 시의 마지막에서 "나는 잠깐 나를 밖에 두고 너의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진술은 돌봄의 가장 중요한 태도를 담고 있다. 돌봄은 나를 앞세우는 일이기보다는 잠시 나를 밖에 두고 누군가의 곁으로 가 그 사람의 마음 안으로 가는 일이다. 내 판단, 내 속도, 내 편리함을 잠시 내려놓고 타인의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는 말이다.
「연꽃잎의 자세」는 곁에 있음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준다. 저녁은 "빛도 기운도 빠진 채 /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그때 연꽃잎 하나가 "하늘을 향해" 서 있다. 그것은 "두껍지도 / 단단하지도 않은" 잎이지만 "지는 해를 붙잡고서 / 잠시라도 / 붉음을 감당"한다고 시인은 묘사한다. 이 시에서 연꽃잎은 무너짐을 막아낼 만큼 단단하지 않지만, 잠시라도 아름다운 시간을 지키는 일을 감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돌봄의 본질 역시 여기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돌봄은 죽음과 쇠락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무너짐 곁에서 잠시라도 그 시간을 함께 감당할 수는 있다.
이런 돌봄의 마음은 「할매는 살겠다고 하신다」에서 더욱 구체적인 장면으로 나타난다.
구순의 할매는
죽겠다 죽겠다 말하며
젖은 하루를 말린다
- 「할매는 살겠다고 하신다」 부분
죽겠다는 말은 이 구절에서 삶의 포기 선언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하루를 견디며 내뱉는 몸이 살기 위해 하는 말이다. 할매는 증손주의 발 냄새를 맡고, "가을 콩대가 터지듯 / 콩알 하나"를 튀어나오게 한다. 더듬거리는 무릎은 어린 무릎에게 닿는다. 그 모습을 보고 시인은 말한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그저 만지는 일
그래서 더 낮게 엎드려
콩알을 찾듯
바닥을 더듬거리는 일
- 위 시 부분
이 구절은 백종덕의 돌봄 시학을 압축해 말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만지는 일, 그것이 돌봄이다. 여기에는 과도한 수사도, 거창한 구원의 서사도 없다. 죽겠다면서도 오늘은 죽지 않기로 하는 삶의 작은 방향 전환이 있을 뿐이다. 그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증손주의 체온과 냄새, 어린 무릎의 감촉이다. 생명은 생명을 만질 때 다시 살아야겠다는 쪽으로 기운다. 백종덕의 시에서 돌봄은 이 접촉의 감각과 함께 한다.
이 시집의 3부에 실린 「낱말 샐러드」, 「우리 딸 이름과 똑같네」, 「엄마의 최선」은 돌봄의 현장에서 언어가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낱말 샐러드」에서 얘기되는 말들은 문법적으로 온전하지 않다. 이런 잘못된 말들이 "무언증의 흰 복도"를 지나고, "입술 밑에 고인 비(非)단어"가 되고 그리하여 "명사와 동사가 접시 위에서 낱말 샐러드"가 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 흐트러진 언어를 무의미한 소음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체위 변경을 하는 언어의 육체"라는 표현은 언어를 몸과 연결한다. 돌봄의 현장에서 말은 단순한 의사전달 수단이라기보다는 삼키지 못하는 목, 마비된 혀, 누워 있는 몸,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생활과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섹션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래 끓는 소리"까지도 "오늘의 가장 정직한 운율"이 된다. 이 시가 강한 울림을 주는 까닭은 언어의 붕괴 속에서도 시가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표준어 표기법에 어긋나는 "--해쓰"라는 표현이 몸으로 말해지는 이 정직한 표현을 대변한다. 틀린 말과 바르지 못한 표현이 삶의 가장 절실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 말들은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말들이 시가 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종덕의 시에서 곁은 가장 적극적으로 돌봄의 윤리를 실천하는 자리이다. 곁에 있는 사람은 보고, 듣고, 기다리고, 이름을 다시 불러주고, 몸의 신호를 읽고, 농담을 받아주고, 울음을 들어준다. 시인은 그 곁에서 받아 적는다. 시가 돌봄이 되는 까닭은 받아 적는 행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들을 붙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말이 무너지는 곳에서 다시 말을 만들고, 이름이 흐려지는 곳에서 다시 이름을 부르며, 생이 약해지는 곳에서 생의 마지막 불씨를 지킨다.
3. 자연에서 배우는 낮은 자세
백종덕의 시에서 자연은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배워야 할 자세를 가르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특히 물, 산, 꽃, 나무, 돌, 햇빛은 모두 낮아지는 법과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자연은 시인에게 교사다. 그런데 자연이 가르쳐주는 것이 돌봄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돌봄 역시 낮은 자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돌보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버려야 한다. 상대의 눈높이, 상대의 몸의 속도, 상대의 어눌한 언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백종덕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는 몸 낮춤의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음 시 「팔당에서 물을 보았다」가 대표적이다.
팔당댐에서 물을 만났다
물의 신체를 깊게 만난다
검룡소에서 시작해
두물에서 몸을 섞은 물
달과 별과 매미와 잠자리를
한꺼번에 피워 올렸다
본다는 일이 깨달음이 되는 순간이 있다
물은 가장 본질에서 태어나
마침내 거슬러 올라 보려고도 하지만
자신보다 낮은 곳으로 임한다
사람이 물을 본다는 일은
한 가계의 역사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섞이고 만나고 고이고 다시 흘러가는
계절을 지나가는 마음과 같았다.
- 「팔당에서 물을 보았다」 전문
시인은 물의 신체를 만난다. 물은 검룡소에서 시작해 두물에서 몸을 섞고, 달과 별과 매미와 잠자리를 한꺼번에 피워 올린다. 시인은 "본다는 일이 깨달음이 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 깨달음의 핵심은 물이 "자신보다 낮은 곳으로 임한다"는 데 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런데 이 낮은 자세가 많은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섞이게 하고, 변화와 발전을 이루고 결국은 역사를 구성한다. 한 사람의 성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낮은 자세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돌봄의 자세로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타인의 몸 가까이 가게 되고 그와 섞이고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낮은 물의 자세는 돌봄의 자세와 닮았다. 돌봄은 자신을 낮추어 타인의 몸 가까이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절의 속셈」에서도 자연은 사람에게 배움을 준다. 봄은 큰 성공을 바라지 않고, 여름의 푸름은 낙엽을 좋아하지 않으며, 가을은 낮은 곳을 알려준다. "가을 스승은 / 당신에게 낮은 곳을 가르쳐 줍니다 /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구절은 이 시집의 자연관을 잘 말해준다. 계절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지 않는다. 계절은 지나감과 기다림과 낮아짐을 가르친다. 특히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내려놓음의 계절이다. 낙엽이 지고, 열매가 익으며, 생은 자신의 무게를 땅 쪽으로 돌려놓는다. 백종덕의 시가 자연에서 배우는 낮은 자세는 바로 이 내려놓음의 지혜가 아닐까 한다.
자연의 일부인 나무 역시 중요한 스승이다. 「오늘도 나무를 본다」에서 시의 화자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노년의 마음을 나무를 바라보는 행위로 옮겨 적는다. "네가 보고 싶을 때 / 나는 가만히 나무를 본다 / 그리고 나지막이 이야기를 건넨다 / 바람 타는 나무가 / 네 목소리로 대답할 때까지"라는 대목에서처럼 나무는 그리움의 대리자가 된다. 직접 닿을 수 없는 자식의 목소리는 바람 타는 나무를 통해 돌아온다. 이렇듯 자연은 부재를 견디게 하고 위로하는 매개가 된다. 돌봄의 현장에서도 이런 매개는 중요하다.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없다. 그러나 나무, 바람, 햇빛, 별은 사람의 부재를 대신해 외로운 노년의 삶을 응대해 준다. 시인은 그 응대의 말을 듣고 전해주는 사람이다.
다음 시 「자작나무를 읽었다」는 시인이 나무를 보며 얻게 된 깨달음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타작(打作)이다
부러지고 꺽이면서도
매서운 추위를 견뎌온 몸짓
살기 위해
바닥을 치던
고단한 타점(打點)들
자작의 날들
누군가에게
그것은 자장(滋養)이었다
끝내 온기를 잃지 않으려 했던 활엽의 그리움으로
서서 떠는 법을 익혔던
그것은 간단한 나무의 날들이 아니었다
한 생애가
제 시간을
어떤 걸음으로 건너왔는지
흰 살갗 위에
새겨놓은
눈부신 대답을 해독해 보았다.
- 「자작나무를 읽었다」 전문
이 시에서 자작나무는 나무의 이름이기를 넘어 한 생애의 문서다. "부러지고 꺾이면서도 / 매서운 추위를 견뎌온 몸짓"이 있고, "살기 위해 / 바닥을 치던 / 고단한 타점들"이 있다. 시인은 자작나무의 흰 살갗 위에 새겨진 이 고난의 시간을 "해독"한다. 이렇듯 백종덕의 시에서 자연을 본다는 것은 표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몸에 새겨진 견딤의 흔적을 읽는 일이다. 이런 읽기의 방식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늙은 몸의 주름, 굽은 무릎, 반복되는 말, 흔들리는 손은 모두 한 생애가 자신의 시간을 건너온 흔적이다. 시인은 그것을 해독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나무로부터 깨달은 삶의 자세이고 자신의 시의 존재 이유이다.
시인에게 깨달음을 준 자연은 이제 시인에게 따뜻한 인격적 존재로 다가온다. 「이름」은 단 네 줄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시인과 자연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작품이다.
이쁜아 -
큰 소리로 한번 외쳐 보았더니
초록 목도리를 한
산이 돌아보았다
눈화장을 금방 끝낸
별이 내려다 보았다.
- 「이름」 전문
이 시에서 "이쁜아"는 자연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 호명은 산과 별을 돌아보게 한다. 세계는 이름을 통해 응답한다. 시인이 자연을 부르는 이 호명의 방식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것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너를 알아본다는 뜻이며, 너와 나 사이에 응답의 통로를 연다는 뜻이다. 나아가 돌봄의 현장에서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불러오는 가장 짧은 문장이다. 이름을 잃어가는 사람에게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행위는 그 사람을 세계 속에 다시 세우는 일이다.
「정기정꽃」은 이 이름 부르기의 의미가 가장 극적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노래가 자꾸 발을 헛디딘다
누군가 박자를 놓쳐도 아무도 고치지 않은, 오후
의자 위로 나란히 얹힌 무릎들
서로 다른 계절이 정물처럼 내려앉아 있다
"꽃 이름을 하나씩 말씀해 보실까요"
개나리
동백 꽃
아까시아 꽃
백일홍 --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든다
기척 없던 공기를 가르고
가장 투명한 눈동자가 정면의 허공을 꿰뚫는다
"정기정꽃이요"
순간, 방 안의 흐름이 멈춘다
하얗게 표백된 풍경 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명한 줄기 하나가
바닥을 뚫고 솟구쳐 오른다
...(중략)...
정기정꽃 -
우주를 다 덮고도 남을
엄청난 꽃잎 한 송이의 꽃이다.
- 「정기정꽃」 부분
꽃 이름을 말해보라는 질문에 한 사람이 자기 이름에 꽃을 붙여 "정기정꽃이요"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방 안의 흐름은 멈추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명한 줄기 하나"가 솟구친다. 시인은 "이름은 이미 만개한 소묘가 되어 있었다"고 쓴다. 그리고 "정기정꽃"은 "우주를 다 덮고도 남을 / 엄청난 꽃잎 한 송이의 꽃"이 된다. 이 시의 감동은 이름을 잘못 말한 장면을 한갓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는 데서 나온다. 시인은 그 대답 속에서 한 생애가 제 이름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장면을 본다. 단순한 호칭인 이름은 여기서 존재가 마지막까지 붙잡는 자기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정기정꽃"은 질문의 의도를 벗어난 틀린 답이긴 하지만, 한 인간이 자기 이름으로 피워낸 마지막 개화이다. 이렇게 한 존재는 자연을 배우면서 자연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4. 바다 이미지와 존재의 귀향
이 시집의 중심 이미지는 단연 바다다. 바다는 표제시 「가나다로 오는 바다」에서부터 여러 편의 「바다」 연작과 「바다로 돌아간 손」, 「고흐의 노을」, 「눈 오는 밤」, 「어떤 귀향」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백종덕의 바다는 풍경으로 존재하거나 여행의 장소로 등장하기보다는 한 존재가 무게를 내려놓는 자리, 상처를 씻는 자리, 마지막에는 돌아가야 할 근원의 자리로 등장한다.
「바다-5」에서 바다는 정화와 봉합의 존재로 나타난다.
검은 뻘은 수만 개의 입술이다
포화 속에서도 기어이 공기를 마중 나가는
어린 게들의 집요한 발짓
바다는 제 몸에 수조 개의 숨길을 내어
죽은 것들의 영혼을 정화한다
비릿함은,
부패가 아니라 치열한 세탁의 냄새
거대한 파도가 성벽을 쌓을 때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섞어 상처를 봉합한다.
- 「바다-5」 전문
이 시에서 갯벌은 죽음과 생명이 뒤섞이는 자리다. 검은 뻘은 수만 개의 입술이며, 어린 게들은 공기를 향해 집요하게 발짓을 한다. 바다는 죽은 것들의 영혼을 정화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섞어 상처를 봉합한다. 이 시에서 바다는 돌봄의 존재이다. 그 돌봄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섞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이런 바다의 이미지는 앞서 본 물의 낮은 자세와 이어진다. 바다는 낮은 곳에서 썩은 것, 죽은 것, 상처 난 것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바다는 이 시집에서 거대한 돌봄의 공간이 된다.
「바다-6」은 바다의 책임을 생각하게 한다. 바다는 하루에 두 번 "혓바닥을 끌끌 차는 표정"을 한다.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눌러 쓴 원망도, 싸운 연인들의 토라진 발자국도, 아침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답장을 꺼내 보여준다. "그 일도 / 바다가 맡고 있는 책임"이다. 이 구절에서 바다는 인간의 원망과 다툼과 흔적을 지우며 다시 시작하게 하는 존재다. 바다가 행하는 것은 지움과 망각이기보다는 회복과 치유이다. 밀물과 썰물은 상처의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모래의 여백을 마련한다. 돌봄 또한 때로는 누군가의 원망과 부끄러움과 흔적을 조용히 씻어내는 일이다.
다음 시 「바다로 돌아간 손」은 이 시집에서 바다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게 육화된 작품이다.
내 손을 바다를 낚는 미끼로 쓸까 한다. 수면에 닿자 손끝에서 너울이 춤을 춘다. 들물의 입맞춤처럼 파도가 가랑이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수심이 손목을 감싸면 낚아채려는 무게가 개흙처럼 쌓여간다.
내가 바다를 원했지만 바다가 나를 소유하려 한다. 마음의 틈새로 소금물이 고인다. 손끝의 압점이 물때를 문신한다. 젖은 살점이 바다의 날숨을 느끼자 물결은 손금을 지운다. 한 떼의 윤슬이 투명해진다.
낚시를 던지지 않는다. 입질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가장 비린 것을 원하는 물고기에게로 육취(肉臭)가 묻지 않은 손을 내주려 한다. 아직 쓰여 본 적 없는 생에서 건져 올린 깨끗한 손을 내밀고 싶어 한다.
- 「바다로 돌아간 손」 부분
시인은 "내 손을 바다를 낚는 미끼로 쓸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가 진행될수록 바다를 낚으려던 손은 오히려 바다에게 소유된다. 손끝에는 물때가 문신처럼 새겨지고, 물결은 손금을 지운다. 화자는 "가장 비린 것을 원하는 물고기에게로 육취가 묻지 않은 손"을 내주려 한다. 인용하지 않은 이 시의 뒷 부분에서 "물속에서 너무 오래 머문 손은 이제 육지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기꺼이 바다에 수장"된다고 말한다. 이 시의 바다는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욕망을 지워내는 힘이다. 손은 세계를 붙잡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손이 바다에 돌아가 손금을 잃는다. 이것은 소유의 능력이 말소되는 장면이다. 인간은 붙잡으려 하지만, 바다는 붙잡는 손 자체를 자신에게 돌려보낸다. 존재는 결국 자신이 붙잡으려던 근원에 붙잡혀 귀향한다.
「바다-7」에서 바다는 음악이 된다. "바다는 거대한 가야금"이고, 바람은 현을 퉁기며, 섬들은 낮은 저음으로 공명한다.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자들이 / 바다에 모여 합창하는 밤"이라는 구절은 이 시집의 바다 이미지를 종합해 보여준다. 바다는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합창 장소다. 요양원의 무언증, 반복되는 말, 신음, 가래 끓는 소리, 울음과 욕설은 모두 이 바다의 음악 안으로 들어간다. 바다는 침묵한 자들의 소리를 모아 가장 정직한 내면의 독백으로 돌려준다. 백종덕의 바다에는 그래서 돌봄의 청각이 깃들어 있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가나다로 오는 바다」는 바다의 상징적 핵심을 말해준다.
가, 나, 다
속으로 말하면
물도
가, 나, 다
발등을 읽고 지나간다
발목이 모래 속으로 묻힐수록
무게가 먼저
가, 나, 다로 떠나고
내가 빠져나간 자리 만큼
수평선이 가, 나, 다로
가까워져 왔다.
- 「가나다로 오는 바다」 전문
「가나다로 오는 바다」에서 바다는 가장 처음의 말과 함께 온다. "가, 나, 다"를 속으로 말하면 물도 "가, 나, 다"로 발등을 읽고 지나간다. 이때 발등은 바다가 읽는 몸의 문장이다. 사람은 바다 앞에서 무게를 내려놓는다. 그래서 "발목이 모래 속으로 묻힐수록 / 무게가 먼저 / 가, 나, 다로 떠나고"라는 구절이 중요해진다. 몸은 모래에 묻히지만 무게는 처음의 말 쪽으로 떠난다. 이것은 죽음의 이미지와도 연결되지만, 동시에 해방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삶의 무게가 가장 처음의 발음으로 풀리는 순간, 수평선은 가까워진다. 존재는 멀리 떠나 사라지는 것이라고 얘기되고는 하지만 사실은 처음의 자리로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백종덕의 귀향은 이렇게 역설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고 처음의 말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여기서 바다는 죽음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무게를 내려놓게 하는 곳이며, 사라짐과 귀환이 함께 일어나는 장소로 변화된다. 사람이 마지막에 돌아가는 곳이 결국 가장 처음 배운 말의 자리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바다는 존재의 귀향지다.
5. 고통을 견디는 유쾌한 언어
백종덕의 시를 읽다 보면 무거운 장면들 사이에서 뜻밖의 웃음이 자주 터져 나온다. 요양원, 노쇠, 기억의 상실, 죽음, 병원, 응급실, 그리움, 가족의 부재 같은 소재들은 쉽게 비장함으로 기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비장함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농담을 발견하고, 욕설의 생기를 받아 적고, 일상의 사소한 장면을 해학적으로 뒤집는다. 이 유쾌함은 고통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반대로 고통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생의 탄력에서 나온다. 웃음은 고통이 인간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지막 생활 감각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유쾌한 하루」는 그런 유쾌함의 출발점을 말해준다. 책상 위 서류들은 정거장의 승객 같고, 이면지 서랍에 몸을 숨긴 일들은 처리한 것인지 처리한 척 속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시인은 어르신들께 대접할 "달콤한 시 한 국자"를 아직 길어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배꼽시계의 울림을 듣는다. 그리고 4월 1일, 자신이 "이 집의 원장"이라는 사실도 "속이 다 훤히 보이는 짭짤한 /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시의 웃음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그러나 그 도망은 실제 도피라기보다 잠시 농담으로 숨을 고르는 일이다.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이런 거짓말을 꿈꿀 수 있다.
「인수인계」는 요양원의 일상 속에서 욕설과 웃음이 어떻게 생의 활력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의례적인 안부들이 공기 중에 부유하는 건조한 순간, 센터장의 유쾌한 난입이 시작된다. 노란 고무줄 한 가닥이 검버섯 핀 어르신의 손마디에 걸리고, "살짝 당기세요, 더, 조금만 더"라는 말이 이어진다. 긴장이 팽팽해지다가 누군가 줄을 놓치는 순간 "에이, 씨부럴"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 욕설에 분홍 앞치마는 "입 큰 웃음꽃"을 터뜨린다. 마지막의 "오늘 인수인계는 / 씨, 시원한 욕 한마디면 만족이다"라는 구절은 절묘하다. 여기서 욕설은 몸이 아직 반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생의 탄성이다. 이는 이 욕설이 상스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어르신의 욕 한마디는 돌봄의 공간을 살아 있는 공동체로 바꾼다. 걱정과 웃음이 함께 씰룩이는 안색들 속에서 인간은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
「피자 한 판의 정치」는 사소한 식사 장면을 정치적 언어로 전환하는 작품이다. 피자 두 조각이 남은 상황에서 "우리 사이좋게 나눠 먹자"는 말은 겉으로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빼앗긴 승기를 끝내 되찾겠다는 / 가장 정중한 정치"가 담겨 있다. 이 시의 재미는 피자 한 판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권력과 협상과 배려의 장면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정치성은 냉소로 흐르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미묘한 욕망을 웃으며 바라보는 태도가 있다. 백종덕의 해학은 사람의 약점을 폭로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작은 속셈을 알아보되, 그 속셈까지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여름 복숭아」도 가볍고 사랑스러운 농담의 시다. 복숭아는 하늘에서 잠깐 내려온 존재로 그려지고, 화자는 "입안의 낙원"을 맛본 뒤 "몇 상자 몰래 챙겨"가려 한다. 천국 문 앞 수문장이 물으면 "이건 그냥 여름날의 구름"이라고 슬쩍 웃으며 지나갈 작정이다. 이 시의 농담은 아름다움을 몰래 훔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다. 삶이 고단할수록 이런 향기로운 죄의 상상력은 중요하다. 백종덕의 시에서 웃음은 삶의 쾌락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봄의 이별」은 이별의 감정을 비장하게 처리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비튼다. "꽃비에 넘어질까 / 우산을" 쓰고, 손목시계는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낸다. "멈춘 건 내 심장인데 시간은 잘도 가네요"라는 괄호 속 발화는 슬픔과 농담이 동시에 작동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의 "혓바닥 끝에 남은 소금기를 쏙, 내밀며 / 한마디로 메롱메롱 한 이별"이라는 구절은 이별의 통속적 비극성을 유쾌하게 환기한다. 그러나 이 유쾌함은 슬픔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소금기는 남아있다. 다만 그 소금기를 혓바닥으로 내밀며 "메롱메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생을 견디게 한다.
「요, 녀석들」은 아주 짧지만 백종덕 시의 장난기가 빛나는 작품이다. 새벽녘 방 안까지 따라와 밤을 후벼대던 장닭의 나래짓 같은 소리는 문을 열고 보니 바람이었다. 마지막 "바람, 요, / 요 녀석들이었구나"라는 발화는 자연을 친근한 장난꾸러기로 부른다. 이때 세계는 무겁고 두려운 대상에서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로 바뀐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세계와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이처럼 백종덕의 유쾌한 언어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요양원의 일상에는 냄새와 신음과 쇠약이 있고, 응급실 복도에는 하얀 천과 멀어져 가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동시에 욕설, 농담, 피자, 복숭아, 고무줄, 장난스러운 바람도 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웃는다. 아니,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웃음은 더 절실하다. 백종덕의 시가 따뜻하게 읽히는 까닭은 그 웃음이 사람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고, 사람을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로 붙들기 때문이다.
6. 맺으며
『가나다로 오는 바다』는 가장 처음의 말로 돌아가는 시집이다. 그 처음의 말은 "가, 나, 다"이며, 이름이며, 얼굴이며, 마음이다. 시인은 노년의 삶과 돌봄의 현장에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다. 기억은 흐려지고, 몸은 굳어가고, 말은 샐러드처럼 뒤섞이고, 이름은 엉뚱한 자리로 옮겨 앉는다. 그러나 그 모든 쇠락 속에서도 인간에게는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은 마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한 그릇의 음식, 창밖의 나무와 나누는 대화, 자식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그리움 그리고 가장 처음 배운 말의 음성적 감각이다.
백종덕의 시는 이 남겨진 것들을 받아 적는다. 곁에서 받아 적는다는 것은 돌봄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렇듯 돌봄은 백종덕 시인에게는 시를 쓰는 이유이며 방식이 된다. 시인은 누군가의 곁에 서서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몸을 보고, 그의 농담을 받아 적고, 그의 울음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사라지는 것보다 남는 것에 더 오래 눈을 둔다. 이 시선이 그의 시를 따뜻한 배려의 언어로 만든다.
또한, 그의 시는 자연에서 낮은 자세를 배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연꽃잎은 지는 해의 붉음을 잠시 감당하며, 자작나무는 흰 살갗에 견딤의 문장을 새긴다. 이런 자연의 모습은 돌봄의 태도와 연결된다. 돌봄은 낮아지는 일이고, 기다리는 일이며, 침묵 속에서 자라는 것을 믿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이 모든 사유를 품는 가장 큰 이미지다. 바다는 발등을 읽고 지나가며, 상처를 봉합하고, 원망의 발자국을 지우고,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자들의 합창을 받아준다. 바다는 죽음과 귀향, 상실과 회복, 침묵과 음악이 함께 머무는 자리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바다는 종착점이 아닌 돌아감의 장소이며 시작의 장소이다. 존재는 바다를 향해 가며, 그 바다에서 다시 "가, 나, 다"라는 처음의 말로 돌아간다.
백종덕의 시가 특별한 힘을 갖는 것은 이러한 사유를 지나치게 엄숙한 언어로만 밀고 가지 않는 데 있다. 그의 시에는 욕설과 농담, 해학과 장난기가 살아 있다. 그 웃음은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고통이 인간의 전부가 되지 못하게 한다. 웃음은 돌봄의 공간에 남겨진 생의 탄력이며, 늙고 병든 몸에도 아직 반응하고 있는 마음의 신호다. "씨, 시원한 욕 한마디"가 인수인계의 만족이 되는 순간, 시는 삶의 비극을 생활의 활력으로 바꾸어 놓는다.
『가나다로 오는 바다』는 곁의 시학을 보여준다. 곁에 선다는 것은 누군가의 쇠락을 함께 보는 일이며, 그 쇠락 속에서도 아직 남겨진 빛을 알아보는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문고리를 잡고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죽겠다고 말하는 할매가 오늘은 죽지 않기로 하는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백종덕은 그 곁의 시간을 시로 받아 적는다. 그래서 이 시집은 느린 귀향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집을 읽으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곳이 멀고 낯선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곳은 처음 배운 말의 자리이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던 자리이며, 누군가의 곁에서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만지던 자리다. 그 자리에서 백종덕의 시는 바다의 물결처럼 조용히 말한다, 사라지는 것보다 끝내 남는 것이 더 많다고.
- 백종덕 시에서 읽는 돌봄의 언어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백종덕의 시집 『가나다로 오는 바다』를 읽으면 먼저 '돌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시인이 요양원을 운영하며 노년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말은 이 시집의 중요한 정조나 사유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그것은 '곁에 있음'의 경험에서 얻게 된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누군가의 쇠약해지는 몸, 자주 되풀이되는 말, 사라지는 기억, 견디기 힘든 그리움 같은 쉽게 말로 정리되지 않는 고통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끝 자리에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 생각을 통해 시인은 "가, 나, 다"라는 가장 처음의 말, "부르던 이름 하나, 붙잡고 싶은 얼굴 하나, 마지막까지 건네고 싶었던 마음 하나"로 돌아간다. 이 시집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그 처음의 말로 돌아가는 이 느린 귀향의 과정이다.
시인의 말에서 그는 "누군가는 이름을 잊어가고, 누군가는 같은 문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분은 창밖의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분은 다 식은 국물 한 숟갈에 평생의 그리움을 담아내기도" 한다고 쓴다. 여기서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상실의 현상 자체보다 그 상실 속에서도 버리지 못한 삶의 흔적이다. 이름을 잊는 사람에게도 이름을 향한 그리움은 남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에게도 반복을 통해 붙잡고 싶은 삶의 장면은 남는다. 백종덕의 시가 돌봄의 윤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돌봄은 결핍을 관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돌봄은 사라지는 것들의 표면 아래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돌봄의 가치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잊고, 더디게 말하고,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을 맞는다. 그러나 속도와 효율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느린 몸과 반복되는 말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생산성과 성과로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에서 노년의 몸은 쉽게 주변부로 밀려난다.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사람, 하루 대부분을 침상 위에서 보내는 사람은 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돌봐야 한다. 그래서 돌봄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윤리적 가치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돌봄은 인간을 기능으로 환산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느린 존재의 시간을 함께 견디겠다는 약속이다. 백종덕의 시는 바로 이 약속의 언어를 시로 옮긴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 돌봄은 연민만을 감상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돌봄은 구체적이고 생활 감각적이다. 고무줄을 당기며 웃고, 배식차가 지나가고, 기저귀를 갈고, 섹션기 속으로 가래 끓는 소리가 빨려 들어가고, 어르신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그리움을 담은 식은 국물 한 숟갈을 본다. 이 시집의 언어가 생생한 까닭은 이렇듯 돌봄의 현장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냄새와 소리와 욕설과 농담과 신음이 그대로 들어온다. 이 구체성이 시를 살아 있게 한다. 돌봄은 막연한 선의에서 확인되는 것이기보다 한 사람의 몸 곁에 머무는 시간이며, 그 몸이 내는 소리를 끝까지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2. 곁의 마음과 돌봄의 실천
『가나다로 오는 바다』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은 '곁'이다. 곁은 단순한 위치를 뜻하지 않는다. 곁은 마음의 방향이며, 이는 타인의 시간 안으로 잠시 들어가는 사랑의 실천이다. 백종덕의 시에서 곁은 타인을 구경하고 관찰하는 자리가 아닌 함께 견디는 위치를 말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누군가의 몸이 무너지는 동안 그 무너짐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장소이며, 누군가의 말이 흩어지는 동안 그 말의 남은 음절을 받아 적는 자리이다.
「마음이라는 꽃」은 이 곁의 의미를 가장 단순하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옆을 바라본다는 건
경계의 마음
뒤를 바라본다는 건
의심의 마음
위를 바라본다는 건
겸손의 마음
너를 바라본다는 건
사랑의 마음
하늘을 바라본다는 건
기도의 마음
곁을 바라본다는 건
배려의 마음
마음이란
내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내 시선이 닿는 곳에 피는 꽃이었다.
- 「마음이라는 꽃」 전문
이 시의 핵심은 마음을 내면의 고정된 실체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음은 시선이 닿는 곳에서 피어난다. 백종덕의 돌봄 시학은 이 발견에서 출발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베푸는 행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선을 옮겨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내 중심에서 타인의 곁으로, 나의 편의에서 타인의 불편으로, 나의 속도에서 타인의 더딘 시간으로 시선을 옮기는 일이다. "곁을 바라본다는 건 / 배려의 마음"이라는 구절이 이 모든 것을 다 함축해 보여준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돌봄의 시작이 시선의 전환에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가능할 때 나의 마음은 꽃이 되어 누군가를 기쁘게 하거나 위로할 수 있다. 배려와 돌봄은 이렇게 시선에서 나온다.
「문고리」 역시 곁의 사유를 사물의 이미지로 구체화한다. 문고리는 안과 밖을 잇는 장치다. 그것은 닫힘과 열림 사이에 놓여 있다. 시인은 "손이 닿으면 안과 밖이 잠깐 흔들린다"고 말한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다는 것은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잠시 흔드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곁으로 가는 일의 출발이기도 하다. 시의 마지막에서 "나는 잠깐 나를 밖에 두고 너의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진술은 돌봄의 가장 중요한 태도를 담고 있다. 돌봄은 나를 앞세우는 일이기보다는 잠시 나를 밖에 두고 누군가의 곁으로 가 그 사람의 마음 안으로 가는 일이다. 내 판단, 내 속도, 내 편리함을 잠시 내려놓고 타인의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는 말이다.
「연꽃잎의 자세」는 곁에 있음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준다. 저녁은 "빛도 기운도 빠진 채 /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그때 연꽃잎 하나가 "하늘을 향해" 서 있다. 그것은 "두껍지도 / 단단하지도 않은" 잎이지만 "지는 해를 붙잡고서 / 잠시라도 / 붉음을 감당"한다고 시인은 묘사한다. 이 시에서 연꽃잎은 무너짐을 막아낼 만큼 단단하지 않지만, 잠시라도 아름다운 시간을 지키는 일을 감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돌봄의 본질 역시 여기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돌봄은 죽음과 쇠락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무너짐 곁에서 잠시라도 그 시간을 함께 감당할 수는 있다.
이런 돌봄의 마음은 「할매는 살겠다고 하신다」에서 더욱 구체적인 장면으로 나타난다.
구순의 할매는
죽겠다 죽겠다 말하며
젖은 하루를 말린다
- 「할매는 살겠다고 하신다」 부분
죽겠다는 말은 이 구절에서 삶의 포기 선언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하루를 견디며 내뱉는 몸이 살기 위해 하는 말이다. 할매는 증손주의 발 냄새를 맡고, "가을 콩대가 터지듯 / 콩알 하나"를 튀어나오게 한다. 더듬거리는 무릎은 어린 무릎에게 닿는다. 그 모습을 보고 시인은 말한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그저 만지는 일
그래서 더 낮게 엎드려
콩알을 찾듯
바닥을 더듬거리는 일
- 위 시 부분
이 구절은 백종덕의 돌봄 시학을 압축해 말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만지는 일, 그것이 돌봄이다. 여기에는 과도한 수사도, 거창한 구원의 서사도 없다. 죽겠다면서도 오늘은 죽지 않기로 하는 삶의 작은 방향 전환이 있을 뿐이다. 그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증손주의 체온과 냄새, 어린 무릎의 감촉이다. 생명은 생명을 만질 때 다시 살아야겠다는 쪽으로 기운다. 백종덕의 시에서 돌봄은 이 접촉의 감각과 함께 한다.
이 시집의 3부에 실린 「낱말 샐러드」, 「우리 딸 이름과 똑같네」, 「엄마의 최선」은 돌봄의 현장에서 언어가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낱말 샐러드」에서 얘기되는 말들은 문법적으로 온전하지 않다. 이런 잘못된 말들이 "무언증의 흰 복도"를 지나고, "입술 밑에 고인 비(非)단어"가 되고 그리하여 "명사와 동사가 접시 위에서 낱말 샐러드"가 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 흐트러진 언어를 무의미한 소음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체위 변경을 하는 언어의 육체"라는 표현은 언어를 몸과 연결한다. 돌봄의 현장에서 말은 단순한 의사전달 수단이라기보다는 삼키지 못하는 목, 마비된 혀, 누워 있는 몸,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생활과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섹션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래 끓는 소리"까지도 "오늘의 가장 정직한 운율"이 된다. 이 시가 강한 울림을 주는 까닭은 언어의 붕괴 속에서도 시가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표준어 표기법에 어긋나는 "--해쓰"라는 표현이 몸으로 말해지는 이 정직한 표현을 대변한다. 틀린 말과 바르지 못한 표현이 삶의 가장 절실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 말들은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말들이 시가 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종덕의 시에서 곁은 가장 적극적으로 돌봄의 윤리를 실천하는 자리이다. 곁에 있는 사람은 보고, 듣고, 기다리고, 이름을 다시 불러주고, 몸의 신호를 읽고, 농담을 받아주고, 울음을 들어준다. 시인은 그 곁에서 받아 적는다. 시가 돌봄이 되는 까닭은 받아 적는 행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들을 붙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말이 무너지는 곳에서 다시 말을 만들고, 이름이 흐려지는 곳에서 다시 이름을 부르며, 생이 약해지는 곳에서 생의 마지막 불씨를 지킨다.
3. 자연에서 배우는 낮은 자세
백종덕의 시에서 자연은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배워야 할 자세를 가르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특히 물, 산, 꽃, 나무, 돌, 햇빛은 모두 낮아지는 법과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자연은 시인에게 교사다. 그런데 자연이 가르쳐주는 것이 돌봄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돌봄 역시 낮은 자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돌보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버려야 한다. 상대의 눈높이, 상대의 몸의 속도, 상대의 어눌한 언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백종덕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는 몸 낮춤의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음 시 「팔당에서 물을 보았다」가 대표적이다.
팔당댐에서 물을 만났다
물의 신체를 깊게 만난다
검룡소에서 시작해
두물에서 몸을 섞은 물
달과 별과 매미와 잠자리를
한꺼번에 피워 올렸다
본다는 일이 깨달음이 되는 순간이 있다
물은 가장 본질에서 태어나
마침내 거슬러 올라 보려고도 하지만
자신보다 낮은 곳으로 임한다
사람이 물을 본다는 일은
한 가계의 역사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섞이고 만나고 고이고 다시 흘러가는
계절을 지나가는 마음과 같았다.
- 「팔당에서 물을 보았다」 전문
시인은 물의 신체를 만난다. 물은 검룡소에서 시작해 두물에서 몸을 섞고, 달과 별과 매미와 잠자리를 한꺼번에 피워 올린다. 시인은 "본다는 일이 깨달음이 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 깨달음의 핵심은 물이 "자신보다 낮은 곳으로 임한다"는 데 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런데 이 낮은 자세가 많은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섞이게 하고, 변화와 발전을 이루고 결국은 역사를 구성한다. 한 사람의 성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낮은 자세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돌봄의 자세로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타인의 몸 가까이 가게 되고 그와 섞이고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낮은 물의 자세는 돌봄의 자세와 닮았다. 돌봄은 자신을 낮추어 타인의 몸 가까이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절의 속셈」에서도 자연은 사람에게 배움을 준다. 봄은 큰 성공을 바라지 않고, 여름의 푸름은 낙엽을 좋아하지 않으며, 가을은 낮은 곳을 알려준다. "가을 스승은 / 당신에게 낮은 곳을 가르쳐 줍니다 /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구절은 이 시집의 자연관을 잘 말해준다. 계절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지 않는다. 계절은 지나감과 기다림과 낮아짐을 가르친다. 특히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내려놓음의 계절이다. 낙엽이 지고, 열매가 익으며, 생은 자신의 무게를 땅 쪽으로 돌려놓는다. 백종덕의 시가 자연에서 배우는 낮은 자세는 바로 이 내려놓음의 지혜가 아닐까 한다.
자연의 일부인 나무 역시 중요한 스승이다. 「오늘도 나무를 본다」에서 시의 화자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노년의 마음을 나무를 바라보는 행위로 옮겨 적는다. "네가 보고 싶을 때 / 나는 가만히 나무를 본다 / 그리고 나지막이 이야기를 건넨다 / 바람 타는 나무가 / 네 목소리로 대답할 때까지"라는 대목에서처럼 나무는 그리움의 대리자가 된다. 직접 닿을 수 없는 자식의 목소리는 바람 타는 나무를 통해 돌아온다. 이렇듯 자연은 부재를 견디게 하고 위로하는 매개가 된다. 돌봄의 현장에서도 이런 매개는 중요하다.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없다. 그러나 나무, 바람, 햇빛, 별은 사람의 부재를 대신해 외로운 노년의 삶을 응대해 준다. 시인은 그 응대의 말을 듣고 전해주는 사람이다.
다음 시 「자작나무를 읽었다」는 시인이 나무를 보며 얻게 된 깨달음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타작(打作)이다
부러지고 꺽이면서도
매서운 추위를 견뎌온 몸짓
살기 위해
바닥을 치던
고단한 타점(打點)들
자작의 날들
누군가에게
그것은 자장(滋養)이었다
끝내 온기를 잃지 않으려 했던 활엽의 그리움으로
서서 떠는 법을 익혔던
그것은 간단한 나무의 날들이 아니었다
한 생애가
제 시간을
어떤 걸음으로 건너왔는지
흰 살갗 위에
새겨놓은
눈부신 대답을 해독해 보았다.
- 「자작나무를 읽었다」 전문
이 시에서 자작나무는 나무의 이름이기를 넘어 한 생애의 문서다. "부러지고 꺾이면서도 / 매서운 추위를 견뎌온 몸짓"이 있고, "살기 위해 / 바닥을 치던 / 고단한 타점들"이 있다. 시인은 자작나무의 흰 살갗 위에 새겨진 이 고난의 시간을 "해독"한다. 이렇듯 백종덕의 시에서 자연을 본다는 것은 표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몸에 새겨진 견딤의 흔적을 읽는 일이다. 이런 읽기의 방식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늙은 몸의 주름, 굽은 무릎, 반복되는 말, 흔들리는 손은 모두 한 생애가 자신의 시간을 건너온 흔적이다. 시인은 그것을 해독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나무로부터 깨달은 삶의 자세이고 자신의 시의 존재 이유이다.
시인에게 깨달음을 준 자연은 이제 시인에게 따뜻한 인격적 존재로 다가온다. 「이름」은 단 네 줄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시인과 자연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작품이다.
이쁜아 -
큰 소리로 한번 외쳐 보았더니
초록 목도리를 한
산이 돌아보았다
눈화장을 금방 끝낸
별이 내려다 보았다.
- 「이름」 전문
이 시에서 "이쁜아"는 자연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 호명은 산과 별을 돌아보게 한다. 세계는 이름을 통해 응답한다. 시인이 자연을 부르는 이 호명의 방식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것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너를 알아본다는 뜻이며, 너와 나 사이에 응답의 통로를 연다는 뜻이다. 나아가 돌봄의 현장에서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불러오는 가장 짧은 문장이다. 이름을 잃어가는 사람에게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행위는 그 사람을 세계 속에 다시 세우는 일이다.
「정기정꽃」은 이 이름 부르기의 의미가 가장 극적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노래가 자꾸 발을 헛디딘다
누군가 박자를 놓쳐도 아무도 고치지 않은, 오후
의자 위로 나란히 얹힌 무릎들
서로 다른 계절이 정물처럼 내려앉아 있다
"꽃 이름을 하나씩 말씀해 보실까요"
개나리
동백 꽃
아까시아 꽃
백일홍 --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든다
기척 없던 공기를 가르고
가장 투명한 눈동자가 정면의 허공을 꿰뚫는다
"정기정꽃이요"
순간, 방 안의 흐름이 멈춘다
하얗게 표백된 풍경 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명한 줄기 하나가
바닥을 뚫고 솟구쳐 오른다
...(중략)...
정기정꽃 -
우주를 다 덮고도 남을
엄청난 꽃잎 한 송이의 꽃이다.
- 「정기정꽃」 부분
꽃 이름을 말해보라는 질문에 한 사람이 자기 이름에 꽃을 붙여 "정기정꽃이요"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방 안의 흐름은 멈추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명한 줄기 하나"가 솟구친다. 시인은 "이름은 이미 만개한 소묘가 되어 있었다"고 쓴다. 그리고 "정기정꽃"은 "우주를 다 덮고도 남을 / 엄청난 꽃잎 한 송이의 꽃"이 된다. 이 시의 감동은 이름을 잘못 말한 장면을 한갓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는 데서 나온다. 시인은 그 대답 속에서 한 생애가 제 이름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장면을 본다. 단순한 호칭인 이름은 여기서 존재가 마지막까지 붙잡는 자기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정기정꽃"은 질문의 의도를 벗어난 틀린 답이긴 하지만, 한 인간이 자기 이름으로 피워낸 마지막 개화이다. 이렇게 한 존재는 자연을 배우면서 자연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4. 바다 이미지와 존재의 귀향
이 시집의 중심 이미지는 단연 바다다. 바다는 표제시 「가나다로 오는 바다」에서부터 여러 편의 「바다」 연작과 「바다로 돌아간 손」, 「고흐의 노을」, 「눈 오는 밤」, 「어떤 귀향」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백종덕의 바다는 풍경으로 존재하거나 여행의 장소로 등장하기보다는 한 존재가 무게를 내려놓는 자리, 상처를 씻는 자리, 마지막에는 돌아가야 할 근원의 자리로 등장한다.
「바다-5」에서 바다는 정화와 봉합의 존재로 나타난다.
검은 뻘은 수만 개의 입술이다
포화 속에서도 기어이 공기를 마중 나가는
어린 게들의 집요한 발짓
바다는 제 몸에 수조 개의 숨길을 내어
죽은 것들의 영혼을 정화한다
비릿함은,
부패가 아니라 치열한 세탁의 냄새
거대한 파도가 성벽을 쌓을 때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섞어 상처를 봉합한다.
- 「바다-5」 전문
이 시에서 갯벌은 죽음과 생명이 뒤섞이는 자리다. 검은 뻘은 수만 개의 입술이며, 어린 게들은 공기를 향해 집요하게 발짓을 한다. 바다는 죽은 것들의 영혼을 정화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섞어 상처를 봉합한다. 이 시에서 바다는 돌봄의 존재이다. 그 돌봄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섞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이런 바다의 이미지는 앞서 본 물의 낮은 자세와 이어진다. 바다는 낮은 곳에서 썩은 것, 죽은 것, 상처 난 것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바다는 이 시집에서 거대한 돌봄의 공간이 된다.
「바다-6」은 바다의 책임을 생각하게 한다. 바다는 하루에 두 번 "혓바닥을 끌끌 차는 표정"을 한다.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눌러 쓴 원망도, 싸운 연인들의 토라진 발자국도, 아침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답장을 꺼내 보여준다. "그 일도 / 바다가 맡고 있는 책임"이다. 이 구절에서 바다는 인간의 원망과 다툼과 흔적을 지우며 다시 시작하게 하는 존재다. 바다가 행하는 것은 지움과 망각이기보다는 회복과 치유이다. 밀물과 썰물은 상처의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모래의 여백을 마련한다. 돌봄 또한 때로는 누군가의 원망과 부끄러움과 흔적을 조용히 씻어내는 일이다.
다음 시 「바다로 돌아간 손」은 이 시집에서 바다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게 육화된 작품이다.
내 손을 바다를 낚는 미끼로 쓸까 한다. 수면에 닿자 손끝에서 너울이 춤을 춘다. 들물의 입맞춤처럼 파도가 가랑이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수심이 손목을 감싸면 낚아채려는 무게가 개흙처럼 쌓여간다.
내가 바다를 원했지만 바다가 나를 소유하려 한다. 마음의 틈새로 소금물이 고인다. 손끝의 압점이 물때를 문신한다. 젖은 살점이 바다의 날숨을 느끼자 물결은 손금을 지운다. 한 떼의 윤슬이 투명해진다.
낚시를 던지지 않는다. 입질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가장 비린 것을 원하는 물고기에게로 육취(肉臭)가 묻지 않은 손을 내주려 한다. 아직 쓰여 본 적 없는 생에서 건져 올린 깨끗한 손을 내밀고 싶어 한다.
- 「바다로 돌아간 손」 부분
시인은 "내 손을 바다를 낚는 미끼로 쓸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가 진행될수록 바다를 낚으려던 손은 오히려 바다에게 소유된다. 손끝에는 물때가 문신처럼 새겨지고, 물결은 손금을 지운다. 화자는 "가장 비린 것을 원하는 물고기에게로 육취가 묻지 않은 손"을 내주려 한다. 인용하지 않은 이 시의 뒷 부분에서 "물속에서 너무 오래 머문 손은 이제 육지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기꺼이 바다에 수장"된다고 말한다. 이 시의 바다는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욕망을 지워내는 힘이다. 손은 세계를 붙잡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손이 바다에 돌아가 손금을 잃는다. 이것은 소유의 능력이 말소되는 장면이다. 인간은 붙잡으려 하지만, 바다는 붙잡는 손 자체를 자신에게 돌려보낸다. 존재는 결국 자신이 붙잡으려던 근원에 붙잡혀 귀향한다.
「바다-7」에서 바다는 음악이 된다. "바다는 거대한 가야금"이고, 바람은 현을 퉁기며, 섬들은 낮은 저음으로 공명한다.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자들이 / 바다에 모여 합창하는 밤"이라는 구절은 이 시집의 바다 이미지를 종합해 보여준다. 바다는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합창 장소다. 요양원의 무언증, 반복되는 말, 신음, 가래 끓는 소리, 울음과 욕설은 모두 이 바다의 음악 안으로 들어간다. 바다는 침묵한 자들의 소리를 모아 가장 정직한 내면의 독백으로 돌려준다. 백종덕의 바다에는 그래서 돌봄의 청각이 깃들어 있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가나다로 오는 바다」는 바다의 상징적 핵심을 말해준다.
가, 나, 다
속으로 말하면
물도
가, 나, 다
발등을 읽고 지나간다
발목이 모래 속으로 묻힐수록
무게가 먼저
가, 나, 다로 떠나고
내가 빠져나간 자리 만큼
수평선이 가, 나, 다로
가까워져 왔다.
- 「가나다로 오는 바다」 전문
「가나다로 오는 바다」에서 바다는 가장 처음의 말과 함께 온다. "가, 나, 다"를 속으로 말하면 물도 "가, 나, 다"로 발등을 읽고 지나간다. 이때 발등은 바다가 읽는 몸의 문장이다. 사람은 바다 앞에서 무게를 내려놓는다. 그래서 "발목이 모래 속으로 묻힐수록 / 무게가 먼저 / 가, 나, 다로 떠나고"라는 구절이 중요해진다. 몸은 모래에 묻히지만 무게는 처음의 말 쪽으로 떠난다. 이것은 죽음의 이미지와도 연결되지만, 동시에 해방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삶의 무게가 가장 처음의 발음으로 풀리는 순간, 수평선은 가까워진다. 존재는 멀리 떠나 사라지는 것이라고 얘기되고는 하지만 사실은 처음의 자리로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백종덕의 귀향은 이렇게 역설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고 처음의 말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여기서 바다는 죽음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무게를 내려놓게 하는 곳이며, 사라짐과 귀환이 함께 일어나는 장소로 변화된다. 사람이 마지막에 돌아가는 곳이 결국 가장 처음 배운 말의 자리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바다는 존재의 귀향지다.
5. 고통을 견디는 유쾌한 언어
백종덕의 시를 읽다 보면 무거운 장면들 사이에서 뜻밖의 웃음이 자주 터져 나온다. 요양원, 노쇠, 기억의 상실, 죽음, 병원, 응급실, 그리움, 가족의 부재 같은 소재들은 쉽게 비장함으로 기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은 비장함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농담을 발견하고, 욕설의 생기를 받아 적고, 일상의 사소한 장면을 해학적으로 뒤집는다. 이 유쾌함은 고통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반대로 고통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생의 탄력에서 나온다. 웃음은 고통이 인간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지막 생활 감각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유쾌한 하루」는 그런 유쾌함의 출발점을 말해준다. 책상 위 서류들은 정거장의 승객 같고, 이면지 서랍에 몸을 숨긴 일들은 처리한 것인지 처리한 척 속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시인은 어르신들께 대접할 "달콤한 시 한 국자"를 아직 길어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배꼽시계의 울림을 듣는다. 그리고 4월 1일, 자신이 "이 집의 원장"이라는 사실도 "속이 다 훤히 보이는 짭짤한 /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시의 웃음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그러나 그 도망은 실제 도피라기보다 잠시 농담으로 숨을 고르는 일이다.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이런 거짓말을 꿈꿀 수 있다.
「인수인계」는 요양원의 일상 속에서 욕설과 웃음이 어떻게 생의 활력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의례적인 안부들이 공기 중에 부유하는 건조한 순간, 센터장의 유쾌한 난입이 시작된다. 노란 고무줄 한 가닥이 검버섯 핀 어르신의 손마디에 걸리고, "살짝 당기세요, 더, 조금만 더"라는 말이 이어진다. 긴장이 팽팽해지다가 누군가 줄을 놓치는 순간 "에이, 씨부럴"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 욕설에 분홍 앞치마는 "입 큰 웃음꽃"을 터뜨린다. 마지막의 "오늘 인수인계는 / 씨, 시원한 욕 한마디면 만족이다"라는 구절은 절묘하다. 여기서 욕설은 몸이 아직 반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생의 탄성이다. 이는 이 욕설이 상스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어르신의 욕 한마디는 돌봄의 공간을 살아 있는 공동체로 바꾼다. 걱정과 웃음이 함께 씰룩이는 안색들 속에서 인간은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
「피자 한 판의 정치」는 사소한 식사 장면을 정치적 언어로 전환하는 작품이다. 피자 두 조각이 남은 상황에서 "우리 사이좋게 나눠 먹자"는 말은 겉으로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빼앗긴 승기를 끝내 되찾겠다는 / 가장 정중한 정치"가 담겨 있다. 이 시의 재미는 피자 한 판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권력과 협상과 배려의 장면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정치성은 냉소로 흐르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미묘한 욕망을 웃으며 바라보는 태도가 있다. 백종덕의 해학은 사람의 약점을 폭로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작은 속셈을 알아보되, 그 속셈까지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여름 복숭아」도 가볍고 사랑스러운 농담의 시다. 복숭아는 하늘에서 잠깐 내려온 존재로 그려지고, 화자는 "입안의 낙원"을 맛본 뒤 "몇 상자 몰래 챙겨"가려 한다. 천국 문 앞 수문장이 물으면 "이건 그냥 여름날의 구름"이라고 슬쩍 웃으며 지나갈 작정이다. 이 시의 농담은 아름다움을 몰래 훔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다. 삶이 고단할수록 이런 향기로운 죄의 상상력은 중요하다. 백종덕의 시에서 웃음은 삶의 쾌락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봄의 이별」은 이별의 감정을 비장하게 처리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비튼다. "꽃비에 넘어질까 / 우산을" 쓰고, 손목시계는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낸다. "멈춘 건 내 심장인데 시간은 잘도 가네요"라는 괄호 속 발화는 슬픔과 농담이 동시에 작동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의 "혓바닥 끝에 남은 소금기를 쏙, 내밀며 / 한마디로 메롱메롱 한 이별"이라는 구절은 이별의 통속적 비극성을 유쾌하게 환기한다. 그러나 이 유쾌함은 슬픔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소금기는 남아있다. 다만 그 소금기를 혓바닥으로 내밀며 "메롱메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생을 견디게 한다.
「요, 녀석들」은 아주 짧지만 백종덕 시의 장난기가 빛나는 작품이다. 새벽녘 방 안까지 따라와 밤을 후벼대던 장닭의 나래짓 같은 소리는 문을 열고 보니 바람이었다. 마지막 "바람, 요, / 요 녀석들이었구나"라는 발화는 자연을 친근한 장난꾸러기로 부른다. 이때 세계는 무겁고 두려운 대상에서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로 바뀐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세계와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이처럼 백종덕의 유쾌한 언어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요양원의 일상에는 냄새와 신음과 쇠약이 있고, 응급실 복도에는 하얀 천과 멀어져 가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동시에 욕설, 농담, 피자, 복숭아, 고무줄, 장난스러운 바람도 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웃는다. 아니,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웃음은 더 절실하다. 백종덕의 시가 따뜻하게 읽히는 까닭은 그 웃음이 사람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고, 사람을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로 붙들기 때문이다.
6. 맺으며
『가나다로 오는 바다』는 가장 처음의 말로 돌아가는 시집이다. 그 처음의 말은 "가, 나, 다"이며, 이름이며, 얼굴이며, 마음이다. 시인은 노년의 삶과 돌봄의 현장에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다. 기억은 흐려지고, 몸은 굳어가고, 말은 샐러드처럼 뒤섞이고, 이름은 엉뚱한 자리로 옮겨 앉는다. 그러나 그 모든 쇠락 속에서도 인간에게는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은 마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한 그릇의 음식, 창밖의 나무와 나누는 대화, 자식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그리움 그리고 가장 처음 배운 말의 음성적 감각이다.
백종덕의 시는 이 남겨진 것들을 받아 적는다. 곁에서 받아 적는다는 것은 돌봄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렇듯 돌봄은 백종덕 시인에게는 시를 쓰는 이유이며 방식이 된다. 시인은 누군가의 곁에 서서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몸을 보고, 그의 농담을 받아 적고, 그의 울음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사라지는 것보다 남는 것에 더 오래 눈을 둔다. 이 시선이 그의 시를 따뜻한 배려의 언어로 만든다.
또한, 그의 시는 자연에서 낮은 자세를 배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연꽃잎은 지는 해의 붉음을 잠시 감당하며, 자작나무는 흰 살갗에 견딤의 문장을 새긴다. 이런 자연의 모습은 돌봄의 태도와 연결된다. 돌봄은 낮아지는 일이고, 기다리는 일이며, 침묵 속에서 자라는 것을 믿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이 모든 사유를 품는 가장 큰 이미지다. 바다는 발등을 읽고 지나가며, 상처를 봉합하고, 원망의 발자국을 지우고,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자들의 합창을 받아준다. 바다는 죽음과 귀향, 상실과 회복, 침묵과 음악이 함께 머무는 자리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바다는 종착점이 아닌 돌아감의 장소이며 시작의 장소이다. 존재는 바다를 향해 가며, 그 바다에서 다시 "가, 나, 다"라는 처음의 말로 돌아간다.
백종덕의 시가 특별한 힘을 갖는 것은 이러한 사유를 지나치게 엄숙한 언어로만 밀고 가지 않는 데 있다. 그의 시에는 욕설과 농담, 해학과 장난기가 살아 있다. 그 웃음은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고통이 인간의 전부가 되지 못하게 한다. 웃음은 돌봄의 공간에 남겨진 생의 탄력이며, 늙고 병든 몸에도 아직 반응하고 있는 마음의 신호다. "씨, 시원한 욕 한마디"가 인수인계의 만족이 되는 순간, 시는 삶의 비극을 생활의 활력으로 바꾸어 놓는다.
『가나다로 오는 바다』는 곁의 시학을 보여준다. 곁에 선다는 것은 누군가의 쇠락을 함께 보는 일이며, 그 쇠락 속에서도 아직 남겨진 빛을 알아보는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문고리를 잡고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죽겠다고 말하는 할매가 오늘은 죽지 않기로 하는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백종덕은 그 곁의 시간을 시로 받아 적는다. 그래서 이 시집은 느린 귀향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집을 읽으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곳이 멀고 낯선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곳은 처음 배운 말의 자리이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던 자리이며, 누군가의 곁에서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만지던 자리다. 그 자리에서 백종덕의 시는 바다의 물결처럼 조용히 말한다, 사라지는 것보다 끝내 남는 것이 더 많다고.
목차
목차
저자
저자
백종덕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시의 시간들』 시인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노년기 식문화를 다루는 월간지 『존엄한 식사』를 발행하고 있다. 남양주시인협회 회원이며, 덕소에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다. 복봉투 후원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하며 돌봄과 관계의 언어를 기록해 왔다. 돌봄의 공간이 세대와 지역사회를 잇는 삶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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