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영혼의 숲 시선)
강태호 시집
강태호 시집 [봄바람].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온 저자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삶 속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이 시어로 함축되면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시들의 면면에는 저자 개인의 삶뿐 아니라 우리를 이루고 있는 사회와 자연과 관계들이 어우러져 시적 감수성을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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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강 미경(시인 및 문학평론가)
강태호 시인은 68세에 시단(詩壇)에 오른 늦깎기 시인이다. 법학과 행정학을 전공하고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행정학박사학위까지 소지하여 국내 여러 대학에서 다년간 외래교수의 경력도 있는 학자이자 이 시대의 문사(文士)이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시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인생의 과업-정년퇴직, 자녀 출가 등의 숙제를 마치고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 문학의 높은 문지방을 넘어 시인이 되었다. 문학을 전공한 이들도 모든 장르 중에 시가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이미지의 형상화, 관념의 사물화, 아이러니(irony)와 역설(paradox), 은유(metaphor) 낯설게 하기, 사유의 깊이, 철학성, 운율과 리듬 등...... 시가 갖춰야 할 여러 요소들을 체득하고 시인의 반열에 오르기란 녹록치 않은 일이다.
만일, 젊은 시절부터 시집을 냈더라면 벌써 10권 이상의 시집을 묶어 성취해냈을 분이다.
강 시인의 시 104편을 여러 번 통독하면서 그의 시에서는 서양 철학(샤르트르나 뢰비스트로스 등)이나 정신분석(칼융, 프로이드 등)의 이론으로 시를 분석하지 않기로 했다. 시 쓰기는 그에게 '시에로의 행복한 여행, 행복의 부자'가 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얻고 있는 그의 시에 서양의 문학 이론이나 어떤 잣대로 저울질한다는 것은 우매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 시인들은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자연현상에도 예민한 감수성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은유(metaphor), 직유, 반어, 역설, 병치, 도치, 환유 등의 화려한 시적 장치와 기교를 부리기도 한다. 시를 쓴 본인 외에는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는 말장난 같은 난해시를 써내는 게 요즘 시단의 풍토다. 그러나 강 태호 시인은 이런 것들을 거부한다. 거침없이 사회 현실과 정치에 대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용기다. 현실과 사회 문제 등에 대해 예리한 비판과 통쾌한 풍자를 보인 시들도 수십 편이다.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지적한 대로 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대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일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서정을 뛰어 넘어 사회에 눈을 돌려야하는 게 시인의 옳은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시들은 비유와 이미지의 형상화로 그려내기 보다는 한자어와 관념어를 나열하여 직설적으로 교훈적인 시 쓰기에 치우치기가 쉽다.
이 글에서는 현실 참여적인 시들은 논외로 하기로 한다. 강 태호 시인의 시집 『봄바람』중에 수록된 104편 중에서 예리한 서정, 이미지의 형상화가 뛰어난 시들, 그리움의 미학, 삶에 대한 사유와 관조가 두드러진 시들을 묶어서 그의 시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예리한 서정
고대에서는 서사시나 극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현대시에 오면서 포우, 보들레르, 말라르메, 발레리 등에 의해서 서정시가 하나의 장르로 형성되었다. 서정시의 원조는 일찍이 그리스 시대의 여류시인이었던 사포(Sappho)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강 태호 시인의 시집 『봄바람』에서도 몇 십 편의 우수한 서정의 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 워즈워드는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 발생적 표현이다."라고 했다. 강 시인의 서정시를 읽으면서 예민하고 예리한 감수성으로 빚어낸 시편들을 통해 시를 읽는 기쁨과 감동을 얻을 수 있었다.
뻐꾹! 뻐꾹! 뻐꾹새야
너는 어찌하여
그리도 구슬프게 울어대나
무슨 사연 무슨 미련 무슨 한이 맺혀서
무슨 사랑 못 잊어 그 무엇을 찾아
이산 저산 해매이며 그리도 슬피 우나
- 중략 -
다른 새도 슬퍼한다
산천초목 슬퍼진다
흘러가는 구름도 걸음 멈춘다
걸음 멈춘 구름도 눈물 흘린다
내 마음도 슬퍼져 목이 메인다 -28. 「뻐꾸기」-
위 시에서 시인은 뻐꾸기가 우는 것을 '슬프다'는 정서로 표현한다. 뻐꾸기가 우는 이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듯이 뻐꾸기가 우는 의도는 뻐꾸기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뻐꾸기라는 객체(object)의 행동을 시인은 "내 마음도 슬퍼져 목이 메인다"(6연)고 했다. 객관적상관물(objective correlaive)을 통한 시인의 감정이입이다. 5연에서는 다른 새들, 산천초목도 슬퍼한다고 했다. 흘러가는 구름도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대기 중에 대류권에 수증기가 뭉쳐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 구름이다. 수증기에겐 감정이 없다. 그런데 시인은 구름도, 산도, 하천도, 풀도, 나무도 모두 슬퍼진다고 했다. 뻐꾸기의 울음을 자연으로, 자연에서 시인에게로까지 감정을 이입하여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어트는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이라고 했다. 엘리어트는 독자/관객이 느끼는 일상적 감정과 예술적 감정은 다르므로 예술가는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객관적 상관물을 설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T. S. 엘리어트가 주장한 객관적 상관물인 '뻐꾸기 울음'에 강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슬픈'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객관적 상관물은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화시키는 사물, 상황, 사건을 말하며 이미지와 상징 등으로 표현된다는 New Creaticism과 형식주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강 시인은 자신의 슬픈 감정을 '뻐꾸기'라는 청각적 이미지와 '산천초목', '구름'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연결하고 있다.
W.H.오든은 "시는 애련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A.E.하우스만은 "시의 기능은 세계의 슬픔과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슬픈 정서-서정을 극대화한 위의 시에서 서정시의 묘미를 볼 수 있다. 다음 시에서도 애련(哀憐)의 정서를 살펴보자.
마냥 포근했던
너의 검은빛 눈망울은
사랑의 여명(黎明)을 노래하는
새벽닭의 발돋움 이었다
향기로웠던 우리의 이야기는
차가운 가을바람이 실어가고
메아리 없는 절규의 숨결은
정숙한 기도로 가다듬는다
네 슬픔이 강물이 되어
내 가슴으로 파도쳐 밀려오면
나는 파란돛배를 마련하련다
이젠 닮아야지
세상을 거꾸로도 보는
박쥐의 눈을
네가 눈물의 미소로
돌아서는 바람결에
나는 나의 머리를
곱게 곱게 빗어야 했다.
-「미련」 全文-"너의 검은빛 눈망울/ 사랑의 여명을 노래하는/ 새벽닭의 발돋움이었다"는 표현을 보자. '검은빛 눈망울'이라는 시각적 이미지가 '여명을 노래하는' '새벽닭'의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새벽닭의 청각적 이미지가 발돋움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융합하여 공감각적 심상을 이룬다. 정서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너의 검은빛 눈망울"을 "새벽닭의 발돋움"이라고 은유(metaphor)로 연결한 이유가 무엇일까? '눈망울'을 '발돋움'이라고 했다. 마지막 연에서 "네가 눈물의 미소로/ 돌아서는 바람결에/ 나는 나의 머리를/ 곱게 곱게 빗어야 했다"라고 했다. 너는 돌아서서 떠나고, 떠난 너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이별의 단절(3연)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머리를 곱게 곱게 빗어" 머리를 정리하고 마음에 질서를 찾는 것을 볼 수 있다. "향기로웠던 우리 이야기"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며 "정숙한 기도로 가다듬는다"고 했다. 이별의 슬픔(애련)을 머리를 빗고 정숙한 기도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화자의 결 고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화자는 "네 슬픔이 강물이 되어/ 내 가슴으로 파도쳐 밀려오면/ 파란 돛배를 마련하련다"고 했다. '향기로웠던 우리 이야기'의 후각적 심상이 '차가운 가을 바람'의 촉각적 심상을 넘어 '파란 돛배'의 시각적 심상으로 이어진다. 이미지의 천국이다. 이미지의 형상화뿐 아니라, 파란 돛배를 마련하여 '슬픈 너'에게로 노 저어 가고자 하는 화자의 아름다운 마음이 엿보인다. 너를 위한 정숙한 기도를 올리는 승화된 이별의 성숙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별의 시는 「간이역에서?에서 "불이와는 달리 언제나 철로는 두 평행선을 그어 보내고 맞는 별리가 된다"고 했다. "떠나보내고 맞이한다"는 역설(paradox)이다. 떠나보내는 것은 이별이다. 그런데 시인은 "맞이한다"로 반어적(反語的)으로 표현했다. 김 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처럼 강 시인도 역시 "보내고 맞는" 역설을 통해 님을 보냈지만 이별은 이별이 아닌 재회를 열망하는 paradox로 연결하고 있다.
가 닿을 곳이 어디쯤일까
가 닿으면
또 다른 출발역이 되어 줄까
간이역마다 찍고 가는
의문부는
어쩌면 편려便旅의 발자국이 아닐까
하나일 수 없는
영원히 평행선을 긋고 있는
철로
떠나면서 이별이 되고
이별이면서 떠남이 되는
어느 간이역에서의 불이不二
불이不二와는 달리
언제나 철로는 두 평행선을 그어
보내고 맞는 별리가 된다 -「간이역에서」 全文-
2. 그리움의 미학
위에서 '애련'의 정서가 짙은 시들을 몇 편 살펴보았다. '애련'은 곧 이별로 인한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이별은 곧 '그리움'이 된다. 강 태호 시인의 그리움은 사랑하는 님에 대한 그리움, 군시절에 대한 추억,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눌 수 있다. 라캉은 "욕망은 결핍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단절은 곧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강 시인의 ?철로길 소녀?시를 감상해 보자. 중3때 철로길에서 마주치곤 하던 중2 소녀는 지금 시인의 곁에 없나 보다. 결핍이다. 소녀의 부재. 몇 십 년 전 철로 길과 함께 강 시인의 추억 속에서 그리움으로 피어 있다.
진달래 꽃 피어나던 사월의 철로길
하교길에 마주치던 중3소년과 중2소녀
마주칠 때마다 미소의 꽃 피었네
끝내는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하고
바라만보며 지나쳤던 수줍은 듯 해 맑은 그 소녀
고향집 모란꽃 같은 그 소녀
지나간 아쉬움에 뒤돌아보면
그녀도 돌아보고 서있던 그 소녀
용기 없어 가지 못한 나를 원망했네
흰 눈 내리는 날 한밤 불을 끄고
칠흑漆黑같이 어두운 이불속에
눈을 감고 얼굴을 파묻으면 잊혀 질까
진달래꽃 모란꽃 들국화 지고
내 마음의 고향앞산 만년설에
무지개 떠오르며
고향 앞 들녘에
아네모네(Anemone) 피어나는 먼 훗날
그 날이면 잊혀 질까
서산위의 붉은 석양은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머리위의 하늘에는 검은 어둠이 펼쳐지는데
총총히 반짝이는 별들 속에서
미소의 얼굴 내미는 그 소녀 -「철로길 소녀」全文-
진달래 피던 4월의 철로 길은 한 폭의 그림 같다. 토마스 머코올리는 "시가(詩歌)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써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산출하는 예술"이라고 했다. "상상력은 자신의 기억의 작용이며 우리들의 상상력이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아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다"라고 스펜서는 피력했다. 화가가 색채로 그림을 그리듯, 강 시인은 중3시절에 철로 길에서 중2 소녀를 마주치곤 했던 경험의 기억을 언어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진달래꽃(시각적 심상)/ 철로길(시각적 심상)/ 미소의 꽃(시각적 심상)/ 모란꽃 같은(시각적 심상)/ 흰 눈 내리는 날(시각적 심상)/ 칠흙같이(시각적 심상)/ 만년설(시각적 심상)/ 무지개(시각적 심상)/ 고향 앞 들녘(시각적 심상)/ 아네모네(시각적 심상)/ 서산의 붉은 석양(시각적 심상)/ 검은 어둠(시각적 심상)/ 총총히 반짝이는 별들(시각적 심상)/ 미소의 얼굴(시각적 심상) 등의 시어가 모두 회화적 이미지 투성이다. 이 시는 한 폭의 수채화다.
"진달래꽃 모란꽃 들국화 지고/ 만년설"에 봄(진달래)이 지나고, 초여름(모란)이 지나고, 가을(들국화) 지나고, 겨울(만년설)이 지나 계절이 바뀌어도 아네모네 피어나는 먼 훗날 그 날도 잊혀지지 않을 철로길 소녀다. "총총히 반짝이는 별들 속에서 미소의 얼굴 내미는 그 소녀"다. 이 시는 시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그림이다. 유년 시절 철로 길에서 마주치곤 하던 소녀에 대한 맑은 그리움, 이미지와 서정의 정수(精髓)다.
그리움의 서정은 ?코스모스? 시에서도 역력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파아란 하늘(시각적 심상)/ 코스모스(시각적 심상)/ 다홍빛 속삭임(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심상)/ 하늘(시각적 심상)/ 별(시각적 심상)/ 노란 숲(시각적 심상)/ 향기로운 치마(후각과 시각의 공감각적 심상)/ 분홍빛 꿈(시각적 심상)/ 붉은 향기(시각과 후각의 공감각적 심상)/ 뭉게 구름(시각적 심상)을 보인다. 이 시도 수채화다. 끝행에서 화자는 "이 사연 이 바램 너에게 가련다"고 했다. "사랑하기에 그리운 이에게 가고 싶"은 화자의 심정이 언어의 그림으로 그려졌다.
다음의 시 ?노을 녘?도 이미지의 형상화가 뛰어나서 시 읽는 즐거움을 준다.
백주로 도배된
하얀 벽들이
장미문양으로 일어선다
되풀이되는
영원과 유한의 순례로
해는 떴다 지고
말갈기를 세운 세월이
바람을 데 불고 넘어가는 능선엔
갈대 사슴의 울음으로 운다
갈 길 바쁜 철새 한 마리
황금노을에 빗 선을 긋고 가고
10월의 햇살로 영근
한 알의 사과가
가지사이에 매달려 있다 「노을 녘」全文 갈대 사슴(시각적 심상)/ 울음(청각적 심상)/ 황금 노을(시각적 심상)/ 한 알의 사과(시각적 심상)을 보인다. 특히 5연에서 "10월의 햇살로 영근/ 한 알의 사과가/ 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다"는 표현을 보자. 이 표현은 영근 사과 열매 한 알이 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는 심상을 연상하게 해주는 한 폭의 그림이다. 햇살에 익혀낸 붉은 열매(사과)는 성취의 결실을 사유하게 한다고 하겠다.
3. 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은유(metaphor)
"시를 구성하는 2개의 중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라고 웰렉과 워렌은 지적했다. 격조는 율격 즉 리듬과 운율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시의 음악성이라고 하는 기초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 표현법 중에서 은유야말로 고도의 비유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연결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 시인의 ?제대복?이라는 시에서는 '제대복'이라는 원관념을 6개의 보조관념으로 연결하여 은유하고 있다.
멀지 않는 옛날 옛적
군령軍嶺의 오솔길에서
소나기 뒤의 무지개처럼 그리어지던 너
너의 얼룩무늬는
그렇게도 무겁디 무거운
세월의 발자국인가
소스라쳐지는
옛 이야기처럼
검디검은 세월의 그림자인가
서럽게 황홀한 그리움 속에
못다 준 사랑의 눈물자국인가
야릇한 회의懷疑와 푸념들을
하지 못할 실토의 먹물 자국인가
전설처럼 들려오던
우리의 숙원을 이루지 못한
한恨의 묵화墨畵인가
머 언 훗날 까지
내 인생 끝날 까지
거울과 재기再起의
깃발이란 이름이어라 「제대복」全文
제대복의 얼룩무늬는 ① 세월의 발자국(2연), ② 세월의 그림자(3연), ③ 사랑의 눈물자국(4연), ④ 하지 못할 실토의 먹물 자국(5연), ⑤ 한의 묵화(6연), ⑥ 거울과 재기의 깃발(7연)로 은유하고 있다. 제대복을 6개의 보조관념으로 연결할 정도로 군 시절에 대한 강한 향수와 추억을 갖고 있다고 보인다. 군 시절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군복무 기간이 21개월로 단축되었지만, 강 태호 시인이 군복무를 하던 때는 만 36개월 동안 복무했을 것이다. 고된 훈련과 갇힌 군대 생활은 자유도 즐거움도 없는 고단한 의무만 반복되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지난 시절은 모두 그리운 추억의 시간이 되는 모양이다. 또한 강 시인은 군 시절을 "서럽게 황홀한 그리움"(4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럽다'는 정서와 '황홀한' 정서는 정반대의 극한 정서이다. 역설(paradox)이다. '서러운' 감정이 극에 달하여 그 감정을 반대로 표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대증?이라는 시에서도 '제대증'을 '한 포기의 제대花를 피웠'다고 은유로 연결하는 표현력과 무겁고 고달픈 인내의 시간을 '꽃'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해내는 긍정의 힘은 독자의 공감대를 확장시킨다.
「전선의 외로운 병사?라는 시에서도 "철모/ 연푸른 통일의 새싹/ 녹 슬은 탄통/ 낙엽/ 파란 하늘/ 사슴의 미소/ 연분홍 노스텔지어/ 푸르디 푸른 여로"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내고 있다. "클로버 향기"에서는 시각의 후각화를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군 생활의 고통을 이미지로 형상화해내면서 군시절을 추억해내는 것도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능력일 것이다.
「고향집 검은 대 烏竹」, 「나 어릴적 고향 마을」, 「내 고향집은 꽃나무 부자집? 등의 시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다루고 있다. 일일이 다루지 않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시에서처럼 그리움의 서정과 이미지의 형상화를 살려내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4. 사유와 관조
앞에서 강 시인의 시에 나타난 정서와 이미지의 탁월함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지향하는 사유와 철학성의 깊이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중생은 저마다 우주의 고유명사
산업화 도시화로 개인 칸막이의 중생들
고도孤島에 고립된 고독한 현대인
너만의 고도에는 애완동물과 골방만 있다
인문학人文學도 있을까
구름꽃雲花 없는 태양太陽도
별무리星群이 없는 달月도,
그들은 외롭지 않다
장미꽃 향기에도 해당화 순정에도
애련愛戀에 물들지 않는 섬島안의 돌부처.
머~언~ 신기루속의
피안彼岸의 뒤안길
언젠가는 너의 환상幻想이런가
설렘으로 조이던 어린 가슴으로
창공을 향해 외쳐도
그것은 메아리 없는 함성
이젠 조용히 숨결을 가다듬자
이젠 차분히 나만의 거울을 다시보자
그러나 거울마저 잃어버리면
저만의 섬에 있는 소라껍질 속에서
저만의 공간에서 도취하는 현대인
저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은 고독의 자유 -「현대인의 고독」全文-
"물질문명은 토끼 걸음, 정신 문명은 거북이 걸음"이라고 지적했던 O. 슈펭글러를 비롯하여, 아놀드토인비, 갈브레이드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물질문명에 지나치게 편중된 부정된 요소에 대해 우려한 바 있다. 위의 시 2연 "산업화 도시화로 개인 칸막이의 중생들/ 고도(孤島)에 고립된 고독한 현대인/ 너만의 고도에는 애완동물과 골방만 있다"고 했다. 산업이 발달되고 도시화되고 물질문명이 발전하여 인간 중생(衆生)들의 생활이 고도로 편리해졌지만 인간은 점점 고독해진다. 이웃이나 친척간의 교류보다는 취미와 동호인들 간의 관계가 더 끈끈하다. 전철을 타면 매번 똑같은 광경을 목격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손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은 단절이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앞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고 사는 실정이다. 앞집과의 물리적인 거리는 1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몇 백 km 떨어져있는 부산의 친구 집과의 거리 보다 멀다. 두꺼운 벽과 소라껍질(8연)은 더욱 단단해 진다. 대문을 잠그지 않고 살던 옛날과는 시대가 변했다. 인간은 점점 고독해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엔 불신의 두터운 벽이 쌓이고, 배신하는 친구보다는 애완동물에게 정붙이며 사는 게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존재의 고독이다. 3연 "구름꽃 없는 태양도/ 별무리 없는 달도/ 그들은 외롭지 않다" 4연 "장미꽃 향기에도 해당화 순정에도/ 애련에 물들지 않는 섬 안의 돌부처/ 머~언 신기루 속의/ 피안의 뒤안길/ 언젠가는 너의 환상이런가"라는 표현도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25세에 미망인이 된 어떤 여류 작가도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연애와 재혼을 포기한 채, 평생 고양이만 쓰다듬다가 76세에 고독사(孤獨死)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장미꽃 향기와 해당화 순정도 외면한 채 섬 안에 돌부처로 살다간 여류 작가를 생각나게 하는 시다. 그녀의 작품이 유명해져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모았고, 차 한 잔으로 노크했지만 그녀는 사람들을 거절한 채 소라껍질(8연의 골방) 속에서 외롭게 "섬 안의 돌부처"(4연)로 자신을 가두고 살다가 영면한다. "너만의 고도에는 애완동물과 골방만 있다"는 현실 인식에 독자들의 공감이 모아질 것이다.
강시인의 현대 사회에 대한 인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 문제 등에 예리한 비판과 통쾌한 풍자를 보인 시가 수 십 편이다. 그 시들에서 강 시인이 일관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사유와 철학은 평등과 화합이다.「 세탁소? 시와 「대중목욕탕?시에 나타난 사유성을 살펴보고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전략-
세탁된 의류들이 가득 걸려있다
형형색색의 옷들은 천차만별이고
옷 주인의 신분도 천차만별이다
인간의 외적미를 위해 만들어진 의상
밀착되고 정돈되어 걸려있다
평등한 높이에 나란히 걸려있다
- 중략-
세탁물들은 서로 오염의 원인은 모른다
세탁조 드럼통에 들어오면 같은 세제 속에서
세탁물들은 평등관계로 뒤엉켜 회전하면서
상호 조화롭게 화합하며
세탁의 시너지효과발생
-중략 -
세탁소의 세계는
사회적 편견에서 해방되고
갑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호 화합과 조화의 세계
평등의 세계이다 -「세탁소」-
위 시는 발상이 기발하다. 세탁소의 비닐 커버 속에 걸린 세탁물들을 보고 시상을 얻어 사유와 관조로 통섭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물에 감동하여 문학 창작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自然之道)"라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유협(劉?)은 강조했다. 유협이 지적한 것처럼 세탁소에 걸린 세탁물이라는 대상(object)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화합하고 상호 조합하길 기원하는 작품이다. 비닐커버 속에 옷은 평등하게 세탁소 옷걸이에 걸려있다. 옷 주인의 신분, 학벌, 빈부의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평등이다. 이런 평등을 갈망하는 시는 「대중목욕탕?에서도 드러난다.
대중목욕탕은 에덴의 동산
모두가 발가벗은 에덴의 동산
모두가 평등한 에덴의 동산
-후략- -「대중목욕탕」-
에덴동산을 사회적인 여러 등급의 옷을 발가벗은 평등한 동산으로 보고 있다. 대중목욕탕은 몸에 묻은 먼지를 벗기고자 찾아가는 곳이다. 자신의 알몸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서슴없이 드러내고 민몸이 된다.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은 알몸이야말로 노자(老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가식도 체면도 벗어던진 상태를 곧 '에덴동산'이라는 은유로 이끌어내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모든 것에 앞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사람에게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이라고 했다. 강 태호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태초-인위와 가식이 없는 평등한 세계 즉 사회적인 옷을 벗어버린 꾸밈없는 무위자연으로의 갈구, 등급 없는 본연의 모습을 희구하고 있다고 보인다. 강 태호 시인의 시인의식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유협(劉?)은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낙엽 하나도 마음속에 생각을 일으키며, 풀벌레 소리만으로도 마음을 끌기에 족하다"고 했다. 다음 시 「봄바람」을 감상해 보자.
봄바람은
늘 오기만 한다
설렘으로 오기만 한다
재 너머 만년설산 바라보는 나의 볼에
향기롭고 감미로운 스킨십(skinship)으로 찾아온다
획일의 흰 눈 쏟아 내리던 검은 구름 걷어내고
형형색색 피어나는 꽃구름 몰고 온다
춤추며 속삭이듯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앞세워
동백꽃머리에 새 풀 옷 의상을 한
이슬 머금은 봄 처녀 꽃구름에 태워 함께 온다
나에게 온다
만면춘색의 동백꽃 미소와
새들의 합창으로 찾아오는 봄바람
나를 푸른 잎과 빨간 꽃으로 장식해 준다
나는 새 풀 옷 빨간 꽃 얼굴 신랑이 된다
봄바람은
늘 오기만 한다
잠들지 못하는 꿈의 불꽃 타오르게 하면서
아직 오지 않는 미래도 가지고 올 것이다 「봄바람」全文
우리 생활에서 바람은 늘 불어온다. 사시사철 언제나 부는 게 바람이다. 공기 순환의 일종이라고 하겠다. 봄에 부는 바람은 살을 에는 듯한 북풍한설에 비해서 따뜻하고 온화하다. 포근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봄바람도 꽃샘추위라 할 만큼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강 태호 시인은 '봄'이라는 낱말 자체에서 희망과 설레임과 감미로운 스킨십(skinship), 형형색색 꽃구름 몰고 오는 꽃바람으로 인식한다. 봄처녀, 만면춘색의 동백꽃 미소, 새들의 합창으로 찾아오는 봄바람이다. 푸른 잎과 빨간 꽃으로 장식해 준다. 해서 화자는 새 풀, 빨간 꽃 얼굴 신랑이 된다(4연). 꿈의 불꽃 타오르면서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여기에 이 시의 사유와 철학이 숨어 있다. 새신랑과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해서「봄날의 꿈?이라는 시에서도 "산 넘고 바다 건너/ 황조 되어 날아가는/ 봄날의 꿈"으로 시인의 상상은 비상(飛上)한다. 현실을 초월하여 날아오르고 싶은 초월의 무의식이 황조가 되어 날아오르는 것이다. 하얀 새도 아니고, 파랑새도 아니고, 초록이나 빨간 새도 아니고 황조(黃鳥)가 되어 날아오르고 싶은 화자의 마음의 열망은 무엇일까? 노란색은 '희망과 꿈, vission, 새로운 시작'이라는 색채 이미지를 갖고 있다.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고 싶은 시인의 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한다. 유협(劉?)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의 내용을 한 번 더 인용해 보면, "명성과 업적을 남기는 것은 창작뿐"이라고 했다. "삶의 의의와 가치는 저작을 통해 긍정되고 개인의 정신 생명은 이로써 불후를 얻게 된다"고 했다. 아마도 강 시인은 「봄바람?이라는 첫 시집을 상재하면서, 시집을 묶는 일이 새신랑이 되는 일이며 꿈의 불꽃으로 타오르면서 황조가 되어 날아가는 봄날의 꿈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 쓰는 즐거움과 행복, 황조가 되어 비상하길 기원하면서 글을 맺는다.
● 평설자 강 미경 약력
●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 시문학 등단* 현대시인협회 작품상 수상(제10회)
* 시민이 드리는 호국특별상 수상
목차
목차
제2부 고향의 추억
제3부 산하山河 유정有情
제4부 사색思索의 정원
제5부 美學의 詩
■ 평론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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