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동사의 목적어로 놓고
윤태란 수필집
갯벌에 깊은 골이 생기듯이 얼굴에 주름살이 있으면 어떠리. 건강하면 내 생의 봄날이니라. 세월이 가면 누가 내게 계급을 달아주겠는가. 잘 살아왔다고, 또 앞으로 잘 살아갈 거라고 주는 훈장이라 생각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웃자. 공으로 가는 기쁨의 절반은 기다림 속에 깃들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인생의 10%는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고, 90%는 내가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홀츠의 말을 기억하리라. 내 마음의 나비 섬을 그려본다. 나누고 비우고 섬기며 살아갈 때, 내 마음에도 빙하가 멈추고 잔잔한 기쁨이 일렁거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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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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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가 내릴 듯 흐렸다. 예전 같으면 산책길에 우산부터 챙겼을 텐데, 그냥 나섰다. 비를 맞으면 좀 어떠리. 제천 길 물가에는 오리 서너 마리가 물 미끄럼을 타며 잠수를 하고, 길고양이들 보란 듯이 목청껏 꽥꽥거린다. 어떤 날은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며 노려보고, 오늘은 오리가 판친다. 한판 뒤집기를 한 것 같다.
비가 내린다. 평소 같으면 비를 피하려고 달렸지만 요즘은 온전히 젖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습관의 본질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였던가. 마음 한 번 바꿨을 뿐인데 봄비가 된 기분이 든다. 산책길에 비를 맞은 고개 숙인 꽃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그 꽃을 나는 겸손의 꽃이라 불러주었다. 꽃을 바라보며 사람도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저런 상념들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목소리의 울림통만 커지는 것 같고, 어디 목소리뿐이랴. 너그러웠던 마음도 와이셔츠 단추 구멍만큼 작아진다. 내가 그렇다. 모든 이들이 같은 마음이란 걸, 버려야 내가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던 날, 틀에서 벗어나 변해야 산다는 것을 진작 왜 몰랐을까. 초고속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보면 피하려고만 했다. 그들을 통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가는 것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함께 달리면 부딪치고 보이지 않는 마음마저 다치기 때문이랄까. 코끝을 찡하게 하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며칠 전이었다. 동대문 역사문화운동장 환승역에서 계단을 오르려다가 몸을 부딪치는 일이 있었다. 내 탓도 아니요, 상대방의 탓도 아닌 인파에 떠밀려 스쳤을 뿐이다. 남학생은 나를 향해 폭언으로 무섭게 내 귀를 때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 학생한테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충동적인 분노가 습관적으로 폭발할 때는 무조건 피해야만 된다는 인지시스템이 바로 전두엽을 자극했다.
그러나 내 몸은 원목처럼 서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을 뿐, 발바닥이 땅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외모는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생겼다. 이럴 때 넋 놓는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 걸까. 아무튼, 깜깜했다. 내 짐작으로 볼 때, 나이는 청춘의 봄이라고나 할까.
여름을 맞을 준비가 힘에 부쳐서 분노를 토해냈을까. 막연하게 본인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었다. 지나친 과보호가 문제였을까. 무관심일까. 바람처럼 스쳤는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에 온몸을 움츠리기만 했던 나 자신한테 화가 났다. 폭언을 듣고도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만 했던 어른답지 못한 행동에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날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묻지 마 폭행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무관심은 외로운 섬 같다. 그러나 주위를 관심 있게 살피며 위험에 처했을 때, 용기 있게 나서는 살신성인도 있지 않은가. 그 자세가 정말 존경스럽다. 인간 냄새가 나지 않는 매정한 사람들을 볼 때, 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는 사람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화의 불씨는 마른 덤불을 순간의 잿더미로 삼켜버린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숯덩이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원망의 불씨도 크게 만들지 말라고 하는가보다.
우리는 가끔 행복했던 시간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습관이 행복이라는 말을 품고 다니면 좋겠다.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내 마음만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았을까 곱씹어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다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할까. 세상살이가 내 마음대로 된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도리를 지키고 산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라캉은 우리더러 욕망의 주체가 되라고 한 건 아닐까. 어느 날, 집에서 가까운 문화원에 들렀는데, 시니어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내 나이와 비슷해 보인다며 나를 반겼다. 보는 눈이 다르지만 그 분은 나보다 십 년은 더 위로 보였다.
이미 내 마음은 우산을 접은 듯이 구겨졌고, 또래로 보인다는데 어찌하랴. 속상한 마음을 털지 못하는 속 좁은 여자가 나였음을 인정하리라. 잊어버리자. 그리고는 메모지에 숫자 2를 쓰고 해를 그렸다. '이해'를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어느새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입을 벌린 석류 알처럼 내가 웃고 있는 게 아닌가. 해결점도 찾았다. 앞으로 내 나이를 물으면 태양처럼 뜨는 해라고 말하련다. 요즘 곳곳에 혁신 바람이 분다. 노력 여하에 따라 몰라보게 변하는 게 마음이라고 했던가. 봄바람처럼 마음이 가볍다.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성숙시킨 지혜의 힘은 이제 나의 스승이고, 나의 도반이 되었다. 그 남자의 폭언도 일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련다.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은 편견이고, 열려 있는 사람은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리라.
갯벌에 깊은 골이 생기듯이 얼굴에 주름살이 있으면 어떠리. 건강하면 내 생의 봄날이니라. 세월이 가면 누가 내게 계급을 달아주겠는가. 잘 살아왔다고, 또 앞으로 잘 살아갈 거라고 주는 훈장이라 생각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웃자. 공으로 가는 기쁨의 절반은 기다림 속에 깃들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인생의 10%는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고, 90%는 내가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홀츠의 말을 기억하리라. 내 마음의 나비 섬을 그려본다. 나누고 비우고 섬기며 살아갈 때, 내 마음에도 빙하가 멈추고 잔잔한 기쁨이 일렁거리지 않을까.
목차
목차
작품평|올곧은 인성, 진실의 곳간 / 권대근(문학평론가)·179
1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화·13
잃어버린 웃음·18
고개 들기·22
고정관념·26 공·30
꿈·35
내 남자·39
내숭 떠는 여자·43
노란 들통·47
2부 우리 것에 대한 그리움
놋그릇·55
대가리·59
호박·63
쓸개·66
틈·71
아파요, 괜찮아요?·76
오월 단상·81
감투 모자·87
3부 살아가는 슬기와 멋
소리·95
아버지의 틀니·100
아버지가 사는 법·105
개뿔·109
짐·114
가족사랑·119
오빠와 지게·123
제발·127
오징어족·133
4부 더 넓은 세상에로의 산책
뒷모습·141
지하철·145
잠자는 가방·149
전봇대·154
홀로서기·158
목의·163
주문·166
초대·170
살다보면·175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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