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밑에 박힌 김일성 총탄(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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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노래〉를 기억하시는가?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떨던 그날을
그날! 1950년 6월 25일.
75년 전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되었던 6·25전쟁의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노병의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주인공은 류재식 예비역 육군대령이다.
파죽지세로 삼팔선을 넘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공세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이 반전되어 국군이 북진하게 된다. 필자는 6·25전쟁 당시 18세의 춘천고 학생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류재식 학도병은 6사단에 편입되어 평북 묘향산까지 북진하였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면서 겪은 전쟁터의 참담한 현장과 반격작전의 치열한 공방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백미는 휴전 직전 철원 금성지구의 406고지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중공군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류재식 소대장의 무용담이 영화 장면처럼 재현되어 있다. 전쟁터에서 소대장은 소모품 소위라고 불렸다. 피아간에 육탄전을 벌이는 진지 쟁탈 전투에서 자욱한 포연의 화약 냄새, 격전에 절은 땀 냄새, 몸싸움 혈전에서 튀는 피 냄새가 범벅이 되고, 폭탄 터지는 파열음에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가운데 생사를 넘나드는 맹활약을 한다.
류재식 소대장은 총격전 중에 중상을 입고 마산 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심장 밑에 박힌 총탄 제거수술이 불가능하여 그대로 몸에 박힌 채 기적같은 회복을 하고 현역에 복귀하여 군 생활을 이어간다.
백병전 영웅 류재식은 학도병으로 출발하여 DMZ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주월사령부 십자성부대 지원대대장을 역임하고 전역하였다. 한동안 올림픽 등 국가 행사의 사회봉사 활동에 전념하다가, 현재는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으로 참전용사의 복지 향상에 헌신하고 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떨던 그날을
그날! 1950년 6월 25일.
75년 전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되었던 6·25전쟁의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노병의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주인공은 류재식 예비역 육군대령이다.
파죽지세로 삼팔선을 넘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공세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이 반전되어 국군이 북진하게 된다. 필자는 6·25전쟁 당시 18세의 춘천고 학생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류재식 학도병은 6사단에 편입되어 평북 묘향산까지 북진하였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면서 겪은 전쟁터의 참담한 현장과 반격작전의 치열한 공방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백미는 휴전 직전 철원 금성지구의 406고지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중공군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류재식 소대장의 무용담이 영화 장면처럼 재현되어 있다. 전쟁터에서 소대장은 소모품 소위라고 불렸다. 피아간에 육탄전을 벌이는 진지 쟁탈 전투에서 자욱한 포연의 화약 냄새, 격전에 절은 땀 냄새, 몸싸움 혈전에서 튀는 피 냄새가 범벅이 되고, 폭탄 터지는 파열음에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가운데 생사를 넘나드는 맹활약을 한다.
류재식 소대장은 총격전 중에 중상을 입고 마산 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심장 밑에 박힌 총탄 제거수술이 불가능하여 그대로 몸에 박힌 채 기적같은 회복을 하고 현역에 복귀하여 군 생활을 이어간다.
백병전 영웅 류재식은 학도병으로 출발하여 DMZ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주월사령부 십자성부대 지원대대장을 역임하고 전역하였다. 한동안 올림픽 등 국가 행사의 사회봉사 활동에 전념하다가, 현재는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으로 참전용사의 복지 향상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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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머리말
나는 우리나라 나이로 아흔넷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94년이면 꽤 오래 산 셈이다. 아득한 세월 같으나 지금 나의 소회는 한순간의 찰나를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옛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아마도 이승을 떠나기 전에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제 치하 1932년 4월 5일에 태어나 8·15해방이 되면서 소년기를 지나 6·25전쟁이 터지자 곧장 청년 시절로 넘어갔고, 전쟁의 참담한 시련 속에서 나의 인생 행로는 군인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춘천은 나의 고향이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은 삼팔선 아래의 춘천을 삽시간에 난리통으로 몰아넣었고, 열여덟 살 어린 학생에게 전쟁은 놀라운 현장을 보여 주었다. 인민재판 등으로 평온한 일상생활이 파괴되고 겪어보지 못한 고통의 연속으로 세상은 혼란의 범벅이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우리 젊은이들은 모두 피하고 숨었다,
파상공세로 남진을 계속하던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패퇴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반전되어 서울과 춘천도 다시 수복되었고 전쟁의 판세는 국군의 북진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때 나는 곧바로 학도의용군에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군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학도병으로 시작하여 이등병·상등병을 거쳐 소위로 임관되고 소대장·중대장으로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휴전 이후 육군본부 회계감사단의 행정실장을 역임한 다음 대대장·연대장 등 야전 지휘관으로 봉직하고 예편하였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전쟁 이야기를 지금 살려내어 6·25전쟁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 나라 지킴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실상을 알려주고자 함에 있다. 내가 전쟁에서 겪은 체험은 내 개인의 몫이기도 하면서 6·25를 겪은 동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고통과 연민이 함께 엮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하자 곧장 나는 6사단 전방 수색대에 배속되어 화천수력발전소를 탈환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38도 이북 지역의 철원·원산·양덕·개천·희천에 이르기까지 계속 북진하는 국군의 대열에서 활동하였다. 선발대가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하여 한만 국경에 다달았을 때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다는 감격에 한때 들뜬 심정이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급변하는 바람에 다시 통한의 후퇴를 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부대원이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모르는 채 저마다 살길을 찾아 헤매면서 패잔병이 되어 후퇴의 고행을 치렀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혈로를 뚫고 요행히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매일이다시피 했다. 산속에서 외로움과 공포로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이건영 대위님과 극적으로 조우하여 의형제를 맺고 서로 의지하며 천신만고 끝에 6사단에 귀환한 이야기는 필설로 다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훗날, 당시의 긴박하고 처절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을 고비고비마다 넘겼던 상황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긴장을 풀기 위해 땡전 한 잎 들이지 않고 북한 여행을 했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그야말로 전쟁에 참전하였기에 있을 수 있는 북한 답사 여행인 셈이다. 남한 출신의 18세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투에 몸을 던져 가는 곳마다 승리하면서 두려움조차 없었다.
전쟁통에도 사랑은 싹이 트더라. 무섭고도 지루한 환경에서 소년의 풋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외로움을 견뎌내는 버팀목이었고, 그래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6·25 남침이 시작될 때만 해도 국군의 전력이 총체적으로 열세라 일방적으로 몰리면서 병력의 손실이 막심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곳곳에서 남학생들이 학도의용군으로 전장에 투입되었고, 국난에 남녀를 가릴 수 없다 하여 여학생들도 나라를 위해 지원 입대하게 되었다.
내가 6사단 사령부 본부중대에 있을 때 여학생 학도병 9명이 배속되었다. 그중 군계일학처럼 단아하고 청초한 천사가 새파란 숫총각의 눈에 꽂혔다. 무미건조한 남자 병사들의 내무반이 환해지고 활력이 도는 가운데 사춘기 18세 소년은 그녀를 가슴에 간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장교가 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로 떠났다. 첫 이별이었다.
금성지구 406고지 쟁탈 전투에서 나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다. 대대 구호소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춘천의 야전이동외과로 옮겼으나 워낙 중상이라 마산 수도육군병원으로 또 이송되었다.
수술과 치료가 어려운 상태여서 절박한 심정으로 비탄에 빠졌던 내게 다시 천사가 나타났다. 6사단에서 헤어졌던 그녀가 간호장교가 되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첫사랑과의 기적적 해후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녀의 정성 어린 간호로 나의 깊은 상처는 아물고, 다시 땅을 밟고 일어서면서 군 생활의 재복무를 신청하여 적격 판정을 받았다.
나는 불사조인가?
전투 현장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길 수 있었음은 오직 어머님의 기도와 하늘이 도운 덕택일 뿐이다. 백병전에서 총상을 맞고 후송되었을 때 부하들이 '행복탄'에 맞았다고 우스개로 한 말이 기억난다. 죽지 않고 살아나야 한다는 응원이었고 그래서 다시 살아났기에 전우들이 나를 불사조라고 불러주었다. 6사단 정보처 근무 시절 키가 작으면서도 민첩하여 꼬마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또 하나의 싫지 않은 별명이 전우들에 의해 생긴 셈이다.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0일까지 필사즉생의 각오로 장렬하게 싸운 금성지구 406 감재고지의 백병전은 혼전 속의 혈투 그 자체였다. 밤낮을 바꿔가며 진지 탈환을 하던 치열한 상황에서 나는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죽을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비장한 결심을 했다. 부하들을 독려하며 중공군이 버티고 있는 정상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였고, 몸과 몸, 총과 총이 맞부딛치는 격렬한 백병전을 펼쳤다. 돌발적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중공군 장교와 나는 동시에 서로 총격을 가해 피아간에 같이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중공군은 겁에 질려 패주했다. 우리 중대의 옥쇄작전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때 나는 안타깝게도 정신을 잃어 비몽사몽 상태였다.
나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왼팔에 따발단총을 맞고 팔이 부러지면서 실탄이 튕겨 올라 어깨뼈를 치고 내려가 다시 튕겨 좌측 갈비뼈 7개가 부러졌으며, 8번째 뼈에 부딪히면서 힘이 약해져 위로 밀려 올라가 심장에 맞았으나 심장을 뚫지 못하고 심장 바로 밑에 박혔다. X-ray 사진에 찍힌 그대로 지금도 내 몸에 총탄이 박혀 있고, 요행히 나는 구십이 넘도록 건강하게 살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오늘날까지 정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전쟁이 났으나 나는 군문을 떠나지 않고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으로 충실하게 복무하였다. 소령에서 중령을 거쳐 대령에 진급하면서 육본 감사실과 주월사령부 지원부대에서 근무하였고, 휴전선 GOP 대대장과 연대장으로 재직하면서 간첩을 사살하고 땅굴을 발견하는 실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19〉〉년 〉월 〉〉일 부로 〉〉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예편하였다.
지금까지 술회한 이야기는 6·25전쟁이 터졌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최전선의 전투병과 소대장·중대장 시절 직접 전투에 참가하면서 몸소 겪었던 실화들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엮은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함께 싸우다 산화한 전우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죽었고, 가족을 위해서 죽었으며 또 나를 대신해 죽었다. 그러므로 나의 전투 체험기는 내 자신의 회고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희생적 헌신을 되새기는 기록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나의 평생 화두는 나라 걱정이요, 나라 사랑이다.
우리 문중에 명재상으로 유명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조님이 계셨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을 극복한 과정을 정리하여 유비무환의 계책을 수록한 징비록(懲毖錄)을 후세에 남기셨다. 아마도 나라 사랑의 충정은 자그마한 내 뜻과도 같았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따라서 그 선조님의 거룩한 유지(遺志)를 본받아 이 책을 내고자 하는 동기를 얻었음을 외람되게 밝힌다.
6·25에 관련한 많은 일화 중에 나의 기록은 전쟁 과정에 나타난 한편의 예화이다. 이러한 작은 조각이 모아져 전체 기록이 완성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기록상의 미진한 점이 있다면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또한 후세들이 나라 사랑하는데 적으나마 보탬이 될 만한 가치가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끝으로 이 책을 내는데 협조해 준 6·25참전유공자회 동료 전우들과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류병추 회장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표하고, 특히 내용 전반에 대해 정리·감수하면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최종인 작가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우리나라 나이로 아흔넷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94년이면 꽤 오래 산 셈이다. 아득한 세월 같으나 지금 나의 소회는 한순간의 찰나를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옛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아마도 이승을 떠나기 전에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제 치하 1932년 4월 5일에 태어나 8·15해방이 되면서 소년기를 지나 6·25전쟁이 터지자 곧장 청년 시절로 넘어갔고, 전쟁의 참담한 시련 속에서 나의 인생 행로는 군인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춘천은 나의 고향이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은 삼팔선 아래의 춘천을 삽시간에 난리통으로 몰아넣었고, 열여덟 살 어린 학생에게 전쟁은 놀라운 현장을 보여 주었다. 인민재판 등으로 평온한 일상생활이 파괴되고 겪어보지 못한 고통의 연속으로 세상은 혼란의 범벅이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우리 젊은이들은 모두 피하고 숨었다,
파상공세로 남진을 계속하던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패퇴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반전되어 서울과 춘천도 다시 수복되었고 전쟁의 판세는 국군의 북진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때 나는 곧바로 학도의용군에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군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학도병으로 시작하여 이등병·상등병을 거쳐 소위로 임관되고 소대장·중대장으로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휴전 이후 육군본부 회계감사단의 행정실장을 역임한 다음 대대장·연대장 등 야전 지휘관으로 봉직하고 예편하였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전쟁 이야기를 지금 살려내어 6·25전쟁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 나라 지킴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실상을 알려주고자 함에 있다. 내가 전쟁에서 겪은 체험은 내 개인의 몫이기도 하면서 6·25를 겪은 동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고통과 연민이 함께 엮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하자 곧장 나는 6사단 전방 수색대에 배속되어 화천수력발전소를 탈환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38도 이북 지역의 철원·원산·양덕·개천·희천에 이르기까지 계속 북진하는 국군의 대열에서 활동하였다. 선발대가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하여 한만 국경에 다달았을 때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다는 감격에 한때 들뜬 심정이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급변하는 바람에 다시 통한의 후퇴를 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부대원이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모르는 채 저마다 살길을 찾아 헤매면서 패잔병이 되어 후퇴의 고행을 치렀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혈로를 뚫고 요행히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가 매일이다시피 했다. 산속에서 외로움과 공포로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이건영 대위님과 극적으로 조우하여 의형제를 맺고 서로 의지하며 천신만고 끝에 6사단에 귀환한 이야기는 필설로 다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훗날, 당시의 긴박하고 처절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을 고비고비마다 넘겼던 상황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긴장을 풀기 위해 땡전 한 잎 들이지 않고 북한 여행을 했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그야말로 전쟁에 참전하였기에 있을 수 있는 북한 답사 여행인 셈이다. 남한 출신의 18세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투에 몸을 던져 가는 곳마다 승리하면서 두려움조차 없었다.
전쟁통에도 사랑은 싹이 트더라. 무섭고도 지루한 환경에서 소년의 풋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외로움을 견뎌내는 버팀목이었고, 그래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6·25 남침이 시작될 때만 해도 국군의 전력이 총체적으로 열세라 일방적으로 몰리면서 병력의 손실이 막심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곳곳에서 남학생들이 학도의용군으로 전장에 투입되었고, 국난에 남녀를 가릴 수 없다 하여 여학생들도 나라를 위해 지원 입대하게 되었다.
내가 6사단 사령부 본부중대에 있을 때 여학생 학도병 9명이 배속되었다. 그중 군계일학처럼 단아하고 청초한 천사가 새파란 숫총각의 눈에 꽂혔다. 무미건조한 남자 병사들의 내무반이 환해지고 활력이 도는 가운데 사춘기 18세 소년은 그녀를 가슴에 간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장교가 되기 위해 육군보병학교로 떠났다. 첫 이별이었다.
금성지구 406고지 쟁탈 전투에서 나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다. 대대 구호소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춘천의 야전이동외과로 옮겼으나 워낙 중상이라 마산 수도육군병원으로 또 이송되었다.
수술과 치료가 어려운 상태여서 절박한 심정으로 비탄에 빠졌던 내게 다시 천사가 나타났다. 6사단에서 헤어졌던 그녀가 간호장교가 되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첫사랑과의 기적적 해후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녀의 정성 어린 간호로 나의 깊은 상처는 아물고, 다시 땅을 밟고 일어서면서 군 생활의 재복무를 신청하여 적격 판정을 받았다.
나는 불사조인가?
전투 현장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길 수 있었음은 오직 어머님의 기도와 하늘이 도운 덕택일 뿐이다. 백병전에서 총상을 맞고 후송되었을 때 부하들이 '행복탄'에 맞았다고 우스개로 한 말이 기억난다. 죽지 않고 살아나야 한다는 응원이었고 그래서 다시 살아났기에 전우들이 나를 불사조라고 불러주었다. 6사단 정보처 근무 시절 키가 작으면서도 민첩하여 꼬마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또 하나의 싫지 않은 별명이 전우들에 의해 생긴 셈이다.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0일까지 필사즉생의 각오로 장렬하게 싸운 금성지구 406 감재고지의 백병전은 혼전 속의 혈투 그 자체였다. 밤낮을 바꿔가며 진지 탈환을 하던 치열한 상황에서 나는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죽을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비장한 결심을 했다. 부하들을 독려하며 중공군이 버티고 있는 정상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였고, 몸과 몸, 총과 총이 맞부딛치는 격렬한 백병전을 펼쳤다. 돌발적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중공군 장교와 나는 동시에 서로 총격을 가해 피아간에 같이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중공군은 겁에 질려 패주했다. 우리 중대의 옥쇄작전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때 나는 안타깝게도 정신을 잃어 비몽사몽 상태였다.
나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왼팔에 따발단총을 맞고 팔이 부러지면서 실탄이 튕겨 올라 어깨뼈를 치고 내려가 다시 튕겨 좌측 갈비뼈 7개가 부러졌으며, 8번째 뼈에 부딪히면서 힘이 약해져 위로 밀려 올라가 심장에 맞았으나 심장을 뚫지 못하고 심장 바로 밑에 박혔다. X-ray 사진에 찍힌 그대로 지금도 내 몸에 총탄이 박혀 있고, 요행히 나는 구십이 넘도록 건강하게 살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오늘날까지 정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전쟁이 났으나 나는 군문을 떠나지 않고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으로 충실하게 복무하였다. 소령에서 중령을 거쳐 대령에 진급하면서 육본 감사실과 주월사령부 지원부대에서 근무하였고, 휴전선 GOP 대대장과 연대장으로 재직하면서 간첩을 사살하고 땅굴을 발견하는 실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19〉〉년 〉월 〉〉일 부로 〉〉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예편하였다.
지금까지 술회한 이야기는 6·25전쟁이 터졌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최전선의 전투병과 소대장·중대장 시절 직접 전투에 참가하면서 몸소 겪었던 실화들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엮은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함께 싸우다 산화한 전우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죽었고, 가족을 위해서 죽었으며 또 나를 대신해 죽었다. 그러므로 나의 전투 체험기는 내 자신의 회고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희생적 헌신을 되새기는 기록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나의 평생 화두는 나라 걱정이요, 나라 사랑이다.
우리 문중에 명재상으로 유명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조님이 계셨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을 극복한 과정을 정리하여 유비무환의 계책을 수록한 징비록(懲毖錄)을 후세에 남기셨다. 아마도 나라 사랑의 충정은 자그마한 내 뜻과도 같았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따라서 그 선조님의 거룩한 유지(遺志)를 본받아 이 책을 내고자 하는 동기를 얻었음을 외람되게 밝힌다.
6·25에 관련한 많은 일화 중에 나의 기록은 전쟁 과정에 나타난 한편의 예화이다. 이러한 작은 조각이 모아져 전체 기록이 완성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기록상의 미진한 점이 있다면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또한 후세들이 나라 사랑하는데 적으나마 보탬이 될 만한 가치가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끝으로 이 책을 내는데 협조해 준 6·25참전유공자회 동료 전우들과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류병추 회장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표하고, 특히 내용 전반에 대해 정리·감수하면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최종인 작가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목차
목차
1부(내가 만난 6·25)
2부(학도의용군)
3부(육군이등병 류재식)
4부(육군보병학교)
5부(초등군사반)
6부(전선야곡)
7부(7·13전투)
8부(나의 장교 생활)
9부(군복을 벗고)
0부(남기고 싶은 이야기)
2부(학도의용군)
3부(육군이등병 류재식)
4부(육군보병학교)
5부(초등군사반)
6부(전선야곡)
7부(7·13전투)
8부(나의 장교 생활)
9부(군복을 벗고)
0부(남기고 싶은 이야기)
저자
저자
류재식
춘천고 명예졸업, 학도병→이등병·상등병→소대장(소위)→DMZ중대장(대위)·대대장(중령)·연대장(대령) 기타(육군본부 회계감사단 행정실장, 월남전 십자성부대 군수지원대대장) 상훈(화랑무공훈장, 월남명예1등훈장, 대통령·국무총리·국방부장관 표창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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