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얹다(시와편견 서정시선 62)
박준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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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맨 첫 자리에 ‘시’가 놓이는, 놓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가 인간에 대한 탐구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 그 가치를 드러내며 삶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작업이기 때문인 것이다. 서정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언어화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인간의 보편적 삶의 질서와 원리 속에 그 좌표를 찍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아실현의 한 형태다. 보편적 질서와 원리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도 그 출발점은 인간 개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예술적 노력과 그에 따른 변화와 그 어떤 형태의 결과와 책임도 그 자신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 정언명령은 그래서 예술 행위(시 창작)의 전제이면서 그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변화와 변혁을 부르짖는 시나 공리적 가치를 앞세우는 시, 계몽적 구호가 시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도 ‘자아 탐색’이 부족하거나 이를 도외시한 이유가 크다. 자신의 개성적인 감정과 사유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자아의 탐색 과정이며 성숙 과정이고 또한 사회와 인류의 보편적 감정에 통합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서정시에서 ‘자아의 탐색’은 시작이며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준희 시인의 시가 이러한 자아 탐색이라는 주제에 젖줄을 대고 있음은 그 예술적 성취를 논하기에 앞서 그 창작의 자세에서 일단 제 궤도에 걸음을 옳게 내딛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탐색오래도록 숨겨놓았던 나를 꺼내어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건네어보지만아득히 흩어지는 형상어디로 갈지 모르는 바람처럼금세 사라지는 구름처럼개울물이 일으키는 하얀 거품천사의 얼굴로 웃고 있다휘모리장단에 맞춰 장구를 치는 각설이가 되어 보기도 하고난전 마당에서 곱사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 보기도 하며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사는 삶쓸쓸한 거리에 누워있는 낙엽 한 장가는 길을 멈춰 세워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되어 보기도 하는아직 술래잡기하고 있다
사회변화와 변혁을 부르짖는 시나 공리적 가치를 앞세우는 시, 계몽적 구호가 시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도 ‘자아 탐색’이 부족하거나 이를 도외시한 이유가 크다. 자신의 개성적인 감정과 사유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자아의 탐색 과정이며 성숙 과정이고 또한 사회와 인류의 보편적 감정에 통합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서정시에서 ‘자아의 탐색’은 시작이며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준희 시인의 시가 이러한 자아 탐색이라는 주제에 젖줄을 대고 있음은 그 예술적 성취를 논하기에 앞서 그 창작의 자세에서 일단 제 궤도에 걸음을 옳게 내딛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탐색오래도록 숨겨놓았던 나를 꺼내어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건네어보지만아득히 흩어지는 형상어디로 갈지 모르는 바람처럼금세 사라지는 구름처럼개울물이 일으키는 하얀 거품천사의 얼굴로 웃고 있다휘모리장단에 맞춰 장구를 치는 각설이가 되어 보기도 하고난전 마당에서 곱사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 보기도 하며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사는 삶쓸쓸한 거리에 누워있는 낙엽 한 장가는 길을 멈춰 세워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되어 보기도 하는아직 술래잡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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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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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해설]
비상을 꿈꾸는 존재론적 질문 혹은 탐색
- 박준희의 시 세계
복효근(시인)
인문학의 맨 첫 자리에 '시'가 놓이는, 놓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가 인간에 대한 탐구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 그 가치를 드러내며 삶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작업이기 때문인 것이다. 서정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언어화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인간의 보편적 삶의 질서와 원리 속에 그 좌표를 찍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아실현의 한 형태다. 보편적 질서와 원리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도 그 출발점은 인간 개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예술적 노력과 그에 따른 변화와 그 어떤 형태의 결과와 책임도 그 자신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 정언명령은 그래서 예술 행위(시 창작)의 전제이면서 그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변화와 변혁을 부르짖는 시나 공리적 가치를 앞세우는 시, 계몽적 구호가 시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도 '자아 탐색'이 부족하거나 이를 도외시한 이유가 크다. 자신의 개성적인 감정과 사유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자아의 탐색 과정이며 성숙 과정이고 또한 사회와 인류의 보편적 감정에 통합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서정시에서 '자아의 탐색'은 시작이며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준희 시인의 시가 이러한 자아 탐색이라는 주제에 젖줄을 대고 있음은 그 예술적 성취를 논하기에 앞서 그 창작의 자세에서 일단 제 궤도에 걸음을 옳게 내딛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탐색오래도록 숨겨놓았던 나를 꺼내어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건네어보지만아득히 흩어지는 형상어디로 갈지 모르는 바람처럼금세 사라지는 구름처럼개울물이 일으키는 하얀 거품천사의 얼굴로 웃고 있다휘모리장단에 맞춰 장구를 치는 각설이가 되어 보기도 하고난전 마당에서 곱사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 보기도 하며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사는 삶쓸쓸한 거리에 누워있는 낙엽 한 장가는 길을 멈춰 세워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되어 보기도 하는아직 술래잡기하고 있다
「가면을 쓰다」 전문
자아를 찾아간다는 그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탐색" 작업일 것이다. 시인은 「가면을 쓰다」라는 시를 통해 시인이 시를 쓰는 작업이 자아의 탐색 작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첫 줄에서 단호하게 말한 것처럼 이 작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작업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시를 쓰는 작업, 혹은 자아를 탐색하는 작업은 '가면을 쓰는' 것처럼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위장하거나 모호하게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않고 있다.
흰 종이를 앞에 놓고 사유의 날개를 펼치는 그것은 "오래도록 숨겨놓았던 나를 꺼내어/ 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건네어보"는 일이다. 참 막연하고 허허로운 일이다. 바람에 말을 거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에서 출발하는 자의 막막함을, 하염없음을 혹은 부질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바람" 같고 "금세 사라지는 구름" 같고 "개울물이 일으키는 하얀 거품"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천사의 얼굴로 웃고" 있지만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이 "아득히 흩어지는 형상"일 뿐이다.
'나'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몇 겹의 가면을 쓴 것처럼 어느 얼굴이 본래의 나인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하나가 아니다. "휘모리장단에 맞춰 장구를 치는 각설이가 되어 보기도 하고/난전 마당에서 곱사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 보기도 한다. "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삶을 살아가는 부정형의, 무정형의 존재다. 때론 각설이가 되어 굴곡진 삶의 애환을 서러운 흥에 실어 풀어보기도 하고, 삶의 회오리를 뚫고 가며 슬픈 자화상을 그려보이는 곱추 광대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어느 것 하나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길을 찾지 않는 자에게는 안락과 자기만족과 자기도취가 주어진다면 고뇌와 방황은 길을 찾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희열이면서 뼈 시린 고통이다. 당연하게도 시인은 후자를 택한 사람이다. "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 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사는 삶"을 사는 존재다. 자기부정과 자기 모멸은 어쩌면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각증세인지도 모른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듯이 번화한 거리, 밀물처럼 몰려다니는 인파 속에서 시인은 오히려 고독을 느낀다. 오직 생물학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급급한 군중,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며 살아가는 세속적인 삶에 매몰되어 물결치는 대로 몰려다니는 공허한 군중 속에서 시인은 텅 빈 것만 같은 "쓸쓸한 거리에/ 누워있는 낙엽 한 장"처럼 고독하다. 문득 "가는 길을 멈춰 세워/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되어 보기도 한다." 길을 찾는 자는 의심하는 자다. 회의하는 자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나는 의심하고 회의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살아있는 한 이 회외와 본질적인 질문을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아를 찾는, 찾아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다. 영원히 진행형의 "술래잡기"다.
바람의 응원을 받으며 사는 나는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공중부양 중이다 보금자리를 꿈꾸며 하늘 위 무지개 빛 삶을 그려보지만 구름처럼 몰려들어 흔들어 대는 소음에 낡아가고 가슴이 찢어지고 마음마저 황폐해져 샛노란 몸이지만내 가슴에 남겨 놓고 싶은 그 한마디를 위해삭발 하며 의지를 동여매 보는데
「플래카드」 전문
누구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 '플래카드'와 동일시되어 그려진 작품이다. 몇 가닥 줄에 의지하여 공중에 매달린 게 플래카드다. 바람이 불어주면 흔들리면서 그 존재가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존재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치환의 깃발에서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무엇인가 간절한 몸부림을 담고 있다. 시인의 존재가 그 간절한 무엇 ("무지개 빛 삶", "혹은 내 가슴에 남겨 놓고 싶은/그 한마디")을 위한 몸부림이 없다면 한갓 무위의 동작에 불과할 것이다. 공중부양을 꿈꾸는 구도자의 그것처럼 간절하다.
자신의 존재를 고양하고 이상적 자아를 꿈꾸면서 공중에 매달려 처절한 몸부림을 해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군중은 그런 한 개인을 개인으로 두려 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존재를 다른 존재로 인정하려 들지 않고 따돌림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려 드는 것이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개인도 그런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유행에 휩쓸리고 상식에, 편견에 편승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를 탐색하는 일은 그래서 함부로 꿈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구름처럼 몰려들어 흔들어 대는 소음에/낡아가고//가슴이 찢어지고/마음마저 황폐해져/샛노란 몸"으로 변해버리는 플래카드의 운명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그 힘을 얻는 게 아닌가 한다. "삭발하며 의지를 동여매 보는" 것이다. 시인의 시는 그래서 '의지'의 표현이며 이 의지를 통해 자아 탐색의 무모한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박준희 시인이 이러한 '의지'라든지, 혹은 시적 지향점이라든지 자아 탐색이라는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인 설명을 동원하는 대신에 '가면', '플래카드', '하이힐' 등 구제적 사물을 통해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 보인다. 형상화는 시적 진정성을 독자와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시 쓰기의 방법적 핵심적 요소다. 이로써 형체를 갖고 있지 아니한 시인의 느낌과 감정과 사유는 색깔과 형체와 냄새를 지니고 독자의 감각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의 그것을 추체험할 수 있게 된다. 형상화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시가 난해함으로 독자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거나 시적 모호성을 넘어서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는 소비적 언어유희의 미궁 속에 헤매게 한다.
캄캄한 신발장 안에서 잊혔던 너와오랜만에 눈이 마주쳤다빌딩 가장 높은 곳에서지하철 가장 낮은 구석까지발자국을 찍으며 세우던 자존심나의 과거를 잘 아는 너이기에외면할 수 없는 눈빛다시 거리로 돌아왔다마르고 닳도록시멘트 바닥에 맨살로 부딪쳐야 하는 삶스스로 허리를 꺾어 무너지고 싶었지만가지마다 빨간 꽃송이들이 피어나고또각또각 소리 높이며하늘 높은 봄날 속으로 중년의 자존심이 걸어가고 있다
「하이힐」 전문
시를 쓰는 일은 어쩌면 잊고 있었던 하이힐을 신발장에서 꺼내 신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신발은 내 과거를 잘 안다. 지금은 굽 낮은 운동화나 단화를 신고 안전과 편리함과 건강을 좇아 어쩌면 안이한 일상에 젖어 살지만 과거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빌딩 가장 높은 곳에서/ 지하철 가장 낮은 구석까지" 높고 낮음을 구별하지 않고 치열하게 걸었다. 신발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르고 닳도록/시멘트 바닥에/맨살로 부딪쳐야 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때론 그대로 "스스로 허리를 꺾어 무너져"버리고 싶은 가열찬 삶을 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었고 세상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당당했다. 그렇게 발자국을 찍으며 자존감을 세웠었다.
어쩌면 시인은 '플래카드'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고 살아있음을 입증함으로써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아의 탐색 작업은 안이한 일상 속에 젖어 들어서는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극한으로 또는 안일한 일상 밖으로 자신을 내몰아가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시를 늘, 매 순간 쓸 수는 없으나 묵혀둔 하이힐을 꺼내 신어보는 것처럼 때로 안일한 일상으로부터 자신을 바람부는 광야로 불러내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때아닌 하이힐을 신고 거리를 걸어간다. 관성으로부터의 탈출하고자 하는 상징적 언술이다. "가지마다 빨간 꽃송이들이 피어나고/또각또각 소리 높이며/하늘 높은 봄날 속으로" 그의 자존감은 높아가고 있다. 식어가는 혈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잦아드는 모닥불 같은 심장에 불을 지피기 위해 하이힐이라는 소품을 통해 심폐소생술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속도에 익숙해지는 게 생의 전부나무의 하얀 피였던 나는석유 찌꺼기와 강제로 한 몸이 된이미 나의 삶은 정해져 있었다아무리 삶은 둥글게자기를 죽이고 굴러가야 하는 것이라지만쉽게 익숙해지지 않던 길들온몸으로 배우는 게 오직 길 하나인데나는 나의 길을 모른다신을 원망해도 소용없다못에 찔리기도 하고미움도 없이 온갖 것 밟고 가야 하는 슬픈 생죽어서 버려질 때까지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이 둥글둥글한 삶을 버리고 다음 생에는 뾰족하게 태어나고 싶은
「바퀴」 전문
「하이힐」에서 보듯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시인도 삶의 관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문득 그러한 자신을 깨닫고 다시 시작해보려고 시도하는 자가 시인이고 시를 쓰는 작업으로 일탈과 탈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시는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기도 하지만 있어야 할 일을 꿈꾸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따라서 누가 말려도 꿈꾸는 자이고 꿈꾸기를 허가받은 자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꿈꾸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다음 생을 꿈꾼다.
다음 생을 꿈꾼다는 것은 이승의 삶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세속적인 삶에 만족 못해서가 아니다. "이미 나의 삶은 정해져 있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바퀴와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쓴 이 서정시는 뛰어난 형상화의 방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퀴에게 생래적으로 운명지워진 삶은 구르는 일이다. "속도에 익숙해지는 게 생의 전부"다. 수동적인 주어진 운명이다.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세상의 상식과 처세술은 나에게 "삶은 둥글게/자기를 죽이고 굴러가야 하는 것이"라고. 이 길에서는 예속과 순종과 굴종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못에 찔리기도 하고/미움도 없이 온갖 것 밟고 가야" 한다. "죽어서 버려질 때까지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숙명적인 삶을 바퀴에게서 본다. 그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인 셈이다. 바퀴는 생각한다. "나는 나의 길을 모른다/신을 원망해도 소용없다." 바퀴의 운명에 대해 자각하고 신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은 여기서 "나는 회의하고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다르지 않은 말이 된다. 의심하고 회의함으로써 수동적으로 주어진 운명에 대하여 깨닫고 주체적인 자아로 존재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관습과 관성에 의존하여 살고 있는 나를 거기로부터 꺼내어 나는 주체적인 자각을 하게 이른다. 그리고 꿈꾸게 되는 것이다. 다음 생에는 순응 대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선언하게 된다. 이 시는 자아의 탐색이 뛰어난 형상화를 바탕으로 철학적 사유로 깊어져 성공한 한 예가 되겠다.
풀려지지 않는 문으로 울음이 흐르고 있다열리지 않는 문간간이 덜컹거리는 기억을 불러 세워 고문하는데낯익은 발걸음 목덜미를 낚아채는 오후점점 커지는 그리움아직 풀리지 못한 숫자들갈피를 잡지 못해 주춤거리는 마음어둠을 방패 삼아 서성인다창문을 두드리는 달안부를 묻지만 문안에 갇힌 나의 안녕깊은 밤,아직도 숫자를 돌리며 불면 중이다
「비밀번호」 전문
시인은 여전히 "열리지 않은 문 앞"에 서 있다. 나와 마주하기란 앞에서 보았듯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점점 커지는 그리움"에 시인은 "깊은 밤,/아직도 숫자를 돌리며 불면 중이다." 존재에 대한 깊은 탐색은 '그리움'이라는 감염성 높은 단어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움, 그리움과 같은 것이다. 나의 실체, 존재의 본모습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다. "간간이 덜컹거리는/기억" 속의 내가 진짜 모습일까? 이러한 질문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다시 올 수 없는 과거의 모습으로 현재의 자신을 재구성하기란 무망한 노릇임을 누구나 안다. 낯익은 발걸음은 목덜미를 낚아채듯 소스라쳐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님을 자각한다. 마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자물통 앞에선 것처럼 막막하다.
'문'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단어는 존재에 대한, 세계에 대한 통로를 의미한다. 그 문은 잠겨있다. 문 안의 세계는 밖과 단절된 세계이며 폐쇄된 의식의 공간을 의미한다. 자족적이며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은 안전하고 안락할지 모른다. 그러나 '달'은 창문을 두드린다. 저 우주 밖으로 자아의 확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안부를 묻지만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문 안에 갇혀 있는 안녕"일 뿐이다. 자아와 자아가 처한 세계의 폐쇄성을 깨닫는 순간이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해 주춤거리는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조합한다. 깊은 밤 불면 또한 깊다. 이처럼 시인의 시는 자아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작업일지라고 할 수 있다.
죽어있던 글자들이 기어 나온다꿈이었던 나의 몸이 흘러나온다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바람을 불러모아 큰 호흡을 하고햇살 아래 자리 잡는데각자의 놀이터에서시소 놀이도 하고그네를 타고 정신없이 날아 보기도 하는단어들 다시는 죽은 책 속에 갇혀머물고 싶지 않은 문장들살아있음을 확인한다조용한 촛불 아래 모인 단어들가지런히 문장을 이루고 있는데비는 내리고 우울도 내리고
「시(詩)를 캐다」 전문
시인에게 시를 쓰는 작업은 자아의 탐색에 그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그것은 광맥을 찾아 광부과 채광을 하는 작업에 비유되고 있다. 금맥이나 철광석 대신 시에서는 "죽어있던 글자들이 기어 나온다/ 꿈이었던 나의 몸이 흘러나온다." 시를 쓰는 작업은 죽어버린 언어들, 이미 그 효용가치와 의미를, 생명력을 잃어버린 표현들을 파헤치고 살아있는 표현을 찾는 행위이며 죽어버린 꿈을 파헤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바람을 불러모아 큰 호흡을 하고/햇살 아래 자리 잡"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들의 단어들이 "각자의 놀이터에서/시소 놀이도 하고/그네를 타고/정신없이 날아 보"게 만드는, 살아 숨 쉬게 하는 즉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쓰는 작업의 의미를 묻고 있으며 또한 시를 쓰는 자아의 본 모습을 묻고 있다. 이 시는 시를 쓰는 일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한 답이 되겠다. "다시는 죽은 책 속에 갇혀/머물고 싶지 않은 문장들"을 캐내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자면 시를 쓰는 일은 조용한 촛불 아래서 그 빛나는 단어를 다듬고 언어의 금맥을 캐는 일이 되겠다. 어찌 즐겁기만 하랴, 우울하고 때론 비가 내리듯 습기가 가득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프더라도 기꺼운 우울이 아니겠는가?
한 올 한 올로 짠 햇살의 푸른 옷 입고하늘 광야를 겁 없이 누비던 시간들이찬 바람에 안녕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린다붉게 물든 비밀을 단풍 뒤에 숨기고어지럽게 흩어진다흙 냄새 속에 씨앗 심고희망의 지도를 그리고 싶다며지나는 바람을 불러 세워낙엽에게 길을 물어 본다가을이라는 여행이 데려다 준 마지막 역 척박한 땅에 씨 뿌린다내 숨 속의 습기라도 시의 뿌리에 가 닿길 기원하지만겨울은 너무나 길고 날카롭다절실한 침묵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봄날에는 파란 꿈이 발아한다는
「간절함」 전문
다시 시인은 시를 쓰는 일에 대해 묻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이 시 쓰는 일에 있다면 이는 곧 자아의 그 정체성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가을이다. 시인이 나이가 물리적으로 가을 무렵에 접어들었다는 의식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을이 되어 "한 올 한 올로 짠 햇살의 푸른 옷 입고/하늘 광야를 겁 없이 누비던 시간들이/찬 바람에 안녕//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린다." 수렴의 계절에 접어드는 것이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모습이긴 하지만 거기엔 생명의 비의가 숨겨져 있다. "아래로 아래로"라는 첩어가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낮은 자세, 낮은 자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아래로 내리는 붉게 물든 비밀은 무엇일까? "가을이라는 여행이 데려다 준 마지막 역" 그다음에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낮게 내려앉는 시간은 "흙 냄새 속에 씨앗 심고/희망의 지도를 그리고 싶다며/지나는 바람을 불러 세워/낙엽에게 길을 물어 본다." 시인은 가을이 되어 지는 낙엽에게 생명의 순환과 질서에 대해 묻고 있다. 가을이 되어 다시 붉게 물드는 시간은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씨앗을 심고 다시 희망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상징적 표현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광야에 노래의 씨앗을 뿌리는 초인처럼 한 가닥 회의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겨울은 너무도 길고 날카롭기 때문이다."여기서 이 회의에 대한 시인의 답이 있다. '간절함'이다. 제의 제목이 그러하듯이 그가 시를 대하는 자세이고 또한 삶을 대하는 방식이다. "절실한 침묵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봄날에는 파란 꿈이 발아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간절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간절함은 가령 다음과 같은 일이다. "새벽부터 서성이는 발길들/기도는 새하얀 밥을 한 그릇 소복이 담는 일이다/머리를 감고 정성스레 쪽을 짓는 일이다/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촛불을 켜는 일"(「기도를 얹다」)이다.
따라서 시인의 자아에 대한 세계에 대한 시적 탐색은 단순히 언어의 기술이 아니다. 한 그릇 밥을 정성스레 짓는 일이며 머리를 감고 정성스레 쪽을 짓는 일처럼 수행과 같은 일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촛불을 켜는 일처럼 지극정성 기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이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는 탐색"이다. 질문은 고문이 되어 나를 옭죄고 답 대신 "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내일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허공에 내어 걸린 플래카드처럼 "가슴이 찢어지고/마음마저 황폐해져" 또 흐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그럴지라도 시인은 그 어떤 일에라도 '간절함'으로 '기도를 얹'어야 한다고 다짐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기도를 얹어야//소원은 알을 깨고 훨훨 날 수 있을까"하고 시인은 끊임없이 묻고 탐색할 것이다. 그리고 간절함으로 내일도 시의 기도를 얹을 것이다. "돌(시)은 소원의 알"(「기도를 얹다」)이기 때문이다. 알은 부화하여 비상할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이 시인으로서 소원의 알이고 비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비상을 꿈꾸는 존재론적 질문 혹은 탐색
- 박준희의 시 세계
복효근(시인)
인문학의 맨 첫 자리에 '시'가 놓이는, 놓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가 인간에 대한 탐구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 그 가치를 드러내며 삶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작업이기 때문인 것이다. 서정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언어화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인간의 보편적 삶의 질서와 원리 속에 그 좌표를 찍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아실현의 한 형태다. 보편적 질서와 원리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도 그 출발점은 인간 개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예술적 노력과 그에 따른 변화와 그 어떤 형태의 결과와 책임도 그 자신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 정언명령은 그래서 예술 행위(시 창작)의 전제이면서 그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변화와 변혁을 부르짖는 시나 공리적 가치를 앞세우는 시, 계몽적 구호가 시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도 '자아 탐색'이 부족하거나 이를 도외시한 이유가 크다. 자신의 개성적인 감정과 사유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자아의 탐색 과정이며 성숙 과정이고 또한 사회와 인류의 보편적 감정에 통합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서정시에서 '자아의 탐색'은 시작이며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준희 시인의 시가 이러한 자아 탐색이라는 주제에 젖줄을 대고 있음은 그 예술적 성취를 논하기에 앞서 그 창작의 자세에서 일단 제 궤도에 걸음을 옳게 내딛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탐색오래도록 숨겨놓았던 나를 꺼내어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건네어보지만아득히 흩어지는 형상어디로 갈지 모르는 바람처럼금세 사라지는 구름처럼개울물이 일으키는 하얀 거품천사의 얼굴로 웃고 있다휘모리장단에 맞춰 장구를 치는 각설이가 되어 보기도 하고난전 마당에서 곱사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 보기도 하며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사는 삶쓸쓸한 거리에 누워있는 낙엽 한 장가는 길을 멈춰 세워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되어 보기도 하는아직 술래잡기하고 있다
「가면을 쓰다」 전문
자아를 찾아간다는 그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탐색" 작업일 것이다. 시인은 「가면을 쓰다」라는 시를 통해 시인이 시를 쓰는 작업이 자아의 탐색 작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첫 줄에서 단호하게 말한 것처럼 이 작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작업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시를 쓰는 작업, 혹은 자아를 탐색하는 작업은 '가면을 쓰는' 것처럼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위장하거나 모호하게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않고 있다.
흰 종이를 앞에 놓고 사유의 날개를 펼치는 그것은 "오래도록 숨겨놓았던 나를 꺼내어/ 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건네어보"는 일이다. 참 막연하고 허허로운 일이다. 바람에 말을 거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에서 출발하는 자의 막막함을, 하염없음을 혹은 부질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바람" 같고 "금세 사라지는 구름" 같고 "개울물이 일으키는 하얀 거품"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천사의 얼굴로 웃고" 있지만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이 "아득히 흩어지는 형상"일 뿐이다.
'나'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몇 겹의 가면을 쓴 것처럼 어느 얼굴이 본래의 나인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하나가 아니다. "휘모리장단에 맞춰 장구를 치는 각설이가 되어 보기도 하고/난전 마당에서 곱사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 보기도 한다. "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삶을 살아가는 부정형의, 무정형의 존재다. 때론 각설이가 되어 굴곡진 삶의 애환을 서러운 흥에 실어 풀어보기도 하고, 삶의 회오리를 뚫고 가며 슬픈 자화상을 그려보이는 곱추 광대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어느 것 하나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길을 찾지 않는 자에게는 안락과 자기만족과 자기도취가 주어진다면 고뇌와 방황은 길을 찾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희열이면서 뼈 시린 고통이다. 당연하게도 시인은 후자를 택한 사람이다. "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 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사는 삶"을 사는 존재다. 자기부정과 자기 모멸은 어쩌면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각증세인지도 모른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듯이 번화한 거리, 밀물처럼 몰려다니는 인파 속에서 시인은 오히려 고독을 느낀다. 오직 생물학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급급한 군중,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며 살아가는 세속적인 삶에 매몰되어 물결치는 대로 몰려다니는 공허한 군중 속에서 시인은 텅 빈 것만 같은 "쓸쓸한 거리에/ 누워있는 낙엽 한 장"처럼 고독하다. 문득 "가는 길을 멈춰 세워/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되어 보기도 한다." 길을 찾는 자는 의심하는 자다. 회의하는 자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나는 의심하고 회의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살아있는 한 이 회외와 본질적인 질문을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아를 찾는, 찾아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다. 영원히 진행형의 "술래잡기"다.
바람의 응원을 받으며 사는 나는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공중부양 중이다 보금자리를 꿈꾸며 하늘 위 무지개 빛 삶을 그려보지만 구름처럼 몰려들어 흔들어 대는 소음에 낡아가고 가슴이 찢어지고 마음마저 황폐해져 샛노란 몸이지만내 가슴에 남겨 놓고 싶은 그 한마디를 위해삭발 하며 의지를 동여매 보는데
「플래카드」 전문
누구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 '플래카드'와 동일시되어 그려진 작품이다. 몇 가닥 줄에 의지하여 공중에 매달린 게 플래카드다. 바람이 불어주면 흔들리면서 그 존재가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존재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치환의 깃발에서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무엇인가 간절한 몸부림을 담고 있다. 시인의 존재가 그 간절한 무엇 ("무지개 빛 삶", "혹은 내 가슴에 남겨 놓고 싶은/그 한마디")을 위한 몸부림이 없다면 한갓 무위의 동작에 불과할 것이다. 공중부양을 꿈꾸는 구도자의 그것처럼 간절하다.
자신의 존재를 고양하고 이상적 자아를 꿈꾸면서 공중에 매달려 처절한 몸부림을 해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군중은 그런 한 개인을 개인으로 두려 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존재를 다른 존재로 인정하려 들지 않고 따돌림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려 드는 것이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개인도 그런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유행에 휩쓸리고 상식에, 편견에 편승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를 탐색하는 일은 그래서 함부로 꿈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구름처럼 몰려들어 흔들어 대는 소음에/낡아가고//가슴이 찢어지고/마음마저 황폐해져/샛노란 몸"으로 변해버리는 플래카드의 운명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그 힘을 얻는 게 아닌가 한다. "삭발하며 의지를 동여매 보는" 것이다. 시인의 시는 그래서 '의지'의 표현이며 이 의지를 통해 자아 탐색의 무모한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박준희 시인이 이러한 '의지'라든지, 혹은 시적 지향점이라든지 자아 탐색이라는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인 설명을 동원하는 대신에 '가면', '플래카드', '하이힐' 등 구제적 사물을 통해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 보인다. 형상화는 시적 진정성을 독자와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시 쓰기의 방법적 핵심적 요소다. 이로써 형체를 갖고 있지 아니한 시인의 느낌과 감정과 사유는 색깔과 형체와 냄새를 지니고 독자의 감각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의 그것을 추체험할 수 있게 된다. 형상화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시가 난해함으로 독자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거나 시적 모호성을 넘어서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는 소비적 언어유희의 미궁 속에 헤매게 한다.
캄캄한 신발장 안에서 잊혔던 너와오랜만에 눈이 마주쳤다빌딩 가장 높은 곳에서지하철 가장 낮은 구석까지발자국을 찍으며 세우던 자존심나의 과거를 잘 아는 너이기에외면할 수 없는 눈빛다시 거리로 돌아왔다마르고 닳도록시멘트 바닥에 맨살로 부딪쳐야 하는 삶스스로 허리를 꺾어 무너지고 싶었지만가지마다 빨간 꽃송이들이 피어나고또각또각 소리 높이며하늘 높은 봄날 속으로 중년의 자존심이 걸어가고 있다
「하이힐」 전문
시를 쓰는 일은 어쩌면 잊고 있었던 하이힐을 신발장에서 꺼내 신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신발은 내 과거를 잘 안다. 지금은 굽 낮은 운동화나 단화를 신고 안전과 편리함과 건강을 좇아 어쩌면 안이한 일상에 젖어 살지만 과거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빌딩 가장 높은 곳에서/ 지하철 가장 낮은 구석까지" 높고 낮음을 구별하지 않고 치열하게 걸었다. 신발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르고 닳도록/시멘트 바닥에/맨살로 부딪쳐야 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때론 그대로 "스스로 허리를 꺾어 무너져"버리고 싶은 가열찬 삶을 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었고 세상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당당했다. 그렇게 발자국을 찍으며 자존감을 세웠었다.
어쩌면 시인은 '플래카드'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고 살아있음을 입증함으로써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아의 탐색 작업은 안이한 일상 속에 젖어 들어서는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극한으로 또는 안일한 일상 밖으로 자신을 내몰아가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시를 늘, 매 순간 쓸 수는 없으나 묵혀둔 하이힐을 꺼내 신어보는 것처럼 때로 안일한 일상으로부터 자신을 바람부는 광야로 불러내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때아닌 하이힐을 신고 거리를 걸어간다. 관성으로부터의 탈출하고자 하는 상징적 언술이다. "가지마다 빨간 꽃송이들이 피어나고/또각또각 소리 높이며/하늘 높은 봄날 속으로" 그의 자존감은 높아가고 있다. 식어가는 혈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잦아드는 모닥불 같은 심장에 불을 지피기 위해 하이힐이라는 소품을 통해 심폐소생술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속도에 익숙해지는 게 생의 전부나무의 하얀 피였던 나는석유 찌꺼기와 강제로 한 몸이 된이미 나의 삶은 정해져 있었다아무리 삶은 둥글게자기를 죽이고 굴러가야 하는 것이라지만쉽게 익숙해지지 않던 길들온몸으로 배우는 게 오직 길 하나인데나는 나의 길을 모른다신을 원망해도 소용없다못에 찔리기도 하고미움도 없이 온갖 것 밟고 가야 하는 슬픈 생죽어서 버려질 때까지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이 둥글둥글한 삶을 버리고 다음 생에는 뾰족하게 태어나고 싶은
「바퀴」 전문
「하이힐」에서 보듯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시인도 삶의 관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문득 그러한 자신을 깨닫고 다시 시작해보려고 시도하는 자가 시인이고 시를 쓰는 작업으로 일탈과 탈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시는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기도 하지만 있어야 할 일을 꿈꾸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따라서 누가 말려도 꿈꾸는 자이고 꿈꾸기를 허가받은 자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꿈꾸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다음 생을 꿈꾼다.
다음 생을 꿈꾼다는 것은 이승의 삶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세속적인 삶에 만족 못해서가 아니다. "이미 나의 삶은 정해져 있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바퀴와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쓴 이 서정시는 뛰어난 형상화의 방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퀴에게 생래적으로 운명지워진 삶은 구르는 일이다. "속도에 익숙해지는 게 생의 전부"다. 수동적인 주어진 운명이다.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세상의 상식과 처세술은 나에게 "삶은 둥글게/자기를 죽이고 굴러가야 하는 것이"라고. 이 길에서는 예속과 순종과 굴종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못에 찔리기도 하고/미움도 없이 온갖 것 밟고 가야" 한다. "죽어서 버려질 때까지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숙명적인 삶을 바퀴에게서 본다. 그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인 셈이다. 바퀴는 생각한다. "나는 나의 길을 모른다/신을 원망해도 소용없다." 바퀴의 운명에 대해 자각하고 신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은 여기서 "나는 회의하고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다르지 않은 말이 된다. 의심하고 회의함으로써 수동적으로 주어진 운명에 대하여 깨닫고 주체적인 자아로 존재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관습과 관성에 의존하여 살고 있는 나를 거기로부터 꺼내어 나는 주체적인 자각을 하게 이른다. 그리고 꿈꾸게 되는 것이다. 다음 생에는 순응 대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선언하게 된다. 이 시는 자아의 탐색이 뛰어난 형상화를 바탕으로 철학적 사유로 깊어져 성공한 한 예가 되겠다.
풀려지지 않는 문으로 울음이 흐르고 있다열리지 않는 문간간이 덜컹거리는 기억을 불러 세워 고문하는데낯익은 발걸음 목덜미를 낚아채는 오후점점 커지는 그리움아직 풀리지 못한 숫자들갈피를 잡지 못해 주춤거리는 마음어둠을 방패 삼아 서성인다창문을 두드리는 달안부를 묻지만 문안에 갇힌 나의 안녕깊은 밤,아직도 숫자를 돌리며 불면 중이다
「비밀번호」 전문
시인은 여전히 "열리지 않은 문 앞"에 서 있다. 나와 마주하기란 앞에서 보았듯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점점 커지는 그리움"에 시인은 "깊은 밤,/아직도 숫자를 돌리며 불면 중이다." 존재에 대한 깊은 탐색은 '그리움'이라는 감염성 높은 단어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움, 그리움과 같은 것이다. 나의 실체, 존재의 본모습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다. "간간이 덜컹거리는/기억" 속의 내가 진짜 모습일까? 이러한 질문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다시 올 수 없는 과거의 모습으로 현재의 자신을 재구성하기란 무망한 노릇임을 누구나 안다. 낯익은 발걸음은 목덜미를 낚아채듯 소스라쳐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님을 자각한다. 마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자물통 앞에선 것처럼 막막하다.
'문'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단어는 존재에 대한, 세계에 대한 통로를 의미한다. 그 문은 잠겨있다. 문 안의 세계는 밖과 단절된 세계이며 폐쇄된 의식의 공간을 의미한다. 자족적이며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은 안전하고 안락할지 모른다. 그러나 '달'은 창문을 두드린다. 저 우주 밖으로 자아의 확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안부를 묻지만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문 안에 갇혀 있는 안녕"일 뿐이다. 자아와 자아가 처한 세계의 폐쇄성을 깨닫는 순간이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해 주춤거리는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조합한다. 깊은 밤 불면 또한 깊다. 이처럼 시인의 시는 자아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작업일지라고 할 수 있다.
죽어있던 글자들이 기어 나온다꿈이었던 나의 몸이 흘러나온다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바람을 불러모아 큰 호흡을 하고햇살 아래 자리 잡는데각자의 놀이터에서시소 놀이도 하고그네를 타고 정신없이 날아 보기도 하는단어들 다시는 죽은 책 속에 갇혀머물고 싶지 않은 문장들살아있음을 확인한다조용한 촛불 아래 모인 단어들가지런히 문장을 이루고 있는데비는 내리고 우울도 내리고
「시(詩)를 캐다」 전문
시인에게 시를 쓰는 작업은 자아의 탐색에 그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그것은 광맥을 찾아 광부과 채광을 하는 작업에 비유되고 있다. 금맥이나 철광석 대신 시에서는 "죽어있던 글자들이 기어 나온다/ 꿈이었던 나의 몸이 흘러나온다." 시를 쓰는 작업은 죽어버린 언어들, 이미 그 효용가치와 의미를, 생명력을 잃어버린 표현들을 파헤치고 살아있는 표현을 찾는 행위이며 죽어버린 꿈을 파헤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바람을 불러모아 큰 호흡을 하고/햇살 아래 자리 잡"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들의 단어들이 "각자의 놀이터에서/시소 놀이도 하고/그네를 타고/정신없이 날아 보"게 만드는, 살아 숨 쉬게 하는 즉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쓰는 작업의 의미를 묻고 있으며 또한 시를 쓰는 자아의 본 모습을 묻고 있다. 이 시는 시를 쓰는 일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한 답이 되겠다. "다시는 죽은 책 속에 갇혀/머물고 싶지 않은 문장들"을 캐내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자면 시를 쓰는 일은 조용한 촛불 아래서 그 빛나는 단어를 다듬고 언어의 금맥을 캐는 일이 되겠다. 어찌 즐겁기만 하랴, 우울하고 때론 비가 내리듯 습기가 가득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프더라도 기꺼운 우울이 아니겠는가?
한 올 한 올로 짠 햇살의 푸른 옷 입고하늘 광야를 겁 없이 누비던 시간들이찬 바람에 안녕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린다붉게 물든 비밀을 단풍 뒤에 숨기고어지럽게 흩어진다흙 냄새 속에 씨앗 심고희망의 지도를 그리고 싶다며지나는 바람을 불러 세워낙엽에게 길을 물어 본다가을이라는 여행이 데려다 준 마지막 역 척박한 땅에 씨 뿌린다내 숨 속의 습기라도 시의 뿌리에 가 닿길 기원하지만겨울은 너무나 길고 날카롭다절실한 침묵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봄날에는 파란 꿈이 발아한다는
「간절함」 전문
다시 시인은 시를 쓰는 일에 대해 묻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이 시 쓰는 일에 있다면 이는 곧 자아의 그 정체성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가을이다. 시인이 나이가 물리적으로 가을 무렵에 접어들었다는 의식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을이 되어 "한 올 한 올로 짠 햇살의 푸른 옷 입고/하늘 광야를 겁 없이 누비던 시간들이/찬 바람에 안녕//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린다." 수렴의 계절에 접어드는 것이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모습이긴 하지만 거기엔 생명의 비의가 숨겨져 있다. "아래로 아래로"라는 첩어가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낮은 자세, 낮은 자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아래로 내리는 붉게 물든 비밀은 무엇일까? "가을이라는 여행이 데려다 준 마지막 역" 그다음에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낮게 내려앉는 시간은 "흙 냄새 속에 씨앗 심고/희망의 지도를 그리고 싶다며/지나는 바람을 불러 세워/낙엽에게 길을 물어 본다." 시인은 가을이 되어 지는 낙엽에게 생명의 순환과 질서에 대해 묻고 있다. 가을이 되어 다시 붉게 물드는 시간은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씨앗을 심고 다시 희망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상징적 표현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광야에 노래의 씨앗을 뿌리는 초인처럼 한 가닥 회의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겨울은 너무도 길고 날카롭기 때문이다."여기서 이 회의에 대한 시인의 답이 있다. '간절함'이다. 제의 제목이 그러하듯이 그가 시를 대하는 자세이고 또한 삶을 대하는 방식이다. "절실한 침묵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봄날에는 파란 꿈이 발아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간절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간절함은 가령 다음과 같은 일이다. "새벽부터 서성이는 발길들/기도는 새하얀 밥을 한 그릇 소복이 담는 일이다/머리를 감고 정성스레 쪽을 짓는 일이다/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촛불을 켜는 일"(「기도를 얹다」)이다.
따라서 시인의 자아에 대한 세계에 대한 시적 탐색은 단순히 언어의 기술이 아니다. 한 그릇 밥을 정성스레 짓는 일이며 머리를 감고 정성스레 쪽을 짓는 일처럼 수행과 같은 일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촛불을 켜는 일처럼 지극정성 기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이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는 탐색"이다. 질문은 고문이 되어 나를 옭죄고 답 대신 "싸늘한 증오의 미소를 지으며" 내일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허공에 내어 걸린 플래카드처럼 "가슴이 찢어지고/마음마저 황폐해져" 또 흐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그럴지라도 시인은 그 어떤 일에라도 '간절함'으로 '기도를 얹'어야 한다고 다짐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기도를 얹어야//소원은 알을 깨고 훨훨 날 수 있을까"하고 시인은 끊임없이 묻고 탐색할 것이다. 그리고 간절함으로 내일도 시의 기도를 얹을 것이다. "돌(시)은 소원의 알"(「기도를 얹다」)이기 때문이다. 알은 부화하여 비상할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이 시인으로서 소원의 알이고 비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목차
목차
1부 선회가 있다면
가면을 쓰다
과속 방지턱
돌아오는 길
백미러
베이다
비밀번호
선회가 있다면
시, 밤을 깨우다
여우들 틈에서
자아를 보다
자화상
저예요
하이힐
화장대에서
2부 녹슨 호미
검정 고무신
공중전화기
눈물샘을 파는 검정고무신
녹슨 호미
바닥
바퀴
버려진 바이올린
버스 정거장
비둘기호
선풍기
우체통
임대
자전거
재봉틀
플래카드
3부 아픈걸음으로 거닐다
기도를 얹다
꽃꽂이
낡은 벽을 읽다
누가 날개를 꺽었을까
또하나의 사랑
마지막 여행
말라버린 냇가
밀물과 썰물
반신욕기
비목
시(詩)를 캐다
주문
호미
황소같은
4부 미더덕 날다
가을앓이
간절함
꽃샘 추위
노루귀
단풍, 시의 집에 머물다
미더덕 날다
바람을 그리다
백일홍
봄, 앓이중
봄, 오르다
비의 노래
연잎의 눈물
잃어버린 것들
장마
가면을 쓰다
과속 방지턱
돌아오는 길
백미러
베이다
비밀번호
선회가 있다면
시, 밤을 깨우다
여우들 틈에서
자아를 보다
자화상
저예요
하이힐
화장대에서
2부 녹슨 호미
검정 고무신
공중전화기
눈물샘을 파는 검정고무신
녹슨 호미
바닥
바퀴
버려진 바이올린
버스 정거장
비둘기호
선풍기
우체통
임대
자전거
재봉틀
플래카드
3부 아픈걸음으로 거닐다
기도를 얹다
꽃꽂이
낡은 벽을 읽다
누가 날개를 꺽었을까
또하나의 사랑
마지막 여행
말라버린 냇가
밀물과 썰물
반신욕기
비목
시(詩)를 캐다
주문
호미
황소같은
4부 미더덕 날다
가을앓이
간절함
꽃샘 추위
노루귀
단풍, 시의 집에 머물다
미더덕 날다
바람을 그리다
백일홍
봄, 앓이중
봄, 오르다
비의 노래
연잎의 눈물
잃어버린 것들
장마
저자
저자
박준희
창원 거주
2019년 계간 《시와편견》에 신달자 시인 추천으로 등단
시편작가회, 시사모, 한국디카시인모임 운영위원
마산문인협회 회원
2021년 시집 『기도를 얹다』 상재
동인시집 『초록의 뒷면을 지나』 외 4권 공저
2019년 계간 《시와편견》에 신달자 시인 추천으로 등단
시편작가회, 시사모, 한국디카시인모임 운영위원
마산문인협회 회원
2021년 시집 『기도를 얹다』 상재
동인시집 『초록의 뒷면을 지나』 외 4권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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