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한국디카시학기획시선 5)
김종회 디카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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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에 대해 말하려면, ‘디카(디지털 카메라)’라는 매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디카시는 ‘디카’와 ‘시’를 합친 말이다. ‘디카’와 시가 어울려 디카시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디카시에는 분명 일반 시와는 분별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디카시와 시가 갈라지는 지점은 ‘디카’라는 매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가 언어를 매체로 이루어지는 상상의 양식이라면, 디카시는 디카와 언어를 매체로 이루어지는 상상의 양식이다. 디카시는 디카로 찍은 사진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독자들은 디카시를 보고 읽는다. 사진이미지가 언어표현으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한 편의 디카시가 생성된다고나 할까.
우리가 사는 일상은 지천에 날이미지가 널린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이미지는 날이미지를 디카로 찍는 순간 펼쳐진다. 일상에서 보는 진달래꽃 한 송이(날이미지)와 디카로 찍은 진달래꽃 한 송이(사진이미지)는 같으면서도 다른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시인은 날이미지가 사진이미지로 구현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감흥을 언어로 표현한다. 사진이미지로는 미처 담지 못할 날이미지를 시인은 언어로 드러내는 셈이다. 사진이미지와 언어표현이 하나로 어우러져야만 제대로 된 디카시가 탄생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은 사진이미지에서 연상된 내용을 바탕으로 언어표현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젖힌다. 사진이미지를 ‘보고’ 언어표현을 ‘읽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우리는 디카시를 감상하는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일상은 지천에 날이미지가 널린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이미지는 날이미지를 디카로 찍는 순간 펼쳐진다. 일상에서 보는 진달래꽃 한 송이(날이미지)와 디카로 찍은 진달래꽃 한 송이(사진이미지)는 같으면서도 다른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시인은 날이미지가 사진이미지로 구현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감흥을 언어로 표현한다. 사진이미지로는 미처 담지 못할 날이미지를 시인은 언어로 드러내는 셈이다. 사진이미지와 언어표현이 하나로 어우러져야만 제대로 된 디카시가 탄생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은 사진이미지에서 연상된 내용을 바탕으로 언어표현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젖힌다. 사진이미지를 ‘보고’ 언어표현을 ‘읽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우리는 디카시를 감상하는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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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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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해설]
소년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세계
- 김종회의 디카시
오홍진(문학평론가)
디카시에 대해 말하려면, '디카(디지털 카메라)'라는 매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디카시는 '디카'와 '시'를 합친 말이다. '디카'와 시가 어울려 디카시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디카시에는 분명 일반 시와는 분별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디카시와 시가 갈라지는 지점은 '디카'라는 매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가 언어를 매체로 이루어지는 상상의 양식이라면, 디카시는 디카와 언어를 매체로 이루어지는 상상의 양식이다. 디카시는 디카로 찍은 사진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독자들은 디카시를 보고 읽는다. 사진이미지가 언어표현으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한 편의 디카시가 생성된다고나 할까.
우리가 사는 일상은 지천에 날이미지가 널린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이미지는 날이미지를 디카로 찍는 순간 펼쳐진다. 일상에서 보는 진달래꽃 한 송이(날이미지)와 디카로 찍은 진달래꽃 한 송이(사진이미지)는 같으면서도 다른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시인은 날이미지가 사진이미지로 구현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감흥을 언어로 표현한다. 사진이미지로는 미처 담지 못할 날이미지를 시인은 언어로 드러내는 셈이다. 사진이미지와 언어표현이 하나로 어우러져야만 제대로 된 디카시가 탄생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은 사진이미지에서 연상된 내용을 바탕으로 언어표현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젖힌다. 사진이미지를 '보고' 언어표현을 '읽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우리는 디카시를 감상하는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 낮은 개울가
저만치 소녀가 앉았던 징검다리
소년의 눈을 열면 모두 다 보이는데
- 「징검다리」
?
김종회의 디카시에는 여행자의 시선이 드리워져 있다. 여행자의 시선은 무엇보다 낯익은 일상을 보는 눈과는 거리가 멀다. 여행자는 낯익은 장소(고향)를 떠나 낯선 곳을 배회한다.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참으로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다. 위 시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현실 속에서 허구를 보고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나무 그늘 아래 낮은 개울가"를 현실에서 보고 있고, "저만치 소녀가 앉았던 징검다리" 또한 현실에서 보고 있다. 이곳(소나기마을)이 아닌 또 다른 장소에도 개울가와 징검다리는 있을 것이다. 시인이 이곳에 있는 개울가와 징검다리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현실과 허구가 겹친 자리에서 피어나는 낯선 풍경 때문이다. 저 개울가와 저 징검다리는 바로 소설 속 소녀와 이어져 있기에 시적 이미지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울가와 징검다리에 서린 시적 이미지는 "소년의 눈"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년의 눈은 허구를 들여다보는 눈을 가리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라고 할까. 일상에 익숙해진 어른의 눈으로 보면 개울가 징검다리에 앉아 소년을 기다리는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소년의 눈을 열면 모두 다 보이는데"라고 쓰고 있다. 돌려 말하면 소년의 눈을 열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개울가는 그저 개울가일 뿐이고, 징검다리는 그저 징검다리일 뿐이다. 여행자가 되어 소나기마을을 방문한 시인은 소년이 되어 허구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소년의 눈으로 소나기마을을 들여다본다. 소나기마을은 그러니까 현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새로운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인이 사진이미지로 제시한 것은 시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개울가이다. 징검다리가 개울가를 가로지르고 있다. 「소나기」라는 문학작품을 연상하지 않으면 별다른 흥취를 느낄 수 없는 이 풍경에 시인은 소나기 속 소년과 소녀의 눈을 들이댄다. 똑같은 풍경인데도 소년과 소녀의 눈으로 보는 풍경은 확실히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여기에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시인=여행자의 마음 또한 깃들어 있다. 날이미지가 사진이미지로 압축되는 순간, 시인은 비로소 소년과 소녀가 만나는 장소를 상상하게 된다. 개울가와 징검다리는 소년과 소녀의 눈을 통해 시적인 이미지로 뻗어나간다. 보이는 사물을 '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보는' 시인의 존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좋겠다.
차마 진달래라 부를 수 없어서
연한 속살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그대 첫봄의 맑은 얼굴
- 「연달래」
화사하고 넉넉한 함성
작은 것들의 연합은 아름답다
내 안의 것들도 그렇다
- 「작은 입술들」
「연달래」라는 시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진달래를 보고도 차마 진달래라고 부를 수 없는 소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진달래'라는 언어로 어떻게 "그대 첫봄의 맑은 얼굴"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는 언제나 사물의 일부만 드러낼 수 있을 따름이다. 의사소통을 위해 사람들은 언어를 만들었다. 그들은 진달래를 진달래로 부르는 상황을 중시한다. 진달래를 진달래로 부를 수 없으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사람들이 만든 약속 체계가 아닌가. 시인이 아닌 누군가가 진달래를 "맑은 얼굴"로 부르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그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그를 사회부적응자로 내몰 것이다. 언어에 드리워진 질서가 이해되는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규정하는 순간, 우리 또한 언어 질서에 묶인 존재로 규정되는 셈이다.
시인은 진달래를 차마 진달래로 부를 수 없어 "연한 속살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사진이미지로는 한껏 자태를 뽐내는 진달래꽃이 제시되어 있다. 시 제목인 '연달래'는 '연한 속살의 진달래꽃'을 줄인 말일 것이다. 진달래꽃의 부드러운 속살을 보려면 '진달래꽃'이라는 언어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연한 속살은 '진달래꽃'이라는 언어 너머에 있다. 시인은 일상인의 눈으로 진달래꽃을 보려는 게 아니라 소년의 눈으로 진달래꽃을 보려고 한다. 소년의 눈은 언어 너머를 들여다보는 시선과 이어져 있다. 김소월에게 진달래꽃이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라면, 시인에게 진달래꽃은 연한 속살을 깊이깊이 감추고 있는 "그대 첫봄의 맑은 얼굴"이다. 누구나 보는 꽃이 아니라, 소년의 눈을 지닌 사람만이 애오라지 볼 수 있는 꽃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작은 입술들」에도 사물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화사하게 핀 꽃무리를 보며 시인은 "화사하고 넉넉한 함성"을 상상한다. 저 꽃들은 누구를 향해 저리 함성을 지르는 것일까? 화사한 꽃은 제자리에서 다른 생명들이 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박은 몸이니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날개 달린 생명들이야 날아서 이리저리 움직인다지만, 날개가 없는 꽃들은 어떻게 다른 생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힐까? 시인은 "넉넉한 함성"을 말하고 있다. 꽃들은 커다란 함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혼자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다. 수많은 꽃들이 "작은 것들의 연합"을 이루어 목 놓아 함성을 지른다. 시인은 온몸으로 함성을 지르는 이 꽃들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제 몸을 활짝 열어 다른 존재를 기꺼이 맞이하는 생명만큼 아름다운 게 세상 어디에 있을까?
꽃은 온몸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시인은 온몸으로 그 아름다움을 맞이한다. 물론 시인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움은 반드시 '언어'라는 매개를 거쳐야 한다. 디카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디카시는 사진이미지로 시작해 언어표현으로 끝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온몸으로 생명을 피운 꽃을 사진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꽃 이미지에서 시인은 꽃들의 함성을 듣고, 작은 것들이 이루는 연합을 본다. 꽃잎 하나하나가 입술(시 제목이 '작은 입술들'이다)이 되어 소리를 친다. 시인은 작은 꽃들이 연합을 이루어 함성을 외치는 이 풍경을 "내 안의 것들도 그렇다"라는 문장으로 잇는다. 작디작은 꽃들만 함성을 외치는 게 아니라 시인 또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을 향해 함성을 지른다. 시인이 온몸으로 지르는 이 외침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들어줄까?
진달래꽃을 차마 진달래꽃이라 부를 수 없는 마음이 있기에 시인은 꽃들이 외치는 함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에 의미(언어)를 부여하여 사물을 지배하려고 한다. 언어 밖에 있는 사물을 언어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 작업은, 사물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사물이 죽은 자리에서 언어가 뻗어 나온다는 한 철학자의 말을 굳이 되새기지 않더라도, 인간은 분명 언어를 통해 사물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면 깊이 지니고 있다. 시인은 어찌 보면 이러한 지배 욕망을 내려놓고 사물을 사물 자체로 보는 '소년의 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소년의 눈으로 봐야 작은 것들이 이루는 연합이 보이고, 소년의 귀로 들어야 화사하고 넉넉한 함성이 들린다. 이리 보면 소년의 눈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 존재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눈.
야자수 터널 건너 바다를 보다가
선물처럼 좋은 영상을 얻다
삶의 보화도 곳곳에 숨어 있는데
- 「어떤 실루엣」
지구의 속살을 보았다
숨겨진 것은 모두 드러나는 법
내 안의 붉은 빛이 거기 있었다
- 「감숙성 칠채산」
여행자는 바깥에 펼쳐진 낯선 사물을 보며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여행자는 낯선 곳을 떠돈다. 처음 보는 것이든, 이미 본 것이든, 여행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로이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여행자는 고향(낯익은 곳)을 떠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본 사물들을 여행지에서 본다고 해도, 여행자는 새로운 것을 보는 마음으로 그것을 본다. 사물이 새로운 게 아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새로운 것이다. 일상을 중시하는 어른의 눈을 내려놓고, 일상 너머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을 얻은 덕분이라고나 할까. 소년이 되어야 개울가 징검다리에 앉은 소녀(의 마음)를 이해할 수 있다. 소년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연한 속살의 이름"(「연달래」)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걸 소년은 철석같이 믿는다.
「어떤 실루엣」은 미국 여행길에서 본 "선물처럼 좋은 영상"을 사진이미지와 언어로 표현한 작품이다. '선물'이라는 시어에 암시된바, 시인은 야자수 터널 건너로 열린 바다를 보다가 문득 시적 영감을 떠올린다. 시적 영감은 선물처럼 온다. 선물이란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주는 물건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바다는 시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바다는 시인에게 선물과도 같은 좋은 영상을 보여준다. 물론 바다가 내보이는 영상을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볼 준비가 된 존재만이 이 영상을 볼 수 있다. 사물이 자기 속살을 드러내는 것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순간을 놓치면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고 해도 사물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말이다.
시인은 마음을 활짝 열고 사물이 번뜩이는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시인의 말마따나, 삶의 보화는 곳곳에 숨어 있다. 사물들 저마다 보화를 품고 있으니, 사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보화가 있다. 사물이 없는 곳은 없으니, 우리네 발걸음이 닿는 모든 곳마다 보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사물이 언뜻 내보이는 이 보화에 '어떤 실루엣'이라는 시구(시 제목이기도 하다)를 붙인다. 실루엣은 뚜렷하지 않다. 시인은 사물이 순간적으로 펼친 무언가를 보기는 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고 있다. 사물은 무언가를 내보이는 듯하면서도 숨긴다. 보이는 것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은 따라서 시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시인은 늘 사물이 내보이는 것을 통해 사물이 숨긴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야 한다. 시는 무엇보다 사물이 숨긴 진실 속에서 흘러나오는 보화인 것이다.
중국 여행길의 영상을 기록한 「감숙성 칠채산」에서 시인은 이러한 보화를 "지구의 속살"로 표현한다. 사진이미지에는 붉은 흙을 온몸으로 드러낸 감숙성 칠채산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우리가 옷으로 속살을 가리듯, 지구는 나무로 속살을 가린다. 시인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칠채산을 보면서 속살을 온전히 드러낸 지구를 상상한다. 우리 또한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는가. 속살이든, 알몸이든 생명은 제 안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장소를 지니고 있는 법이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이 오지 않는 한 생명은 그 장소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노출되는 순간 생명은 더 이상 생명으로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몸으로 태어난 생명은 알몸으로 죽는다. 속살이나 알몸은 삶과도 이어져 있지만, 죽음과도 이어져 있다. 사진이미지를 다시 보라. 삶이 보이는가, 아니면 죽음이 보이는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산에서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것은 허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숨겨진 것은 모두 드러나는 법"이라는 시구로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삶과 죽음이 결국은 하나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생명으로 태어나는 존재는 어김없이 죽음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죽음을 피해가는 생명은 있을 수 없다. 핏덩어리로 태어난 존재는 시간과 더불어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시간은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주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앗아가는 반대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온몸으로 속살을 드러낸 저 산 또한 무성한 나무숲으로 덮인 시간을 거쳐 오지 않았겠는가. 시인이라고 다를 리 없다. 저 산이 내뿜는 붉은 빛을 시인은 "내 안의 붉은 빛"이라고 표현한다. 푸르른 시절이 지나면 어김없이 붉은 시절이 온다. 생명의 법칙이다.
푸른빛이 퍼지는 시절을 거슬러 올라 우리는 붉은 빛이 완연한 세계에 이르렀다. 시인은 숨겨진 것을 모두 드러내는 그 붉은 세상을 여전히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소년의 눈에는 붉은 세상만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붉은 빛 너머에서 아직도 푸름을 잃지 않은 빛을 보고 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이미 지난 시간을 다시는 거슬러 오를 수 없다. 시간의 푸른빛은 보이지 않는 것에 기꺼이 마음의 눈을 여는 존재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김종회가 품고 있는 "내 안의 붉은 빛"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바깥을 뒤덮고 있는 푸른빛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푸른빛을 보기 위해 소년이 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소년이 된 시인은 낯선 곳을 향해 길을 떠난다. "내 안의 것들"(「작은 입술들」)로 사물들이 내보이는 보화들과 만나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 그는 무엇보다 소년의 꿈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세계
- 김종회의 디카시
오홍진(문학평론가)
디카시에 대해 말하려면, '디카(디지털 카메라)'라는 매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디카시는 '디카'와 '시'를 합친 말이다. '디카'와 시가 어울려 디카시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디카시에는 분명 일반 시와는 분별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디카시와 시가 갈라지는 지점은 '디카'라는 매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가 언어를 매체로 이루어지는 상상의 양식이라면, 디카시는 디카와 언어를 매체로 이루어지는 상상의 양식이다. 디카시는 디카로 찍은 사진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독자들은 디카시를 보고 읽는다. 사진이미지가 언어표현으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한 편의 디카시가 생성된다고나 할까.
우리가 사는 일상은 지천에 날이미지가 널린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이미지는 날이미지를 디카로 찍는 순간 펼쳐진다. 일상에서 보는 진달래꽃 한 송이(날이미지)와 디카로 찍은 진달래꽃 한 송이(사진이미지)는 같으면서도 다른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시인은 날이미지가 사진이미지로 구현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감흥을 언어로 표현한다. 사진이미지로는 미처 담지 못할 날이미지를 시인은 언어로 드러내는 셈이다. 사진이미지와 언어표현이 하나로 어우러져야만 제대로 된 디카시가 탄생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은 사진이미지에서 연상된 내용을 바탕으로 언어표현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젖힌다. 사진이미지를 '보고' 언어표현을 '읽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우리는 디카시를 감상하는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 낮은 개울가
저만치 소녀가 앉았던 징검다리
소년의 눈을 열면 모두 다 보이는데
- 「징검다리」
?
김종회의 디카시에는 여행자의 시선이 드리워져 있다. 여행자의 시선은 무엇보다 낯익은 일상을 보는 눈과는 거리가 멀다. 여행자는 낯익은 장소(고향)를 떠나 낯선 곳을 배회한다.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참으로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다. 위 시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현실 속에서 허구를 보고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나무 그늘 아래 낮은 개울가"를 현실에서 보고 있고, "저만치 소녀가 앉았던 징검다리" 또한 현실에서 보고 있다. 이곳(소나기마을)이 아닌 또 다른 장소에도 개울가와 징검다리는 있을 것이다. 시인이 이곳에 있는 개울가와 징검다리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현실과 허구가 겹친 자리에서 피어나는 낯선 풍경 때문이다. 저 개울가와 저 징검다리는 바로 소설 속 소녀와 이어져 있기에 시적 이미지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울가와 징검다리에 서린 시적 이미지는 "소년의 눈"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년의 눈은 허구를 들여다보는 눈을 가리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라고 할까. 일상에 익숙해진 어른의 눈으로 보면 개울가 징검다리에 앉아 소년을 기다리는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소년의 눈을 열면 모두 다 보이는데"라고 쓰고 있다. 돌려 말하면 소년의 눈을 열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개울가는 그저 개울가일 뿐이고, 징검다리는 그저 징검다리일 뿐이다. 여행자가 되어 소나기마을을 방문한 시인은 소년이 되어 허구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소년의 눈으로 소나기마을을 들여다본다. 소나기마을은 그러니까 현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새로운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인이 사진이미지로 제시한 것은 시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개울가이다. 징검다리가 개울가를 가로지르고 있다. 「소나기」라는 문학작품을 연상하지 않으면 별다른 흥취를 느낄 수 없는 이 풍경에 시인은 소나기 속 소년과 소녀의 눈을 들이댄다. 똑같은 풍경인데도 소년과 소녀의 눈으로 보는 풍경은 확실히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여기에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시인=여행자의 마음 또한 깃들어 있다. 날이미지가 사진이미지로 압축되는 순간, 시인은 비로소 소년과 소녀가 만나는 장소를 상상하게 된다. 개울가와 징검다리는 소년과 소녀의 눈을 통해 시적인 이미지로 뻗어나간다. 보이는 사물을 '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보는' 시인의 존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좋겠다.
차마 진달래라 부를 수 없어서
연한 속살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그대 첫봄의 맑은 얼굴
- 「연달래」
화사하고 넉넉한 함성
작은 것들의 연합은 아름답다
내 안의 것들도 그렇다
- 「작은 입술들」
「연달래」라는 시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진달래를 보고도 차마 진달래라고 부를 수 없는 소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진달래'라는 언어로 어떻게 "그대 첫봄의 맑은 얼굴"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는 언제나 사물의 일부만 드러낼 수 있을 따름이다. 의사소통을 위해 사람들은 언어를 만들었다. 그들은 진달래를 진달래로 부르는 상황을 중시한다. 진달래를 진달래로 부를 수 없으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사람들이 만든 약속 체계가 아닌가. 시인이 아닌 누군가가 진달래를 "맑은 얼굴"로 부르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그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그를 사회부적응자로 내몰 것이다. 언어에 드리워진 질서가 이해되는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규정하는 순간, 우리 또한 언어 질서에 묶인 존재로 규정되는 셈이다.
시인은 진달래를 차마 진달래로 부를 수 없어 "연한 속살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사진이미지로는 한껏 자태를 뽐내는 진달래꽃이 제시되어 있다. 시 제목인 '연달래'는 '연한 속살의 진달래꽃'을 줄인 말일 것이다. 진달래꽃의 부드러운 속살을 보려면 '진달래꽃'이라는 언어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연한 속살은 '진달래꽃'이라는 언어 너머에 있다. 시인은 일상인의 눈으로 진달래꽃을 보려는 게 아니라 소년의 눈으로 진달래꽃을 보려고 한다. 소년의 눈은 언어 너머를 들여다보는 시선과 이어져 있다. 김소월에게 진달래꽃이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라면, 시인에게 진달래꽃은 연한 속살을 깊이깊이 감추고 있는 "그대 첫봄의 맑은 얼굴"이다. 누구나 보는 꽃이 아니라, 소년의 눈을 지닌 사람만이 애오라지 볼 수 있는 꽃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작은 입술들」에도 사물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화사하게 핀 꽃무리를 보며 시인은 "화사하고 넉넉한 함성"을 상상한다. 저 꽃들은 누구를 향해 저리 함성을 지르는 것일까? 화사한 꽃은 제자리에서 다른 생명들이 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땅에 뿌리를 박은 몸이니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날개 달린 생명들이야 날아서 이리저리 움직인다지만, 날개가 없는 꽃들은 어떻게 다른 생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힐까? 시인은 "넉넉한 함성"을 말하고 있다. 꽃들은 커다란 함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혼자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다. 수많은 꽃들이 "작은 것들의 연합"을 이루어 목 놓아 함성을 지른다. 시인은 온몸으로 함성을 지르는 이 꽃들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제 몸을 활짝 열어 다른 존재를 기꺼이 맞이하는 생명만큼 아름다운 게 세상 어디에 있을까?
꽃은 온몸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시인은 온몸으로 그 아름다움을 맞이한다. 물론 시인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움은 반드시 '언어'라는 매개를 거쳐야 한다. 디카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디카시는 사진이미지로 시작해 언어표현으로 끝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온몸으로 생명을 피운 꽃을 사진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꽃 이미지에서 시인은 꽃들의 함성을 듣고, 작은 것들이 이루는 연합을 본다. 꽃잎 하나하나가 입술(시 제목이 '작은 입술들'이다)이 되어 소리를 친다. 시인은 작은 꽃들이 연합을 이루어 함성을 외치는 이 풍경을 "내 안의 것들도 그렇다"라는 문장으로 잇는다. 작디작은 꽃들만 함성을 외치는 게 아니라 시인 또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을 향해 함성을 지른다. 시인이 온몸으로 지르는 이 외침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들어줄까?
진달래꽃을 차마 진달래꽃이라 부를 수 없는 마음이 있기에 시인은 꽃들이 외치는 함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에 의미(언어)를 부여하여 사물을 지배하려고 한다. 언어 밖에 있는 사물을 언어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 작업은, 사물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사물이 죽은 자리에서 언어가 뻗어 나온다는 한 철학자의 말을 굳이 되새기지 않더라도, 인간은 분명 언어를 통해 사물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면 깊이 지니고 있다. 시인은 어찌 보면 이러한 지배 욕망을 내려놓고 사물을 사물 자체로 보는 '소년의 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소년의 눈으로 봐야 작은 것들이 이루는 연합이 보이고, 소년의 귀로 들어야 화사하고 넉넉한 함성이 들린다. 이리 보면 소년의 눈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 존재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눈.
야자수 터널 건너 바다를 보다가
선물처럼 좋은 영상을 얻다
삶의 보화도 곳곳에 숨어 있는데
- 「어떤 실루엣」
지구의 속살을 보았다
숨겨진 것은 모두 드러나는 법
내 안의 붉은 빛이 거기 있었다
- 「감숙성 칠채산」
여행자는 바깥에 펼쳐진 낯선 사물을 보며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여행자는 낯선 곳을 떠돈다. 처음 보는 것이든, 이미 본 것이든, 여행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로이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여행자는 고향(낯익은 곳)을 떠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본 사물들을 여행지에서 본다고 해도, 여행자는 새로운 것을 보는 마음으로 그것을 본다. 사물이 새로운 게 아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새로운 것이다. 일상을 중시하는 어른의 눈을 내려놓고, 일상 너머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을 얻은 덕분이라고나 할까. 소년이 되어야 개울가 징검다리에 앉은 소녀(의 마음)를 이해할 수 있다. 소년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연한 속살의 이름"(「연달래」)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걸 소년은 철석같이 믿는다.
「어떤 실루엣」은 미국 여행길에서 본 "선물처럼 좋은 영상"을 사진이미지와 언어로 표현한 작품이다. '선물'이라는 시어에 암시된바, 시인은 야자수 터널 건너로 열린 바다를 보다가 문득 시적 영감을 떠올린다. 시적 영감은 선물처럼 온다. 선물이란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주는 물건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바다는 시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바다는 시인에게 선물과도 같은 좋은 영상을 보여준다. 물론 바다가 내보이는 영상을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볼 준비가 된 존재만이 이 영상을 볼 수 있다. 사물이 자기 속살을 드러내는 것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순간을 놓치면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고 해도 사물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말이다.
시인은 마음을 활짝 열고 사물이 번뜩이는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시인의 말마따나, 삶의 보화는 곳곳에 숨어 있다. 사물들 저마다 보화를 품고 있으니, 사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보화가 있다. 사물이 없는 곳은 없으니, 우리네 발걸음이 닿는 모든 곳마다 보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사물이 언뜻 내보이는 이 보화에 '어떤 실루엣'이라는 시구(시 제목이기도 하다)를 붙인다. 실루엣은 뚜렷하지 않다. 시인은 사물이 순간적으로 펼친 무언가를 보기는 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고 있다. 사물은 무언가를 내보이는 듯하면서도 숨긴다. 보이는 것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은 따라서 시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시인은 늘 사물이 내보이는 것을 통해 사물이 숨긴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야 한다. 시는 무엇보다 사물이 숨긴 진실 속에서 흘러나오는 보화인 것이다.
중국 여행길의 영상을 기록한 「감숙성 칠채산」에서 시인은 이러한 보화를 "지구의 속살"로 표현한다. 사진이미지에는 붉은 흙을 온몸으로 드러낸 감숙성 칠채산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우리가 옷으로 속살을 가리듯, 지구는 나무로 속살을 가린다. 시인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칠채산을 보면서 속살을 온전히 드러낸 지구를 상상한다. 우리 또한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는가. 속살이든, 알몸이든 생명은 제 안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장소를 지니고 있는 법이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이 오지 않는 한 생명은 그 장소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노출되는 순간 생명은 더 이상 생명으로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몸으로 태어난 생명은 알몸으로 죽는다. 속살이나 알몸은 삶과도 이어져 있지만, 죽음과도 이어져 있다. 사진이미지를 다시 보라. 삶이 보이는가, 아니면 죽음이 보이는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산에서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것은 허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숨겨진 것은 모두 드러나는 법"이라는 시구로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삶과 죽음이 결국은 하나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생명으로 태어나는 존재는 어김없이 죽음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죽음을 피해가는 생명은 있을 수 없다. 핏덩어리로 태어난 존재는 시간과 더불어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시간은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주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앗아가는 반대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온몸으로 속살을 드러낸 저 산 또한 무성한 나무숲으로 덮인 시간을 거쳐 오지 않았겠는가. 시인이라고 다를 리 없다. 저 산이 내뿜는 붉은 빛을 시인은 "내 안의 붉은 빛"이라고 표현한다. 푸르른 시절이 지나면 어김없이 붉은 시절이 온다. 생명의 법칙이다.
푸른빛이 퍼지는 시절을 거슬러 올라 우리는 붉은 빛이 완연한 세계에 이르렀다. 시인은 숨겨진 것을 모두 드러내는 그 붉은 세상을 여전히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소년의 눈에는 붉은 세상만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붉은 빛 너머에서 아직도 푸름을 잃지 않은 빛을 보고 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이미 지난 시간을 다시는 거슬러 오를 수 없다. 시간의 푸른빛은 보이지 않는 것에 기꺼이 마음의 눈을 여는 존재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김종회가 품고 있는 "내 안의 붉은 빛"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바깥을 뒤덮고 있는 푸른빛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푸른빛을 보기 위해 소년이 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소년이 된 시인은 낯선 곳을 향해 길을 떠난다. "내 안의 것들"(「작은 입술들」)로 사물들이 내보이는 보화들과 만나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 그는 무엇보다 소년의 꿈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목차
목차
Ⅰ. 소나기마을 정갈한 얼굴
새봄 손짓
연달래
여름 초입
가을 소나기
무지개 동심
가을 햇볕
만추의 표정
순백 설경
징검다리
소년 말하다
갈밭머리 쉼터
쪽빛구름 쉼터
Ⅱ. 책과 꽃과 풍경이 있는 곳
책과 꽃
『악의 꽃』 초판본
봄이 오는 길목
작은 입술들
함평 용천사 꽃무릇
수종사에서 본 양수리 원경
신두리 해안 사구
목포 문학박람회 수변무대
하동 송림
고성 장산숲
동해 해변 산책로
이병주문학관
Ⅲ. 미국 여행길의 맑은 풍광
옐로스톤 국립공원
캘리포니아 오로라
샌디에이고 미항
요세미티 하프돔
와이키키 해변
바닷가 야자수길
하와이 민속촌
빅아일랜드 정원
낙원 절경
맥주거품 폭포
용암바다
푸른 사자머리
어떤 실루엣
Ⅳ. 중국 북방에서 만난 역사
안중근 의사의 자리
하얼빈 모데른호텔
장춘 관동군사령부
광개토왕릉 가는 길
집안 장수왕릉
삼족오 문양
감숙성 칠채산
돈황 실크로드
명사산 오아시스
황하 상류
강의 어머니
등 악양루
북중러 접경지대
해설
소년의 눈으로 들여다 보는 세계 - 오홍진
새봄 손짓
연달래
여름 초입
가을 소나기
무지개 동심
가을 햇볕
만추의 표정
순백 설경
징검다리
소년 말하다
갈밭머리 쉼터
쪽빛구름 쉼터
Ⅱ. 책과 꽃과 풍경이 있는 곳
책과 꽃
『악의 꽃』 초판본
봄이 오는 길목
작은 입술들
함평 용천사 꽃무릇
수종사에서 본 양수리 원경
신두리 해안 사구
목포 문학박람회 수변무대
하동 송림
고성 장산숲
동해 해변 산책로
이병주문학관
Ⅲ. 미국 여행길의 맑은 풍광
옐로스톤 국립공원
캘리포니아 오로라
샌디에이고 미항
요세미티 하프돔
와이키키 해변
바닷가 야자수길
하와이 민속촌
빅아일랜드 정원
낙원 절경
맥주거품 폭포
용암바다
푸른 사자머리
어떤 실루엣
Ⅳ. 중국 북방에서 만난 역사
안중근 의사의 자리
하얼빈 모데른호텔
장춘 관동군사령부
광개토왕릉 가는 길
집안 장수왕릉
삼족오 문양
감숙성 칠채산
돈황 실크로드
명사산 오아시스
황하 상류
강의 어머니
등 악양루
북중러 접경지대
해설
소년의 눈으로 들여다 보는 세계 - 오홍진
저자
저자
김종회
金鍾會
Jonghoi Kim, Ph. D.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6년 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나온 이래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해 왔으며
《문학사상》《문학수첩》《21세기문학》《한국문학평론》 등 여러 문예지의 편집위원 및 주간을 맡아 왔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비평문학회, 국제한인문학회, 박경리 토지학회,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등 여러 협회 및 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 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평론집으로《문학과 예술혼》《문학의 거울과 저울》《영혼의 숨겨진 보화》등이 있고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등의 저서와《삶과 문학의 경계를 걷다》등의 산문집이 있다.
Jonghoi Kim, Ph. D.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6년 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나온 이래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해 왔으며
《문학사상》《문학수첩》《21세기문학》《한국문학평론》 등 여러 문예지의 편집위원 및 주간을 맡아 왔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비평문학회, 국제한인문학회, 박경리 토지학회,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등 여러 협회 및 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현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 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평론집으로《문학과 예술혼》《문학의 거울과 저울》《영혼의 숨겨진 보화》등이 있고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등의 저서와《삶과 문학의 경계를 걷다》등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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