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다시 시인들 7)
성백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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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고 그렇게 시를 쓰는 성백술 시인이 『복숭아나무를 심다』 이후 7년 만에 2번째 시집 『따뜻한 겨울』을 냈다. 『따뜻한 겨울』은 맨얼굴, 허세를 걷어낸 ‘찐’, 진짜, 날것의 느낌이 든다. 그것은 ‘질박한 진정성’이다. 질박하다는 것은 수수하고 꾸밈이 없다는 뜻이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진솔함이 바로 이 시집의 특성이다.
시인은 대학원까지 마쳤으면서 안정된 직업도 마다하고 기회의 상류사회 기웃거리지 않고 중산층의 평범한 삶도 엿보지 않고 산막리 산촌에 스며들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복숭아나무를 심고, 기회가 되면 산불감시원도 하고 때로 산촌 구판장도 운영하며 인생 깊은 밑바닥에서 시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날카로운 의식과 양심을 지니고 우리 사회 현실의 불의와 부패와 부조리를 강력히 비판하며. 이러한 시인의 애환과 아픔이 이 시집 속에는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 속에서 탄생하는 성백술의 시는 힘겨운 삶을 넘어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꿈과 희망을 전달한다. 창작하는 시 편편마다 고통과 서러움과 아픔을 잉태한 채 용기와 희망으로 반짝인다. 시인의 삶은 처절하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은 깊은 산 속 약수터의 샘물처럼 시원시원하다.
시인은 대학원까지 마쳤으면서 안정된 직업도 마다하고 기회의 상류사회 기웃거리지 않고 중산층의 평범한 삶도 엿보지 않고 산막리 산촌에 스며들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복숭아나무를 심고, 기회가 되면 산불감시원도 하고 때로 산촌 구판장도 운영하며 인생 깊은 밑바닥에서 시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날카로운 의식과 양심을 지니고 우리 사회 현실의 불의와 부패와 부조리를 강력히 비판하며. 이러한 시인의 애환과 아픔이 이 시집 속에는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 속에서 탄생하는 성백술의 시는 힘겨운 삶을 넘어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꿈과 희망을 전달한다. 창작하는 시 편편마다 고통과 서러움과 아픔을 잉태한 채 용기와 희망으로 반짝인다. 시인의 삶은 처절하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은 깊은 산 속 약수터의 샘물처럼 시원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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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1.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고 그렇게 시를 쓰는 성백술 시인이 『복숭아나무를 심다』 이후 7년 만에 2번째 시집 『따뜻한 겨울』을 냈다. 『따뜻한 겨울』은 맨얼굴, 허세를 걷어낸 '찐', 진짜, 날것의 느낌이 든다. 그것은 '질박한 진정성'이다. 질박하다는 것은 수수하고 꾸밈이 없다는 뜻이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진솔함이 바로 이 시집의 특성이다.
시인은 대학원까지 마쳤으면서 안정된 직업도 마다하고 기회의 상류사회 기웃거리지 않고 중산층의 평범한 삶도 엿보지 않고 산막리 산촌에 스며들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복숭아나무를 심고, 기회가 되면 산불감시원도 하고 때로 산촌 구판장도 운영하며 인생 깊은 밑바닥에서 시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날카로운 의식과 양심을 지니고 우리 사회 현실의 불의와 부패와 부조리를 강력히 비판하며. 이러한 시인의 애환과 아픔이 이 시집 속에는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 속에서 탄생하는 성백술의 시는 힘겨운 삶을 넘어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꿈과 희망을 전달한다. 창작하는 시 편편마다 고통과 서러움과 아픔을 잉태한 채 용기와 희망으로 반짝인다. 시인의 삶은 처절하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은 깊은 산 속 약수터의 샘물처럼 시원시원하다.
2.
시인의 시에는 고향을 묘사한 시들이 많다. 그 고향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과 아울러 힘들 때 기대고 위로가 되어주는 심리적 고향을 일컫기도 한다.
홍수진 물에 돼지 떠내려오듯
헤엄쳐야만 건널 수 있던 금강천변
강 이쪽과 저쪽이 만나
하나로 어우러지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모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강변 자갈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돗자리 깔고
낚시 던지고 올갱이 잡고 물장구 치고
피서를 시작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오래된 구강 강변 자갈밭 위로
뜨거운 하루 해 습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루 몇 번 두평리를 지나온 시내버스가
다리를 건너와 구강리 종점을 돌아 나가면
성긴 다릿발 성큼성큼 건너
구강 다리가 몸을 눕힌다 그 그늘 아래
자가용과 사람들이 떼까마귀처럼 몰려들어
텐트 치고 닭 잡아먹고 삼겹살 구워 먹으며
염천 복더위를 마음껏 즐기다 간다
해질녘 두평들과 구강 강변이 만나
다래 덩쿨로 엉겨도 보고, 가끔씩
밤이면 부끄러운 교성도 들려온다
오늘도 두평들과 구강 강변 사이로
금강은 유유히 빛나며 흐르고
구강 다리가 스스로 몸을 눕힌다
- 「구강 다리에서」 전문
고향을 상징하는 구강 다리는 금강을 가로지르는 제법 큰 다리이다. 시인은 이 구강 다리에서 "돗자리 깔고/ 낚시 던지고 올갱이 잡고 물장구 치고" 놀았던 추억을 떠올린다. 이곳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떼까마귀처럼 몰려들어/ 텐트 치고 닭 잡아먹고 삼겹살 구워 먹으며/ 염천 복더위를 마음껏 즐기다"가는 평화로운 곳이다. 고향의 천변에서 여름에 주로 하던 그 물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처럼 오랜 옛날부터 그저 그렇게 해온 일이다. 구강 다리가 언제 생겼는지도 모른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 다리는 강의 양쪽을 이어주며 이쪽과 저쪽이 서로 어우러지게 할 뿐이다. 구강 다리가 주는 평화, 고향이 주는 평화는 "구강 다리가 스스로 몸을 눕힌다"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몸을 눕히는 일은 느긋함, 풍요로움, 여유, 한가함을 생각나게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히 쉬는 자세이다. 이것이 바로 고향이 주는 이미지이며, 우리 또한 고향을 찾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시인은 학업이나 직장으로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서울)에서 지낸다. 시에서 도시는 고향과 대립하는 곳으로 나타난다. 도시는 "비싼 임대료, 가스비, 전기료, 제하고 나면/ 남는 것"(「메추리집」)은 '빈손'뿐인 각박한 곳이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어두운 지하 계단을 내려"(「지하 수기」)오는 일로 하루를 마감하는 숨 막히는 곳이다. "능수능란하게 사기를 치는 장사꾼의 술수와/ 온종일 골라잡아를 외치는 억척스러움의 프로근성"이 부딪치는 곳이자 "콩나물 한 줌 값도 깎는 아귀다툼"(「자본의 굴레3」)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 도시의 속성은 「아리랑치기」란 시에서 잘 드러난다.
아득한 잠은 도시의 악령에 싸여
그는 낯선 이방의 꿈을 꾼다
따뜻한 가정의 불빛도 고향도 모두가 너무 멀리 있다
꽃잎 같은 새벽 비가 뿌린다, 그는 퍼뜩
낯선 곳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젯밤의 일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바지가 없다 핸드폰도 지갑도 열쇠도
절망적으로, 그는 신발을 챙겨 신고 팬티바람으로
집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한다 자기 집조차
잠겨 있다는 걸 꿈에도 짐작 못하면서
-「아리랑치기」 부분
술 취한 "그"를 부축하며 다정스레 말을 걸던 젊은 남녀는 그의 모든 것, 심지어 바지까지도 벗겨간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속담이 실제로 일어난 상황이다. 정직한 노동 대신 남을 속이고 등쳐먹고, 갈취하는 곳, 그래서 선의의 도움과 봉사조차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곳이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를 시인은 "악령"으로 표현하였다. 물건을 빼앗긴 것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자기 집조차/ 잠겨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랑치기를 당하여 열쇠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들어가야 할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출구가 없는 상황과 마찬가지다. 들어가야 할 곳은 집이고 안식처이다. 시인은 도시에서 편히 몸을 눕히고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잃어버렸다. 시인은 귀향을 결심한다. 고향에 돌아감으로써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한 것이다. 물론 고향도 예전의 모습은 아니다. "시골 인구가 줄어들면서 산막분교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어느 교회 연수원으로 바뀌어 아예 폐교가 되어 버린 교정"(「산막초등학교 제4회 동창회」), "보고 싶은 얼굴들/ 모두 떠난 고향엔/ 가을이 저 홀로 깊어 가는데"(「고향」)라는 표현처럼 어릴 때 다니던 학교가 폐교될 정도로 이미 많은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났다. 그래도 시인은 "먼지 자욱한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오길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고향에 돌아와 한 10년은 회춘한 듯" (「밤꽃 피는 유월에」) 하다고 한다.
"아, 오길 잘했다 정말 참 잘했다" 말할 수 있는, 그곳이 바로 고향이고 그 고향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시인은 어머니를 친근하게 "엄니"라고 부른다. 아마 '엄니'야말로 우리가 비루하고 누추한 삶을 견디고 이겨내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지나온 길 어려웠던 시절들을"(「길 위에서」) 지나서 가 닿아야 할 한 지점이 아닐까.
이까짓 거 귀찮기만 하지 콩기름 먹는 게 더 낫겠다
노루 고라니가 다 뜯어 먹어서 콩은 안 돼
상범이네 농사지을 때는 고구마 심어 먹었는데 고구마나 심을까?
고구마 심어서 멧돼지 좋은 일만 시키려고?
들깨는 짐승을 안 타니까 이나마 해먹는 거잖아
엄니와 나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지지굴대면서 들깨를 털다가도
비 오잖아?
갑바 위로 쏟아지는 들깨 떨어지는 소리가 빗방울 소리 같았는데
-「들깨 타작」 부분
들깨를 터는 어머니와 아들(시인)의 대화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어머니는 들기름이라도 짜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세상의 여느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자식들만 바라고 우직하게 일을 하며 고향을 지켜 오신 어머니다. 이러한 어머니에 대해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이다. "여위어 가는 몸에/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어머니의 기억이/ 갈수록 춥고 외롭습니다"(「낙엽이 휘날릴 때」), "나 같은 건달 농사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어머니가 지으시는 농사일을/ 곁에서 거드는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폐농」) 이러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은 "팽팽하던 기억의 끈이 흐트러질 때마다/ 혼자된 아들은 불안하다."(「울 엄니」)처럼, 불안감으로 나타난다. 고향을 지탱하는 것 중 하나는 '어머니의 기억'이다. 공유된 기억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기억을 통해 어머니와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이 불안해하는 것은 "기억의 끈이 흐트러"지는 어머니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에게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세요"(「낙엽이 휘날릴 때」)라고 권한다. 삶을 뒤돌아본다는 것은 시인과 어머니와 함께 기억을 더듬고 복원하는 일이다. 함께한 시간을 더 견고히 하는 일이다. 얼마큼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다가올 시간을 '불안'하지 않게 맞이하는 일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이 이제 좌표의 한 점이 되는 일이다.
시인의 시 가운데 두드러진 점은 이른바 '목소리'가 담긴 시가 다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를 통해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함의가 담긴 시를 말한다. 육이오 때 노근리 주민의 학살을 다룬 시 「노근리, 그해 여름」이나 공권력에 의한 친구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를 표현하는「거문도」,「헌화」 같은 시가 그 예이다. 하지만 꼭 무슨 주의나 무슨 이념이나 무슨 운동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불평등한 곳으로 본다.
보자기에 덮인 저녁 밥상머리
남편을 기다리는 텔레비전 뉴스 속으로
오늘도 가로등 희미한 골목을 오르는
걸레처럼 후줄근한 사내의 노동
축 늘어진 어깨 덜렁거리는 시계추는
먹이사슬 고리의 어디쯤에 해당할까
노동자 농민 위에 화이트칼라 있고
반장 대리 과장 부장 끝이 없는데
맨 밑바닥 더 내려갈 것도 없는
늘 모자란 남편의 월급봉투
장관급 국회의원들 억억억 챙겨 먹고
차관급 검찰 경찰이 억억을 긁어먹으면
그 아랫것들 수억씩 남겨 먹는데
이 땅의 송충이 혹은 메뚜기나 다름없는
남편과 그 식구들은 저녁밥을 먹는다
노동과 한숨에 찌든 땀방울을 먹는다
- 「자본의 굴레4」 부분
메뚜기는 풀을 먹고, 개구리는 메뚜기를 먹고, 새는 개구리를 먹고, 그리고 맨 마지막엔 인간이 있다. 인간이야말로 풀에서 악어와 고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최상위 포식자이다. 이것을 인간 사회로 환원한다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는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와 농민이 있고, 그 위에 화이트칼라(화이트칼라에도 계층이 있다), 맨 위에는 고관대작과 같은 정치꾼이 있다. 노동자들이 "한숨에 찌든 땀방울"을 먹는다면, 이들은 먹이사슬 위에 군림하면서 아래층을 괴롭혀서 긁어낸다. 이러한 포식과 피식의 권력 행태를 시인은 "연속극보다 재미있는 꼭두각시 정치 놀음/ 썩을 대로 썩고 곪을 대로 곪은 권력과 자본"(「따뜻한 겨울」)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수직적인 계층만이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같은 계층끼리도 서로 속이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자유와 평등, 평화와 번영"(「양키 고 홈」)의 세상을 꿈꾼다. 자유와 평등이야말로 삶을 삶답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방침이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을 저해하는 세력, 약한 자를 괴롭히고 억압하며 이용하려는 세력에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것을 국가 범위로 확대한다면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이다. 시리아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다 귀국한다는 미 여군이 사실은 보이스 피싱의 주범이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는 시에는 미국에 대한 시인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가는 데마다 전쟁으로 무기 팔아먹기에 바쁘고/ 주둔비 협정에 돈 받아 챙기기에 바쁘고/ 죄 없는 무수한 양민들 학살하고/ 식민지 국가를 건설하기에 바쁘다"(「양키 고 홈」) 반면 제국주의 세력에 억압받았던 이력이 있거나 그로 인해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과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토고, 발음만 해도 토할 것처럼 슬픈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 토고
수백 년 전 그들의 조상, 그들의 부족들
근대 서구 제국의 노예로 붙잡혀 팔려가고
수백 년 식민지의 아픔과 내전을 겪은 그들
기아와 질병과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대개는 원시의 자연과 야생의 대륙을 꿈꾸지만
황폐한 가뭄과 기근으로 아이들 죽어갔다
- 「토고의 꿈」 부분
제국주의 세력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빈곤과 전쟁의 씨앗을 퍼뜨리고, 우리나라에는 분단의 비극을 심어 놓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의 가장 크고 소중한 목표로 통일을 제시한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드론을 날려보자/ 통일의 꿈과 희망을 띄워보자."(「드론」)는 표현처럼 통일은 시인의, 아니, 우리의 꿈과 희망이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화창한 봄날
우리는 아침 일찍 관광버스를 타고
2박 3일쯤 백두산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관광버스는 노래방 기계 뽕짝을 틀어 놓고
얼씨구, 지화자 좋다
버스가 흔들리도록 어깨춤을 추면서
아침부터 몇 병이고 소주병을 깔 것이다
- 「시가 꿈꾸는 세상」 부분
통일된 세상은 누구나 꿈꾸는 대동 세상일 것이다. "얼씨구, 지화자 좋다/ 버스가 흔들리도록 어깨춤을 추"는 세상이고, "어깨를 서로 부둥켜안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놓아 부"르는 세상이다. 다소 멋쩍어 보이지만 실제 통일이 된다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춤과 노래는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행위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이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으며 일상에서 노래를 즐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얼씨구 지화자'는 우리 민족이 흥을 표현하는 몸의 소리이다. 아마 정치라는 것은 민중들로부터 춤과 노래를 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함포고복'이란 말처럼 기분이 좋아 자기 몸을 북 삼아 두드리는 일, 몸이 스스로 춤추고 흥이 나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일, 이것이 시인이 꿈꾸는 자유와 평등의 세계, 평화와 번영의 세계, 그리고 통일된 세상일 것이다.
포식자가 넘쳐나는 냉정한 자본의 세계에서 시인들, 예술가들은 종종 실패를 경험한다. 고향에 돌아오기 전의 생활이 여의찮았음은 「거울을 보며」,「알콜 중독」,「담배」 같은 시에서 드러난다. 시인은 그것을 "한없이 느려터진 나의 게으름"과 "도무지 실천하지 않는 나의 무력감"(「반성」)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국제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한 경험을 쓴 「인천국제공항에서」를 보면 오히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선의가 배반당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이스 피싱을 잡으러 왔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경찰관이 나에게 충고했다 아직도 보이스 피싱을 믿고 계시잖아요 실제로 그 시리아인은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인천국제공항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실제 있는 사람처럼 속여넘기는 세상, 도처에 낚고 낚이는 '피싱'이 넘쳐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시골 출신의 순박한 시인은 상처 받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세상을 낙관한다. 올곧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이 땅의 뭉글게 닳아빠진 것들을/ 날카롭게 벼려서 날 세우"(「대장장이의 노래」)기를 바란다. 시집의 제목이 "따뜻한 겨울"인 것도 이러한 낙관의 표현이다.
봄은 겨울 속에서 온다
꽝꽝 얼어붙었던 저수지 얼음장 녹이고
어두운 겨울의 둥지 속에서
파란 무 싹이 자라고
지난겨울 동면에 들었던 개구리들
빗소리에 놀라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어떤 씨앗들은 겨울을 나지 않으면
새싹을 키우지도 못한다지
혹독한 겨울의 어두웠던 밤들
쓰라린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자는
따뜻한 봄날 한 줌 햇살의
기쁨과 고마움을 모른다지
-「우수 경칩 지나」 부분
정말, "봄은 겨울 속에서 온다" 씨앗에 춘화처리를 해야 싹이 튼다는 사실은 고통과 시련이 우리 삶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함을 나타낸다. 겨울을 경험해야 "따뜻한 봄날 한 줌 햇살의/ 기쁨과 고마움을" 느끼고 얼음의 시간을 견뎌내야 봄바람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듯이, "쓰라린 고통"은 오히려 살아있음의 고마움을 알게 하고 살고 싶다는 의지를 북돋운다.
사람들이 날마다 건져 올리는
하루분의 희망이나 행복은 결코
월척이 넘는 대어만은 아니리라
한 마리씩 빙판 위로 올라와 파닥이는
작고 눈부신 빙어들
아마도 이 얼음장 밑에는
수천수만의 빙어 떼가
은빛의 광맥을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
-「빙어 낚시」 부분
시인은 사람들이 건져 올리는 희망이나 행복을 "월척이 넘는 대어"가 아니라, "작고 눈부신 빙어" 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 이것이 시인이 꿈꾸는 삶일 것이다. 대어는 작은 고기를 잡아먹는 탐욕스러운 포식자이다.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그 고기는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홀로 지낸다. 빙어는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무리를 이룬다. 비록 약하지만, 무리를 지어 대어를 물리치며 "은빛의 광맥"을 이룬다. 혼자 사는 삶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이다."이제는 저 나무들처럼 살고 싶다"(「산불 감시원 2.」)라고 할 때 '나무들'의 삶이 그러하다. 시인은'나무'라고 하지 않고 '나무들'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무'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일 뿐이지만 이런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들이 모이면 숲을 이룬다. '나무들'은 울울한 숲이 된다. 숲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홍수를 예방하고 공기를 맑게 하며, 의식주의 재료를 숲에서 얻을 수 있다. '산림 치유'란 말이 있듯이 숲속을 걸으면 심신이 안정되고 면역력이 높아진다. 아름다운 숲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은 숲속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휴식을 취한다. 그래서 나라마다 숲을 가꾸고, 어떤 숲은 신성하게 여겨 특별히 보호하기도 한다. 더구나 숲은 못난 나무, 잘난 나무가 어울렁더울렁 함께 있다. 나무뿐 아니라 풀, 새, 바람, 햇빛과 그늘이 함께 어우러져 숲을 이룬다. 시인이 숲을 지키는 산불 감시원 일을 하게 된 것도 숲이 주는 이런 효과와 혜택, 이미지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숲은 우리를 품어주고, 휴식과 아울러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숲을 떠나 생활의 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정화된 몸과 마음으로 더 단단히, 더 사려 깊게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그 삶의 자세를 시인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로 표현한다. 아마 시인의 삶의 내력과 목표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시가 아닐까 한다.
내 손에 쥐어진 단단한 돌 하나
너는 온갖 침식과 굴곡을 거쳐
마침내 남은
차갑게 빛나는 하나의 결정이다
이름 없는 산골짜기
긴 강을 지나오면서
버려져 아무에게도 받지 못한 사랑
스스로 모가 나 정 맞춰 온 가난
어둡고 긴 세월이었다
보석도 아니고
고귀한 이상도 아닌 것이
깎이고 닳리우며 강의 밑바닥
그 인내의 고역과
단련의 아픔 속에서
단지 흐름에 맡겨진 침묵의 항변이었다
이제 일체의 비곗살 관념을 떨치고
손끝에 전해 오는 신선한 촉감
견고한 힘으로 남은
존재의 당당함이여
달려가 외쳐라
내 손에 쥐어진 한줌 돌 하나
표적을 향하여 네게 힘을 가하면
너는 내 팔을 떠나는 힘찬 무기가 된다
- 「어느 돌멩이의 외침」 전문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고 그렇게 시를 쓰는 성백술 시인이 『복숭아나무를 심다』 이후 7년 만에 2번째 시집 『따뜻한 겨울』을 냈다. 『따뜻한 겨울』은 맨얼굴, 허세를 걷어낸 '찐', 진짜, 날것의 느낌이 든다. 그것은 '질박한 진정성'이다. 질박하다는 것은 수수하고 꾸밈이 없다는 뜻이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진솔함이 바로 이 시집의 특성이다.
시인은 대학원까지 마쳤으면서 안정된 직업도 마다하고 기회의 상류사회 기웃거리지 않고 중산층의 평범한 삶도 엿보지 않고 산막리 산촌에 스며들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복숭아나무를 심고, 기회가 되면 산불감시원도 하고 때로 산촌 구판장도 운영하며 인생 깊은 밑바닥에서 시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날카로운 의식과 양심을 지니고 우리 사회 현실의 불의와 부패와 부조리를 강력히 비판하며. 이러한 시인의 애환과 아픔이 이 시집 속에는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 속에서 탄생하는 성백술의 시는 힘겨운 삶을 넘어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꿈과 희망을 전달한다. 창작하는 시 편편마다 고통과 서러움과 아픔을 잉태한 채 용기와 희망으로 반짝인다. 시인의 삶은 처절하지만 오히려 그의 작품은 깊은 산 속 약수터의 샘물처럼 시원시원하다.
2.
시인의 시에는 고향을 묘사한 시들이 많다. 그 고향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과 아울러 힘들 때 기대고 위로가 되어주는 심리적 고향을 일컫기도 한다.
홍수진 물에 돼지 떠내려오듯
헤엄쳐야만 건널 수 있던 금강천변
강 이쪽과 저쪽이 만나
하나로 어우러지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모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강변 자갈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돗자리 깔고
낚시 던지고 올갱이 잡고 물장구 치고
피서를 시작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오래된 구강 강변 자갈밭 위로
뜨거운 하루 해 습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루 몇 번 두평리를 지나온 시내버스가
다리를 건너와 구강리 종점을 돌아 나가면
성긴 다릿발 성큼성큼 건너
구강 다리가 몸을 눕힌다 그 그늘 아래
자가용과 사람들이 떼까마귀처럼 몰려들어
텐트 치고 닭 잡아먹고 삼겹살 구워 먹으며
염천 복더위를 마음껏 즐기다 간다
해질녘 두평들과 구강 강변이 만나
다래 덩쿨로 엉겨도 보고, 가끔씩
밤이면 부끄러운 교성도 들려온다
오늘도 두평들과 구강 강변 사이로
금강은 유유히 빛나며 흐르고
구강 다리가 스스로 몸을 눕힌다
- 「구강 다리에서」 전문
고향을 상징하는 구강 다리는 금강을 가로지르는 제법 큰 다리이다. 시인은 이 구강 다리에서 "돗자리 깔고/ 낚시 던지고 올갱이 잡고 물장구 치고" 놀았던 추억을 떠올린다. 이곳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떼까마귀처럼 몰려들어/ 텐트 치고 닭 잡아먹고 삼겹살 구워 먹으며/ 염천 복더위를 마음껏 즐기다"가는 평화로운 곳이다. 고향의 천변에서 여름에 주로 하던 그 물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처럼 오랜 옛날부터 그저 그렇게 해온 일이다. 구강 다리가 언제 생겼는지도 모른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 다리는 강의 양쪽을 이어주며 이쪽과 저쪽이 서로 어우러지게 할 뿐이다. 구강 다리가 주는 평화, 고향이 주는 평화는 "구강 다리가 스스로 몸을 눕힌다"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몸을 눕히는 일은 느긋함, 풍요로움, 여유, 한가함을 생각나게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히 쉬는 자세이다. 이것이 바로 고향이 주는 이미지이며, 우리 또한 고향을 찾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시인은 학업이나 직장으로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서울)에서 지낸다. 시에서 도시는 고향과 대립하는 곳으로 나타난다. 도시는 "비싼 임대료, 가스비, 전기료, 제하고 나면/ 남는 것"(「메추리집」)은 '빈손'뿐인 각박한 곳이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어두운 지하 계단을 내려"(「지하 수기」)오는 일로 하루를 마감하는 숨 막히는 곳이다. "능수능란하게 사기를 치는 장사꾼의 술수와/ 온종일 골라잡아를 외치는 억척스러움의 프로근성"이 부딪치는 곳이자 "콩나물 한 줌 값도 깎는 아귀다툼"(「자본의 굴레3」)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 도시의 속성은 「아리랑치기」란 시에서 잘 드러난다.
아득한 잠은 도시의 악령에 싸여
그는 낯선 이방의 꿈을 꾼다
따뜻한 가정의 불빛도 고향도 모두가 너무 멀리 있다
꽃잎 같은 새벽 비가 뿌린다, 그는 퍼뜩
낯선 곳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젯밤의 일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바지가 없다 핸드폰도 지갑도 열쇠도
절망적으로, 그는 신발을 챙겨 신고 팬티바람으로
집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한다 자기 집조차
잠겨 있다는 걸 꿈에도 짐작 못하면서
-「아리랑치기」 부분
술 취한 "그"를 부축하며 다정스레 말을 걸던 젊은 남녀는 그의 모든 것, 심지어 바지까지도 벗겨간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속담이 실제로 일어난 상황이다. 정직한 노동 대신 남을 속이고 등쳐먹고, 갈취하는 곳, 그래서 선의의 도움과 봉사조차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곳이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를 시인은 "악령"으로 표현하였다. 물건을 빼앗긴 것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자기 집조차/ 잠겨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랑치기를 당하여 열쇠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들어가야 할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출구가 없는 상황과 마찬가지다. 들어가야 할 곳은 집이고 안식처이다. 시인은 도시에서 편히 몸을 눕히고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잃어버렸다. 시인은 귀향을 결심한다. 고향에 돌아감으로써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한 것이다. 물론 고향도 예전의 모습은 아니다. "시골 인구가 줄어들면서 산막분교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어느 교회 연수원으로 바뀌어 아예 폐교가 되어 버린 교정"(「산막초등학교 제4회 동창회」), "보고 싶은 얼굴들/ 모두 떠난 고향엔/ 가을이 저 홀로 깊어 가는데"(「고향」)라는 표현처럼 어릴 때 다니던 학교가 폐교될 정도로 이미 많은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났다. 그래도 시인은 "먼지 자욱한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오길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고향에 돌아와 한 10년은 회춘한 듯" (「밤꽃 피는 유월에」) 하다고 한다.
"아, 오길 잘했다 정말 참 잘했다" 말할 수 있는, 그곳이 바로 고향이고 그 고향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시인은 어머니를 친근하게 "엄니"라고 부른다. 아마 '엄니'야말로 우리가 비루하고 누추한 삶을 견디고 이겨내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지나온 길 어려웠던 시절들을"(「길 위에서」) 지나서 가 닿아야 할 한 지점이 아닐까.
이까짓 거 귀찮기만 하지 콩기름 먹는 게 더 낫겠다
노루 고라니가 다 뜯어 먹어서 콩은 안 돼
상범이네 농사지을 때는 고구마 심어 먹었는데 고구마나 심을까?
고구마 심어서 멧돼지 좋은 일만 시키려고?
들깨는 짐승을 안 타니까 이나마 해먹는 거잖아
엄니와 나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지지굴대면서 들깨를 털다가도
비 오잖아?
갑바 위로 쏟아지는 들깨 떨어지는 소리가 빗방울 소리 같았는데
-「들깨 타작」 부분
들깨를 터는 어머니와 아들(시인)의 대화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어머니는 들기름이라도 짜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세상의 여느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자식들만 바라고 우직하게 일을 하며 고향을 지켜 오신 어머니다. 이러한 어머니에 대해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이다. "여위어 가는 몸에/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어머니의 기억이/ 갈수록 춥고 외롭습니다"(「낙엽이 휘날릴 때」), "나 같은 건달 농사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어머니가 지으시는 농사일을/ 곁에서 거드는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폐농」) 이러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은 "팽팽하던 기억의 끈이 흐트러질 때마다/ 혼자된 아들은 불안하다."(「울 엄니」)처럼, 불안감으로 나타난다. 고향을 지탱하는 것 중 하나는 '어머니의 기억'이다. 공유된 기억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기억을 통해 어머니와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이 불안해하는 것은 "기억의 끈이 흐트러"지는 어머니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에게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세요"(「낙엽이 휘날릴 때」)라고 권한다. 삶을 뒤돌아본다는 것은 시인과 어머니와 함께 기억을 더듬고 복원하는 일이다. 함께한 시간을 더 견고히 하는 일이다. 얼마큼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다가올 시간을 '불안'하지 않게 맞이하는 일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이 이제 좌표의 한 점이 되는 일이다.
시인의 시 가운데 두드러진 점은 이른바 '목소리'가 담긴 시가 다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를 통해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함의가 담긴 시를 말한다. 육이오 때 노근리 주민의 학살을 다룬 시 「노근리, 그해 여름」이나 공권력에 의한 친구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를 표현하는「거문도」,「헌화」 같은 시가 그 예이다. 하지만 꼭 무슨 주의나 무슨 이념이나 무슨 운동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불평등한 곳으로 본다.
보자기에 덮인 저녁 밥상머리
남편을 기다리는 텔레비전 뉴스 속으로
오늘도 가로등 희미한 골목을 오르는
걸레처럼 후줄근한 사내의 노동
축 늘어진 어깨 덜렁거리는 시계추는
먹이사슬 고리의 어디쯤에 해당할까
노동자 농민 위에 화이트칼라 있고
반장 대리 과장 부장 끝이 없는데
맨 밑바닥 더 내려갈 것도 없는
늘 모자란 남편의 월급봉투
장관급 국회의원들 억억억 챙겨 먹고
차관급 검찰 경찰이 억억을 긁어먹으면
그 아랫것들 수억씩 남겨 먹는데
이 땅의 송충이 혹은 메뚜기나 다름없는
남편과 그 식구들은 저녁밥을 먹는다
노동과 한숨에 찌든 땀방울을 먹는다
- 「자본의 굴레4」 부분
메뚜기는 풀을 먹고, 개구리는 메뚜기를 먹고, 새는 개구리를 먹고, 그리고 맨 마지막엔 인간이 있다. 인간이야말로 풀에서 악어와 고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최상위 포식자이다. 이것을 인간 사회로 환원한다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는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와 농민이 있고, 그 위에 화이트칼라(화이트칼라에도 계층이 있다), 맨 위에는 고관대작과 같은 정치꾼이 있다. 노동자들이 "한숨에 찌든 땀방울"을 먹는다면, 이들은 먹이사슬 위에 군림하면서 아래층을 괴롭혀서 긁어낸다. 이러한 포식과 피식의 권력 행태를 시인은 "연속극보다 재미있는 꼭두각시 정치 놀음/ 썩을 대로 썩고 곪을 대로 곪은 권력과 자본"(「따뜻한 겨울」)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수직적인 계층만이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같은 계층끼리도 서로 속이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자유와 평등, 평화와 번영"(「양키 고 홈」)의 세상을 꿈꾼다. 자유와 평등이야말로 삶을 삶답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방침이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을 저해하는 세력, 약한 자를 괴롭히고 억압하며 이용하려는 세력에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것을 국가 범위로 확대한다면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이다. 시리아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다 귀국한다는 미 여군이 사실은 보이스 피싱의 주범이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는 시에는 미국에 대한 시인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가는 데마다 전쟁으로 무기 팔아먹기에 바쁘고/ 주둔비 협정에 돈 받아 챙기기에 바쁘고/ 죄 없는 무수한 양민들 학살하고/ 식민지 국가를 건설하기에 바쁘다"(「양키 고 홈」) 반면 제국주의 세력에 억압받았던 이력이 있거나 그로 인해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과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토고, 발음만 해도 토할 것처럼 슬픈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 토고
수백 년 전 그들의 조상, 그들의 부족들
근대 서구 제국의 노예로 붙잡혀 팔려가고
수백 년 식민지의 아픔과 내전을 겪은 그들
기아와 질병과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대개는 원시의 자연과 야생의 대륙을 꿈꾸지만
황폐한 가뭄과 기근으로 아이들 죽어갔다
- 「토고의 꿈」 부분
제국주의 세력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빈곤과 전쟁의 씨앗을 퍼뜨리고, 우리나라에는 분단의 비극을 심어 놓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의 가장 크고 소중한 목표로 통일을 제시한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드론을 날려보자/ 통일의 꿈과 희망을 띄워보자."(「드론」)는 표현처럼 통일은 시인의, 아니, 우리의 꿈과 희망이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화창한 봄날
우리는 아침 일찍 관광버스를 타고
2박 3일쯤 백두산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관광버스는 노래방 기계 뽕짝을 틀어 놓고
얼씨구, 지화자 좋다
버스가 흔들리도록 어깨춤을 추면서
아침부터 몇 병이고 소주병을 깔 것이다
- 「시가 꿈꾸는 세상」 부분
통일된 세상은 누구나 꿈꾸는 대동 세상일 것이다. "얼씨구, 지화자 좋다/ 버스가 흔들리도록 어깨춤을 추"는 세상이고, "어깨를 서로 부둥켜안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놓아 부"르는 세상이다. 다소 멋쩍어 보이지만 실제 통일이 된다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춤과 노래는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행위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이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으며 일상에서 노래를 즐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얼씨구 지화자'는 우리 민족이 흥을 표현하는 몸의 소리이다. 아마 정치라는 것은 민중들로부터 춤과 노래를 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함포고복'이란 말처럼 기분이 좋아 자기 몸을 북 삼아 두드리는 일, 몸이 스스로 춤추고 흥이 나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일, 이것이 시인이 꿈꾸는 자유와 평등의 세계, 평화와 번영의 세계, 그리고 통일된 세상일 것이다.
포식자가 넘쳐나는 냉정한 자본의 세계에서 시인들, 예술가들은 종종 실패를 경험한다. 고향에 돌아오기 전의 생활이 여의찮았음은 「거울을 보며」,「알콜 중독」,「담배」 같은 시에서 드러난다. 시인은 그것을 "한없이 느려터진 나의 게으름"과 "도무지 실천하지 않는 나의 무력감"(「반성」)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국제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한 경험을 쓴 「인천국제공항에서」를 보면 오히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선의가 배반당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이스 피싱을 잡으러 왔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경찰관이 나에게 충고했다 아직도 보이스 피싱을 믿고 계시잖아요 실제로 그 시리아인은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인천국제공항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실제 있는 사람처럼 속여넘기는 세상, 도처에 낚고 낚이는 '피싱'이 넘쳐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시골 출신의 순박한 시인은 상처 받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세상을 낙관한다. 올곧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이 땅의 뭉글게 닳아빠진 것들을/ 날카롭게 벼려서 날 세우"(「대장장이의 노래」)기를 바란다. 시집의 제목이 "따뜻한 겨울"인 것도 이러한 낙관의 표현이다.
봄은 겨울 속에서 온다
꽝꽝 얼어붙었던 저수지 얼음장 녹이고
어두운 겨울의 둥지 속에서
파란 무 싹이 자라고
지난겨울 동면에 들었던 개구리들
빗소리에 놀라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어떤 씨앗들은 겨울을 나지 않으면
새싹을 키우지도 못한다지
혹독한 겨울의 어두웠던 밤들
쓰라린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자는
따뜻한 봄날 한 줌 햇살의
기쁨과 고마움을 모른다지
-「우수 경칩 지나」 부분
정말, "봄은 겨울 속에서 온다" 씨앗에 춘화처리를 해야 싹이 튼다는 사실은 고통과 시련이 우리 삶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함을 나타낸다. 겨울을 경험해야 "따뜻한 봄날 한 줌 햇살의/ 기쁨과 고마움을" 느끼고 얼음의 시간을 견뎌내야 봄바람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듯이, "쓰라린 고통"은 오히려 살아있음의 고마움을 알게 하고 살고 싶다는 의지를 북돋운다.
사람들이 날마다 건져 올리는
하루분의 희망이나 행복은 결코
월척이 넘는 대어만은 아니리라
한 마리씩 빙판 위로 올라와 파닥이는
작고 눈부신 빙어들
아마도 이 얼음장 밑에는
수천수만의 빙어 떼가
은빛의 광맥을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
-「빙어 낚시」 부분
시인은 사람들이 건져 올리는 희망이나 행복을 "월척이 넘는 대어"가 아니라, "작고 눈부신 빙어" 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 이것이 시인이 꿈꾸는 삶일 것이다. 대어는 작은 고기를 잡아먹는 탐욕스러운 포식자이다.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그 고기는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홀로 지낸다. 빙어는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무리를 이룬다. 비록 약하지만, 무리를 지어 대어를 물리치며 "은빛의 광맥"을 이룬다. 혼자 사는 삶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이다."이제는 저 나무들처럼 살고 싶다"(「산불 감시원 2.」)라고 할 때 '나무들'의 삶이 그러하다. 시인은'나무'라고 하지 않고 '나무들'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무'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일 뿐이지만 이런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들이 모이면 숲을 이룬다. '나무들'은 울울한 숲이 된다. 숲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홍수를 예방하고 공기를 맑게 하며, 의식주의 재료를 숲에서 얻을 수 있다. '산림 치유'란 말이 있듯이 숲속을 걸으면 심신이 안정되고 면역력이 높아진다. 아름다운 숲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은 숲속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휴식을 취한다. 그래서 나라마다 숲을 가꾸고, 어떤 숲은 신성하게 여겨 특별히 보호하기도 한다. 더구나 숲은 못난 나무, 잘난 나무가 어울렁더울렁 함께 있다. 나무뿐 아니라 풀, 새, 바람, 햇빛과 그늘이 함께 어우러져 숲을 이룬다. 시인이 숲을 지키는 산불 감시원 일을 하게 된 것도 숲이 주는 이런 효과와 혜택, 이미지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숲은 우리를 품어주고, 휴식과 아울러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숲을 떠나 생활의 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정화된 몸과 마음으로 더 단단히, 더 사려 깊게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그 삶의 자세를 시인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로 표현한다. 아마 시인의 삶의 내력과 목표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시가 아닐까 한다.
내 손에 쥐어진 단단한 돌 하나
너는 온갖 침식과 굴곡을 거쳐
마침내 남은
차갑게 빛나는 하나의 결정이다
이름 없는 산골짜기
긴 강을 지나오면서
버려져 아무에게도 받지 못한 사랑
스스로 모가 나 정 맞춰 온 가난
어둡고 긴 세월이었다
보석도 아니고
고귀한 이상도 아닌 것이
깎이고 닳리우며 강의 밑바닥
그 인내의 고역과
단련의 아픔 속에서
단지 흐름에 맡겨진 침묵의 항변이었다
이제 일체의 비곗살 관념을 떨치고
손끝에 전해 오는 신선한 촉감
견고한 힘으로 남은
존재의 당당함이여
달려가 외쳐라
내 손에 쥐어진 한줌 돌 하나
표적을 향하여 네게 힘을 가하면
너는 내 팔을 떠나는 힘찬 무기가 된다
- 「어느 돌멩이의 외침」 전문
목차
목차
시인의 말
이바위산의 멧돼지들
구강 다리에서
거울을 보며
산불
시가 꿈꾸는 세상
거문도
알콜 중독
이발을 하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인천국제공항에서
산막초등학교 제4회 동창회
도청
양키 고 홈
낙엽이 휘날릴 때
들깨 타작
종합인력
천마령을 넘어서
담배
복날
따뜻한 겨울
폐농
울엄니
우수 경칩 지나
겨울 같지도 않은 겨울이
벌초
반성
제부도
백구
노근리, 그해 여름
산불감시원 2
드론
쌍둥이
어머니의 남자
봄바람 꽃샘바람
고향
밤꽃 피는 유월에
꽃피는 5월
길 위에서
정상 부근
메추리집
아리랑치기
빙어 낚시
5월의 신부
붉은 악마
베트남 여자
꽃호박
자본의 굴레 3
자본의 굴레 4
헌화
겨울 교단
둔치에서
남녘의 편지
지하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
겨울제
토고의 꿈
대장장이의 노래
미아리의 밤
미아리의 밤 2
친구의 죽음
파도의 시
해설
시간을 견디는 질박한 진정성ㆍ송은숙(시인)
이바위산의 멧돼지들
구강 다리에서
거울을 보며
산불
시가 꿈꾸는 세상
거문도
알콜 중독
이발을 하면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인천국제공항에서
산막초등학교 제4회 동창회
도청
양키 고 홈
낙엽이 휘날릴 때
들깨 타작
종합인력
천마령을 넘어서
담배
복날
따뜻한 겨울
폐농
울엄니
우수 경칩 지나
겨울 같지도 않은 겨울이
벌초
반성
제부도
백구
노근리, 그해 여름
산불감시원 2
드론
쌍둥이
어머니의 남자
봄바람 꽃샘바람
고향
밤꽃 피는 유월에
꽃피는 5월
길 위에서
정상 부근
메추리집
아리랑치기
빙어 낚시
5월의 신부
붉은 악마
베트남 여자
꽃호박
자본의 굴레 3
자본의 굴레 4
헌화
겨울 교단
둔치에서
남녘의 편지
지하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
겨울제
토고의 꿈
대장장이의 노래
미아리의 밤
미아리의 밤 2
친구의 죽음
파도의 시
해설
시간을 견디는 질박한 진정성ㆍ송은숙(시인)
저자
저자
성백술
1961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4년 『시에티카』로등단하여 시집으로 『복숭아나무를 심다』가 있으며 논저 『창작방법론의 전형성에 대한 연구』가 있다. 현재 고향 영동에서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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