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응 거부선언(파도문고)
학살의 시대를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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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정직한 말들이기에,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질문
고병권, 홍은전의 강력 추천도서
지금 이 시대 진보들이 읽어 볼만한 책
‘이 책을 읽고 불편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잠시 교정지를 미뤄두고 생각한다. 이 책의 작가 이하루 씨를 처음 본 것은 2021년 여름 우연히 열어본 어느 강연 동영상에서다. 강연이 시작되자 무척 작고 마른 체구의 청년이 등장했다. 그는 더듬더듬 떨리는 음성으로 “나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썰렁함에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별 기대 없이 듣다가 어느새 나는 본래 앉아 있던 자세를 가다듬으며 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몇몇 장면에서는 주책없이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동이었다.
『사회적응 거부선언: 학살의 시대를 사는 법』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음악가이며 동물해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하루의 여행 산문집이다. 그는 2014년 한국을 떠나 2021년 귀국할 때까지 60여 개국 4만 4천 킬로미터를 히치하이킹하며 걸었다. 만약 이 책에서 20대 청년의 해외여행이 가진 낭만을 기대한다면, 곧장 책을 덮어도 좋다. 그의 유랑은 남달랐다. 무척 대담하고 거칠었으며 아름다웠다. 그는 호주에서 덤스터다이빙(쓰레기통 뒤지기), 그리스에서 난민 인권 활동, 이스라엘에서 반성폭력 활동, 유럽 곳곳에서 레인보우 개더링, 미국과 대만 등지에서 동물해방 활동에 참여했다. 우리가 무심결에 버리는 음식들을 그러모아 재활용하고,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국경 바깥의 사람들을 돌보았으며, 성폭력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았던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피의자를 여론 심판에 서게 했고,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 가장 억압받는 생명인 ‘축산 동물’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일에 앞장섰다.
철학자 고병권은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이하루의 여정을 ‘정직하게 걷는 길’이라는 말로 일갈했다.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단도직입으로 한국을 떠나고 잠시 머무르고 다시 짐을 꾸리는 와중에 조마조마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기존의 사회가 가진 편견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작가는 애써 우회하거나 말을 돌려서 상황을 무마하지 않는다. 그의 단호하고도 또렷한, 너무도 정직하여 말문이 막혀버리는 질문들은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함과 통쾌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의 지혜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언뜻 무일푼의 배낭여행기 정도에서만 머무를 수도 있었던 어느 청년의 기록은, 현대 사회가 지닌 모순을 순서대로 맞닥뜨리고 무너뜨리는 격렬한 쟁론과 연대의 르포가 되었다.
작가의 여정 속에는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처음 노숙을 할 때 곁으로 다가온 당나귀, 노르웨이 사미족의 순록, 이스라엘 키부츠의 소, 미국의 초국적 축산기업 축사의 돼지와 칠면조, 이탈리아 알프스의 꿀벌,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돼지, 하와이와 대만의 닭… 이 수많은 동물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의 식량이 되기 위해 죽음을 코앞에 둔 상태였고, 그는 그 동물들 각각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였음을 생생히 기록했다. 그는 비록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그 동물들이 살아 숨쉬도록, 사진과 영상과 글로 기록했다.
이하루는 진보와 보수 이데올로기로 양분된 이 세계에 여봐란 듯이, 기존 기득권들의 위선을 까발린다. 그가 장면 장면마다 던지는 질문들은, 이 세계가 오랫동안 암암리에 맺어온 모종의 합의들-자유, 민주, 평화-이 권력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다. 일례로 유럽의 어느 진보적 잡지 모임에서 ‘평화로운 논의’를 강요하며 어떤 문제제기도 묵살하려는 이들을 향해 또렷이 ‘이것은 왜 학살이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종종 곱씹게 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의 끝에서 그는 동물해방이라는 이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캐치프레이즈 아래에 섰다.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작업이 어쩌면 2020년대 한국사회의 진보 세력, 좀 더 넓게 보면 전 세계 진보 진영이 처한 답보 상태를 깰 수 있는 하나의 주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진보 진영은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사이 인권이라는 테제는 갈기갈기 여러 가닥으로 찢겨, 특히 2010년대 페미니즘과 백래시, 동물해방운동의 직접행동 출연(대표적으로 전 세계적인 동물 구조 활동 등)으로 그 갈등이 더욱 크게 분출했다. 하지만 진보 진영들은 이 같은 변화를 여전히 하찮은 주변부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는 그저 불편한 진실들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나열되어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을 외면하고 안온한 삶을 유지하려 하기보다 더욱 급진적인 생각과 행동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이 위선이 가득한 사회에 적응하기보다 ‘거부’와 ‘반대’의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고, 이 작고 마른 체구의 청년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다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이 책을 읽고 불편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하지만 독자들이 느낄 법한 불편함은 정확하게는 마음속 깊이 자리한 ‘부끄러움’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철학자 고병권이 다음과 같이 썼던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하루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뒤로 갈수록 힘에 겨웠다. 원고를 읽다가 여러 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여야 했다. 내 안의 누군가가 그만가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 같았다. 이 정직한 여정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예감하며 내 치부가 드러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수많은 차별과 폭력의 모티브를 제공한 곳이라며 가리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너무나 정직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책 9면) 이하루의 정직한 질문들에,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때다.
이 책 『사회적응 거부선언』은 온다프레스의 연속기획 ‘파도문고’의 첫 번째 도서다. 파도문고는 전 지구적인 생태, 평등, 노동의 위기에 맞서는 작은 파도 같은 이야기들의 기획 시리즈다. 이 시대의 급진적인 생각들, 금기가 된 행동들이 어떤 때에는 잔잔하게, 어떤 때에는 거세게 몰아칠 것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이 결국에는 우리를 살릴 것이다. (근간으로 ‘생전의 장례식: 현대사회의 죽음에 관한 고찰’과 ‘모두의 성찬: 성소수자와 교회’가 준비 중이다.)
고병권, 홍은전의 강력 추천도서
지금 이 시대 진보들이 읽어 볼만한 책
‘이 책을 읽고 불편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잠시 교정지를 미뤄두고 생각한다. 이 책의 작가 이하루 씨를 처음 본 것은 2021년 여름 우연히 열어본 어느 강연 동영상에서다. 강연이 시작되자 무척 작고 마른 체구의 청년이 등장했다. 그는 더듬더듬 떨리는 음성으로 “나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썰렁함에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별 기대 없이 듣다가 어느새 나는 본래 앉아 있던 자세를 가다듬으며 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몇몇 장면에서는 주책없이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동이었다.
『사회적응 거부선언: 학살의 시대를 사는 법』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음악가이며 동물해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하루의 여행 산문집이다. 그는 2014년 한국을 떠나 2021년 귀국할 때까지 60여 개국 4만 4천 킬로미터를 히치하이킹하며 걸었다. 만약 이 책에서 20대 청년의 해외여행이 가진 낭만을 기대한다면, 곧장 책을 덮어도 좋다. 그의 유랑은 남달랐다. 무척 대담하고 거칠었으며 아름다웠다. 그는 호주에서 덤스터다이빙(쓰레기통 뒤지기), 그리스에서 난민 인권 활동, 이스라엘에서 반성폭력 활동, 유럽 곳곳에서 레인보우 개더링, 미국과 대만 등지에서 동물해방 활동에 참여했다. 우리가 무심결에 버리는 음식들을 그러모아 재활용하고,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국경 바깥의 사람들을 돌보았으며, 성폭력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았던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피의자를 여론 심판에 서게 했고,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 가장 억압받는 생명인 ‘축산 동물’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일에 앞장섰다.
철학자 고병권은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이하루의 여정을 ‘정직하게 걷는 길’이라는 말로 일갈했다.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단도직입으로 한국을 떠나고 잠시 머무르고 다시 짐을 꾸리는 와중에 조마조마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기존의 사회가 가진 편견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작가는 애써 우회하거나 말을 돌려서 상황을 무마하지 않는다. 그의 단호하고도 또렷한, 너무도 정직하여 말문이 막혀버리는 질문들은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함과 통쾌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의 지혜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언뜻 무일푼의 배낭여행기 정도에서만 머무를 수도 있었던 어느 청년의 기록은, 현대 사회가 지닌 모순을 순서대로 맞닥뜨리고 무너뜨리는 격렬한 쟁론과 연대의 르포가 되었다.
작가의 여정 속에는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처음 노숙을 할 때 곁으로 다가온 당나귀, 노르웨이 사미족의 순록, 이스라엘 키부츠의 소, 미국의 초국적 축산기업 축사의 돼지와 칠면조, 이탈리아 알프스의 꿀벌,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돼지, 하와이와 대만의 닭… 이 수많은 동물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의 식량이 되기 위해 죽음을 코앞에 둔 상태였고, 그는 그 동물들 각각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였음을 생생히 기록했다. 그는 비록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그 동물들이 살아 숨쉬도록, 사진과 영상과 글로 기록했다.
이하루는 진보와 보수 이데올로기로 양분된 이 세계에 여봐란 듯이, 기존 기득권들의 위선을 까발린다. 그가 장면 장면마다 던지는 질문들은, 이 세계가 오랫동안 암암리에 맺어온 모종의 합의들-자유, 민주, 평화-이 권력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다. 일례로 유럽의 어느 진보적 잡지 모임에서 ‘평화로운 논의’를 강요하며 어떤 문제제기도 묵살하려는 이들을 향해 또렷이 ‘이것은 왜 학살이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종종 곱씹게 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의 끝에서 그는 동물해방이라는 이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캐치프레이즈 아래에 섰다.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작업이 어쩌면 2020년대 한국사회의 진보 세력, 좀 더 넓게 보면 전 세계 진보 진영이 처한 답보 상태를 깰 수 있는 하나의 주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진보 진영은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사이 인권이라는 테제는 갈기갈기 여러 가닥으로 찢겨, 특히 2010년대 페미니즘과 백래시, 동물해방운동의 직접행동 출연(대표적으로 전 세계적인 동물 구조 활동 등)으로 그 갈등이 더욱 크게 분출했다. 하지만 진보 진영들은 이 같은 변화를 여전히 하찮은 주변부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는 그저 불편한 진실들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나열되어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을 외면하고 안온한 삶을 유지하려 하기보다 더욱 급진적인 생각과 행동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이 위선이 가득한 사회에 적응하기보다 ‘거부’와 ‘반대’의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고, 이 작고 마른 체구의 청년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다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이 책을 읽고 불편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하지만 독자들이 느낄 법한 불편함은 정확하게는 마음속 깊이 자리한 ‘부끄러움’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철학자 고병권이 다음과 같이 썼던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하루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뒤로 갈수록 힘에 겨웠다. 원고를 읽다가 여러 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여야 했다. 내 안의 누군가가 그만가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 같았다. 이 정직한 여정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예감하며 내 치부가 드러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수많은 차별과 폭력의 모티브를 제공한 곳이라며 가리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너무나 정직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책 9면) 이하루의 정직한 질문들에,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때다.
이 책 『사회적응 거부선언』은 온다프레스의 연속기획 ‘파도문고’의 첫 번째 도서다. 파도문고는 전 지구적인 생태, 평등, 노동의 위기에 맞서는 작은 파도 같은 이야기들의 기획 시리즈다. 이 시대의 급진적인 생각들, 금기가 된 행동들이 어떤 때에는 잔잔하게, 어떤 때에는 거세게 몰아칠 것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이 결국에는 우리를 살릴 것이다. (근간으로 ‘생전의 장례식: 현대사회의 죽음에 관한 고찰’과 ‘모두의 성찬: 성소수자와 교회’가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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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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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이어서
1년 전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하루는 〈Planet A〉의 감독이었다. 〈Planet A〉는 장애인, 난민, 성노동자 등의 인간 동물과, 소, 돼지, 닭 등의 비인간 동물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고발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담은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 내 발언 영상을 짧게 넣고 싶다고 했다. 당시 외국인 보호소에서 자행된 고문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행한 발언이었다. 나는 인간수용시설로서 외국인 보호소와 장애인 시설에서 자행된 감금과 폭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언급했다.
하루는 내 발언을 전체 열다섯 가지 이야기를 연결하는 고리들 중 하나로 삼았다. 그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많은 것을 보았고 그만큼 많이 아파했던 것 같다. 자신은 많은 일을 겪었기에 좀처럼 울지 않는다면서도 곧잘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어디까지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의 절박성에 닿지는 못했다.
어느 날 하루는 내가 있는 '읽기의 집'을 찾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행기 같은 글이라고 했다. 6년 가까이 여기저기 다녔다고. 처음에는 배낭여행 같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가 파편적으로 들려준 이야기들은 내가 아는 여행과 너무 달랐다. 단어들부터 낯설었다. 나는 그에게 식당이나 마트의 쓰레기통에서 식자재를 구하는 덤스터 다이빙에 대해 들었고, 도시 문명을 떠나 돈이나 전자기기 없이 숲속에서 한 달을 지내는 레인보우 개더링에 대해 들었다. 또 숲이나 바닷가, 공원에서 침낭을 깔거나 해먹을 걸고 그냥 잤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집안일을 해주거나 베이비시터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권을 빼앗긴 채 수용시설에 갇혀 지낸 이야기도 들었고, 미국 어딘가 있다는 거대한 도살장을 찾아간 이야기도 들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니었고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흘러나온 파편들이었다. 이 파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는 나는 이것들을 제멋대로 끼워 맞추고는 집시나 히피의 정처 없는 방랑기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완성한 원고를 읽었다. 시작하는 문장이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알 수 없는 상처를 지닌 문장이었다. 그는 출국 이틀 전에 엄마에게 통보하고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불안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여정. 그러나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씩씩하게 방랑자의 삶을 살아냈다. 돈 없이 살아가는 기술들을 익히고 거침없이 사람들을 사귀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는 금세 강해졌고 그의 삶은 재밌어 보였으며, 그가 찾아간 곳들은 아름다웠다. 길 위의 사람들은 손을 치켜든 그에게 기꺼이 옆자리를 내주었고 친구를 소개해주었으며 가족이 되어주었다.
어떻게 이런 방랑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하루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 같았다. 그에게는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를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옆자리에 태워주었지만 그 전에 그는 누구든 자신의 마음에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여정을 따라 읽으며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글의 어디서부턴가 풍경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여정은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한곳은 언제나 다음 곳을 안내하고 있었다. 더 이상 벅찬 순간이 벅찬 순간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폭력은 더 큰 폭력을 가리켰고, 상처 난 장소는 더 큰 상처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는 난민을 만났고 장애인을 만났고 성폭력 피해자를 만났다. 그리고 여러 폭력들이 응집된 곳에서 비인간 동물들을 만났다. 젖을 짜내기 위해 계속해서 강간당하는 소, 집단 피살을 앞둔 돼지, 도망갈 수 없도록 날개가 잘린 여왕벌.
곳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하루에게 자리와 음식을 내어주고 하루를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문명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숲에 들어온 사람들은 평화를 해치지 말라며 성폭력 사건 앞에서 침묵했고, 인간에 대한 폭력 사건에 함께 분노했던 사람들은 비인간 동물들이 당한 폭력 앞에서 무감각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혹은 이 나라 시민이 아니니까, 인간이 아니니까 폭력을 문제 삼지 않으려 했다. 어떤 이들은 홀로코스트나 강간 같은 끔찍한 말들을 비인간 동물에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 희생자를 모욕하는 짓이라고도 했다.
나 역시 하루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뒤로 갈수록 힘에 겨웠다. 원고를 읽다가 여러 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여야 했다. 내 안의 누군가가 그만가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 같았다. 이 정직한 여정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예감하며 내 치부가 드러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수많은 차별과 폭력의 모티브를 제공한 곳이라며 가리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너무나 정직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랑기의 끝에 이르러서야 나는 이것이 방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하루는 길을 떠돈 것이 아니라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처가 없었던 것은 맞다. 그는 몸이 머물 곳만큼이나 생각이 머물 곳을 미리 정해두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정직이었다. 알지 못하는 길이었지만 그는 용감하게 걸었다. 이 책은 정직한 발걸음이 어떻게 한 인간, 한 동물을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지를 보여준다. 동물해방운동가인 하루는 이 길을 따라 우리를 떠나 우리에게 온 것이다.
- 고병권, 철학자
1년 전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하루는 〈Planet A〉의 감독이었다. 〈Planet A〉는 장애인, 난민, 성노동자 등의 인간 동물과, 소, 돼지, 닭 등의 비인간 동물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고발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담은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 내 발언 영상을 짧게 넣고 싶다고 했다. 당시 외국인 보호소에서 자행된 고문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행한 발언이었다. 나는 인간수용시설로서 외국인 보호소와 장애인 시설에서 자행된 감금과 폭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언급했다.
하루는 내 발언을 전체 열다섯 가지 이야기를 연결하는 고리들 중 하나로 삼았다. 그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많은 것을 보았고 그만큼 많이 아파했던 것 같다. 자신은 많은 일을 겪었기에 좀처럼 울지 않는다면서도 곧잘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어디까지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의 절박성에 닿지는 못했다.
어느 날 하루는 내가 있는 '읽기의 집'을 찾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행기 같은 글이라고 했다. 6년 가까이 여기저기 다녔다고. 처음에는 배낭여행 같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가 파편적으로 들려준 이야기들은 내가 아는 여행과 너무 달랐다. 단어들부터 낯설었다. 나는 그에게 식당이나 마트의 쓰레기통에서 식자재를 구하는 덤스터 다이빙에 대해 들었고, 도시 문명을 떠나 돈이나 전자기기 없이 숲속에서 한 달을 지내는 레인보우 개더링에 대해 들었다. 또 숲이나 바닷가, 공원에서 침낭을 깔거나 해먹을 걸고 그냥 잤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집안일을 해주거나 베이비시터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권을 빼앗긴 채 수용시설에 갇혀 지낸 이야기도 들었고, 미국 어딘가 있다는 거대한 도살장을 찾아간 이야기도 들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니었고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흘러나온 파편들이었다. 이 파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는 나는 이것들을 제멋대로 끼워 맞추고는 집시나 히피의 정처 없는 방랑기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완성한 원고를 읽었다. 시작하는 문장이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알 수 없는 상처를 지닌 문장이었다. 그는 출국 이틀 전에 엄마에게 통보하고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불안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여정. 그러나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씩씩하게 방랑자의 삶을 살아냈다. 돈 없이 살아가는 기술들을 익히고 거침없이 사람들을 사귀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는 금세 강해졌고 그의 삶은 재밌어 보였으며, 그가 찾아간 곳들은 아름다웠다. 길 위의 사람들은 손을 치켜든 그에게 기꺼이 옆자리를 내주었고 친구를 소개해주었으며 가족이 되어주었다.
어떻게 이런 방랑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하루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 같았다. 그에게는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를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옆자리에 태워주었지만 그 전에 그는 누구든 자신의 마음에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여정을 따라 읽으며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글의 어디서부턴가 풍경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여정은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한곳은 언제나 다음 곳을 안내하고 있었다. 더 이상 벅찬 순간이 벅찬 순간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폭력은 더 큰 폭력을 가리켰고, 상처 난 장소는 더 큰 상처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는 난민을 만났고 장애인을 만났고 성폭력 피해자를 만났다. 그리고 여러 폭력들이 응집된 곳에서 비인간 동물들을 만났다. 젖을 짜내기 위해 계속해서 강간당하는 소, 집단 피살을 앞둔 돼지, 도망갈 수 없도록 날개가 잘린 여왕벌.
곳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하루에게 자리와 음식을 내어주고 하루를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문명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숲에 들어온 사람들은 평화를 해치지 말라며 성폭력 사건 앞에서 침묵했고, 인간에 대한 폭력 사건에 함께 분노했던 사람들은 비인간 동물들이 당한 폭력 앞에서 무감각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혹은 이 나라 시민이 아니니까, 인간이 아니니까 폭력을 문제 삼지 않으려 했다. 어떤 이들은 홀로코스트나 강간 같은 끔찍한 말들을 비인간 동물에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 희생자를 모욕하는 짓이라고도 했다.
나 역시 하루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뒤로 갈수록 힘에 겨웠다. 원고를 읽다가 여러 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여야 했다. 내 안의 누군가가 그만가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 같았다. 이 정직한 여정이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예감하며 내 치부가 드러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수많은 차별과 폭력의 모티브를 제공한 곳이라며 가리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너무나 정직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랑기의 끝에 이르러서야 나는 이것이 방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하루는 길을 떠돈 것이 아니라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처가 없었던 것은 맞다. 그는 몸이 머물 곳만큼이나 생각이 머물 곳을 미리 정해두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정직이었다. 알지 못하는 길이었지만 그는 용감하게 걸었다. 이 책은 정직한 발걸음이 어떻게 한 인간, 한 동물을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지를 보여준다. 동물해방운동가인 하루는 이 길을 따라 우리를 떠나 우리에게 온 것이다.
- 고병권, 철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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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정직하게 걷는 길은 어디에 이르는가 · 고병권(철학자)
그의 흙 묻은 발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홍은전(기록활동가)
1장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했지
생존의 기술 / 생활의 기술 / 히치하이커들 / 외국인 수용소
2장 태양을 가로질러 걷기
노동의 기술 / 난민 수용소 / 가족에 대하여 / 방랑의 기술 / 폭력에 대하여
3장 어떤 길들은 다른 길들보다 더
연결의 기술 / 방관자들 / 매직하우스 / 가슴과 자궁 / 노숙인 수용소 / 가축 수용소 / 목격자들
4장 물에 던져진 돌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책임에 대하여 / 동네 아는 농부 / 학살의 기준 / 평화에 대하여 / 어떤 동네
5장 새들의 흔적을 따라 걷기
생추어리 / 혁명의 기술 / 부서진 날개 / 증인들 / 죽음에 대하여
부록 1 / 이 글을 쓰며 함께 읽은 책
부록 2 / 히치하이킹 기록
정직하게 걷는 길은 어디에 이르는가 · 고병권(철학자)
그의 흙 묻은 발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홍은전(기록활동가)
1장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했지
생존의 기술 / 생활의 기술 / 히치하이커들 / 외국인 수용소
2장 태양을 가로질러 걷기
노동의 기술 / 난민 수용소 / 가족에 대하여 / 방랑의 기술 / 폭력에 대하여
3장 어떤 길들은 다른 길들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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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물에 던져진 돌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책임에 대하여 / 동네 아는 농부 / 학살의 기준 / 평화에 대하여 / 어떤 동네
5장 새들의 흔적을 따라 걷기
생추어리 / 혁명의 기술 / 부서진 날개 / 증인들 / 죽음에 대하여
부록 1 / 이 글을 쓰며 함께 읽은 책
부록 2 / 히치하이킹 기록
저자
저자
이하루
전문 부랑자이자 히치하이커, 사회 부적응자. 평생 일만 하며 사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집을 떠났다. 세계를 방랑하던 중 인류가 집단으로 묵인하는 동물 착취 시스템의 규모와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에 대한 '앎'에 충격을 받아, 숨겨진 진실을 알리는 데 집중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 임시로 거주하며 동물해방을 위한 퀴어-아나키 예술활동가 공동체 플라가미(@plastic agami)의 대표이자 영화/음악 프로듀서, 래퍼, 영상기록활동가로서 여러 투쟁 현장에 연대하고 있다. 언제나 떠날 기회를 노리며 '대충 열심히' 삶을 정리한다.
현재 한국에 임시로 거주하며 동물해방을 위한 퀴어-아나키 예술활동가 공동체 플라가미(@plastic agami)의 대표이자 영화/음악 프로듀서, 래퍼, 영상기록활동가로서 여러 투쟁 현장에 연대하고 있다. 언제나 떠날 기회를 노리며 '대충 열심히' 삶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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