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시들지 않아 하루도 쉴 수 없다(리얼리스트 시전 2)
이옥금 시집
Regular price
$13.48
Sale price
Regular price
✈️
Estimated delivery date 예상 배송일
Standard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8-12 영업일
Express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6-8 영업일
자기 앞의 꽃을 명상하다
한국 현대시에서 ‘꽃’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미당이 설파한 누님같이 생긴 꽃, 국화는 만고풍상을 겪고 난 후 피어난 완숙미를 드러낸다고 평자들은 말합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온 세상이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은 환상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너를 불러 줘야만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김춘수의 시각은 자기중심적 사유의 발로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존재의 타자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꽃이 시들지 않아 하루도 쉴 수 없다』는 새로운 꽃의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완상 대상으로서, 인식 대상으로서 꽃이 아니라 실존하는 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들지 않는 꽃은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소멸 능력이 사라진 비주체적 존재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들지 않는 꽃은 생명을 잉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누군가 바라봄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집은 하루도 쉴 수 없는 여성성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하루도 쉴 수 없는 여성 현실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실천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것은 애초에 정해진 삶의 출발, 고정된 생활의 질곡, 예정된 여성 종말의 전통을 상징합니다. 이옥금은 이 상징을 깨기 위해 오히려 하루도 쉴 수 없다고 자기 분열을 시도합니다. 남성성의 푯대 위에 자기 깃발을 세우고자 합니다. 이러한 일은 엘렌 식수가 주장했던 ‘voler’의 상상력입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가는 일입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변신하는 일입니다. 이 시집은 그러한 여성 변화의 명상을 담았습니다.
이옥금은 귀농 시인입니다. 서울 예술 대학교 문예 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습니다. 그 이전 2000년 계간 『학산문학』에 소설이 추천 완료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이력에도 문단을 떠나 시골로 간 이유는 그의 문학 속에 자연을 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경북 문경에서 미나리를 키우며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으려는 것이며, 자기 앞의 생을 살고자 하는 뜻입니다.
『꽃이 시들지 않아 하루도 쉴 수 없다』는 무엇을 담았는가?
기다리는 힘
걷는 사람은 사색하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적 사유 속에 시는 깊이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는 기다리는 이의 것입니다. 김기림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변절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인입니다. 그가 미당이나 최재서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다리는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예언자적 지성으로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처럼 이 시집은 하루도 쉬지 않고 기다라는 이의 마음 자세로 새로운 영토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총 6부로 나누어 편성했습니다. 1부 돌아오지 않은 것들을 위해 기다림, 2부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을 위해 떠남, 3부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위해 돌아감, 4부 이 길을 건너기 위해 다시 세움, 5부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 기억함, 6부 전깃줄 위의 생을 위해 애도함. 1부는 귀농 살이 현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떠난 것들을 자연이 언제나 기다리듯이 문을 닫지 않고 시인이 문전에 서 있습니다. 2부는 전통적 여성성에 갇힌 생각들을 판단중지시키고 새롭게 문을 열고 있습니다. 3부는 부정했던 여성적 면모를 다시금 복원시키고자 합니다. 4부는 괄호 친 존재들의 타자성을 담았습니다. 5부는 빛바랜 옛사랑을 더듬고 있습니다. 6부는 간당간당한 삶의 현장을 지켜보며 위기에 처한 존재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 시집은 궁극적으로 기다리는 힘이 거름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갈 것이라는 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이 땅에 시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지만 이옥금은 그 남성적 상징 위에 여성적 깃발을 꽂고자 합니다. 아직은 깃발의 아우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찬찬히 이 시집을 읽다보면 분명 기다리는 자의 미래가 보이리라 믿습니다.
한국 현대시에서 ‘꽃’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미당이 설파한 누님같이 생긴 꽃, 국화는 만고풍상을 겪고 난 후 피어난 완숙미를 드러낸다고 평자들은 말합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온 세상이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은 환상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너를 불러 줘야만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김춘수의 시각은 자기중심적 사유의 발로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존재의 타자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꽃이 시들지 않아 하루도 쉴 수 없다』는 새로운 꽃의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완상 대상으로서, 인식 대상으로서 꽃이 아니라 실존하는 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들지 않는 꽃은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소멸 능력이 사라진 비주체적 존재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들지 않는 꽃은 생명을 잉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누군가 바라봄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집은 하루도 쉴 수 없는 여성성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하루도 쉴 수 없는 여성 현실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실천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것은 애초에 정해진 삶의 출발, 고정된 생활의 질곡, 예정된 여성 종말의 전통을 상징합니다. 이옥금은 이 상징을 깨기 위해 오히려 하루도 쉴 수 없다고 자기 분열을 시도합니다. 남성성의 푯대 위에 자기 깃발을 세우고자 합니다. 이러한 일은 엘렌 식수가 주장했던 ‘voler’의 상상력입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가는 일입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변신하는 일입니다. 이 시집은 그러한 여성 변화의 명상을 담았습니다.
이옥금은 귀농 시인입니다. 서울 예술 대학교 문예 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습니다. 그 이전 2000년 계간 『학산문학』에 소설이 추천 완료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이력에도 문단을 떠나 시골로 간 이유는 그의 문학 속에 자연을 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경북 문경에서 미나리를 키우며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으려는 것이며, 자기 앞의 생을 살고자 하는 뜻입니다.
『꽃이 시들지 않아 하루도 쉴 수 없다』는 무엇을 담았는가?
기다리는 힘
걷는 사람은 사색하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적 사유 속에 시는 깊이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는 기다리는 이의 것입니다. 김기림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변절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인입니다. 그가 미당이나 최재서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다리는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예언자적 지성으로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처럼 이 시집은 하루도 쉬지 않고 기다라는 이의 마음 자세로 새로운 영토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총 6부로 나누어 편성했습니다. 1부 돌아오지 않은 것들을 위해 기다림, 2부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을 위해 떠남, 3부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위해 돌아감, 4부 이 길을 건너기 위해 다시 세움, 5부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 기억함, 6부 전깃줄 위의 생을 위해 애도함. 1부는 귀농 살이 현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떠난 것들을 자연이 언제나 기다리듯이 문을 닫지 않고 시인이 문전에 서 있습니다. 2부는 전통적 여성성에 갇힌 생각들을 판단중지시키고 새롭게 문을 열고 있습니다. 3부는 부정했던 여성적 면모를 다시금 복원시키고자 합니다. 4부는 괄호 친 존재들의 타자성을 담았습니다. 5부는 빛바랜 옛사랑을 더듬고 있습니다. 6부는 간당간당한 삶의 현장을 지켜보며 위기에 처한 존재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 시집은 궁극적으로 기다리는 힘이 거름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갈 것이라는 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이 땅에 시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지만 이옥금은 그 남성적 상징 위에 여성적 깃발을 꽂고자 합니다. 아직은 깃발의 아우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찬찬히 이 시집을 읽다보면 분명 기다리는 자의 미래가 보이리라 믿습니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시집 해설에서
기둥 하나로 세운 시
1. 시를 세우는 일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다. 어원으로도 시poem는 그리스어 'poesis'에서 유래했는데 '만들다'는 뜻을 품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처럼 시는 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이옥금 시를 대하며 시는 어쩌면 세우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를 짓고 관조하는데 머물지 않고 하늘 높이 올리는 일은 아닐까.
바슐라르는 시적 상상력을 수직적 상상력이라 특히 집어 말한다. 정지된 시간, 밋밋한 시간, 일상적 시간, 타인의 시간, 사물의 시간에서 벗어나 수평적 삶에 묶인 존재 해방을 재촉한다. 이 수직적 상상력은 선회의 시간, 길들여지지 않은 시간, 신비로운 시간, 존재의 응집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이옥금의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시간을 담고 있다. 심장이 고동치고 있는지, 기쁨이 커지고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생의 면면에 균열을 가하려는 것이다.
이옥금은 시 「당산나무」에서 수직적 상상력의 실마리를 드러낸다. 그는 '낯설고 막막한 들판', 즉 수평적 시간에 갇혀 있다. 거기에서 '오벨리스크' 상징과 대면하고 있다. 태양신을 우러렀던 남근 욕망과 마주한 것이다. 그의 시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지배적 권위를 부정하고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수직적 몽상을 '위해' 기존 서판 위에 돌멩이 하나를 얹듯 시 한 편을 올려놓는다. 그것은 '기둥 하나로 세운' 시의 '신전'이다. 궁극적으로 '수도자의 얼굴'을 한 시의 다발이 '나뭇잎'처럼 매달려 아우성치는 깃발을 꿈꾸고 있다.
그에게 시를 세우는 일은 수평적 시간에 갇힌 존재를 '위해' 기다리고, 길 떠나며, 기꺼이 돌아가는 일이며, 새롭게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기억하기 위해 애도하는 일이다. 돌아오지 않은 것들을 위한 기다림의 시이며, 어느 질곡에선가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을 위한 떠남의 시이며,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위한 돌아감의 시이며, 앞을 가로막는 길을 건너기 위한 다시 세움의 시이다. 그렇게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 기억하고 전깃줄 위에 걸린 듯 위태로운 목숨을 위해 애도하는 시이다.
2. 식물성 대화와 엇갈이의 시
이옥금이 시를 세우는 공간은 자연이다. 구체적으로는 귀농하여 스스로 선택한 농촌의 일상이다. 아직은 시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단계다. 시의 열매는 내밀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기둥의 시라 할 수 있다. 펄럭이는 시의 깃발은 내걸리지 않은 상태다. 다만 순정한 시의 아우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것 같다.
어떤 사과는 주인 모르게
마음속 병을 앓는다
이파리 뒤에서
끝까지 숨기고 익는다
아픈 사과는 무겁다
중력이 더 해
지상으로 지상으로 더 가까이
닿는다
과수원 주인은
병든 사과를
가슴에 꿀이 든 줄 알고
딴다
물까치 떼가 쪼아댄 상처는
비품으로 분류하고
마음이 아픈 사과는
정품으로 골라 놓는다
해가 갈수록
사과밭 주인이나 사과나
마음이
무겁고 무겁다
-「과심果心」 전문
이 시를 보며 김억이 번역한 타고르의 시「원정園丁」과 김종삼의 시「원정園丁」이 떠오른다. 타고르의 시에서 정원사gardener로서 화자는 '죽음을 그립어하는 풀들'과 '이르게 올으는 저녁달'에 대해 말한다. 풀들과 저녁달은 모두 원정이 관리하는 과수원, 혹은 정원에서 동거하는 사물이다. 원정은 이러한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능력이 있다. 시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풀들이 왜 죽음을 그리워하며, 저녁별이 서둘러 떠오르는 이유를 시인은 알고 있다. 타고르는 여왕과 신하의 관계를 통해 하사받은 원정의 소임을 다하려는 뜻을 담는다. 달리 말하면 신을 찬양하는 자연의 소리를 들어 전달하는 자로서 시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과심을 꿰뚫고 있다. 그는 자연의 마음속 병을 헤아려 상처를 위무하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과심은 분별없이 곧 시심이 되어 침묵 속에서 내밀한 대화를 나눈다. 이제 사과밭 주인과 사과는 서로 생의 무게를 공유함으로써 통한다. 이는 보들레르가 "자연은 살아 있는 기둥들이/때때로 모호한 말들을 새어 보내는 사원"이라 말했던 교응Correspondances의 순간과 같다. 보들레르가 "컴컴하고도 심원한 통일 속에서/긴 메아리 멀리서 섞이어 들 듯" 서로 화답했듯이 이옥금도 자연과 교감한다.
여기서 자연과 나누는 무거운 대화는 김종삼의 원죄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김종삼은 평과?果, 즉 사과를 "몇개째를 집어 보아도 놓이었던 자리가 썩어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 갔다."고 자탄한다. 이때 원정은 시인에게 신이라도 된 듯 다스린다. "당신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리가 없다고," 이 말은 시인을 위축시키는 저주와 같지만 시인의 운명은 그럴 수 없다. 척박한 불모의 땅에서 '악의 꽃'을 피워낸 보들레르처럼 문학의 어머니는 신의 다스림 밖에 있다. 이 시에서 이옥금이 체감한 무거움도 단지 원정의 관리나 다스림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마음의 소리라 할 수 있다.
농촌살이에서 시 쓰기는 끊임없는 반복과 순환 끝에 맺는 열매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유위적有爲的 시학은 어울리지 않는다. 억지로 만들어낸 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속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옥금의 시 쓰기는 엇갈이의 시학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아무 때나 씨를 뿌려 거두는 일로서 인위人爲에서 자유로운 시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은 닭을 위해/닭장 문을 부숴야겠다(「닭들이 돌아온다」)"는 실존적 결단이며, 문명의 급습에 공포에 떨고 있는 짐승들과 엎드려 우는 밤(「산골 깊은 밤」)을 선택한 존재론적 인식이다.
돌들이 머리에 초록 수건을 쓰고 있다
밭을 매는 할머니처럼 엎드려 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할머니는 열무를 뜯으며
밭에 돌이 있어야 농사가 잘 된다고 했다
돌들이 오줌을 싼다고 했다
그래서 가물어도 채소가 산다고 했다
돌들이 이끼를 기르고 있다
무성할 땐 초록 채소밭 같다
가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걸 보니
돌들은 엇갈이로 이끼를 기르고 있다
-「돌이끼」 전문
생명生命은 생生과 명命, 즉 태어남과 죽음(목숨)이 대립하지 않고 더불어 있는 형상이다. 태어남을 잉태할 수 없을 것 같은 '돌' 위에도 생명은 존재한다. '가끔 사라졌다 나타났다' 소멸과 생성을 멈추지 않는 달의 행로와 같다. 이는 목숨 걸고 길러낸 자연의 의지이다. 밭 매는 할머니처럼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며 밀고 나가는 오체투지(「청벌레」) 이며, '뼈가 닳도록 눈발을 쓸어 내고(「열한 시 반 시골 버스」)' 난 후의 세상이다. 해방 공간이며 자유와 연대가 살아 있는 장소이다. 이옥금의 시도 그처럼 중갈이하며 흘린 땀방울이고 오줌이다. 모두 생명 현상에 관여하는 물질적 상상력이다.
이 대화적 상상력은 바흐친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형식을 띤다. 크로노토프는 삶을 드러내는 그물망으로서 시공간이다.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망조직matrix-fabric이며 네트워크이다. 이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이며 나와 다른 경험을 한 주체와 의식을 같이하는 순간이며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시 「완두」가 펼치는 크로노토프는 의미심장하다. 한 꼬투리에 든 생명들은 벌과 나비와 바람의 자식들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타자들의 동거는 상징적 계보학을 무너뜨리는 경계 넘기이며 환타지이며 신화적 사랑의 환희이다.
바흐친은 "나는 인간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고 이 사람은 구체적인 크로노토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삶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이고 유일한 크로노토프가 타자에 반응을 보이며 행위를 수행하는 실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옥금의 시는 타자와 동일한 시공간에서 공존하는 크로노토프를 내장하고 있다. 논리를 거슬러 갈등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불확정적 사건들이 엇갈이한 장소이다.
3. 물과 돌의 변주곡
자연 속에서 획득한 시심이 타자와 교류하는 시공간인 식물적 대화의 크로노토프를 생성했다면 이옥금 시에서 물과 돌은 경직된 삶을 강요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자연의 품속에서도 좀체 가시지 않는 억압이 그를 옥죄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번 시집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v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불연속적으로 타자 지향적 의지를 흔들기도 하고 삶의 안정된 리듬이 아니라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부정적이기보다는 시의 다성성을 확보하는 특질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바다를 건너올 때
집을 나가던 바다는
저녁을 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남자 하나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저녁 해도 바다로 빠져들고 있다
대교를 건너가는
자동차들도 바다로 빠져들고 있다
문이 없어서 아직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이
출렁이고 있다
-「바다에는 문이 없다」 전문
바다는 모성 상징으로 여성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그러므로 '집을 나가던 바다'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바다도 모두 시인의 환유적 치환물이라 할 수 있다. 바다는 남자와 저녁과 자동차들을 집어삼킨다. 그런데 귀환할 수 있는 출구가 없다. 이는 품기만 하고 토해 내지 못하는 이타적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는 데서 고통의 환유이기도 하다. 시인은 여성성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는 최초의 실재이다. 요나 콤플렉스가 어머니의 태반, 즉 안온하고 평화로운 공간을 상징한다면 이옥금이 담고 있는 요나 콤플렉스는 무의식 속에 퇴행하는 자아를 드러낸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자아가 '바다를 뒤로 한 채(「바다로 가는 길목」)' 얼굴 없는 존재로 사물처럼 취급당하는 소외로 나타난다. '녹슨 뼛조각(「바다 위를 건너가는 버스」)'은 그러한 존재성을 잘 드러내는 사물이다. 마침내 "나는 어쩌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자탄하며 자기 연민에 빠진다. 이는 신의 부름을 거부했던 요나에게 내려진 징벌일 수 있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향수, 즉 어디에 있든지 고향 집에 있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노발리스가 말한 바 있다. 시도 마찬가지다. 이옥금은 스스로 집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시「코리도라스 여자」에서 물은 여성적 감옥이다. 바다로 가는 것은 여성성에 묶이는 것이다. 그래서 탈출 욕망을 품지만 탈출구가 없다. 바다가 감옥이 되는 아이러니는 '돌' 이미지에서도 성립된다.
남자가 돌멩이를 쏟아 놓았다
돌들이 온통 땀에 젖어 있다
여자 혼자 사는 집
저만치 뒤 곁에 두고 한 개 한 개 날라
키 맞추어 쌓아 놓고
남자가 갔다
-「돌담」에서
똑, 똑, 똑, 똑, 구두 굽에 더욱 힘을 주어 노크하자
이빨들 모서리를 세워 내 발부리를 조아 버릴 것 같다
발길을 늦추고 서서히 걸어가는 늦은 밤 귀갓길
물음표같이 내려온 힐 뒤축으로
똑, 똑, 이 길 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데
입도 안 벌리고 늘 대답을 안 하는 당신은
어젯밤에도 어떻게 내 구두 굽은 갉아먹었던 거지요?
-「구두 소리」에서
사랑은 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눈물을 만드나요
나는 그곳에서 본 당신의 마지막입니다
당신이 내게 던진 돌멩이가
벽이 되고 돌담이 되어 서 있습니다
-「은둔」에서
시 「돌담」에서 돌멩이는 남자의 부분 요소로 제유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남자의 수고로움은 땀에 젖은 돌 이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쌓은 돌담 속에서 안전하다. 그러나 이 수동적 평화는 이옥금의 시에서 자아 훼손의 단초이기도 하다. 이처럼 돌은 혹은 남성성은 그에게 이중적 감옥이라 할 수 있다.
시 「구두 소리」에서 돌은 보도블록으로 변신하여 돌담의 경계 넘어 견고하게 시인에게 다가선다. '똑 똑 똑 똑' 신호음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이며 '늦은 밤'의 위험에서 보호를 호소하는 구명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무시된 채 오히려 다듬어지고 갉아 먹히는 교정 언어로 변질돼 그를 억압한다.
돌은 이끼를 키우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시의 탑을 올리는 주춧돌로 쓰였던 소명을 배반한 채 벽과 돌담 장애물로 변질된다. 마침내 그는 깨닫게 된다. 돌과 같은 남성적 권위에서 안주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현실 앞에 서게 된다. 시 「은둔」은 그러한 양상을 담고 있다. 남자가 던진 돌멩이가 보호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벽과 담이 되어 그에게 다가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물과 돌의 이중성은 그에게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레비나스가 설파했듯 '타자로부터 나를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긍정적 계기'이다. 추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읽게 된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자기 삶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려는 징후'이다. 최초의 실재를 의심하게 되었고 최초의 경험과 논쟁하여 실존적 결단의 순간을 맞이한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감행한다. '자기 자신의 삶 살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말같이 생긴 사람이 말가죽 구두를 신고 말같이 간다
소같이 생긴 사람이 소가죽 구두를 신고 소같이 간다
양같이 새긴 사람이 양가죽 구두를 신고 양같이 간다
물소같이 생긴 사람이 물소 가죽 구두를 신고 물소같이 간다
낙타같이 생긴 사람이 낙타 가죽 구두를 신고 낙타같이 간다
타조같이 생긴 사람이 타조 가죽 구두를 신고 타조같이 간다
뱀같이 생긴 사람이 뱀 가죽 구두를 신고 뱀같이 간다
가죽과 가죽이 가족같이 걸어간다 코를 세우며 간다
악어같이 생긴 사람이 악어 가죽 구두를 신고 악어같이 간다
도마뱀같이 생긴 사람이 도마뱀 가죽 구두를 신고 도마뱀같이 간다
캥거루같이 생긴 사람이 캥거루 가죽 구두를 신고 캥거루같이 간다
이구아나같이 생긴 사람이 이구아나 가죽 구두를 신고 이구아나같이 간다
밍크같이 생긴 사람이 밍크 가죽 구두를 신고 밍크같이 간다
염소같이 생긴 사람이 염소 가죽 구두를 신고 염소같이 간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간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여행」 전문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떠나는 여행은 자기 자신의 죽음 앞에 앞서 달려가 보는 일이다. 이는 현재 나의 본래적 모습은 무엇인가 묻는 일이며, 피안에 있는 시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시간에 대해 묻는 일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반드시 죽어야 할 운명 앞에 소극적 삶을 지양하고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스스로 구축한 생을 구가하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열세 켤레 구두로 변형된다. 이 형상적 변경eidetic variation은 우연히 '~같이 생긴' 판단을 중지 시키고 부분적 변주를 통해 그가 지닌 본질에 가 닿으려는 시적 상상력이다. 그렇게 '~같이' 보이는 존재에서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획득하여 '~같이' 변형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변형은 물과 돌의 이중적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수많은 타자들의 속성이 내 존재 확인의 근거임을 보여주고 있다. 열세 번의 다중성이 그의 시에 담긴 것이다.
4. 시의 깃발을 올리기 위해
이옥금이 세운 시의 기둥은 전면과 후면이, 혹은 외면과 내면이, 또는 의식과 무의식이 동주同住하는 형상이다. 이는 타인의 얼굴에서 죽음과 구원을 동시에 발견한 레비나스의 존재론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타자의 죽음 앞에서 타자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언명이 새겨 있을 것 같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식물적 대화를 나누는 엇갈이의 시학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공주처럼 완두콩을 느끼는 예민함을 지니고 있다. 그게 사랑이라면 좀 더 확대된 시적 서정이라 할 수 있다. 그처럼 시의 씨앗이 뿌려진 공간은 친근한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그 장소에 세우는 시의 기둥은 자존적이다. 가방으로 환치된 여성(「여자와 가방」)은 지금까지 어디 한 곳에 못 박혀 있었지만 이제 여행을 감행한다. 자궁으로 환유된 바다(「검은 비닐봉지」)는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지 않는 감각
을 기억해 내(「벽 속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위태로운 생의 전깃줄에 한 생애를 걸치고 있다, 다시 일어설 유토피아를 꿈꾼다.
전깃줄 위에서 펼쳐지는 그의 현실 인식은 영화 〈전선 위의 참새〉를 떠올리게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동안 숨어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과거와 다시 마주한다. 이제 그의 시는 기둥을 세웠으니 깃발을 달아 펄럭이게 할 차례다. 아마도 그 경지는 망각하지 않으려는 애도 끝에 올리는 기도 같은 것이리라.
잠은 아픔을 모른다
눈은 그렇게 떨어져 내려도 고통을 모른다
홀로 떨어져 있어도 외로움을 모른다
차갑고 외로운 곳에서
그가 겪은 고독의 두께만큼
하얀 이불을 덮어 주고
마지막 얼굴을 덮어 주고
그가 가는 길에 푹신하게 카펫을 깔아 주며
유빙이 되어 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무덤 속까지 잠이 얼어서 깨어나지 않도록
눈은 쌓이고 또 쌓인다
-「언 잠」에서
그러므로 다시 침묵 속에 스스로를 안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시가 다가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는 그가 마주해야 할 수많은 마지막 얼굴이다. 스스로 소멸함으로써 강을 건너듯 깨어나 자기 삶을 사는 것이다.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기둥 하나로 세운 시
1. 시를 세우는 일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다. 어원으로도 시poem는 그리스어 'poesis'에서 유래했는데 '만들다'는 뜻을 품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처럼 시는 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이옥금 시를 대하며 시는 어쩌면 세우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를 짓고 관조하는데 머물지 않고 하늘 높이 올리는 일은 아닐까.
바슐라르는 시적 상상력을 수직적 상상력이라 특히 집어 말한다. 정지된 시간, 밋밋한 시간, 일상적 시간, 타인의 시간, 사물의 시간에서 벗어나 수평적 삶에 묶인 존재 해방을 재촉한다. 이 수직적 상상력은 선회의 시간, 길들여지지 않은 시간, 신비로운 시간, 존재의 응집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이옥금의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시간을 담고 있다. 심장이 고동치고 있는지, 기쁨이 커지고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생의 면면에 균열을 가하려는 것이다.
이옥금은 시 「당산나무」에서 수직적 상상력의 실마리를 드러낸다. 그는 '낯설고 막막한 들판', 즉 수평적 시간에 갇혀 있다. 거기에서 '오벨리스크' 상징과 대면하고 있다. 태양신을 우러렀던 남근 욕망과 마주한 것이다. 그의 시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지배적 권위를 부정하고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수직적 몽상을 '위해' 기존 서판 위에 돌멩이 하나를 얹듯 시 한 편을 올려놓는다. 그것은 '기둥 하나로 세운' 시의 '신전'이다. 궁극적으로 '수도자의 얼굴'을 한 시의 다발이 '나뭇잎'처럼 매달려 아우성치는 깃발을 꿈꾸고 있다.
그에게 시를 세우는 일은 수평적 시간에 갇힌 존재를 '위해' 기다리고, 길 떠나며, 기꺼이 돌아가는 일이며, 새롭게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기억하기 위해 애도하는 일이다. 돌아오지 않은 것들을 위한 기다림의 시이며, 어느 질곡에선가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을 위한 떠남의 시이며,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위한 돌아감의 시이며, 앞을 가로막는 길을 건너기 위한 다시 세움의 시이다. 그렇게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 기억하고 전깃줄 위에 걸린 듯 위태로운 목숨을 위해 애도하는 시이다.
2. 식물성 대화와 엇갈이의 시
이옥금이 시를 세우는 공간은 자연이다. 구체적으로는 귀농하여 스스로 선택한 농촌의 일상이다. 아직은 시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단계다. 시의 열매는 내밀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기둥의 시라 할 수 있다. 펄럭이는 시의 깃발은 내걸리지 않은 상태다. 다만 순정한 시의 아우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것 같다.
어떤 사과는 주인 모르게
마음속 병을 앓는다
이파리 뒤에서
끝까지 숨기고 익는다
아픈 사과는 무겁다
중력이 더 해
지상으로 지상으로 더 가까이
닿는다
과수원 주인은
병든 사과를
가슴에 꿀이 든 줄 알고
딴다
물까치 떼가 쪼아댄 상처는
비품으로 분류하고
마음이 아픈 사과는
정품으로 골라 놓는다
해가 갈수록
사과밭 주인이나 사과나
마음이
무겁고 무겁다
-「과심果心」 전문
이 시를 보며 김억이 번역한 타고르의 시「원정園丁」과 김종삼의 시「원정園丁」이 떠오른다. 타고르의 시에서 정원사gardener로서 화자는 '죽음을 그립어하는 풀들'과 '이르게 올으는 저녁달'에 대해 말한다. 풀들과 저녁달은 모두 원정이 관리하는 과수원, 혹은 정원에서 동거하는 사물이다. 원정은 이러한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능력이 있다. 시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풀들이 왜 죽음을 그리워하며, 저녁별이 서둘러 떠오르는 이유를 시인은 알고 있다. 타고르는 여왕과 신하의 관계를 통해 하사받은 원정의 소임을 다하려는 뜻을 담는다. 달리 말하면 신을 찬양하는 자연의 소리를 들어 전달하는 자로서 시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과심을 꿰뚫고 있다. 그는 자연의 마음속 병을 헤아려 상처를 위무하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과심은 분별없이 곧 시심이 되어 침묵 속에서 내밀한 대화를 나눈다. 이제 사과밭 주인과 사과는 서로 생의 무게를 공유함으로써 통한다. 이는 보들레르가 "자연은 살아 있는 기둥들이/때때로 모호한 말들을 새어 보내는 사원"이라 말했던 교응Correspondances의 순간과 같다. 보들레르가 "컴컴하고도 심원한 통일 속에서/긴 메아리 멀리서 섞이어 들 듯" 서로 화답했듯이 이옥금도 자연과 교감한다.
여기서 자연과 나누는 무거운 대화는 김종삼의 원죄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김종삼은 평과?果, 즉 사과를 "몇개째를 집어 보아도 놓이었던 자리가 썩어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 갔다."고 자탄한다. 이때 원정은 시인에게 신이라도 된 듯 다스린다. "당신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리가 없다고," 이 말은 시인을 위축시키는 저주와 같지만 시인의 운명은 그럴 수 없다. 척박한 불모의 땅에서 '악의 꽃'을 피워낸 보들레르처럼 문학의 어머니는 신의 다스림 밖에 있다. 이 시에서 이옥금이 체감한 무거움도 단지 원정의 관리나 다스림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마음의 소리라 할 수 있다.
농촌살이에서 시 쓰기는 끊임없는 반복과 순환 끝에 맺는 열매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유위적有爲的 시학은 어울리지 않는다. 억지로 만들어낸 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속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옥금의 시 쓰기는 엇갈이의 시학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아무 때나 씨를 뿌려 거두는 일로서 인위人爲에서 자유로운 시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은 닭을 위해/닭장 문을 부숴야겠다(「닭들이 돌아온다」)"는 실존적 결단이며, 문명의 급습에 공포에 떨고 있는 짐승들과 엎드려 우는 밤(「산골 깊은 밤」)을 선택한 존재론적 인식이다.
돌들이 머리에 초록 수건을 쓰고 있다
밭을 매는 할머니처럼 엎드려 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할머니는 열무를 뜯으며
밭에 돌이 있어야 농사가 잘 된다고 했다
돌들이 오줌을 싼다고 했다
그래서 가물어도 채소가 산다고 했다
돌들이 이끼를 기르고 있다
무성할 땐 초록 채소밭 같다
가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걸 보니
돌들은 엇갈이로 이끼를 기르고 있다
-「돌이끼」 전문
생명生命은 생生과 명命, 즉 태어남과 죽음(목숨)이 대립하지 않고 더불어 있는 형상이다. 태어남을 잉태할 수 없을 것 같은 '돌' 위에도 생명은 존재한다. '가끔 사라졌다 나타났다' 소멸과 생성을 멈추지 않는 달의 행로와 같다. 이는 목숨 걸고 길러낸 자연의 의지이다. 밭 매는 할머니처럼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며 밀고 나가는 오체투지(「청벌레」) 이며, '뼈가 닳도록 눈발을 쓸어 내고(「열한 시 반 시골 버스」)' 난 후의 세상이다. 해방 공간이며 자유와 연대가 살아 있는 장소이다. 이옥금의 시도 그처럼 중갈이하며 흘린 땀방울이고 오줌이다. 모두 생명 현상에 관여하는 물질적 상상력이다.
이 대화적 상상력은 바흐친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형식을 띤다. 크로노토프는 삶을 드러내는 그물망으로서 시공간이다.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망조직matrix-fabric이며 네트워크이다. 이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이며 나와 다른 경험을 한 주체와 의식을 같이하는 순간이며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시 「완두」가 펼치는 크로노토프는 의미심장하다. 한 꼬투리에 든 생명들은 벌과 나비와 바람의 자식들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타자들의 동거는 상징적 계보학을 무너뜨리는 경계 넘기이며 환타지이며 신화적 사랑의 환희이다.
바흐친은 "나는 인간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고 이 사람은 구체적인 크로노토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삶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이고 유일한 크로노토프가 타자에 반응을 보이며 행위를 수행하는 실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옥금의 시는 타자와 동일한 시공간에서 공존하는 크로노토프를 내장하고 있다. 논리를 거슬러 갈등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불확정적 사건들이 엇갈이한 장소이다.
3. 물과 돌의 변주곡
자연 속에서 획득한 시심이 타자와 교류하는 시공간인 식물적 대화의 크로노토프를 생성했다면 이옥금 시에서 물과 돌은 경직된 삶을 강요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자연의 품속에서도 좀체 가시지 않는 억압이 그를 옥죄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번 시집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v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불연속적으로 타자 지향적 의지를 흔들기도 하고 삶의 안정된 리듬이 아니라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부정적이기보다는 시의 다성성을 확보하는 특질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바다를 건너올 때
집을 나가던 바다는
저녁을 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남자 하나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저녁 해도 바다로 빠져들고 있다
대교를 건너가는
자동차들도 바다로 빠져들고 있다
문이 없어서 아직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이
출렁이고 있다
-「바다에는 문이 없다」 전문
바다는 모성 상징으로 여성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그러므로 '집을 나가던 바다'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바다도 모두 시인의 환유적 치환물이라 할 수 있다. 바다는 남자와 저녁과 자동차들을 집어삼킨다. 그런데 귀환할 수 있는 출구가 없다. 이는 품기만 하고 토해 내지 못하는 이타적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는 데서 고통의 환유이기도 하다. 시인은 여성성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는 최초의 실재이다. 요나 콤플렉스가 어머니의 태반, 즉 안온하고 평화로운 공간을 상징한다면 이옥금이 담고 있는 요나 콤플렉스는 무의식 속에 퇴행하는 자아를 드러낸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자아가 '바다를 뒤로 한 채(「바다로 가는 길목」)' 얼굴 없는 존재로 사물처럼 취급당하는 소외로 나타난다. '녹슨 뼛조각(「바다 위를 건너가는 버스」)'은 그러한 존재성을 잘 드러내는 사물이다. 마침내 "나는 어쩌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자탄하며 자기 연민에 빠진다. 이는 신의 부름을 거부했던 요나에게 내려진 징벌일 수 있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향수, 즉 어디에 있든지 고향 집에 있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노발리스가 말한 바 있다. 시도 마찬가지다. 이옥금은 스스로 집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시「코리도라스 여자」에서 물은 여성적 감옥이다. 바다로 가는 것은 여성성에 묶이는 것이다. 그래서 탈출 욕망을 품지만 탈출구가 없다. 바다가 감옥이 되는 아이러니는 '돌' 이미지에서도 성립된다.
남자가 돌멩이를 쏟아 놓았다
돌들이 온통 땀에 젖어 있다
여자 혼자 사는 집
저만치 뒤 곁에 두고 한 개 한 개 날라
키 맞추어 쌓아 놓고
남자가 갔다
-「돌담」에서
똑, 똑, 똑, 똑, 구두 굽에 더욱 힘을 주어 노크하자
이빨들 모서리를 세워 내 발부리를 조아 버릴 것 같다
발길을 늦추고 서서히 걸어가는 늦은 밤 귀갓길
물음표같이 내려온 힐 뒤축으로
똑, 똑, 이 길 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데
입도 안 벌리고 늘 대답을 안 하는 당신은
어젯밤에도 어떻게 내 구두 굽은 갉아먹었던 거지요?
-「구두 소리」에서
사랑은 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눈물을 만드나요
나는 그곳에서 본 당신의 마지막입니다
당신이 내게 던진 돌멩이가
벽이 되고 돌담이 되어 서 있습니다
-「은둔」에서
시 「돌담」에서 돌멩이는 남자의 부분 요소로 제유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남자의 수고로움은 땀에 젖은 돌 이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쌓은 돌담 속에서 안전하다. 그러나 이 수동적 평화는 이옥금의 시에서 자아 훼손의 단초이기도 하다. 이처럼 돌은 혹은 남성성은 그에게 이중적 감옥이라 할 수 있다.
시 「구두 소리」에서 돌은 보도블록으로 변신하여 돌담의 경계 넘어 견고하게 시인에게 다가선다. '똑 똑 똑 똑' 신호음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이며 '늦은 밤'의 위험에서 보호를 호소하는 구명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무시된 채 오히려 다듬어지고 갉아 먹히는 교정 언어로 변질돼 그를 억압한다.
돌은 이끼를 키우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시의 탑을 올리는 주춧돌로 쓰였던 소명을 배반한 채 벽과 돌담 장애물로 변질된다. 마침내 그는 깨닫게 된다. 돌과 같은 남성적 권위에서 안주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현실 앞에 서게 된다. 시 「은둔」은 그러한 양상을 담고 있다. 남자가 던진 돌멩이가 보호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벽과 담이 되어 그에게 다가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물과 돌의 이중성은 그에게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레비나스가 설파했듯 '타자로부터 나를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긍정적 계기'이다. 추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읽게 된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자기 삶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려는 징후'이다. 최초의 실재를 의심하게 되었고 최초의 경험과 논쟁하여 실존적 결단의 순간을 맞이한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감행한다. '자기 자신의 삶 살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말같이 생긴 사람이 말가죽 구두를 신고 말같이 간다
소같이 생긴 사람이 소가죽 구두를 신고 소같이 간다
양같이 새긴 사람이 양가죽 구두를 신고 양같이 간다
물소같이 생긴 사람이 물소 가죽 구두를 신고 물소같이 간다
낙타같이 생긴 사람이 낙타 가죽 구두를 신고 낙타같이 간다
타조같이 생긴 사람이 타조 가죽 구두를 신고 타조같이 간다
뱀같이 생긴 사람이 뱀 가죽 구두를 신고 뱀같이 간다
가죽과 가죽이 가족같이 걸어간다 코를 세우며 간다
악어같이 생긴 사람이 악어 가죽 구두를 신고 악어같이 간다
도마뱀같이 생긴 사람이 도마뱀 가죽 구두를 신고 도마뱀같이 간다
캥거루같이 생긴 사람이 캥거루 가죽 구두를 신고 캥거루같이 간다
이구아나같이 생긴 사람이 이구아나 가죽 구두를 신고 이구아나같이 간다
밍크같이 생긴 사람이 밍크 가죽 구두를 신고 밍크같이 간다
염소같이 생긴 사람이 염소 가죽 구두를 신고 염소같이 간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간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여행」 전문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떠나는 여행은 자기 자신의 죽음 앞에 앞서 달려가 보는 일이다. 이는 현재 나의 본래적 모습은 무엇인가 묻는 일이며, 피안에 있는 시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시간에 대해 묻는 일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반드시 죽어야 할 운명 앞에 소극적 삶을 지양하고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스스로 구축한 생을 구가하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열세 켤레 구두로 변형된다. 이 형상적 변경eidetic variation은 우연히 '~같이 생긴' 판단을 중지 시키고 부분적 변주를 통해 그가 지닌 본질에 가 닿으려는 시적 상상력이다. 그렇게 '~같이' 보이는 존재에서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획득하여 '~같이' 변형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변형은 물과 돌의 이중적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수많은 타자들의 속성이 내 존재 확인의 근거임을 보여주고 있다. 열세 번의 다중성이 그의 시에 담긴 것이다.
4. 시의 깃발을 올리기 위해
이옥금이 세운 시의 기둥은 전면과 후면이, 혹은 외면과 내면이, 또는 의식과 무의식이 동주同住하는 형상이다. 이는 타인의 얼굴에서 죽음과 구원을 동시에 발견한 레비나스의 존재론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타자의 죽음 앞에서 타자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언명이 새겨 있을 것 같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식물적 대화를 나누는 엇갈이의 시학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공주처럼 완두콩을 느끼는 예민함을 지니고 있다. 그게 사랑이라면 좀 더 확대된 시적 서정이라 할 수 있다. 그처럼 시의 씨앗이 뿌려진 공간은 친근한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그 장소에 세우는 시의 기둥은 자존적이다. 가방으로 환치된 여성(「여자와 가방」)은 지금까지 어디 한 곳에 못 박혀 있었지만 이제 여행을 감행한다. 자궁으로 환유된 바다(「검은 비닐봉지」)는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지 않는 감각
을 기억해 내(「벽 속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위태로운 생의 전깃줄에 한 생애를 걸치고 있다, 다시 일어설 유토피아를 꿈꾼다.
전깃줄 위에서 펼쳐지는 그의 현실 인식은 영화 〈전선 위의 참새〉를 떠올리게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동안 숨어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과거와 다시 마주한다. 이제 그의 시는 기둥을 세웠으니 깃발을 달아 펄럭이게 할 차례다. 아마도 그 경지는 망각하지 않으려는 애도 끝에 올리는 기도 같은 것이리라.
잠은 아픔을 모른다
눈은 그렇게 떨어져 내려도 고통을 모른다
홀로 떨어져 있어도 외로움을 모른다
차갑고 외로운 곳에서
그가 겪은 고독의 두께만큼
하얀 이불을 덮어 주고
마지막 얼굴을 덮어 주고
그가 가는 길에 푹신하게 카펫을 깔아 주며
유빙이 되어 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무덤 속까지 잠이 얼어서 깨어나지 않도록
눈은 쌓이고 또 쌓인다
-「언 잠」에서
그러므로 다시 침묵 속에 스스로를 안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시가 다가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는 그가 마주해야 할 수많은 마지막 얼굴이다. 스스로 소멸함으로써 강을 건너듯 깨어나 자기 삶을 사는 것이다.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목차
목차
1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위해_기다림
과심果心
닭들이 돌아온다
이무기가 사는 밭
산골 깊은 밤
당산나무
감사비료
달무리지던 밤
열한 시 반 시골 버스
밥맛
피차彼此
청벌레
돌이끼
분홍 두부
2부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을 위해_떠남
바다에는 문이 없다
바다를 건너가는 버스
궁륭穹?이 펼쳐지다
돌담
코리도라스 여자
이란성
도마뱀 꼬리를 보았다
회전문
여행
완두
눈보라
3부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위해_돌아감
바다로 가는 길목
여자와 가방
월미도에 뜬 흰 달
조화 속이다
어떤 여자의 요리 셀카
반달
검은 비닐봉지
하지夏至
엄마가 안 계시니
냉장고
구두소리
엄마의 뒷머리
4부 이 길을 건너기 위해_다시 세움
은둔
그림자들이 보따리를 안고 있다
거미와 비행기
새벽 조등弔燈
자명종
도덕경 제81장
백년 된 집
골짜기 연못
착한 사람
어느 집 개에 관한 이야기
공사 구간
굴뚝 그림자
5부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_기억함
벽 속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그믐
맨드라미
미시령 터널
개얼굴
말랭이
열정
어시장에서
남산위의자물통
사랑
희양산
6부 전깃줄 위의 생을 위해_애도함
언 잠
당직
2월의 납골당
전깃줄
전깃줄에
지중화地中化
어떤 벌레
장미 505사絲
전화
마을 회관
여백
해설 기둥하나로 세운 시(이민호)
과심果心
닭들이 돌아온다
이무기가 사는 밭
산골 깊은 밤
당산나무
감사비료
달무리지던 밤
열한 시 반 시골 버스
밥맛
피차彼此
청벌레
돌이끼
분홍 두부
2부 빠져나오지 못한 것들을 위해_떠남
바다에는 문이 없다
바다를 건너가는 버스
궁륭穹?이 펼쳐지다
돌담
코리도라스 여자
이란성
도마뱀 꼬리를 보았다
회전문
여행
완두
눈보라
3부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위해_돌아감
바다로 가는 길목
여자와 가방
월미도에 뜬 흰 달
조화 속이다
어떤 여자의 요리 셀카
반달
검은 비닐봉지
하지夏至
엄마가 안 계시니
냉장고
구두소리
엄마의 뒷머리
4부 이 길을 건너기 위해_다시 세움
은둔
그림자들이 보따리를 안고 있다
거미와 비행기
새벽 조등弔燈
자명종
도덕경 제81장
백년 된 집
골짜기 연못
착한 사람
어느 집 개에 관한 이야기
공사 구간
굴뚝 그림자
5부 먼 곳에 다녀오기 위해_기억함
벽 속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그믐
맨드라미
미시령 터널
개얼굴
말랭이
열정
어시장에서
남산위의자물통
사랑
희양산
6부 전깃줄 위의 생을 위해_애도함
언 잠
당직
2월의 납골당
전깃줄
전깃줄에
지중화地中化
어떤 벌레
장미 505사絲
전화
마을 회관
여백
해설 기둥하나로 세운 시(이민호)
저자
저자
이옥금
전북 김제 출생. 서울 예술 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2007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2000년 계간 『학산문학』 소설 추천 완료. 2012년 문경으로 귀농 현재 문경 청정미나리 대표.
Payment & Security
Payment methods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99 이상 무료 배송
3% 리워드 크레딧 적립
Secure Pay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