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언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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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들의 인생 지침서
현재의 독자들도 알기 쉬운 조식 입문서
언행록을 만드는 목적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장차 인생을 살아가면서 본받아야 할 전범(典範)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 〈조식 언행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언행록은 조식의 학문을 기리고 조식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조선 선비들이 인생 지침서와도 같이 읽었던 것입니다.
이 〈조식 언행록〉은 공부한 것과 행동한 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조식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줍니다.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 경서를 읽고 공부하는 자세,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出處)의 기준, 제자들을 가르치고 벗들과 교유하는 도리, 집안 식솔들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보여줍니다. 조식이라는 한 인물의 구체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 유학의 이념을 묘사합니다. 학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학문, 학자가 추구해야 하는 당위의 삶을 확인해 줍니다.
이 〈조식 언행록〉의 원래 제목은 〈남명선생 언행총록(南冥先生言行總錄)〉입니다. 인조 때의 학자 박인(朴絪)이 1636년 편찬했습니다. 1600년대에 편찬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독자들이 조식의 학문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삼는데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최근 연구자들이 쓴 글을 넘어서는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언행록은 조식 학문의 핵심을 알기 쉽게 보여줍니다.
현재의 독자들도 알기 쉬운 조식 입문서
언행록을 만드는 목적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장차 인생을 살아가면서 본받아야 할 전범(典範)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 〈조식 언행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언행록은 조식의 학문을 기리고 조식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조선 선비들이 인생 지침서와도 같이 읽었던 것입니다.
이 〈조식 언행록〉은 공부한 것과 행동한 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조식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줍니다.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 경서를 읽고 공부하는 자세,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出處)의 기준, 제자들을 가르치고 벗들과 교유하는 도리, 집안 식솔들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보여줍니다. 조식이라는 한 인물의 구체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 유학의 이념을 묘사합니다. 학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학문, 학자가 추구해야 하는 당위의 삶을 확인해 줍니다.
이 〈조식 언행록〉의 원래 제목은 〈남명선생 언행총록(南冥先生言行總錄)〉입니다. 인조 때의 학자 박인(朴絪)이 1636년 편찬했습니다. 1600년대에 편찬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독자들이 조식의 학문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삼는데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최근 연구자들이 쓴 글을 넘어서는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언행록은 조식 학문의 핵심을 알기 쉽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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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지금 우리가, 이 언행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조식은 실천을 강조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조식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일상생활에서 조식이 실제로 보여준 모습은 어땠을까요? 이 〈조식 언행록〉은 공부한 것과 행동한 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조식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조식 언행록〉의 원래 제목은 〈남명선생 언행총록(南冥先生言行總錄)〉입니다. 인조 때의 학자 박인(朴絪 ; 1583~1640)이 편찬했습니다. 박인이 이 언행록을 편찬한 것은 조식의 아들 조차마(曺次磨)의 부탁을 받고서였습니다. 1628년 조차마는 박인을 찾아와 조식의 연보와 사우록 편찬을 부탁했습니다. 이 무렵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 정권이 몰락한 이후 조식의 제자들이 크게 위축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조식은 글을 쓰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식에 관한 자료는 그 학문적 위상에 비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식의 재전제자였던 박인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조식의 모습을 생각하며, 조식 관련 자료 수집과 언행록 편찬 작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박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참람하게 이 일을 했습니다. 이에 여러 선생들의 문집을 참고하고 또 여러 사람들이 듣고 본 일을 두루 조사했습니다. 선생의 남아 있는 행적을 찾았습니다. -(無狀僭不自? 乃考諸先生文集 旁搜聞見遺事) -〈산해사우연원록 서문(山海師友淵源錄序)〉"
박인은 특히 조식의 벗 성운(成運)이 쓴 〈남명선생 묘갈문(南溟先生墓碣)〉,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쓴 〈남명 조선생 행장(南冥曺先生行狀)〉, 제자 김우옹(金宇?)이 쓴 〈남명선생 행장(南冥先生行狀)〉과 〈남명선생 언행록(南冥先生言行錄)〉 등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김우옹의 〈남명선생 언행록〉 같은 경우는 그 내용을 거의 대부분 가져와 이 언행록에 반영했습니다. 조차마의 부탁을 받은 지 8년 후인 1636년, 마침내 〈남명선생 연보〉,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綠)〉과 함께 이 언행록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조식의 삶에는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주희(朱熹) 등과 같은 송나라 학자들의 삶이 겹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과 같은 우리나라 사림파 학자들의 생각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조식 언행록〉은 종종 이전 시대 현자(賢者)들의 삶에 견주어 조식의 삶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조식 또한 정명도와 같이 행동하고, 조식 또한 주희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식은 김굉필과 같이 〈소학〉 읽기를 강조했습니다. 또 정명도, 정이천, 주희와 같이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학문의 실마리로 삼았습니다. 송나라 학자들의 성리학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근사록(近思錄)〉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또 성리학 총서라 할 만한 〈성리대전〉을 즐겨 읽었습니다. 조식은 단지 이와 같은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조식에게 읽기와 암송하기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터득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식은 당시의 학자들이 읽기와 암송하기는 잘하지만 터득하기와 실행하기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경전의 진실은 넘쳐나는데 현실에서의 적용은 터무니없을 만큼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경전에 해결책이 없어서 현실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식은 이론과 실천, 이해와 행동 사이에는 '아주 넒은 강'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식에게 학문하는 자의 삶은 바로 이 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조식은 앞 시대 현자들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당위를 따르고자 했습니다. 물론 넓은 강 건너의 현실은 이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 언행록은 당위와 현실을 오가는 조식의 모습을 한 장면, 한 장면 전달해 줍니다.
아직까지 이 언행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번역서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언행록을, 조식의 저술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언행록을 조식의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조식의 말과 행동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언행록은 조식 학문의 핵심을 알기 쉽게 보여줍니다.
조식은 실천을 강조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조식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일상생활에서 조식이 실제로 보여준 모습은 어땠을까요? 이 〈조식 언행록〉은 공부한 것과 행동한 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조식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조식 언행록〉의 원래 제목은 〈남명선생 언행총록(南冥先生言行總錄)〉입니다. 인조 때의 학자 박인(朴絪 ; 1583~1640)이 편찬했습니다. 박인이 이 언행록을 편찬한 것은 조식의 아들 조차마(曺次磨)의 부탁을 받고서였습니다. 1628년 조차마는 박인을 찾아와 조식의 연보와 사우록 편찬을 부탁했습니다. 이 무렵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 정권이 몰락한 이후 조식의 제자들이 크게 위축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조식은 글을 쓰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식에 관한 자료는 그 학문적 위상에 비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식의 재전제자였던 박인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조식의 모습을 생각하며, 조식 관련 자료 수집과 언행록 편찬 작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박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참람하게 이 일을 했습니다. 이에 여러 선생들의 문집을 참고하고 또 여러 사람들이 듣고 본 일을 두루 조사했습니다. 선생의 남아 있는 행적을 찾았습니다. -(無狀僭不自? 乃考諸先生文集 旁搜聞見遺事) -〈산해사우연원록 서문(山海師友淵源錄序)〉"
박인은 특히 조식의 벗 성운(成運)이 쓴 〈남명선생 묘갈문(南溟先生墓碣)〉,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쓴 〈남명 조선생 행장(南冥曺先生行狀)〉, 제자 김우옹(金宇?)이 쓴 〈남명선생 행장(南冥先生行狀)〉과 〈남명선생 언행록(南冥先生言行錄)〉 등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김우옹의 〈남명선생 언행록〉 같은 경우는 그 내용을 거의 대부분 가져와 이 언행록에 반영했습니다. 조차마의 부탁을 받은 지 8년 후인 1636년, 마침내 〈남명선생 연보〉,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綠)〉과 함께 이 언행록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조식의 삶에는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주희(朱熹) 등과 같은 송나라 학자들의 삶이 겹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과 같은 우리나라 사림파 학자들의 생각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조식 언행록〉은 종종 이전 시대 현자(賢者)들의 삶에 견주어 조식의 삶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조식 또한 정명도와 같이 행동하고, 조식 또한 주희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식은 김굉필과 같이 〈소학〉 읽기를 강조했습니다. 또 정명도, 정이천, 주희와 같이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학문의 실마리로 삼았습니다. 송나라 학자들의 성리학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근사록(近思錄)〉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또 성리학 총서라 할 만한 〈성리대전〉을 즐겨 읽었습니다. 조식은 단지 이와 같은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조식에게 읽기와 암송하기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터득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식은 당시의 학자들이 읽기와 암송하기는 잘하지만 터득하기와 실행하기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경전의 진실은 넘쳐나는데 현실에서의 적용은 터무니없을 만큼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경전에 해결책이 없어서 현실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식은 이론과 실천, 이해와 행동 사이에는 '아주 넒은 강'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식에게 학문하는 자의 삶은 바로 이 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조식은 앞 시대 현자들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당위를 따르고자 했습니다. 물론 넓은 강 건너의 현실은 이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 언행록은 당위와 현실을 오가는 조식의 모습을 한 장면, 한 장면 전달해 줍니다.
아직까지 이 언행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번역서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언행록을, 조식의 저술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언행록을 조식의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조식의 말과 행동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언행록은 조식 학문의 핵심을 알기 쉽게 보여줍니다.
목차
목차
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았던 젊은 시절 18
二 경(敬)하는 공부를 위주로 한 까닭 29
三 삶의 원칙으로 삼은 경계의 말들 46
四 〈소학(小學)〉, 집안에 거처할 때의 도리 64
五 때를 만나지 못한 은자(隱者) 77
六 백성의 고통을 잊을 수 없었던 뜻 89
七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여 99
八 부귀가 아니라 학문과 덕(德)을 기준으로 120
九 공부란 오직, 스스로 터득하는 것 134
十 아래에서 사람의 일을 배우는 하학(下學) 155
十一 두개골이 갈라지고 사지가 찢기더라도 167
十二 암울한 시대, 학문하는 자의 길 182
◎ 절목별 출처, 번역 원본 수정 사항 203
二 경(敬)하는 공부를 위주로 한 까닭 29
三 삶의 원칙으로 삼은 경계의 말들 46
四 〈소학(小學)〉, 집안에 거처할 때의 도리 64
五 때를 만나지 못한 은자(隱者) 77
六 백성의 고통을 잊을 수 없었던 뜻 89
七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여 99
八 부귀가 아니라 학문과 덕(德)을 기준으로 120
九 공부란 오직, 스스로 터득하는 것 134
十 아래에서 사람의 일을 배우는 하학(下學) 155
十一 두개골이 갈라지고 사지가 찢기더라도 167
十二 암울한 시대, 학문하는 자의 길 182
◎ 절목별 출처, 번역 원본 수정 사항 203
저자
저자
박인
박인(朴絪 ; 1583~1640)은 광해군, 인조 때의 학자이다. 일생 동안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합천군 용강(龍岡 ; 현재의 용주면 손목리)의 향리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다. '바르고 큰(正大)' 학문으로 이름이 났다. 조식의 재전제자(再傳弟子 ; 제자의 제자)이다. 조식의 제자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정인홍(鄭仁弘)에게서 배웠다. 젊은 시절 "티끌 먼지가 별안간 오장 안에 생겨난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이 냇물에 흘려보낼 것 -(塵土?能生五內 直令?腹付歸流)"이라는, 조식의 칠언시 구절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628년 조식의 아들 조차마(曺次磨)로부터 조식의 연보와 사우록 편찬을 부탁받았고, 1636년 이 〈남명선생 언행총록(南冥先生言行總錄)〉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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