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의 재조명
타공의 영웅, 특무부대장은 왜 참모총장에 의해 암살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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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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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은 누구인가?
1916년 함남 영흥 출생. 만주의 일본군 헌병대에서 공산주의자 수사의 실무를 익혔고, 1946년 월남 후 대한민국 육군에 투신하였다. 해방후 남한에서 공산 세력은 미국 후원 하의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남북 공산 세력은 국회와 사법부 내 첩자 침투, 군대의 반란, 무장유격대 파견으로 신생 국가의 내부 전복을 기도하였다. 이때 김창룡은 미군정의 CIC를 모델로 형성된 한국군 정보수사기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군 내외 공산주의 세력 색출에 앞장섰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 수호와 안보 역량 구축의 핵심 공신이었다. 그는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에 취임한 뒤, 1956년 1월 암살당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부 최고의 정보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대공 수사는 집요하고 철저했다. 그는 혐의만으로 서둘러 체포하지 않았으며, 확실한 증거가 포착될 때까지 몇 달이고 잠복과 미행을 거듭하였다. 유족과 부하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계절별 두 벌의 군복이 그가 가진 외출복의 전부였고, 5년 가까이 정보기관장직에 있었지만 부정하게 남긴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신상필벌에 엄격하여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사적으로는 자애로운 상관이었다. 그는 장교와 사병의 식당 구분을 없앴으며, 일상 대화에선 하급자에게도 경어를 썼다. 일이 바쁘면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군복을 입은 채 잠들곤 했다는 부하들의 증언도 남아 있다.
하지만 1956년 1월, 김창룡은 일단의 군부 인사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이 아니라, 특무부대의 군 비리 수사와 군벌 간 갈등, 작전계통과 정보계통의 충돌, 이승만의 군 통제체제와 군 파벌의 대립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본서는 암살사건 재판기록을 토대로 그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다.
특무기관장은 왜 육군 참모총장 일당에 의해 암살되었나?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나선 김창룡의 지프를 번호판 없는 차량이 가로막았다. 군복 차림의 괴한 둘이 다가와 권총 여섯 발을 쏘았다. 다섯 발이 명중했고 김창룡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현역 육군 대령 허태영 일당의 범행이었다.
70년간 이 사건은 '사원私怨이 빚어낸 비극' 혹은 '군부 파벌 싸움의 결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의 결론은 그보다 깊다. 김창룡 암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도, 단순한 비리 은폐 살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승만 통치체제를 지탱하던 두 축, 곧 군부 내 최대 실력집단이던 정일권 군벌과 대통령 직속 정보기구 역할을 하던 김창룡 특무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의 특무부대는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 파벌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었다.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 장성들의 비자금과 사생활 문제, 군 고위층의 부패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정일권 군벌은 단순한 부패 집단이 아니었다. 6·25전쟁 이후 비대해진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정일권은 이승만 정부가 군을 통솔하는 데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었고,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김창룡 특무대 역시 이승만이 군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의지한 또 하나의 핵심 보루였다.
결국 김창룡 암살은 이승만 체제 외부에서 가해진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를 떠받치던 내부 세력들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승만은 군벌을 이용해 군을 통제했고, 특무대를 이용해 그 군벌을 감시했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구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특무대의 정보권은 군 지휘계통의 작전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비리와 파벌을 파헤치던 김창룡은 바로 그 충돌의 한복판에서 희생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에 대한 전면적 수사가 군 통수체제의 파탄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수사 범위를 제한하였다. 그 결과 사건의 최고 배후로 지목될 정일권은 끝내 단죄되지 않았다. 김창룡 암살은 군 고위층 비리 은폐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이 군부를 장악하고 국가정보체계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통치체제 내부의 파열이었다.
희생자가 '현대사의 악인'이 된 이유는?
1956년 암살 직후,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조차 그를 '타공전선의 제1인자', '공과 사를 엄연히 구별한 모범적 군인'으로 애도하였다. 그러나 불과 30~40년 뒤 그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 '김구 암살의 배후'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무엇이 이 극적인 전도를 가능하게 하였는가.
악마화의 시동을 건 것은 암살범들 자신이었다. 허태영과 강문봉 등은 김창룡을 '전횡과 조작의 화신'으로 매도하였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이후 암살 가해자들이 오히려 득세하자 가해자들이 '민주화 영웅'의 지위를 얻었고 그들의 자기 정당화 서사가 대중에 유포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1980~90년대 민중민족주의 사관의 확산과 함께 왔다. '반공투쟁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성립'이라는 국가 서사가 '분단과 양민학살'의 서사로 뒤바뀌면서, 반공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창룡은 '국가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KBS 드라마는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그를 김구 암살의 배후로 묘사하여 이 이미지를 수천만 시청자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유족이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기각하였다.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허위 사실도 방송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역사 왜곡에 법원까지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책이 밝히듯이 김창룡 개인의 악마화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역사 서사 전복과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의 공로자를 악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
김창룡의 특무부대가 지키고자 한 이승만 정권은 오늘날 흔히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정권이었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제2부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이었는가를 정면으로 다룬다.
당시 야당은 부산정치파동(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을 이승만 독재의 증거로 내세웠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파적 입장에서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1948년 제헌헌법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과반수 의결기관이며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준내각제적' 체제였다. 유진오 등 몇몇 법률가와 임정 출신의 신익희와 한민당 등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도 내각제적 헌법으로 실권을 국회에 붙들어두려 했다. 1948년 당시 세계에서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였다. 제헌헌법이 일그러진 공화체제를 담았던 것은 이승만에 대한 제헌의원들의 '당쟁하는 마음'에서 기인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직선제 및 중임제한 철폐의 두 차례 개헌을 관철하였는데, 그것은 억압과 무리수를 동반하는 정치파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책은 1950년대 정치사의 혼란을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으로 돌리는 통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야당이 내세운 '민주주의'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신념윤리'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의와 정의라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되 그 결과는 중요시하지 않는 전통적 도덕정치였다. 조선왕조 이래 혈연·지연·학연에 기초한 가산제(家産制) 문화와 신념윤리가 지배하는 정치 풍토에서 이승만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강건한 책임윤리의 정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면, 야당이 '독재'라 규탄한 이승만의 행동은 전통적 당파 정치의 한계를 뚫고 근대적 책임윤리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소명의 과정이었다고 재해석될 수 있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부터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중심제를 '인간 사회가 고안한 가장 선미한 정부형태'로 보았다. 야당과 한국 정치학계는 이 점을 외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또 야당의 거센 당쟁을 이겨내고 군을 통솔하는 가운데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그 통치체제의 핵심 보루였던 김창룡 특무부대의 역할 역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왜 지금 김창룡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건국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다. 건국을 반대한 김구가 국부로 추앙받고, 이승만은 친일 독재자로 매도된다. 아울러 김창룡도 국가폭력의 실행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성립과 유지 과정에서 폭력 여하가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실제로 어떠한 위협 속에서 건설되었으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수사체계를 필요로 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왜 훗날 '국가폭력'의 서사로만 기억되게 되었는가. 이 책은 우리가 이 질문에 새로 답할 것을 촉구한다.
가족이 기록한 '인간 김창룡'
본서 제3부에는 김창룡의 두 딸이 쓴 글이 수록되었다. 아버지가 암살된 뒤 가족은 긴 세월 사회적 낙인과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먼 브라질로의 이민, 타국에서의 생존과 자립,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사의 악인'으로 기억되는 인물 의 실재 모습과 남겨진 가족의 삶 역시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1916년 함남 영흥 출생. 만주의 일본군 헌병대에서 공산주의자 수사의 실무를 익혔고, 1946년 월남 후 대한민국 육군에 투신하였다. 해방후 남한에서 공산 세력은 미국 후원 하의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남북 공산 세력은 국회와 사법부 내 첩자 침투, 군대의 반란, 무장유격대 파견으로 신생 국가의 내부 전복을 기도하였다. 이때 김창룡은 미군정의 CIC를 모델로 형성된 한국군 정보수사기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군 내외 공산주의 세력 색출에 앞장섰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 수호와 안보 역량 구축의 핵심 공신이었다. 그는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에 취임한 뒤, 1956년 1월 암살당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부 최고의 정보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대공 수사는 집요하고 철저했다. 그는 혐의만으로 서둘러 체포하지 않았으며, 확실한 증거가 포착될 때까지 몇 달이고 잠복과 미행을 거듭하였다. 유족과 부하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계절별 두 벌의 군복이 그가 가진 외출복의 전부였고, 5년 가까이 정보기관장직에 있었지만 부정하게 남긴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신상필벌에 엄격하여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사적으로는 자애로운 상관이었다. 그는 장교와 사병의 식당 구분을 없앴으며, 일상 대화에선 하급자에게도 경어를 썼다. 일이 바쁘면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군복을 입은 채 잠들곤 했다는 부하들의 증언도 남아 있다.
하지만 1956년 1월, 김창룡은 일단의 군부 인사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이 아니라, 특무부대의 군 비리 수사와 군벌 간 갈등, 작전계통과 정보계통의 충돌, 이승만의 군 통제체제와 군 파벌의 대립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본서는 암살사건 재판기록을 토대로 그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다.
특무기관장은 왜 육군 참모총장 일당에 의해 암살되었나?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나선 김창룡의 지프를 번호판 없는 차량이 가로막았다. 군복 차림의 괴한 둘이 다가와 권총 여섯 발을 쏘았다. 다섯 발이 명중했고 김창룡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현역 육군 대령 허태영 일당의 범행이었다.
70년간 이 사건은 '사원私怨이 빚어낸 비극' 혹은 '군부 파벌 싸움의 결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의 결론은 그보다 깊다. 김창룡 암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도, 단순한 비리 은폐 살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승만 통치체제를 지탱하던 두 축, 곧 군부 내 최대 실력집단이던 정일권 군벌과 대통령 직속 정보기구 역할을 하던 김창룡 특무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의 특무부대는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 파벌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었다.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 장성들의 비자금과 사생활 문제, 군 고위층의 부패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정일권 군벌은 단순한 부패 집단이 아니었다. 6·25전쟁 이후 비대해진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정일권은 이승만 정부가 군을 통솔하는 데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었고,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김창룡 특무대 역시 이승만이 군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의지한 또 하나의 핵심 보루였다.
결국 김창룡 암살은 이승만 체제 외부에서 가해진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를 떠받치던 내부 세력들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승만은 군벌을 이용해 군을 통제했고, 특무대를 이용해 그 군벌을 감시했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구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특무대의 정보권은 군 지휘계통의 작전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비리와 파벌을 파헤치던 김창룡은 바로 그 충돌의 한복판에서 희생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에 대한 전면적 수사가 군 통수체제의 파탄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수사 범위를 제한하였다. 그 결과 사건의 최고 배후로 지목될 정일권은 끝내 단죄되지 않았다. 김창룡 암살은 군 고위층 비리 은폐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이 군부를 장악하고 국가정보체계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통치체제 내부의 파열이었다.
희생자가 '현대사의 악인'이 된 이유는?
1956년 암살 직후,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조차 그를 '타공전선의 제1인자', '공과 사를 엄연히 구별한 모범적 군인'으로 애도하였다. 그러나 불과 30~40년 뒤 그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 '김구 암살의 배후'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무엇이 이 극적인 전도를 가능하게 하였는가.
악마화의 시동을 건 것은 암살범들 자신이었다. 허태영과 강문봉 등은 김창룡을 '전횡과 조작의 화신'으로 매도하였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이후 암살 가해자들이 오히려 득세하자 가해자들이 '민주화 영웅'의 지위를 얻었고 그들의 자기 정당화 서사가 대중에 유포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1980~90년대 민중민족주의 사관의 확산과 함께 왔다. '반공투쟁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성립'이라는 국가 서사가 '분단과 양민학살'의 서사로 뒤바뀌면서, 반공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창룡은 '국가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KBS 드라마는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그를 김구 암살의 배후로 묘사하여 이 이미지를 수천만 시청자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유족이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기각하였다.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허위 사실도 방송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역사 왜곡에 법원까지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책이 밝히듯이 김창룡 개인의 악마화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역사 서사 전복과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의 공로자를 악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
김창룡의 특무부대가 지키고자 한 이승만 정권은 오늘날 흔히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정권이었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제2부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이었는가를 정면으로 다룬다.
당시 야당은 부산정치파동(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을 이승만 독재의 증거로 내세웠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파적 입장에서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1948년 제헌헌법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과반수 의결기관이며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준내각제적' 체제였다. 유진오 등 몇몇 법률가와 임정 출신의 신익희와 한민당 등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도 내각제적 헌법으로 실권을 국회에 붙들어두려 했다. 1948년 당시 세계에서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였다. 제헌헌법이 일그러진 공화체제를 담았던 것은 이승만에 대한 제헌의원들의 '당쟁하는 마음'에서 기인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직선제 및 중임제한 철폐의 두 차례 개헌을 관철하였는데, 그것은 억압과 무리수를 동반하는 정치파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책은 1950년대 정치사의 혼란을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으로 돌리는 통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야당이 내세운 '민주주의'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신념윤리'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의와 정의라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되 그 결과는 중요시하지 않는 전통적 도덕정치였다. 조선왕조 이래 혈연·지연·학연에 기초한 가산제(家産制) 문화와 신념윤리가 지배하는 정치 풍토에서 이승만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강건한 책임윤리의 정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면, 야당이 '독재'라 규탄한 이승만의 행동은 전통적 당파 정치의 한계를 뚫고 근대적 책임윤리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소명의 과정이었다고 재해석될 수 있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부터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중심제를 '인간 사회가 고안한 가장 선미한 정부형태'로 보았다. 야당과 한국 정치학계는 이 점을 외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또 야당의 거센 당쟁을 이겨내고 군을 통솔하는 가운데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그 통치체제의 핵심 보루였던 김창룡 특무부대의 역할 역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왜 지금 김창룡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건국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다. 건국을 반대한 김구가 국부로 추앙받고, 이승만은 친일 독재자로 매도된다. 아울러 김창룡도 국가폭력의 실행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성립과 유지 과정에서 폭력 여하가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실제로 어떠한 위협 속에서 건설되었으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수사체계를 필요로 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왜 훗날 '국가폭력'의 서사로만 기억되게 되었는가. 이 책은 우리가 이 질문에 새로 답할 것을 촉구한다.
가족이 기록한 '인간 김창룡'
본서 제3부에는 김창룡의 두 딸이 쓴 글이 수록되었다. 아버지가 암살된 뒤 가족은 긴 세월 사회적 낙인과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먼 브라질로의 이민, 타국에서의 생존과 자립,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사의 악인'으로 기억되는 인물 의 실재 모습과 남겨진 가족의 삶 역시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목차
목차
발간사
머리말
제1부 김창룡 사건의 진실과 왜곡
1 1956년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2 6·25전쟁 후 육군 특무부대 팽창과 작전계통과의 충돌
3 한국 현대사의 악인이 된 김창룡
보론 김창룡 장군 유족의 KBS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 사건 판결
4 대한민국 건국기 군 정보수사기구의 조직과 활동
제2부 한국 정치의 원형
5 대한민국 초창기 정치사의 재해석
제3부 나의 아버지 김창룡
6 아버지의 아리아
7 오래 기다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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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부 김창룡 사건의 진실과 왜곡
1 1956년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2 6·25전쟁 후 육군 특무부대 팽창과 작전계통과의 충돌
3 한국 현대사의 악인이 된 김창룡
보론 김창룡 장군 유족의 KBS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 사건 판결
4 대한민국 건국기 군 정보수사기구의 조직과 활동
제2부 한국 정치의 원형
5 대한민국 초창기 정치사의 재해석
제3부 나의 아버지 김창룡
6 아버지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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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저자
이영훈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성균관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퇴직, 현재 이승만학당의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공저, 서울대출판부, 2004), 『대한민국역사』(기파랑, 2013), 『한국경제사』 Ⅰ, Ⅱ(일조각, 2016), 『반일 종족주의』1·2권(공저, 미래사, 2019~2020)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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